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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화 383화


페레니케 383화 “파이라 님,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저 기다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무슨 수로 신경 쓰지 않겠는가? 이노의 뜻은 분명했다. 파이라는 지금 이곳에 이리 서 있어서는 안 됐다. 왕자의 시종과 하녀가 곤란한 눈으로 서로를 흘끔거렸다. 아까 왕자의 늙은 하녀가 한참이나 라브렌티오스 가 아가씨와 실랑이를 벌이며 곤욕을 당하는 것을 본 시종은 끝내 그녀를 외면하지 못하고 구해주기 위해 왔지만, 여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참이었다. 파이라는 얼마 전 왕명에 의해 라브렌티오스 가로 갑자기 돌아갔다. 그것을 ‘갑자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며칠에 한 번 꼴로 그녀의 방에 새로운 가구를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브렌티오스 가로의 귀환은 쫓겨나는 것에 가까웠으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고, 파이라는 왕의 눈 밖에 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가 왕에게 하사 받은 귀물들은 고스란히 수레에 실려 라브렌티오스로 갔다. 그때 왕자의 처소에서 차출되었던 어린 하녀들도 선물처럼 딸려갔다. 일개 개인에게 왕궁의 노예를 하사하는 것은 몹시 특별한 일이었다. 세간이 그것을 무어라 부르겠는가? 왕의 총애였다.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는 애틋함이었다. 높으신 분의 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무엇도 속단할 수 없었다. 파이라가 언제 왕궁으로 다시 돌아올 줄 알고 그녀의 미움을 사겠는가? 시종이 소녀를 달래듯 다시 불렀다. “파이라 님. 다음에 다시 오십시오.” “아까 안에 들어갔을 때, 정말로 전하께 내가 와 있는 것을 전했느냐?” 그녀가 시종의 권유를 무시하고 늙은 하녀에게 물었다. 어조가 짐짓 간곡해졌다. 하녀는 이노의 심복이었다.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이 곧 이노의 뜻이라 보아도 좋았다. 처음에 어쩔 줄 모르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다른 어린 하녀들을 물린 것도 그녀였다. 보는 눈이 많으면 좋을 것 하나 없다는 듯이. “전하께서는 아직 수업 중이십니다.”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아까는 왜 왕자께 전한 척하였느냐? 전하께서 알고도 나를 보지 않으시려는 것처럼!” “파이라 님.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소녀가 간신히 억누른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이노 님에게 날 보러 오라고 해.” “아까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이노 님은 왕성 밖으로 출타하셨습니다.” “이노 님도 계시지 않은데 네 멋대로 이리 하는 것이라고? 고작 여종 따위가, 이제는 내가 폐하의 눈 밖에 났다고 생각해 이리 멋대로 날 박대하는 것이다?” “파이라 님. 오늘은 돌아가시는 편이 낫습니다.” “너희가 날 안에 들이지도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날 이리 뙤약볕에 세워두고, 벌 받게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누가 감히 아가씨께 벌을 주겠습니까?” 시종이 여종 앞을 막아서며 나직이 되물었다. 남자의 그 이성적인 태도가 도리어 화살이 됐다. 파이라는 거의 반나절이나 기를 쓰고 지킨 정숙한 얼굴을 잃었다. “이게 벌이 아니면 무엇이 벌이야! 나는 전하를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단지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인데, 앉아서 기다릴 곳도, 마실 물 한 잔도 내어주지 않는 연유가 무엇이냐고!” 그녀는 아직 공식적으로 왕궁에 드나들 권리를 빼앗기지 않았고, 라브렌티오스 가 자제들과 같이 왕자를 알현할 자격도 갖추었다. 왕이 아직 그녀를 폴릭세네와 악토르의 귀중한 혈족으로 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파이라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저는 이유도 모르고 밀려났다. 그러니 이유라도 알고자 한 것이 전부였다. 제가 알지 못할 누명을 썼다면 누명을 벗어야 했다. 누군가 왕 앞에 저를 모함했다면 알아야 했다. 실수를 했다면 고쳐야 했다. 그런데 라브렌티오스 공조차 이유를 모른다 했다. 그는 그녀에게 고작 당분간 가내에서 자중하라는 충고만 남겼을 뿐이었다. 이유를 모른다면서 자중하라고? 모를 리 없다. 그저 알려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브렌티오스 공도. 이노도. 왕의 시종들과 눈앞의 이 아랫것들도. 이방인들의 땅에서, 노역하는 아비 아래 자란 무식한 계집애에게는……. 파이라가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틀어쥐었다. 