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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외전 11화


외전 11화 발드르 드 스카디는 불안했다. 잔느가 청혼을 승낙한 뒤 마차를 타고 그녀와 함께 영지로 돌아왔으면서도 불안감은 사라지기는커녕 커져만 갔다. 겉으로는 잘 숨겼으나, 사실 마차에서 내릴 때 그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신경 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이 세상에서 떼어 내서 자신만 아는 곳에 숨겨 두고 싶었다. 저택 현관 앞에 정차한 마차에서 내린 후, 뒤이어 내리는 그녀의 작고 귀여운 손을 쥐는데 울컥하고 원초적인 욕망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그 욕망은 간신히 움켜쥔 행복을 누군가가 앗아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감히 그의 것을 앗아 갈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를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광활한 북부 대지의 지배자이며 랑시스 제일의 무력을 자랑하는 발드르 드 스카디의 것을? 몇 달 전의 발드르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터였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비록 서자 출신이라 할지라도 왕이 오늘내일하는 시기의 왕세자는 과연 그의 몇 안 되는 적수가 될 만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이전부터 그의 신경을 알게 모르게 긁던 상대⋯⋯. 달리는 마차 안에서 잔느는 고백했다. '공작님께서 아셔야 하실 일이 있습니다. 제가 공작님께 청혼을 받기 직전에⋯⋯ 왕궁에서 왕세자 전하를 뵈었는데, 그분께서는 왕위에 오르신 뒤 제가 그분의 메트레상티트르가 되어 줄 것을 바라셨습니다.' '메트레상티트르라면⋯⋯.' '그렇습니다. 제가 정부가 되어 주길 바라셨지요.' 발드르는 간담이 다 서늘했다. 그의 연적도 이전의 자신과 같은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청혼을 좀 더 망설였다면 어땠을까?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까? 발드르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는지, 잔느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그 자리를 거절한 것은 왕비 자리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세자 전하께서 제게 청혼하셨더라도 전 거절했을 겁니다. 공작님을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잔느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발드르는 예상치 못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기쁜 것은 기쁜 것이고, 왕세자의 마음은 그가 대비해야 할 일이었다. 과연 왕세자가 잔느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해서 '네.'하고 순순히 물러날까? 읽어 본 편지로 짐작해 보건대 그럴 리가 없었다. 왕세자는 아마 잔느의 거절을 거절로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터였다. 그저 좀 더 공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두 인간이 같은 것을 원하면 일어날 것은 싸움뿐이었고 그는 잔느의 마음을 이미 가졌으니 수성(守城)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다행히도 적의 공격이나 침략을 막는 것은 발드르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발드르는 적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듯이 잔느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그에게 유리한 점이 있었다. 잔느는 그의 영지로 들어왔고 아마 아직 왕세자는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고 있으리란 것이었다. '훼방 놓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는 수밖에.' 발드르는 저택으로 돌아와 잔느와 헤어지자마자 랑시스의 법전을 찾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그녀와 혼인할 때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이전의 발드르에게 훗날 법전의 혼인 항목을 다 외울 정도로 탐독하게 되리라 말해 주었다면 그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일이 오늘 일어났다. 그는 두 눈이 빠지도록 법전을 들여다보았다. 랑시스의 결혼법은 신랑과 신부의 가문이 귀족에 속하기만 하다면 귀천상혼을 금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혼인 장사에서 최대한 이득을 보려는 두 가문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조건이 엇비슷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피하는 것뿐이었다. 