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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화


05. “떨어지면 죽겠지?” 벨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샤는 볕에 잘 말린 붕대와 연고를 가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래를 봐. 여긴 낭떠러지야.” 벨은 사샤의 말에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빼곡하고 울창한 숲. 바닥이 어디인지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샤. 이 창문을 깨 본 적 있어?” “응. 있어.” 사샤는 창가에 앉아 벨의 손에서 붕대를 풀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가지는 못했어.” “그러면 새가 나는 걸 본 적은?” 벨은 새파란 하늘을 보며 물었다. 사샤는 어느새 새살이 많이 올라온 벨의 손에 정성스레 연고를 발랐다. 조금씩 상처가 공기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려야 할 것 같았다. 더는 눌러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의 상처도 꽤 많이 아문 듯했다. “응? 사샤? 새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니까?” 벨이 독촉하자 사샤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란 하늘. 사샤는 그것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그것을 보는 것이 고통이었다. “아니. 모르겠어. 이곳에 온 뒤로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어.” 헛된 희망을 품을까, 감당할 수 없는 욕심에 가슴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이상해. 난 이곳에 온 뒤로 계속 하늘만 쳐다보았거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새가 나는 걸 본 적이 없어. 비가 내리거나, 창문이 바람에 덜컹거린 적도 없어.” “…….” 네르아는 비가 잦은 지역이다. 소나기처럼 한바탕 퍼붓고 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뜨고, 새벽녘에는 늘 짙은 안개비가 뿌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가진 곳이었다. 우기인 봄, 여름을 지나면 비가 내리는 횟수가 잦아들고 겨울쯤이 되면 꽤나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는 했지만 이 정도로 매일매일 햇볕이 쨍쨍한 날은 드물었다. “우리가 있는 곳이 빅토리아는 맞는 걸까?” “…….” 사실 모르겠다. 요한이 말한 요새란 곳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곳에 잡혀 와 그곳에 줄곧 가두어져 있다는 것만 알 뿐.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일까. 어디인지 알게 되면 그럼, 지금과 뭔가가 달라질까? 아니. 어차피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알아도 알지 않아도 모두 쓸데없는 호기심이고 걱정이었다. 그러니 일말의 희망도, 호기심도, 상상도 가지지 않으련다. 사샤는 하늘을 쳐다보는 데 골몰해 있는 벨의 손에 꼼꼼하게 붕대를 감았다. 정오의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벌컥, 언제나와 같이 디터가 예고 없이 문을 열었다. “사샤 로랑!” 사샤는 붕대를 서둘러 매듭짓고 다정하게 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먹을 것을 가지고 올게. 벨. 기다려.” “응.” 방을 나서서 긴 복도를 걷는 내내 디터의 매서운 눈빛이 집요하게 그녀를 쫓았다. 매번 그럴 때마다 사샤는 언제 어떻게 그가 주먹을 휘두를까 두려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동안 아주 잘 먹고 잘 잤나 봐. 암퇘지처럼 살이 뒤룩뒤룩 찐 걸 보니 말이야.” “…….” “언젠가 이곳에서 벗어나게 되면 각오하라고. 너 같은 암퇘지를 먹기 위해 줄 선 병사들이 아주 많거든.” “…….” 그는 저를 싫어했다. 경멸하고 증오했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냥 자신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것 같았다. 이유도 없는 증오는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그가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요한은 어떠한가. 그는 차라리 순한 편에 가까웠다. 매일 이곳에 와 자신과 점심을 먹는 이상한 취미를 가졌고 거품을 물고 발작하며 쓰러지는 여자를 보는 것을 즐기는 미친놈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는 부드러움으로 자신의 광기를 가릴 줄은 알았다. 그렇기에 사샤는 그의 부드러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소한 말은 통하는 자였으니 말이다. 두 남자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면 어쨌든 선택지는 딱 하나뿐이었다. 식당에는 피아노 선율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고 요한은 전축기의 앞에 서 있다가 그녀를 맞았다. 선율은 온몸이 녹아내릴 듯 아름답고 감미로웠다. 제복을 차려입은 요한은 마치 연회장에 나온 왕자님처럼 보였고 테이블 위 가득 차려진 음식 역시 화려한 파티를 장식해 주는 풍성한 고급 요리 같았다. 기이한 광경이다. “드비쉬 좋아해?” 요한이 여유로운 자세로 물었다.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빌어먹을 작자가 누군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뿌루퉁한 표정의 사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요한은 눈을 감고 선율을 따라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는 음악에 완전히 심취한 듯 보였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정말 달빛 아래를 걷는 기분이야. 대단히 로맨틱하지.” “…….” 그가 반짝 눈을 떴다. 천진하고 맑은 눈이 해사하게 웃었다. “병동에서는 음악을 틀어 주지 않나? 환자들의 안정을 위해서 말이야.” “매분, 매초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런 사치 부릴 여유 따위 없어.” “저런. 애석하군.” 전혀 애석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고는 사샤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당겨 주었다. 식사를 하자는 신호는 매번 같았다. 그러면 사샤는 아무 말 없이 그가 지정해 준 자리에 앉고는 했다. “왜 매번 이 짓을 하는 거지?” “무슨 짓?” “여기 와서 나랑 밥 먹는 것 말이야.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해서.” 요한은 맞은편에 앉아 냅킨을 펴 무릎 위에 얹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글쎄. 일종의 취미 생활이지.” “독이 든 음식을 숨겨 놓고 내가 먹나 안 먹나 시험하는 게 취미 생활이야?” “네가 매번 긴장하고 있는 게 좋아. 나는 긴장감을 즐기거든.” 요한은 베이컨을 하나 찍어 입에 넣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게 살기 위한 처절함이라면 더욱 재밌지.” 사샤는 얼굴을 구기고 한 자 한 자 힘을 주었다. “내 소원은 언젠가 당신이 이 취미에 질려서 그 역겨운 얼굴을 마주 보고 음식을 씹지 않아도 되는 거야.” “자. 받아.” 요한은 키득키득 웃으며 베이컨을 집어 먹은 포크를 건넸다. 수없이 되풀이되어 이제는 익숙해진 순서들. 습관처럼 대화 없이도 통하는 제스처들. 사샤는 이 모든 게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사샤는 요한이 내민 포크를 받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 할 때 그가 포크를 빙 돌렸다. 뭐야. “자.” 그가 다시 내밀었다. “…….” 사샤가 손을 뻗자 그는 다시 포크를 돌렸다. “자. 받아. 어서.” 이 미친놈이. 또 신경을 긁기 시작한다. 사샤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불시에 손을 뻗었다. 요한은 잘도 그녀의 손을 피했다. 그것도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뭐 하는 거야!” 사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포크를 채 갔다. 요한은 키득거렸고 사샤는 씩씩거렸다. “아니. 요즘 들어 너무 긴장감이 없나 싶어서.” “매일 너와 마주 보며 밥 먹는 것도 고역이니까 그걸로 만족하지 그래?” 사샤는 앞 접시에 그것을 내려놓고 또 한 덩이를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요한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실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잖아.” “뭘?” “여기서 나와 점심을 먹는 것 말이야. 이것이 하루 중 유일하게 너에게 시각을 알려 주는 행위이지. 또 네 인형을 위해 먹을 것을 챙길 수 있는 시간이고. 또 네가 외부인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지.” “그래서 뭐. 너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 “네가 미치지 않게 도와주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넌 미쳤어!” 