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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2부 15화 - 말이 되어도 좋아.


방금 전의 소란은 어디로 가고, 크레아가 사라진 지금 나와 엘피 사이에는 적막만이 맴돈다. 이제는 진짜 시작이라는 긴장감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것 보다 더 큰 이유는 지금 이곳이 너무 나도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파라리스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런데 주인님, 원래 이렇게 높은 균열은 이렇게 조용한 거야?” “글쎄… 나도 이렇게 높은 등급은 몇 번 들어 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그리고 그때는… 이렇게 평화롭다가 갑자기 뭔가 가 훅 튀어나왔었지? 그래서 그런가 이곳에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이 됐던 것이었지만, 계속해서 이런 풍경들이 반복되다 보니 팽팽하던 긴장감도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상하네…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 하염없이 펼쳐진 눈과 나무. 나는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춘 채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지만 이렇다 할 특이사항은 없다. 딱 하나. 이미 긴장이 풀릴 때로 풀린 엘피가 쪼그려 앉아 눈을 뭉치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 뭐하냐 너?” “아니 그… 추위라는 개념이 사라져서 그런가 눈도 안 차갑더라고. 신기해서 그만…” “하아…” “진짜야! 와서 만져봐. 신기하다니까? 잘 안 뭉쳐 지긴 하지만…” “…” 보란 듯이,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뭉치는 엘피. 당연한 말이지만 굉장히 신기하긴 하다. 안 차가운 눈을 신기하지 않게 여기면 남자가 아니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눈이나 뭉치고 앉아 있을 때는 아니지 않냐? 응? “그… 그렇긴 한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안 차가운 눈을 뭉쳐 보겠어. 그렇지 않아?" “하… 엘피. 아무리 지금 별일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균열 안이거든?” “알아! 아는데… 그 왜, 전쟁 중에도 노래 부르고 놀고 하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 시발 이게 맞나? 내가 원한 건 뭔가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전장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엘피랑 눈으로 소꿉장난이나 하게 생겼다. 뭔가 잔뜩 긴장했던 과거의 내가 바보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 “싫어?” “아니… 하지만 만약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때까지 아무 일도 없잖아. 이 균열은 일정 부분 까지는 안전한 균열이겠지.” “…” 그런가? 하긴, 균열 중에서도 종종 이런 균열이 있으니 엘피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긴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30분째 조용할 이유도 없겠지. 게다가 티는 안내지만 아마 꽤나 걸었으니 엘피 녀석도 힘들 것이다. 나도 존나 발 아프고 말이야. 그러니 엘피가 원하는 대로 잠깐 쉬어 가는 걸로 하자. 뭔 일이 터질거였으면 이미 터지고도 남았을 테니까 말이다. “… 그래, 그러면 잠깐 쉬었다가 가자.” “앗싸! 자 그러면 여기 와서 앉아 우리 자기~ 우리 로맨틱 하게 눈 사람이나 만들어 볼까?” “…” 어휴… 징그러. 징그러우니까 그런 애교 섞인 말 금지라는 말과 함께, 나는 내 몸 뚱아리의 한 2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 옆으로 가 앉는다. 그리고는 이 빌어먹을 힐을 벗는다. 이거 신고 있으니까 걷기도 힘들고… 무엇보다도 발 아파. “… 뭐야? 신발은 왜 벗어?” “발 아파서… 어차피 눈이랑 풀이 깔려 있으니까 딱히 발바닥이 아플 일도 없고…” 무엇보다도 추운 게 없잖아? 이런 불안정한 형태의 신발은 전투에 방해만 될 뿐 도움이 될 요소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무의식 중에 다리를 꼰 자세로 마저 남은 신발 한쪽도 벗는 것이었지만, 그 모양새가 굉장히 성적으로 문란했던 모양이다. “와… 진짜 존나 야하네 주인님?” “아니… 엘피 너는 갑자기 무슨 말이야?” “몰라서 물어? 그런 음탕한 몸으로 그런 자세. 거기다가 맨발… 흐흐흐…” “…” 돌겠네... 엘피, 나는 너를 사랑 하지만 한 번씩 이해가 안된다? 암만 내용물은 그대로라지만 어찌 됐거나 남자에서 여자로 바뀐 거잖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양성애자인 거냐고. 나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엘피를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꽤나 감동적이다. “아니? 나 양성애자 아닌데? 나는 그냥 주인님이라서 좋은 거야.” “… 나라서 좋다고?” “그래, 모습이 어떻든 나는 주인님을 평생 사랑할 거야.” 가령 나이가 들어 머리에 물이 다 빠져도, 온 피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져도 내 사랑은 변함이 없다. 나는 뜻하지 않은 뜻 밖의 한 마디에 내심 감동하는 것이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앞선 빌드업을 완전히 박살 내놓는다. “가령 말 못하는 짐승이 되어도…” “짐승? 아니… 그건 좀 너무 간 거 아닐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왕이면 듬직하고 잘 생긴 말이 좋겠네. 흐흐흐…” “…” 어이, 거기까지. 더 이상 이상한 발언으로 내 감동을 짓밟지 말아줘. 나 그 이상 들으면 엘피라는 마족에게 너무 실망할 것 같아. 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천연덕스럽게 농담이라고 말하니 다행이긴 한데… 진짜 농담이지? “아이… 당연하지. 그나저나 주인님은? 내가 나이 들어도 사랑해 줄 거지?” “당연하지. 근데 마족들은 안 늙지 않나?” “음… 그러면 내가 어디까지 변해도 사랑해 줄 거야?” “그건 어…” “…” 시발… 이런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를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환장할 노릇이다. 