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27화
26.
집 안에는 집기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쾅! 짤랑! 쿵! 쾅! 콰광! 챙! 여러 가지 소리를 내며 여러 가지 물건이 벽이나 존 로랑의 몸에 부딪혔다.
“사샤! 왜 이래!”
“왜 이래? 왜 이러냐고!!”
그는 놋쇠 그릇을 들어 제 오빠에게 막 집어 던지고 악을 썼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날 속일 수 있어! 이 빌어먹을 거짓말쟁이!”
“방금 나쁜 말 썼어. 사샤.”
바비가 소파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다 지적했다. 요한은 그 옆에 앉아 제 허벅지에 앉은 고양이를 매만졌다. 마리는 그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그의 무릎에서 떠나질 않았다. 존은 허리를 숙여 그것을 피하고는 항변했다.
“내 말 좀 들어 봐, 사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정보국의 지침이 그랬다고!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나는 나라의 녹을 먹는 일개 공무원일 뿐이잖아!”
“그건 내 세금이야! 존 로랑!”
사샤는 찬장 옆에서 집게를 집어 들었다.
“너 이외의 무수한 국민이 낸 세금이지! 난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기로 맹세…….”
사샤가 그것을 집어 던졌다. 집게는 살벌한 소리를 내며 벽에 꽂혔다. 존 로랑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봉사하기로 맹세한 사람이라고!”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잖아! 적어도 빈 묘지를 붙잡고 통곡하게 하는 일은 없었어야지! 네가 정말 내 오빠라면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 넌 당장 미친 여자처럼 그러지! 저 새끼가 살아 있는 건 비밀로 해야 하지! 나도 방법이 없었단 말이야!”
흠. 미친 여자라. 요한은 마리의 등을 긁으며 사샤가 미친 여자처럼 구는 게 어땠는지 떠올렸다. 제법 볼 만한 그림이었다.
“요한이 죽었다고 했잖아! 3년 동안 날 속였어! 무려 3년 동안 감쪽같이 날 속였다고! 너도 마찬가지야! 요한 폰 윌렌도르프! 이 망할 거짓말쟁이야!”
“사샤. 나쁜 말을 계속하고 있어.”
“넌 방에 들어가 있어! 바비!”
사샤가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바비는 울상이 되어 요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사샤! 저 새끼가 여기 있는 것도 불법이야! 쟨 자기 존재를 완벽히 지워야 한다고! 저 새끼가 요한 폰 윌렌도르프란 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그자는 죽었고 저놈은 이제 ‘화이트’란 말이야!”
“닥터 윌리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요한이 중얼거렸다.
“입 닥쳐, 요한!”
남매가 동시에 그에게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로랑 집안 같으니. 요한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계속해서 고양이의 등을 긁었다. 존의 주의는 다시 사샤에게로 향했다. 그는 한층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사샤. 내 말 이해했어? 저 새끼가 여기 왔다는 걸 정부에서 알면 나도 쟤도 철창행이야. 이건 완벽한 명령 위반에 근무지 이탈이라고. 도첸의 전범이 도첸에 들어오다니!”
예정에 없던 일이다. 존은 요한이 이 집에 들어와 있는 걸 목격하기 전까지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얌전히 연합국의 어딘가에 처박혀 있거나 아니면 지금껏 그랬듯 다른 지중해의 나라로 휴가를 떠난 줄 알았다. 설마 제 동생의 집에 숨어들어 있었을 줄이야!
“넌 나중에 따로 이야기 좀 해. 화이트 요한 폰 염병할 윌렌도르프.”
존이 이를 짓씹으며 말하자 요한이 빙그레 웃었다.
“기꺼이. 존 로랑.”
다행히도 사샤의 집은 갑작스레 방문한 두 남성에게 각각 방을 내줄 만큼 넓었다. 다만 침대도 이부자리도 없는 것이 흠이었다. 사샤는 대충 아무 이불과 베개를 그들에게 집어 던졌다. 사샤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쌌다. 무려 3년 동안 자신이 한 맘고생을 생각하면 그들을 지붕 위에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성에 차지 않았다.
“사샤, 사랑하는 혈육에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니?”
존은 그녀가 집어 던진 베개와 이불을 뒤적거리며 애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땐 이러지 않았잖아. 적어도 소파에서는 재워 달라고.
“입 닥쳐. 존 로랑. 엽총 가져오기 전에.”
“…….”
그녀는 정말로 엽총이 있고 정말로 그것을 쏠 줄 알고 진실로 그것을 쏠 만큼 화가 나 있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므로 그는 조용히 이불을 펴고 누웠다. 사샤는 쾅 존 로랑의 방문을 닫았다.
요한은 사샤가 던지고 간 베개와 이불은 그대로 놔둔 채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쌀쌀한 봄바람이 휘파람처럼 방 안으로 쓸려 들어왔다. 요한은 눈을 감고 바람과 풀의 내음을 만끽했다. 달이 꽤 밝았다. 그 덕에 무수히 뜬 별들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사방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귀뚜라미가 날개를 비비는 소리뿐.
그야말로 고요했다. 평화로웠다. 그가 알고 있던 도첸은 늘 비행기가 날고, 군홧발의 둔중한 소리가 들리고, 수시로 자동차의 엔진 음이 들려오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한때는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가 없어질까 두려워했었다. 그 소리가 높은 건물을 세우고, 불을 밝히고 도로를 포장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라져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평화로울 뿐.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것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작은 집, 아담한 정원, 너무 고요해 제 심장 소리까지 들리는 침묵, 가끔 울리는 종소리처럼 떨리는 귀뚜라미 소리.
끼익. 문이 열렸다. 밤이 깊어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요한은 고개를 돌려 침입자를 확인했다. 사샤였다. 그녀는 손에 작은 등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잠이 안 와, 사샤?”
그는 물었다.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놓고, 심지어 3년을 죽은 사람처럼 살아 놓고 마치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산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당신은 왜 안 자는데?”
“글쎄. 난 원래 잠이 많지 않잖아.”
몰라. 잠이 많은지 어쩐지. 우리는 한 번도 같이 아침을 맞이해 본 적이 없잖아.
“저것 봐, 사샤.”
요한이 하늘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의 미소가 아이처럼 해맑다.
“달빛이 아주 예뻐.”
“…….”
사샤는 그의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달빛보다 그의 눈이 더 빛나는 것 같았다. 심술이 날 만큼 예뻤다. 여전히 넌 변한 것이 없구나. 난 너무 많이 변해 버렸는데. 사샤는 무릎을 모으고 그 위를 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당신은 날 보고 싶은 적이 없었나 봐.”
요한이 마침내 달에서 사샤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빛을 머금은 채였다. 달빛이 그의 눈으로 옮겨 간 것이 틀림없다.
“그럴 리가.”
“그럼 왜 날 한 번도 안아 주지 않아?”
“안으려고 했는데 네가 주먹을 날렸잖아.”
그걸 변명이라고……. 사샤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하긴 넌 언제나 좀 별났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지.
“지금 안아도 될까?”
“…….”
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웃으며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친김에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향을 들이마셨다. 요새에 있던 때와는 다른 향이었다. 다른 종류의 샴푸겠지. 하지만 이것도 이 나름대로 좋았다. 요한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 봤다. 평화로웠다. 지극히.
“오빠가 네 유품이라고 내게 건넨 게 있는데. 그건 정말 네 거 맞아?”
요한은 붉은 머리 묶음을 기억해 냈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주워서 주머니 속에 숨기던 날도.
“입고 있던 옷가지를 태운다며 모두 빼앗아 갔어. 그건 아마 존이 태우기 전에 몰래 빼돌렸을 거야. 난 지니고 있을 수 없었거든.”
사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요한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사샤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와 꼭 시선이 맞았다.
“그럼 어쨌든 네 거긴 한 거네? 그렇지?”
“그래.”
“넌 그때부터 날 사랑한 거야. 그렇지?”
“……몰라. 그런 건지…… 아니면…….”
