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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153화 미레가 장난스럽게 내 무릎에 털썩 앉았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꽂혔다. “장난이에요. 킥킥.”


ㅂ연무장 입구를 밀고 들어서는 순간,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목소리가 3층 높이의 석조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 고개를 들어 관람석을 훑었다. ​ 빈자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1층부터 3층까지, 빽빽이 들어찬 인파가 저마다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 각약각색의 모습이었다. ​ 대부분은 나처럼 평범한 인간의 외형이었지만, 중간중간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 붉은 피부를 가진 자, 온몸이 푸른빛으로 물든 자. ​ 어떤 이는 머리 위로 짐승의 귀가 쫑긋 솟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인간의 골격 자체에서 벗어나 있었다. ​ 그러나 그들끼리의 소통은 어색함 없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 -아스테라 집정관의 서신들 보셨습니까? 플레이어들과의 계약 제한이라니. 불길하군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목숨에 지장주지 않을 만큼만 허용? 도대체 놈들 목숨이 얼마나 허약한지,어느 정도인지! 알 방법이 있나! -그러나 총군주의 자리가 공석이라는 소문이 돌고있는지금에……. -공작께서 충격발언에 마정석마비주의를 하라더군요. 호호. ​ 나와 함께 둘러보던 미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렇게 많은 귀족분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건 처음 봐요. 아스테라님의 즉위식만큼은 아니지만, 비견될 정도예요.” ​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 “바헬무토 공작은 뭘 하려는 걸까요?” ​ 무언가의 시작 전. 그런 느낌이었다. ​ 수업이 시작되기 전 학생들이 마지막 잡담을 나누듯,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연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모두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때, 나를 알아본 시종 하나가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층, 두 층. 오를수록 더 많은 대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 권력 다툼, 영지 분쟁, 누군가의 스캔들. 귀족들의 세계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 마침내 가장 꼭대기 층에 발을 디뎠다. ​ 화려한 의상을 걸친 마족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 금실로 수놓은 옷, 보석이 박힌 장신구 그리고 육성중이거나 강해지기 위해 연구중인 방법들. ​ 그들은 서로에게 과시하듯 몸짓을 크게 하며 떠들어댔다. ​ 공작에게 잘 보이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느껴졌다. ​ 그러나 공작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주변의 마족들을 물러나게 했다. ​ 그들이 비켜선 사이로, 더 높은 곳으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미레와 함께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 최상층 중앙에는 특별한 좌석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자리임이 명백했다. ​ 붉은 벨벳, 섬세하게 조각된 등받이. 고급스러웠다. ​ “푹신하네. 좋다.” ​ 미레가 장난스럽게 내 무릎에 털썩 앉았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꽂혔다. ​ “......미레야?” “장난이에요. 킥킥.” ​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 미레가 웃으며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 바로 옆에는 바헬무토 공작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가 미레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공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했다. ​ “남주님. 자리는 괜찮으신지요?” “좋네. 연무장이 한 눈에 다 보여.” ​ 실제로 그랬다. 이 높이에서는 아래층의 모든 관람석과 중앙의 넓은 연무장 바닥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자, 주변에 모여 있던 마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 정적이 흘렀다. ​ 그들은 눈알을 굴리며 내 정체를 파악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 포기했는지, 하나둘 자신의 자리로 흩어졌다. ​ 바헬무토 공작은 앉는 대신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던 종을 집어 울렸다. ​ 여인의 절명 같은 스산한 울림이 홀 가득 퍼져나갔다. ​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옷자락의 스스로, 발을 옮기는 소리, 침을 삼키는 음성까지. 