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평화주의자의 뜨거운 사정(事情)
1부 기(起) 평화주의자의 19금 강요 생존기
제1화. 평화주의자의 뜨거운 사정(事情)
“젠장. 덥다.”
천무진(天武眞)은 땀을 훔쳤다.
아니, 훔친다는 표현은 틀렸다.
그저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손바닥으로 훑어냈을 뿐이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은 훔칠 새도 없이 턱 끝에 매달려 뚝, 뚝 떨어졌다.
“더워. 덥다고. 망할.”
7월 한낮의 태양은 가마솥 뚜껑처럼 달아올라 작열하는 열기를 지상으로 쏟아붓고 있었다.
매미들은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어젖혔다.
하지만 천무진은 알았다.
이 지독한 열기는 단순한 날씨 탓이 아니었다.
적어도, 10할 중 8할은.
“크으으...!”
그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아랫배, 단전(丹田) 깊은 곳에서부터 불덩이 하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생명력 그 자체이자, 삼라만상을 태동시키는 근원의 힘.
양기(陽氣).
그것도 그냥 양기가 아니라,
빌어먹을 놈의 ‘천양신체(天陽神體)’에서 뿜어져 나오는, 문자 그대로 폭주하는 양기였다.
“사부님. 젠장할 사부님.”
천무진은 스승을 욕했다.
이미 3년 전에 죽어서 무덤에 있지도 못할(화장했다) 스승이었지만,
욕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승은 숨을 거두기 직전,
그의 손을 붙잡고 유언을 남겼더랬다.
[무진아. 너는... 특별한 체질이다.]
[사부님! 그런 건 됐으니까 숨이나 제대로 쉬세요! 의원! 의원 어딨어!]
[아니다. 의원은 무슨. 이미 늦었다. 콜록! 잘 들어라, 무진아. 너의 그 빌어먹을 천양신체는...]
[빌어먹을?]
[그래, 빌어먹을.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주기적으로 양기가 폭주할 게야. 그걸 못 다스리면...]
[못 다스리면?]
[터져 죽는다.]
[예?]
[혈관이 터지고, 심장이 터지고, 뇌가 터지고... 아주 그냥, 불꽃놀이처럼 팡! 하고 터져 죽을 게야.]
스승의 유언은 참으로 스승다웠다.
망할 영감탱이.
천무진은 그때 진지하게 물었다.
[해결책은요?]
[...있지. 아주 확실한 해결책이.]
[뭡니까!]
[여자를... 여자를 만나거라.]
[예?]
[음양(陰陽)의 조화. 너의 그 활화산 같은 양기를 받아줄 차가운 음기가 필요하다. 여자를 만나서, 밤마다...]
[밤마다?]
[...합체(合體)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스승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숨을 거뒀다.
망할 영감탱이.
“합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천무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합체? 말은 쉽다.
하지만 올해로 스무 살인 천무진은, 여자와 합체는커녕 손목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순진무구한 평화주의자였다.
평화!
그것이 스승이 두 번째로 남긴 유언이자, 천무진의 삶 그 자체였다.
[무진아. 명심해라. 절대 강호(江湖)에 나가지 마라.]
[예?]
[특히 정파(正派) 놈들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마라.]
[...정파요?]
[그래. 그 위선자 놈들. 그놈들은 대협이니 정의니 하는 뻔지르르한 말로 사람을 홀리지. 하지만 그 정의라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잔인한 건지 아느냐? 난 그놈들의 정의 놀음에 휘말려 평생을 고통받았다. 네놈 스승인 내가 바로 그 산증인이다!]
스승은 한때 천하제일이라 불렸지만,
정파의 정의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했다.
천무진은 그 정의가 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강호에 나가지 않는다.
정파와 엮이지 않는다.
합체 같은 귀찮은 짓은 안 한다.
평화롭게 산다.
“평화... 젠장, 평화고 나발이고 타 죽게 생겼다고!”
천무진은 비틀거렸다.
스승이 임시방편으로 가르쳐준 청심공(淸心功)이 이젠 한계였다.
예전에는 한 시진 정도만 운기해도 뜨거움이 가라앉았는데, 이젠 두 시진을 꼬박 운기해도 아랫배의 불덩이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름을 부은 듯 더 활활 타올랐다.
“이러다... 이러다 진짜 스승님 말대로 팡 하고 터지는 거 아냐?”