사샤. 네 눈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빛이 얼마나 영롱한지. 뜨는 해보다, 하늘의 별보다, 환히 비추는 달보다 그것이 더 나를 눈부시게 한다. 넌 여전히 그것을 모르겠지.
“더 오래전인 건지.”
“왜, 3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어? 날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봤다면서.”
“네가 날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땐 그랬다. 네가 새로운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과거의 어둠은 묻어 두고 행복한 삶을 찾아 파랑새처럼 떠나길 바랐다. 네가 행복해지면 내 인생도 가치 있을 것 같았지. 나는 조용히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려고 했어. 네가 웃는 것, 네가 친구들을 만나는 것. 그러다 사랑에 빠져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낳는 것. 네가 그들에게 둘러싸여 죽어 가는 것. 그러다 언젠가 네가 내 빈 무덤에 그랬던 것처럼 네 무덤에 꽃을 놓아 줄 수 있기를.
“나는 욕심을 내는 것에 서툴러. 사샤.”
“…….”
“뭔가를 원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난 오랫동안 내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알아. 그런 건.”
사샤가 그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댔다. 심장 고동이 손바닥을 울린다.
“나도 한때는 당신이 그렇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도 나처럼 심장이 뛰고 있더라고.”
요한은 오랫동안 자신은 심장이 없다고 느끼고 살아왔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매번 고동을 확인해야 했다. 매일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나 낯설었던가.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사샤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얼마나 여기에 머무를 수 있어?”
“하루.”
“그 이후엔?”
“모르겠어. 어디론가 또 떠나겠지.”
“레드본을 찾아서?”
“그래. 레드본을 찾아서.”
사샤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요한은 얇은 네글리제 안으로 느껴지는 사샤의 어깨와 등을 천천히 쓸었다. 보드랍고 뜨거운 그녀의 피부와 온기가 느껴졌다. 문뜩 그녀의 피부를 직접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요한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고 턱을 들어 올렸다.
사샤의 얼굴이 조금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요한도 아주 희미하게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것, 혹은 외로움이나 허전함 같은 것.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새까만 방 안에 작은 전구가 깜빡거리듯, 사샤는 요한의 어둠 속에 작은 빛들을 몰고 왔다. 언젠가 그것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한 전구들처럼 크고 환한 빛을 낼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알 수 있다.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어. 요한.”
“…….”
“네가 어디에 있든 그럼 우린 연결될 수 있잖아.”
요한은 사샤의 뺨과 입술을 쓰다듬었다.
“네가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사샤. 넌 결혼도 하지 않았잖아. 이미 바비라는 아이가 있고. 고양이도 한 마리 기르고 있지. 어쩌면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네 인생이 불행해질 수도 있어.”
“네가 내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보다 더 불행한 건 없어.”
“…….”
사샤는 요한의 손을 붙잡고 그의 손가락에 키스했다. 도톰한 입술에서 열기와 숨결이 느껴졌다. 손끝이 저릿했다.
“네가 없을 동안 네 대신 사랑을 쏟을 존재가 필요해. 아이가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넌 나를 찾아올 거야. 그렇잖아.”
“…….”
“언제가 되어도 나와 아이를 찾아줄 거야.”
“…….”
사샤는 그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불가항력이었다. 요한은 그녀의 손길에 저항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순간을 누구보다 고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샤보다 더 오랫동안, 더 깊게 갈망하고 원해 왔다.
“사샤…….”
요한은 제 셔츠 단추를 푸는 사샤의 손길을 느끼며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던가?”
사샤는 설핏 웃었다. 그러며 진지하고 침착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서 셔츠를 벗겨 냈다.
“했어. 요한. 아까. 이제 입 맞춰 줘. 어서.”
요한은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개처럼 재빠르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을 빨고 핥다가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혀를 굴렸다. 제 허벅지에 가뿐히 앉히자 사샤가 도톰하고 말캉한 혀를 얽어왔다. 입가에 질척한 체액이 고였다.
요한은 그녀의 등과 어깨를 더듬어 올라가 네글리제 끈을 벗겼다. 얇고 보드라운 실크가 저항 없이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사샤는 흥분으로 들썩이는 제 젖가슴으로 그의 손을 이끌었다. 요한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말캉하고 따듯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절로 신음이 났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흠모했음을 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라 손가락질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열정을 품은 남자들이 수두룩했다. 외로움에 함몰되어 한번쯤 그들에게 기댈 수도 있었다. 한 순간이라도 열락으로 그것을 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샤는 지난 3년간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았다. 흠이 없는 조각상처럼 그녀에게는 균열을 일으킨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요한은 한 때 그녀에게서 뜨거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교회 창문마다 스테인드 글라스로 새겨진 성인들처럼 그녀도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했었다.
“사샤.”
요한은 그녀의 젖무덤을 주무르고 엄지로 유두를 긁으며 속삭였다. 사샤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헐떡였다.
“내 손길이 그리웠어?”
요한은 한시도 그녀의 뜨거움을 잊은 적이 없었다. 손을 스치던 부드러움. 말랑거리고, 매끈하고 촉촉한 감촉. 귓가에 닿던 달콤한 속삭임과 달뜬 얼굴, 흐릿하게 감기던 나른한 눈동자까지도. 언제나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너를 만난 후엔 자꾸만 네가 보였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지쳐 쓰러져 잠들 때에도 눈을 감으면 자꾸만 네가 떠올랐어.
“내가 그리웠어?”
당연하여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사샤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입술을 붙였다. 요한이 달갑게 그것을 맞아주었다. 입을 벌려 신음을 뱉고 혀를 내밀어 그녀가 빨도록 했다. 저릴 정도로 가슴을 주무르며 희롱하다 그녀의 척추를 타며 덧그리다 얇고 낭창거리는 허리를 쥐었다가 얇은 속옷 사이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쓰다듬고 더 깊고 은밀한 곳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사샤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했다. 요한은 제 목에 휘감긴 사샤의 팔 하나를 풀어 제 부푼 앞섶에 대고 문질렀다.
“핥아줘. 사샤.”
“아….”
그의 손가락은 부탁을 하는 동안에도 열심히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서 왕복 운동을 했다. 사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핥아달라고?
“…어 …어딜?”
요한이 열심히 제 앞섶에 그녀의 손바닥을 비비적거렸다. 여기?
“……여기? 여기 말이야?”
얼떨떨한 음성으로 물었다. 요한은 제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 다음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툭 붉어져 그녀의 손을 찔러댔다.
“그래. 여기.”
페니스를 핥아달라고?
“네가 핥아 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그냥 핥으면 되는 거야?”
요한이 몹시도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개처럼 엎드리면 돼.”
“…….”
“개처럼 엎드려서 내 것을 핥아 줘.”
밤하늘 달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천사 같았다. 비록 타락한 자일지라도.
사샤는 그에게서 물러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요한은 제 바지와 속옷을 단번에 벗어 던지고 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개처럼 핥아 달라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이다. 사샤가 무릎으로 기어 그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요한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몇 번 빗어 넘겨주더니 제 하반신으로 그녀의 머리를 눌렀다. 평안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그의 페니스는 흥분으로 뻣뻣하게 기립한 채였다.
사샤는 그의 것에 손가락을 휘감았다. 꿀꺽 침을 한번 삼키고 그녀는 혀를 살짝 내밀며 어색한 얼굴로 그를 올려 보았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거야. 그렇게 해.
사샤의 입술이 선단에 닿을 듯 가까웠다. 어서 해. 사샤. 어서. 억지로 누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비단 같은 갈색 머리를 그는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조바심에 입술이 메마르고 입안이 버석거렸다. 머뭇머뭇 다가온 그녀의 혀가 마침내 할짝, 하고 그의 것을 가볍게 핥았다. 요한의 골반이 움찔 떨었다.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나오려다 끊겼다. 사샤가 확신이 없는 눈으로 다시 그를 올려 보았다. 요한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고 사샤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혀를 내밀어 그의 것을 핥았다. 조금 뭉근하게 조금 더 길게. 요한은 마침내 안심하는 듯, 만족하는 듯 ‘아’ 하고 신음을 토했다. 사샤는 열심히 핥았다. 맛도 없고 색도 없고 향도 없는 것이었지만 제가 혀를 움직일 때마다 제 정수리에 쏟아지는 그의 숨과 신음소리가 좋았다. 여간해서는 들을 수 없다. 그가 만족스레 내뱉은 신음이나 혹은 헐떡이는 숨소리 같은 것.