사샤가 베이컨을 씹다가 그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정말이지, 저 입에 바른 허튼소리는 매번 들을 때마다 지겹다. 양심도 없고 개념도 없고 정신머리는 더더욱 없는 미치광이! 그녀를 자극해 놓고 요한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저 미친놈이 대체 왜 저러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자신이 그를 무척 즐겁게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 저는 그에게 그저 한낱 유희 거리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사샤는 그를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를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포로였고 요한은 그녀의 목줄을 쥔 사내였다. 그것에서 오는 무력감과 패배감. 요한이 즐기는 것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먹어. 사샤. 어서 먹고 네 인형도 먹이라고.” 요한이 스테이크를 집어 그녀의 접시 안에 던져 주었다. 그러고는 저도 똑같은 것을 가져와 나이프로 찍어 뜯어먹었다. 식사 내내 사샤는 그에게 화를 냈고 요한은 웃었다. 언제쯤 이 지겨운 유희 제공을 끝낼 수 있을지 까마득했다. 미치지 않게 도와준다고 미친 소리를 해 댔지만 사실 이런 환경 자체가 그녀를 미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정신을 바로 잡는 것은 오로지 벨 때문이었다. 그녀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미치고 싶어도 미칠 수 없었다. 매번 긴장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이유도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그가 던져 준 인형은 얼마나 달콤한가. 전능한 창조주처럼 그는 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처지를 모르는 알량한 그 자존심, 그 굽혀지지 않는 자존심이 자꾸만 저를 망각의 길로 이끌며 저 미친 자에게 또 다른 유희를 제공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왜. 대체 왜 그는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유리관에 가두어 전시하는 거미처럼 그저 재미로 소유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사샤는 요한과의 식사를 마치고 접시에 가득 담긴 음식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창가에 앉아 있는 벨의 얼굴이 조금 뾰로통했다. “오래 기다렸어?” 그녀는 사샤를 외면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뻐 보이지 않는 건 확실했다. 사샤는 테이블 위에 스테인리스 쟁반을 가져와 그 안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 “먹을 것을 가져왔어. 안심하고 먹을 만한 것들만.” “왜 매번 사샤만 초대될까?” 사샤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벨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왜 나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해?” “글쎄.” 요한이 벨에 대해 한 이야기는 전할 것이 못 되었다. 사샤는 달리 대답할 것이 없어 말을 얼버무렸다. “불공평해.” “…….” 그렇게 말하며 벨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푸른색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소름 돋았다. 마치 너무 순수해서 질투가 질투인지, 이기가 이기인지 모르는 아이를 보는 듯했다. “나라면 기회를 만들 수 있었을 거야.” 사샤는 그녀의 뜻을 헤아려보려 했다. 그러나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가 사샤였다면 그 아름다움으로 그 남자를 유혹했을 거야. 그래서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고 간청해 보겠어.”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 남자는 사이코야. 나 같은 여자에게 유혹당할 만큼 순수하지도 않아.” “하지만 사샤는 아름답잖아.” “…….” 모르겠다. 평생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살면서 꾸며 본 적도 화장을 해 본 적도 예쁜 옷을 입어 본 적도 없다. 그나마 옷다운 옷을 입었을 땐 도첸의 국경을 넘을 때였다. 그마저도 곧 만신창이가 되어야 했지만. “내가 그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세상 모든 남자들을 다 후리고 다녔을 텐데. 그럼 이꼴을 당하고 있을 리도 없겠지.” 조금 빈정이 상했다. 악의로 하는 말 같진 않았지만 듣는이에 따라 그렇게 느끼기엔 충분한 뉘앙스였다. 사샤는 그 대화를 회피하고 싶어 머리를 쓸어올리고 치마를 털었다. “먹어. 어서.” “…….” 벨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지겹고 따분한 얼굴로 빵을 뜯었다. 내가 요한을 유혹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렇게라도 해서 이곳을 탈출하길 원하는 걸까. 그 남자에게 몸이라도 팔라는 소리인가. 아니 그건 너무 비약적인 사고방식이다. 단지 벨은 고립된 생활에 신경질이 난 거다. 차별 받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대우가 다른 것에 불만을 느끼고 부당함을 표현할 수도 있는 거다. 얌전히 제 상황을 수긍하는 것보다는 건강한 반응이다. 사샤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그다지 지금으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벨이 식사를 할 동안 사샤는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몸을 씻고 몸과 손의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그 이후엔 벨을 씻기고 그녀의 머리를 말려 주며 스무고개 게임을 했다. 끝말잇기도 하고 수수께끼도 냈다. 벨은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왔고,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눈을 감아도 악몽을 꾸지는 않는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미치지 않기 위해 악을 쓰고, 그 메아리를 위로 삼아 침대 위에서 괴롭게 울지도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렀는가. 지금은 그저 잠들 뿐이었다. 길고 깊은 평온이었다. “사샤! 사샤!” 곤히 잠든 그녀를 벨이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봐!” “벨…….” 사샤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웅얼거렸다. 시계가 없는 이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곤 해가 뜨고 지는 것뿐이었다. 사샤는 얼핏 눈을 떴다. 아직 새까만 밤이었다. 밤이라는 건 아직 자야 할 시간이란 뜻이다. “열쇠를 찾았어!” 열쇠라면 일전에 자신도 찾은 적이 있다. 쟁반 밑이었던가 음식 밑이었던가 아무튼 놀랄 것도 없다. 그것이 또 나오다니 보물찾기 흉내라도 내려 했던 건지 잘도 여기저기 숨겨 두었다. “벨…….” 사샤가 한숨 쉬듯 벨을 불렀다. 열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분명 이야기했다. 그녀의 머리를 감겨 주며, 말려 주며, 혹은 붕대를 감겨 주며 그녀가 없는 동안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가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벨. 전에도 말했잖아. 열쇠로 문을 열어 봤자 벽뿐이라니까.” “어딘가에 문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봤어. 디터 소령이 문 앞에 연고를 려놓고 가는 걸 내가 봤어!” 사샤는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벨의 손에는 정말로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사샤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벽문을 열었던 그 열쇠가 이것과 같은 모양인지 어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가는 문 같아. 디터가 분명 거기로 사라졌어.” “…….” 사샤는 희망에 들뜬 벨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희망 다음은 어김없이 절망이다. 반드시 그렇다. 또 그 절망을 감당할 여력이 이젠 남아 있지 않다. “우린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있다니까!” “잡힐 거야. 디터한테. 요한한테.” “아니야. 안 그럴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해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조심하면 돼. 조심하면 나갈 수 있어. 아주 조심스럽게 나가면 돼. 일단, 일단 나가 보는 거야. 그게 안 되면 문밖에 뭐가 있는지라도 살펴볼 수 있어.” “벨. 우리는…….” “이대로 계속 살 순 없어!” 벨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이대로 계속 살 수는 없다고! 알아?