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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화 : 전화 한 통, 떠오른 로터


“헬기 고장이요?” 심각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서준은 흘끗 옆자리에 눈길을 던졌다.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조금씩 귀에 담았다. “그럼 다른 병원 헬기는요?” -헬기가 있는 병원이 있어야지! 게다가 죄다 수술실 풀이란다! 응급실 베드조차 없어! “아아….” -일단 차가 올라가고 있기는 하니까. 그때까지 환자가 버티길 바라야지, 뭐. “골반 관통했다면서요. 언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어떡하냐? 당장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뿐인데! “하아….” -일단 병원으로 와. 곧장 수술 들어갈 수 있게 준비라도 해 둬야지. “알았어요. 정형외과 박주연 선생님 미리 콜 해 주세요.” 통화가 끝나고 차 안은 적막이 찾아왔다. 시트에 머리를 기댄 이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옆자리를 본 서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환자 이송용 헬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헬기가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차가 대신 움직이는 듯했다. 골반이면 관통상이라는 건데, 이거 진짜 응급 상황 아닌가? 다시 바뀐 신호에 액셀을 밟으며 고민했다.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돕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떠오르는 조력자의 얼굴에 핸들을 탁 쳤다. “선생님!” “네?” 기운 넘치는 목소리에 이현이 번쩍 눈을 떴다. 운전대를 붙잡은 서준의 얼굴이 환하다. “헬기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네?” “헬기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일반 헬기도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구조용 헬기로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신호가 걸렸다. 병원 근처 사거리에서였다. 서준은 그 틈에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반쯤 넋 나간 시선이 오른쪽 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얼빠진 소리냐고 말하는 듯하다. 믿지 못하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환하게 외쳤다. “지금 당장 헬기 띄울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응급구조사나 의사를 태워야 하니까 일단 병원으로 가면 되겠죠?” “네?” “헬기요! 헬기!” “아니, 그게 무슨….” 하지만 몇 번이나 말해도 이현의 표정은 여전했다. 정말로 헬기가 떴다. 그것도 윤서준의 전화 한 번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 천진난만한 교도관의 정체가 뭔가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걸 생각할 경황은 없었다. 이현은 환자가 이송되는 대로 바쁘게 외상 센터를 뛰어다녔다. “초기 초음파 스캔 확인하고 바로 수술실로 옮길게요!” “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병원 바닥 전체가 울렸다. 헬기로 이송된 환자 외에도 외상 센터에는 심각한 중증 환자가 많았다. 환자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이현이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서준은 덩그러니 외상 센터 한가운데 남았다. “아.” 뭔가 엄청난 일이 지나가고 있는데, 자신만 태풍의 눈이 된 것처럼 고요하다. 멋쩍은 기분에 괜히 코를 훌쩍이며 턱밑을 깔짝깔짝 긁었다. 땀 나게 뛰는 의료진들과 통증을 호소하며 실려 가는 환자들이 앞뒤로 스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멋쩍은 기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묵직한 기분만이 남았다. 손을 들어 천천히 배에 가져다 대었다. 복부를 관통당했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신도 이곳 환자들과 다를 것 없이 급히 실려 왔고, 생사를 몇 번이나 넘나들며 긴 수술을 마쳤다. 새삼스럽지만 강이현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대단했다. 또 한 번 속으로 감탄했다. 헤어지면서 인사를 받지 못한 것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게다가 헬기를 띄워 그에게 도움이 되기까지 했다. 뿌듯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을 막아선 익숙한 그림자에 표정이 굳었다. “서준, 너!” “하, 하하….” 아버지인 윤태성 회장과 형인 윤도현이었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급하게 온 모양이다. 어색하게 웃은 서준이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아버지, 형.” 전화 한 번에 헬기를 띄워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서준은 윤 회장과 도현을 꼭 끌어안으며 볼에 진한 뽀뽀까지 남겼다. 이렇게 해야 징그러워서라도 잔소리를 더 안 한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 하나 살렸잖아요. 게다가 우리 회사에서 후원하고 있는 병원이기도 하고….” “그것도 네 성화에 못 이겨서 하는 거잖아, 이 모자란 녀석아. 아무튼, 네 엄마가 너 보고 싶다고 난리니까 도현이랑 집에 가 있어.” 