“사샤. 입을 벌려 봐.”
헐떡이며 그가 멍령했다. 사샤는 영문도 모르고 작게 입을 벌렸다. 요한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그녀의 머리를 아래로 짓눌렀다. 삽시간에 그의 페니스가 입안에 들어찼다.
‘웁’ 하고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났다. 요한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제 허리를 짓쳐 올렸다. 그의 것이 목젖을 스쳤다. 침입해 온 것을 내뱉으려 열심히 구역질을 해댔으나 그의 것은 계속해서 목구멍을 드나들었다. 그가 들어찰 때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만! 그만! 사샤가 그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그를 밀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힌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입안에 물려있는 것 때문에 그것을 알려줄 수도 없었다. 안 되겠는지 사샤는 그의 음낭을 쥐고 힘껏 당겼다.
“아!”
하고 그가 크게 신음을 내질렀다. 동시에 제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풀렸다. 사샤는 콜록거리며 재빨리 머리를 들었다.
“콜록, 콜록, 죽을 뻔 했잖아! 이 변…….”
‘이 변태 새끼야!’를 끝마치지 못하고 뒤로 발라당 쓰러졌다. 요한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긴 탓이었다. 그는 재빠르게 사샤의 허벅지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밀부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읏!”
사샤가 움찔 몸을 떨며 신음을 토했다. 요한은 그녀가 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 주었다. 개처럼 엎드려 그것을 핥았다. 이제 사샤는 그가 어떤 감촉을 느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감미롭고 부드럽고 황홀했다. 허리가 멋대로 움직였고 그가 했듯 사샤도 그의 보드라운 백금의 머리를 움켜쥐게 되었다. 변태 새끼란 말은 취소다. 지극히 인간적이라 정정한다.
요한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입술을 부딪치고 혀를 얽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요한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단번에 그녀의 질구 안으로 페니스를 집어넣었다. 예고 없이, 준비 없이, 갑작스러온 삽입이었다. 사샤는 ‘히익’하고 숨을 들이켠 채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가 제 안에 들어왔음을 뒤늦게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요한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샤는 정신없이 허우적대며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였다. 강해지지도 약해지지도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고 그녀의 안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반복되는 기계적인 움직임이 사샤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매번 그가 들어왔다 나가는 느낌이 달랐다. 분명 같은데도 달랐다. 반복할수록 그것이 쌓였다. 그녀의 안으로 무언가를 계속해서 밀어 넣는 듯 고양감이 부풀어 올랐다. 사샤는 손톱을 세우고 그의 어깨를 긁어댔다. 제 몸이 어찌 될까 두려웠다.
“아! 아아으,”
신음이 비명처럼 바뀌자 요한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쉬. 하고 그가 말했다.
“존이 듣겠어.”
제 동생을 깔고 누운 것을 알면 놈은 내 멱을 따버릴 거다. 아무리 너의 동생이 먼저 아이를 갖고 싶어 했노라 이야기해도 놈의 분노는 오롯이 자신에게만 향할 것이다.
“알겠지? 사샤?”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착하지. 요한은 천천히 손을 치웠다. 숨을 고르는 그녀의 입에서 단 향이 났다. 그것을 삼키고 싶어 그는 사샤의 입술을 제 입으로 덮었다.
요한은 다시 움직였다. 등줄기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벗은 몸이 번뜩거렸다. 추삽질에 속도를 붙였다. 사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요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힘껏 매달렸다. 그러자 요한은 그녀의 허리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히는 듯하더니 그는 상체를 뒤로 눕히고 다리를 뻗었다. 사샤는 어느새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움직여 봐.”
사샤는 도리질 했다. 자신이 없었다.
“해 봐. 사샤.”
요령이라도 알려 주려는 듯 요한이 그녀의 골반을 잡고 앞뒤로 비볐다. 그것만으로도 ‘아윽’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안 돼. 요한. 못해. 소리가 날 거야. 못 참을 거야. 요한은 계속해서 그녀의 골반을 흔들었다. 소리 내지 않으려 제 손등을 물었으나 쉽지 않았다. 사샤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자 했으나 요한이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못 해?”
요한이 물었다.
“못하겠어?”
응 하고 사샤가 성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작게 웃으며 무릎을 세웠다. 그 무릎 위로 사샤의 손을 이끌었다. 더듬거리다가 그녀는 그것을 쥐었다. 몸이 뒤로 젖혀지며 골반이 위로 떴다. 요한은 그녀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뒤로 밀었다. 허벅지가 활짝 벌어짐과 동시에 엉덩이가 위로 떴다. 곱슬거리는 음모, 젖어서 번들거리는 음순과 질구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것이 머금고 있는 저의 페니스도.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원초적이고 음탕한 동시에 그가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 생각했다. 그가 허리를 들었다. 그러자 사샤의 질구 안으로 그의 페니스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샤의 사타구니에 근육이 뭉쳤다. 힘줄이 돋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앞뒤가 아닌 위 아래로 허리를 움직였다. 퍽, 하고 부딪혔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 광경을 골몰했다. 사샤의 애액이 그의 아랫배로 후두둑 떨어졌다. 뜨겁고 더럽고 난잡하여 황홀하였다. 사샤는 두 손으로 제 입을틀어막고 쏟아지는 신음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한이 두 손으로 온전히 그녀의 무게를 지탱한 채 행위를 계속할 동안 사샤는 인형처럼 무력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피스톤 운동을 계속했을까 슬슬 사정감이 몰려왔다. 종잇장처럼 나풀거리는 사샤의 허벅지를 놓으니 그녀의 몸이 허물어졌다. 요한은 그녀를 다시 바닥에 눕혔다. 힘없이 낙하한 그녀의 무릎을 들어 올리고 눌렀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지 사샤. 내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는 사샤의 엉덩이가 위로 들릴 때까지 그녀의 다리를 누른 뒤 제 것을 삽입했다. 사샤가 몸을 떨며 까무러쳤다. 빠르고 거친 추삽질 끝에 그는 단발의 신음과 함께 울컥, 제 것을 그녀의 안에 쏟아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고양감에 허리가 몇 번이나 잘게 움직였다.
요한은 곧바로 페니스를 빼내지 않았다. 머물 수 있을 만큼 머물다 사샤가 버티지 못해 다리를 버둥거릴 때가 되어서야 제 정액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유의하며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힘을 주면 안 돼. 사샤. 알았지?”
힘을 주면 밖으로 흘러내릴 테니까.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본능적인 행위인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접힌 다리를 내려주었다. 허벅지가 딱 붙도록 자세를 잡아 준 뒤 그녀의 옆에 모로 누워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헐떡거리는 그녀의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사랑해. 사샤. 내 세계에는 온통 너뿐이야.”
요한이 진심을 다해 귓가에 속삭였다. 알아. 나도 알아. 네 세계엔 나뿐이라는 걸.
나도야. 나도 그래. 내게도 온통 너뿐이야. 내 머리에도, 내 가슴에도, 내 삶에도 온통 다 너 뿐이야.
“아이를 갖도록 해줄게 사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안아 줄게.”
사샤는 소 리내어 웃었다. 닿아있는 그의 몸이 따듯했다.
“응.”
사샤는 그 밤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염원했다.
다음 날. 요한은 떠났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를 위해 끓여 둔 스프와 붉은색 튤립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이제 막 정원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을 꺾어 둔 모양이었다. 사샤는 꽃을 들고 창밖을 보았다. 아침 해는 찬란했고 전날과는 다르게 따듯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에서 벚꽃이 개화하고 있었다. 곧 그것은 흐드러지게 피어나 첫눈처럼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요한. 당신이 다녀가고 난 네르아의 날씨는 신비할 정도로 맑아.