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매일매일 이렇게 죽을 때까지 살 수는 없단 말이야!” “벨.” 아니야, 벨. 우리는 이대로 살 수 있어. 나는 이대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매일매일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고, 매일매일 피투성이가 된 이불과 옷을 빨지 않아도 돼. 자고 싶으면 언제든 잘 수 있고 착하게 있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도 있어. 이대로 살면 안 돼? 이대로 살면 안 될까? 죽음을 각오한다면 어떻게든 나갈 수야 있다. 창문을 깨고 몸을 던지면 된다. 울창하게 자라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무숲들 사이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면 된다. 그다음엔 모든 걸 운명에 맡기면 돼. 나가려고 한다면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이대로도 나쁘지 않잖아. 너만 괜찮다면. 너만 있어 준다면 나는 외롭지 않아. “여긴 감옥이야. 사샤! 나는 철창에 갇힌 강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내겐 가족이 있어! 엄마, 아빠를 찾아야 한다고! 내 동생도 찾아야 한단 말이야!” 벨의 말이 사샤의 허를 찔렀다. 가족.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가족. 저에겐 없고 그녀에게 있는 것. 갑자기 발밑이 수만 갈래로 찢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끝이 없는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벨이 저에게서 저만치 물러나 버린 것 같았다. 절대로 다다를 수 없이 멀리. 벨이 애원했다. “사샤! 도와줘! 우리 같이 나가자! 제발!” “…….” 마음이 뒤틀린다. 끔찍한 상상을 했다. 내게도 가족이 없으니, 너 역시…… 너 역시 없어도 돼. 아니! 아니야! 안 돼! 이러면 안 돼! 그런 잔인한 상상을 하다니! 끔찍해! 그 자체로 죄를 짓는 거야. 안 돼, 사샤 로랑.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자신의 저열함을 믿을 수 없었다. 복부에 통증이 일었다. 매스꺼웠다. 그녀는 제 입을 막고 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역겨운 것들이 쏟아져 나올까 두려웠다. “사샤.” “…….” “사샤, 괜찮아?” 내가 무슨 생각을…… 대체 무슨 생각을…… 아니, 그러나 매일 생각했다. 죽어 가는 군인들, 선량하고 가엾은 어린아이들이 피를 토하면 슬프고 안타까워 우는 한편에 그깟 일들 따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마음의 그림자. 문병을 온 연인의 꽃다발, 곤히 잠든 아이의 이마에 닿는 상냥한 엄마의 입맞춤. 포옹. 자장가. 가끔은 그런 것들을 외면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추악하고 일그러진 본심. “사샤. 배가 아픈 거야? 그래? 누워. 어서 누워.” 벨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사샤의 몸을 눕히고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사샤. 얼굴이 창백해. 미안해.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사샤에게 화를 내겠어. 사샤가 아니었으면 난 진작 죽었을 거야. 지금 사샤가 어떻게 되면 난 견디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제발 아프지 마. 내가 배를 쓸어 줄게.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몸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 벨이 사샤의 뺨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이 감옥에서 꼭 나가자. 우리 모두를 위해서. 두고 봐. 난 포기 안 해.” “…….” 너무 오래 이곳에 있었다. 두려움이 앞선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잘 길들여진 개처럼 사샤는 익숙해진 일상과 공간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미안해. 벨. 너는 인형이 아닌데. 어느새 나도 너를 그렇게 생각했나 봐. 미안해.   늦은 밤까지 잠을 설치다 사샤는 늦잠을 잤다. 정오쯤이 되어서야 눈을 뜨니 벨은 자랑스럽게 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카펫 위에 주저앉은 그녀의 무릎 아래로 알코올 솜과 붕대가 지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봐! 사샤! 나 혼자 연고도 바르고 붕대도 감았어! 잘했지?” 그러나 사샤는 대답을 하는 대신 헝클어진 머리를 쓸고 제 목을 매만졌다. 입안이 메말라 목구멍까지 쩍쩍 갈라졌다. 그것을 눈치챈 벨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라 물 컵을 건넸다. “자.” “고마워.” “곧 디터 소령이 오겠지? “아마도.” “사샤가 요한과 식사를 하러 가면 나는 디터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몰래 쫓아가 볼 생각이야.” 사샤가 하얗게 질려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는 훈계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벨!” 벨은 안심하라는 듯 사샤의 어깨를 꼭 쥐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가득했다. “걱정 마. 사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디터 소령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걸 벌써 알았을 거야! 열쇠를 찾으려고 할 게 분명하다고!” “본인이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모를 거야.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면 돼. 그 사람은 결벽적이니까 분명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을걸?” “벨! 이건 너무 위험해!” 그 사람이 어떻게 제 포로들을 다루는지 알잖아. 그 사람이 얼마나 우리를 끔찍하게 고문했는지 알잖아. 이건 너무 위험해. 너무나 위험하다고. 불안해하는 사샤의 등을 벨이 어루만졌다. 이제 불안에 떠는 이와 그것을 위로하는 이의 역할이 뒤바뀐 것 같았다. 그조차도 사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정말이야. 어차피 방법은 이것뿐이야.” “벨. 우리 좀 더 시간을 두고…….” “안 돼.” 그녀는 단호했다. 다시 고집스럽고 엄격한 얼굴이었다. 천진하여 더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 “더 시간을 끌 순 없어. 기회는 지금뿐이야. 그리고 우린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해.” “너무 성급해.” “사샤는 이곳에 남고 싶어?” “…….”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벨의 얼굴이 더 냉랭해졌다. “여기서 계속 그런 대우를 받고 싶은 거야? 하루에 한 번씩 그 남자와 식사하며 갇혀 살고 싶은 거야? 그래?” “……벨…….” “여기서 난 애완견만도 못한 존재야. 사샤는 사람 취급이라도 받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사샤는 좋을지 몰라도 내겐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대우야. 정말 날 생각한다면. 아니, 적어도 바른 인간이라면 사샤도 내 생각에 동의해야 해.” “…….” 대꾸할 수 없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다시 부정을 하면 부도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벨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사샤는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험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고통을 받을까 겁이 났다. 안주하고 싶었다. 이기적인 욕심인 것이 분명했다.   쾅! 디터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벨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사샤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저벅저벅 디터의 발소리가 그토록 크고 무섭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벨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터에게 이 모든 계획을 들킬까, 혹여나 그가 이상한 낌새라도 챌까 겁이 났다. “사샤 로랑. 팔자 좋군. 일어나!” “그녀는 아파요!” 사샤가 꼼짝도 못 하자 벨이 대신 항변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벨은 무어라 더 외치려고 했다. 그러나 사샤가 그녀의 옷깃을 잡고 만류했다. 아니, 그러지 마. 지금 그를 자극해선 안 돼. 사샤가 고개를 젓자 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쿵, 디터가 침대 가드를 발로 찼다. “일어나. 굼뜬 계집애.” 