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3화
12.
다음 날 늦은 아침, 사용인이 사샤의 방으로 아침을 가지고 왔다. 사샤는 가운을 입고 그녀가 침대 위에 트레이를 올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요새 내의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아침을 배달해 주나요?”
사용인이 대답했다.
“아니요. 장교님들과 초대받은 귀한 손님들에게만 챙겨 드리고 있습니다.”
사용인도 금발에 벽안을 가지고 있었다. 도첸엔 유난히 금발에 벽안이 많았다. 그것은 요한과 닮았지만 누구도 그와 같다고 할 순 없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머리맡의 종을 당기시면 됩니다.”
사샤는 고개를 틀어 침대 머리맡의 종을 확인했다. 지금껏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 건지도 몰랐다.
“아. 고마워요.”
“그럼.”
사용인은 정중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사샤는 트레이에 나온 음식을 먹기 전에 모두 냄새를 맡아 보았다. 때마다 다른 과일들이 올라오긴 했지만, 메뉴는 기본적으로 늘 비슷했다. 바게트 빵과 소시지, 몇 가지 종류의 콩과 커피였다. 사샤는 벙커에 갇혀 있을 때부터 먹었던 이 음식들의 맛과 향을 아주 잘 기억했다. 음식의 향과 모양을 살피고 포크를 들기 전 그것을 제 손과 옷으로 한 번 문질러 닦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달라진 것은 또 있었다. 사물의 위치에 지나치게 민감해진 것이다. 사샤는 방을 나설 때와 잘 때에, 식사 때마다 모아 둔 빵가루를 손잡이 위에 묻혀 놓고는 했다. 만일 누군가가 몰래 방에 들어왔었다면 빵가루의 흔적을 통해 그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꽃병의 위치. 테이블의 위치, 베개의 위치, 침대의 위치, 옷이나 작은 액세서리의 위치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려 들었다.
모든 것이 요한 때문이었다. 그가 그동안 해 놓은 장난질이 사샤를 언제나 불안하게 만든 탓이었다. 그러니 통제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것이 설령 더는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상황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형성된 버릇은 고치기가 힘든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순서로 음식을 먹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콩을 몇 개 집어 먹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바게트를 뜯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소시지를 베어 물었다. 한 음식이 입안에서 잘게 조각나 목구멍으로 넘어간 후에야 그다음 것을 먹었다. 그래야 맛과 향이 입안에서 섞이지 않고 그래야 어떤 음식을 삼키고 뱉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친 후에는 커피포트에 남아 있는 커피를 잔에 따라 창가에 앉아 마셨다. 창 너머 잘 관리된 잔디와 정원이 넓게 펼쳐졌다. 신수 마을에 살 때는 네르아에 이런 성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릴 때 그녀가 본 가장 호화로운 건물은 마을 어귀에 뾰족한 첨탑을 가지고 있던 성당이었다. 사샤는 한때 그것을 성처럼 여겼다. 그곳에서 살고 싶어서 수녀가 될 거라고 부모님께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거대해 보였던 성당이 이곳과 비교하면 작은 원두막 수준도 될까 말까였다. 이곳에 와서야 네르아에 왕족이 있었고 제법 호화로운 나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족은 왜 망했을까. 다스릴 군주가 없어서 네르아는 땅을 빼앗겼을까. 학살되지 않은 네르아의 토착민들 중, 다시 나라를 되찾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을까. 다들 도첸의 국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할까. 아니면 모두 자신처럼, 이 땅에서 쫓겨나 남쪽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까.
멍하니 잔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인간은 딱 둘이었다. 디터거나, 요한이거나. 사샤는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말끔히 정복을 차려입은 요한이 보였다. 긴 다리에 늘씬하게 달라붙는 바지에, 휘장이 멋들어지게 수놓인 블레이저를 몸에 휘감고, 그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미가 느껴지는 군모를 위로 살짝 들어 올리며 여전히 잠옷 차림인 사샤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사샤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한참 남았잖아.”
“정오엔 나도 일이 있어. 네 스케줄에 맞추기는 힘들어.”