돌아와. 언젠가. 스치듯 지나갈지라도,
당신이 또다시 떠나야 할지라도.
기다릴게. 요한.
언제라도.
여기서.
외전
판결문을 들여다보는 재판관의 하얀 수염이 기이하게 움직였다. 그는 몇 번 입을 오물거리다 긴장감이 가득한 청중의 뇌골을 흔드는 목소리로 죄인의 이름을 외쳤다.
“죄인! 요한 폰 윌렌도르프!”
사내는 허리와 손목에 포승줄을 찬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제법 허름해진 도첸의 군복을 착용 중인 그에게 쏠렸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백금발 아래 푸른 눈동자는 죄인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밝았다. 좌중은 침을 삼키며 재판관으로부터 그의 형을 확정 짓는 다음 문장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형을 선고한다.”
재판관이 탕탕. 판결봉을 두 번 내리쳤다. 한쪽에서는 신음이 흘렀고 한쪽에서는 그 역사적 현장을 담으려는 기자들의 번쩍이는 플래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기자들은 사형선고를 받는 순간, 요한의 표정에 대해 모두 한결같이 기술했다. 마치 아무 감정이 없는 괴물처럼 보였노라고. 그다음, 또 다음 죄인이 차례대로 사형을 선고받고 울음을 터트릴 때도,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할 때도 요한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그 자리에 박제해 놓은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분노, 절망, 슬픔, 환희, 감격이 뒤섞인 그 적나라한 공간에서 그는 그 어떤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는 듯 보였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당당하여 더 잔인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처음으로 사형 집행일 전, 사형수에게 지급되는 짧은 몽당연필과 종이 한 장에 대해 생각했다. 빈 백지로 남겨두어야 할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남겨야 할지. 남긴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남겨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나는 전쟁의 서막이 드리워지기 전, 따듯한 남쪽의 한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원시시대의 모습 그대로 수렵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부족인이었던 나의 부모님은, 쏟아져 들어오는 산업화 문물에 매료되어 그들처럼 부유해지기 위해 대륙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고,
그때쯤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철강산업의 부족한 일손을 메우고자 이주 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이던 도시 네피란에 정착하였습니다. 부모님은 금세 부유해지셨습니다. 아마 머리가 무척 좋았기 때문일 겁니다. 도덕적인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올바른 분들이었다면 나 같은 괴물이 태어날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에겐 성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겐 마땅한 이름도 없었습니다. 섬에서 모친의 이름은 배추 나비였고, 아버지의 이름은 푸른 바다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은 하얀 눈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네피란에 정착하고 얼마 안 돼 이름을 지녔고 머지 않아 귀족의 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 그것은 나의 특징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의미 없는 이름과 성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어디에도 하얀 눈처럼 내 머릿빛이나, 배추 나비처럼 모친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았으니까요.
학교에서 나는 때때로 ‘노인’이라 불리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노인이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요한이라는 나의 이름보다 ‘노인’이라는 별명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더 내게 알맞은 이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나는 아이들의 놀림에도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노인이라 놀리며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했답니다. 정말로 무엇이든지요. 여자아이에게 꽃을 꺾어다 주라고 하면 꺾어다 주었고,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따오라고 하면 열매를 따왔고 개미를 밟으라고 하면 밟았고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를 죽여 오라면 죽여서 가져갔습니다. 거미나 뱀을 잡아 오라고 하면 잡아갔고 개구리의 배를 갈라 보라고 하면 갈라 보였습니다. 나는 단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들은 나를 무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린 얼굴을 하며 도망을 가거나, 울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이후엔 누구도 내게 명령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나는 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심심하여 개미를 죽이고, 뱀을 잡고, 거위의 배를 갈랐죠. 나는 그저 의아했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으니까요.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지금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내가 도달하는 곳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갈라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심지어 부모조차 나와 눈 맞추기를 꺼려 했습니다.
난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괴물로 만든 건지. 내게 뱀을 잡아 오라고 시키는 대신 꽃을 심으라고 했다면요. 저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대신, 꽃을 따다 화관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니요. 아닐 겁니다. 다른 것을 알려주었어도 종국에 저는 같은 괴물이 되었을 겁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내가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어디에도 물들지 못했어요. 무엇도 내게 스며들 수 없었지요. 나는 견고한 성벽으로 만들어진 성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단단하여 나조차도 나를 허물 수가 없는 그런 성 말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고립 된 채 살아왔습니다. 내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하답니다. 새까만 침묵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지요. 마치 늪지대에 들어차 있는 악어처럼 저는 조용히 침잠하여 시끄러운 세상을, 정신없는 삶을 그저 관찰해왔습니다.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까요?
때론 당신 역시 상동 떨어져 있는 기분을 느껴보았노라 할 수 있겠죠. 그리하여 고립된 듯한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해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평생 행복도, 불행도, 그래서 외로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정반대의 방향에 서 있는 그 두 단어의 정 가운데에 있는 추처럼 어느 곳을 향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저는 너무도 당연하게 기쁨도, 슬픔도 그로 인한 미소를 지을 수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면. 당신은 그 또한 짐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느 때고 평온했답니다. 세상의 어떠한 절망도 내 안의 평화를 깨뜨리진 못했습니다. 네. 저는 그것을 평화라고 칭합니다. 그것이 종국에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하여도 네. 그것은 제게 분명 평화였습니다.
우리는 (나를 제외한) 아주 오랫동안 신은 선한 이를 사랑하고 그리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선과 악을 심판하여 선한 이를 천국으로 이끈다고 배워왔지요. 그러나 실상, 이 세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신이 사랑하는 선한 이란, 자비롭고 정의로운 영혼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이기에 솔직하며 그리하여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만 같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동족의 뱃가죽에 칼을 찔러 넣을 수 있는 맹목적인 사랑. 내가 성경에서 읽은 신은 그러한 자입니다. 나는 그런 자들이 신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지 지켜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자들 중 하나지요.
당신은 나를 무엇이라 정의하겠습니까? 당신도 다른 이들이 나를 부르듯 괴물이라 생각한다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나는 진실로 신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생명일 겁니다. 내가 섞일 수 없는 이 세상이 내 눈에 얼마나 쉽게 보이는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좇아 이곳에 도달했을까요. 어떤 이들의 눈에 내가 좇는 것은 돈이나 권력일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의 눈에는 붉은 피와 뜨거운 죽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것은 오로지 이 허무하고 지루한 심연의 진흙 속에서 나를 끌어내 줄 단 하나였답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열망하는 아주 뜨겁고 강렬하고 위대한 곳으로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나는 공허해졌습니다.
사샤 로랑.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새까만 어둠, 축축하고 더러운 곰팡이 내음 안에서 연약한 짐승의 눈빛을 한 그 여자와 마주했을 때 어쩌면 그때 나는 도망쳤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고 따끔한 감각이 내 목덜미까지 차고 올라왔을 때 어쩌면 그때 그녀를 죽여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뻣뻣한 가죽장갑 안에 식은땀이 고였을 때, 나는 그때, 어쩌면 그때.
그녀로 인해 만들어진 그 미미한 균열들…… 그것이 종국에는 나를 두 동강 내어 버릴 것이라고 예감하면서도, 어쩌면 말입니다. 어쩌면…… 저는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을 고대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죽음 앞에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했으니까요.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가느다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악어일지, 아니면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퍼떡이는 짐승일지 아니면 그저 나약하고 처연한 죽음 앞의 인간일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는 지금 평생의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뜨겁고 벅찬 무엇인가를.
만약 계획대로였다면 나와 사샤 로랑이 만날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제러드가 레드본의 충실한 개로 만족했더라면 사샤 로랑은 으레 다른 순진한 처녀들이 그랬듯 보반의 손에 농락당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제러드는 본인의 위치에 만족할 줄 몰랐고,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원했으며 결국 그는 레드본의 위협이 되고 말았죠. 사샤는 그런 제러드를 향한 본보기였습니다. 자신의 분수와 위치를 지키라는 무언의 협박이었습니다. 반역죄를 물어 보반과 사샤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면 차라리 모든 것이 쉬웠을 테지요. 그러나 나는 더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모르겠군요. 나는 운명이나 필연 따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만약 내 인생에 있어 어떠한 순간을 ‘운명’이라 일컬어야 한다면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던 그때일 겁니다.