그가 더 화를 내기 전에 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걱정과 두려움으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 디터의 목소리가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사샤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고 디터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 그러고는 말없이 사샤를 내려 보았고 사샤는 침착하게 그를 응시했다. “팔을 벌려.” “…….” “다리도.” “…….” 사샤는 그가 시키는 대로 천천히 팔을 벌리고 다리도 벌렸다. 디터는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그녀의 실루엣을 훑었다. 몸은 휘청거렸고 그가 제 몸을 만질 때마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이를 사리물었다. 벨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녀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혹여나 그가 이상한 낌새라도 차릴까 그럴 수도 없었다. 두려웠다. 벨이 걱정되었다. 그녀의 계획이 들킬까 봐 무서웠다. 디터는 사샤의 턱을 쥐었다. 악력에 턱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입을 벌려.” 그는 분명 뭔가를 찾고 있었고 그것을 사샤가 숨겼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 사샤는 쉽게 입을 벌리지 못했다. 두려움에 질식되어 있어도 저항하고픈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입 벌려.” “…….” 그는 요한이 아니야. 그의 충실한 개일 뿐이다. 호락호락하게 따르고 싶지 않아졌다. 왠지 벨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미친놈의 진을 빼 놓을 때까지 덤벼 보면 어떨까. 요한과의 식사 시간은 정해져 있고 디터는 요한이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충견처럼 그 앞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조금 더 시간을 벌면 그는 벨의 몸을 뒤질 시간이 부족할 거다. 그러면 발각될 확률도 줄어든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 지는 것이다. “왜…… 왜 그러죠?” 사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알 바가 아니야.” “왜 그러는지 알아야 저도…….” 디터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그는 지체 않고 사샤의 뺨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사샤의 몸이 쓰러졌다. 그는 멱살을 잡아 끌어 올렸다. “잡혀 온 쥐새끼 년 주제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어디서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어. 입 벌려.” “싫어요.” 대놓고 완강하게 버텼다. 디터는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후 인정사정없이 발길질이 날아왔다. 어깨를 밟고 배를 걷어차고, 닥치는 대로 때렸다. 구둣발에 머리가 밟혔다. 두개골이 으깨질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그만!! 그만해요!” 벨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만! 그만해요! 사샤는 아프다고요! 아파요!” “저리 가!” 그가 벨의 뺨을 후려쳤다. 앙상한 그녀의 몸이 저만치 나가떨어지더니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질 않았다. 안 돼! “벨!” 사샤가 허겁지겁 일어나 벨에게 다가가려 하지 디터가 사정없이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어딜 가려고. 암퇘지 같은 년!” “아악!” “내가 왜 너희 같은 것들을 돌봐야 하냔 말이야! 젠장!” 그는 쉼 없이 구시렁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그러는 동안 사샤는 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복도를 질질 끌려갔다. 마침내 식당의 앞에 다다랐을 때 디터는 그녀를 그 앞에 내동댕이쳤다. 사샤는 속절없이 바닥을 굴러 연약하게 떨었다. 고통과 수치심이 그녀의 정신과 육체를 좀먹어 갔다. “일어서.” 사샤는 바닥에 엎어져 헉헉댈 뿐 일어나지 못했다. 참다못한 디터가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아윽!’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살육의 빛을 띤 그의 눈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었다. 그는 사샤의 면전에 이 물린 소리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네년은 그날, 보반 의원의 사무실에서 총에 맞아 뒈졌어야 했어. 그날 내가 널 죽였어야 했는데.” 왜 이유도 없는 증오를 받아야 하는가, 사샤는 디터에게 한 번 정도는 묻고 싶었다. 정말이지 왜 그토록 내가 밉고 싫냐고, 어째서 그토록 죽이고 싶을 만큼 나를 혐오하느냐고. 그런 마음을 안고 사는 것이 행복하느냐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되풀이해서 묻고 싶은 질문은 언제나 그의 잔인함 앞에서 무너졌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두려움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공포가 그것을 잠식했다. 디터는 식당의 문을 열고 사샤를 그 안으로 떠밀었다. 군침 도는 음식 냄새가 문 밖으로 퍼졌다. 사샤가 비틀비틀 안으로 들어서자 곧 문이 ‘쿵’ 닫혔다. 요한은 식탁에 앉아 경마 잡지를 읽고 있다가 사샤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꼴이 왜 그래?” 사샤는 아무 말 없이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감정을 갈무리해야 했다. 침을 삼키며 그녀는 고통과 그에게서 야기된 수치심 따위도 같이 삼켰다. 눈앞의 남자는 수치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대꾸가 없자 그는 다시 물었다. “디터에게 대들었나 보군. 왜?” “내 몸을 멋대로 만져서.” 사샤는 대충 설명했다. “아. 뭔가를 찾고 있는 눈치던데.”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다. 혹시 그 무언가를 요한도 알고 있을까? 그럴까? 예측할 수 없는 공포가 그녀의 핏줄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싫어. 생각하고 싶지 않아. 감당할 수 없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아.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가 제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혹시 디터의 물건을 훔쳤어?” “아니.” 사샤는 즉시 부정했다. 너무 즉시였다. 그녀는 재빠르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훔쳐서 뭘 해. 도망치지도 못하는데.” 요한은 보고 있던 잡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샤는 잠시의 침묵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매번 그 사람이랑 같이 오는 거야?” “누구? 디터? 그게 왜?” “별로 내게 좋은 일이 아니라서 그래.” “내겐 꽤 편리한 부하인데.” “내겐 불편한 사람이야. 그가 날 때리고 고문했으니까.” 그는 잔에 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글쎄. 너에겐 중요할지 몰라도 내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네.” 그렇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사샤는 초조하게 제 손가락을 매만지며 입술을 씹었다. 정신이 온통 문 밖에 가 있었다. 디터가 문 앞에 있을까? 아니면 잠시 벨에게 갔을까? 그가 문밖을 비우는 것을 요한이 알까? 요한도 그가 열쇠를 찾기 위해 나와 벨의 몸을 뒤지는 것을 허락한 것일까? 벨은 열쇠를 어디에 두었을까? 그것을 결국 빼앗기게 될까? 그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거지? 입술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사샤는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요한이 젖은 냅킨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피가 나니까.” 따끔한 통증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샤는 그제야 제 입술이 터졌다는 걸 깨달았다. 요한은 사샤의 입가에 묻은 피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사샤는 제 입술 위에서 골몰하는 요한의 두 눈동자를 멍하게 올려 보았다. 부탁해볼까.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벨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녀의 계획이 디터의 손에 발각될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데 그가 기꺼이 이용당해 줄까. 사샤는 그의 손을 잡고 구걸하듯 물었다. “벨과 같이 식사하고 싶어. 벨을, 벨을 데려오게 해 줘.” “…….” 요한은 제 손등을 덮고 있는 그녀의 차갑고 시린 손을 주시했다. 아직도 푸르스름한 멍이 남아 있는 까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부탁이야. 벨을 데려오게 해 줘.” “인형은 금지야.”