숨도 얕게 쉬려는 듯 귀족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적막이 그들을 짓누렸다. ​ 이제 실내에는 아무도 감히 깊은 숨을 내쉬지 못하는 듯한 고요한 적막만이 지배했다. ​ “바헬가를 지지해주시는 모든 귀족분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무게는 철저했다. ​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청중을 한 바퀴 훑었다. ​ 지지자들의 순종적인 눈빛을 확인한 공작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희미하게 걸렸다. ​ 침묵 속에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강해지는 것.” ​ 그는 마치 연설의 포문을 열 듯, 단어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어 단상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그 팔뚝의 근육이 경직되고, 손가락 사이로 흰 줄이 그어졌다. ​ “그리하면 새로운 세계가 우리를 맞이한다는 사실을, 감히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상승! 상승!” ​ 모인 귀족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 “저는… 변방의 나부랭이였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몇몇 분들이 분명히 여기 계시겠죠.” ​ 대다수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몇몇은 얕은 인상을 찌푸렸고, 또 다른 몇몇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 그들의 감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 “결국 저는 이 자리에 올라섰고, 마왕성 직속 2급 요원이라는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성장의 위는, 끝내 단단한 한계에 부딪히더군요.” ​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신세한탄이나 하려고 모두를 부른게 아닌것을! ​ 청중의 시선이 공작의 뒷말에 맹렬하게 집중했다. ​ “하지만!” ​ 모두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바헬무토 공작을 노려봤다.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 ‘당신이, 그 한계를 뚫었단 말인가!’ ​ 바헬무토 공작은 연설대를 벗어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한 걸음, 한 걸음. ​ 그의 발걸음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족들의 눈알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를 따라 또르르 굴러갔다. ​ 연무장의 한 가운데에 선 공작의 등 뒤로 검은 연기가 뭉클거리며 피어솟았다. ​ 하나, 둘, 셋. ​ 수가 늘어났다. ​ 넷, 다섯, 여섯. 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일곱, 여덟. ​ 이내 여덟 개의 짙은 그림자가 공작의 깃털처럼 등 뒤로 펼쳐졌다. ​ 그 수가 셀 수 없이 늘어나더니, 이내 여덟 개의 짙은 그림자가 공작의 깃털처럼 등 뒤로 펼쳐졌다. ​ “검은 창……! 실제로 보게 되다니! 노출을 꺼리던 공작께서?” ​ 누군가의 목소리가 떨렸다. ​ “어마어마하군. 저 창 하나하나가 왠만한 마족보다도 더 쌔보이는군.” “일일군단!” ​ 그들의 평가가 들려왔다. ​ 흐릿하게 떠다니던 검은 창들이 점차 선명한 형태를 이뤘다. ​ 검은 연기 속에서 개별적인 윤곽이 드러나고, 창날의 예리함까지 감지되기 시작했다. ​ 그 자태가 모인 이들에게 절로 경외감을 안겨주었다. 누구도 눈을 떼지 못했다. 떨 수도 없었다. 오직 공작만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여전한 미소를 띠고. “여기있는 대부분의 영광스런 귀족분들께선 제 창을 4개이상 받아내지 못할껍니다. 여기에 이의가 있는 분은 지금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 물론 눈치없이 내가 손을 들어 나가진 않았다. 미레또한 근질근질한듯 손끝을 움찔했으나 얌전히 무릎에 놔두었다. ​ “좋습니다.” ​ 경악과 기겁으로 군중이 물들었다. ​ “저건……누가와도 못 막겠군.” ​ 검은 창이 공작의 시선을 따라 살아있는 듯 흐물거렸다. 창날이 뱀처럼 구부러졌다가 다시 곧게 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맹수가 몸을 푸는 것 같았다. ​ “여러분들께 육성중인 후계자, 또는 일가의 경비대장이든 무력을 자랑할 수 있는 자들을 데려와달라는 무리한 요청에 응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자신들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를 길러냈는지 증명할 차례였다. ​ 각 귀족가에서 차출된 힘있는 자들이 하나씩 공작에게 도전했다. ​ 첫 번째 도전자가 앞으로 나섰다. ​ 도전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마력이 응집되어 공기를 가르며 예리한 바람 소리를 냈다. ​ “……졌습니다.” “뛰어난 마력이었습니다.” “달콤한 패배입니다.” “영광입니다, 공작.” ​ 일방적인 도전자의 연격을 검은 창으로 막아낸다. 이 후 모든걸 쏟아부었다고 판단한 도전자는 방어자세를 취한다. 공작은 단 한 합. 일격. ​ 찌르거나, 휘두르거나. ​ 도전자들은 공작의 힘이 조절된 공격을 막고는 예의를 갖추며 내려갔다. ​ “여러분들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 공작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 이어서 품속에서 실크천으로 감싸진 무언가를 꺼냈다. ​ 천을 한 겹, 두 겹 벗겨낼 때마다 은은한 묵빛이 새어 나왔다. ​ 마지막 천이 벗겨지자, 묵빛 목걸이가 드러났다. 어둠을 삼킨 듯한 검은 보석이 불길하게 빛났다. ​ ‘저건.’ ​ 나침반은 잠잠하게 반응이 없었다. [성유물 탐색 나침반] 성유물의 위치 탐색합니다. 단,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 신창을 소환해 미레에게 쥐어줬다. ​ “앗?” ​ 오른쪽 눈을 깜빡이자 미레가 미소지으며 신창을 꽈악 쥐었다. ​ 미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나침반의 불합리적인 짧은 인지거리를 알고 있기에 공작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 공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긴장? 