여기서 대답 잘 못하면 하루 종일 입이 툭 튀어나와 있을 게 뻔하거든. “뭐야. 왜 대답 안해?” “아니… 그 뭐랄까… 어디까지 변한다는 게 너무 광범위 하잖아. 그래서…” “범위를 정해 달라는 거지? 좋아! 그러면 주인님은 만약 내가 말로 변해도 사랑해 줄 거야?” “…” 말이라니… 존나 당황스럽지만 어찌 됐거나 나는 말로 변한 엘피를 떠 올려 본다. 붉은 눈동자, 그리고 화려한 광택이 흐르는 탄탄한 몸매의 백마. 당연한 말이지만 동물 애호가로서 씻기고, 쓰다듬는 것 까지는 문제없다. 어쩌면 뽀뽀 까지도 가능 할지 모르지. 그런데 그 이상은? 내가 말로 변한 엘피랑… 할 수 있나? “…” 매독의 기원은 라마. 에이즈의 기원은 원숭이… 믿을 수 없지만 인류는 두발 네발 가릴 것 없이 구멍만 보이면 넣는 미친 짓을 해 왔다. 그러니 어쩌면 내 유전자에도 그런 정신 나간 가능충의 유전자가 0.0001%나마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그렇기에 나는 나름대로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말이 된 너와 섹스까지도 할 수 있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지만, 순간 무의식 적으로 떠오른 말과 인간의 교배 현장에 말문이 턱 막힌다. “커헉…!!!” “갑자기 왜 그래 주인님?” “아… 아냐 아무것도… 미안하지만 잠깐 내게 시간을 줘.”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나와의 싸움 중이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난잡한 수간의 현장을 황급히 머릿속에서 지운다. 그리고는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말 말고 다른 짐승. 예를 들어 말이랑 비슷한 양은 어떨까? 특히나 아주 먼 옛날. 양은 양치기들의 훌륭한 파트너였다는 쓰레기 같은 정보를 어느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으니… 어쩌면 양 정도는 가능 할… 지도? “…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인님?” “엘피.” “응?” “그나저나 네가 말 하는 게 2d 기준이야 아니면 3d 기준이야?” “… 갑자기?” “어, 뭔가 현실은 허들이 높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2d 로 하자. 그게 더 재미 있을 거 같아.” “…” 2d라… 그러면 양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푹신푹신하니 말이나 소에 비해서 사이즈도 적당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귀엽잖아? 라고. 나는 이 기괴한 질문에 ‘양 정도면 가능하다.’ 라는 정신 나간 답을 하려는 것이었지만, 순간 뜻하지 않은 무언가 가 하늘을 날아 다니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는 어딘가 얼 빠진 표정으로, 그 거대한 것에 정신이 홀린 나는 엘피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방? 와… 진짜 나보고 실망할 거라니 뭐니 하더니 곤충이야? 하다 못해 같은 포유류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2d 니까 유명한 그 나방 동인지 보고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우리 주인님은 얀데레 좋아하는 구나?” “…” “주인님?” “…” 엘피의 시선이,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고. 동시에 이전까지는 없었던 거대한 그림자가 이 숲을 서서히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폭격기가 낮게 비행하며 머리위를 날아가는 듯한 압도적인 무게 감. 어느새 그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는 나와 엘피를 집어 삼키고 있었고, 나와 엘피는 수직으로 고개를 들어 그 믿을 수 없는 것을 잠시 동안 멍 하니 바라본다. “… 뭐야 저거? 나방? 설마 저거 몬스터인 거야?” “…” 말 문이 턱 막히는 광경. 나는 엘피의 대답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익숙한 한 마디가 내게 정신 차리라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 … 몬스터 확인. no. 658 프텐크로나미아. 지금부터 전투 준비 태세로 전환합니다. *** 어쩐지… 눈이 이상하게 잘 안 뭉쳐지더라니. 나는 눈이 녹은 자리에 이상한 흰색 가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엘피에게 소리치듯 말 한다. "보이지 이 가루? 혹시 모르니까 이거 눈에 가져다 대면 안 돼?” "알아 나도... 이 분진가루 저 나방한테서 떨어진 거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덩치가 저렇게 크니 이 설산을 다 덮고도 충분하겠지. 어찌됐거나 피부에 닿아도 멀쩡한 걸 보면 이걸 눈에 비비거나 입에 넣지만 않는 이상 크게 문제는 없을 듯하다. 만약 이 분진이 심각한 맹독 물질이었다면, 이미 엘피며 나며 피부가 빨갛게 부어올랐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분진에 관해서 만큼은 더 이상 신경 쓸 게 딱히 없다만, 문제라면 저 나방이었다. 사이즈야 저것 보다 큰 녀석들도 많이 보고 상대해 왔으니 그런대로 적응이 되지만, 저게 날아다니면서 공격한다고 생각하면 벌써 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이라서 말이지. (만약 저게 날아다니면… 창이라도 만들어서 던져야 하나?) 시발. 투창이라니… 내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는데, 문득 어쩌면 이제는 총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이야 신도가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둘. 그만큼 강해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 … 그건 불가능 합니다. 개인적인 견해 입니다 만 총 같이 복잡한 걸 형상화하려면 아마 신도 50명 정도는 있어야 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 50명이라니… 시발 그냥 원시인처럼 창이나 던지라고 하지 그러냐? 하… 젠장. 벌써부터 닭 쫓는 개 마냥 대가리 치켜세우고 창 던질 생각하니 뒷목이 뻐근한 기분인데, 그 순간 알트가 입을 열었다. - 굳이 창을 던지는 무식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 네. 멀리 투척 물을 던지는 거라면 꼭 총이 아니더라도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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