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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화


7화 나는 필기구와 시험지를 학생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시험지와 나를 번갈아 보던 아가씨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난처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시험지를 바라보려 들지도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항하려는 걸까? 처음부터 내 기를 꺽어 놓으려고?' 하지만 내가 자신의 할머니와 친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하는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달고 무시하고 싸움을 걸던 자작가 여식의 태도와는 달리 아나 아가씨는 심하게 주눅이 들어 보였다. 아나 아가씨는 도움을 청하듯 나를 바라보다 시험지로 시선을 돌려 종이 한구석을 만지작거렸다. “선생님, 저는⋯⋯ 저는 이 문제를 못 풀어요.” “왜죠? 아직 문제를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 “저는⋯⋯.” 아나 아가씨는 아랫입술을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꼭 깨물었다. “아직 글을 못 읽어서요, 선생님.” 소녀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 왜? 어떻게?'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잠시 얼어 있었다. 의아함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열세 살이라며?' 열세 살이라면 처음 마엘 도련님을 만났을 때 나이다. 그때 마엘 도련님은 내가 놀랄 정도로 높은 지식수준을 자랑하셨다. 물론 도련님이 특이한 경우긴 하나⋯⋯ 글도 못 읽는다고? '뭔가 이상한데.' 물을 처지가 못 되어 그냥 지나갔다만 되짚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현 공작 각하에게 불과 얼마 전까지 형이 있었다는 것. 귀족 가문은 보통 맏이에게 작위와 영지를 몰아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대 가지 않아 귀족 작위를 가진 자는 너무나 많아지는 반면 영지는 쪼개질 대로 쪼개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이 사생아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버지가 인정하는 자식은 적법한 자식들과 함께 고급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공작 정도가 되면 이복형제에게 중하급 귀족 작위를 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작위 계승권과 상속권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달라도 형제끼리는 친할 수 있는 법이니까. '원수 같은 형의 자식을 양녀로 거두진 않았겠지. 그것도 가정 교사를 직접 물색까지 해 가면서.' 하지만 이 모든 전제가 맞다면 공작저의 여식으로 거둬지기 전에도 교육을 받았을 게 아닌가? 그런데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그럼⋯⋯ 글을 아예 못 읽는다는 거죠? 단어 하나도?” 내 말에 눈앞의 소녀는 더더욱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가장 좋아하는 건 뭐죠?” “네?” 나는 아나 아가씨의 바로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소녀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럼 오늘 오전 시간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 볼까 싶어서요. 저는 아나 학생이 뭘 좋아하는지 궁금한데, 제게 말해 줄 수 있나요? 그럼 저도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려 줄게요.” 그 말에 아나 아가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는⋯⋯ 저는⋯⋯ 잔느 선생님.” “네?” “선생님, 제가 하는 말을 비밀로 해 주실 수 있나요?” “좋아요. 걱정 말고 말해 봐요. 어차피 나는 여기에 친구도 없답니다.” 그 말에 갑자기 학생의 얼굴이 햇살처럼 밝아졌다. “⋯⋯저도 그래요. 선생님, 저는요.” 학생의 몸이 내게 폭 안길 듯이 가까워졌다. 아나 아가씨는 그 작은 손을 내 어깨에 얹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 내 귀에 속살거렸다. “저는 버터를 만드는 게 정말 좋아요. 우유가 덩어리질 때까지 휘젓는 건 힘들지만 버터를 만드는 날엔 버터밀크를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거든요. 선생님은 버터밀크를 드셔 보셨나요? 시큼하지만 정말 맛있어요.” '버터밀크? 버터밀크라고, 지금?' 버터밀크는 버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였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귀족가의 여식이라면 당연히 버터밀크의 존재도, 버터를 만드는 법도 몰라야 하는 데⋯⋯. 나는 지금 들은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 ❖ 발드르 드 스카디 공작은 같은 귀족이면서도, 귀족 집단에게 적대감과 편견을 가진 인물이었다. 거만한 데다 사치스럽고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편견 말이다. 수도 프랑에 서 '왕명'이랍시고 정치적 투쟁에서 진 귀족들을 유배 보내오면서 그 편견은 더 강화 되었는데, 정작 죄인이 되어 스카디령으로 유배 온 귀족들은 대귀족인 그보다 더 신분이 낮으면서도 뿌리가 야만족이라며 그를 은근히 무시해 왔다. 