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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잿더미 위에 핀 벚꽃


1. 백지와 먹물 해주와의 시간은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주말마다 만나 영화를 보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한강을 산책했다. 그리고 헤어지면 자기 전까지 통화를 했다. 그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보윤에게는 기적이었다. "보윤 씨 목소리 들으면 잠이 잘 와요. 하루 종일 숫자랑 씨름하다가 보윤 씨 목소리 들으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해주의 낮은 웃음소리. 그 부드러운 진동은 보윤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심장을 천천히 녹였다. 보윤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댄 채,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좋아서, 동시에 너무 두려워서. "저도요... 해주 씨 목소리 듣고 있으면 안심이 돼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 화면이 꺼지면, 보윤은 어김없이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알몸을 비춰보았다. 지은이 사준 야한 슬립 사이로 터질 듯 부푼 가슴이 보였다. 잘록한 허리와 넓은 골반. 남자들이 침을 흘리며 탐내던 그 육체. 보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몸은 더러웠다. 백윤겸의 담배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았고, 나를 탐했던 남자들의 끈적한 손때가 묻어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정액으로 얼룩지고, 폭력으로 멍들었던, 너덜너덜해진 중고품. 반면에 해주는 너무나 하얗고 깨끗했다. 그는 명문대를 나와, 화목하고 반듯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났다. 구김살 하나 없는 성격, 다정한 말투, 맑은 눈동자. 그 옆에 선 자신은 마치 순백의 한지 위에 튀어버린 검은 먹물 한 방울 같았다. '해주 씨가 내 과거를 알면... 경멸하겠지? 더럽다고 침을 뱉겠지? 내가 모텔에서 상사 비위나 맞추던 여자라는 걸 알면... 소름 끼쳐 하겠지?' 데이트 도중 그가 환하게 웃어줄 때마다, 보윤은 속으로 울었다. 그의 맑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죄책감이 목을 졸랐다. 이 남자를 사랑하지만, 감히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행복해질수록, 더 깊은 자기혐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 기다림의 공포 주말 오후, 삼청동의 한 한옥 카페. 보윤은 창가 자리에 앉아 아이스 라떼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약속 시간인 2시가 10분이나 지났다. 평소라면 약속 시간 20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을 해주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혹시 늦더라도 미리 연락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전화를 걸어도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만 나올 뿐이었다. 보윤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왜 안 오지? 무슨 일 있나? 아니면... 혹시...' 불안이라는 놈은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들킨 건가?' 트라우마가 고개를 쳐들었다. 누군가 내 과거를 말해버린 게 아닐까? 회사에 소문이라도 난 걸까? 아니면 감옥에 있는 백윤겸이 편지라도 보낸 걸까? 해주가 나를 보고 "너 걸레라며? 더러운 년."이라며 싸늘하게 비웃고 떠나는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해주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보윤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7살 때, 오이 반찬을 거절했다가 문밖에 버려져 떨었던 그 차가운 복도의 공기. 대학 시절, 백윤겸에게 버림받아 낯선 펜션 방에 홀로 남겨졌던 그 비참한 공포. 그 기억들이 오버랩되며 보윤의 숨통을 조여왔다. 카페의 소음이 멀어지고, 심장 소리만 쿵쿵대며 고막을 때렸다. '버림받았어. 또 버림받은 거야. 주제 파악 못하고 행복해하니까 벌 받는 거야.' 보윤은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저 여자 차였나 봐, 하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딸랑- 카페의 풍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누군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 붉게 상기된 얼굴. 기해주였다. 3. 순백의 고백 "보윤 씨! 하아... 하아... 죄송해요. 헉... 많이 기다렸죠?" 해주는 보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왔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셔츠 등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의 품에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투박하게 싸인, 꽤 커다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해주 씨...!" 보윤은 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안도감과 서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연락도 안 되고... 저,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아, 정말 미안해요. 오는 길에 급하게 뛰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그게 하필 배수구 쪽에 부딪혀서... 액정이 나가고 먹통이 됐어요. 연락할 방법은 없고, 공중전화는 안 보이고, 시간은 늦었고..." 해주는 울상이 되어 설명했다. 