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스물한 번째 이야기 - 연연불망(戀戀不忘) (110)
524.
뜻을 알 수 없는 조소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석진은 코로 숨을 길게 내쉬며 계속 걸었다.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도 끝없는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도망...
그래 이건 도망이야.
처음에는 분명....
민희를 찾아서 나오던 길이었다.
아침에 들었던 이야기.
이혼을 말하던 민희에게서 대화의 끝을 내지 못했기에....
사람이 조금 적어진 지금....
다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민희가 왜 흔들리는지....
무엇이 그녀를 이리 움직이게 했는지....
대략 짐작은 갔다.
분명....
이것도 어머니의 입김 때문이리라.
거기에다가....
누나들....
어머니를 쏙 빼닮은...
그녀들이...
민희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해댔으리라.
사실....
정확히 어떤 얘기를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석진의 관심 밖에 있는 일이었다.
민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신경 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민희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직접 그녀를 보고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지....
남들의 말을 통해서 알아보는 건...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다만....
함께 살아왔던 세월 속에서....
경험으로 얻었던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하자면....
어머니나 누나들이 할 만한 행동은 뻔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민희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민희가 그것 때문에....
이혼을 생각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남의 말에 무심한 면도 있었고....
크게 귀 기울여 듣는 그녀도 아니었기에....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리리라 생각했다.
민희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
판단했기에...
잘 넘길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혼이라니....
민희가 이혼에 대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망치가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처음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집에서 몰래 나간 뒤....
장례식장에서 만난 것이 처음이었는데....
민희의 입에서 제대로 된 사과는 듣지 못했다.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이 일도 덮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후....
어머니와의 거리도....
아예 멀리 떼어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제주에 있는 지사로의 전근도...
생각했었다.
그래....
이제....
독립할 때가 되긴 했지....
생각은 했었지만...
결심도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인생에서 뭔가 변화를 주는 건 이런 해프닝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 결정에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홀로 서는 도전에 임할 각오도 다졌다.
그런데....
이혼?
이혼이라고???
민희가....
이런 여자였던가?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증오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민희를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옆에 있었던....
그 남자를 향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심장 가득 채워지는 이 감정에....
부글부글 끓는 느낌에....
절로 콧김에서 쏟아지는 숨결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자꾸....
못된 생각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흉기를 들고 난리쳤다는 뉴스 기사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석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는....
심호흡을 이어갔다.
길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길게 숨을 내쉬고.....
최대한 천천히 숨을 들이키면서 허파를 늘렸다.
갈비뼈가 드드득 소리를 내며....
뻣뻣해지는 가운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뒤...
다시 아주 천천히....
조금씩 숨결을 나눠서 내쉬었다.
감정이 격해져서 컨트롤이 안 되는 듯 싶으면....
학창 시절부터 해왔던 습관이었다.
스트레스가 급격히 높아지고 힘들어질 때도....
자주 했던 습관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자....
폭풍이 몰려오는 것 같던 감정도 잦아들며....
조금씩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자업자득....
그간 내가 쌓았던 모든 것을....
돌려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석진은 가늘고 떨리는 숨결을 길게 토해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정답 같았다.
어쩌면 결혼 생활을 이어온 그 시간은....
민희에 대해 믿음이라는 이름 앞에 그녀를 방치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임신에 대해서도....
석진 몰래 어머니가 만나자고 했을 것이 뻔했는데도....
어머니에게 직접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긴...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어머니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도는 했어야 할지 모른다.
아니....
민희 앞에서....
그런 발언을 보여줬으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석진 없이는 아예 만나지 말라고....
잘라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민희를 지켰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여러 번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것을 놓쳐버린....
나 자신의 카르마 일지도.
석진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짙은 회색의 구름이 가득 찬 상태에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비가 내린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그런 하늘이었다.
**************
분향실을 나오는데 뒤에서 따라 나오는 민희를....
순간 끌고 어머니가 가는 것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리는 민희를 보며 쫓아가려는데....
이번엔 내 앞을 첫째 언니가 가로막았다.
