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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화 301화


페레니케 301화 제17장. 오르테아 왕자는 연무장 울타리 앞에서 서판을 읽고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봤더니 어느 날 바실리오스 가 노예들이 널찍한 돌판을 어디선가 가져왔다. 그것을 잘린 나무 밑동 위에 올려두자 낮은 책상 같은 것이 됐다. 시골집에서나 볼 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악토르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가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다음날에는 돌로 된 책상 아래에 염소 가죽과 푹신하고 예쁜 방석이 깔려 있었다. 또 그 다음날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오는 쪽에 나무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늙은 노예는 왕자에게 이제 이곳에서 두루마리 책도 얼마든지 읽으실 수 있으실 것이라 했다. 악토르의 책상이 놓인 곳은 정오가 지난 오후면 햇살이 잘 드는 곳이었다. 뤼케도 북풍의 신 보레아스의 날개는 피해 가지 못했지만, 아직은 견디기 어렵지 않은 낮이다. 뤼케는 먼 옛날 키벨라르가 펠라곤을 위해 다른 지체 높은 신들로부터 몇 가지 축복을 담보 받은 땅이었다. 그 이후로는 더위도, 추위도, 언제나 견딜 수 있는 만큼만 고통스러웠다. 악토르는 서판에 고개를 박고 스승의 섬세한 글씨를 손끝으로 몇 번이고 따라 썼다. 눈에 걸리는 줄을 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무구가 땅 위로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울타리 안에서는 형제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데우칼리온은 바실리오스 장군이 뤼케로 귀환하기 전에는 왕비의 작은 궁정 안에 있는 학당과 연무장에서 온종일 수업을 받았지만, 이제는 고작 이틀에 한 번 꼴로 아침에 학당으로 가 몇 시간 수업을 받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실리오스 가에서 보내고 있었다. 바실리오스 장군이 그렇게 데우칼리온의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바실리오스 장군이 귀가하면 데우칼리온은 다시 연무장으로 갔다. 악토르는 그 무렵 바실리오스 가에서 데우칼리온과 저녁을 먹고 떠나지만, 데우칼리온은 밤까지 연무장에 남아 북풍 속에 화살을 쏘았다. 결코 밀어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 바실리오스 장군의 창 앞으로 수십 번 날아들기도 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얼마간 남아 있던 악토르가 그것을 보았다. 그 광경은 울새가 바위에 부딪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는데, 비유를 듣고는 데우칼리온이 제가 보잘것없게 들린다고 몹시 풀이 죽어서, 악토르는 ‘크뤼사오르가 바위에 부딪히는 것처럼 보였다’고 급히 정정해 주었다. 데우칼리온이 크뤼사오르를 멋있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울새든, 종달새든, 매든, 수리든, 바위에 부딪히면 가련한 신세가 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데우칼리온은 그렇게 줄곧 깊은 밤까지 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밤에는 녹초가 되어 궁정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거였다. 언제는 연무장 땅바닥에서 누워 자겠다고 우긴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랬다가 걷어차였다고 해서 악토르는 귀를 의심했다. 바실리오스 장군이? 응. 너를? 그렇다니까. 공께서 네가 왕자인 것을 기억하고는 계시겠지? 한시도 잊지 않으실걸……. 부왕의 강압적인 교육과 버거운 훈련에 이골이 난 악토르로서도 저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일과였다. 바실리오스 장군이 왕자를 두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형제는 산산조각 나듯 온종일 연무장을 굴러다녔다. 얼마 전까지는 데우칼리온의 친우들이 대련을 위해 오후면 바실리오스 가로 왔는데, 이제는 소년들이 아니라 바실리오스 장군의 부관들이 붙어 있었다. 아, 또다시 데우칼리온이 날아갔다. 그 앞에 바실리오스 공의 장교들이 신전의 기둥처럼 서서 아무도 작은 왕자를 동정하지 않는 것이 보였다. 악토르의 눈에는 커다란 어른들의 비열한 괴롭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 아래 진중한 눈썹이 심란하게 변했다. 어쩌면 스승님은 본인이 뤼케에 계시지 않는 사이에, 바실리오스 장군이 조카를 더 괴롭히지는 않을지 염려하셨던 것은 아닐까? 악토르가 제 작은 두 손에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더러 아우를 지켜보라고 했던 것이라고. 저러다 저 애가 정말로 죽지는 않나 보아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메티온이 고귀한 제자에게 그런 망이나 보는 허드렛일을 시켰던 것은 아니다. 