나에게는 통상적이고 순조로운 절차를 밟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제러드, 보반, 레드본과 나, 요한만이 존재했고 어디에도 사샤 로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충동적인 일이었습니다. 지루한 날들, 나태한 햇볕 아래 그저 약간의 유희가 필요했던 겁니다. 철창을 열고 들어가 본 피투성이의 사샤 로랑은 마치 방치된 관절 인형처럼 보였습니다. 피와 취조실의 온갖 오물로 더럽혀진 그녀는 기묘하고, 처연하며 또한 숭고할 정도로 아름다웠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신을 믿나? 사샤 로랑?’
그녀는 사지의 힘줄이 끊긴 이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바르르 떨던 입술을 꼭 물었다 뱉고서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믿지 않아.’
아아. 그 순간을 박제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때 사샤 로랑의 목소리를, 그 눈빛을. 그 축축하고 더러운 오물의 냄새 속에 섞인 그녀의 연약한 숨소리를. 처음으로 내 심장을 두드리던 그 뜨겁고 오묘한 박동을.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내가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고 그것이 나를 두드리는 순간, 나는 완전히 열려버렸습니다. 아주 활짝. 매서운 바람이 안으로 들이닥칠 만큼 활짝. 그리하여 그 순간, 저는 사샤 로랑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기묘한 순간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새롭고 낯설고 그리하여 처음으로 지루하지 않던 순간을 말입니다.
나는 그녀가 내게 충심을 다하는 군인이나 충견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내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무엇’이 될 거라는 것은 알았답니다. 그리고 나는 간절히 그녀가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몰두했고 그녀를 시험했고 가능한 한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 애썼습니다. 그녀는 마치 아름답지만 곧 바스러질 섬세한 유리공예품 같았고 저는 그녀가 부서지지 않도록 새롭게 담금질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실험용 쥐처럼 다루었습니다. 두드리고 담그고 두드리고 담그기를 반복하며 그녀가 끓어오르다가 식는 모습을 반복하여 관찰했죠. 나는 그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어요. 나를 죽이겠노라 말할 때 툭, 불거져 나오는 목과 이마의 핏대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그녀가 된 듯 심장박동이 빨라지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뜨거움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마치 처음으로 빛을 본 자와 같을까요? 아니면 처음으로 어둠을 들여다본 자와 같을까요? 무엇이었든지, 그 뜨거움은 정말이지… 정말이지 경이로웠답니다. 나는 마침내 개안한 장님처럼 네, 바로 그것처럼…… 그녀를 신봉하고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나는 그녀의 잘린 머리카락을 주워 내 가슴팍에 쑤셔 넣었습니다. 성물을 신봉하는 광신도처럼 나는 그녀의 일부분을 가슴에 지닌 채 나는 그녀의 빛에 내 눈이 멀기 전에 그녀가 내게서 도망쳐주길 원했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관찰자였습니다. 내게 세상이 쉬운 만큼 다른 이들에겐 어려웠을 테고 내가 다른 이를 판단하듯, 다른 이들은 나를 판단할 수 없었을 겁니다. 나조차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는 나를 누군가가 느끼고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테니까요. 어떤 이들은 나를 무서워하고 어떤 이들은 나를 동경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나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내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느낄 수가 없었으니까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으니까요. 나는 그들의 눈빛을, 행동을, 생각을 읽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사샤가 주는 뜨거움은 그래서 강렬했고 나를 도취시켰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 나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녀는 나의 작고 귀여운 고양이였답니다. 손을 대면 하악질을 하고 그러다 손톱을 세워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내게 치명적이지는 못한 존재. 그녀가 남기는 상처는 간지럽다 못해 애달프기까지 했지요.
사샤 로랑이 내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것은 그녀가 내 뺨을 할퀴었을 때도, 내 목을 졸랐을 때도, 심지어 단도로 내 옆구리를 있는 힘껏 찔렀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돌시를 타고 숲을 가로지르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그녀가 내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답니다. 왜냐하면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느끼는 열기가 그녀에게서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척추를 울리며 내 장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나는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나신의 여자가 내 허벅지에 제 엉덩이를 부빌 때 느껴지는 욕구를 내 옆구리를 찌르고 태연히 앉아 나를 비웃으며 사랑을 논하는 여자에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마침내, 처음으로, 진흙구덩이 속의 악어가 아닌 인간으로 삶이라는 비극의 무대의 한가운데로 내던져졌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몸이 떨려옵니다. 손끝이 하얗게 바래버리고 머리가 텅 비어 버리고 맙니다.나는 삶을, 사랑을, 섹스를, 그리고 남자로서 한 여자를 소유하고픈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게 결코 오지 않을 거라 여겼던 순간이 마침내 도래해버렸고 나는 매일 밤 두려움에 떨었답니다.
나는 타들어 가는 사막 위의 잡초가 되어버렸습니다. 잔인한 태풍 앞의 마른 가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흔들리고 부서지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갈망했답니다.
나는 드디어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어쩔 도리가 없는 내 갈망을 부수고 깨트리고 찢으면서도 그것에서부터 멀어질 수가 없었답니다. 매초, 매분, 나는 정신을 잃고 맙니다. 나는 때때로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답니다. 나는 내 안에 끓어오르는 갈망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더 큰 갈증이 몰아닥치고는 했습니다.
그녀로 인해 나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저열한 욕구와 비틀린 욕망을 가진 수컷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한 나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이제 고통의 달콤함을 압니다. 타는 듯할 갈망의 쾌감을 압니다. 나는 마침내 내 안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알고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노라 감히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샤 로랑의 온기를 떠올리려 애씁니다. 여전히 그녀를 갈망하는 내 뜨거움을 느낍니다. 이제 나는 세상을 느낍니다. 그 안에 들어서서 내가 느끼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아픔을, 고통을, 희망과 절망을, 그리고 헌신을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디디에.
만일 당신이 천국에 있다면, 필시 그곳에 있겠지만, 그곳에서 신을 만났다면 부디 간청하건대 사샤 로랑의 모든 고통을 내가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해주십시오. 그리하여, 감히 전할 수 없는, 갈 곳 없는 사랑을 부디 품에 안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제 나는 당신에게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나는 감히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녀를 위해 조국을, 신념을, 내가 가진 것들을 모두 버립니다. 이것으로 나는 감히 나의 사랑을 그녀에게 증명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온기를 가진 인간으로서, 심장을 가진 남자로서 기꺼이 죽겠습니다.
디디에.
당신에게 닿을 리가 없을 이 편지를, 나의 서명과 마침표를 찍은 후 곧바로 불쏘시개로 던져질 이 편지를, 나는 침묵 속에 처음으로 평화로운 즐거움과 행복에 잠겨 바지런히 손을 놀려 쓰고 있습니다. 나는 최초이자 최후로 당신에게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나, 마자브족의 미천한 후예 요한 폰 윌렌도르프가 되고 다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나의 모든 것을 고백합니다. 모든 것은 재가 되어 증발하겠지요. 나는 세상에 무엇으로 남을까요. 반역자, 살인광,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갖고 태어나 처형당한 죄인으로 남을 겁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신에게 용서와 자비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당신에게 닿는다면, 당신이 믿는 신이 천국으로 당신을 인도했다면 부디 사샤 로랑을 지켜주세요. 그녀의 행복을 빌며 빼곡히 채운 이 종이를 화롯가에 던집니다.
굿바이. 디디에. 부디 평안하기를.
단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요한으로부터.
제법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도시의 자욱한 안개로 젖은 어깨를 툭툭 털며 사내들이 술집으로 모여들었다. 때는 아직 해가 지기 전, 술을 마시기에는 꽤 이른 시간이었으나 술집 안은 이미 취한 이들과 싸구려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잡음 섞인 음악들로 시끄러웠다.