그리고 조용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 식사는 했어요? "
" 아니.... 별로 생각이... "
그러는 사이 민희와 그녀의 어머니는 저쪽 건너편....
안 보이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 걱정 말아요. 엄마도 심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을 거에요. 우리... 잠시 얘기 좀 해요. "
조용하지만 단호한 그녀의 말에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손짓으로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약간 떨어져 있는 탁자 위로...
민희의 둘째 언니가 쟁반을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선이 마주치자 특유의 미소를 빙긋 지어보이는....
그녀.
이래서....
자매인가....
콤비네이션 연계 공격을 당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내 앞에는...
편육....
떡....
몇 가지 반찬과 북어채....
견과류가 담긴 접시가 놓여지고....
바로 앉으려는 그녀를 첫째 언니가 살짝 손으로 밀치며 말렸다.
발끈하면서 뭐라고 하려는 둘째를....
말없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눈짓을 하자....
결국 입술을 삐죽거리며 바로 물러섰다.
그리곤....
어깨 한번 들썩이고는 멀리 걸음을 옮겼다.
다소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 첫째 언니....
이름이 가물가물해서 생각이 잘 나지 않는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의 이름부터 말했다.
" 서주희에요. 오랜만이네요? 참, 이름이.... "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나를 빤히 보는 모습을 보며...
나만 기억 못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안심과 함께...
고개를 절로 꾸벅 거리며 빠르게 답했다.
" 김우태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
나이는 아마 나보다 위였을 거다.
아니....
그건 확실히 기억했다.
" 술... 한잔 할래요? "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순간 땡기긴 했다.
장례식장에서 술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 네... "
그러자 바로 일어서는 첫째 언니....
주희씨는 빠른 걸음으로 냉장고로 가서는...
소주를 꺼내고 잔을 챙겨서 다시 앞에 앉았다.
내민 잔을 받자마자 바로 소주병을 기울이는 그녀.
맑고 투명한 소주가 잔을 채우고 내가 병을 받아들기 전 바로 자신의 잔까지 채웠다.
그리고 어떤 말도 없이 바로 시원스럽게 비우는 모습에 나도 따라 마셨다.
차가운 소주가 목을 따라 뱃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씁쓸한 뒷맛이 입안을 채웠다.
그때 잔을 내려놓은 주희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 불안하지는 않아요? "
" 네? "
무슨 말인가 싶어서 멀뚱거리며 주희를 바라보는데...
그녀는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 민희... 남편도 여기 있는 거 아시죠? "
아....
그런 의미였구나....
하긴 그녀들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긴 했을 거다.
나와 민희 남편의 조우는....
강력한 태풍과도 같은 일이었을 테니.
거기에다가....
막상 벌어지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것이...
더 근심이 되었으리라.
난 빠르게 답했다.
" 이미 봤습니다. "
하지만 내 대답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받아드릴 것인지는 생각 못했다.
안심하라고 답한 것인데....
정작 그것을 들은 주희의 표정은 묘한 빛을 띄웠다.
" 봤다고요? "
" 네..... "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지는 그녀.
하지만 곧 기침과 함께 표정을 가다듬고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 민희와는 언제부터 연락했어요? "
약간 차가워진 얼굴로 묻는 주희의 말에 내 대답은 조심스러워졌다.
" 얼마... 안됐습니다. "
혹시나 오래전부터 만나왔나 하는 의구심에 물었을까 하는 생각에...
얼마라는 단어를 강하게 말했던 듯 싶었다.
사실....
약간 긴장되어 정신이 없긴 했다.
" 여기도 민희가 말해서 온 건가요? "
" 네... 제가...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
사실을 말하자면 이곳에 함께 왔었지만...
그것을 말하면 같이 여행하던 일까지 말해야 했으니....
그렇게 말할 정도로 넋을 놓지는 않았다.
다만....
내 의지로 왔다는 얘기는....
꼭 하고 싶었다.
" 하아.... 그렇군요. "
약간 한숨처럼 느껴지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주희씨의 모습.
그리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주희의 표정에 나도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때였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