도현에게 눈짓을 보낸 윤 회장은 병원장을 만나고 가겠다며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어머니는 왜 갑자기 또 내가 보고 싶으실까.” “요즘 같은 화실 다니는 HSS 고활성 분이 참 성격도 밝고 좋다 하시더라.” “진짜?” “어, 진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덤덤한 표정이 마주해 온다. 삐걱 소리가 날 것처럼 고개를 기울인 서준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일반형 아들을 왜 자꾸 고활성, 저활성이랑 엮으려고 하신대?” “내 말이. 나도 우리의 모친께서 이렇게 열려 있으신 줄 몰랐다.” “집에 안 가면 안 되겠지?” “아버지 성격 알잖아. 홧김에 병원 후원 끊으시면 어쩌려고. 강이현인가? 그 선생 때문에 여기 후원해 달라고 떼쓴 거 아니었어?” “선생님 뵙고 가고 싶은데….” “몇 시간이나 걸릴 수술인 줄 알고? 가자. 다음에 와서 봐.” 결국 끌려가듯이 병원을 나섰다. 더듬더듬 어긋난 걸음이 마지못해 도현의 뒤를 따랐다. 몇 번이나 미련이 짙은 눈으로 뒤를 돌아보면서였다. 수술실에서 나온 이현은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넋을 놓았다. 뒤이어 나온 동료 의사 주연이 발끝으로 이현을 툭툭 건드렸다. “여기서 뭐 해요? 밖에 보호자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선생님이 대신 좀 얘기해 주세요.” “알았어요, 그럼. 고생했어요.” “고맙습니다.” 주연이 떠나고, 텅 빈 수술실 앞에 이현 혼자 남았다. 그는 주르륵 등을 미끄러뜨리며 주저앉았다. 장장 여섯 시간이 넘은 수술이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가만히 앉아 눈을 깜빡이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갔겠지?” 주섬주섬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손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동안 온 연락이 없나 확인했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당장 헬기를 띄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서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 모습에 짧게 터지듯 웃음이 나왔다. 교도관에,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러고 보니 윤서준은 꽤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병실도 1인 병실을 이용했고, 매일같이 그의 병실로 수많은 선물이 들어왔었다. “엄청난 VIP 고객이었네.” 읏차!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온 연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당연히 핸드폰 화면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번호를 줬는데도 왜 여태 연락이 없는지 이제야 알겠다. 윤서준과 강이현은 사는 세계가 달랐다. 어떤 재벌이 아무런 뒷배도 없는 일개 의사와 친분을 쌓을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 못해 아쉽지만, 그런 건 혼자 속으로 하고 말기로 했다. 지금까지 서준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그런 인사치레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뭐, 약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니. 자신도 더는 서준에게 볼 일이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서준,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얌전히 좀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어떻게 얌전히 있어요, 아버지.” “이게 또 말대답이지!” 네 형을 보라며 윤 회장이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면 더는 할 말이 없어 입을 합 다물었다. 확실히 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히 공부만 하고, 지금도 얌전히 회사 일만 하고 있었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며 난리를 치던 자신과는 달랐다. “참고인 조사 갔다는 놈이 갑자기 헬기 띄워 달래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이게 납치를 당한 건지, 조난을 당한 건지, 네 형이랑 얼마나 전전긍긍했는데!” “상황이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다음에는 오해 안 하시게 잘 설명할게요.” 아무리 꾸중을 들어도 다음엔 안 그러겠다는 말 만큼은 못 뱉었다. 언제든 이현이 헬기를 띄워야 한다고 말하면, 몇 번이든 헬기를 띄울 생각이다. 비록 회사 재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좋은 게 아닌가? 조만간 기사가 뜨면 기업 이미지도 분명 좋아질 것이다. 서준은 여태껏 잘 다져왔던 특유의 처세술로 윤 회장의 기분을 맞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 회장이 포기한 듯 한숨을 폭 내쉰다. “그건 그렇고, 교도관 일은 언제까지 할 거야?” 하지만 하나의 난관이 들어가자, 다른 난관이 툭 튀어나왔다. 법 공부를 했으면 변호사나 될 것이지, 교도관이 됐다며 늘 듣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미간을 접은 서준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 얘기 하신다. 저 교도관 계속할 거라니까요?” 처음으로 제대로 마음먹고 정한 길이다. 이 일, 저 일 간을 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진심이라며 분명하게 말하자 윤 회장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짙고 긴 한숨이었다. “안타까워서 그러지. 