주인은 익숙한 듯 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날씨야.”
사내 중 하나가 코트를 벗으며 욕을 지껄였다. 주인은 껄껄 웃으며 그의 앞에 싸구려 보리 맥주로 가득한 커다란 잔 하나를 내밀었다.
“어서 오게 토마스. 이런 날씨 한두 해 겪나? 매해 여름이 이랬는데 뭘.”
토마스는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키더니 입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겪어본 중 올해가 가장 빌어먹을 날씨야. 작년보다 더 안 좋다구. 빌어먹을. 아무래도 이 땅을 떠야겠어. 도첸이 망하고 나니 이젠 신도 이 땅을 버린 거야.”
“쉬.”
주인이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사내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는 옆으로 살짝 눈길을 주었다. 토마스는 주인의 눈길을 따라 술집에 들어선 낯선 자를 보았다.
낯선 객의 맥주잔은 반쯤 비어 있었다. 잿빛 코트에 흰 머리를 가진 노신사의 손에는 생전 처음 보는 금화가 들려있었다. 짐짓 점잖은 듯 앉아 테이블 위에 동전을 굴리는 그에게 토마스는 문뜩 호기심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못 보던 동전이군요. 어디 먼 곳에서 오셨나 봅니다.”
노신사는 긴 금줄이 달린 안경 너머 힐끗 그를 보더니 천천히 미소 지었다. 눈가에 근사한 주름이 생기며 하얀 콧수염 끝이 살짝 움직였다. 토마스는 그의 미소가 무척 우아하고 인자하다고 생각했다. 토마스는 그에게 먼저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하며 악수를 건넸다.
“전 토마스라고 합니다. 아내와 함께 식료품점을 하고 있죠. 농사도 짓구요.”
“마티. 마티 도랭입니다. 티타와에서 막 돌아왔습니다.”
노신사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점잖았다. 토마스는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빛냈다.
“티타와! 알고 있습니다. 적도 근처의 휴양지 중에 가장 근사한 곳이라고요! 그건 티타와의 화폐인가요?”
“네. 티타와의 금화죠. 도첸의 화폐로 환산하면 150바크쯤 될 겁니다.”
도첸의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토마스는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주인은 토마스의 눈치와 노신사 마티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도첸이 연합국에 통합된 이후로 방치된 빅토리아는 죽은 채 이승을 떠도는 망자와 같은 곳이 되었다.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연합국으로도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채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진 국경의 북쪽 땅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도시인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이 독재국가의 국민이어서 불행하다거나 불편하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은 살며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는 농사를 짓고 식료품을 팔았으며 그 돈으로 처자식을 건사하고 집을 고치고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첸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세상은 도첸의 멸망을 축하했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이제야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떠들어 댔지만 토마스에게 조국의 멸망은 그 자체가 불행이자 슬픔이었다. 도첸은 멸망했고 도첸의 화폐는 가치를 잃었다. 사람들은 점차 새로운 통화에 적응되어 갔지만 여전히 빅토리아 시에서는 도첸의 지폐를 사용한다.
세상의 변화와 동떨어져 도태되어 버린 것 같은, 버려진 것 같은, 그리하여 국가의 패배가 마치 개인의 패배인 것 같은 분위기가 이 도시에는 팽만해 있었다. 도시는 머문 사람들과 함께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서 어딘가에서 갈 길을 잃고 표류 중이었다.
“도랭 씨는 이 도시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주인이 갑작스레 말을 잃은 토마스를 대신해 물었다. 노신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옛 친구를 보려고요.”
“오. 그렇군요. 친구분이 이 근처에 사십니까?”
“네. 아마도요.”
“이곳은 처음이시고요?”
“아니요. 아마 4년… 5년쯤 이곳에 살았었죠.”
“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첫 잔은 제가 사겠습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도랭 씨.”
주인은 넉살 좋게 윙크를 해 보였고 마티 도랭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토마스가 냉기가 어린 맥주잔을 만지며 물었다.
“친구분이 이곳에 있는 것은 확실한가요?”
“아마도요.”
“이곳에 남은 사람들이 이제 별로 없어서요. 어쩌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친구분의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호의는 고맙지만 저 혼자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옛 추억도 되새길 겸 천천히 도시도 구경하고요.”
마티 도랭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좀처럼 우울하게 가라앉은 낯을 펴지 못했다.
“이곳에 구경할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토마스의 말에 도랭이 되물었다. 여전히 침착하고 평온한 어투였다.
“보시다시피, 여긴 이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에요.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이끼, 나무덩쿨, 이 도시는 곧 원시시대의 유적지처럼 변할 겁니다. 두고 보세요. 완전히 유령의 도시가 될 거라고요. 그때쯤 되면 저와 제 처자식은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도 있어요.”
“토마스.”
주인이 헛웃음을 켜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심각했다.
“정말이야. 두고 보라니까. 여긴 이제 빅토리아가 아니라 네르아로 돌아갈 거야. 다시 야만인들이 돌아오고 우린 다 굶어 죽던지 그 아래로 기어들어 가야겠지.”
“그만하게. 토마스. 다른 사람들이 듣겠어.”
“들으라지!”
토마스는 더욱 배짱을 부리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들으란 듯 술집 안의 좌중을 훑어보며 외쳤다.
“어차피 그 네르아 계집의 품에서 나오는 돈 때문에 사람들은 다 귀가 먹었으니까 말이야!”
또 시작이로군. 주인은 한숨을 쉬며 제 이마를 문질렀다.
“모두 그년의 얼굴에 홀린 게 분명해! 누구는 망한 도시에서 여자 치마폭에서 나오는 돈이나 주우며 살고 누구는 잘난 얼굴과 몸뚱이로 저렇게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니 이게 과연 이치에 맞는 이야기냔 말이지!”
“토마스. 자네도 그 여자 덕에 농사를 짓고 살고 있잖아. 그 여자가 무상으로 자네에게….”
“대신 그년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품질 좋은 야채와 채소를 잔뜩 하사받잖아! 그뿐이야! 고기도! 우유도! 치즈도! 그년은 돈 한 푼 내지 않고 다 받아먹는다고!”
“어쨌든 자네의 경작지는 그 여자의 땅이야. 잊었어? 그나마 여기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사는 건 모두 그 여자가 무상으로 땅과 돈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그 돈이 어디 그 년이 노력해서 얻은 돈이냔 말이야! 그 작은 머리통으로 수를 굴리며 여기저기 발을 걸치고 있다가 적당한 때에 다른 남자로 갈아타며 호의호식하는 것뿐이야. 그것도 그렇게 다 큰 사생아를 떡하니 데리고 다니면서.”
“…….”
토마스가 울분을 쏟아내고 나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쥬크박스의 음악이 소음처럼 맴돌 뿐이었다.
“토마스. 이 사람아.”
술집 주인은 빈 그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제발 그놈의 성질머리 좀 죽여. 언제까지 과거의 영광에 도취되어 살 참인가. 도첸은 망했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도첸의 국민이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거야. 여기 이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밉든 곱든 서로 부둥켜안고 도와주고 감싸주며 그렇게 사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
토마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커다란 맥주잔을 단번에 비웠다. 그러고 이렇다 할 말도 하지 않고 욕설을 한번 내뱉고 술집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다시 담소를 나누며 여유를 되찾았다. 모두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도랭 씨.”
주인은 토마스가 놓고 간 맥주잔을 능숙하게 치우며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마티 도랭은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물었다.
“그년이 누굽니까?”
“아.”
주인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난처한 듯 웃었다.
“도랭 씨는 이곳에 얼마 만에 돌아오셨나요?”
“아주 오랜만에요.”
마티가 대답했다. 주인은 몇 번 뜸을 들이다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티타와 금화를 한번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사샤 로랑이란 여자에 대해 아십니까? 보반이란 정치가와 결혼하며 유명세를 탔죠. 그때 신문이나 방송에 많이 나오곤 했는데……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계셨다면 모르실 수도 있고요.”
“…….”
