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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season2. 60. 소문(2)


season 2 60. 소문(2) 대한민국 최고 외과의의 연구실은 의외로 소박했다. 딱 필요한 집기들이 최소한의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책장과 책, 프린트된 종이들이 가득 채웠다. ‘컴퓨터가 없어?’ 아직 pc가 일반적이지 않을 때이기는 하지만, 의대 교수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특히 1년 전과 달리 ‘윈도우95’라는 획기적으로 편리해진 OS의 등장으로 컴맹들도 가벼운 문서 작업이 가능해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조교가 알아서 다 해주고 이놈 저놈 수발들어줄 것들이 차고 넘칠 텐데. 그런 의아함으로 방을 슬쩍 둘러보는 기찬에게 한태수가 자리를 권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어? 앉아.” “네, 고맙습니다.” 기찬과 최창섭이 소파에 나란히 앉자, 책상에서 뭔가를 들여다보던 교수가 곧 상석처럼 마련된 1인 소파에 합류했다. “연구회 신입이 있다고 해서 인사 좀 하려고 불렀다.” 어떤 사족도 붙지 않은 깔끔한 용건이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교수의 모습에 기찬은 속으로 작게 웃음을 삼켰다. ‘이때도 그 성격 그대로였구나.’ 워낙 냉정하고 치밀하고 논리적인 성격과 언행 탓에 우스갯소리로 로봇설이 유행했던 적도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한결같은 성격이라면, 그에 관한 미래의 정보를 그대로 활용해도 될 것 같았다. “연구회 지도교수님이 교수님이신 걸 문 앞에서 알았어요. 이렇게 직접 뵐 수 있을 거로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예의를 갖춘 반듯한 태도면서도 명성이나 위계에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상대의 성향애 맞춘 연출된 태도였고, 교수는 예상한 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듣던 대로 당돌한 면이 있구나.” 언뜻 지적처럼 보이는 말과 다르게 표정에는 어떤 호기심과 만족감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마치 ‘이놈 봐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기찬은 교수의 흥미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1, 2학년 중에 제 앞에서 쫄지 않는 학생은 못 봤겠지.’ 사실이었다. 조교들도 어지간해서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기 일쑤였다. 한태수가 갑질을 하거나 무서운 존재라서는 아니다. 다들 알아서 기는 것뿐이었다.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병폐.’ 한태수는 그 병폐를 정확하게 인지한 인물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사명감도, 노력할 생각도 없었다. 제 일하기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한 마당에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니,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자신의 무의식 속에 박혀있는 이상적인 태도를 보이는 어린 제자가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동한 것이다. 즉, 한태수의 눈에 들기 위한 기찬의 의도는 적중했고, 자연스럽게 다음 수순으로 옮겨갔다. “듣자 하니 주식에도 꽤 해박하다던데, 언제부터 한 거야?” 기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틀리려야 틀릴 수 없는 정확한 미래 정보를 가지고 있는 분야의 주제라면, 아낌없이 퍼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의학 분야의 질문도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이제 겨우 의대 2학년생이 한태수 정도 되는 천재를 만족시키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잘 보이려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적당한 선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 것이다. ‘마침 창섭 선배한테 들은 얘기가 있는 모양이니, 딱 그 정도 선이면 되겠지.’ 기찬은 자신만의 기준을 만든 뒤 한태수의 질문 수준이나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주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 갖고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주식 관련 대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꽤 오래, 깊게 이어졌다. 한태수가 경제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당시에도 주식에 이 정도로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게 기찬에게는 예상 밖의 호재가 됐다. “흐음.” 길었던 대화 끝에 한태수가 턱을 매만지며 흥미롭다는 얼굴로 기찬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이 녀석, 제법이네.’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넌 인마, 경제나 경영을 전공해서 애널리스트가 될 것이지, 의대는 뭐 하러 왔어? 여기 힘만 들지 돈은 못 벌어.” 기찬은 기꺼운 마음을 감추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돈 벌려고 의사 되려는 거 아닙니다.” “명예? 그럼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는 게 나아. 지금도 늦지 않았다. 고시는 전공 불문이야.” “명예 때문도 아닙니다. 그건 마치 연예인들의 인기처럼 한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허상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찬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단단한 힘이 실려있었고, 그 똑 부러진 대답에 한태수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뭐 하러 의사 하려고. 