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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1> 도성 제일의 객사, 묘원각은 저녁 장사 준비로 한창 분주하였다. 적국을 토벌한 병사들이 막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 누구나 일을 거들어야 했다. 한데 세령만이 잔뜩 긴장한 채로 귀빈채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음…….” 문지기처럼 서 있던 사내는 노골적으로 세령을 훑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닿아 오는 눈길이 불쾌해야 정상이거늘, 지금은 그저 정체를 들킬까 조마조마하다. 세령은 손끝에 잡히는 옷소매를 꾹 쥐었다. 그런다고 안도감이 느껴질 리는 없었다. 분수에 맞지 않은 비단옷이 친숙하지 않아서 되레 족쇄처럼 느껴졌으니까. “흐음.” “…….” 전신을 쓸어내리던 의심의 눈초리가 아래에서 올라와 얼굴에 닿았다. 그때, 세령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 계집이 확실하냐.” 세령을 데려온 계집종에게 묻는 말이었다. 곁에 있던 계집종은 고개를 조아리고 답하였다. “예. 나리.” 사내는 여전히 미심쩍은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 아무렴 어떤가 싶었던 모양이다. 이내 의심하는 것도 성가시다는 듯 눈길을 거두었다. “너는 예 있고, 너만 따라오거라.” 계집종을 물린 사내는 저를 따라오라 명하며 몸을 틀었다. 바짝 긴장한 세령은 그의 뒤를 한발 늦게 쫓았다. 교전을 마치고 돌아와 회포를 푸는 병사들, 그들에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로 객사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그렇지만 귀빈채만은 별세계인 양 고요하였다.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온 묘원각의 주인, 희명군의 명으로 방을 모두 비운 탓이었다. 희명군. 살육에 중독되어 일부러 전쟁을 일으킨다던 야차 같은 사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땐 그 화를 풀기 위해 이곳에서 기생 하나를 끌고 가 난잡하고 잔혹하게 괴롭힌댔다. 아침이 밝고 죽어 나온 자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끔찍한 몰골은 본 적이 없었노라 입을 모았단다. 묘원각에 팔려 온 지 고작 석 달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소문은 귀가 닳도록 들어 왔다. 그만큼 희명군은 어딜 가나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곤 하였다. 그런 사내를 마주하러 가는 길인데, 세령은 다른 이들이 느낄 법한 두려움보다 좀 더 특별한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묘원각 기생이었던 어미와 아주 어릴 적에 지내던 방이었다. ‘여긴 다시 못 올 줄 알았는데…….’ 그땐 평범한 기생의 작은 거처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이 객사의 주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호화롭게 변해 있으니 기분이 묘하였다. 그러나 그리움은 잠시뿐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묘원각에서의 끔찍한 기억이 절로 연상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방은 진작 허물어 잔해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도 떠올린 과거에 그 장면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코끝에 선혈이 남은 듯,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하여 세령은 무심코 눈을 찡그렸다. 후덥지근한 계절임에도 괜스레 오한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떠는데, 대뜸 희명군의 수하가 상전의 취향을 언질 주었다. “희명군께선 자가라는 호칭을 싫어하시니, 나리라 부르는 게 좋을 것이다.”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덕분에 끔찍했던 기억에서 겨우 빠져나왔으나, 사내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이미 희명군의 방 앞에 도달한 터라 말을 덧붙이지 않은 것이겠지만, 대충 보아도 목석같은 사내라 무얼 여쭈어도 더 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리, 무혁입니다. 기생을 찾으셨다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그가 문에 대고 사람이 왔노라 알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답은 없었으나 수하는 세령에게 들어가란 턱짓을 하였다. 올 것이 왔구나. 불쑥 끼쳐 온 긴장감에 세령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떼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일순 끼쳐 온 피 냄새에 헛숨을 들이켰다. “흡.” 8년 전 끔찍한 사고를 상기시키는 냄새였다. 세령은 습관처럼 주춤 뒷걸음질하였다가, 바위산처럼 달아날 길을 막고 있는 사내의 기척에 멈칫하였다. ‘대체 왜 이런 냄새가…….’ 세령은 호롱불 몇 개만 켜 놓아 어둡고 스산한 내부를 바라보았다. 아직 발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벌써 겁이 났다. 피비린내에 코를 가리고 도망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데, 뒤에서 쏘아 대는 수하의 눈길이 따갑기까지 하니 진퇴양난이었다. 자처하여 온 자리이므로 무책임하게 달아날 수도 없었다. ‘……참아야 해. 예서 물러나면 도화 언니까지 위험해질 거야.’ 세령은 두려움을 꾹 누르며 겨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두 발이 방 안에 놓이자, 뒤에서 곧장 문이 닫혔다. 공간이 밀폐되니 혈향 말고도 미세하게 풀을 태운 냄새가 났다. 그다음으로는 후, 하고 입김 뱉는 소리가 이어졌다. 긴장감에 몸이 굳어 제 발끝만 응시하던 세령은 구석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숙였다. “희, 희명군 나리를 뵙습니다.” 희명군이 앉은 쪽으로 절을 올렸으나 그쪽에선 한참 동안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무언가 쓱쓱 닦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울 뿐이었다. 언제 일어나도 괜찮은 것인지 배운 적 없으니 세령은 퍽 난감하기만 하였다. 긴장한 탓에 자세 또한 불편하였다. 해서 고개를 들어도 괜찮으냐 물으려던 찰나,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게서 밤을 새울 생각이냐.” 행동만큼이나 거칠 줄 알았던 음성은 의외로 미성이었다. “어…… 아니, 아닙니…….” 