고작 직업 하나 때문에 파혼이나 당하고 말이야. 너 그러다 혼자 늙어 죽어.” 전에도 한번 이런 대화가 오간 적이 있었다. 서준이 파혼을 당한 다음 날이었다. 잔뜩 술에 취한 윤 회장은 혀가 꼬부라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손주를 못 보는 건 괜찮다. 결혼을 못 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주변 사람 다 잃고 혼자가 될까 봐, 그게 걱정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마저도 이 직업이 불만이라며 떠났는데, 다른 이는 오죽할까? 지금도 조금씩 멀어진 인연들이 보인다. 사실은 평생 혼자 살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어렴풋이 자신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었다. -오늘도 힘차게 생활하고 계실 전국 수용자분들을 위해 힘내시라는 의미에서 노래 한 곡을 준비해 봤어요. 노래는 따로 소개하지 않을게요. 차분하게 가사를 느끼면서 잠시 마음의 휴식을 취해 보는 게 어떨까요? -다시 만날 그날만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하염없이…. “하염없이…. 이이이….” 한강 교정센터 제1사동 관구실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앙 테이블에 볼을 찰싹 붙인 서준이 녹아내리듯 자리에 붙어 있었다. 주변에는 온갖 의학 서적과 약학 서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허이구! 이게 다 뭐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박 부장과 최 부장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널려있는 책을 들춰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여기서 다른 일 하겠다고 공부하는 놈들 숱하게 봤지만, 의학 공부하는 놈은 처음 본다.” “요즘 또 윤 부장님 왜 그래요? 뭔가 보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기분이 처지시는 것 같네?” “냅 둬. 윤 부장 지금 상사병 앓고 있잖아. 남산대병원 간판 의사 때문에.” “어? 정말요?” “아닙니다! 제 존경심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시라니까요?” 놀리는 말에 넘어간 서준이 발끈하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남의 커피를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켠다. 내린 지 얼마 안 된 탓에 뜨거울 텐데,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윤 부장님, 식도 안 타요? 엄청 뜨거울 텐데?” “냅둬요. 저 인간은 뚝배기에 나온 국밥도 원 샷 하는 사람이야.” “아, 하긴.” 너무 잘 먹는 사람을 보고 놀라긴 처음이었다며 둘이서 하하 호호 웃는다. 서글픈 서준의 얼굴은 어느새 그들의 안중에서 사라졌다. 다시 흐물흐물 녹듯이 자리에 앉은 서준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제 또 언제 선생님을 볼 수 있을까? 그 이후로 전과 같은 우연도 없고, 만날 핑계도 없다. 딱 하나 남은 방법은 그때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강도가 약사에게 어떤 약을 요구했는지 기억해야 선생님께 연락할 구실이 생긴다. “….”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닥파닥 팔다리를 휘저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안 난다! 이걸 어떡하지? 이대로는 선생님을 만날 구실이 생기지 않는데!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번에도 우연이 일어났다. 급하게 구급차에 올라탄 서준은 손수건을 꺼냈다. 수용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달 전 아이를 낳은 HSS 고활성 수용자였다. “못해도 두세 달은 푹 쉬어야 하는 건데.” 박 부장이 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접었다. 병원에 가는 것은 좋지만, 환자의 얼굴을 보면 또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의료과장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 안쪽에 출혈이 있는 것 같다네? 우리 의무실 초음파로는 잘 안 보이니까 외부 진료 나가래요.” “원격 진료는요?” “당연히 내원해서 검사해 봐야 안다고 하지.” “아.” 오래된 기계는 있으나 마나였다. 도움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의료 시설이 노후화되다 보니, 의무실에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것에도 외부 진료를 나가야 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우리 의료 시설 너무 협소한 거 아닙니까? 서부 교정센터는 간단한 수술도 가능하다고 아주 자랑을 하던데.” “우리가 좀 뒤처지긴 했죠. 그래도 소장이 조만간 의무실 싹 바꿀 거라고 했어요.” “의무실을요?” “이번에 지원금 나왔잖아요. 그걸로 의료 시설 최고 교정센터로 만든다고 난리야. 의무사무관도 더 뽑을 거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법무부에서 허가한 겁니까?” “받는 중이래요.” “아아, 그럼 아직 확정은 아니네요.” 괜히 좋다 말았다. 시트에 몸을 기댄 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빨리 의무시설이 개선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외부 진료를 나가지 못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살짝 뒤숭숭해진다. 선생님을 더 만나기 힘들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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