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49화
49화
“⋯⋯.”
그저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앞의 이분이 추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혹시나 오해를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분은 찬찬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팔과 손을 배에 얹은 채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대가 방타두르 공작 부인 자제의 가정 교사로 있다 유배 온 툴루즈인가요? 지금은 이곳에서 스카디 공작 양녀의 가정 교사를 맡고 있다고 들었어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렇게 중차대한 직책을 맡게 되었죠?”
“예?”
“그대는 유배자의 신분으로 여기 왔잖아요. 그런데 공작저에서도 가정 교사를 하고 있다니, 놀라워요. 혹시 툴루즈가와 공작가가 내가 모르는 무슨 연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그 말에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공주 전하께서는 방을 휘휘 둘러보셨다. 그러자 문가에 서 있던 남작 부인이 말했다.
“저런, 꽃병의 꽃이 시들었군요. 우리 밖에 나가 신선한 꽃을 꺾어 오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에 시녀들이 우르르 방을 나갔다.
“자, 이제 우리 둘만 남았어요. 툴루즈 양, 이제 내게 허심탄회하게 말해 주지 않겠어요? 유배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공작저의 가정 교사를 하게 되었죠? 그리고 공작은 미혼이라 알고 있었는데 양녀는 또 무엇이고요? 내가 스카디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 그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네요.”
그녀는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친근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제가 이곳에 와 가정 교사가 된 연유는⋯⋯.”
공주 전하의 명령인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작가에 해가 될 말은 가능한 한 배제하려 노력하며 나는 이곳에 온 후 일어난 일을 공주님께 전했다.
“그렇군요. 툴루즈 양,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고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 전에 궁정에서 만난 적이 있나요? 어디선가 그대를 본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그럼 그대가 이토록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기분 탓이군요. 툴루즈 양, 자, 의자를 들고 이리 와 더 가까이 앉도록 해요.”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그녀는 갑자기 내 손을 감싸 쥐었다.
“툴루즈 양,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대가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여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아주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답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려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내가 아버님의 명에 따라 북부 지역을 순시하고 격려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에요. 내 진짜 목적은 스카디 공작의 얼어붙은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랍니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젖어 드나 싶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분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는 내가 공작과 혼인하지 않으면 에스파트의 왕과 결혼시키겠다더군요. 그는 절름발이에 윗입술이 갈라져 코에 붙고 주걱턱이 너무나 커 음식도 제대로 씹을 수 없는 자라고 해요. 나는 그의 초상화를 받아 보고 깊은 절망에 빠졌답니다. 왕의 초상화란 미화되기 마련인데 그는 초상화에서조차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했어요. 그런 자와 혼인하느니 야만인이라도 같은 나라의 공작이 낫지 않겠어요? 그런데 공작은 절대로 왕족과는 혼인할 생각이 없다더군요. 그래서 내가 이 먼 땅까지 직접 왔어요. 공작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요.”
공주 전하의 방문 이유를 알게 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데 공작은 나와 혼인해 주지 않겠다지 뭐예요.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단 거예요. 그럼 다음 후계자는 어쩔 것이냐 물으니 스카디의 문제는 공주가 상관할 게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요? 그는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어요.”
공주 전하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꼭 쥐었다.
“툴루즈 양, 나를 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지 않겠어요? 내가 공작과 혼인하여 괴물과 결혼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 말에 나는 공주 전하께 붙잡힌 손을 포함해 온몸이 떨렸다.
“공주 전하, 저는 일개 가정 교사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툴루즈 양. 툴루즈 양은 공작의 최측근이잖아요. 나는 그대가 양녀와의 일로 공작과 긴밀하게 소통했다고 들었어요. 매주 만찬을 함께하면서 말이에요. 공작은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그대의 말은 들을 거예요. 공작은 그대를 신뢰하니까요.”
그런 말을 대체 누구에게 들은 것일까? 순간 나는 오싹했다.
