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59화
59화
그는 여느 때와 같이 그 목소리를 무시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오늘따라 천둥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가까이서 치는 천둥처럼.
'일어나!'
마치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그가 억누르고 짓눌러 무의식의 저편에 밀어 넣었던 기억이 기어코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그는 자신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가.'
잊었다고 생각한 형의 목소리였다.
'가서 잡아.'
'더 늦기 전에.'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주었다고 믿었던 혈육이 떠난 후에, 그래, 그나마 형은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배반당한 후에 발드르는 어떻게 했는가? 복수하듯이 형과의 기억을 지우려 노력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그는 형을 부러 찾지 않았다. 찾고자 하면 못 찾을 리 없었을 텐데도, 그는 형이 미웠다. 왜 밉지 않았겠는가?
떠나기 전에 떠난다고 말 한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아니, 자신도 데려가 주었더라면, 이 쓸쓸하고 무정한 곳에 홀로 남겨 두지 않고.
'어서. 더 늦기 전에.'
그런데 죽은 형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이 떠난 뒤에 발드르는 늘 궁금했었다. 사랑이 작위와 영지보다 가치가 있는지. 살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는지. 그리고 아주 가끔 꿈을 꿨다. 형이 돌아와 후회했노라고, 지금이라도 다시 스카디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노라고 말하는 꿈을. 그러나 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해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피로함으로 인한 환청인지 정말로 형의 영혼이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분명 그 목소리를 들었다.
후회하지 않았다는 형의 목소리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이미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프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물자 운반을 위해 잘 닦여진 길이라 하더라도 호위병 하나 없이 밤중에 움직이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먼 길갈 채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사흘 걸리는 길을 서두르려 하면 하루쯤 가서 열흘쯤 눕는 법이건만.
그러나 마음이 급했다.
이미 잔느가 한참 전에 프랑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말을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역참에 잠시 들러 지친 말을 교체할 때를 제외하곤 계속해서 밤낮없이 달렸다. 무척이나 이상하게도 피로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택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보다 점점 더 몸은 가뿐해지고 힘이 났다. 정체 모를 힘이 그를 지배하는 듯했다.
그러나 마음은 그와 반대로 프랑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무거워졌다.
'이제 와서 붙잡자고? 어떻게?'
유배형이 풀린 지금 무엇으로 잔느를 붙잡아 다시 스카디로 데려올 수 있단 말인가?
돈과 보석, 연금?
달리면서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가 가진 것으론 유배형이 풀리자마자 스카디에 마차를 보내온 왕세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이미 잔느의 마음은 왕세자에게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아나가 울고 있으니 돌아와 달라고?'
발드르는 잠시 잔느의 동정심에 기대 볼 생각도 해 보았다. 아나가 죽어 간다고, 죽어 가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런 말을 한다면 잔느는 아마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거짓말로 잔느를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억지로 붙잡을 수야 있겠지만 진정 원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는 잔느가 자발적으로 겨울엔 끔찍할 만큼 춥고 지루하며 재미도 없는 스카디에 남아 주기를 바랐다. 온후하고 따스하며 향락이 넘치는, 심지어 가족도 있는 프랑이 아니라.
발드르는 스카디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전자를 선택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달리는 것은 헛수고인가? 지금이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돌아가야 하나?'
왜 그때 붙잡지 않았을까? 잔느가 아직 스카디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불안과 후회와 괴로움이 그의 뒤통수를 잡아채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희망을 건 것은 오직 하나, 잔느의 마음이었다.
'제가 공작님을 사랑하니까요.'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던 그 고요한 눈동자에 서렸던 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쉬이 변하는 법이다.
아무 선택을 내리지 않는 것 또한 일종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로 자신이 시간을 질질 끌고 있던 동안, 잔느의 마음은 어땠을까?
'늦었을까? 이미 늦어 버린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야심한 밤, 발드르는 프랑에 도착했다. 대관식 정도의 행사가 아니고서야 프랑에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는 그였지만 내로라하는 대귀족이었으므로 프랑 근교에 저택 한 채는 두고 있었다. 발드르가 프랑으로 올라올 때 머무르는 용도였지만, 하도 그 용도로는 쓰이지 않아 지금은 프랑으로 보낸 전령이 잠시 머무르고 말을 교체하는 용도로나 쓰이는 곳이었다.
저택의 관리인은 그의 부관으로 일하다 은퇴한 퇴역 장교였다. 아무런 전갈 없이 초주검이 되어 나타난 주인을 보고 관리인은 귀신이라도 본 듯이 혼비백산했다.
“나으리⋯⋯?”
“말이 많이 지쳤으니 마부를 불러 주게.”
발드르는 프랑에 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목욕물과 잠자리도 준비해 주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그를 이끌었던 정체불명의 힘은 사라지고, 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로가 몰려왔다. 지치고 피곤했다. 그는 목욕을 하자마자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다음 날.
발드르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길을 떠났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대체 뭐라고 해야 프랑의 가족과 이 따스한 기후를 포기하고 스카디로 돌아오라고 할수 있을까?
'모르겠다.'
피로감이 일으킨 흥분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는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차피 거절당할 것이라면 빠르게 거절당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럼, 그 이후에는 어쩌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울게 될까? 아니면 그녀를 납치하게 될까? 이후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는 편지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외웠던 주소지에 다다랐다. 주소지에는 낡고 허름한 건물이 서 있었다. 잔느는 그동안 이런 곳에서 살았나? 가문이 영락한 뒤에? 계단을 오르며 발드르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주소지의 문 앞에 서서야 자신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혼하러 온 것이면서도, 보석은커녕 꽃조차도.
'제정신이 아니군.'
최악이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로에 전 몸은 머릿속의 망설임을 무시하고 문을 두드렸다.
“예?”
금방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발드르는 문을 열고 나온 여자를 보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하녀나 입을 법한 무늬 없는 무명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눈앞의 이 여자가 잔느의 동생 안이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누구시죠?”
발드르는 잔느에게 익히 들어 온 까닭에 처음 본 그녀가 친밀하게까지 느껴졌지만, 안은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나는 스카디의 공작 발드르 드 스카디오.”
“⋯⋯.”
“잔느에게 볼 일이 있어 왔소.”
“공작 각하!”
그 말에 잔느의 동생은 놀라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숙였다.
발드르는 집 안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작지만 건물 외관과는 달리 깔끔한 곳이었다. 잔느의 어머니가 그에게 와 인사했는데, 젊었을 적에는 잔느를 똑 닮았을 것 같았다. 아니. 잔느가 어머니를 닮은 것이겠지.
잔느는 외출 중이었다. 그는 딱히 묻지 않았지만 무엇 때문에 외출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응접실에 있는 화분 때문이었다. 응접실은 랑시스를 상징하는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곧 응접실에 혼자 남겨졌다. 흰 붓꽃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대체 무슨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
결투라면 모를까, 그 어떤 조건을 내건다 해도 프랑의 왕세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헛수고였다면?'
그를 여기까지 이끈 형의 목소리도 사실 피로감에 의한 환청이었다면?
'지금이라도 일어서서 나가야 할까?'
아주 많은 생각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을까, 드디어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잔느였다. 그것도 스카디에서와는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저 드레스는 누구에게 선물받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