“미리 말을 해 주면 좋잖아.”
“설마 이 시간까지 뭉그적거리고 있을 줄 몰랐지.”
그는 뚜벅뚜벅 방을 가로질러 테이블에 바짝 밀어 놓은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꼭 끼는 블레이저 단추 몇 개를 푼 뒤, 긴 다리 하나를 반대편 다리에 얹은 후 그는 느슨하게 발목을 까딱거렸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뒤 물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사샤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가운을 풀고 옷장으로 향하며 그녀는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혼자 간다고 했잖아.”
“물론 나도 그러고야 싶지.”
사샤는 가운에 이어 실크 파자마도 끌어 내렸다. 요한은 그녀가 내려놓은 찻잔을 비스듬히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트레이 위에 놓인 커피포트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오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너는 결혼을 위해 요새에 머무는 손님이고, 명색이 정치인의 피앙세인데 공식적인 스케줄에 샤프롱 하나 없이…….”
무심코 바라보니, 부드러운 레이스 재질의 팬티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뒷모습이 침대의 휘장과 옷장 문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였다.
“샤프롱 하나 없이 다니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그는 식은 커피가 담긴 잔 위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커피를 부었다. 사샤가 막 실내화를 벗고 스타킹에 발가락을 끼워 넣었다. 요한이 그녀를 등지고 서서 테이블 위의 잔을 들었다. 미적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일부러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그러나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은 없었다.
요한은 뭔가를 지껄이고 싶었다. 아무 말이나. 그러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머뭇머뭇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미적지근한 커피를 삼켰다.
“디디에 신부님은 요새에 오신 지 얼마나 됐어?”
사샤가 스타킹을 허벅지에 올리며 물었다. 쫀쫀하고 가는 직물이 착, 소리를 내며 그녀의 매끈한 피부 위에 부딪혔다. 그녀는 가터벨트를 밴드에 끼우고 다시 스타킹을 매만졌다. 다시 ‘찰싹’ 피부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건 왜 물어?”
요한이 다시 잔을 채우며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분 어디 출신이신지 그런 건 알아?”
“네르아 출신이지. 요새에 온 지는 십여 년 좀 더 되었고.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 묻는 거라면 그렇다고 대답할게.”
“…….”
“어때? 네가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해?”
디디에의 출신이나 머문 기간을 묻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요한은 알고 있었다. 그렇겠지. 그는 방첩부의 우두머리이고, 이 요새의 소장이다. 의도를 감추거나 목적을 숨긴 채 그를 떠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충.”
하고 사샤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디디에를 의심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확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확인해야만 했다. 그만큼 사샤가 지닌 불안감의 수치는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녀는 나머지 스타킹에도 발을 끼워 넣고 천천히 올렸다. 스륵, 스륵 피부에 나일론이 마찰했다. 요한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준비가 다 되면 나와. 문 앞에 서 있을게.”
“뭐?”
사샤가 되물었다. 그러나 요한은 다시 대답해 주지도 않고 왔던 대로 방을 가로질러 나가 버렸다. 다시 묻는 소리를 들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사샤는 진이 빠졌다. 하여간. 제멋대로지. 스타킹을 마저 가터벨트에 끼우고 은은한 푸른색 원피스를 옷장에서 꺼내며 그녀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날씨는 사시사철 비와 안개를 달고 사는 지역에 걸맞지 않게 유독 화창했다. 기분이 가라앉은 두 남녀가 느끼기에 다소 민망할 지경이었다.
요새의 사람들이 햇빛을 만끽하고자 담요를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잔디밭 곳곳에 그것을 깔고 앉아 술을 마시고 과일을 먹고 책을 읽으며 전례 없는 날씨를 만끽했다. 사샤는 흡사 축제가 시작된 듯한 분위기 속에 요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는 급작스레 말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으레 살살 긁어 대거나, 조롱이 섞인 농담을 던졌을 사람이 사샤가 옷을 다 갈아입고 방을 나온 이후, 그답지 않게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린 것이다. 왜 저러지? 갑자기?
“날씨가 좋네.”
견디다 못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요한이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다였다.
