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05)
519.
민희로부터 새벽 세시 넘어서 온 전화를 받고...
여러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에 깜빡 졸았는데....
갑자기 울리는 노랫소리에 잠이 깼다.
우태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잡고 알람을 끄고 나서야...
그 정체가 어제 저장해둔 것임을 깨달았다.
아직도 민희와 함께 갔었던 여행의 잔재랄까.
일찍 일어나서 민희가 가고 싶었던 곳을 가려고 알람을 저장해두었던 것인데....
진작에 그 일정은 취소가 되었는데도 장례식장부터 계속 마음이 복잡하다 보니.....
알람 해제한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필....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괜히 알람으로 해서.....
평상시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인데 이렇게 뜻밖의 기습 공격을 당하고 나니까....
마음에 작은 파장이 퍼져나갔다.
몸도 피곤하고 머리고 무거운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모닝콜로 잠에서 강제로 일어나게 되니까...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여친이 모닝콜 해줘서 싫어졌다는 말이....
순간 마음에 훅 들어왔다.
하지만 일단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니....
더 이상 자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분명 개운하게 잠을 깬 것은 아닌데도 눕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뵙고 올까?
어차피 오늘 하루 시간도 많이 남아 있었기도 했고 이제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어제 집 안을 내내 뒤집고는 들쑤셔 놓은 덕분에 어지러운 상태이긴 했다.
말끔하게 처리하려면 다시 오늘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겠지만....
또 막상 하기 시작하면 오늘 중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청소보다 아버지 생각이 더 많은 부분 머릿속을 차지했다.
어제....
친자 확인 검사지 결과를 보고 나니....
갑자기 아버지를 뵙고 싶어졌다.
어쩌면 민희가 지금 자신의 아버지 영정 사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우태 또한 자신을 품어주었던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것도 하나의 핑계일지 모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민희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갈 것 같아서....
일부러 다른 목적지로 설정하고 무작정....
그곳을 향해 가려는 것인지도.
갈 때....
민희가 해줬다는....
유부 초밥....
들고 갈까.....?
유부초밥.
한 가지 음식으로 동시에 두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태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두 사람.
아버지가 빙긋 웃으면서 면회 왔던 기억까지 떠올라서....
더욱 빨리 가고 싶어졌다.
물론....
기일도 아니고...
명절도 아닌데 갑작스런 아들의 방문이....
편히 쉬고 계신 아버지를 놀라게 하지는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분명 싫어하는 얼굴을 보이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평생....
무거운 짐이 되었을....
못난 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전 진짜....
아버지의 아들 맞아요.
지금은 알고 계시죠?
죽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슬쩍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오톨도톨한 감각.
영정 사진으로 썼던 것이지만 잘 청소하고 닦아서 그런지 여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제 찍은 것처럼.
난데없이 영정 사진을 찍고 오셨던 날까지 떠오르면서....
마음이 촉촉이 젖어왔다.
우태는 눈을 감고 잠시 고개를 숙이며 서있다가는....
코로 뜨거운 숨을 토해낸 뒤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찬물로 씻어야 할 듯 싶었다.
그래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집을 나설 수 있을 거 같았다.
**************
누군가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거의 느껴질 듯 말 듯....
하지만 조금씩 힘이 느껴지고...
어깨가 흔들리는 게 점점 선명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손길이 난폭하거나....
강해서 불쾌한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워서....
잠결에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달까?
깨우려고 하면서도 정말 깨면 어쩌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소심하고 섬세했다.
아....
맞아....
우리 여행 중이었지....?
이렇게 자신을 깨울 사람은 우태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민희는 몽롱함에서도....
따듯한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분명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저녁 시간에 집에 나서면서도...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물론...
낮 시간에 만난 나래....
정말 오랜만에 보았던 나래와의 시간이....
도화선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되돌아 생각해볼수록....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이 괜찮은 것일까.....
하는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더 이상 고민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달리는 내내....
고속도로 위에서 느꼈던 감정.
간만에 느끼는 해방감.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
민희 자신과 우태만 타고 있는 차만 달리는 상황이...
어떻게 보면 마치 공포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풍경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기분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우태 오빠와 민희 그녀 자신을 위해....
둘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달려가는 듯한 느낌에....
오히려 조용하고 적막한 그곳이 더욱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니 함께 했던 모든 시간....
