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02)
516.
#25. 어둠 속에서 (4)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
과거의 기억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에겐....
추억이 살아가는데 힘이 된다고 하지만....
나에겐 상처가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남들에게는 전혀....
그런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들키게 된다면....
그 순간....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민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처....
내 아픔....
그게 오히려 약점이 되어....
그녀가 내게서 멀어질까 봐.....
하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니...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좋지도 않은 과거를 괜히 들춰서....
얼룩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졌기에....
더더욱....
알려줄 수 없었다.
**************
그날 밤 아버지의 기억은 공포 그 자체 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그런 표정은....
당시 얼마 살지 않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제법 많이 컸다고 생각했었지만....
역시 그날 밤 내 기억 속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자면....
여전히 어리고 전혀 크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가 무섭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가 나도 모르게....
작게 외쳤던 말 한마디....
아빠라고 불렀던 그 말이....
마법처럼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성난 도깨비처럼 일그러졌던....
차갑게 굳어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천천히 풀리고....
내가 알고 있던....
평상시의 아버지 얼굴로....
돌려놓았다.
그리곤 한동안.....
두 눈을 연신 깜빡거리더니....
한참 뒤 손등으로 양쪽 눈두덩을 비비셨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깬 듯.....
훌쩍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눈을 비비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띄우시며....
속삭이듯 말을 건네셨다.
물론....
어색하게 굳어진 얼굴은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입술이 묘하게 삐뚤어져 있긴 했다.
" 아.... 우태.... 깼구나? 아비가 곤히 자는 걸 깨웠네.... 미안하다.... 미안해..... 일어나지 말고.... 그냥 다시 눈 감고.... 어서 자거라.... "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려 가슴까지 덮어주시고는 투박한 손길로 몇 번이고 토닥거리셨다.
그때 눈동자에 충혈된 흔적을 보지 않았다면.....
아까 내가 보았던 그 아버지의 모습은 그냥 잠결에 착각했다고....
잘못 보고 지레 겁먹었다 믿고도 남을 정도의 변신.....
급격한 변화였다.
하지만....
마법이 일어난 건....
아버지뿐만 아니었다.
나 또한 아버지의 말에 마법이 걸린 것처럼....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무서웠으면서도....
어떻게 바로 잠이 들었는지....
이후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무서웠기 때문에...
더욱 빨리 자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밤 기억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내가 잠들 때까지 아버지가 곁에 계셨는지....
아니면 토닥토닥 거리시고는 내가 눈을 감자마자 바로 일어나 방문을 닫고 나가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하는 건....
그대로 내가 잠에 빠졌다는 사실 뿐.
그 다음날도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아마도....
그냥 평범했던 아침 그대로였을 것이다.
나도 될 수 있으면 빨리 잊으려고 했고 아버지도 이후 별말씀 없으셨다.
그대로 마음속 깊은 곳에....
뇌리 깊은 곳에 묻어둔 상태에서....
문을 잠그고 잊어버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기억이 지워질 리는 없었다.
가끔 제멋대로 잠긴 문을 열고는....
꿈속에서 벌컥 벌컥 깨어나 나를 잠에서 깨웠다.
언제나 악몽으로 찾아온 그 기억은....
내 온몸을 땀에 흠뻑 젖게 만들고....
벌떡 일어나서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나 밖에 없는 방 한가운데....
이부자리 위에 앉아서는 헉헉 거리는 가운데에서도....
그날 밤 아버지에게 흘러나왔던 술 냄새가....
코끝에 가득 맺혀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좀 더 나이를 먹었을 때.....
그날 밤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날 밤....
무서운 생각을 하셨을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상상.
아버지의 핏발 선 눈동자.
내가 느꼈던 두려움.
그때 내가 느꼈던 느낌은....
바로 살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면서 했던 말 중....
하나....
" 몰라! 니 새끼니까 니가 데리고 살아!!! "
어머니가 집에서 나가기 전....
종종 두 분이 싸우는 동안....
내 방에서 몰래 들었던 그 말.
하지만 언젠가 엄마가 다니던 교회 목사에 대해 인터넷에서 검색하면서....
문득 깨달았던 사실이 열쇠가 되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거울 속 내 얼굴과 그 목사의 얼굴이 닮았다!?
원래 아버지보단 엄마를 닮았다고 들어왔던 내 얼굴이....