마티 도랭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사샤 로랑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주인은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모두 다 죽거나 감옥에 갇혔어요. 라울 서기장, 공화당 정치가, 명망 있는 군인들. 심지어 그의 가족과 자식들까지. 도망가지 않으면 누구나 다 잡혀가 재판을 받고 추방당하거나, 철창에 갇혔죠. 그런데 사샤 로랑은…. 어느 날 갑자기 사지가 멀쩡한 채 나타나더군요.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요. 분명 보반의 자식은 아니에요. 머리 색도 눈동자 색도 틀리고 심지어 조금도 닮지 않았어요. 신문에서만 보던 여자가, 방송에서나 보던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생아인지 뭔지 모를 자식을 데려와 다 망한 도시에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그녀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아마 그런 금화를 집안에 쌓아놓고 살지도 몰라요.”
주인은 마티의 금화를 턱짓하며 말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녀가 연합국의 첩자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저렇게 남편은 골로 갔는데 혼자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고요. 또 다른 소문으로는 그녀가 이미 도첸이 망하기 전에 남편을 버리고 연합국의 유력 정치가를 유혹해 배를 갈아탔다고도 합디다. 토마스나 이곳 사람들은 후자를 더 믿어요.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자면 그편이 더 설득력이 있죠. “
조강지처를 둔 정치인을 유혹해 떠들썩하게 결혼한 여자다. 게다가 나라가 멸망한 후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생아까지 달고 왔으니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 대해 추잡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마을을 떠날 형편이 안될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호의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건 토마스도 마찬가지예요. 상권이 완전히 다 죽어버린 덕에 집도 땅도 잃고 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는데 사샤 로랑이 차압당한 그의 땅과 집을 사서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돌려준 덕에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겁니다. 저도 그리고 이 앞에 제물포, 그 옆에 의상실도요. 우리는 모두 그녀의 자비에 기대어 삽니다. 그녀를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도 그건 부정할 수 없지요.”
“어째서일까요?”
마티 도랭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고 주인은 ‘예?’하고 되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도랭 씨?”
“사샤 로랑은 어째서 호의를 베풀죠?”
“글쎄요.”
주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어떤 이들은 이용해 먹기 위해 술수를 부리는 것이라 했다. 어떤이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 했다. 어떤 이들은 사샤 로랑이 돈을 주고 자신들을 노예처럼 산 거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알 수 없는 또 다른 계략을 꾸미려 자신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라고도 했다.
“저는 그저, 그 여자가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러나 그는 그저, 사샤 로랑이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의 호의에 비해 그녀가 바라는 것은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 한해의 수확물을 나누어 주는 것. 집에 문제가 생기면 달려와 도와주는 것. 단지 가끔 들려 집에서 홀짝일 만한 맛있는 술 몇 병을 선물해주는 것. 그저 함께해 주는 것. 사샤 로랑이 바라는 것은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어떤 소문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도랭 씨. 어쨌든 그녀는 이 마을의 은인이랍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에게 빚을 졌고 또, 그녀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한답니다. 사람들이 뭐라 하던 간에 말이죠.”
“…….”
“물론 저의 친절에는 그녀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엽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답니다.”
주인은 약간의 농담을 건네며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마티 도랭은 맥주잔을 마저 비우고 손안에 굴리던 금화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아니요. 첫 잔은 제 선물입니다. 도랭 씨.”
“이것은 돈이 아닙니다. 당신이 내게 줬듯이 이것도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오. 그러니 받으세요.”
“…….”
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부시게 발광하는 금화를 받아들었다. 언뜻 스치는 노인의 손길이 꽤나 강건했다.
마티 도랭은 술집에서 나와 안개가 자욱한 빅토리아의 구시가지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안개에 축축하게 젖은 이끼와 나무 덩쿨에서 풍겨 나오는 시프레의 향이 가득했다.
축축한 구시가지는 지나치게 평온해 마티 도랭은 그가 시가지가 아니라 꼭 숲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을 주민들에게는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그 고요함이 마티 도랭에게는 오히려 평화로 다가왔다. 그는 푸르고 축축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젖은 날개를 펄럭이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종달새 몇 마리가 짝을 지어 빙빙 돌고 있었다.
“꺼져! 토마스 진저!!”
여자의 고성과 함께 아까 술집에서 본 사내 하나가 후다닥 건물에서 나왔다. 그의 뒤에 이어 여러 가지 과일들이 쏟아져나왔다. 토마스는 두 손으로 막 저를 향해 내던져진 늙은 호박을 쳐내고는 ‘악’하는 비명을 질렀다.
“이 빌어먹을 여편네! 뭐 하는 짓이야!”
“하루 종일 술만 퍼먹다가 뒈지지 집에는 뭐하러 기어들어 와! 꺼져!”
마티 도랭은 지팡이를 굴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꽤나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나 식료품점 문 앞에 허리춤을 짚고 서 있는 진저 부인은 풍채는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붉은 머리는 그녀를 더 강하고 빈틈없는 여전사로 보이게 했고 남편을 막아선 여자의 모습에서는 빈틈이 없었다. 토마스는 차마 그런 제 아내를 밀치고 식료품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가만 안 두겠어! 이 미치광이 마녀!”
“그래? 날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래 한번 해봐! 한 발짝만 더 내 집 앞을 얼쩡거렸다간 네 발모가지를 분질러 놓을 테니까!”
“거긴 내 집이야! 이 배은망덕한 돼지야!”
“여긴 네 집이 아니라 사샤 로랑의 집이야! 불쌍하고 가난하고 멍청한 빈털터리 토마스 진저! 그리고 사샤 로랑은 너 같은 놈팽이가 아니라 나와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여기서 살게 해준 거고! 알겠어? 멍청아! 이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돼지는 바로 너라고!”
“이…….”
토마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자는 식료품점 문을 쾅 닫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잠시 후 물을 잔뜩 길은 양동이를 들고 나왔다. 마티 도랭은 진저 부인이 제 남편을 향해 냉수 세례를 퍼붓기 전에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에서 비명과 고함과 욕설이 미친 듯이 뒤엉켰다.
마티 도랭은 저 부부가 있는 이상 이 시가지가 유령도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망설이거나 번지를 살피거나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정오를 알리는 소리였다. 도로에 드문드문 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길거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 몇이 종소리를 듣고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곧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인 것이다.
마티 도랭은 그로부터 한참을 지나 시가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걸었다. 노인답지 않게 지친 기색이 없는 발걸음은 오히려 시가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빠르고 경쾌해졌다.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오솔길을 지나자 곧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애옹-.
어디선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났다. 마티 도랭은 모자를 벗으며 미소지었다. 우거진 수풀과 흔들리는 들꽃들 사이를 헤치고 몸에 잔뜩 풀을 묻힌 황금색 털빛의 고양이가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가와 그의 발치에 제 몸을 부볐다.
“안녕. 나비야.”
애옹.
고양이는 고릉거리며 대답했다. 마티 도랭은 장갑을 벗으며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제 앞에 배를 뒤집고 재롱을 부리는 녀석의 배를 쓰다듬었다. 노인의 것답지 않게 단단하고 주름 하나 없이 곧은 손이었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마티 도랭의 목소리에 상냥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그것은 아까 펍에서 낯선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억양과 말투였다. 못 보던 사이에 녀석의 풍채는 더욱 좋아졌다. 마티 도랭은, 아니 마티 도랭으로 변장한 요한은 그녀의 통통한 뱃살을 두드리며 웃음을 흘렸다. 감촉이 무척이나 좋았다.
“사샤는 잘 지내고 있니?”