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 요한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보았다. 붉게 부풀어 오른 볼과 터진 입술도.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녹색 눈동자도.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 사샤?” “내가, 내가 디터를 화나게 했어. 혹시나…… 혹시나 그가 벨에게 해코지를 하면…….” “그가 뭔가를 찾고 있다면 네가 어떻게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 아이에게서도 찾으려고 할 거야.” “벨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사샤는 방어적으로 항변했다. 요한은 지겨움을 느꼈다. 그는 냅킨을 바닥에 던져두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결백해!” 요한은 제 이마를 문지르며 넌덜머리가 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게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어. 나와는 무관한 일이니까.” 사샤는 애가 탔다. 단단히 닫힌 문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그랬다. 문을 닫고 있으면 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복도를 걷고 있어도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안에서는 누군가 밖에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니 벨이 비명을 질러도 이 안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우리라. 요한이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샤는 늘 그렇듯 포크를 달라고도, 접시를 바꾸자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그가 식사하는 걸 쳐다볼 뿐이었다. 정신은 온통 침실로 향해 있었다. 쾅! 요한이 식탁을 내려쳤다. 사샤가 놀라 움찔 몸을 떨었다. “정신 차려. 사샤 로랑.” “하지만…….” “어떠한 순간에도 일상의 규칙을 지켜.” “…….”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는 가끔 디터보다 더 무서운 얼굴을 한다. 그러나 사샤는 그가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아니, 어떤 때에 그런 얼굴을 하는지 예측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었다. 다만 정신이 번쩍 들며 흐릿해졌던 두려움이 선명해지고는 했다. “음식이, 음식이 넘어갈 리가 없잖아. 걱정이 돼서…….” “먹어. 억지로라도 씹어서 삼켜.” “…….” “네가 이곳에 들어와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 그거야. 먹는 것.” “난 기계가 아니야!” 사샤가 항변했다. “난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당신 같은 괴물과는 달라.” “때론 기계가 되어야 할 때가 있어. 어떨 때는 괴물이 되어야 할 때도 있지. 감정을 앞세워 자신이 사람이길 증명하려는 건 위선이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군.” 그는 입을 닦고 포크와 나이프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요한의 의자가 뒤로 밀렸다. 사샤는 일어서는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는 테이블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안 돼. 아직…… “기다려. 잠깐.” 아직 벨에게 건네줄 음식을 챙기지 못했다. 하루에 단 한 번뿐인 식사 시간, 지금 음식을 챙기지 못하면 벨은 꼼짝없이 하루를 굶어야 했다. 만일 그녀가 정말로 오늘 이곳에서 나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만약을 대비해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챙겨야 한다. “잠깐.” 사샤가 그를 붙잡았으나 요한은 냉정하게 그녀의 팔을 쳐냈다. “오늘 네 인형에게 줄 음식은 없어. 이게 다 네가 멍청한 덕분이지.” “…….” 요한은 장갑을 끼고 그녀를 스쳐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문을 닫는 소리는 디터의 요란하고 거친 소리보다 훨씬 더 크고 난폭하게 들렸다. 사샤는 황망하게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가 무엇을 집어 먹었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렇게나 많은데, 이 중 챙겨 갈 수 있는 음식은 없었다. 그러니 음식은 포기해야 했다. 사샤는 서둘러 식당을 나가 복도를 뛰었다. 활짝 열린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벨이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벨!” 사샤는 그녀에게 달려가 몸을 살폈다. “괜찮아? 다친 곳 없어?” “난 괜찮아. 정말이야.” 벨은 안심시키며 사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눈동자는 전에 없이 건강하고 밝았다.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았어.” “……뭐?” “디터가 돌아왔을 때 내가 계속 기절해 있는 척했더니 어쩌지 못하고 나가더라고. 그래서 그의 뒤를 밟았지. 그가 어디로 나갔는지 알아? 사샤?” 벨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을 이어 나갔다. “천장에, 천장에 문이 달려 있었어. 뚜껑처럼 그게 열리더라니까! 그들이 내려올 때, 사다리를 내렸다가 나갈 때 그것을 가지고 나가더라고!” 천장. 천장에 문이 달려 있다고? “밤이 되면 책상이랑 의자를 잔뜩 쌓아 올리자. 사샤. 몇 개만 올려도 금방 손이 닿을 거야.” “…….” 나갈 방법을 찾았다. 디터 소령이 열쇠를 떨어뜨린 덕에. 하지만 이렇게 쉽게? 이렇게 쉽게 나갈 수 있게 된 거야? 그래. 디터 소령의 실수 덕분이다. 이런 기회가 흔하게 오는 건 아니야. 정말 나가려면 지금 나가야 해. 그러나 선뜻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쁨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다는 생각. 이렇게 쉬웠다면 지금껏 이곳에 갇혀 있던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 그래서 애써 그것을 부정해 보고 싶어졌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아니야. 그렇게 쉬울 리가 없어. 그럴 리 없어. 이건 다 함정이야. 모함이야. 거짓말이야. 그러나 정말 이것이 끝이라면? 정말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면? 나간 후에는 어떻게 국경을 넘지? 국경까진 또 어떻게 가지? 국경을 넘은 다음에는? 막막하던 일들을 사샤는 하나씩 천천히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이들에게 잡히지 않고 국경까지 간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희망적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레사 수녀님도 만나 뵐 수 있고, 바비를 돌봐 줄 수도 있다. 시민권이 생기니 사는 건 지금보다 나아지리라. 분명 예전보단 나은 인생이리라. 갇혀 있던 일을 이야기하면 제러드 장군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요한이라는 작자는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큼 중요한 자이니 그자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 그러면 좀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그동안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왜 그것을 보호라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더는 굶지도, 맞지도, 고문당하지도 않으니 그저 이 반복되는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왜 그랬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 삶이 너무 안락했다. 자유로울 땐 자유롭지 못했다. 그때는 모든 일상이 고되고 힘들었다. 아이러니하게 갇히고 나서야 그녀는 자유롭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통제에 길들어지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자. 날이 어두워지면 여기서 나가는 거야. 무사히 밖으로 나가면 우리 부모님을 찾을 거야. 내 동생도.” 벨이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러면 우리 다 같이 이 나라를 떠나자. 국경을 넘어가면 우릴 해코지하지 못할 거야.” 함께 국경을 넘는다. 그래. 함께 넘으면 된다. 어차피 도첸군에게 쫓기는 그들이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는 불가능하다. 벨도 그녀의 가족을 데리고 자신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럼 안전해진다. 제러드가 도와줄 거야. 먼저 벨의 가족이 살 거처부터 마련해 준 다음 병원에서 나오는 월급을 쪼개 그들이 정착할 때까지 도와주면 돼. 어차피 바비는 제러드가 보살펴 준다고 했으니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평생 같이 있자. 한 가족이 되는 거야.” 벨이 또박 또박 말했다. 가족. 가족이라. 평생 함께하는 가족이라. 그게 가능할까. 정말로? 