왜 그 목사와 비슷한 부분으로 보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번 새겨진 생각은 보면 볼수록 더욱 닮은 모습을 찾아낼 수 밖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의 퍼즐 또한 저절로 맞춰졌다.
아버지 또한 그 목사를 알고 있었고....
엄마라는 그 여자를 만나러 몇 번이고 갔을 때....
그 목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문득 깨달았을지 모른다.
아버지께서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던 그 시절....
그 시간이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보다....
불륜의 상대를 더 닮았던....
아들의 존재.
매일 집에서 마주쳐야 했던....
그 아들의 얼굴 속에서....
가장 아픈 상처를 쿡쿡 찔러대는 가운데.....
아버지께선 불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친자 확인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선....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다.
잡다한 우편물부터 이메일까지....
내가 모두 알려드렸으니....
통장의 씀씀이 하나까지 내가 꽉 잡고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의 삶이 더 애잔하고 아팠는지 모르겠다.
그냥 자신의 핏줄이거니 믿으시며 나를 거두고 키우셨다.
오히려 내가....
아버지 몰래....
친자 확인을 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이 검사지 결과.....
처음 내 손에 쥐어졌을 때 얼마나 떨면서 펼쳤던가.
하지만....
거기서 친자 확률 99.9퍼센트임을 확인하는 순간.....
내 마음 속에 올려 있던 커다란 바위가....
용암 속에 빠진 것처럼 스르륵 녹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버지께 감사했다.
친자도 아닐지 모르는 나를....
불륜의 상대와 닮은 나를 보면서.....
끝끝내 자신의 아들로 대해주셨던 아버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어머니라고 불리던 존재와 그 불륜의 상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일어났던 종교에 대해.....
깊은 원망을 품고 있으셨지만....
나에게 전혀 보여주지 않으시던....
아버지.
하지만....
그 긴 시간동안.....
혼자서 속으로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지.....
난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
원래 이렇게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운다는 것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우태에게 연락을 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화장실을 갔다 온 뒤....
내내 민희 자신을 보는 듯한 석진의 시선에....
핸드폰마저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꺼낼 생각을 못했다.
아니....
나중엔 그럴 생각도 할 새가 없었다.
여덟시를 지나자 손님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상을 치우고 다시 차리고....
인사하고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휙휙 흘러갔다.
언니네 손님들....
그리고....
석진씨의 지인들까지 오면서.....
장례식장은 북적북적 거렸다.
그러고 보니....
민희의 손님이라곤 교회에서 알던 지인들....
학창 시절 친구 몇몇 뿐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오지 않았다.
업무상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정말 그간 살아오면서 쌓아온 인간관계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싶었을 거다.
그 얼마 안 되는 지인들 중....
정말 민희를 깜짝 놀라게 만든 손님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영석 선배였다.
오영석.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을 선배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갑자기 들어선 그의 모습에 정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아마도....
우태 오빠를 통해 알고 온 듯 싶은데.....
정말 그가 맞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한참을 봤던 듯 싶다.
하지만....
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꽃을 올린 뒤 나와 맞절을 하는 동안....
영석 선배의 얼굴은 내내 조문을 했던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내가 더 뻣뻣해져서는....
어색함을 표내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의 자리에 먹을 것을 내놓고 잠시 앉아있는 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내려놓았다.
배웅하려고 장례식장 건물 밖까지 나왔는데....
영석 선배의 얼굴에서 약간의 변화를 봤던 거 같다.
들어가라고 손을 들어 흔들고는....
뒤돌아가는 그의 뒷모습 속에서.....
그 옛날 우태 오빠와 함께 만났을 때 모습이....
시간이 뒤로 흘러가 대학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냈다.
그때도....
휘적휘적....
우태 오빠와 자신을 두고는....
혼자 무심하게 걸어가던 그의 모습이....
세월을 뛰어 넘어 이곳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영석 선배에 대해선....
그 어떤 서운함도 없었던 듯 싶다.
그렇게 친하거나....
정겨움을 느끼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인간관계의 거리감에 있어선....
가장 변화가 없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은.....
만약....
다시 우태 오빠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땐 영석 선배와도 좀 더 거리를 좁히는 노력을 하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오빠 생각이 나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보이는 시간.
밤 11시 7분...
아니 8분으로 막 바뀌는 것을 보며....
전화를 걸까 생각하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구.....? "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