다만 랑시스의 법은 귀족이 혼인할 경우 상위 영주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모시는 주군의 적과 혼인하여 주군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법적으로 발드르가 누군가와 혼인하기 위해서는 국왕 폐하에게 결혼 청원서를 보내 사인을 받아야 했고, 국왕은 이를 허락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그래, 내가 공주와 혼인하지 않는다 하자 국왕이 으름장을 놓았었지. 공주가 아니라면 누구와도 혼인하지 못하게 해 주겠다고.' 그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여기서부터 머리가 아팠다. '결혼 청원서라⋯⋯. 현재 국왕은 병석에 누워 있으니 자연스럽게 대리자인 왕세자가 사인하게 되겠군.' 그는 혹시라도 이에 대한 파훼법이 있나 싶어 더 읽어 나갔다. 랑시스의 국교는 혼인을 단순히 세속적인 계약이 아닌 신께서 개입하는 성스러운 일로 규정했다. 결혼식은 성사이기 때문에 꼭 사제가 주관해야 했으며, 일단 사제를 증인 삼아 결혼식을 올린 뒤 첫날밤을 치르고 나면 그 혼인 자체가 무효로 규정될 만한 강력한 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에야 설령 국왕이라 할지라도 혼인을 부정하거나 이혼시킬 수 없었다. 신이 묶은 것을 인간이 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냥 혼인할까, 허가 없이?' 법을 다 읽은 발드르는 처음엔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유혹에 휩싸였다. 허락보다는 용서가 빠를 때도 있는 법이다. 이 법대로라면 내일 당장이라도 사제를 데려다 혼인하고 첫날밤을 치르면 끝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이후에 진통은 좀 있겠지만 뭐⋯⋯.'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일개 사제 정도야 협박해 결혼식에 세울 수 있을 터이지만 허가장이 없다면 다 이루어진 혼인 절차 자체를 문제 삼아 어깃장을 놓을지 모른다. 지금이야 내가 조금 우세할 수 있으나 그자는 언젠가 왕이 될 것 아닌가.' 물론 허가가 없이 결혼한다 할지라도 훗날 랑시스의 국왕이 된 왕세자가 결혼을 무효로 만들거나 감히 그에게 주어진 영지를 다스릴 권한을 회수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마 그렇진 못할 터였다. 그즈음에는 아마 잔느와 그 사이에서 아이도 태어났을 테고, 랑시스의 국왕이 스카디 가문에 준 영지는 명목상 랑시스의 것이긴 해도 이미 스카디 가문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더불어 스카디 가문이 이 영지에서 물러난다면 랑시스의 군대로는 이 영지를 결코 지킬 수 없을 것이었고, 랑시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권력자의 자존심은 때론 피해를 감수할 정도로 세지. 발목이 붙잡히지 않으려면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선 안 돼.' 그렇다면, 왕세자에게 무엇을 내주어야 결혼 청원서에 사인을 받아 낼 수 있을까, 발드르는 고민에 휩싸였다. 그가 왕세자라고 생각해 보니 절대로 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선뜻 떠오르는 해답이 없어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민을 털어 냈다. '일단은⋯⋯ 씻지.' 우선 목욕이나 하기로 했다. 목욕을 하던 도중 발드르는 문득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결혼 청원서에 허가를 받을 만한 해답은 아니었고, 창고에 두고 잊어버린 어머니의 유품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께서 처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값이 나가는 것들을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일이 기억났던 것이다. 대부분이 어머니께서 즐겨 하던 장신구였다. 어린 그의 눈에도 그것은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장신구가 그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발드르는 스카디가의 유산을 물려받고 나서도 이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목욕을 마치고 폴린느 부인과 함께 지하실로 향했다. 보석들은 창고 한구석에서 먼지를 잔뜩 먹은 채 궤짝 안에 잠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보석의 상태가 기억과 달라 실망했지만 세정을 거치자 다시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어머니께서 걸쳤던 장신구들은 많았지만 중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던 것은 역시 아버지께 혼인 선물로 받았던 자수정 파뤼르(parure)였다. 한데 어우러져 광채를 뿜어내는 장신구 세트를 보자마자 그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어서 이 물건을 잔느에게 보여 주고 그녀의 머리와 귀와 목과 팔에 채워 주고 싶은 욕망이 었다. 그는 다른 것들, 이를테면 자디잔 진주와 자수정을 늘어뜨리는 형태로 만든 코르사주 장식 같은 것들은 본체만체하고 파뤼르만을 들고 잔느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에게 칭찬받을 거란 기대로 잔뜩 들뜬 개와 같은 심정으로. '그런데 이 보석이 내 눈에는 아름다워 보여도 잔느와 같이 궁정 생활을 한 사람의 눈에는 유행에 뒤처져 보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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