놀란 세령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얼굴에 흠칫하였다. ‘……휘언?’ 익숙한 낯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리 자랐대도 못 알아볼 법한 이목구비가 아니다. 도성 규수들을 죄 울리고 다닌다던 꽃미남 선비도, 듬직하고 건실한 신랑감이라 소문이 자자하던 양반가 자제도 이 묘원각에서 실제로 본 적 있었으나, 세령은 살면서 본 사내 중 그 애보다 아름다운 이를 본 적 없었다. 날카로운 눈매, 곧게 뻗은 콧대,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 그리고 왼쪽 눈 아래의 점까지 그대로였다. 물론 어릴 때보다 눈매가 깊어지고 턱은 날렵해진 데 반해 긴 목은 두툼하여 소년티를 온전히 벗은 모습이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그리 몸이 훌쩍 자랐음에도 세령은 눈앞의 사내가 휘언, 그 아이임을 의심치 않았다. 찬란했던 미모는 바래기는커녕 더 원숙한 빛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바로 아는 체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낯설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몹시 익숙한데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구든 돌아볼 법한 수려한 외모만 여전할 뿐, 죽음의 냄새를 가득 떠안고 있어 산 사람 같지 않았다. 차라리 저승사자라 칭하는 쪽이 더 어울릴 터다. 말갛게 누이, 소리를 하며 저를 따라다닐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무서우리만치 생경한 분위기에 세령의 확신은 금세 사그라져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혹 시간이 너무 흘러서 휘언에 대한 기억이 퇴색된 걸까?’ 사내는 기다란 장도의 혈흔을 영견으로 닦고 있었는데, 세령은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검붉은 피에 놀라 벌벌 떨었을 것인데 온 신경이 수려한 얼굴에 박힌 탓이었다. 뜻밖의 재회에 멀거니 있자, 희명군은 그제야 시선을 옮겨 세령의 넋 나간 표정을 관망하듯 응시하였다. 무미건조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세령은 더더욱 그 얼굴이 제가 알던 사람의 것이 맞는지 긴가민가해졌다. “오랜만이로구나.” “……예?” 사내가 툭 던진 말에 세령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의구심이 확신이 되려던 순간, 찬물이 끼얹어졌지만. “근래엔 이 방에 제 발로 찾아온 자가 없었는데 말이지.” “아…….” 나른한 음성에 정신이 다시금 돌아왔다. 착각이었구나. 역시 그 애가 예 있을 리 없지. 그래. 휘언이었다면 저를 이렇게나 모르는 체하지는 않았을 거다. 사납기가 두억시니보다 더하다던 희명군이 그 애와 동일인일 확률은 더더욱 낮았고. ‘사람이 어쩜 저리 닮을 수가 있을까.’ 해묵은 그리움이 착각이라도 불러일으킨 걸까. 어쩐지 그럴 것 같더란 생각을 하면서도 실망감에 속이 쓰렸다. 한데 불현듯 사내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제 발로 찾아왔단 말은 무슨 뜻이지?’ 두 시진 전, 희명군이 기생 도화를 찾는단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혹여 도화가 죽임을 당할까 무서웠던 세령은 제가 대신 도화의 이름으로 희명군을 모시겠다며 행수를 찾아가 사정을 하였다. 그러니 세령은 그의 부름으로 이 자리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의가 아니라. 혹 다른 이들은 뭐 머리채라도 잡혀 끌려왔단 뜻인가. 그런 놀음을 원하는 것이었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리 오지 않고 무얼 하느냐? 언제든 도망치려고 그 자리를 고수하는 것인가.” “……아, 아니옵니다.” 상념에 잠길 새도 없이 채근하는 소리에, 정말 머리채라도 잡힐까 봐 세령이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아니어야지. 허락 없이 문을 여는 순간 그 목에 칼이 들이밀릴 터인데.” 나직한 어투였으나 협박이었다. 바깥엔 제 사람이 대기하고 있으니 달아날 생각은 말고 고분고분하게 굴란 의미. 말뜻을 이해한 세령이 황급히 다가가자, 사내는 여상하게 장죽을 물며 턱짓으로는 제 대각선 방향에 있는 방석을 가리켰다. 그의 명대로 자리에 앉으니 희미해진 줄 알았던 피 냄새가 더 짙게 드리웠다. 사내가 부는 매캐한 연기 덕에 되레 숨이 쉬어질 정도였다. “여긴 왜 왔느냐?” “……예?” “아까부터 계속 되묻기만 하는구나.” “…….” “내 말이 어려우면 더 친히 물어봐 주랴? 천 한 오라기 없이 나랑 뒹굴고 싶어서 걸음 하였느냐 묻는 것이다.” <2> 인내가 다하기라도 하였는지 사내의 어조가 어째 더 서늘하게 들려왔다. 낭패였다. ‘그만 떨고 진정해, 은세령. 도화 언니는 이런 걸로 긴장하지 않는단 말이야.’ 스스로 다독여 보았지만 짙어지는 듯한 혈향 때문에 별 소용은 없었다. 고작 냄새일 뿐인데도 두려움이 엄습해, 손끝부터 벌벌 떨려 오는 일은 8년 전부터 불가항력이었으니까. 비릿한 쇠 냄새만 접하여도 유혈이 낭자하던 과거 장면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진다. 세령은 동요를 티 내지 않으려 고개를 떨구고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따끔한 시선이 내리꽂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하였다. 그래야만 했고. “그, 그런 게 아니고, 저는 나리께서 부르셔서…….” “나는 이런 천치를 부른 적이 없는데.” “…….” 혹 도화가 아니란 걸 눈치챈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의중이 있는 게 분명한데, 이런 자리를 접해 본 적 없는 세령이 상전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난감하였던 세령은 눈알을 도르르 굴려 사내와 그가 쥔 장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날붙이가 무서워 어리벙벙하게 구는 거라 여겼는지 검을 검집에 넣고 멀리 치워 두었다. 이런 배려도 할 줄 아는 사내였나. 소문과는 다른 면모에 놀랐으나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선혈의 향은 그대로인지라 관자놀이가 다 지끈거렸다. 하여 제대로 된 답변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하아―” “…….” “이름은 무어냐. 이건 답할 수 있겠지?” 대답을 기다리는 게 이골이 났는지 희명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곤 질문을 바꾸었다. 짜증 섞인 한숨에 눈치를 보던 세령은 우물쭈물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도화, 이옵니다.” 본디 오기로 되어 있었던 기생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반듯하던 사내의 미간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거짓말.” 