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21화
21화
그러더니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동상이요?”
“동상에 대해 들어 본 적 없소?”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밖에서 걸을 때 손이 저리고 따갑다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끼지 못했소? 그 상태로 계속 있으면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검어지면서 살이 죽게 되오. 그게 바로 동상이고 심하면 괴사한 부분을 잘라 내야 하지.”
“손가락을 잃어요?”
밖에 나갔을 뿐인데 손가락을?
“손가락뿐이오? 추위에 노출된 부분은 다 잃게 되오. 그대의 코 같은 곳 말이오.”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눈보라가 그쳤다고 추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오. 이곳 사람들이 외출을 하지 않는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다시는 밖에 나가지 마시오. 피치 못하게 밖에 나가더라도 오래 머물지 말고, 들어와선 더운물로 몸을 데우고, 정 여의치 않으면 따뜻한 물이라도 드시오! 혹여나 밖에 노출된 금속은 절대로! 절대로 잡지 말고!”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게 바로 목욕을 하란 이유였구나!'
그가 나더러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를, 상황을 파악한 나는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속사포처럼 쏘아붙이고 나서 그는 내게 물었다.
“그런데 밖에는 왜 나간 거요?”
“⋯⋯.”
“또 나갔으면 할 일 마치고 돌아갈 것이지, 왜 그렇게 오래 서성거렸고?”
나는 일단 침묵으로 얼버무리려 해 보았지만 날카로운 눈빛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이유를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살이 좀⋯⋯ 꼈습니다.”
그는 내 말을 전혀 이해 못 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강아지가 그러고 있으면 귀엽겠지만 공작이 그러니 전혀 귀엽지 않았다.
“저, 그게 겨우내 앉아서 먹다 보니⋯⋯ 살이 쪄서 옷이 맞지 않는 바람에⋯⋯ 좀 그 살을 빼 보려고⋯⋯ 눈도 멎었겠다, 산책을 했습니다⋯⋯.”
공작은 내 부연 설명에 양손을 허리에 얹고 입을 벌렸다. 그러더니 나를 위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살이 쪘다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살이 쪄서, 짐승도 겨울을 나기 위해 살을 찌우는데⋯⋯ 살을 뺀다고?”
세상에 이런 멍청이를 다 본다 싶은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허, 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고 나는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졌다. 나를 '저런 등신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자가 나를 안을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했다니.
“그게 코나 손가락을 걸 만한 일은 아니지 않소?”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심지어 첫 식사 때는 공작 앞에서 구토를 했고, 시간이 좀 흘러서는 치마폭에 사과를 주워 담다 걸리기까지 했다.
'정말⋯⋯ 정말 내 착각을 말로 안 꺼내서 다행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집무실을 방문했는지 공작이 몰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려면 지금보다도 더 많이 살을 찌워야 할 거요. 살은 열 손실을 억제하니 말이오. 더군다나 겨울은 병에 걸리기 쉬운 계절이고 병에 걸리면 살 따위야 금방 내리게 마련이오.”
“예.”
“그대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 모르겠지. 봄이 올 때까지 앞뜰 산책은 금지요. 뭐, 정살을 빼고 싶다면⋯⋯ 말을 타시오. 내 이러라고 가을부터 말을 내주지 않았소? 설마 말타기에 싫증이 나 그런 기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겠지?”
'내가 얼마나 더 배려해 줘야 하는 거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부끄러움에 말도 나오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수치심에 심장이 두근대다 못 해 터질 것 같았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 보시오.”
돌이켜 보면 나는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 없을 정도로 멍청한 게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금지령을 어기고 그가 우려하던 바를 모두 실행하게 되었으니. 만약 내가 미래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옷을 다 새로 맞추는 한이 있더라도 살을 찌웠을 것이다. 아니, 금지령을 어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공작 각하의 경고이자 조언을 잘 받아들여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살을 빼자고 코나 손가락을 잃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럼 살은 어떻게 했는가? 나는 식사를 조금씩 줄였고 브륄을 더 오래 탔다. 다행히 금방 찐 살은 또 금방 빠져 약 2주 만에 숨만 쉬어도 터질 것 같던 옷에 몸이 잘 들어가게 되었다.
'휴.'