아니면 흥분? ​ 그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 지금까지 공작과 검은 창에 쏠렸던 시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동자들이 천천히, 일제히 나를 향해 굴러갔다. ​ 귀족들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 “바헬무토 공작. 나를 부른거겠지?” “허허허. 맞습니다.” “강해졌네. 축하해. 창도 그때보다 더 굵어진거 같아.” “감사합니다. 주신 축복덕분입니다.” ‘……축복이라.’ ​ 어째서인지 갑자기 정시은이 내게 무릎을 꿇으며 길드를 바치겠다던 그 날이 떠올랐다. ​ ‘쌔한데?’ ​ 그러나 걱정은 쓸데없는 짐 일뿐. ​ 나침반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 진동이 더 격렬해졌다. ​ 부르르르르— ​ 손을 뻗어 묵빛 목걸이를 향해 나침반을 내밀었다. ​ 찰나. ​ 나침반의 좁은 틈새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슈우우웅— ​ 가느다란 붉은 광선이 어둠을 가르며 완벽한 직선을 그렸다. 흔들림도, 휘어짐도 없이 목걸이를 정확히 겨냥했다. ​ 빛이 묵빛 보석에 닿는 순간. ​ 콰아아아—! ​ 목걸이가 반응했다. ​ 검은 보석 속에서 검붉은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심연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듯, 불길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성 유물을 탐지하였습니다.] ​ 공작이 손에 쥔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그는 황급히 다시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에 당황과 놀라움이 스쳤다. ​ ‘맞네. 여기에와서 바헬무토 공작이 2개나 찾아줬어.’ “묵빛으로 된, 우리 마계에서 나올뻡한 물건이 아닌 것들을 수색했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건 이것이 맞으시죠?” ​ 그 순간, 바헬무토 공작의 인상이 달라 보였다. ​ 처음 봤을 때의 오만방자한 늙은 권력자가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려는, 묘하게 친절한 아저씨처럼 느껴졌다. ​ “맞아.” “찾느라 꽤나 고생했습니다.” ​ 그의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다. ​ “많은 자본을 써야 했죠. 쓸려간 목숨도 있지만.” ​ 공작은 회한 어린 눈으로 손 안의 목걸이를 내려다봤다. 검은 보석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더 깊게 보였다. ​ “그 예전을 무모한 도전이라고도 부르지 않겠습니다. 그건 자살행위였으니까요.” “아.” ​ 공작의 입가가 환하게 펴졌다. 콧수염이 위로 올라가며 주름진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 “이번엔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래.” ​ 묵빛 목걸이가 내 손에 쥐어졌다. ​ [침묵의 목쇄(성유물)]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빛을 뺏겨 슬퍼하고 있습니다. ​ ‘뺏겼다고?’ ​ 이상했다. 성유물 설명은 능력이나 효과를 나타내는 대신, 이건 마치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 목걸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공작을 똑바로 바라봤다. ​ “이제 하고 싶은건?” ​ 그는 기다렸다는 듯, 전신의 힘을 쥐어짜듯! ​ 큰 소리로 외쳤다! ​ “축복! 그 축복을!” ​ 인벤토리에 미리 추출한 강화를 꺼내 스포이드에 한 방울 담아 공작에게 던졌다. ​ 스포이드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공작이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치 성배를 받드는 것처럼. 그가 스포이드를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 “아아아ㅡ! 이 영롱한 빛깔이며! 마신님이시어!” ‘뭐? 마신?’ ​ 어리둥절한 나의 반응과는 별개로 모두가 기겁을 하고 있었다. ​ 여기저기서 숨을 멈추었고, 그 조그마한 동작도 하지않은채 경직됐다. ​ 수많은 마족들이 단체로 충격을 먹은 듯 바헬무토 공작만을 쳐다봤다. ​ 어서 뒷말을 마저 하라는 듯! ​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공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포이드를 입으로 가져갔다. ​ “으음…….” ​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의 우는 것에 가까웠다. 눈가가 붉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 톡. ​ 한 방울이 혀 위에 떨어졌다. 공작이 눈을 감았다. 흐느끼듯 떨리는 호흡으로, 그 한 방울을 천천히 음미했다. ​ 침묵. 긴, 긴 침묵. ​ 귀족들의 시선이 공작에게서 나에게로, 다시 공작에게로 왔다 갔다 했다. ​ “아, 아아아! 또 느껴집니다!” ​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 “저는 또 강해졌습니다! 온몸으로 힘이! 마력이! 아아아아ㅡ!” ​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작은 스포이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들어 내게 건넸다. 마치 성물을 봉헌하듯. 나는 괜히 찝찝해서 손끝으로만 스포이드를 받아 재빨리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공작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 “제 전력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 공작의 등 뒤에서 검은 창들이 피어올랐다. 하나, 둘, 셋……아니, 수십 개. ​ 순간적으로 밤이 강림한 것처럼 어둠이 연회장을 삼켰다. 빛조차 검은 창들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 더 굵어졌고, 커지기까지. ​ 복제되듯 끊임없이 늘어나며 시야 가득히 음침한 어둠으로 가득 찼다. 