아침 일찍 올라갔던 산행도 그렇고....
보성 녹차밭에서 함께 걸었던 시간도 그렇고....
같이 먹고 같이 보고 그리고 함께 돌아다니는 내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우태와 함께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행복했다.
하루 종일...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그래도 몸은 피곤했는지....
바삐 돌아다니던 일정을 마치고 들어간 숙박 시설....
몸을 누웠던 침대는 너무 폭신했다.
그리고....
옆에는 우태가 있었다.
그의 팔....
그의 가슴....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한없이 달콤한 잠에 빠져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그래서....
이 시간이.....
행복했다.
절로 입술이 달싹이며....
중얼거렸던 단어.
" 오빠..... "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뻗는데....
갑자기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간 인식했던 공간...
인지했던 것과 다른 느낌.
싸늘한 감각에 깜짝 놀라서 눈을 뜨니...
역시나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민희의 집도 아니었다.
메마른 디자인의 방 안 모습.
넓은 공간 속....
천장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벽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곳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찾아온....
병원 장례식장임을.
그리고 그간 망각 속에 있었던...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우태와 통화하고....
장례식장 안에서 가족들과 얘기하다가....
좀 자라는 말에 들어가서 누웠던 시간.
잠이 오지 않을 거 같더니만....
언제 깜빡 졸았는지 금세 어두워진 기억들.
하지만 더 그녀의 심장을 콩딱콩딱 뛰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럼....
누가 깨운 거야.....?
날...
누가....
더더욱 놀란 마음에 몸을 일으키는데....
마침내 그녀의 시선을 가득 채우며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진이었다.
서....
설마....
들었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민희는 그 순간....
자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석진의 얼굴을 보고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언제나처럼 미소 짓고 있는...
석진의 얼굴이 그녀를 마주했다.
" 일어났어요? "
민희가 대답하기 전에 그녀가 누워있던 자리...
이불들을 개면서 말을 이었다.
" 미안해요. 좀 더 민희씨 자도록 놔두고 싶었는데.... 처형께서 깨워야 한다고.... 이젠 일어나서 아침 좀 먹여야 한다고.... 미안해요. 훗.... "
목소리도 전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민희는 휘휘 주변을 훑어보았다.
닫힌 문.
그 안....
넓은 방에는 지금 민희와 석진...
둘 밖에 없었다.
아마도 다들 일찍 일어나서 모두 나가고....
거의 해 뜰 무렵 잠들었던 자신만 남은 모양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이해도 되었다.
아마도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민희를 위해....
일부러 조용히 놔두었으리라 하는 그들의 배려도....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아니었으면 엄마가 벌써 깨워도 남았을 시간.
부랴부랴 올라온 딸을 위해 남겨두었을....
엄마의 마음.
하지만....
석진을 보자마자....
정신이 점점 맑아지면서.....
그간 미루었던 숙제를 해치워야 할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반동의 힘이었다.
오빠를 부른 것이 왜....
심장에 송곳을 찔러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껴야 할까.
왜...
깜짝 놀라야 하는 일이 되는 걸까.
마음이 삐죽거리며 만들어낸...
감정.
이젠 이 모든 것을....
지금 그가 개고 있는 이부자리처럼...
깨끗하게 정리하고 끝내야 할 시간임을 느꼈다.
어쩌면 아직 잠에서 덜 깼기 때문에....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
아니, 만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희는 지금 이 말을 하지 못하면....
또 어젯밤처럼 내내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낼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무거운 입술을 달싹였다.
" 석진씨.... "
애써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 세면도구도 챙겨왔어요. 가서 씻고 와요. 지금... 가족들 아침 먹는다고 모여 있거든요. 그럼.... "
" 석진씨.....! "
씨라고 말하는 마지막 글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석진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리고...
물끄러미 민희를 바라보는데....
그때에 맞춰서 민희는 내내 가슴 속에 품었던 말을 꺼냈다.
" 우리.... "
절로 끊어지는 말.
하지만 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우리 이만 이혼해요. "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서서히 허공으로 사라지고....
방안의 모든 것들도 점점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마치 넓은 운동장처럼 큰 방에서....
석진과 민희....
모든게 사라지고 유일하게 둘만이 또렷하게 남아서....
한명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또 한명은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