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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화 388화


페레니케 388화 “니케,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라고요? 메티온 타소스. 손해 볼 것은 무엇도 없어요. 어차피 숙부에게 남은 선택지는 치유소의 신관 두엇과, 내 덕분에 뤼케에 발이 묶여 있던 어린 제사장 하나죠.” “…….” “내가 못 고치면 그들에게 넘겨요. 그들은 모두 뤼케에 있으니 대단한 시간 낭비도 아닐 거예요.” 왕자들은 그들의 숙부 혹은 스승이 결국 소녀를 지나쳐 가버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얼마간 페레니케를 내려다보던 메티온은 결국 그녀의 말에 따랐다. 노예를 안아 든 소 타소스 공이 왕자의 처소를 나가는 것을 노예들이 어쩔 줄 모르고 환송했다. 이윽고 왕자들과 바실리오스 장군의 딸도 그곳을 떠났다. 뜰까지 따라 나온 이노가 창백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이내 냉랭하게 몸을 돌리며 시종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여전히 왕성으로 귀환하지 않으셨다더냐?” “예. 이제 왕비 전하와 함께 대성소에서 신관들을 접견 중이시라 합니다. 차라리 성소 안에 들어가 아뢰게 할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일개 노예의 일이다. 폐하께 왕궁의 중대사처럼 다급히 일러바치는 것도 우습지.” “물론 그렇지요.” “어차피 귀환하시면 폐하께서도 차차 이 일을 아시게 될 테고, 파이라 라브렌티오스에게는 그 편이 낫다.” 파이라 라브렌티오스에게 그 편이 낫다고? 뭉개진 두 손을 들고 악토르의 지붕 아래에서 고립된 파이라를 곧장 건져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왕의 한 마디뿐이었다. 왕이 차차, 늦게 이 일을 알게 되는 것이 무슨 수로 파이라에게 이롭겠는가? 이것을 ‘노예의 일’이라 부르는 것은 사건의 축소나 다를 바 없었다. 아직도 파이라 라브렌티오스가 저 안쪽에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노예의 일’이겠는가? 그녀는 이 일을 일부러 작은 일처럼 대하고 있었다. 큰일은 오래도록 숨기기가 어려우니까. “이노 님. 정말로 파이라 님께 신관을 불러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혼인을 앞두고 큰 흉이 질 텐데, 만일 왕자님이 잠시 홧김에 말씀하신 것이면…….” “우리는 단지 폐하의 뜻을 기다릴 뿐이야. 신관을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 “아가씨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지. 왕께서 저를 구하시지 못하는 동안, 홀로 많은 것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메티온 숙부. 제 팔이 베였을 땐 다섯 번쯤 토하지 않았어요? 징그럽다고 불평하고요.” “정확히 말해라. 베인 게 아니라 네가 네 팔을 잘라먹은 것이지.” “……팔을 잘라?” “팔을 자른 게 아니라 그냥 살이 좀 잘린 거였어요. 별것 아니죠.”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살이 잘린 건 괜찮은 거지? 페레니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악토르의 낯은 창백해졌다. 데우칼리온은 이제 침상 옆에서 페레니케의 조수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메티온 타소스. 가련하고 비위 약한 남자였는데.” 메티온은 공기를 가볍게 하는 아이의 놀림에도 알키오네를 얼마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이내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키오네의 다리를 묶고 그녀의 무릎을 한 번 움켜쥔 뒤 손을 떼어냈다. 이윽고 데우칼리온의 유모가 울상을 하고 알키오네의 허벅지 위에 앉아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눌렀다. 이 마음씨 착한 여인은 알키오네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해서, 페레니케가 거꾸로 앉게 해야 했다. “숙부가 보기 힘들 거예요. 정말로 괜찮겠어요?” “내 비위는 괜찮아.” “비위 말고, 마음이요.” 메티온이 실소했다. 여태껏 그의 누이와 이 노예 외에는, 아무도 그에게 마음의 안부 따위를 물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저 어린 여자애가 제게 겨우 그런 것을 묻는 것이다. 마음. 그토록 사소한 것을. “나도 보지 못할 것을 누가 보게 할까. 알키오네는 알키오네야. 어떻게 있어도.” “…….” “이 애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내가 보여야 해.” 그가 알키오네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받치고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놓았다. “데우칼리온. 너는 침상 안쪽으로 올라가서 알키오네의 팔을 잡아.” 왕자는 거리낌 없이 침상을 타고 올라가 알키오네의 오른팔을 눌렀다. 페레니케가 알키오네의 몸 위로 올라타며 악토르를 흘끗 돌아보았다. “뭐해요? 