“요즘도 마구간에 들러?”
“…….”
“타리프는 어떤 사람이야?”
“…….”
“돌시는 당근 말고 다른 좋아하는 것은 없어?”
“…….”
“돌시 말고 다른 아끼는 말은?”
“…….”
“이봐!”
사샤가 참다못해 고함을 빽 지르며 자리에 멈췄다. 요한은 그보다 몇 걸음 더 떼었다가 뒤를 돌았다. 흥분으로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콧김을 황소처럼 뿜었다.
“갑자기 귀가 먹었어? 왜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해?”
씩씩대는 그녀의 머리 위로 금목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을을 기다렸다 수많은 꽃과 열매들을 피우는 금목서는 그 향이 만 리를 간다고 했다. 신부가 잠옷 속에 넣어 유혹한다는 향. 요한은 그것에 사샤의 향기가 섞여 있음을 알았다. 그는 낯빛을 굳혔다.
“그냥 조용히 가면 안 되겠어?”
“갑자기 입을 꾹 다무니까 그렇지. 갑자기 그러니까 기분이 이상하잖아. 내가.”
요한은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앞으로 옮기는 것을 사샤가 뛰어가 잡아당겼다.
요한이 그녀의 손을 쳐냈다. 탁, 하고 손등과 손목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컸다. 사샤는 넋이 나갔다. 그토록 맹렬한 적개심을 보이는 그를 처음 보았다. 놀라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제 블레이저 자락을 잡아 내리고 가느다란 백금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이마를 가리던 몇 줄기의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뒤로 넘어갔다. 그에게 험하게 다루어진 적은 많다. 쓰러지거나 목이 졸리거나. 그렇지만 한 번도, 한 번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늘 절제되어 있었던 탓에. 사샤는 한 번도 그것을 폭력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번 손을 쳐내는 동작임에도 사샤에게 그것은 폭력으로 다가왔다. 더없이 잔인하고 난폭한 것으로. 사샤는 얼이 빠져 물었다.
“이제 너도 곧 날 때릴 참이야? 바닥에 쓰러뜨려서 발로 밟고 뭉갤 참이야? 디터처럼? 너도 똑같은 인간이니?”
“그와 내가 다르다고 한 적 없어.”
요한이 입을 열었다. 사샤는 그의 표정을 읽어 보려 애썼다. 아주 희미한 그의 감정 같은 것.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차라리 오만한 빛을 띠든지, 조롱의 빛을 띠어 주길 바랐다. 향도 색도 없는 그의 얼굴은 그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끔찍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너에게는 나나, 디터나 죽여야 하는 원수일 뿐이잖아.”
“…….”
“이제 와 달라질 게 있어?”
그 물음에 사샤가 대답했다.
“아니. 없어.”
그러나 사샤는 자신이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 버렸다는 것을 안다. 그곳에서 디터와 요한의 거리는 어느새 멀어져 있다. 자신을 기점으로 그와 디터는 시소처럼 서로 반대편에 서 버렸다. 디터가 있는 장소의 이름은 증오와 복수였다. 그 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하고 깊어졌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자리에 붙여야 하는 이름은 아마도 증오와 복수의 반대말이리라.
그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증오와 복수에서 멀어지고, 증오와 복수로 다가가면 요한에게서 멀어졌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 요한에게 당신을 죽이겠노라 이야기했던 때와는 점점 더, 돌이킬 수 없이 달라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그런 얼굴을 할 거라면 더 일찍 했어야지. 애초에 나와 닿는 것이 싫었다면, 나를 경멸했다면, 애초에 나를 만지고, 웃고, 상냥한 척 굴지 말았어야 해. 그랬다면 당신의 온기를 원할 리 없어. 외로움에 사무칠 때, 당신을 떠올릴 일도 없을 거야.
“걸어. 사샤.”
그러면, 당신의 표정과 말투에 상처받을 일도 없다.
사샤는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을 바닥에 떨구었다. 애초에, 이딴 것을 소중히 들고 있어선 안 됐어. 사샤는 요한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성경책을 보고 시선을 저에게 옮기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걸으라고 하니 보란 듯이 걸어갔다. 요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쫓다가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몇 걸음 뒤처져 말없이 사샤의 뒤를 따랐다. 금목서의 향이 부질없이 그들을 뒤쫓았다.