평소의 침착하고 댄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약속 시간에 늦어 안절부절못하는 순진한 소년 같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뛰어왔는데... 저기, 오다가 꽃집을 봤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해주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포장지가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꽃들은 싱싱했다. 하얀색과 연한 분홍색이 섞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이었다. "핸드폰도 고장 났는데 이거 고르느라 좀 더 늦었어요. 꽃집 사장님한테 제일 예쁜 거, 보윤씨한테 제일 잘 어울릴만 한 걸로 달라고 하느라..." 보윤은 멍하니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확 끼쳐왔다. 해주는 호흡을 가다듬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보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보윤의 몸을 훑는 욕망도, 과거를 캐묻는 의심도 없었다. 오직 투명할 정도로 맑은 진심뿐이었다. "보윤 씨." "네...?" "저, 핑계 대지 않을게요. 늦어서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해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보윤 씨 좋아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매일매일 더 좋아지고 있어요." 쿵. 보윤의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카페의 소음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사라지고 오직 해주의 목소리만 들렸다. "보윤 씨가 너무 여려보여서... 제가 급하게 다가가면 놀라서 도망갈까 봐, 깨질까 봐 조심스러웠어요.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어요. 제가 보윤 씨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요. 저랑... 만나주실래요?" '지켜주고 싶어요.' 지은이가 했던 말과 같았다. 하지만 지은의 말이 '나 없으면 넌 죽어'라는 식의 날카로운 칼날로 빚은 통제의 성벽이었다면, 해주의 말은 '당신이 다치지 않게 내가 막아줄게요'라는 부드러운 솜이불 같았다. 보윤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꽃다발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자신은 더러운 여자인데. 닳고 닳은 구멍인데. 남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던 멍청한 년인데. 이 남자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처럼 바라봐 준다. "저... 저 같은 게... 그래도 돼요? 해주 씨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데... 저는 부족하고, 상처도 많고..." 보윤이 울먹이며 물었다. 자격지심이 끝까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해주는 보윤의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잡았다. "무슨 소리예요. 저한테는 보윤 씨 같은 사람이 아니면 안 돼요. 저한테는 보윤 씨가 세상에서 제일 맑고 예뻐요. 다른 사람은 안 보여요." 해주의 눈빛은 확고했다. 그 눈빛이 보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둠을 몰아냈다. 보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구원의 동아줄을 놓치면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았다. "네... 네, 해주 씨. 좋아요... 저도 해주 씨 좋아해요..." 해주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었다. 그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보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손등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스킨십조차 성스럽게 느껴지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4. 개화 카페를 나와 해주와 손을 잡고 삼청동 거리를 걸었다. 보윤은 달라진 세상을 둘러보았다. 지은을 만나기 전, 보윤의 세상은 타고 남은 잿빛이었다. 희망도 없고, 생기도 없는, 그저 불에 타 죽어버린 폐허의 색. 그곳에서 보윤은 숨만 쉬는 시체였다. 지은을 만난 후, 세상은 형광색으로 바뀌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화려하고 자극적인 네온 컬러. 지은이 입혀준 옷, 화려한 화장, SNS 속의 보정된 사진들. 그것은 보윤을 돋보이게 했지만, 인공적인 빛이라 오래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프고 피로했다. 그런데 지금, 해주와 함께 걷는 이 거리는 달랐다. 연분홍빛. 마치 세상 모든 공기가 벚꽃 잎으로 변해 흩날리는 것 같았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봄의 색. 그것은 눈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잿빛 폐허를 덮어버릴 만큼 포근하고 강인한 생명력의 색이었다. 보윤은 맞잡은 해주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보윤의 손을 빈틈없이 감싸주었다. 내 몸에 새겨진 멍 자국도, 더러운 기억들도, 이 분홍빛 사랑이 지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던 그 얼룩들이, 해주의 온기로 인해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신이시여, 만약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25년 만에 처음으로, 굳게 닫혀 있던 보윤의 첫사랑의 문이 열렸다. 그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빛 속에서, 보윤은 자신이 '남자들의 구멍'이 아닌, '사랑받는 여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늦게 도착한, 그러나 가장 완벽하고 찬란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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