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47화
47화
소문은 소문일 뿐, 내가 직접 그분을 보고 겪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주 전하께서는 왜 이곳에 오시는 것일까.'
한편으로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이 여기 오실 이유가 없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분께서 미래의 혼약자를 보러 오는 것이라면.
이웃 국가의 왕과 죽은 쇼와즈르의 공작가 자제를 포함하여 여러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그분의 결혼 상대로 지목 되었으나 모두 흐지부지되어 공주 전하께는 아직 혼약자가 없었다.
발드르 드 스카디 공작이라면 그분에게도 걸맞은 신랑감이지 않을까? 그 누구와 결투해도 이길 수 있는 무력을 갖춘 데다 사교계에 전혀 출입을 하지 않아서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미남이지 않은가.
그는 공주 전하께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이곳으로 온다면 매일 무도회가 열리는 화려한 궁정 생활을 포기해야 하겠지만.
'그런데 그분께서 그러실 수 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공주 전하가 오기 전까지 폴린느 부인의 진두지휘 아래 저택은 새 단장을 마쳤다. 저택의 낡은 부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었거나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대리석 바닥은 어찌나 광을 냈는지 고개를 숙이면 얼굴을 비춰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공주 전하께서 이곳을 방문한다는 소문을 들은 지 한 달여 뒤, 백마 여섯 마리가 끄는 화려한 사륜 순금 마차 행렬이 저택에 당도했다. 그 뒤를 수행단과 왕실 기병 근위대 마흔 명가량이 따랐다. 실로 눈부신 행렬이었다.
내 방의 창은 앞뜰로 나 있어서 나는 멀리서나마 마차에서 그분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마차에서 내리는 그분의 손을 잡아 주는 것도.
나는 그분이 그 어떤 사내라도 무릎 꿇릴 수 있을 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혹시 그분께서 자신의 남편감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이라면?'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궁정에서 떠도는 소문과 달리 무섭지도, 거칠지도, 오만하지도 않고 다정하다는 사실을⋯⋯.
그는 무척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와 함께라면 이 추운 날씨와 지루함도 능히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그날 저녁, 공주 전하와 그는 함께 정찬을 들었을 것이다. 혼자 침대에 앉아 식사하며 나는 ‘정부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분의 경쟁자가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에 풍성한 머리칼, 별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 작위와 재색을 겸비한 그분에겐 질투도 나지 않았다. 질투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할 수 있는 법이다. 두 분은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느꼈다.
'그가 만약 공주 전하의 마수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하지?'
공주 전하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자신의 매력을 화살 삼아 덫에 걸린 남자들을 사냥하고 그들이 육체와 정신에서 피 흘리는 것을 즐기는 잔인하고 무도하신 분이셨다. 그런데 만약 그가 공주 전하의 함정에 빠진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요동쳤다.
그러나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젊은 날의 치기로 그러신 것이겠지? 설마 혼인하고 나서도 그런 장난을 치실까?'
만약 그가 공주 전하와 혼인한다면? 그녀는 아나의 어머니이자 내 고용주가 될 것이었다. 가정 교사를 감독하는 권한은 안주인에게 주어지는 권리니까.
“⋯⋯.”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자연스레 불길한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으랴. 모든 것이 주제넘는 짓이었다. 나는 그저 그가 그분의 발아래에 무릎 꿇은 남자들 보다는 좀 더 현명하기만을 바랐다.
공주 전하가 이곳을 왜 방문했는지는 이후 공주 전하께 지대한 관심을 가진 아나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스카디 공작령의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더더욱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공주 전하께서 갑자기 이 변방까지 와 장병을 격려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공주 전하는 많은 시녀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셨기 때문에 저택은 오랜만에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밖을 내다보면 공주 전하가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말을 타고 산책을 하는 것이 곧잘 보였고, 아나는 공주 전하가 연 차 모임에 초대받기도 했다.
“공주님은 정말 다정하고 아름다우세요! 동화책 속 그림보다 훨씬 더요!”
공주 전하의 존재는 아나를 흥분시켰다.
“또 있잖아요! 공주님께서 공작님에게 무도회를 열어 달라 요청하셨대요. 국경을 지켜 준 데 대한 공로를 치하하고 싶으니 스카디령 내 귀족들을 모두 초대해 달라고요. 선생님, 공주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으시고 저도 와서 자리를 빛내 달라고 하셨어요! 선생님도 함께 참석해 주실 거죠?”
아나의 말에 나는 난처해졌다.
“무도회는 초대받은 분만 갈 수 있답니다.”
“제가 공주님께 말씀드릴게요! 공주님이시라면 분명 선생님도 초대해 주실 거예요.”
“아가씨.”
나는 아나가 공주님께 큰 결례를 저지르기 전에 아나를 막아 세웠다.
“저는 사실 벌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랍니다. 공작님께선 제가 죄인임에도 능력을 높이 사 아가씨의 교육을 맡기신 것이지요. 그런 제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저도 비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공작님의 위신까지 깎이게 될 것이랍니다.”
“⋯⋯.”
그 말에 아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이라뇨, 선생님? 선생님께서 무슨 벌 받을 일을 하셨는데요?”
그에 대해선 설명하기 어려워 나는 쓴웃음만 지었다.
며칠 뒤, 아나의 말대로 무도회가 열리게 되었고, 그 준비로 인해 수업은 중지되었다.
폴린느 부인이 아나의 드레스를 준비하고, 무도회에서 아가씨의 후견인이 될 만한 귀족 부인을 구하는 등 안주인의 역할을 맡았다. 부인은 나를 불러 궁정의 무도회가 어떤 식으로 열리는지 묻고, 무도회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응했지만 무도회에는 참석한 적이 없어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무도회가 열렸다.
온 저택이 방문객들로 북적거렸고 내 방에서까지 무도회가 자아내는 소음이 들렸다. 새삼 생각해 보니 이 저택이 악기 소리와 사람 소리로 가득 찬 것은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이었다.
그는 무도회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까, 침대에 누워 나는 생각했다.
'지금쯤 공주 전하와 함께 춤을 추고 있겠지?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신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은 그분과⋯⋯.'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 도망치자.'
결심이 든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고 곰 가죽 외투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등잔불을 켠 후, 하인용 계단을 사용해 남들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다.
밤은 어둡고 축축하고 차가웠다. 모든 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까.'
저택의 창문에선 환한 불빛과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밝고 아름답지만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오로지 그 빛으로부터 도망치듯 걸었다. 아무 목적지도 없이.
밤이슬에 젖은 풀이 외투 자락을 스쳤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언덕 위 덩그러니 선 나무 아래였다.
'작년 가을, 이곳에서 자주 책을 읽었었지.'
차디찬 밤바람이 이마를 스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뭇잎에 일부가 가려진 달이 보였다.
'여기 있다가 불이 꺼지면 들어가자.'
겨우 도망친 곳이 나무 아래라니. 우습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나는 등잔이 엎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내려놓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외투가 두꺼워 춥지는 않았다. 두 무릎을 세워 배에 붙인 뒤 나는 무릎을 감싸 안고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여기서 뭐 하시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말에 나는 소스라쳤다.
“흐아아아악!”
나는 비명부터 질렀다. 캄캄한 밤중인 데다 하인도, 방문객도 무도회로 분주할 시간이었다. 누군가 이곳에 올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다 등을 기대고 있던 나무에 몸을 부딪치기까지 했다.
벌떡 일어나 보니 공작이 유리를 씌운 등잔을 들고 서 있었다.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에 유령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여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