애옹. 고양이는 무아지경으로 고릉거리며 대강 대답했다. 요한은 녀석의 턱을 긁어주며 멀리 보이는 사샤의 2층 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와 풀과 꽃이 우거진 그녀의 집은 꼭 동화 속 요정의 집 같았다. 요한은 외투를 벗고 어느 기둥이 튼튼한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는 한참 동안 그의 무릎에 앉아있다가 해가 질 무렵 그의 곁을 떠났다. 그쯤에서 사샤가 보살피는 열 살배기 사내아이가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는 곳마다 돌멩이를 힘껏 차버리는 것이 뭔가 단단히 성이 나 보였다. 실상 그 아이는 언제나 성이 나 보였다. 언젠가 한 번은 사샤 로랑에게 귀를 붙잡힌 채로 질질 끌려가기도 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우스워 그는 꽤 오랫동안 그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웃고는 했다. 어쩌면 지금도 그때가 떠올라 웃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위가 어둠으로 잠기자 사샤의 집안에 불이 켜졌다. 이제야 멀리서라도 그녀의 실루엣을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은 사샤가 제 방에 불을 켜고 들어와 머리를 빗어 내리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칠 때만을 기다렸다. 마치 달빛이 드리워지기만을 기다리는 순례자처럼 그는 맹목적으로 그녀의 방 창만을 바라보았다. 좀 더 어둠이 짙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좀 더 선명하게 발광할 때쯤 사샤의 방에 불이 켜졌다.
요한은 숨을 죽이고 그녀가 방으로 들어와 화장대 위의 등을 켜고 다갈색의 윤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질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그녀의 머릿내음을 떠올렸다. 비단처럼 손에 감기던 머리카락의 감촉도. 한때 살을 섞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었다는 것이 다시 떠올려도 잘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며 아련하게 그녀의 감촉을 떠올릴 뿐이었다.
사샤는 한참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두 손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왔다. 그녀는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과 어딘지 모를 풍경들을 한번 훑어보고 곧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창문을 닫아야지 사샤.”
요한은 혼잣말을 했다. 창문을 닫아. 그러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녀가 창문을 걸어 잠그길 기다리다 문뜩, 그는 자신이 아까부터 안경을 벗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재빠르게 안경을 벗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재빠르게 몸을 숙이는데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에 수렵용 탄환이 박혀 푸스스, 연기가 일었다. 사샤가 달빛에 반사된 그의 안경 빛을 본 것이다. 첩자로서는 재능이 없었으나 저격수로는 재능이 타고난 여자였다.
탕! 그가 막 벗어난 자리에 다시 한발이 날아와 꽂혔다. 풀과 모래가 사방으로 날렸다. 탕! 마지막 한 발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뒤꿈치를 스쳤다. 바짓단이 탄약으로 타들어 가 있었다. 빌어먹을! 사샤!
그는 간신히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헉헉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른 들판 사이, 요한과 사샤의 벌어진 거리 만큼 긴장감이 팽팽하게 들어찼다. 요한은 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쿵쿵, 박동하며 혈액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비소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렇게 멀리 있어도 마치 눈앞에서 그녀를 본 것처럼 황홀하게 심장이 뛰었다. 요한은 나무의 뒤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사샤가 창문을 닫았다. 요한은 그 후에도 한참이고 사샤가 닫힌 커튼 사이로 창밖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샤 로랑이 저를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요한은 그 시간을 호사스럽게 누렸다. 그리고 동이 트기 전, 세상이 가장 조용하고 어둡고 고요할 때 그는 그곳을 빠져나갔다.
***
존 로랑은 헤밀턴 호텔 206호 창가에 서성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다. 아침이 밝자 거리는 분주해졌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 중 분명 요한이 있을 터였다. 요한이 변장을 하면 존은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사실 누구도 그를 알아볼 수 없다. 요한의 변장과 연기력은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존 로랑은 처형 날 아침, 발가벗은 채 팔다리에 쇠고랑을 차고 있던 그를 처음 보았다. 사내는 야위고 더러웠으나 어둠 속에 섞인 초연한 얼굴과 자태만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눈이 아릴 정도로 빛이 났었다.
‘당신은 처형당하는 대신 다른 이름, 다른 신분, 다른 국적을 얻게 될 거요.’
존 로랑의 말에 요한은 벌거벗은 몸을 차가운 벽에 기대며 느긋하게 제 코를 훔쳤다.
‘그런다더군.’
‘사샤가…… 당신에게…….’
존은 그 자리에서 사샤의 이름을 꺼내놓고 머뭇거렸다. 요한의 푸른 눈이 그를 향해 발광했다. 요한 폰 윌렌도르프는 이제 없다. 그의 이름, 국적, 나이, 모든 것이 지워진 채 그는 유령이 되어 레드본을 좇는 연합군의 개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사샤는 이 남자를 살리려 그토록 열심이건만, 저는 사샤에게 요한이 살아있노라 알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죽음을 전해야만 했다. 그걸 알면서도 그를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사샤가 그를 생각하는 만큼, 그도 사샤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였다. 사샤가 궁금해하는 것처럼 요한도 어째서 그가 사샤를 살려두었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벌거벗은 채 쇠고랑을 차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위협적인 남자였다. 그래서 존 로랑은 덜컥 겁이 났다. 어쩌면 압도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군인 두 명이 다가와 철창살을 열고 양쪽에서 그의 팔짱을 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절그렁절그렁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존은 그가 자신을 그냥 지나치기 전 다급히 그를 불렀었다.
‘요한!’
그리고 물었다.
‘혹시 남길 것은 없소? 무엇이라도 좋으니…….’
요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러다 그저 픽 웃었다. 그는 알몸이었다. 당장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의 소지품은 곧 모두 군의 방침에 따라 모두 소각될 예정이었다. 요한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하나도 남김없이.
허망하게 그를 보내고 존은 사샤에게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요한이 벗어둔 옷가지 한 귀퉁이라도 하나 떼어가고자 소각되기 직전 그의 옷을 뒤졌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얇은 유선지에 싸놓은 붉은색 머리카락 한 줌이었다. 당시의 존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품에 지니고 있었다면 무척 소중한 것이라 여겨져 그것을 사샤에게 건넸다. 그것이 무엇인지 들은 것은 그때 동생의 입을 통해서였다.
똑똑. 똑똑. 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존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만약을 위해 손에 권총을 쥐고 그는 재빠르게 문 외시경으로 밖을 살피고 잠긴 문을 열었다.
백금발의 요한은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모자를 벗고 안경과 수염을 떼어냈다.
“30분 늦었어.”
“그랬던가?”
“어딜 다녀온 거야?”
그러나 요한은 대답 대신 옷가지를 툭툭 털었다. 존은 그의 오른짝 바지 뒷단에 그을음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뢰라도 밟았어?”
“비슷하지.”
비슷하긴 개뿔. 그럼 그 잘난 다리는 절단이 나 있어야지. 요한은 찬장에서 유리컵과 위스키를 꺼냈다. 존이 어디에다가 술을 숨겨두는지는 이미 훤히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병의 주둥이를 따며 존에게 물었다.
“새로 들어온 정보는 없어?”
“래드본의 주요인물 중 하나가 말라오로 이동 중이라는 첩보가 있어.”
“거짓말이야.”
요한은 단숨에 위스키 잔을 비우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바로 다시 잔을 채웠다.
“걔네는 무기가 아니라 돈을 따라 움직여. 이제 전쟁물자가 아닌 다른 수단을 찾았을 거야.”
“…….”
요한은 다가와 존에게 잔을 건넸다.
“끄나풀이 있어.”
“어디에?”
그는 눈을 옆으로 살짝 굴렸다. 연합군 내부 첩자라는 소리다. 씨발. 존은 독한 위스키를 들이켜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숨겨둔 탄창을 꺼내 제 하네스 여기저기에 끼워 넣었다.
“잘못된 정보면 뒤질 준비해.”
“미리 부모님 묘소라도 참배해놓지 그랬어.”
요한은 호텔의 문을 열며 비아냥거렸다. 존은 세상 다 포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몰라. 씨발. 살아남으면 갈 거야. 넌 애미애비도 없는 새끼라 좋겠다.”
존이 그를 휙 지나쳐 갔다. 요한은 콧수염을 다시 붙이고 안경을 쓰며 웃었다. 그러고는 제 허리춤에 꽂혀 있는 리볼버의 위치를 확인했다.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거기엔 내가 먼저 갈 거야. 존 로랑.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