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59)
472.
#21.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하나.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움이 몸 속 깊이 파고드는....
아픔의 시간.
아무런 기약도 없이....
어떤 약속도 없이.....
그냥 가만히....
떨어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교도소에서도 그래서 사형보다....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 더 힘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또한....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공포에 덜덜 떨며....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하지만...
무기징역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만이....
이 갇힌 공간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란 사실을 인지하며...
매일 희망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깊은 고통을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
아무런 희망도 없고...
아무런 기대도 품을 수 없이...
갇혀진 공간...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가운데....
특히나 혼자서 그 영겁의 시간을 반복하면서...
자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스스로 정신이 무너져서 이상해져 버리는....
그것 자체가 바로 형벌이라고 하는....
그것을 어쩌면 지금 나도....
똑같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바탕에는....
오직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그리움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
조금 다를 뿐.
**************
생각해보면....
단 세 번의....
세 번 밖에 안 되는 만남이었다.
갑작스러운 연락....
그리고 동해까지 드라이브.
기다림....
또 갑자기 걸려온 그녀의 전화.....
그 뒤 이루어진 점심시간....
짧은 식사시간.
그리고....
아버지 납골당에서의 생각지도 못한 만남.
긴 시간 동안....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시간에 비하면....
그 세 번도 나에겐 정말....
귀중하고 많은 만남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만난다고 해서....
그리움이 옅어지거나....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나....
납골당에서 만난 뒤....
서울까지 함께 올라오며...
차 안에서 한두 시간....
함께 시간을 보냈음에도....
밥이라도 같이 먹지 못하고 보내버린 뒤 남은 상실감이란.....
정말 이상하게도 깊게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도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도란도란 같이 유부초밥을 먹으며....
그녀가 손수 싼....
그 유부 초밥을 먹으며....
함께 바라보았던 풍경만으로도....
심장이 시려오는 듯 싶은데....
주체 못할 내 욕심은 끝도 없이 부풀어 올라서....
또 다시 그녀를 찾아 머릿속을 헤매이고....
시리도록 괴롭혔다.
연락처를 알지 못했을 때보다....
알고 있기에 더욱 괴롭다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역시....
그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녀를 잡았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선약이 있다는데....
어찌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생각이 맴돌다가 사라져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길게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것 뿐이었다.
결국 민희와의 연락이 이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처음 마음먹었던 것은....
온통 새카맣게 칠해진 거짓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냥 한 번....
보고 싶었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냥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냥 난.....
처음부터 민희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계속 ING....
진행형이길 바랬다.
아버지 말씀 그대로였다.
" 그런 여자 놓치면..... 우태 너.... 평생 후회한다. 민희 참... 고운 아이야.... "
그래....
그래서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홀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기약 없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연락하지 못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 남은.....
도덕적인 장벽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
타인과의 비난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내 연락으로 인해....
민희 그녀가 곤란한 지경에 빠질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비겁한 변명이라 해도....
그게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역시....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결국 나는 또 죄 없는 영석이를 찾았다.
지희씨에게는 언제나 미안할 뿐이지만.....
녀석이 사는 동네에까지 찾아가서는 술 한 잔 하자고 꼬셔대는....
나쁜 친구였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묵인해주는 제수씨에게....
정말 감사할 뿐이었다.
어른의 감사는....
그에 향응하는 금전적 선물이라던데...
아무래도 명절이 오면....
한우 세트라도 보내야 할 듯 싶다.
어찌 됐든....
그 와중에 슬리퍼를 찔찔 끌며 나타난....
영석이 녀석과 함께 꼬치 집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익숙한 상호에 이끌려서 들어갔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꼬치 집 같은 주점이 ....
우리들의 학창시절 대학가나 유흥가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프렌차이즈 주점이 다 그렇듯....
유행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룡이....
자취를 감춰버린 것처럼....
그 많던 주점이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래도.....
아예 없어져 버린 다른 주점들에 비하면....
이렇게 간간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봐서는....
그래도 어떻게든 생명력을 이어가는 모습에....
조금이나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치 천연기념물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
그런 추억을 떠올리는 주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니 내 발걸음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세월이 잔뜩 묻어 있는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반갑게도 빠르게 나온....
시원한 생맥주.
그리고 꼬치 세트를 씹으면서....
근래 있었던 일을 떠벌렸다.
별로 할 만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인터넷 기사에서 봤던 가쉽거리를 떠들고....