죽은 아비를 고국에 묻어주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한 영웅 같은 소녀가 있다고 백성들이 떠들 적에는 자랑스레 그녀를 끌고 다녔으면서, 이제는 그녀를 곤욕 속에 홀로 내버려 두었다. ‘이들이 타소스의 원수보다 나을 것은 뭐지?’ 심지어 저 벽 너머에는, 소 타소스 공이 왕자의 스승으로 앉아 있었다. 라브렌티오스의 마지막 조각인 저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세워두고, 타소스의 아들은 그토록 귀하게 대우하다니. 파이라는 악토르가 처음으로 미워졌다. 페플로스 축일에 먼 발치에서 왕자를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맹목적인 애정이 그녀를 비웃었다. ‘왕자의 뜻이 아닐 거야. 어쩌면 부왕의 눈치를 보고 계실지 몰라.’ 내가 온 것을 정말로 모르실 거야. 내가 이리 고생하는 것도 모르실 거야. 안다면 나를 이리 두지 않으셨을 거야. 사실은, 지금쯤 나를 크게 오해하고 계실지도 몰라. 그래. 그는 소 타소스 공의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까……. 파도처럼 생각이 밀려들었다. 라브렌티오스 공도 언젠가 제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메티온 타소스가 왕자를 제 입맛대로 길들이고 있어. 공회 사람들도 슬슬 왕자께서 소 타소스 공에게 벌써 세뇌 당하신 것은 아닌가 불안해 하고 있다고…….’ 폐하께선 전하를 언제까지 저리 적진에 방치하실 셈이지? 데모스가 그녀의 기억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왕자가 미웠다. 그러나 메티온 타소스가 그를 세뇌시켰다. 그렇다면 악토르의 잘못이 아니었다. 파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다른 짐승의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그 순간 거짓말처럼 멀찍이 뜰을 가로질러 회랑으로 들어서는 인영이 보였다. 아. 파이라가 입 안으로 나직한 감탄을 삼켰다.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을 탐스럽게 늘어뜨린 여종이었다. 그리 낯설지 않지만, 분명 이곳에 속한 이는 아니었다. 파이라가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을 번뜩이며 여종의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했다. 메티온 타소스의 그 여종. 예전에 저 계집을 두고 소 타소스 공의 침방 노예일 것이라고 다른 하녀들이 떠들던 것을 그녀도 몰래 엿들은 적이 있었다. 유독 생김새가 아름다워 눈에 걸리듯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저기 가는 저 손님은?” 돌연 차분해진 소녀의 낯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시종과 하녀가 여종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흘끗 돌아보았다. “너희의 허락 따위는 구하지도 않고 왕자의 처소에 들어가는구나. 나와는 달리 말이야.” “저것은 소 타소스 공의 노예입니다.” “손님으로서 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 위해 왔을 뿐이지요. 제 주인을 따라 왕성에 든 겁니다.” “그렇다면 소 타소스 공의 노예가 나보다 처지가 좋은 것이로구나.” “…….” “나는 여기에 몇 시간째 서 있는데, 저 타소스 노예 계집은 제 집 마당처럼 왕자의 회랑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야.” 스스로 지껄이면 지껄일수록 머리가 격앙되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살의가 치밀었다. 그러나 말씨는 그녀가 분노한 만큼 도리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표정은 동요 없이 차분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가벼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는 타소스의 노예만도 못한 계집이야. 그렇지?” 하녀가 시종을 보았다. 하필이면 소 타소스 공의 노예가 쉬이 들어가는 꼴을 보았으니, 더는 진입마저 막을 명분이 없었다. 위병을 불러 왕자의 친족을 죄인처럼 끌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주인에게 망신을 끼치는 일이니. 늙은 하녀가 결국 천천히 옆으로 비켜 섰다. 파이라가 비스듬히 웃었다. “시장하구나. 주방으로 가서 요기를 해야겠어.” 그저 왕자께서 상대하지 않으시면 됐다. 하녀가 주방으로 안내하듯, 혹은 주방이 아닌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빠른 걸음으로 파이라를 앞서가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파이라가 똑같은 미소로 그녀를 내쫓았다. “네 낯짝을 앞에 두고 음식을 삼키면 속이 역할 듯해.” 그래도 거리를 두고 조금씩 따라오던 하녀가 이노의 급한 부름이라도 받은 모양인지 중도에 다른 길로 샜다. 이제는 파이라가 주방 외에는 더 갈 곳이 없는 길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 늙은 하녀가 제 뒤를 쫓든 말든 파이라는 상관하지 않았다. 한낱 노예일 뿐이지 않나? 저렇게나 아름다운 여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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