공포가 밀려왔다.
죽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런,
아랫도리가 뜨거워서 터져 죽는 황당한 죽음은 절대 사양이었다.
“물... 물이 필요해.”
그는 본능적으로 음기를 찾았다.
하지만 합체할 여자를 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찾는 음기는 훨씬 더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뒤탈 없는 것이었다.
계곡물.
“어디 보자... 이 근처에 분명히 계곡이 있었는데.”
그는 산속을 헤집고 다녔다.
스승과 함께 살던 이 산은 그의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니,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열기가 아랫배를 지나 등줄기를 타고, 이젠 뇌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크헉, 허억...”
이성이 마비되는 기분.
저 멀리,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빛이 보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청량한 물소리.
“살았다...!”
천무진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곳으로 달렸다.
숲을 헤치자, 시야가 탁 트였다.
그곳엔 그가 기억하던 대로, 바위들 사이에 숨겨진 작은 소(沼)가 있었다.
작은 폭포수가 하얗게 부서지며 떨어지고, 그 아래에는 성인 대여섯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평화...!”
천무진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주위를 잽싸게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하긴, 이런 후미진 곳에 누가 올 리가.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입고 있던 허름한 무명옷을 벗어 던졌다.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는 알몸이 한낮의 태양 아래 드러났다.
그는 그대로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크하아아아아아아...!”
천상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머리끝까지 차가운 물이 그를 감쌌다.
아랫배에서 들끓던 불덩이가 ‘치이익-’ 하고 꺼지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그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작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위 아래로 다가갔다.
차가운 물줄기가 정수리를 때렸다.
“이거지... 이게 평화지.”
천무진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청심공을 운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물의 음기가 자연스럽게 그의 양기를 중화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유언을 다시 떠올렸다.
‘여자를 만나 합체해라...’
“흥. 사부님은 틀렸어.”
천무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 따위가 뭐가 필요해? 이렇게 시원하고 평화로운 계곡물만 있으면 되는데. 여자는 귀찮다고. 말도 많고, 화도 잘 내고, 성가셔. 역시 평화가 최고야.”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인생 철학은 ‘단순, 무식, 평화’였다.
복잡한 건 질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들끓던 양기가 겨우 잠잠해지고, 이성이 돌아오며 슬슬 한기까지 느껴질 무렵이었다.
바스락-
“...!”
천무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오감은 천양신체의 영향으로 일반인보다 훨씬 예민했다.
미세한 풀벌레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사람이 숲을 헤치고 다가오는 소리였다.
‘젠장! 누구야!’
천무진은 경악했다.
지금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자연인의 상태였다.
이런 모습을 들켰다간...
‘안 돼! 이건 평화롭지 못해!’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첨벙거리는 소리를 죽이며, 그는 아까 등을 기댔던 폭포수 뒤편, 바위틈으로 몸을 숨겼다.
폭포수 물줄기가 커튼처럼 그의 앞을 가려주었다.
그는 차가운 바위에 몸을 밀착하고 숨을 죽였다.
‘제발.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이길. 제발, 제발...’
바스락, 바스락.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숲을 헤치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
천무진은 숨을 멈췄다.
남자가 아니었다.
하늘색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나이는 그와 비슷해 보이는 처녀였다.
손에는 빨랫감이 담긴 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망했다.’
천무진은 절망했다.
하필이면 왜 여자가.
그것도 이 시간에, 이 후미진 곳까지.
처녀는 익숙한 듯 바구니를 내려놓고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후우. 덥다, 더워.”
처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저고리 고름에 손을 가져갔다.
‘...어?’
천무진의 눈이 커졌다.
‘아니, 잠깐. 아가씨? 설마?’
처녀는 망설임 없이 저고리를 벗었다.
하얀 속적삼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것도 덥다는 듯, 이번엔 치마끈으로 손을 가져갔다.
‘안 돼! 보... 보면 안 돼! 이건 평화롭지 않아!’
천무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폭포수 뒤편의 바위틈은 너무나도 비좁았다.
그가 고개를 돌릴 수 있는 방향은, 폭포수 물줄기 사이로 그녀가 보이는 바로 그 방향뿐이었다.
스르륵-
치마가 흘러내렸다.
새하얀 속치마와 속바지만 입은 자태가 드러났다.