“어제 공작이 무도회장에서 나갔다 그대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오는 걸 본 사람도 있었고요.”
공주 전하께서 내 두 손을 꽉 쥔 채로 말씀을 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진 묻지 않겠어요. 그러나 툴루즈 양, 생각해 보아요. 그대가 언제까지 공작의 총애를 받을 수 있겠어요? 또 언제까지 양녀의 가정 교사로 이 저택에 머무를 수 있겠고요. 남자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아요. 그들은 나비나 벌 같아 어느 꽃이든지 가리지 않고 꽃이 시들면 떠나 버리고 말죠. 그러나 우정은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하답니다. 나에게 그대의 우정을 베풀어 주어요. 그럼 나도 내 우정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지 알려 줄 테니.
나는 그대를 유배형에서 풀어 줄 힘과 그대에게 좋은 짝을 찾아 줄 능력이 되는 사람이랍니다.”
“⋯⋯.”
“그뿐인가요? 나는 그대의 가문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어요. 그대가 나를 곤경에서 구해 주면 나도 그대를 곤경에서 구해 드리지요.”
너무나 달콤한 말인 데다 그 말씀을 하시는 사람이 공주 전하이신 까닭에 도저히 거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도와달라 간청하고 있었다. 사실 도와줄 수만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 부탁은 어렵지 않아요. 공작에게 나를 칭찬하며 나에 대한 경계를 풀어 주세요. 아무래도 공작은 궁정에 떠도는 내 소문을 미리 들었나 봐요. 그 소문에 대해선 툴루즈 양도 알죠?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요. 그대가 경계만 풀어 주면 그다음에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만약 결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대 잘못이 아니니 궁정으로 돌아가면 그대를 유배형에서 풀어 드리겠어요.”
겨우 그것뿐인가?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의문인가 하면, 괴물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와 결혼하고 싶은 유일한 이유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요.”
“공주님께서는 이곳에 오셔서 스카디 공작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공주 전하는 공작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공작을 사랑하게 되셔서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드신 것입니까?”
여기 와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래서 그와의 혼인을 원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공주 전하의 요청을 들어 드릴 용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공주 전하는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분이시기에, 그분의 사랑을 받는 남자라면 분명히 행복해질 테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그의 행복이니까.
그렇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설령 그의 옆자리에 내가 없다 할지라도.
“하, 하하⋯⋯.”
하지만 내 질문에 공주 전하는 붉은 입술 양 끝을 움찔하나 싶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맑고 명랑한 웃음이었다. 침묵하는 나를 앞에 두고 한참이나 웃음은 계속되었다.
“사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툴루즈 양.”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공주님이 말씀하셨다.
“사랑은 아내와 남편이 하는 일이 아니랍니다. 아내와 남편이 하는 일은 가문의 재산을 지키고 후계자를 생산하는 것이지요. 혼인은 가문 간의 계약이고 거기에 사랑이 개입되면 탈이 날 수 있어요. 사람의 마음은 증오든 애정이든 변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랑은 남편이 아니라 애인들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말에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툴루즈 양도 방타두르 부인의 자제를 가르쳐 보셨으니 아시지 않나요? 방타두르 부인이 열심히 분전하고는 있지만, 아버님께 방타두르 부인만 있는 건 아니죠. 설마 툴루즈 양은 방타두르 부인이 아버님의 유일한 애인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요?”
“⋯⋯.”
“툴루즈 양, 나는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하고 싶어요. 적어도 공작은 에스파트의 왕처럼 불구나 추남은 아니니까요. 괴물과 후계자 생산을 하면 괴물이 태어나지 않겠어요? 생산을 위한 행위를 하기도 무척 거북하고요. 그리고 좀 멀다 뿐이지 공작의 영지는 아버님 나라에 있잖아요. 아이만 낳고 나면 나는 다시 궁정으로 복귀할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