놀란 세령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도화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나. 그렇다면 저를 떠보던 연유가 이해된다. 희명군이 도화를 지명한 것은 처음이니 두 사람이 마주친 적도 없으리란 행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예 왔다. 한데 아무래도 그게 실수였던 것 같다. 속내를 꿰뚫는 듯한 서슬 퍼런 시선에 손끝이 떨려 왔다. ‘망했구나. 어쩌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을지도 모르겠어.’ 한층 가까워진 듯한 죽음에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하나 이 귀빈채에 발을 들이겠노라 결심하였을 때부터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낯익은 얼굴이 자꾸만 8년 전의 기억을 불러일으켜, 정신이 흐트러지고 심장이 죄였지만 무어라도 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희명군이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 같아.’ 문득 소문 하나를 떠올린 세령은 이에 기대어 도박을 걸어 보기로 하였다. “춤에 소질이 있는 자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지나가는 묘원각 사람을 붙잡고 물으신다면 모두가 저, 도화라 할 것입니다.” “그게 너다?” “예.”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공연히 깜빡이면서 더 당당한 체하였다. 그러자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비틀리며 픽 바람 소리를 뱉었다. 설핏 올라간 입꼬리가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어우러지니 무표정일 때보다 그 미모가 빛을 발하였다. ‘다들 저 수려한 얼굴에 속지 말라 하였다. 정신 차려, 은세령.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였어.’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긴 세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곧바로 이성을 붙들었다. “하면 어디 증명해 보거라. 네가 도화라는 사실을.” “……춤을 보이라는 말씀입니까?” “이것도 못 알아들으면 귀를 잘라 버릴까 고민하였는데,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구나.” 그가 처음으로 보인 긍정적 반응에 극심한 부담감이 일었다. 가슴에 바위라도 얹힌 기분이었다. 섬뜩한 말보다 새카만 동공에 드리운 기대가 더 목을 조일 줄이야. 고작 가락지나 만들어 팔던 세령이 춤을 출 수 있을 리 없다. 하나 이런 요구쯤은 귀빈채에 발을 들일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세령은 자연스럽게 핑계를 대었다. “송구하지만, 급히 부르신 바람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여 형편없을 것입니다.” “상관없다. 하던 대로 하거라.” “기실 낮에 발을 접질리는 바람에 휴가를 받은 참이고요.” “잘만 걷던데.” “귀한 부름을 거역할 수 없어 온 것이나, 춤을 추기에는 모자랄 것입니다. 어설픈 모습을 보여 나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염려되옵니다. 그러니 부디 아량을 베풀어 흥을 깬 것에 대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사내가 하,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같잖은 핑계로 명을 회피하는 것보다 기분이 상할까.” “…….” “재미없군. 이깟 계집이 뭐라고…….” 허언임을 가벼이 간파한 걸까. 사내는 입가를 싸늘하게 굳히고 시시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미련 없이 시선을 거두고 감정 없는 낯으로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분명 준비한 대로 잘 넘긴 것 같은데, 사내가 뿜어내는 위압감 탓인지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쓸모를 보이지 못한 제 목을 장도로 내려칠 것 같아서 긴장이 풀리질 않았다. 한데 그는 구석에 둔 검을 쥐는 게 아니라, 별안간 본인 옷고름을 당겼다. 설마, 즐길 흥취가 없으니 바로 잠자리에 들겠단 건가. 사내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세령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잡하다 못해 잔혹한 정사를 즐긴다던 사내였다. 해서 희명군의 흥을 깨고 이 방에서 쫓겨날 계획이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위기에 세령은 어쩔 줄 모르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때,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으려던 눈에 빈 술잔이 들어왔다. “수, 술을 더 하시겠습니까? 제가 따라 드릴…….” 술병으로 뻗었던 손이 탁, 사납게 내쳐졌다. “술병 들 힘도 없는 몇 노인네들이 꼴에 숟가락만 들 수 있으면 아랫도리를 얼마든 놀릴 수 있다며 나불거리지. 한데 너는 나를 지금, 같은 취급하는 것이냐.” 화났다고 여길 만큼 냉랭한 음성이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하여 세령은 엉거주춤 뻗고 있던 손을 거두고 부자연스럽게 일으켰던 몸도 조용히 물렸다. “이리저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땐 언제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다니. 이 묘원각을 찾는 영감들 수준은 다 그 모양인 건가.” 눈치 빠른 사내는 세령이 불리한 상황을 벗어나려 궁리 중이었던 걸 이미 꿰뚫고 있었다. 혼잣말인 듯 중얼댔으나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더는 상황을 모면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낙담한 세령은 고개를 바닥으로 푹 숙였다. 불운하게도 곧장 겉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떡하면 좋지.’ 사내가 하얀 저고리 차림이 되었을 때만 하여도 날이 더워 벗은 것이리라 바라기도 하였다. 하나 한 장뿐인 저고리 고름에까지 손을 댔을 땐, 역시 즐길 거리가 없으니 몸이나 섞자는 뜻 같아서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방에서 살아 돌아올 방법은 없는 건가요?] [사내를 전혀 모르는 어린 기생은 내쫓았던 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 외에는…….] 그가 한쪽 팔을 소매에서 빼려 몸을 뒤척였을 때, 예 오기 전 행수와 나누었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경험이 없는 여인은 품지 않았던 희명군. 