성당에 도착하자, 조금 이른 시간에도 디디에가 나와 반갑게 맞았다. 요한과 몇 마디 정중한 인사를 나눈 후, 그는 사샤를 전날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티 테이블이 놓인 작은 다과실로 안내했다.
“조금 이른 도착이로군요.”
디디에가 데워진 우유를 포트에 담으며 말했다.
“네.”
사샤는 짧게 대답했다. 디디에는 시럽과 홍차 잎을 준비하며 힐끗힐끗 사샤의 안색을 살폈다. 심란하고 우울한 낯빛이었다. 디디에는 다과상을 챙기며 요한이 그녀의 성경책을 건넨 일을 떠올렸다. 닦아 낸 것이 분명하지만 책등과 모서리에 흙과 마른 낙엽이 묻어 있었다. 그는 요한과 사샤, 그리고 더러워진 성경책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궁리해 보았다.
“디터 대신 누가 따라올까 궁금했는데 요한이 직접 모시고 왔군요.”
“…….”
디디에의 말에 사샤의 얼굴이 한결 더 어두워졌다. 오는 길에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사샤 양, 무슨 일입니까? 설마 요한이 무슨 몹쓸 짓을 한 건가요?”
“아니요. 아녜요. 아니, 모르겠어요.”
사샤는 고개를 젓다가 혼란스럽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그녀는 어깨를 떨었다. 디디에는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무엇이든 이야기해 보세요. 같이 해답을 찾아봅시다.”
“차라리 그가 나를 때렸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내게 디터처럼 굴었다면…….”
그랬다면 정말로 쉬울 것이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디터에게 가진 감정처럼 명쾌하고 깨끗하고 단순했을 것이다.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란 얼마나 쉬운가. 그것을 눈덩이처럼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증오하던 대상에게 열정을 갖는 것은 어떠한가. 이토록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해답이란 것이 존재할까.
“처음엔 증오뿐이었어요. 그를 볼 때마다 화가 솟구쳐서 머리가 텅 비어 버릴 정도였어요. 자다가도 그를 생각하면 불길에 타 죽는 것 같았어요. 이가 갈리고 온몸이 아팠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 뜨거움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온종일 그를 죽일 궁리를 하다가, 그러다가 그를 찾게 되고, 그를 찾아서 다시 증오를 불태우다가……. 그러다 헤어지면 저는 또 그 사람을 생각해요.”
사샤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파르르, 유리잔이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요한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가 나일 수 있는 순간은 오직 그와 같이 있을 때뿐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종일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다가 그를 만나면……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되는 것 같아요.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나는 그에게 집착하고 있어요.”
요한만이 이 고통스러운 나날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착할 필요도, 참을 필요도, 배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배설하고 싶은 대로 배설하면 그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진창에 떨어지고 굴러 오물투성이가 된 저에게 그는 그제야 비로소 너답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녀의 안의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더럽고 가장 추잡한 자아를 끄집어내곤 했다.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는 모습을 그에게는 참 많이도 보였다. 그를 증오하면서도, 사샤는 그를 의지하고 있었다. 분노에는 어리광이 섞였고, 때론 비틀린 애정이 숨어 있었다.
그가 웃으면. 그러면, 화가 나는 동시에 한편으로 안심하고는 했다. 그가 보여 주는 인내심과 유쾌함이 혹시나……. 혹시나 애정일까. 가끔은 강압적이기까지 한 배려는 어쩌면 특별한 것이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편 사샤는 그 모든 순간을 이리저리 재고 따져 가며 수없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되뇌어 떠올리고는 했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증오는 열정이 되고, 열정은 예정이 되고, 애정은……. 이제 집착이 되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 이것이 올바르고 정상적인 감정이라면 떠올릴 때마다 이토록 무섭고 떨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토록 모든 것이 새까맣고, 아득하고,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무거웠다. 이 감정이 족쇄 같았다. 온몸을 꽁꽁 싸맨 쇠사슬 같았다. 결국은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 갈 파멸의 전조였다.