어쩌면, 어쩌면…… 모든 건 아주 쉬울지도 몰라. 새 가족이 정말로 생길지도 몰라. 그럼 더는 외롭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나간 이후의 삶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몰라. 행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퇴근길에 함께 먹을 요리 재료를 사 가서 모두와 함께 웃으며 식사할지도 몰라. 벨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면 저도 그녀를 따라 소리 내어 웃고 파도처럼 그 웃음이 온 집 안을 덮칠지도 몰라. 아아. 그래.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사샤는 벨의 손을 꽉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래. 나가자. 여기서 나가자. 여기서 나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자.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달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드리워지지 않는 새까만 밤, 모두가 아주 곤히 잠든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둘은 침대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벽난로를 바라보는 이들처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연한 얼굴로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시간이 됐어. 사샤.” “…….” 사샤는 벨이 내민 손을 잡았다. 어둠에 적응한 눈은 그림자 속의 사물들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또 그녀는 벨의 밝은 눈과 표정도 선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실로 오늘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사샤는 이제 벨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좋아, 나는 네가 이끄는 대로 가겠어. 그것이 어디든 너를 믿고 가보겠어. “가자.” 그들은 침실에서 의자와 테이블을 끌고 복도로 나왔다.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은밀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여기야.” 벨이 복도의 끝, 단단히 잠긴 벽문의 왼편, 복도에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가장 마지막 기둥의 뒤쪽을 가리켰다. “여기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갔어.” 사샤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문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만일 지금이 낮이라 해도 화려한 장식 때문에 알아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벨은 거대한 그림 아래 꽃과 조명을 받치고 있던 테이블을 끌어 그 아래에 놓았다. “이 테이블을 하나 더 놓아야 할 것 같아.” 벨이 높이를 가늠하며 말했다. 사샤는 그녀를 도와 다른 테이블 하나를 더 끌어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제 내가 올라가 볼게.” 그녀는 침실에서 가지고 온 의자를 밟고 두 칸이나 쌓인 테이블을 올라갔다. “조심해. 벨.” 위태위태한 모습에 사샤가 목소리를 떨었다. “괜찮아. 벽에 붙어 있으니까 조금만 조심하면 무너질 일은 없어. 그런데 너무 낮아. 침실에서 작은 테이블 하나를 더 가지고 와야 할 것 같아.” “알았어. 기다려.” 사샤는 종종걸음으로 침실에서 테이블을 끌고 왔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그것을 올려 주자 벨이 능숙하게 받아 테이블 위에 쌓았다. 어둠 속에서 두 여자의 몸놀림은 맹목적이고 무척이나 헌신적이었다. 벨은 무언가를 쌓고 울리는 것에 무척이나 능숙한 것 같았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놀라 사샤가 물었다. “벨. 무섭지 않아?” “응. 나는 자주 높은 곳에 올라갔거든. 친구들이랑 이런 식으로 물건을 쌓아서 나무 위로도 올라가고 지붕으로도 올라갔어. 높은 곳을 좋아하거든.” 벨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을 쌓는 그녀는 자신만만하고 흥분해 있었다. 사샤는 자신은 어떤 식으로 놀았는지 떠올리려고 해 보았다. 아홉 살 이후에는 살아남는 것조차 힘겨웠고 그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하게 행복했다는 느낌만 남았을 뿐. “의자가 하나 더 필요해.” 침실에는 이제 의자가 없다. 그러나 식당에는 의자가 무척 많았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을지도 몰라. 사샤는 식당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문고리를 돌리자 문은 미끄러지듯 열렸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다. 요한이 최초로 이 문을 연 이후 이곳은 항상 열려 있었나. 아니면 이것도 단순한 실수인가. 궁금하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한 번도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이었다. 조금 더 모든 것을 기민하게 관찰해 볼 것을. 아마 그랬다면 지금 느끼는 불안함의 수치가 조금은 낮아졌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더 안전해졌을 것이다.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좋았을 것을. 사샤는 의자 하나를 들고 식당을 나왔다. 그러고는 의자를 밟고 올라 벨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제법 높고, 아슬아슬한 탑이 쌓였다. 벨이 의자를 밟고 일어서니 그녀의 머리는 천장에 닿고도 남았다. 그녀는 천장을 손으로 몇 번 더듬더니 품에서 열쇠를 꺼내 구멍에 끼웠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조였다. 몇 번을 더 덜그럭거리더니 마침내 철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체할 수 없는 흥분이 사샤의 피를 들끓게 만들어 그녀는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맞았어! 정말로 문이었어! 벨은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벽에 두 손을 대고 힘을 주어 밀었다. 끼익―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 안 돼! 벨! 너무 빨라! “벨!” 사샤가 소리 죽여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벨은 뭔가에 홀린 듯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 돼, 안 돼. 벨! 그것은 마치 태양 같은, 눈부시도록 환한 빛이었다. 거대한 유성이 충돌하여 만들어 낸 찰나의 광명처럼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빛이 마침내 사샤의 시력을 완전히 앗아 갔다. 벨! 찌르는 듯한 고통에 사샤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소용이 없었다. 새하얀 빛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동공에 머물며 형체도, 빛도, 색도 구분할 수 없게 만들다가 아주 서서히 사라졌다. 사샤는 한참 만에 간신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천천히 빛과 어둠이 구분되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벨?”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녀가 없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빛 아래에 마치 증발되어 버린 것처럼, 그 빛에 녹아 재 가루로 날아가 버린 것처럼 벨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벨!” 사샤는 벨과 함께 만들어 놓은 탑에 올랐다. 그것은 마치 신에게 도전하는 바벨탑처럼 아득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넘어질 듯 휘청이면서도 사샤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가장 높이 쌓여 있는 의자를 밟고 균형을 잡은 후 완전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둠은 사라지고 눈앞에는 환한 빛만이 가득했다. “벨.” 눈앞의 풍경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철컥, 쇠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보이는 것은 잘 닦인 군홧발들, 그리고 제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총구, 그리고…… “손 들어. 쥐새끼.” 디터. “…….” 아. 이제야 모든 것은 확연하게 눈 안에 들어왔다. 그곳은 천장이 아니라 바닥이었다. 밖은 너무도 밝은 대낮이었고, 그곳은 수많은 군인이 지나다니는 오래된 고성의 복도였다. 군인 두 명이 사샤의 겨드랑이에 손을 껴 그녀를 끌어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멍청하면 무식하다더니, 정말 그렇군.” 디터가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뭐지? 왜 내가 여기 있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여긴 어디지? 