왜 그걸 잊고 있었지. 그게 바로 자신이 목숨을 걸고 도화 대신 이 자리에 나설 수 있었던 연유였는데. “모, 못 하겠습니다!” 세령은 황급히 소리쳤다. “뭐?” “소, 소, 송구하지만, 제가, 춤만 추던 사람인지라, 사내 몸을 잘 모르옵니다. 하여 나리를 제대로 모실 수 있을지 염려되어…… 그, 그러니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 그것이…….” 쉬이 미래를 기약하기엔 두려운 존재였다. 해서 다음에는 제대로 해 보겠단 빈말이 좀처럼 이어지질 않았다. “허…….” 희명군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음탕한 짓 하려고 부른 기생이 난데없이 못 하겠다 뻗대었으니 황당한 게 당연하였다. 하나 별다른 질타는 없었다. 하던 걸 계속 이어 가려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났다. ‘뭐, 뭐야. 분명 경험 없는 여인은 건들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당장에라도 무자비한 손이 뻗어 와 저를 덮칠 것만 같아서, 세령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나 진작 바닥에 떨어져야 했을 흰 저고리는 어째 소식이 없었다. 해서 세령은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다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 저고리에서 한쪽 팔을 꺼낸 사내는 세령이 있든 말든 개의치 않고 붉게 물든 무명천을 풀어내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피 냄새가 나더라니, 저게 원흉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옷을 벗은 게 밤일하려던 게 아니고…….’ 희명군이 실소한 의미를 그제야 알아챈 세령은 일순 목덜미가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떡 줄 놈은 있지도 않았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셈이었다. 낯부끄러워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데, 두꺼운 팔뚝을 칭칭 감고 있던 천이 툭, 떨어졌다. 세령의 시선이 자연히 한 꺼풀 벗겨진 사내의 맨살로 향하였다. 깊게 베인 상처에선 피와 진물이 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데 그는 물을 가져와 씻는 것도 성가시다는 듯 마시던 술을 그 위에 부어 버렸다. “아, 아니, 나리!” <3>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 해진 세령과 달리, 희명군은 짙은 눈썹만 구겼다. “후우…….” 정물 같던 사내도 사람이기는 한지, 그는 흐르는 피와 술을 영견으로 닦아 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세하게 떠는 손을 뻗어 장죽을 물고 깊게 빨아들이기도 하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선혈이 껄끄러워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머리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주십시오, 나리.” “…….” 창백한 얼굴이 세령에게 향하였다. 선뜻 영견을 건네진 않았지만 손을 쳐 내지도, 싸늘한 거절을 뱉지도 않았다. 빤한 시선은 그저 제 의중을 가늠하는 듯 보였다. “혼자 하실 힘이 없다고 여겨 이러는 게 아닙니다. 상흔의 위치를 보니 제가 치료하는 게 더 효율적인 듯하여 그렇습니다.” 세령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앉으며 커다란 손에서 영견을 조심스레 빼내었다.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희명군은 결국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손에서 순순히 힘을 풀었다. “……천치인 줄 알았는데.” 세령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사내의 팔에 흐르는 선혈을 영견으로 신중하게 감쌌다. 그러고는 살살 닦아 내니 스치는 부위가 움칠 떤다. 두 손으로도 잡기 힘들 것 같은 팔뚝은 단단한 근육으로 꽉 차 있었다. 날붙이가 어찌 이 돌덩이를 파고들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듯, 손이 닿을 때마다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을 뒤척였다. 세령은 연거푸 장죽만 무는 희명군을 흘끗거렸다. 붉은 입술로 부지런히 연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감정 없이 텅 빈 눈동자는 어딘가 피로해 보였다. 담배가 아닌 진통약을 피우는 걸까. 향이 독해 세령의 입에서 잔기침이 튀어나왔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고 장죽을 뻑뻑 빨아 댔다. “팔이 불편해 보이니 다 벗는 게 낫겠습니다.” 한쪽 팔만 덜렁 빼 두었던 저고리를 붙드니, 그는 의외로 얌전하게 몸을 내어 주었다. 하여 세령은 거추장스럽던 옷을 수월하게 벗기고 흐르는 체액을 전부 말끔히 닦아 내었다. 이어 지혈을 하고 상처 부위에 짓이긴 약초까지 발라 주었다. 상흔이 깊어 치료는 제법 오래 걸렸다. 아무런 대화가 없어 지루할 법도 한데 희명군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세령의 손을 내내 눈에 담았다. 그의 눈빛에는 흥미가 드리워 있었으나 세령은 그게 자신이 허튼짓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거라 여겼다. 해서 따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랴, 상처를 돌보랴 홀로 전쟁을 치렀다. 식은땀을 흘린 건지 끝날 즈음에는 등이 축축할 정도였다. “저, 다른 곳은 괜찮으십니까?” 새 무명천을 사내의 팔에 감은 세령은 치료가 끝났단 걸 알리듯 예의상 여쭈었다. 한데 고개를 든 순간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그가 다가와 있었다. 놀라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달싹이는데, 희명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른한 한숨처럼 되물었다. “다른 곳?” 입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시야를 잠시 흩뜨렸다. 세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 그러니까…… 다친 부위가 또 있다면, 봐 드리겠단 뜻이었습니다.” 너무 가깝단 생각에 시선을 피하고 슬금슬금 몸을 무르려 하니, 팔꿈치가 붙들렸다. 달아날 생각은 말라는 듯한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사내 몸을 모른다더니. 벗기는 게 퍽 능숙하구나.” “네? 저, 저는 그저 상흔이 있는 곳을…….” “내가 어딜 봐 달라 할 줄 알고.” “…….” “둔부에 진물이 났다 하면, 내 바지를 내리고 봐줄 것이냐? 하면 그 앞은?” “아,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아니옵고…… 히익!” 