뭐, 집안에 누구 아픈 사람 있냐?” 정말 지독히 현실적인 추측이고 질문이었다. 일부러 그리 묻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기찬은 준비된 대답을 차분히 내놓았다. “인간의 생명, 그 존엄을 직접 마주해보고 싶었습니다.” 한태수의 눈빛이 한순간 반짝이는 걸 기찬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 대한 반응은 최창섭이 먼저 보였다. “교수님, 기찬이, 교수님 강의 들었습니까?” “그럴 리가.” 한태수는 한층 깊어진 눈으로 기찬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기찬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아니, 그런 척했다. ‘놀랍겠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내가.’ 사실 기찬의 대답은 미래에 한태수 교수가 쓴 여러 저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왜 의대에 진학했는지, 편한 삶을 두고도 어째서 그토록 의료계에 헌신하는지, 그에게 환자는 어쩐 의미인지. 차 한 모금을 마신 한태수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주제가 바뀌었다. “그래. 연예계 활동은 아주 접은 건가?” 아주 사소한 변화였지만, 기찬은 이 또한 놀라웠다. 그가 타인의 사적 영역에 관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었다. 즉, 기찬은 이제 한태수의 관심 영역 안에 발을 들였다는 의미였다. “네. 학기 시작 전에, 일찌감치 다 정리했습니다.” 기찬이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교수가 다시 물었다. “왜?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일 텐데.” 이번에도 기찬은 수월하게 대답했다. “제가 재능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애초에 경험 삼아 나가본 거였고요.” 그 말에는 교수가 코웃음을 쳤다. “겸손이야 뭐야? 재능이 없는데 그냥 취미로 하던 음악 실력으로 대상을 받아?” 늘 받았던 질문과 답변의 형식이었기에, 당연히 기찬은 빠져나갈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게 어디 제 능력인가요? 재영이 덕분이죠 뭐.” 언제나 누구에게든,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 김재영. 그래, 걔가 참 잘하더라.” 교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음미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기찬은 그런 교수를 가만히 살폈다. ‘나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네.’ 단지 최창섭 등,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만 알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슬쩍 궁금증이 일었다. 한태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하지만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덤비면 안 돼.’ 그가 더 다가오도록 해야 한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빨리 친분을 만들고 싶다는 조바심 때문에 관계를,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중, 최창섭의 목소리가 정신을 붙들었다. “교수님.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찬이가 정신 사납게 이것저것 건드리는 게 많기는 해도, 성적도 좋고 학과 일도 아주 빈틈없이 잘 합니다.” 한태수 교수가 주식에 이어 연예계 쪽 일을 연이어 언급하는 것을 보고, 최창섭은 우려 내지는 나무람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한태수는 마치 그런 최창섭의 말을 귀담아듣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전에 말한 프로젝트, 이 친구도 참여하는 걸로 추천하는 건가?” 기찬이 모르는 내용의 대화였다. 그래서 입다물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네, 교수님.” 간결한 대답과 함께, 최창섭의 손이 기찬의 어깨에 둘렸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 말에 한태수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증? 자네가? 허허, 처음 보는 일이로군.” 놀란 건 기찬도 마찬가지였다. ‘한태수만큼이나 타인에게는 관심이 1도 없는 냉혈한이?’ 기찬은 최창섭과 한태수를 한번씩 번갈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삼켰다. 생각보다 주요 인물들 공략을 잘한 것 같아 흡족했다. 그런 기찬의 마음에 호응이라도 하듯, 한태수가 최창섭에게 지시했다. “그러면, 다음 주 학술회, 이 친구도 같이 가지.” “네. 교수님.” 최창섭이 살짝 미소 지으며 기찬을 돌아봤다. “자세한 설명은 따로 해 줄게.” 눈치 빠른 기찬은 질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예상보다 길었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한태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다가 기찬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자네 말대로 가지고 있는 주식은 전부 처분하겠네. 그리고 그 돈으로 금을 사라고?” “네. 빛을 내서라도 금을 사시는 게 좋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기찬의 대답에 한태수가 다시 한번 웃었다. “진짜 소문대로네. 너, 이 투자 망하면 네가 책임져.” 정말 궁금했다. 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을까? ‘나에 대한 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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