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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96)


510. #25. 어둠 속에서 (2) 사람이 얼마나 뻔뻔해질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 시선 속에.... 난 얼마나 나쁜 년일까.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수록.... 무언가가 안에서 끓어오른다. 왜.... 왜 다른 사람들 시선에 대해..... 내가 신경 써야 할까? 내 행복.... 내 시간은.... 그들이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닌데. 이미 남의 시선 속에서..... 난 힘든 시간을 보냈었는데.... 왜 또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봐야 하는 건데? 그래.... 오로지..... 내가 제일 먼저.... 내가 최우선이어야.... 하는 거잖아. 내 삶에서.... 내가 먼저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뻔뻔하게 뭐 어때서. 난 뻔뻔하지 못해서..... 너무 많은 것을 놓쳐 왔는걸. 이미.... 너무 많은 것을..... ************** 버석거리는 옷감의 느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끼게 되는... 풀 먹은 치마저고리가..... 자꾸만 낯선 검정 상복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한손으로 치맛단을 들고는.... 조심스레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와서...... 마침내 제대로 마주보는.... 아버지 영정 사진. 민희는 사진 속 아버지 얼굴을 보며 숨을 골랐다. 사실.... 아버지 영정 사진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얼굴..... 사진 속 얼굴을 보고 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오긴 했지만..... 결국 울음이 터지지는 않았다. 하얀 국화꽃으로 가득 장식된 가운데.... 언제나처럼 근엄한 표정의 아버지 얼굴. 언제 찍으셨는지 알 수 없는.... 약간 젊어 보이기까지 한.... 그 얼굴 속에 담겨진.... 그 근엄함이.... 민희의 감정을 힘껏 억누르는 듯 보였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기억들. 모질 땐.... 한없이 모질고.... 엄했던 지난 시간이..... 자꾸만 사진 너머에서 넘실넘실..... 건너왔다. 그래서 더 민희의 마음속에 죄스러운 마음은 들었지만.... 슬픔은 넘치지 못했다. 죄송해요, 아빠.... 역시 난.... 나쁜 딸이었나 봐. 좋은 기억만 생각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미안해, 아빠..... 향을 피우고.... 꽃을 올리고..... 아버지 사진 아래..... 잠시 앉아서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용서와 참회.... 그리고 좋은 곳에 가시길 바라는 마음.... 심장이 쪼여오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며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는 와중에..... 캄캄한 가운데..... 또 다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여러 기억들. 하지만.... 그 마지막 기억의 파편은..... 결국 민희의 눈꺼풀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 절대 안 돼! 그 놈과 결혼하겠다는 말 하려면 그냥 학교고 뭐고 다 때려쳐어엇!!! " 순간 고막에 찌잉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들리는.... 이 소리. 언젠가부터..... 뇌까지 찢어질 듯 울리던 소리..... 순간.... 난청이라도 온 것 아닐까 싶은.... 이명이 오랜만에 다시 생긴 듯 싶었다. 쿵쿵 거리는 심장 고동을 느끼며 민희는 고개를 들고 일어나서.... 바로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종석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 종석아, 나.... 엄마 좀.... 엄마 좀 보고 올께. " 어쩌면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민희의 속마음을 전혀 모른 채 종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럴래? 알았어... 여기 들어왔던 입구로 다시 나가서 바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면 돼. 거기 보이는 팻말 따라 가면 바로 응급실로 연결 되거든. 아직 엄마 거기 계셔. 아! 둘째 형부도 아직 거기 계실 거야. 전화해서 확인해볼까? " 말하면서도 당장 전화를 걸 듯 핸드폰을 꺼내는 동생의 모습에 민희는 서둘러 말렸다. " 아.. 아니야. 무슨 전화까지... 내가 그냥 알아서 가볼께. " " 응... 알았어. 천천히 갔다 와. 여긴 내가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엄마도 보고.... 엄마도 누나.... 보고 싶어 하셨어. " 희미한 미소를 보여주는 종석을 뒤로 하고 민희는 그대로 뒤돌아 나와 신발을 신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전체적으로 장례식장 안 손님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들도 한산한 풍경. 상주로 보이는 가족들이 한쪽 구석에 모여서 간단히 식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오순도순 모여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하긴... 평일 아침.... 장례식장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아마도... 최소 점심시간은 되어야.... 조문객의 모습들이 보일 듯 싶었다. 출구로 나가기 전... 문득 시선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했다. 아마... 아직도 남편 석진은.... 대여소에 있을 것이다. 생각 외로 아무런 말도 안하고... 부드러운 미소만으로 민희 자신을 맞이하고는... 상복을 골라 입고 나오는 동안에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들은 건.... 고작 놀래어서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어서 처남에게.... 종석이에게 내려가 보라는 말 뿐이었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긴 한데.... 역시 그런 석진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 후유우우..... "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절로 흘러나오는, 무겁기 짝이 없는 한숨을 흘리며.... 장례식장 맞은 편 병원 본관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에 걸려 있는 푯말.... 그리고 바닥에 색색으로 이어진 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그 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장례식장과는 또 다른 풍경. 