“그를 죽이면…… 그러면…… 나는 해방될까요?”
사샤는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너를 죽이면, 그럼 나는 멈출 수 있을까. 그러면 이 사슬을 풀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내가 죽어야, 그래야 모든 것이 끝날까.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너를 놓지 못하면. 혹은 그 이후에도 너를 놓지 못하면 그땐, 그땐 어쩌지.
“사샤.”
디디에가 찻잔을 매만지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손은 따듯하고 건조했다.
“당신이 가진 감정이 무엇이든 그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잘못된 거예요! 이건 완전히 잘못됐어요!”
“사샤.”
“나는 그를 위해 변명을 해요! 그가 내게 한 짓들이요! 나를 가두고, 고문하게 하고, 내게 독을 먹이고! 친구를, 친구를 죽이게 한 모든 일들! 그것들의 변명거리를 찾아요! 그를 위해서…… 나는 그가 내게 한 짓들에 정당성을 찾으려고 한다고요!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사실 모든 건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를, 그를 이해하려고 한다고요!”
내가 왜 그래야 해! 왜! 그를 이해할 필요도, 그를 감싸 줄 필요도 없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는 네르아를 침략해 학살을 자행하고 나라를 빼앗은 도첸의 장교이고, 간부며, 라울 서기장의 심복이다. 신문이, 이 요새가, 그의 휘장이, 그가 보여 주는 권력이 그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증명한다.
증오해야 맞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그의 행동에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편에 서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자신이 하려는 것은 그것이었다. 패륜이었다. 배신이었다. 더러운 변절자였다.
“당신은 내내 혼자였어요. 그리고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고요. 신이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어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의지할 곳을 찾으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그것은 신이 우리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 ‘본능’이란 선물일 뿐, 누구도 비난할 수 없어요.”
사샤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려 깊고 진중한 눈으로 사샤의 파리한 낯빛을 살피며 더욱 힘주어 이야기했다.
“사샤 양. 당신도 당신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세요. 그래야 괴로움도 줄어듭니다.”
아니.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받아들여선 안 된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무너지고 만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자위하기 위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밖에 안 된다. 그런다고 해서 이 괴로움이 덜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떤 말도 그녀에게 위안이 되는 것 같지 않자, 디디에는 사샤를 아주 잠시라도 괴로움에서 건져 내기 위해 아예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내일 함께 신수 마을에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요?”
“신수 마을이요?”
사샤가 고개를 들었다. 괴로움에 짓이겨져 있던 눈이 무구하게 깜빡였다. 디디에는 미소 지었다.
“네. 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아마 사샤 양이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분계선의 접경지와 가까워 거의 개발되지 않았거든요. 부모님께 인사도 드릴 겸.”
도첸에 첩자로 들어와 모든 것이 끔찍했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이곳에서 디디에를 만난 것이다. 어쩌면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그래서 두 번 다시는 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고향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의 무덤을 어루만져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고통이 오로지 그것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 역시 감사해야 할는지도 몰랐다. 살아 있길 잘했다는. 지금껏 견뎌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단 하나의 위로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 보고 싶어요.”
한결 밝아진 목소리에 디디에가 환하게 웃었다.
“잘되었군요. 모든 준비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나와 함께 가십시다.”
사샤도 디디에를 따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뺨 위에서 식어 버린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그 후엔 신부 수업을 위해 성경을 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적인 성경 말씀만을 몇 번 외우고 그 나머지 시간은 다른 이야기들로 채웠다. 네르아와, 신수 마을에 대한 소소한 추억거리들. 그것만으로도 쉴 새 없이 떠들 수 있었다. 사샤는 디디에와 이야기를 나누며 생기를 되찾아 갔다. 종종 하늘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처음처럼 절망적인 빛을 띠지는 않았다.