하지만 그도 공작 자리에 오른 초기엔 유배 귀족들의 사정을 고려하고 자비를 베풀었다. 그가 베푼 자비란 귀족들에게 쉽고 간단한 업무를 맡기고 그 대가로 저택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감사가 아니라 경악과 비난이었다. '어떻게 나더러 일을 하란 말이오!' 자신이 다시 복권되기만 하면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으름장에다, 같은 귀족에게 일을 시키다니 역시 진정한 귀족이 아니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 설마 유배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호의호식하길 바랐나?' 지긋지긋해진 발드르는 불평불만을 하는 이들에게 국경 지대의 요새를 짓는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뒤늦게나마 그에게 굽혀 오는 귀족들에게는 토지 조사서를 작성하고 장부를 베껴 쓰는 일을 시켰고. 그런데 왜 이번에 유배 온 여자에겐 더 나은 혜택을 주었냐 하면, 얼굴도 본 적 없는 왕의 사생아가 보낸 간곡한 편지 때문은 절대 아니고 그에게 갑자기 양녀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쩌다 조카를 양녀로 거두게 되었는지 설명하자면 길다. 아무튼 발드르는 조카를 공작저의 일원에 어울리는 아이로 키우고자 마음먹었다. 자신이 입양한 이상 아이는 어쩌면 나중에 한 나라의 왕비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막상 아이를 저택으로 데려와 보니 큰 문제가 발견되었다. 아이는 글을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발드르는 급히 가정 교사를 구해 보았지만 고용된 이들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중 몇몇은 아이가 난독증이며 백치라는 악담에 가까운 말까지 퍼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떨어지듯 누군가 그의 영지로 유배 오게 된 것이다. 사생아긴 하나 왕자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가정 교사가. '드디어! 쓸 만한 인간을 보내 주는군.' 무슨 죄로 유배를 왔나 싶어 그는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은 잔느 드 툴루즈, 죄목은 불온사상 전파였다. '불온사상?' 그 정도야 공작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온사상이 뭐 어쨌단 말인가? '살인, 폭행, 방화, 강도, 절도, 영아 살해도 아니지 않은가?' 이곳엔 정치범 외에 당장 사형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죄수들도 버려졌고, 그럼 발드르는 그 죄수들을 요새를 축조하는 데 보내어 죽기 직전까지 노역을 시켰다. 아무튼, 유배인보다 앞서 도착한, 가정 교사의 제자이자 왕의 정부 소생인 왕자의 편지에는 그녀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는지, 어쩌다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소상히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어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정치 싸움에 휘말린 흔한 경우였다. '사생아여도 왕자의 가정 교사로 일했으니 수준 미달은 아니겠지. 거만하기야 이를 데 없겠으나 콧대는 내가 눌러 주면 되는 일이고. 유배인이라 오히려 좋군,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을 테니.' 어쨌든 그는 잔느란 여자가 유배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그러나 잔느는 도착 예정 날짜에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닷새, 보름 그리고 달이 지나가도록.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산적 떼에게라도 당한 건가 싶어 사람을 보내 샅샅이 뒤진 결과, 여자는 며칠 전에 스카디령에 도착은 했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 회복될 때까지 허름한 여관에 묵고 있었다. 발드르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직접 여관에 행차했다. 그렇게 잔느를 처음 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젊군?' 왕자의 가정 교사는 대개 나이 든 노부인이 맡기 마련이었는데 도착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땟국물에 전 꾀죄죄한 몰골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비쩍 마른 꼴을 보고 그는 화가 치밀었다. '감히 내 가정 교사를 고문해?' 본인은 아직 동의도 안 했건만 발드르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미 양녀의 가정 교사였다. 그는 그녀가 유배 오기 전 당연히 고문당한 줄 알았다. 하지만 유배인을 간호하느라 일정에 차질을 빚은 호송관의 얘기를 들어 보고 난 후 그는 이마를 짚었다.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닌데 저 꼴이 되어 앓아누웠다고?'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온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 저 상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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