한낮의 햇살이 물기에 반사되어 그녀의 몸을 눈부시게 비췄다.
“...크헉.”
천무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르르륵-!
간신히 계곡물로 식혀두었던 아랫배의 불덩이가, 마치 기름 창고에 불씨가 떨어진 것처럼 거대하게 폭발했다.
‘이... 이런 망할!’
그는 경악했다.
청심공! 청심공을 외워야 한다!
‘마음은 거울이요, 여자는 돌멩이다... 여자는 돌멩이...’
하지만 그의 눈은 정직했다.
처녀는 이제 속치마마저 벗어 던지고, 얇은 속바지만 입은 채 물가로 걸어왔다.
찰박, 찰박.
그녀가 맑은 물에 발을 담갔다.
“후후. 시원하다.”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천무진의 귀에는 도화선에 불붙는 소리처럼 들렸다.
쿠콰콰콰-!
아랫배의 양기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된다고, 이 망할 몸뚱아리야! 나는 평화주의자라고!’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여자는 돌멩이. 여자는...
‘젠장. 돌멩이가 너무 예쁘잖아.’
그가 다시 실눈을 떴을 때, 처녀는 이미 물속에 들어와 몸을 씻고 있었다.
하얀 목덜미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물에 젖은 속바지가 그녀의 풍만한 곡선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냈다.
천무진의 얼굴이 숯불처럼 달아올랐다.
열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이, 이건... 이건 아까보다 더 심해!’
계곡물의 음기 따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의 천양신체는, 그가 평생 외면해왔던 스승의 유언이 진리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계곡물 백 번보다,
여자 한 번이 더 강력한 음기라는 것을.
문제는 그 음기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합체는커녕 쳐다보기만 해도 몸이 터질 것 같다는 점이었다.
“흐으읍...!”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청심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양기를 억누르기 위해,
그는 온몸의 기혈을 머리 쪽으로 끌어올렸다.
열기를 머리로 뽑아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그리고,
그 시도는 절반은 성공하고 절반은 실패했다.
주르륵-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코에서 흘러나왔다.
코피였다.
‘아.’
천무진이 당황하는 사이,
붉은 코피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가 몸을 숨긴 바위틈에서,
코피는 폭포수 물줄기를 타고 흘러들어가... 처녀가 목욕하던 소(沼)로 섞여 들어갔다.
처녀는 한참 동안 물장구를 치며 더위를 식히다,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
물 위에, 붉은 실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꽃잎인가...?’
그녀가 손으로 그것을 휘젓자, 붉은 줄기가 흩어졌다.
...피였다.
“...피?”
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폭포수 물줄기 사이. 시뻘건 코피를 쌍으로 흘리며,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알몸으로 바위에 붙어 숨어 있는 사내를.
“...”
“...”
정적이 흘렀다. 천무진은 필사적으로 손을 저었다.
“저, 저기... 아가씨. 이건 오해... 그러니까, 평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계곡이 떠나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처녀는 물 밖으로 뛰쳐나가며, 손에 잡히는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변태! 변태다! 이 미친놈이!”
“악! 아, 아파! 아니, 오해라고! 평화!”
천무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건 아니었다.
그가 원한 평화로운 삶은 이게 아니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변태예요! 여기 변태가 있어요!”
처녀의 고함 소리에, 저 멀리 숲에서 우렁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연화야! 무슨 일이냐!”
“설마... 멧돼지라도 나왔나!”
‘망했다.’
천무진은 직감했다.
저들은 이 처녀의 가족이거나,
마을 장정들이리라.
그들에게 코피 흘리는 알몸 변태로 발각되는 순간, 그의 평화로운 삶은 끝장이다.
“젠장! 망할 놈의 정파!”
천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지금은 정파 탓이 아니잖아.’
그는 재빨리 외침을 수정했다.
“망할 놈의 체질!”
그는 폭포수 뒤편에서 튀어나와, 아까 벗어두었던 옷을 허겁지겁 꿰어 입기 시작했다.
아니, 입을 시간도 없었다.
그는 옷을 한 손에 움켜쥐고, 알몸에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린 채, 숲 반대편으로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사부님! 이게 다 사부님 탓입니다! 그냥 합체하라고만 했지, 쳐다만 봐도 터진다고는 안 하셨잖아요!”
그의 처절한 외침이 한여름의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의 스무 살,
평화롭고 싶었던 여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