그의 악력 한 번에, 세령의 몸이 사내의 다리 위로 끌려 올라갔다. 졸지에 군 자가의 몸 위에 올라타게 된 세령은 기겁하며 물러서려 했지만 단단한 팔뚝에 허리가 붙들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내려 주십시오!” “처음부터 나와 이런 일을 하려고 예 온 것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그것참 희한하구나. 내가 여인을 들였다면 단연 몹쓸 짓을 하리라 여길 터인데. 순진한 체하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 천치인 게냐?” “…….” 말문이 턱 막힌 세령을 보고 사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렸다. 아마도 희명군의 어깨를 감히 밀칠 수 없어 제 가슴 앞에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는 모양새가 여느 소동물 같아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는 입맛을 다시듯 입가를 손으로 훔치더니, 이내 웃음을 거두고 세령을 시선으로 샅샅이 훑었다. 이걸 어찌 발라 먹을까 고심하는 날짐승의 눈빛이었다. 하나 그는 목덜미를 콱 깨무는 것 대신, 세령의 손 하나를 가져가 엄지로 맥이 펄떡펄떡 뛰는 손목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온도에 솜털이 쭈뼛 섰다. “손목이 참 가늘구나.” “…….” “이런 걸로 저항한들 아무 소용 없겠어. 자칫하면 부러질지도 모르겠고.” 별거 아닌 감상이었지만, 손목 안쪽에 닿는 촉감과 더불어 허리를 휘감은 팔뚝의 힘이 강해지니 바짝 긴장감이 돌았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손목 하나쯤은 정말 가벼이 부러뜨릴 것 같았다. “너.” “…….” “섣불리 친절을 베풀지 말거라.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없다면.” “그, 그게 무슨…….” “다음에 오지랖을 부릴 땐, 손목 하나 내놓을 각오 정도는 하란 뜻이다.” 섬찟한 소리와 함께 손목 핏줄이 불거진 곳을 꾹 누른다. 당장에라도 뼈마디를 부러뜨릴 듯한 기세라, 맥이 벌컥벌컥 뛰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희명군은 세령의 손목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뿐 아니라 내려가도 된다는 듯 바닥을 턱짓하였다. 혹여 말을 바꿀세라 세령은 달아나듯 후다닥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사이 사내는 벗었던 옷을 느긋하게 다시 걸쳤다. “다시 묻지. 이름이 무엇이냐.” “도…….” “한 번만 더 다른 이의 이름을 올리면, 그 이름이 갖고 싶은 거라 여기고 이름 주인을 데려와 숨통을 끊어 주마. 그리하면 넌 정말 도하인지 뭔지가 될 수 있겠지?” 말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전신이 움츠러들었다. 잘난 입꼬리가 근사하게 올라갔음에도 선득한 눈빛 탓에 조금도 농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 세령은 솔직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은세령입니다.” “은세령.” 세령을 따라 나직하게 읊조린 이름이 사내의 입 안에서 여러 번 굴려졌다. 은세령. 은세령. 그리운 것을 곱씹는 것 같기도 하였고 단순히 외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은세령.” “예.” “이만 가 보거라.” 의외의 말에 세령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토록 순순히 내보내 주리라곤 생각 못 하였다. 뜬금없었어도 경험이 없단 말을 한 건 잘한 선택이었던 걸까. 공연히 변덕을 부리면 곤란하였으므로 세령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한 발, 두 발, 사내에게서 멀어질수록 무언가 끈적한 것이 발바닥에 들러붙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방문을 열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으므로 이렇게 사내와 연이 끝나는가 하였다. “…….” 왜 그때, 뒤통수에 따끔하게 쏘아 대는 시선이 신경 쓰였던 걸까. 한 번을 안 돌아보느냐는 추궁 같아, 제 발 저렸다. 하여 세령은 떠나기 전에 마침표를 찍듯 등을 돌려 묵례하였다. 그리고 뒷걸음을 쳐 방 밖으로 발을 물렀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물밀듯 밀려오는 안도감에 세령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한데 바깥에 대기하던 수하가 문을 닫으려는 찰나, 희명군이 대뜸 입을 열었다. “은세령.” 닫히던 문이 세령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문지방 너머, 희미한 호롱불을 등진 사내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산 깊은 곳에서 범이라도 만난 양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이름은, 궁금하지 않으냐?” “아…….” “너도 네 이름을 말해 주었으니, 나도 돌려주는 게 마땅하지 않나.” 다시 만날 사이란 생각을 안 하였으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왕자군의 본명을 알아 무엇하겠나. 한데 사내의 눈빛은 본인의 이름을 물어보라 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로 보인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환부를 돌봐 주었으니 특별히 알려 주마. 내 이름은…….” 허공에서 시선이 무섭도록 얽혔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그리고 사내의 반질반질한 입술이 벌어졌을 때, 올가미는 뱀이 되어 세령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내 이름은, 휘언이다.” 좁아지는 틈새로 먹잇감을 응시하는 맹수. 그와 같은 눈빛을 끝으로 탁, 문이 닫혔다. <4> 그날은 행랑방까지 어찌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안대문까지는 희명군의 수하를 따라갔다지만, 그 이후부터는 허청거리며 발이 가게 두었으니까. 그래도 귀소 본능이란 게 있는지 어찌어찌 제 방에 돌아오긴 하였다. ‘동명이인이겠지. 한데 아무리 그래도 얼굴까지 닮을 수가 있나.’ 이토록 동일인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연유는 희명군과 휘언의 성격이 정반대라는 점 때문이었다. 한없이 다정했던 소년의 모습은 어제 본 사내에게선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은 죄 세령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냉랭한 낯엔 살기만 느껴졌더랬다. 아무리 곱씹고 곱씹어도 휘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말이 안 되지.’ 