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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31. 변태의 사랑 방식 (5)


“그러니까 라그놀이라는 짐승하고 싸우다 생긴 상처다 이거죠? 그러다 무슨 일이 생겨 이성을 잃고 흥분한 채로 날 강간 했다?” 강간이라고 아예 대놓고 하는 말에 강호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싸움은 어디서 한 건데요?” “그... 그게...” 그냥 말 실수였다고 둘러댈까 하며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지만 저 표정을 보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감정조차 담겨 있지 않은 그녀의 눈빛은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 하지 말고 이실직고 하라고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 할 수도 없다. 게란트에 대해 말하고 그녀에게 확인 시켜 주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게란트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가 어찌 나올지 예상할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호기심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호 본인이 이미 증명을 한 바 있다. 게란트를 처음 발견하고 그 세상이 매우 위험한 세상이라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미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탐험을 나섰다가 위기를 맞이했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다. 라그놀과의 전투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제대로 준비한 것도 없이 무턱대고 싸움을 벌였다. 싸움을 벌이기 전만 해도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충분히 각오도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면 제대로 준비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한 것도 자만에 불과했다. 강시연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국가도 아니고 무려 다른 우주,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호기심을 억누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한 번 발을 들이게 되면 더욱 큰 호기심에 잠식 될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야.’ 결국 거짓을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짓을 말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거짓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이 있다고 한다.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자신의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선의를 가장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람의 기준이라는 것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정도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누군가는 이 정도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그저 당장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회피하기 위한 자신만의 변명이라는 것이 강호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강호도 실제로는 선의의 거짓말을 꽤나 하며 살아 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강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어떤 사람일까?’ 거짓을 말 할 수도 없고 진실을 말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침묵 할 수밖에 없는데, 어찌 보면 가장 최악의 결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입을 열려던 순간 이번에도 강시연의 입이 먼저 열렸다. “됐어요. 그 질문은 안 한 걸로 할게요.” 그 말에 심각하게 굳어 있던 강호의 표정이 한 순간에 맥없이 풀어졌다. 그와는 반대로 강시연의 머릿속은 한 순간 복잡해졌다. 어디서 싸우다 생긴 상처냐는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마주하고 앉은 강호의 눈빛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가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 말은 자신이 한 질문이 그에게는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들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생각을 정리한 듯 표정을 굳히는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대답을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이었지만 그의 대답을 들으면 그와의 관계가 영영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든 것이다. 그래서 얼른 질문을 철회했다. 그러자 단숨에 표정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호의 모습에서 강시연은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그 질문이 왜 그렇게 그에게 중요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심한 표정과 눈빛을 유지했다. 자신이 연기자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어제 제가 당한 일이 여자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고 있죠?” “네...”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하기야 지은 죄가 있으니 당당하게 그렇다고 말하기도 뭐하다. “좋아요. 잘 안 다니까 다른 질문을 하나 할게요. 대신 이 질문만큼은 반드시 대답해 주었으면 해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안돼요. 이건 무조건 대답을 들어야 해요.” 단호한 말에 강호가 침을 삼켰다. 대체 그녀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또다시 공기가 어깨를 짓누른다고 느낄 무렵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오늘 이후로 새벽에 벌어진 것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제게 확답을 줄 수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이번에도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리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야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호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약속을 섣불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선의의 거짓말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라그놀과 전투를 벌일 때만 해도 결과가 강시연에 대한 겁탈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게란트를 계속 오가는 이상 이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리고 다음에는 지금 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데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거짓으로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강호가 선택한 대답은 침묵이었다. “그건... 미안해요.” 강호의 대답에 무표정을 유지하던 강시연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거짓으로라도 괜찮다고, 빈 말이라도 좋으니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침묵이라니.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생각에 뭐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화를 내고 강요한다고 해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강시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강호라는 남자의 성격에 대해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융통성 없는 남자! 한동안 매서운 눈으로 강호를 노려보던 강시연이 돌연 탄식을 내뱉었다. “하아!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을...” 자조 섞인 말투에 강호가 더욱 움츠려 들었다. “좋아요. 그럼 다르게 물을 게요. 당신! 언제고 이 일에 대해 제게 사실대로 이야기 해 줄 수는 있어요?” 그녀의 말에 강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땐 모든 걸 다 말해 줄게요.” “그 때라는 게 언젠데요? 제가 죽기 전에요?” “그건...” 머뭇거리는 강호의 모습에 강시연이 이번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단호하게 말했다. “말을 해 주겠다는 말은 진짜에요?” “그건 약속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융통성 없는 남자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강시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그것도 더 이상 캐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요.” 그녀의 말에 강호가 반색을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금 표정이 가라앉았다. “아! 오해하지 말아요. 그렇다고 새벽의 일을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하기야 여자로서 쉽게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했는데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넘어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어제의 일에 대해 우리 진지하게 대화 좀 해 봐요. 당신이 어제 제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아요? 아, 기억난다고 했었죠? 하기야 그러니까 몰래 도망가려고 했겠지.” “그건...” “변명하지 말고요.” 단칼에 잘라내는 그녀의 말에 강호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아프다고,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하던 건 기억나요?” 그녀의 추궁에 강호의 고개가 한 없이 밑으로 내려간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하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지금 제가 제대로 걷기도 힘든 거 아세요?” “미... 미안해요.” “여자를... 그런 식으로 겁탈하고 미안하다면 끝이에요? 강호씨,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의 지적에 강호는 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그녀를 피해 일단 도망갈 생각을 했었던 자신의 모습에 또 다른 자괴감이 생겨난다. 스스로도 자신의 이런 모습이 무척이나 실망스러운데 하물며 그녀라면 어떤 심정일까 하고 생각하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제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 지 알아요? 당신이 절 죽이려는 줄 알고 내가...”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뒷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강호는 그녀가 지금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힘들고 괴롭기에 오히려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며 참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프고 먹먹해져 온다. 동시에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는 한없이 늘어만 간다. 그렇게 또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 침묵은 앞서의 침묵보다 더욱 무거웠으며 온 몸을 압박하는 주변의 공기가 아예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를 향한 죄책감의 깊이 만큼이나 너무나 아픈 침묵. “후우- 당신 생각을 말 해 봐요. 당신은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길게 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강호 역시 숨을 길게 들이 마시고는 침을 삼켰다. 지금이 중요한 고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 한 마디로 그녀의 곁에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그냥... 시연씨가 원하는 대로 따를게요.” “뭐든지요?” “네...” “그럼 제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강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빈말이라는 것을 강호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정말 융통성 없는 거 알아요? 이럴 땐 빈말이라도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기만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아! 정말...” 강호의 대답에 강시연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표정과 달리 내심 그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으면 몰라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하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시연은 잘 알고 있다. 강호의 얼굴을 보며 강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그가 입을 닫음으로 인해서 지난 몇 시간 동안 고민하며 생각해 두었던 모든 질문들이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너무 완고해서 문제였어.’ 계획이 흐르러졌지만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리고 아직 모든 계획이 흐트러진 것은 아니다. 조금 상황이 달라져서 뜬금없는 전개가 되어 버릴 수도 있긴 했지만, 지금이 최적의 기회라는 생각에 생각을 정리한 강시연이 입을 열었다. “뭐든지 다 한다고 했으니,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밑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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