마치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펼쳐진 것 같았다. ​ 검은 창이 한번 더 복제되듯 늘어나며 시야 가득히 음침한 어둠으로 가득찼다. ​ 거절의 의사를 펼치려했지만, 너무나도 애절하는 눈빛이었다. ​ 일 끝나고 한잔하러 가자던 반장님과 조장님의 권유를 뿌리칠수 없었는데. ​ -너 아니면 같이 술 먹을 사람이 없단 말이야……. ​ ‘아 진짜.’ ​ “알겠어. 대신 설렁설렁 하지마.” “크히히히히힛, 좋습니다! 좋아요!” ​ ​​ ​ * * * ​ ​ 좌석에 앉은 모두가 생각하는 것을 잊었다. ​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 그저 공작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광경을 볼 뿐이었다. ​ 슈우우욱! 창! 카앙! ​ 검은 창들이 직선으로 돌진했다. ​ 그런데— ​ 휘익! ​ 갑자기 궤적이 휘어졌다. 뱀처럼 구불거리며 예상치 못한 각도로 파고들었다. ​ 어떤 창은 허공에서 사라졌다가— 슈욱! ​ 상대방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 또 다른 창은 순식간에 거대해지더니— 쾅! ​ 거대한 망치처럼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후려쳤다. ​ 직선, 곡선, 순간이동, 타격. 일반적인 공격과는 다른 변칙적인 기술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놀라운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 수십, 수백 개의 창들이 각기 다른 공격을 펼치면서도—서로 부딪히지 않았다.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계산된 궤적으로, 동시에 쏟아졌다. ​ "크으윽……!" ​ 공작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 그리고ㅡ ​ “하아……하아……” ​ 연회장 곳곳에서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귀족들이었다. ​ 그들의 숨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칠었다. 마치 야수가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내는 위협음과 비슷했다. ​ 합이 길어질수록. 시선이 움직였다. ​ 바헬무토 공작에게 쏠렸던 이목이—천천히, 그의 상대에게로 옮겨갔다. 저 무지막지한 공격들을 막아내는 자. ​ 챙! 카앙! 퍼억! ​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강하게 쳐내고. ​ 어떤 것은— 퍽! 그냥 몸으로 받아낸다. ​ 창끝이 어깨를 스쳤다. 하지만 공작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몰아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 ​ 합이 시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두 발. 쿵. ​ 연무장의 바닥이 금이 갔다. 발이 박혔다. 땅을 파고들었지만. 그대로였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 “하아아아아아—!” ​ 바헬무토 공작이 포효했다. 슈우우우욱! ​ 모든 검은 창이 하나로 합쳐졌다. 거대한, 거대한 검은 창 하나. 필살기. ​ "받아라아아아—!" ​ 콰아아아아앙! ​ 공기가 찢어졌다. ​ 파아아아앙! ​ 파공음이 터져 나갔다. ​ 퍼억—! ​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 연회장의 벽이 흔들렸다. 귀족들의 옷깃이 펄럭였다. ​ 피부로 느껴졌다. 뼈까지 울리는 충격파를. ​ 모두가 본능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렸다. ​ “하아, 하아.” ​ 공작은 탈진하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갸냘픈 검은 창 하나를 지지대로 사용하고 있었을 뿐 본래의 용도로 쓰기엔 무리로 보였다. ​ 먼지가 가라앉았다. 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모두가 공작의 죽음을 예상했다. 아주 강한 마족을 제대로 도발한 댓가는 심장 가장 안쪽에 박혀 있는 마석이리라. ​ 귀족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 “바헬무토 가문의 봉납식이었나……!” “저 자는 대체 누구지?” “아아아…미친, 우린 모두 죽을 거야. 저렇게 강한 분께서 과연 우릴 살려둘까?” ​ 공포가 번졌다. 누군가 도망갈 준비를 했다. 누군가는 무릎을 꿇을 자세를 취했다. 그때. ​ “모두들……보셨습니까.” ​ 힘 한 톨 없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퍼졌다. 바헬무토 공작이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 하지만 그보다 더 고요한 환경이 그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리게 해주었다. 공작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하지만 웃고 있었다. ​ “마신의 화신께서…….” ​ 공작이 떨리는 손으로 연무장 중앙을 가리켰다. ​ “우리에게 강림하셨습니다.” ​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먼지 속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두 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상처 하나 없이. ​ “천족과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 공작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 “묵빛의 도구, 장식을 봤다면 가져오십시오!” ​ 공작이 두 팔을 벌렸다. ​ “화신께서 축복을 내려주실 겁니다!” ​ 침묵. ​ 그리고— ​ 쿵. ​ 한 귀족이 무릎을 꿇었다. ​ 쿵. 쿵. ​ 또 다른 귀족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 쿵쿵쿵쿵— ​ 연회장 전체가 무릎 꿇는 소리로 가득 찼다.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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