한참 과거를 반추하던 세령은 한때 자신이 아끼고 좋아했던 이가 그런 사내일 리 없단 결론을 내렸다.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왕자군이 어찌 저 같은 천것과 동고동락하며 자랐겠나. 심지어 과거의 그 아이는 저처럼 부친이 누군지 모르는 기생의 자식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8년 전 살인 사건이었다. 살해당한 두 어미 앞, 피 묻은 단검을 쥔 휘언. 그 장면을 목도하였지만 세령은 여태껏 그 애가 살인범일 리 없다고 확신해 왔다. 휘언은 제게 슬픔을 안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짓을 할 연유도 없을뿐더러, 일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저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는 게 결정적인 근거였다. 한데 만약 닮은 이가 있었던 거라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게야?” 생각에 잠겨 있던 세령은 차를 막 우려 온 행수의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멀쩡한 걸 보니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구나.” “예. 조언해 주셨던 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고맙지. 하마터면 도화까지 잃을 뻔하였으니 말이야. 이 객사를 맡은 지 두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어려운 분이라, 너를 보내 놓고도 내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한데 걱정이구나. 저 대신 너를 보낸 걸 도화가 알면 아주 난리를 피울…….” “행수 어른!” 행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씩씩대는 도화를 보자마자 행수는 올 게 왔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범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세령이 함께 있을 줄은 예상 못 하였는지 도화는 잠시 멈칫하였다가 불같이 화를 냈다. “제가 분명 부탁드렸잖아요. 세령이는 가만두라고! 벌써 노망이라도 난 거예요?”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다가오기에 세령은 행수의 앞을 막아섰다. “언니, 오해야! 행수 어른한테 내가 부탁한 거야.” “뭐라고? 너…… 미친 거야? 네가 귀빈채를 왜 가, 왜!” “희명군께서 언니를 찾으신다잖아. 거기 가면 죽을 텐데 내가 어찌 가만있어.” “그러니까 네가 왜 나 대신 거기에 가냐고!” “그게…….” “그렇게 죽고 싶었어? 그럼 나더러 죽여 달라고 하지 그랬어. 왜 구태여 귀빈채까지 들어가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거야! 내가 너희 모녀 죽는 꼴을 다 봐야 직성이 풀려?” 제멋대로 도화를 사칭한 것도 있으니 어느 정도의 화풀이는 들어 주려고 하였다. 한데 마지막 말엔 세령도 욱하고 말았다. “나는 뭐 다른 줄 알아? 언니까지 죽어 버리면……!” “…….” “나는 정말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알 수가 없어지잖아.” 아차 싶었는지 도화의 입이 딱 다물렸다. “나한텐 언니밖에 없는 거 알잖아. 그러니 내가 별수 있어? 무모한 거 알면서도 달려들어야지.” “아무리 그렇대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다시 돌아간대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거야. 그러니까 언니,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날…… 그날에 대해 보고 들은 거, 조금이라도 떠올려 줄 수 없어? 정말 여전히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너는 왜 그 얘기를 또……. 내가 모른다고 누누이 말하잖아.” 행수에게 달려들던 기세는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도화는 그새 풀이 죽어 세령의 눈길을 피하고 웅얼거렸다. 늘 이런 식이었다. 다그치든 구슬리든 사정하든 도화는 일관적으로 그날을 제 머릿속에서 지운 것처럼 굴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였다. 묘원각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기생답게 기세등등하다가도 어머니 얘기만 꺼내면 꼭 저렇게 어물거렸으니까. “세령아. 이제 그만 다 잊고 네 인생 살면 아니 되는 거야? 이제 와 밝히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잖니.” “……나는 그날 내 가족을 다 잃었어. 한데 어떻게 그걸 잊고 살아.” “…….” “적어도 누가 원수인지 알아내서, 반드시 죗값 치르게 할 거야.” “8년이나 지난 일을 네가 무슨 수로 밝히겠다는 것인데.” “관아에 고발해서…….” “하……. 너 정말 관아에서 버러지 목숨만도 못한 기생의 죽음을 밝혀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맞는 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기생이 이 묘원각에서 죽임을 당하였던가. 희명군의 손에 희생된 이만 따지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경우가 다반사였다. 관아에서 움직이는 일은 당연하게도 없었고. “……그래도 난, 잊고는 못 살아. 진범을 만나면, 그 두꺼운 낯짝에 침이라도 뱉어 줄 거야.” 8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한 세령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외숙의 집이었고. 외숙부는 어머니에게 가겠다며 나서는 세령을 방에 가두었다. 당시엔 외숙이 원망스러웠지만, 홀로 도성까지 가기엔 세령은 너무 어렸고 수중에 가진 돈도 없었으니 막지 않았더라면 길바닥에서 죽었을 테다. 뒤늦게 그걸 깨달은 세령은 노자라도 모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외숙부댁에 몸을 의탁하며 집안일을 돕고 소일거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가락지 공예에 소질을 보여 돈을 벌기 시작하였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외숙이 종종 어려운 형편을 얘기하는 통에 돈이 모일 새는 없었다. 저 또한 사정이 급하였지만 어찌 그 손을 뿌리치랴. 어머니의 복수도 중요했으나 거둬 준 은혜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세령은 8년이란 시간 동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데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중매쟁이에게 혼례 사기를 당해 석 달 전 묘원각에 팔리게 되었다. 결국 어떻게든 묘원각으로 돌아오긴 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파헤치기엔 시간이 너무 흘러 버린 걸까. 