그럼 내가 왜 다시 외출하게 되었는가. 그 일이 있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눈보라가 멈추고 여전히 춥긴 하지만 아주 청명한 날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햇볕이 내리쬐고 채찍처럼 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들자 하인들은 복도에 난 창을 가렸던 무겁고 두꺼운 태피스트리를 일제히 내리고 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작했다. 들이치는 바람은 쌀쌀했지만 묵직하게 고여 있던 공기가 비질하듯 쓸려 갔고, 빈자리에 햇살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차갑지만 좋다.'
나도 폐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몸을 떨며 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에 소복하게 쌓인 흰 눈을 수십 명의 하인들이 넉가래로 부지런히 쓸어 내는 것이 보였다. 수업 내내 아나는 집중하지 못했고, 틈만 나면 창문 가까이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선생님! 저는 수업이 끝나면 아젠트 호수에 가서 스케이트를 탈 거예요. 선생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아젠트 호수? 밖에 나가면 동상에 걸릴 텐데요.”
숲 초입에 큰 호수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호수 이름이 아젠트인지는 몰랐다. 가을쯤에 브륄을 타고 호숫가에 가 봤을 때도, 물을 마시던 수사슴들이 경계하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길 포기했다. 브륄보다 더 큰 몸집에 거대한 뿔, 거기에 받히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아나가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매달려 왔다.
“괜찮아요! 선생님, 꽁꽁 싸매고 나가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예요! 바람도 불지 않고 해도 났고, 이런 때야말로 밖에 나가야 하는걸요! 집 안에만 박혀 있으면 오히려 병에 걸릴 거예요!”
“아나는 이런 때 밖에 나가 봤나요?”
“그럼요, 선생님! 집 근처 강가에서 실컷 놀다 저녁에 밥 먹으러 들어갔는걸요!”
“으음.”
'그런가. 눈이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 오래 머물러도 괜찮은가.'
나는 잘 모르지만 현지인인 아나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겠지 싶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혼자 갈 건가요? 보모는요?”
“보모 언니는 늘 바빠요.”
'바쁘다고? 할 일이 아나와 놀아 주는 것뿐일 텐데?'
아나의 말에 나는 걱정이 되었다. 호숫가는 사슴 서식지와도 겹치는 것 같았고, 혼자 갔다가 산돼지나 늑대 같은 야생동물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말은 타고 갈 거죠?”
“그럼요, 너무 멀잖아요!”
“으음.”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선생님, 같이 가요! 제가 스케이트 타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하지만 난 스케이트가 없는걸요.”
“그럼 미끄럼만 타면 되죠! 언 호수는 미끄러워서 신발도 충분히 잘 미끄러져요!”
“으음.”
“정말 재미있어요! 선생님!”
저렇게 좋아하는데 아나를 무작정 막기가 망설여졌다. 나만 해도 몸이 옥죄고 좀이 쑤시니까. 아나의 말을 들어 보니 보모도 같이 가 줄 것 같진 않은데, 내가 보모에게 동행해 달라 명령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혼자 보내기엔 너무 걱정이 되는데.'
“그럼, 약속해요. 너무 오래 있진 않겠다고, 나는 따뜻한 곳에서 와서 추위에 약하거든요.”
“네!”
그리고 나는 이 결정을 얼마 뒤 미친 듯이 후회하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 어린아이에게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안내하게 한 것을. 나는 한 치 앞을 모르고 아나와 함께 길을 나섰다.
아나의 말은 짙은 밤색 조랑말이었는데 아나는 마치 조랑말과 한 몸인 것처럼 말을 탔다.
'와⋯⋯!'
브륄을 타고 달리며 나는 그간 너무 답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람이 섬찟할 정도로 차긴 했지만 햇살이 따스해 생각보다 춥진 않았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치 내가 달리는 것처럼.
나는 입을 벌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검은 벨벳 캡 밑으로 머리칼이 나부꼈다. 실내 마장에서 나와 오랜만에 밖에 나온 브륄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브륄은 전혀 추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긴 털이 추위를 막아 주는 모양이었다.
걸어갔으면 한참이나 걸렸겠지만 말을 타니 금방이었다. 우리는 곧 호숫가에 도착했다. 호수는 꽝꽝 얼어 은색 쟁반 같았고, 표면은 햇살을 튕겨 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오는 길도 그러했지만 호숫가엔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브륄의 위에서 나는 잠시 신세계를 보느라 넋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