원래... 대학 병원이라는 곳이... 언제나 붐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침부터 많이 사람들이 얽혀대며 북적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뭘 그리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크고 넓은 1층 로비에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귀가 멍멍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간간히 보이는... 하얀 가운의 사람들 외에도... 나이 드신 어른들도 그렇고 젊은 사람들까지... 연령도 다양했다. 인파 속에서 현기증이 생기려는 것을 느끼며.... 민희는 연신 머리 위를 바라보면서.... 응급실을 찾아서 걸었다. 마침내.... 빨간 색 선이 끊어지는 곳....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응급실이란 글자가 써진 문을 볼 수 있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들 모습부터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의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방금 전 정말 위급한 환자라도 들어온 것인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의 의료진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어디 있는지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특히나.... 스테이션에 있는 이들 또한 연신 전화기를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통화중이라 더욱 물어볼 수 없었다. 민희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칸마다 커튼이 처진 침대 사이를 걸으며.... 명찰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강은숙....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발견했다. 다른 병상과 마찬가지로 커튼이 둘러쳐진 상태라 안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슬쩍 젖히고 들어갔는데.... 바로 그 안에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엇.... 처제...! 언제 왔어? "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는 엉덩이를 살짝 들며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민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방금 왔어요. 둘째 형부.... 어머니는 어떠세요? "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시선을 향한 곳에 눈을 꼭 감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절로 목소리를 낮추게 되었다. 하긴... 형부의 목소리도 애초 작았으니... 그것에 맞추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응, 괜찮으셔... 잠깐만.... " 먼저 슬쩍 옆으로 나와서 커튼 밖으로 나가는.... 둘째 형부를 쫓아 나오는 민희. 그는 그제서야 빙긋 미소 지으며 민희를 맞이했다. " 이제 막 약기운이 돌았는지 잠에 드셨어. 크게 아픈 곳은 없으신데 아무래도... 놀라셔서 그런 듯 싶어. 안정제 처방 받고 영양제 링거 맞으셔서 이제 좀 눈을 붙이신 거 같아. 거의 한숨 못 주무셨으니까.... 이대로 좀... 주무시도록 놔두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참! 근데 처제는 어떻게 왔어? 지방에 내려가 있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연락 받아서 많이 놀랬지? 그래도 어떻게 용케.... 빨리 왔네? " " 아니에요. 이제야 막 왔는걸요... " 말하면서도 마음이 쿡쿡 쑤시는 듯 싶었다. 아버지 부음을 들었던 그 시간.... 자신은 한참 남자와 사랑을 속삭이는 중이었으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빨리 왔다는 말 자체가 죄책감을 불러오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장례식장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우태의 모습이 생각났다. 들어가기 전... 슬쩍 입구 유리창에 비춰보였던 그 모습.... 표정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민희의 심장이 울컥 쪼여왔었다. 민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 형부는 계속.... 엄마 곁에 계신 거에요? 아침 내내? " " 그런 건 아니고... 와이프가 같이 있다가 애들 때문에 집에 간 사이에 대신 지키고 있었지, 뭐. 참! 처남은 봤어? 보고 온 거야? " " 네. 보고 온 거에요. 그럼 이제.... 제가 여기 있을게요. 형부는 좀 쉬세요. 아침.... 식사도 못하셨을 거 아니에요? " " 식사는 무슨.... 별로 배고프지도 않을 걸. " " 그래도 좀 쉬세요. 새벽부터 오셨을 거 아니에요. 제가 대신 엄마 곁에 있을께요. " " 괜찮은데.... " " 아니에요. 이제라도 제가... 엄마 곁에 있을께요. " " 흐음.... "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둘째 형부는 바로 빙긋 웃었다. " 알았어. 그럼 난 아버지 계신 곳에 있을께. 혹시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주고. " " 네. 그럴께요. " 그렇게 응급실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고는 바로 어머니 옆자리에 들어오는 민희였다.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 모습. 살짝 찌푸린 표정의 엄마 얼굴을 보니...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손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주글주글한 손등 위 혈관.... 살이 올라 통통하지만.... 나잇살이 보이는 팔뚝 위로.... 하얀 반창고 아래 링거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똑똑....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 봉지를 보면서 민희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한손... 그리고 또 다른 한손. 손아래 느껴지는 엄마의 푸석거리는 피부. 딱딱한 손가락. 그렇게 민희는 엄마의 손을 양손으로 쥐고 나서야.... 갑자기 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 속에서.... 민희는 엄마의 손을 잡고는 소리 없이.... 계속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울음소리를 삼킨 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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