당시 묘원각에 있었던 이들 중 남은 이는 도화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묘원각의 주인과 이곳을 관리하는 행수까지 바뀌었다. 이런 환경에 행적을 찾으려고 하니, 한낱 계집종으로선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세령은 도화의 안위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지. 언니, 그 애는 기억나? 나랑 자주 놀던 사내아이 말이야. 그날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애가 죽었는지, 끌려갔는지 생각나는 거 없어?” 그동안은 어머니에 대해서만 파고들었기에 휘언에 대해 물은 건 처음이었다. 한데, 도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쩐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기, 기억 안 나. 그런 애가 있었나?” 대체 뭘 숨기기에 저리 안절부절못하는 걸까. 쉬이 답해 줄 거라곤 생각 안 하였지만 도화의 태도가 퍽 의심스러웠다. 마치 밝히면 누군가에게 보복당할 거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일순 위화감이 들었다. 어릴 적 저와 노닐던 휘언, 그리고 저를 처음 보는 것 같던 희명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같다. ‘설마…… 쌍생아인가?’ 대개 동궁에서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쌍생아를 저주라 여겨 희생된 이들이 간혹 있다고 하였다. 아무리 왕세자가 아닌 왕자군이래도 그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휘언과 얼굴도 이름도 같은 희명군이 그날 묘원각에 있었고 쌍생아의 한쪽을 처단한 사건이 벌어진 거라면…… 어쩐지 도화가 입을 다무는 것도 말이 되는 듯하였다. ‘그렇다면 휘언은……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을까?’ 소문에 희명군은 어릴 적부터 생명을 약탈하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게 선대왕이 주변국을 섬멸할 때 그를 병기로 앞세웠던 연유였다고. 하지만 저와 어린 시절을 보낸 휘언은 심한 놀림을 받아도 묵묵히 감내만 하던 이였다. 세령의 추측대로 묘원각에 의탁하던 휘언이 왕자군의 죄를 뒤집어쓴 게 맞다면, 매 맞고 쫓겨났거나 죽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어제 만난 사내는 세령과 휘언의 원수일 테지. 비록 이 모든 건 세령의 어림짐작일 뿐이었지만, 어째선지 불가능한 일도 아니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자는 진실을 알고 있겠지.’ 세령은 눈빛과 음성만으로도 사람을 수렁에 처박던 희명군을 떠올렸다. 물론 단둘이 마주하는 건 어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고, 그가 진짜 모친을 죽인 원수라 한들 확인할 길도 복수할 기회도 없을 거다. 침을 뱉긴커녕 입을 열자마자 죽겠지. 결국 8년 전부터 묘원각에서 머물던 도화만이 그날의 진실을 말해 줄 상대란 건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대체 어찌하여야 저 무거운 입을 열 수 있을지 막막하였다.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행수 어른, 영선입니다. 혹시 안에 은세령도 함께 있는지요?” 영선은 어제 저를 데리러 왔던 계집종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편도 아니었던지라, 세령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행수와 도화 또한 의아한 눈으로 세령을 바라보았다. 제게 주목된 시선에 살짝 눈치가 보였던 세령은 머뭇거리다가 직접 방문을 열고 영선을 대면하였다. “나를 왜 찾는 것이야?” “역시 예 있었구나. 묘원각의 주인께서 부르신다.” “……무어?” “어서 준비하도록 해.” 계집종 영선은 가져온 비단옷을 세령의 품에 던지듯 안겨 주었다. <5> 희명군의 부름을 함께 전해 들은 도화가 뜯어말리긴 하였으나, 8년 전 사건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 세령은 기꺼이 영선을 따랐다. 한데 무에 못마땅하였는지 영선은 세령을 데리고 가면서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기에 불렀던 계집을 또 부르신 거람. 하물며 기생 일을 하던 애도 아닌데…….” 혼잣말이었으나 대답을 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도 그럴 게, 희명군은 한 번 대면한 여인을 다시 불러낸 전적이 없었다. 다 죽어 버렸던 탓도 있었지만, 쫓겨났다던 어린 기생도 찾지는 않았었다. 한데 내보냈던 이를 하루 만에 도로 불러내다니. 도화나 행수가 알기에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심지어 ‘은세령’이란 이름을 콕 집어 말했다는데, 어제 이름에 그리 집착하였던 연유가 다시 불러들이기 위함이었나. 하면 그는 왜 자신을 다시 부른 것일까. 만일 그가 정말로 어미를 죽인 자라면, 처음 그 장면을 목도한 세령 또한 놓쳐 버린 먹잇감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저를 죽일 작정인지도. 저승길이라 생각하니 당장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으며, 그의 명을 거역할 만큼 베짱이 크지도 않았다. 그날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에 달아나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도 않았고. 하여 세령은 두 번은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방문 앞에 다시 섰다. “나리. 은세령입니다.” “들어오거라.” 느릿하고 나직한 음성. 별거 아닌 듯한 말인데도 그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와 제 발목을 끈적하게 휘감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붙들린 것도 아닌데 뱀이라도 있는 듯 소름이 끼쳐 세령은 공연히 발을 털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상투를 틀지 않고 풀어 둔 머리카락 탓일까. 전장에서 막 돌아왔던 어제는 야생의 짐승처럼 보였는데, 오늘은 어쩐지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충 여며 섶이 벌어진 저고리 탓인지 흐트러진 모습은 조금 위태해 보이기도 하였다. 날은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고 지독하던 피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독한 연기가 그의 장죽에서 피어오르고 있는데도 창을 열어 두어선지 후원에 핀 꽃 내음이 방 안을 옅게 채우고 있었다. ‘후원이라…….’ 후원하니, 그를 둘러싼 소문 중 하나가 떠올랐다. 