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32. 진격의 강시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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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강호는 대역 배우 일이 없는 날에는 액션 스쿨에서 몸을 단련하고 무기 다루는 법을 익히는 한편, 특전사 출신의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었다.
라그놀과의 전투에서 강호는 살생이라는 것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살생이라는 표현을 할 때 그 범주를 살아있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로 표현을 한다.
짐승, 곤충, 나무, 풀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는 행위를 말하며, 현대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이들은 살생이라는 행위에 대해 지극히 거부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개미나 바퀴벌레 같은 곤충이나 해충을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이기도 하고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하지만, 닭이나 개와 같은 대상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피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과 공포를 가지고 있는데, 피를 본다는 상황 자체가 자신 혹은 누군가가 상해를 입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 자체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때려서 피를 본다는 것은 큰 용기와 독심이 필요하다. 나아가 피를 보고 살생을 한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로는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랫동안 도축 일을 하거나 개장수 일을 하게 되면 특유의 살기가 몸에 밴다고 한다.
살생을 하는 과정에서 몸에 특유의 살기가 배게 되고, 이런 사람은 옆에 가는 것 만으로도 몸에서 피 냄새가 난다고도 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이 도축업에 종사하기 어려운 이유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라그놀을 죽이면서 살기 혹은 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일부 체험을 한 강호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 자체를 너무나 얕잡아 보았고 자신을 너무 과신해 버린 결과 강시연에게 그런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강시연과의 그런 행위를 통해서 가슴 속에서 들끓던 살기와 살심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니 화가 복이 된 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강호가 내린 결론은 부단한 수련과 노력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살생을 하고 살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배울만한 곳이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군대이기는 하지만, 강호의 입장에서 그것은 대안으로 삼을 만큼의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액션 스쿨에 나가서 특전사 출신으로부터 그들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간접 체험을 통한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늘도 그렇게 액션 스쿨에서 훈련도 하고 지식도 쌓고 하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
차를 몰아 카페로 향하는 강호는 살짝 걱정이 되면서도 들뜬 기분이 되었다.
오하영과의 저녁 약속이다.
물론, 오하영 단 둘이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강시연도 함께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들뜨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게란트를 발견하고 시스템을 얻은 것만으로도 큰 변화이건만, 강시연과 오하영까지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끼어 들 듯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여신과 유니버스 아키텍쳐 시스템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선택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두 존재는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이다 보니 대단하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막연한 느낌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강시연과 오하영은 다르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생각으로 인해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존재들. 하지만 엄연히 같은 세상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두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기 시작한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제대로 실감이 되고 있는 중이었다.
빌라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카페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백구가 제일 먼저 반겨준다.
“강호야.”
잠시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겨주고 있는데 카운터 안쪽에서 누나인 미진이 부르며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강시연씨랑 오하영씨 왔어.”
“그래?”
“응! 온지 한 시간 정도 됐어.”
미진의 말에 공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사전에 강시연으로부터 언질을 들은 바 있는 까닭이다.
[하영이랑 좀 일찍 만나서 속내를 한 번 살펴볼게요. 일단 간을 반응을 봐서 어떻게 할 지 제대로 계획을 세워 보려고요. 당신은 내가 하는 말에 적당히 장단이나 맞춰요.]
강시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미진이 강호의 팔을 붙잡았다.
“왜?”
“강시연씨랑은 잘 돼가?”
“잘 되고 말고가 어딨어? 왜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데?”
“네가 남이니? 응? 그리고 강시연씨 같은 사람이랑은 데이트 할 때 무슨 대화를 하나 궁금해서 그러지.”
그 말에 한강변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자지, 보지, 좆물에 젖치기라는 단어들이다.
분명 상황만 놓고 보자면 데이트이기는 한데, 대화 내용을 놓고 보자면 무슨 포르노 영화를 한 편 찍은 기분이다.
이런 건 절대로 누군가에게 말 할 수가 없다.
특히 누나에게는 더더욱 말 할 수도 없고, 말을 해서도 안 되는 내용이다.
“강시연씨는 뭐 별세계 사람인가?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 했어. 그게 다야.”
“흐흥! 말 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거지?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별 것도 다 궁금하네. 나 커피나 한 잔 태워줘. 시원한 걸로.”