다시 종이 울렸다. 오후 1시를 알리는 단발의 육중한 소리. 수업은 끝났고 사샤는 성경책을 덮었다. 아직도 성경의 두꺼운 가죽 위에 요한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커버를 한 번 매만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한은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쨍하니 뜬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그 사이사이 보석처럼 빛나는 햇살을 들여다보았다. 푸드덕 비둘기가 날아가며 짧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뎅― 하고 첨탑 위의 종이 울렸다.
그는 손을 내리고 새파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바람 한 점 없이 청명했다. 구름은 몇 시간째 제자리에 머무는 것 같았다. 요한은 하늘에 몇 가지의 색이 있는지를 가늠했다. 푸른색. 하얀색. 회색, 노란색. 그러느라 누군가 저에게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사샤가 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였다.
“바쁘다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널 기다리고 있었지. 나름대로 바빴고.”
“…….”
사샤는 냉랭한 눈으로 그를 내려 보다가 말했다.
“디디에 신부님이 당신을 찾아.”
요한은 상체를 일으켜 뒤를 보았다. 디디에가 성당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중하게 두 손을 모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그를 기다리는 듯했다.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에 묻은 낙엽을 털어 냈다. 햇살 아래 백금발이 눈부시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사샤는 그것을 외면하려고 몸을 틀었다. 그러고선 애꿎은 나무만 쳐다보았다.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지 말고.”
“…….”
대답하지 않자 요한도 그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디디에 신부는 요한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가 성당의 계단을 오르자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사샤 양을 데리고 신수 마을에 다녀올까 합니다.”
“네…….”
요한은 제 어깨와 바지에 묻은 흙과 풀잎을 털어 내느라 대충 내뱉은 뒤 다시 물었다.
“그것도 신부 수업의 한 부분입니까?”
“아니요. 제가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이자, 성직자의 임무죠.”
요한은 군모를 바로 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한 시간은 저의 권한이니 소장님이 가타부타할 일은 아니기도 하고요.”
그는 제 뒷머리에 붙은 낙엽 하나를 털어 내고는 흔쾌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맞아요.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은 없죠. 그렇지만 제가 지정한 사람과 동행하셔야 할 겁니다. 뭐. 명목이라면 안전상의 이유라고 해 두죠.”
아니면 다른 이유든가. 이유야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샤와 디디에 둘만 보낼 수는 없다. 요한은 둘이 같은 고장의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디디에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신수 마을의 성당 사제였다는 것과 그곳이 사샤의 고향이라는 것 말이다.
또한, 디디에는 요새에서 유일하게 요한이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절대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서 디디에는 신의 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내세웠고 때때로 요한의 제안이나 성의를 거부하기도 했다.
요한은 그런 디디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하나쯤은 견제의 대상을 남겨 두는 것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았다. 게다가 성직자인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는 될 수 없으니 더더욱 그 대상으로 적합했다. 위험하진 않지만 동시에 동등하게 보이는 인간으로서 디디에는 지금까지 충분히 만족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으로서, 또 사제로서의 죄의식과 부채감으로 사샤에게 섣부른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선량하고 헌신적이며 제법 용감한 사제였다. 그러니 그가 사샤에게 가지는 애틋함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요한은 그 애틋함이 디디에의 성정과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위험으로 닥치기 전에 미리 견제하며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안다.
“차편도 제가 마련하도록 하죠. 아무래도 그편이 더 안전하실 겁니다.”
디디에는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래서야 서로 불편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과 사샤를 위해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사샤가 어떤 명목으로 보반과 결혼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이 결혼에 사랑이 없다는 것도. 있는 것이라고는 두 명의 꼭두각시와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국익이라는 허무한 명분뿐이라는 것도.
만일 지금이 평화로운 시대라면 디디에는 모두를 위한 정의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에겐 정의로운 일이 누군가에겐 악한 일이 되고, 누군가에겐 이익이 되는 일이 곧 누군가에겐 불행의 파도가 덮치는 일이 되는 때였다.