사실 소 타소스 공이 뤼케에 있을 적에도 데우칼리온은 얼마간 그렇게 살았고, 소 타소스 공은 말로는 조카를 애틋하게 여기지만 눈으로는 바실리오스 가 연무장에 굴러다니는 것이 제 하나뿐인 조카인지 돌멩이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 일쑤였다. 잠시 나와서 걷는 것도 춥다고 부리나케 지나가버렸지. 하지만 악토르는 가끔 데우칼리온이 바닥에서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거나 엎드려 모래를 뱉어내느라 콜록거리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커다란 사내들에게 화가 났다. 이전에는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데우칼리온은 그보다 언제나 작은 동생이었지만 왕자답게 당당했으며, 항상 또래보다 몇 배는 강한 소년이었다. 물론 악토르가 여태껏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형제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부왕과 저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데우칼리온이 아무리 힘겨워해도 감히 그 순간들에 빗댈 수는 없으리라. 그때는 어쩌면 죄악감이 전부였다. 다른 누군가가 아프기 때문에 제 마음도 아픈 것은 소년에게 아직 생경한 감각이었다. 가끔은 아버지가 고통스러워 보이면 이렇게 소년의 가슴 언저리가 걱정스레 시큰거리곤 했다. 그러나 부왕은 아들에게 되도록 내색하지 않는 아버지였고, 소년의 마음을 맴도는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악토르는 그것을 조금씩 홀로 알아가고 있었다. 연무장 안에서 데우칼리온이 일어났다. 악토르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잠시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데우칼리온이 장난스레 콧잔등을 찌푸리며 별것 아니었다는 듯 거만하게 턱으로 그를 가리켰다. 악토르가 희미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메티온이 뤼케를 떠나며 그에게 시킨 것은 바실리오스 공의 감시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은 별반 대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너는 네 형제와 똑같이 시간을 보내라. 똑같이요? 그러니까, 내가 네 곁에 있을 때와 똑같이 말이야……. 메티온은 이제 왕자와 둘이 남으면 정말로 어린 제자를 대하듯 하대했다. 이방인 노예 교사들이야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스스로 지체 높은 스승들은 제자의 신분이 귀해도 으레 당연히 그렇게 했다. 이를테면 펠레우스가 데우칼리온에게 하듯이. 악토르는 그것이 몹시 기뻐서 데우칼리온에게 그날 저녁 몰래 자랑도 했다. 데우칼리온은 물론 그 기쁨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공대를 듣나 하대를 듣나 특별히 좋을 게 무엇이냐는 거였다. 어차피 저를 걷어찰 거라면. 악터, 그게 대수야? 하지만 그렇게 묻고는 곧 형제를 이해했다.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 니칸드로스. 그렇게 작은 것도 행복이 될 수 있을까? 악토르는 행복을 잘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데우칼리온은 몹시 바빴다. 악토르도 조금은 바빴다. 부왕과 부왕의 감시자들에게 검사받을 것은 없지만, 그 대신 메티온이 왕자 앞에 서판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갔기 때문이다. 언제 스승이 돌아올지 모르니 눈을 뜨면 감을 때까지 시간이 모자란 기분이었다. 와중에 형제가 같이 시간을 보낼 방법이라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각자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가 메티온이 없는 바실리오스 가의 작은 학당에서 바실리오스 부녀를 가르쳤다는 늙은 이방인 노예와 남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점심나절에 데우칼리온이 바실리오스 가로 왔고, 점심을 같이 먹고 나면 이런 오후가 됐다. 악토르는 서판 위 문장을 손끝으로 훑으며 외우다가도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데우칼리온에게 지나치게 구는 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가 보기에는 솔직히 모두가 지나쳤지만, 개중 눈에 띄는 자는 특별히 메티온에게 밀고를 할 셈이었다. 저 자들의 이름을 하나도 모르니 속으로 별명도 지었다. 생강이 데우칼리온을 다섯 번이나 던졌어. 오렌지 빛이 나는 붉은 머리를 악토르는 생강이라고 불렀고, 데우칼리온도 그 남자가 생강처럼 고약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이윽고 서판을 보는 둥 마는 둥, 다시 울타리 너머 연무장 안으로 소년의 시선이 박혀 있다 이내 가물거렸다. 해 아래 구름이 걷힌 것처럼 소년의 청회색 눈동자 위로 문득 빛이 들었다. 메티온이 보였다. 마을 어귀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개처럼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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