그러고는 강시연과 오하영이 있는 테이블을 향했다.
홀을 지나 테이블로 다가가자 칸막이 너머로 강시연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맞은편에 앉은 오하영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강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눈웃음을 치며 아는 체를 해 왔다.
그녀의 작은 환대를 받으며 칸막이를 지나치던 강호가 칸막이 쪽 소파에 앉아 있는 오하영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강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오하영의 이미지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비슷했다.
순진하고 귀여운 얼굴과는 상반되는 육덕진 몸매의 아이돌 가수.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상에서는 주로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니며 몸매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있는 여자.
그런데 지금, 강호의 시선을 받고 있는 오하영은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얀색 니트는 풍만한 가슴의 굴곡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다가 크게 패인 라운드 사이로 보이는 쇄골과 가슴골은 섹시한 멋을 한껏 표출하고 있었다.
일전에 강시연이 오하영을 두고 음란한 몸이라고 말하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뭐해요? 앉지 않고.”
그 말에 오하영의 옆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가슴을 힐끔거리던 강호가 화들짝 놀라고는 강시연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서로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오랜만입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리자,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 구경을 하던 강시연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 표정이 왜 이래? 누가 보면 소개팅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그 말에 오하영이 인상을 쓰며 강시연을 흘겨보았다.
잠시 강호와 오하영간에 안부를 묻는 말이 오가고 멧돼지 사건이 잇던 말에 대한 고마운 인사도 다시 한 번 오갔다.
그러고 나자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 틈을 타서 강호가 낮은 목소리로 강시연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몸은 좀 어때요? 이제 좀 괜찮은 겁니까?”
“뭐 숨길게 있다고 그렇게 속삭여요? 하영이도 내 몸 상태가 당신 때문에 그렇다는 거 다 알아요.”
“네?”
그 말에 강호조차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그 일도?”
오하영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속삭이자 강시연이 살짝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며칠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약 먹고 쉬었더니 이제 좀 괜찮아 졌어요. 그러게 내가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었잖아요. 이게 뭐야. 나도 힘들고 당신도 힘들고.”
그러면서 강시연이 슬쩍 강호의 허벅지를 쓰다듬는데, 그 손의 움직임을 오하영이 모를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 강시연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강호씨 같은 남자는 절대로 여자 하나로 만족 하지 못 해.]
[나 혼자서 강호씨를 만족시켜 줄 자신이 없어.]
[결국 욕구 불만이 쌓이면 다른 여자를 안기 시작할 거야.]
[강호씨가 이 여자 저 여자 아무 여자나 안고 다니는 건 싫어.]
[차라리 강호씨한테 어울릴 만한 여자를 내가 직접 골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런 말을 너무나 태연한 얼굴로 잘도 하는 강시연의 모습에 오하영은 충격을 받았다.
강시연의 남성편력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단 둘이 있을 때면 음란한 말을 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남성편력이 남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강시연의 말은 시쳇말로 자신이 강호의 여자를 직접 골라 그에게 바치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바람을 피우는 건 용납을 못하지만, 다른 여자와 같이 강호라는 남자를 공유하는 건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생각에 오하영은 지금껏 자신이 알고 있던 강시연의 모습이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복잡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강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오하영이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혼란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와 마주앉은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이상하리만치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강호의 얼굴을 힐끔 거리다 그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오하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지... 지금 내 가슴을 보고 있는 거야?’
강시연의 손은 여전히 강호의 허벅지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녀의 손길을 허벅지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가슴을 훔쳐보고 있는 중이다.
[남자라는 동물은 다 똑같아.]
강시연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혼란이 더욱 가중되는 와중에도 얼굴이 화끈 거리며 숨이 가빠오는 것이 느껴진다.
오하영의 머릿속으로 꿈에서 강호와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혀가 입술을 파고 들어와 뱀처럼 휘감아오던 느낌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만 느껴진다.
당시에 느꼈던 모든 감각과 감정들.
그것은 꿈이었지만 꿈이 아니었고, 환상이었지만 현실처럼 생생했다.
“하영아! 하영아?”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오하영이 고개를 들자, 강시연이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얘가 갑자기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래?”
강시연의 말에 자신이 방금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를 깨달은 오하영의 얼굴과 목덜미가 한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