완벽한 정의란 없었다. 다만 자신이 조금 더 정의롭다고 믿는 것을 택할 뿐이다. 만일 완벽한 정의를 펼친다면 디디에는 이 결혼을 반대해야 옳았다. 진실한 사랑이 아닌, 이익을 얻기 위한 목적의 허례허식일 뿐이라면 신의 권능 아래 축복을 빌어서도, 맹세해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을 거부하면 사샤는 그 가치를 상실한다. 체제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되지 못하면 그녀는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그러면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디디에는 이 모든 것이 신에 대한 모독이며 죄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해진 규율대로 이 결혼을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조금 더 정의로운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사샤 양에겐 친구가 필요합니다.”
“글쎄요. 과연 필요할지 모르겠는데요. 아마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겁니다.”
분명 그는 ‘벨’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일화는 이미 디디에도 사샤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디디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겐 버팀목이 필요해요. 아니면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겁니다. 요한. 모든 사람이 다 당신처럼 강하진 못해요.”
요한이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디디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 사내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누군가는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사려 깊고 다정한 남자라고도 했다. 요한은 다정하면서 난폭했다. 처세술이 좋아 누구에게나 친절한 반면 누구에게나 잔인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디디에는 그가 누구보다 투명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이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깊이가 없었다. 그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선악의 구분이 없었고 충실히 자신의 본능에만 따랐다. 그에게 백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모든 수단이요, 그 외의 쓸모없는 것은 전부 쓸모없는 ‘흑’이었다. 요한의 세계에는 오직 그 두 가지 성질의 것만 존재했다.
그러니 온기를 원하는, 감정의 교류를 원하는 사샤의 속을 그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녀의 외로움을. 고통을. 그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퍽이나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만약 그녀가 무너진다면, 디디에. 그녀를 죽여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요한은 미소 지었다. 근심에 가득 싸여 잔뜩 인상을 찌푸린 디디에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표정.
“할 수 있다면 그녀를 신에게 인도해 보십시오. 여러모로 그편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요한은 격식을 차려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엿볼 수 없었다. 디디에는 사샤에게 다가가는 요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러며, 요한에게 사샤란 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껏 피어났다가 그 쓸모가 다하면 그의 발밑에 말라 비틀어져 부서져 버리는 것. 그는 성호를 그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그녀를 도우소서.
사샤가 반보 앞에 걸었다. 요한은 그녀의 반보 뒤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돌시는 당근보다 옥수수를 좋아해.”
조용히 불어오는 바람 소리처럼, 아니면 발밑에 구르는 낙엽 소리처럼 요한이 말을 걸었다. 사샤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 닿았다. 그는 내내 사샤의 뒤통수를 보고 걸은 듯했다.
“옥수수보다는 사과를 좋아하고.”
사샤는 ‘아’ 하고 짧게 소리 내었다. 두 시간도 더 전에 물었던 것을 이제야 대답하는 것이다. 떨떠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타리프는 이곳에 왕가가 살았을 때부터 대대로 마구간을 지켰어. 그는 말을 아주 사랑해. 그리고 이 성도 매우 아끼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추억과 흔적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까.”
“…….”
“나는 마구간의 모든 말을 아껴. 이 영지의 돼지도. 닭도. 젖소도. 땅에 피는 꽃도. 나무도.”
그는 성당에서 요새로 이어지는 길고 드넓은 정원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자연은…… 아무 이유 없이 가진 것을 베풀어. 동물은 친구를 사랑하고 주인을 섬기는 데 조건이 없지. 생명을 가진 것 중에 예측할 수 없이 잔인한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야.”
그것은 마치, 그는 인간 이외에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 같았다. 그가 증오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말로 들렸다. 문뜩 뿌리부터 썩어들어 갔다는 신수 나무가 떠올랐다. 신수 나무가 죽기 전, 자행되었던 주민 학살. 그리고 그 이후에 요한의 처형까지.
“신수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고 들었어. 맞아?”