사샤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오들오들 떨며 앉아 있는 벨을 보았다.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 옆에 총구가 바짝 붙어 있었다. 벨……. 대체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된 거야?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았다. 토끼 굴을 지나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 사샤는 도저히 이 풍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천장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은 바닥인가, 어째서 테라스의 밖으로 잔디와 나무의 뿌리와 흙이 보이고, 어째서 분수대가 서 있는가. 똑똑히 보았다. 그곳은 밤이었고, 창밖으로 빼곡한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정말이야. 그곳은 밤이었다. 해는 늘 규칙적으로 뜨고 졌고, 그곳은 완전무결하게 깊은 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바닥에 있는가? 어째서 천장이 아닌 바닥일까. 왜, 천장 위에 바닥이 있는 걸까.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벨이 지르는 소리에 넋이 나간 사샤가 움찔 놀라 어깨를 흔들었다. ……벨. 벨은 흐느끼며 사샤를 가리켰다. “저 여자가, 저 여자가 그랬어요!” 벨……? “저는 싫다고 했는데, 저 여자가 열쇠를 훔쳤다며 나가자고 했어요!” 그녀는 절규했다. 공포에 질린 얼굴과 사샤를 가리키는 손끝은 마치 거대한 방패와 잘 벼린 칼처럼 사샤의 시선을 밀어내고 또 마음을 무자비하게 쑤셨다. “정말이에요! 대령님! 저는 그곳에 있으려고 했어요! 그렇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저를 죽인댔어요!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어요!” 벨이 기어가 디터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사샤는 생각했다. 그녀는 단지 살고 싶은 것이라고. 그저 너무나 강하게 살아남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그녀에겐 가족이 있으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나 같은 타인보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 더 소중하니까. 알아. 알아. 나도 알아. 너에겐 가족이 있었지. 나와 보낸 시간보다 네 가족과 보낸 시간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찰나의 순간 나는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했고 너는 그저, 너는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란 걸. 나처럼. 바로 나처럼. 너에게 들러붙어 그렇게라도 기생하려던 나처럼. “더럽게! 어딜 들러붙어!” 디터는 발로 차 벨을 떨쳐 냈다. 벨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는 제 바지 자락을 탁탁 털고 난 후 사샤와 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나는 벙어리에 하나는 배신자라.” “아녜요!” 벨이 일어나 항변하자 디터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닥쳐!” “흑…….” 벨이 울음을 터트렸다. 사샤는 처연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기 위해 도리어 더 위험해지고, 더 가여워지는 그녀를. “내게 좋은 생각이 났어.” 디터가 말했다. 그의 눈빛이 언제나처럼 잔인하게 빛났다. 익숙한 광기가 벼락처럼 사샤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그는 잔인해질 거야. 고문할 거야. 다시 우리를 죽을 때까지 때리고, 다시 다시. 다시! “둘을 안뜰에 세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인들이 벨과 사샤를 들어 안뜰로 끌고 갔다. “살려줘! 살려 줘요! 사샤! 사샤!” 벨이 사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너무나 처절하게 불렀다. 그러나 사샤는 그에 응답해 줄 수가 없었다. 같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을 수가 없었다. 함께 침실에 있던 그때처럼 그녀를 감싸 안고 괜찮을 거라 달래 줄 수가 없다. 이미 탑은 무너졌다. 누려 왔던 평화는 자유로움으로써 해체되었다. 광야에 내던져진 인간은 그러므로 살기 위해 서로를 배신하고 또 죽였다. 디터는 휘파람을 불며 둘이 안뜰의 끝과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기를 기다렸다. 군인들이 둘에게 총을 하나씩 쥐여 주었다. 사샤와 벨 둘 다 서로를 쳐다보며 벌벌 떨었다. 디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서로 총을 쏘는 거야.” 뭐? “한 번에 한 발씩. 한 놈이 죽으면 한 놈은 살려 주지.” 사샤는 벨을 보았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 마른 잎사귀 같은 몸. 파랗게 질린 얼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진 처연한 얼굴. 흑…… 흑. 흑……. 그녀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제발……” 벨이 흐느끼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 줘……. 사샤…….” “열을 셀 때까지 둘 다 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어.” “안 돼. 안 돼. 안 돼. 난 못 해!” 사샤가 도리질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 할 수 없어. 이건 너무 잔인해. 너무 끔찍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게임이었다. 동참할 수 없다. 이 더러운 놀이에 참여할 생각은 추어도 없다. “하나!” 그러나 디터는 가차 없이 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만해! 차라리 날 죽여!” “둘!” “그만!” 사샤는 벨을 보았다. 그녀의 떠는 몸을 보았다. “사샤 미안해…….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살려줘…….” 살고 싶어 애처로운 얼굴. 혼란스럽고, 아픈 얼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잔뜩 겁을 먹은 얼굴. 안 돼. 안 돼. 안 돼! 벨은 연약하다. 또한 어리다.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녀는 그저 살고 싶을 뿐이다. 그녀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잔인하게 다가오는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사샤는 안다. 너에게 내 피를 묻힐 순 없어. 그런 끔찍한 짓을 너에게 시킬 순 없어. 사샤는 제 관자놀이에 총을 댔다. 그러자 디터가 곧바로 총구를 벨에게 조준했다. 벨은 숨을 히끅거렸다. 가느다란 다리 사이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건 반칙이야. 네가 총구를 당기는 순간 이년 머리통도 날려버리겠어.” “…….” “사격은 서로를 향할 때만 유효해. 어기면 둘 다 죽이겠어.” “사샤…….” 벨이 절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사샤는 입술을 깨물고 총을 내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잔인한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 방법은 없는 걸까. 이대로 꼼짝없이 추악한 게임에 희생양이 되어야 할까. 그때 군중들의 사이에 요한이 보였다. 그는 막 군모를 벗고 있었다.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디터도 사샤와 동시에 요한을 발견했다. “윌렌도르프 소장님!” 디터가 그에게 경례를 했고 동시에 사샤가 본능적으로 그에게 뛰어들었다. “요한!” 그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벨이 디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샤는 요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살려 줘!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 요한은 영문을 모르는 듯 침잠된 눈을 들어 디터를 보았다. 그는 요한의 곁에 바짝 다가가 낯은 목소리로 한참 동안 무언가를 속삭였다. 요한은 잠자코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나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사샤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아들었다는 표시일까? 아니면……. 다음 순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샤를 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계속해. 디터.” “……안 돼.” 안 돼, 그러지 마.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마. “미안해. 미안해. 잘못했어.” 사샤는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손바닥이 그 열기로 녹아내릴 정도로 싹싹. “다신, 다신 안 그럴게. 말 잘 들을게. 하라는 대로 뭐든지 할게. 