정치, 사회, 경제 전반적인 이슈를 끌어다가.....
멋대로 해석하고 분석해서는....
그냥 입과 혀가 꼴리는 대로....
주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작에 녀석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입이 모든 일을 불러오는 재앙의 원인이라고 했던가.
그만큼 주체 못하고 떠들어서 좋은 일은 없다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간질거리는 입술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놀려댔다.
" 영석아..... "
" 응? 왜? 또 무슨 불만이 이 사회에 있냐? 이 투덜이 스머프 같은 자식아. "
실실 썩소를 날리며 맥주를 마시는 그에게 말을 꺼냈다.
" 나... 민희 만났다.... "
" 풉!!! "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순간....
영석은 마시던 맥주를 잔에 뿜어내고는 연신 콜록거렸다.
그리곤 빨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말을 토했다.
" 콜록... 콜록... 너.. 임마... 콜록.... "
하지만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다시 옆에 있는 물 잔을 들고는 벌컥 벌컥 마셔댔다.
그 큰 잔을....
잔을 다 비우고서야.....
탁 소리와 함께 내려놓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 야... 이 자식!!! 너 설마 민희라는 게 그... 서민희 말하는 거 맞냐? "
" 니녀석이 알고 내가 아는 민희가 서민희 말고 누가 있겠냐? "
" 이런 씹....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이 자식아!!!! 너.... 진짜 그 서민희를 만났다고?!!!!!! "
잔뜩 얼굴이 붉어져서는 펑 소리와 함께 터질 듯한 영석이를 보며.....
담담히 대답했다.
" 그래. "
" 야이.. 이 미친 새끼...... 이... 미친 새끼가.....? "
영석은 벌떡 자리를 일어나려다가....
씩씩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젠 맥주잔을 잡고 들이켰다.
이것도 무슨...
아까 물 마시는 것처럼 잔을 싹 비우고서야....
나를 바라보았다.
미간 사이....
주름을 잔뜩 잡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걔가 먼저 연락했지? 어!? "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영석은 대답을 듣자마자 콧구멍으로 거친 숨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고개를 들었다가 이를 악물고는 숙였다.
" 하씨.... 어휴.....그럴 줄 알았다... 결혼도 한 년이 왜... 정말 썅...... "
하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 쌍년 >>이라는 말.
영석은 아직도 민희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나도 내 눈으로 직접.....
주섭이와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아버지 납골당에도 찾아주고....
내가 힘들었던 그 날에도 와서 안아주었던....
그녀에 대해 변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민희의 모습을 말해주려고 해도....
그게 오히려 더욱 이상하게 표현될 듯 싶었다.
한편으로는 결혼하고도....
전 남친 아버지 기일을 찾아오고....
장례를 마치고 벌인 그...
갑작스런 정사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일이었다.
헤어지자고 정작 나에게서 멀어져놓고...
나 몰래 아버지를 찾아간 것 또한....
말로 끄집어서 표현하기엔....
제3자가 보았을 때....
좋게 받아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 듯 싶었다.
그래도 역시....
역시나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런 게 아니야. "
" 야!!!!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정신 차려, 임마..... 하아... 진짜 우태.... 너도 문제다. 대체 왜 그런 여자애를 왜??? 왜 못 잊는 거냐? 어???? "
영석은 목이 타는 듯 맥주잔을 들었다.
아까 자신이 다 마셔놓고는 잔을 들었다가....
끝까지 세워서는 얼마 안 되는 몇 모금이라도 빨고는...
내려놓았다.
미처 주문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그리고 이어지는....
긴 한숨....
" 그 애는 진짜.. 하.... 아니다. 아무리 첫사랑이라도 그렇지. 넌.... 넌 정말 지독한 녀석이다, 임마! 하.... 지겹다 지겨워..... "
난 맥주를 천천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피식 웃었다.
" 야... 근데... 너도 나도 그리고 민희도 이제 애라고 부를 만한 나이는 아니지 않냐? "
" 미친 새끼... 아휴... 씨발 그게 지금 할 말이냐? 하! 지랄이다. 사장님! 여기 맥주 아니 삼천 씨씨 피쳐로 하나 갖다주세여! "
영석이 녀석이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평소라면 그냥 생맥주 500cc 한잔 달라고 할 녀석이....
피처를 시킨 것 보니 정말로 크게 빡친 모양이었다.
다만 그 빡침이....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모습이니....
씁쓸하게 소리 없는 웃음으로 대신 할 뿐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