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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화


43화 봄이 되자 나는 저택을 벗어나 다시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서재에 가지만 않는다면 마주칠 일은 거의 없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브륄을 타고 밖으로 나가자 숨이 탁 트이는 듯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그즈음의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사랑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해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매일 매일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조금도 여인으로 보지 않을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마치 저주 같았다. 차라리 아예 보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찬 시간은 조금씩 고통스러워졌다. 그와 마주하면 할수록 나는 내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보잘것없는 데다 죄인 신분인 나를. 그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어쩌자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하필이면 스카디 공작을?' 사랑은 내게 분별없이 그를 원하게 했다.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어졌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성이 나를 말렸지만 그를 바라고 원하는 욕망은 멈춰지지 않았다. 어느 날 잠든 그에게 입맞춤을 하는 꿈을 꾸게 된 나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어도 단단히 아님을 자각했다. 그래도 봄이 오고 시원한 바깥 공기를 마시자 그 열기가 조금은 사그라지는 듯했다. 달군 쇠 위에 잠시 물을 끼얹은 것처럼. 나는 브륄을 타고 장원 곳곳을 누볐다. 아나가 빠져 죽을 뻔했던 호숫가에 가 보기도 했고, 사냥터 근처까지 나아가 보기도 했고, 사과 과수원에도 들렀다. 한때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주렁주렁 사과가 달렸던 나무들에는 수줍은 꽃망울들이 가득 맺혀 있었다. 개중엔 마음이 조급해 터뜨리듯 꽃이 피어 있기도 했다. 분홍빛을 머금은 흰 꽃봉오리와 꽃에 시선이 빼앗겨 브륄을 멈추고 서 있는데, 원수를 두면 도처에서 만난다 했던가? 나는 또 그와 그가 탄 검은 말과 마주쳤다.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눈이 마주친 게 먼저였다. 그러자 그는 내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내려서 산책 좀 합시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그는 약간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 말에 나는 말에서 내렸다. 그도 말에서 내렸고, 우리는 말을 묶어 놓은 뒤 걷게 되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망울을 단 나무가 흔들렸다. 그는 뒷짐을 지고 걸으며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소?” “예?” “내가 그대에게 뭔가 실수라도 한 것이오?” 이해 못 할 말이었다. 내가 두 눈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있자 그는 재차 내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왜 나를 피하시오? 제집처럼 드나들던 서재에도 발걸음을 뚝 끊고, 만찬 때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내 얼굴은 쳐다보려 하지도 않고,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혼자 놀라 고개를 숙이고. 내가 그대를 섭섭하게 했소? 말해 보시오.” “⋯⋯.” “왜 아무 말이 없소?” 그 순간 숨이 턱 하고 틀어막혔다. 뭔가 그럴싸한 변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함과 동시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그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이 내게 책을 준 그날부터 사랑하게 되었다고? 당신을?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상대라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면 원하게 되니까, 그 손을 잡아 보고도 싶고, 얼굴에 두 손을 얹어 보고도 싶고, 입 맞춰 보고 싶기도 하니까 그 욕심이 죄스러워서 두 눈을 예전처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고? 외사랑이 이렇게 힘든 줄 알지 못했다고, 만약 내가 발 묶인 죄수가 아니었다면 이 일을 그만두고 짐을 싸서 도망쳐 버렸을 거라고? 그리고 이 마음이 아무런 연료가 없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럴 수 없어 이 마음은 계속해서 타들어 가고 있다고? “⋯⋯.” 나는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자코 있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변명하지 않는 것 보니 정곡을 찔렸나 보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렇다면 뭐지?” 공작이 내게 바싹 붙듯이 다가섰다. “내게 대체 왜 그러시오?” 그리고 나는 그만큼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다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그게, 제가, 그⋯⋯.” 그때였다. 번뜩하고 머릿속에 변명거리가 떠오른 것은. “그간 서재를 찾지 않은 것은⋯⋯ 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지?” 그렇다. 그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방에 틀어박혀 언제 보낼지 알 수 없는 편지를 쓰고 또 썼다. “편지라면 누구에게?” 그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고 물었다. “마엘 공자에게?” 그런데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상했다. “어머니와 동생에게입니다.” “⋯⋯.” “혹시 다시 편지를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편지를 쓰다 보니 좀처럼 서재에 발걸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말수가 줄었다면 그건 제가⋯⋯ 아마 그때 고향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편지를 쓰다 보니 가족이 그리워져서 저도 모르게 공작 각하께 괜한 오해를 산 것 같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라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내 말에 사납던 그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지만 고개를 숙이거나 돌릴 수 없었다. 결국 시선을 먼저 피한 이는 그였다. 그는 고개를 위로 올려 머리 위에 있는 나무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심정은 이해하오. 그러나 슬퍼만 하면 되겠소? 그대가 슬퍼하는 것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정착할 생각을 해야지.” 그리고 또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너무도 말이 없기에 나는 자연히 그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나뭇가지 끝에 움튼 사과꽃 봉오리가 보였다. 나는 그를 따라 한참 그 봉오리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갑자기 그가 말했다. “새로운 가족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겠소?” “예?” “⋯⋯그대도 성인이지 않소. 아이가 두셋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지.” 무슨 뜻인지 전혀 해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그가 시선을 다시 내게로 돌렸다. “성인이 되면 새로 가정을 꾸리고, 이전 가정과는 헤어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 “내가 하려는 말은⋯⋯ 그대가 그토록 가족을 그리워한다면⋯⋯ 이곳에서 가족을 만들어⋯⋯ 그 그리움을 잊어 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뜻이오.” “⋯⋯.” “그대는 좋으나 싫으나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사람이니까.” 나는 그의 말을 잘 알아들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제가 여기서 새로운 가족을 어떻게 만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 “혹시 개나 고양이를 기르란 말씀이신지요?” 동물을 길러 외로움을 해소해 보란 것일까? 나도 그 생각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 저녁에 빵조각 따위를 아껴 놓았다 뒤뜰의 고양이에게 주기도 했다. 이곳의 고양이는 프랑의 고양이와 달리 덩치가 크고 털이 풍성했다. “그런 뜻이 아니오. 어떻게 짐승이 가족이 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어떻게⋯⋯?” 그가 하는 말은 수수께끼 같았다. 그것도 답이 당최 짐작도 가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누가 저와 가족이 되어 주겠습니까? 공작님 말씀대로 보통이면 아이를 두셋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유배 온 죄인에게요. 더군다나 저희 가문은 이제 영락하여 폐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저와 대체 누가 연을 맺으려 하겠습니까?” “내가 되어 주면 되지 않소?” 그 말을 듣고도 나는 한참 뒤에야 의미를 이해했다.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나 싶어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공작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되어 줄 수 있소.” “⋯⋯.” “당황스럽겠지. 갑작스러울 것 아오. 그러나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소. 언젠가는 털어놓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나도 몰랐소.” 말을 이으며, 그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내 제안을 생각해 줄 수는 없겠소? 충분히 시간을 주고 대답을 기다리겠소.” 그 말을 듣는데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싶었다.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드오. 그대가 내 사람이 되어 주면 좋겠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쁨으로 숨이 막혀서였다. 정말이지⋯⋯ 그것은 사람의 인생에 몇 없을 실로 완벽한 순간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되새겨 볼 만한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대를 내 정부로 맞이하고 싶소.” 바로 그다음 떨어진 그의 말에 곧바로 산산조각 났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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