시키는 대로 할게.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뭘? 뭘 말이야, 사샤?” 그가 물었다. 무엇을 비느냐고.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냐고. “뭐든지. 뭐든지! 뭐든지 미안해. 정말이야. 부탁해. 안 그럴게.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제발 부탁해. 제발 살려 줘. 내가 이렇게 빌게. 부탁이야. 시키는 대로 할게…….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래도 당신은 날 돌보아 줬잖아. 우리는 함께 식사했잖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잖아. 내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다정하게 닦아 주었잖아. 내게 벨을 주었잖아. 날 가두었지만 날 돌보았잖아. 우리는 친했잖아. 당신은 웃었고, 내가, 내가 당신을 웃게 만들었잖아. 당신은 나를 즐거워했잖아. 그러니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부탁해, 제발. 요한이 몸을 굽혔다.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차가운 벽안의 안에 단 한 조각의 따스함이라도 찾아보려 사샤는 열심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발. 이번만. 이번만 도와줘. 제발. 다신 반항하지 않을게. 다신 대들지 않을게. 다시는. 다시는. 난 못 해. 요한. 제발 나를, 벨을 우리를 구해 줘. 요한은 장갑을 벗고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엉망으로 얼룩진 눈물이 그의 손에 깨끗하게 쓸려 나갔다. “사샤.” “요한…… 제발…… 부탁이야. 제발 나 좀 살려 줘.”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정말……? 일순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요한은 미소 지으며 사샤의 얼굴을 가까이 당겼다. 귓가에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녀를 죽여.” 죽여. 그녀를 죽여. 그녀를 죽여야 해.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안 돼. 안 돼. 안 돼, 요한! 그는 몸을 일으키고 다시 장갑에 손을 꼈다. “디터.” 요한이 그를 부르기 무섭게 군인들이 그녀를 원위치로 다시 끌고 갔다. “요한! 요한! 제발! 요한!” 사샤는 절규하듯 요한을 불렀다. 디터가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요한!” “둘.” “제발!” “셋.” 사샤는 자리에 주저앉아 요한만을 쳐다보았다. 그의 평온한 얼굴에 단 한 번 균열이 생기길. 제발. 제발 도와주길. 마지막까지 잡고 버틸 지푸라기라고는 오로지 그뿐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제발. 흑…….” 요한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온하고 우아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마치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쏴. 사샤. 쏴 버려. 그 여자를 죽여. 안 돼. 안 돼. “다섯.” 벨이 덜덜 떨며 총을 살폈다. “방아쇠를 당겨!” 군중들 중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고함을 질렀다. “그래! 방아쇠를 당겨! 잠금쇠를 풀고 방아쇠를 당기라고!” 광기에 찬 함성과 휘파람 소리. 살육에 미친 자들이 연약한 짐승들을 우리에 가두고 도박을 시작했다. 그 광기에 사샤는 현기증이 일었다. 탕! 총알이 격발했다. 사샤는 총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총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던 벨이 기어코 방아쇠를 당겨 버린 것 같았다. 총알은 잔디밭을 파고들며 연기를 내뿜었다. 벨.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사샤를 보았다. 완전히 혼이 나간 얼굴에는 일말의 욕망이 도사렸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욕망. 이곳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욕망. 죄책감과 죄의식도 사라진 생존에 대한 열망. 벨은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일순 사샤는 그녀의 얼굴에서 디터를 보았다. 그와 꼭 닮은 광기를 보았다. 탕! 벨이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사샤를 벗어나 석벽 기둥을 파고들었다. 푸스스 연기가 날렸다. 벨의 얼굴이 다시 파랗게 질렸다. 그러더니 흐느꼈다. 총알은 빗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사샤의 차례였다. 사샤의 총구에서 총알이 나갈 차례였다. 그래서 흐느꼈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살기 위해 흐느꼈다. “사샤…… 제발…….” 쐈어. 네가 날. 날 향해 쐈어. 나는 어떤 순간에도 너를 이해했는데. 내 피로 더러워질 너의 영혼을 걱정했는데. 너는 나를 쐈어. 그런 얼굴로. 그런 처참하고 잔인한 얼굴로. 내게 가족이 되겠다 했지. 너는 내게 새로운 가족을 꿈꾸게 했어. 내 손을 잡고 평생 나와 함께 하겠다고 했지. 그런데 너는 날 쐈어. 벨. 그러더니 일순 벨의 얼굴이 뒤바뀌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떨었다. “사…… 살려 줘. 사샤.” 연약한 저 여자를 안다. 연약해서 보살펴 주려 했던 여자다. 살고 싶다는 욕망보다 외로움을 달래고 온기를 느끼고자 하는 욕망이 더 컸던 여자. 그래서 꼭 자신에게 맞춰 놓은 인형 같았던 여자. 벨. 빌지 마. 빌지 마. 벨. 나는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알잖아. 우리는 무력해. 너는 내게 총을 쐈고 나는, 그 순간 산산조각이 났어. 나는 더 이상 미래를 그릴 수 없어.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없지. 더는 너의 웃음을 떠올릴 수 없어. 따듯한 식탁에 향기로운 음식 냄새를 그릴 수 없어. 그리고 우리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너도. 나도. 아아 이 얼마나 가여운 영혼들인가. 벨. 우리는 타락했어. 우린 더 이상 서로를 향해 웃을 수 없고 다신 예전과 같아지지 않을 거야. 우린 파괴되었어. 우린 죽을 거야. 그것도 아주 추악하고 처참하게. 결국 우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어. “하나.” 디터가 다시 수를 셌다. 벨이 한 발을 쐈으니 이젠 사샤의 차례였다. “사샤.” 벨이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차라리 그곳에 있을걸. 열쇠를 창밖으로 던져 버릴걸. 그 좁은 우리에 갇혀 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겪지 않았겠지. 여전히 너는 내 품에 있고 나는 너의 머리를 말려 줄 수 있었겠지. 이렇게 잔인한 외로움을 깨닫지 않아도 됐을 거야. 이토록 공포에 질린 가엾은 네 모습을 볼 일도 없었을 거야. “둘.” 디터는 거침없이 수를 세었다. 지루한지 수를 세는 속도가 처음보다 빨라져 있었다. 그는 어느새 다섯을 새고 있었다. 벨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안 돼!” 어느 지점에서 정신을 놓았을까. 공포를 견디다 못해 미쳐 버린 것인지 벨은 눈을 뒤집으며 악을 썼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러더니 여섯을 세기도 전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사샤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찰나의 고통에 전신이 마비된 것 같았다. 사샤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탕! 다시 격발된 총알이 불을 뿜으며 튕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벨의 이마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그녀는 지푸라기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디터가 총구를 거두었다. “규칙 위반이다. 벨.” 순간 안뜰에 침묵이 감돌았다. 군인들은 지루하게 끝나 버린 볼거리에 낙담했고 사샤는 머리가 날아간 벨의 시체를 보느라 넋이 나갔다. “벨……?” 사샤가 입을 뻐끔거렸다. “생존자는 의무실로 데려가도록. 이상. 해산이다.” 디터가 명령했고 개미 떼처럼 모여 있던 군인들이 안뜰을 천천히 비웠다. 벨……? 요한이 군모를 고쳐 쓰고 몸을 돌렸다. 디터가 총을 총집에 집어넣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누워 있는 그녀의 위로 새까만 군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들이 저를 들어 안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샤는 자신이 죽음의 안에 있는지, 아니면 삶의 안에 있는지 느낄 수조차 없었다. 잊고 있었던 삶과 죽음의, 꿈과 현실의 그 고통스러운 경계에 그녀는 다시 놓인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 출구가 없는 외로움. 죽음보다 더 아픈 삶. 사샤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살아야 하는 건 너였어. 죽어야 하는 건 나였어. 살아야 했던 건……. 벨……. 벨…….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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