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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더 이상, 이곳에


새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침실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소피아는 서서히 의식이 깨어나며 다리 사이에서 유난히 축축한 감각을 느꼈다. 잠결에 이불을 걷어내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맨살을 간지럽혔다. "어...?" 소피아는 눈을 천천히 떴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래를 향했다. 하얀 속옷은 완전히 벗겨져 발목에 걸쳐 있었고, 다리 사이의 음부는 하얀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 하얀 액체... 소피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 자신을 범했을 때 흘러내렸던 그 진한 정액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질 주변으로 말라붙은 하얀 얼룩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소피아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을 뿐. 침대 시트에도 마른 얼룩이 남아있었다. 소피아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새벽빛이 점점 더 밝아오는 가운데, 소피아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두려움,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상실감까지... 그녀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했다. "도대체 누가..."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한 침실에 메아리쳤다.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 이 저택에서 하녀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 이 저택에서 이런짓을 할 사람은 이 저택에 단 한사람밖에 없었다. [15. 더 이상, 이곳에] 아침이 밝아오자 저택은 여느 때와 같이 분주해졌다. 하녀들은 각자의 일을 시작했고, 복도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울렸다. "소피아, 괜찮니?" 클라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 소피아의 얼굴에 그녀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소피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마치 잘못 맞춰진 인형처럼 어색했고, 입술 끝에서 떨리는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 클라라는 소피아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체온은 정상이었지만, 소피아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흐릿해 보였다.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언니..." 소피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살짝 떨리고 있었고, 아침 일찍 갈아입은 속옷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클라라는 동생처럼 여기는 소피아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더 이상 캐물을 수는 없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언제든 말해." 클라라의 따뜻한 말에 소피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여전히 새벽의 일이 무겁게 자리잡고 있어 쉽지 않았다. 소피아가 결국 따뜻한 클라라의 말에 눈물을 고였다. "언니... 저... 어젯밤에..." 소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얀 앞치마에 눈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백작님이... 제 방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소피아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클라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같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클라라는 말없이 소피아를 끌어안았다. 작은 새가 떨리는 것처럼, 소피아의 어깨가 흔들렸다. '햇살처럼 명랑했던 그 미소는 어디로 갔을까...' 클라라는 처음 만났던 소피아를 떠올렸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그녀는 마치 들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수도의 화려한 저택에서 일하게 된다는 기쁨에 들떠있던 그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여기서는 모든 게 새로워요. 여기서라면 뭘 해도 잘 될 것 같아요.' 그때 소피아가 했던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지금 그녀의 정원에는 시든 꽃잎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두 여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치 쓸쓸한 겨울나무처럼.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클라라는 속삭였지만, 그 말이 거짓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저택에서는 아무것도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장미정원의 가시처럼,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소피아의 흐느낌 소리가 조용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었지만, 이 저택의 새장 속에 갇힌 하녀들은 그럴 수 없었다. 클라라는 소피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위로와, 동시에 깊은 절망이 담겨있었다. 새벽이슬이 창가에 맺혔다가 사라지듯, 소피아의 순수함도 이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집무실의 창을 통해 비춰들었다. 로웬은 서류더미 사이에서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중후한 모습의 집사 윌리엄이 들어왔다. 그의 흰 머리칼과 깊은 주름은 오랜 세월 이 저택을 지켜온 흔적이었다. 로웬이 어린 시절 후계자 교육을 받을 때부터 늘 곁에서 지켜봐 준 사람이었다. "백작님, 처리하실 서류가 있습니다." 윌리엄은 공손히 서류 한 장을 로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퇴직 신청서였다. 로웬의 시선이 서류를 훑었다. 그의 눈동자가 순간 멈칫했다. 거기에는 '소피아 밀러'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있었다. 전처와 이혼한 후, 저택의 모든 관리는 로웬의 몫이었다. 하녀들의 고용과 퇴직까지도. 그는 천천히 서류를 들어올렸다. "언제 제출된 건가?" "오늘 아침입니다, 백작님." 윌리엄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그는 이 저택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녀들의 고통도, 백작의 은밀한 행동들도. 로웬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서는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소피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 "네, 백작님." "소피아에게 전해주게. 내가 불렀다고." "알겠습니다, 백작님." 윌리엄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에는 무거움이 담겨있었다. 수십 년간 이 저택을 지켜보며, 그는 얼마나 많은 하녀들이 이렇게 떠나갔는지 목격해왔던 것일까. 로웬은 서류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붉은 노을이 집무실을 물들일 때, 소피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생기를 잃은 채 창백했다. "백작님... 저는..." 소피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로웬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깊이가 있었다. "알고 있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순간의 충동에 몸을 맡긴 자신의 어리석음, 그리고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며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던 비겁함까지. 창가에 드리운 붉은 노을이 마치 그의 죄를 질책하는 듯했다. 로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는 소피아도 다른 하녀들처럼, 특히 클라라처럼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넘어갈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을 통해 위로금을 정산해 주도록 하지." 그의 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마치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듯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은 비겁한 시도였다. 금전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는,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잠재우기 위한 미약한 발버둥에 불과했다. 소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녁 하늘은 점점 더 붉어져갔다. 로웬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비겁한지 잘 알고 있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것, 그것은 그의 죄책감을 잠시나마 달래기 위한 미약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그의 눈에 소피아의 붉어진 눈가가 보인다. "가봐도 좋네." 그의 말에 소피아는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무거운 한숨처럼 들렸다. 로웬은 홀로 남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노을은 이제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고, 어둠이 서서히 그의 집무실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소피아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며, 로웬의 뇌리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본 소피아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가가 붉어진 그녀의 얼굴, 그 흐릿한 고통의 흔적이 그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소피아를 마주하고 있던 그 짧은 순간, 소피아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눈앞에 펼쳐지며, 마치 그녀가 온전히 그의 것이었어야 했다는 듯한 강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을 따라갔다. 그가 새벽에 느꼈던 강렬한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그만… 그만해야 한다.' 그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욕구는 점점 더 강해졌다. 그는 마치 전능하듯 그 욕망에 휘둘리고 있었다. 손끝이 떨리며, 마음은 점점 더 엉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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