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35. 삼식이 (1)
인간을 가리켜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의 천성적으로 망각하는 동물이며, 망각이 있기에 학습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니체는 이 망각을 인간에게 부여된 ‘역설적’인 과제이자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 관한 근원이라고 언급했다.
망각이라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 능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삶과 발전에 필요한 기능을 하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이야기다.
망각이 있기에 인간은 학습을 하고, 학습을 하기에 발전을 한다. 하지만 망각이 있기에 인간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기도 한다.
인간을 두고 역설적인 존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창한 것 같지만 이러한 망각의 역설은 인간의 사소한 행동이나 습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담배 애호가들이 금연을 결심하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다이어트를 시도하며 과거의 실패를 밑거름 삶아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다짐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약속이다. 그리고 학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굳은 결심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흐릿해지게 되고,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딱 한 대만 피우고 다시 금연하면 돼.]
[딱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 다이어트 하면 돼.]
이런 식으로 유혹에 무너져 내리게 되고, 굳은 결심은 망각 속에 파묻혀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게 된다.
여기에 호기심이라는 악마의 유혹까지 더해지면 인간은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고 당위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라그놀과의 전투 이후, 강호는 자신이 최면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란트라는 세상은 위험한 곳이다.
그것도 매번 숲을 탐험 할 때마다 생명을 담보로 잡아야 할 정도로 위험이 지천에 깔려 있다.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매번 게란트로 넘어가기에 앞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면서 주의를 주고 각오를 다진다.
특히, 시스템이라는 것에 현혹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었다.
[게란트는 게임이 아니다. 현실이다.]
당시 라그놀과의 전투를 준비하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분명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면서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뜨고 있었어.’
당시 자신의 모습은 라그놀과의 전투에 앞서 긴장하고 신중했지만, 그 이면에는 잔뜩 흥분하고 들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첫 보스 레이드를 뛸 때처럼 흥분하고 들뜬 상태라 할 수 있었다.
해변에서 대게와의 전투를 하며 큰 위험에 처했었던 것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님에도, 과거의 학습에서 얻은 교훈을 망각하고 저도 모르게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호기심에 스며들 듯이 빠져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스템이 주는 마력에 빠져 있었고,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로 오판까지 하고 말았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으로 게란트에 대한 경계심을 한껏 세웠다.
게란트로 넘어가서도 베이스캠프 내에서 몸을 단련시키고 강철묵궁을 숙달시키는 훈련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닷새가 지나기도 전에 강호는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유 모를 조바심이 생겨났다.
라그놀과의 전투가 끝나고 백구 퀘스트가 완료되며 새로 생겨난 반려동물 시스템이 강호의 호기심을 부채질 하며 자극했던 것이다.
백구의 원수를 갚는 퀘스트에 대한 보상으로 생겨난 반려동물 시스템과 숨겨진 스텟의 랜덤 개방.
한동안 게란트에 대한 생각을 최대한 억누르려 했었지만, 새롭게 생긴 시스템은 결국 강호로 하여금 시스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들었다.
‘미쳤네. 이건 웬만한 게임의 펫 시스템 그 자체잖아.’
강호는 반려동물 시스템 창을 보면서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반려동물 시스템은 흔히 MMORPG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펫 시스템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퀘스트 완료와 함께 반려동물 시스템이 활성화 되었고, 동물 조련사는 스킬이 생겨났다.
[동물 조련사 2 – 동물과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한 보정치가 10% 늘어난다.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반려동물 시스템에 등록할 수 있는 동물의 숫자가 늘어난다.]
스킬의 이름과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한 스킬이며, 스킬의 레벨이 향상됨에 따라 반려동물로 등록할 수 있는 동물의 숫자가 늘어난다.
이 자체만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는 스킬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반려동물 시스템과 결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저 멀리서 사냥한 동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백구가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는 것과 함께 알림창이 뜬다.