요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의 질문을 즉흥적으로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르아를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거든. 신수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도첸의 국민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지.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앞에서 뒤통수를 날렸어. 그리고 사람들은 저항할 명분을 잃었고 결국, 싫든 좋든 모두 도첸의 국민이 됐어. 최소의 희생으로 우린 최대의 이익을 봤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 요한에게 사람의 가치는 그 정도인 것이다.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 따져 본 후에 실이 될 때는 한 톨의 미련도 없이 그를 버린다. 오로지 득이 될 때만이 가치가 있었다. 그에게 인간이란 산, 바다, 하늘, 가축, 짐승, 나무와 꽃, 심지어 아주 작은 풀 한 포기보다 못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애정에는 조건이 있고, 늘 필요로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채워 줄 때만이 사랑을 준다고. 그의 말이 한편으로는 맞다. 인간의 욕망이란 스스로 비우지 않는 한 영원히 그 갈망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를 채워 주면 둘을 원하고 둘을 채워 주면 셋을 원한다. 그래서 애정이란 계속해서 자라나는 꽃에 주는 물과 같았다. 점점 더 많은 것이 끝도 없이 필요하다.
요한은 그것을 무용한 것으로 생각했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웅덩이에 어째서 매번 물을 들이부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단지 단 한 번의 입김으로도 멀리 날아가 싹을 피우는 것도, 그저 가만히 앉아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매일 만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그의 주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애정을 주고 자라나는 생명이 존재한다.
“매일 밤 병원의 딱딱한 침대에 무릎을 꿇고 드렸던 기도가 뭐였는지 알아?”
사샤가 말했다.
“내 부모님을 죽인 놈을 찾게 해 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그놈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주세요.”
“…….”
“감사의 기도 같은 건 할 수 없었어.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어. 대신 매일매일 엄마·아빠를 꿈속에서 보게 해 달라, 오빠를 제발 살려 달라, 그놈들을 죽여 달라 빌었지.”
“…….”
“하는 거라곤 모두 그런 기도뿐이라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
“하나는 이루어졌네. 이럴 줄 알았으면 포기하지 말고 좀 더 해 보는 건데.”
“난 딱히…….”
“알아. 당신은 이익을 위한 철저한 계산으로 한 행동이라는 거. 그래도 내 소원 중 하나는 이루어진 거야. 어찌 되었든 동료의 총구에 뒤져 버렸으니까. 그만큼 처참하기도 힘들잖아.”
“…….”
“그러니까, 고마워. 당신이 당신의 동료들을 죽이는 바람에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
칭찬이나 감사의 인사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멸시일지도, 아니면 비난일지도 모른다. 받는 이에겐 달갑지 않은 인사치레였고 사샤도 딱히 저의 태도와 말투를 번복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일도 당신이 올 거야?”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며 지나쳤다. 요한은 갑자기 그녀가 무척 멀리 있다고 느꼈다. 지금껏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있다고 오해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도 저도 아닌, 진심도 거짓도 아닌 듯 허공에 맴도는 그녀의 말처럼 딱 그 정도가 적당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 쓸모 있는 도구와 그것을 보관하는 도구함 정도의 사이. 그러면 서로에게 해가 될 일이 없다. 위험할 일도 없다.
사샤는 대답을 기다리는지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청명한 하늘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부신 오후의 햇살 아래 그녀의 피부가 진주처럼 빛났다.
그녀는 요새 정원에 장식해 놓은 아프로디테의 대리석 조각처럼 눈부셨다. 투명한 바닷물처럼 푸르른 원피스의 안 어느 곳에 검붉은 멍 자국이 물감처럼 번져 있는지 요한은 안다. 곧게 편 가슴의 아래, 갈비뼈 부근을 지그시 잡으면 고통에 몸을 움츠리리라. 그리고 너는 울음을 터트리겠지. 어쩌지 못하고 안았던 감촉. 손바닥 아래 떨리는 그녀의 척추와 날개 뼈가 아직도 진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졌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걸어갔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오는 모습을 사샤는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녀는 요한이 조금 더 가까이 오기를 열망했다. 그가 다가오면 추위가 사라졌다. 흐렸던 시야가 명료해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비로소 몸과 마음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고동쳤다. 각막과 동공이 그를 그리려 분주해졌다.
“내일도, 내일도 올 것이냐니까?”
요한은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윤곽을 따라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따라갔다.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만지는 것 같았다. 비단 같은 눈길이 그의 모든 윤곽을 그렸다.
“그래. 올 거야. 내일도.”
아아.
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