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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화


57화 “⋯⋯.” “나와 함께 다시 돌아갑시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숨이 가빠 왔다. 그냥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아내⋯⋯ 아내요?” “그렇소.” “지금 제가 사는 집을⋯⋯ 보셨지요? 저희 가문은 영락할 대로 영락해 공작님께서 만족할 만한 지참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지참금은 필요 없소.” “저와 결혼하시면 귀천 상혼이라 다른 귀족들에게 조롱받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제 가문은 제 대에서 유명무실해지게 될 것입니다.” “개의치 않소.” “아예 혼인하지 않으시겠다면 모르겠으나 혼인하실 계획이시라면⋯⋯ 저보다 더 좋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랑시스의 공주님이 아니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그와 혼인하지 못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소?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는 행운을 누리라고?” 그러나 그가 내뱉은 대답에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물었다. “모든 게 빈말이었소?” “아닙니다.” “그럼 마음이 변했소?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소?” 나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금 전에 말한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소?” 그 말에도. “그럼 되었군.” 이후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 어떤 예감이 우리 둘을 동시에 감싸안았으리라. 지금 맞은편에 앉은 이 사람과 앞으로 평생 함께하게 되리라는 절대적이고 강력한 예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나와 혼인해 주길 바라오.”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나와 혼인하겠소?” “예.”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 주겠소.”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빼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반지였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해 미안하군. 오늘 우리의 혼인이 성사되었다는 증거로 이 반지를 주겠소.” 그는 내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 주려 했지만 어느 손가락에도 헐거워 엄지에 간신히 맞았다. 나는 반지 낀 손을 꼭 쥐었다. 그가 일어섰다. “예의를 갖춰 곧 다시 방문하리다.”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같이 가겠어요.” 나는 더 이상 그와 한시도 떨어져 그리워하고 싶지도, 애를 태우고 싶지 않았다. 또한 이상하게도 지금 그와 떠나지 않으면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느꼈다. 그리고 나중에 나는 알게 된다.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는 그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이 일을 궁금해하고 있던 어머니와 동생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내게 청혼하기 위해서이며, 방금 내가 그 청혼을 수락했다고. 동생과 어머니는 까무러칠 만큼 놀랐다. 어머니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반지 낀 손으로 어머니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허락해 주실 거죠? 저분을 사랑해요. 다시 저분과 함께 가고 싶어요.” 어머니와 동생은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저했지만, 내 간절한 눈빛을 읽었는지 곧 허락했다. “다시 돌아올게요.” 나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고마움을 담아 키스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그를 따라 스카디 공작령으로 돌아갔다. 춥고, 안개에 휩싸인 그 도시로. 이번엔 유배자가 아닌, 공작님의 신부로서였다. ❖ ❖ ❖ 스카디는 랑시스 내부보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적국과 동서 국경 지역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들의 정세에 더 민감 한 곳이었다. 예로부터 수도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고 접경지대에선 늘 사소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갑자기 큰 불길로 번져 스카디를 위협할 수도 있는 마찰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스카디는 화약고였다. 그러니 인접국이 돌아가는 사정은 알아도 프랑의 궁정 사정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보통 프랑의 궁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늘 스카디와 상관없이 끝나기도 했고. 그래서 프랑의 궁정에 역병이 돌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 발드르는 그 역병이 그에게 어떤 여파를 미칠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한 여자의 작고 부드러운 손에 움켜쥐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이미 노쇠한 국왕이 죽느냐 사느냐는 애초에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랑시스의 국왕이 누구냐와 관계없이 스카디는 그의 것이었다. 국왕이 바뀌어 대관식이 치러진다면 프랑으로 올라가 형식적으로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예를 취한 뒤 다시 스카디로 돌아가 영지를 다스리기만 하면 되었다. 게다가 국왕에게는 후사가 셋이나 있지 않은가? 그중 한 명은 사생아지만. 그는 프랑의 역병이 이곳까지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프랑에서 스카디로 오는 길목에 검문소와 천막을 세우고 수도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주일간 격리시켰다. 왕궁에 도는 전염병의 잠복기는 길어도 5일이었고 일단 발병하면 3일 안에 죽느냐 사느냐가 판가름이 났으므로 그 정도로의 기간으로도 역병의 전파를 막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정보의 정체가 일어났다. 그리고 정보란 한여름의 생선처럼 상하기 쉬운 것이어서 하루만 지나도 쓸모가 없어진다. 프랑의 역병은 사람들을 빠르게 죽여 나갔다. 역병에는 순서가 없어 아이가 죽는가 하면 노인은 살아남았다. 그때문에 사람이 죽고 사는 순리도 바뀌어서 원래대로라면 결코 왕좌에 오를 수 없는 사생아가 왕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그 즉시 대규모 사면을 요청해 자신의 옛 가정 교사를 복권시켰다. 발드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잔느 드 툴루즈를 태우러 온 마차가 영지에 도착한 뒤였다. 그와 함께 잔느 드 툴루즈가 영원히 스카디에 머무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발드르를 비웃듯이 마엘 공자, 아니 왕세자의 서신도 도착했다. 발드르는 왕궁의 시종에게 서신을 받아 들었다. 왕궁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열어 보니 무척이나 정중하고 우아한 필체로 글이 적혀 있었다. 그간 자신의 가정 교사를 돌봐 주셔서 감사하다는 노고의 치하와 함께 자신의 가정 교사는 이미 사면되었으니 먼 길 떠날 준비를 시켜 마차에 태워 보내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개 정부의 소생이던 시절 잔느에게 적었던 비밀 편지에서와 같은 간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처음 보낸 편지에서 느껴졌던 절박함도 없었다. 서신은 정중하나 명령조였다. 서간을 읽는 중에 그는 가슴을 칼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것은, 스카디란 유리병 속에 갇혀 있던 나비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비의 소원이었으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배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는 것이 잔느 드 툴루즈의 염원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사면은 모든 유배인들의 바람이었다. 게다가 발드르는 잔느의 편지도 읽었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편지를. 그것까지 본 이상 그녀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고, 보내 주어야 했다. '잔느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내 가정부에게 일러 떠날 채비를 해 주도록 하지.' 그는 시종에게 말하면서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고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 곁을 떠나다니?' 시종이 집무실을 나서고 그가 부인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준비를 해 달라 이르는 중에도 그의 정신 한구석은 마비된 듯이 이 상황을 부정했다. 잔느가 내 곁을 떠난다고? 이 스카디를? 그의 말을 들은 부인은 펄쩍 뛰며 '정말 잘된 일이로군요!'라고 말했다. '잘된 일인가? 유배지라 해도 스카디에 있는 동안 내가 이토록 잘해 주었는데?' 부인이 떠난 뒤 혼자가 되자 그는 집무실을 빙빙 돌았다. '그것도 오늘 바로 떠난다고?' 비록 잔느에게서 사랑을 얻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녀가 영영 떠나 버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와 스카디를 떠나겠다고?'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그는 잔느가 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사랑한다 하였으므로. 사랑하면,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를 사랑한다면? 떠난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를 스쳐 지나간, 그를 사랑해야 했지만 실은 사랑하지 않았던 많은 얼굴들이 책장을 넘기듯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가정 교사와 보모들이. 사실 그는 그들을 사랑했었다. 사랑했었지만 무어라 말하면 그들이 자신을 떠나지 않고 돌아봐 줄지 알 수 없었다. 남아 줄지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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