황급히 알림창을 살피는 강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백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백구의 레벨은 5입니다.]
반려동물 시스템에 등록된 백구에게 레벨 시스템이 적용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알림창을 닫고 메뉴창에서 반려동물 아이콘을 클릭하자 등록된 반려동물의 관리창이 뜬다.
얼른 손을 뻗어 백구의 정보를 열어보자 우측으로 백구와 관련한 새로운 창이 갱신되며 정보가 떠올랐다.
* 이름 : 백구(레벨 5) [잔여 스텟 포인트 4]
- 근력 : 13
- 민첩 : 18
- 지구력 : 16
- 지능 : 6
* 스킬 (잔여 스킬 포인트 4)
[전투모드 2 – 전투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신체 상태로 변신하며, 모든 신체 능력이 20% 향상된다.]
레벨 시스템과 스킬 시스템.
강호의 시스템과 달리 반려동물 시스템에 등록된 동물은 전투를 통해 경험치를 쌓고 레벨을 올릴 수 있다.
필요한 경험치의 수치는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전투로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며, 이렇게 얻은 포인트로 스텟과 스킬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마음먹기에 따라 백구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처럼 리스크가 클수록 백구를 단시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백구가 빠르게 성장한 만큼 강호로서는 매우 든든한 조력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해변에서 잡았던 그 대게 같은 몬스터를 또 사냥하면 빠르게 렙업 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지난 이틀 동안 잡았던 동물들은 기껏해야 사슴이나 개돼지 수준의 몬스터 정도가 다였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레벨 5까지 올라갔다.
만약 라그놀과 같은 몬스터나 톱니집게대게같은 몬스터를 사냥한다면 얼마나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을 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문제는 내 욕심에 백구를 위험으로 내 몰아도 되느냐 하는 거야.’
백구가 강해지는 만큼 게란트에서의 생존률이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스템에 등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백구를 이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 강호의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시스템에 의해 주어진 기회를 그대로 묵혀두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백구는 게란트가 고향이다.
인간이 죽음을 앞두게 되면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하듯, 언젠가는 게란트라는 고향에서 터를 잡아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러자면 힘이 없어 제 부모처럼 사냥당해 죽는 것 보다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백구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스텟과 스킬 포인트는 최대한 아껴야 해.’
게임처럼 포인트를 리셋 시킬 수가 없으니 하나를 올리는 데에도 매우 신중해야 한다. 게다가 새로운 스킬이 생겨날지도 모르,니 그때를 위해서라도 포인트는 최대한 모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천천히 하는 거야. 시간은 많아.’
어차피 메인 퀘스트에도 별도의 완료 기한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정해진 기한이 없다는 건 마음 내킬 때 혹은 준비가 되었을 때 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걱정이 되는 것은 역시나 게란트라는 세상 자체가 현실세계라는 점이다.
메인 퀘스트에서 말하길 수인족이 멸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지금 당장 퀘스트 실패 알람이 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것이 강호로 하여금 백구를 빠르게 레벨 업 시켜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이어지게 만들곤 했다.
‘백구도 백구지만 다른 반려동물도 얻어야 하는데.’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를 전장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조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렇다고 아무 조력자나 받을 수는 없다.
이왕이면 강한 동물을 반려동물로 삼는 것이 이득이었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동물이라면 더 바랄게 없다.
‘하늘을 나는 동물이라...’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거대한 새나 몬스터를 새끼 때 사로잡아서 길들인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다. 혹은 용기사라는 이들이 있어 드래곤으로 대변되는 몬스터를 잡아서 길들인 다음 등에 타고 전투를 벌인다는 식의 이야기도 등장하고는 한다.
그런 식으로 거대한 맹금류나 몬스터를 사로잡아서 반려동물로 삼을 수 있다면 등에 올라타서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바다 너머에 있는 섬에도 갈 수 있을지 몰라.’
거대한 새의 등에 올라타서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