오라버니.” “아.” “손이 두 개나 있으면서 놀고 있을 건가요?” 데우칼리온의 처소에서도 방 안에 들인 이는 거의 없었다. 악토르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으로 올라와 반대편 팔을 붙잡았다. 그것으로 알키오네의 사지가 완전히 고정되었다. 메티온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 아래 빗장뼈 사이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페레니케가 알키오네의 이마를 덮으며 알테아를 크게 틔웠다. 빛 아래 메티온의 알테아가 잠재웠던 눈이 번쩍 뜨이고, 고통에 찬 두 눈이 페레니케와 메티온을 올려다보았다. 선명한 빛을 띤 금갈색 눈동자가 하나, 그리고 벌겋게 살이 내려앉은 눈꺼풀이 가까스로 반쯤 드러낸 희뿌연 눈동자가 하나. 메티온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하나도 잊지 않으려는 듯이. “메, 티온, 님…….” “그래. 내가 여기 있어.”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피부가 지글거리며 끓는 물처럼 움직였다. 짐승이 울부짖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물로 축축한 뺨에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알키오네, 울면 안 돼. 눈물이 닿으면 더 아파.” 울부짖는 여자 위에 엎드린 페레니케가 냉담하게 속삭였다. 그 말에 그녀의 등 뒤에서 알키오네의 다리를 누르며 울고 있던 데우칼리온의 유모가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았다. “네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어.” 알키오네가 본능적으로 더 큰 고통의 근원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충격을 받기 직전에 손을 떼어낸 페레니케는 잠시 알테아를 꺼트렸다. 그녀의 손이 닿았던 면에 드문드문 새 살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은 이전보다 더 짙고 참혹했다. 페레니케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가늠하는 눈길을 내렸다. “절대로 내가 흔들리면 안 돼요.” 다시 환한 빛이 온 사위를 밝히며 일어났다가, 알키오네의 이마로 쏟아지듯 스며들었다. 데우칼리온과 악토르의 손이 동시에 알키오네의 양 어깨를 잡아 누르고, 메티온은 그녀의 빗장뼈 사이를 누르던 손을 움직여 턱 아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짓눌렀다. 알키오네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왕자들에게 짓눌린 팔 아래 손으로 무엇이든 붙잡아 움켜쥐려는 듯 침상을 긁어내렸다. 노예의 두 눈이 눈 앞의 소녀를 지나 메티온을 원망스레 향했다. 그러나 메티온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메티온의 차가운 두 손이 그녀의 목을 더 세게 누르고, 비명을 내지르는 턱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딱딱하게 굳은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몸 위로 정신이 잠시 깨어나 그의 눈물을 인지했다. 알키오네는 그제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화롯가에서 말린 노간주 나무 열매를 고르며 주인을 위해 끓이던 물이 제 머리 위로 쏟아지던 광경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불에 타는 듯한 이 고통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성을 다시 끔찍한 고통이 뒤덮었다. “아아아악!” 다리는 바위에 짓눌린 듯했고 두 팔은 어딘가에 묶인 듯했다. 알키오네는 제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다 알지 못했다. 이마를 거의 말간 빛으로 다 되돌린 페레니케가 진흙에 뒤엉긴 것처럼 벌건 살에 머리카락이 징그럽게 엉긴 정수리로 손을 옮겼다. 짓눌린 채로 미약한 발버둥을 치던 알키오네가 새로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했다. “페레니케.”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페레니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들이 점점이 아래로 떨어져 알키오네의 가슴을 적셨다. 빛이 불처럼 알키오네의 살을 살라먹는 듯했다. 그러나 빛의 불길이 지나고 난 자리는 거짓말처럼 깨끗해졌다. 뤼케의 치유소에서 내로라 하는 고위 신관도 이렇듯 빠르게 말간 살갗을 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왕자들은 빛에 압도됐다. 신성한 손끝에 온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에브도키아 땅 위에서 가장 정결하고 신성한 빛이었다. 펠라곤의 여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소년들의 눈에 경외감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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