목숨을 앗을 전쟁도, 기생도 없을 때면 사내는 후원을 꾸미는 데 집착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정성스레 가꿔 놓고 한동안 방치하여 전부 죽여 놓기도 여러 차례라, 사람 대신 죽이기 위해 꽃을 기르는 게 아니냔 말까지 나왔다고 하였다. 시들어 가는 생명을 보는 게 그의 낙이라나 뭐라나. 이리 향기가 방 안까지 가득 감도는 것을 보면 아직은 건재한 듯하다만……. “언제까지 게 서 있을 생각이지?” “아, 희명군을…….” “절은 되었고 이리 와 앉기나 하거라.” 엉거주춤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킨 세령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공기에 어제는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어색함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니 희한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밀어 둔 서안. 그 위에는 여인이 쓸 법한 경대와 달력으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어제까지 빠짐없이 가위표를 해 둔. 경대의 쓸모도 그렇고 날짜를 세는 것도 의아하였지만, 문득 그가 저를 지긋이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하여 세령은 시선을 황급히 거두고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왜 저리 빤히 보는 것이야…….’ 세령이 예 발을 들일 때부터 희명군은 눈을 떼지 않았는데, 시선이 어찌나 집요한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눈치가 보였다. 싫어할 게 뻔하나 술잔이 비었더라면 그 핑계로 거북한 공기를 환기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잔을 채워 놓고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기만 했다. 어제처럼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부담스러웠다. 해서 세령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오늘은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내게 궁금한 점이 많을 듯하여.” “희명군 나리에 대해서 말씀입니까?” “아니. 휘언에 대해서.” 물어보려던 것이긴 하였지만, 먼저 그 이름을 뱉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세령은 퍽 당황하고 말았다. 하여 저도 모르게 부정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런…… 그런 건 없습니다.” “없다고?” “처음 듣는 이름이옵니다.” “분명 내 이름을 말해 주었던 것 같은데.” “아…….” 거짓말을 나무라는 듯 반듯한 미간에 선이 생겼다. 그러나 사내는 거기서 더 다그치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젖어 촉촉해지는 모양새가 넘치기 직전의 잔처럼 위태롭고 외설스러웠다. 지레 찔린 세령은 급하게 눈길을 거두었다. 긴장한 탓일까. 그의 행동이 죄다 의식되었다. 희명군은 비운 잔에 다시금 술을 채우더니, 새 잔에도 술을 따라 세령 쪽으로 밀었다. 술상 끝까지 밀린 잔은 떨어질 듯 말 듯 불안하게 흔들거려,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들어.” 간결한 명령조에 세령은 홀린 듯 따랐다. 위태롭게 상 밖으로 튀어나와 있던 잔 때문도 있었지만, 고압적인 말투가 거부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여 군말 없이 잔을 기울이는데, 희명군이 한숨과 함께 말을 터트렸다. “그놈이 들으면 섭할 소리를 하는구나. 휘언은 너를 참 좋아했던 것 같은데.” “큽, 콜록! 네…… 네?” 채 넘기지 못한 술에 사레가 들린 세령은 한참 기침을 토한 후에 겨우 되물었다. 독한 향에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그를 바라보니, 잔잔한 못에 커다란 돌을 던져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건 버릇인가.” “…….” “아니면, 그놈이 은세령이란 계집에게 껌벅 죽느라 내 신경까지 건드렸단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걸까.” 희명군이 뱉는 말은 농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나 확실한 건, 그가 휘언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양 군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희명군이 제 어미를 죽이고 휘언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단 가정이 맞았던 걸까. 연이은 혼란에 말문이 막힌 저 대신 그가 나서서 설명해 주길 바랐지만 희명군은 이내 그 이야기엔 흥미를 잃은 듯 말을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사내 경험이 없으니 시간을 주면 나를 제대로 모시겠다 하였지? 어디 무얼 준비했는지 볼까?” 하마터면 자신이 다음번엔 제대로 모시겠노라 선포하였다고 믿을 뻔하였다. 사내와 다시 독대하는 게 두려워 그 말만은 끝까지 뱉지 않았었는데, 희명군은 세령이 삼킨 말을 멋대로 꾸며 냈다. “……제가 언제 그리 말하였습니까.” “끝맺지 않았을 뿐이지, 하려던 말은 맞지 않나.” “그런…….” “왜. 하루로는 사내 경험을 채우기에 모자랐나?” “……예.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던지라.” “행수가 그리 능력 모자란 자는 아닐 터인데. 네가 정말 내 시중을 들 생각이었더라면, 반나절만으로도 방중술을 가르쳤을 거다.” 그는 행수까지 들먹이며 세령의 빈말을 꼬집었다. “소, 송구합니다만, 발목이 아직 낫질 않아…….” “또 그 소리구나. 이미 너는 유화가 아님을 직접 밝히지 않았더냐. 하였던 거짓말은 왜 또 들먹이는 걸까.” “…….” 같잖은 핑계를 반복하면 결국 꼬리가 잡힌단 걸 사내는 이런 식으로 깨닫게 해 주었다. 한데 도화가 아니라 유화라는 이름은 뭘까. “허언이 습관인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나를 속일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붙어먹을 생각은 없다는 게지?” “…….” “하면 너 말고, 다시 연화라는 계집을 부를까?” “연화…… 도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름이 도화였나? 아무튼 그 춤 잘 춘다던 기생 말이다. 아, 그래. 그자를 데려와 만족스러운 밤놀이를 어찌하여야 하는지 직접 보여 달라 하는 건 어떠하냐. 좋은 가르침이 될 터인데.” “아, 안 됩니다!” 비록 이름을 계속 틀리는 허술함이 보이는데도 사내가 만만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라면 정말로 도화를 불러 제 앞에서 정사를 벌일 것 같았으니까. “그 계집이 네게 무엇이기에 이리 싸고도는지 궁금해지는군.” “…….” “하면 오늘은 무엇으로 네 몫을 다할 것이냐.” “몫이라니…….” “기생이라면 보통은 춤을 팔거나, 노래를 팔거나. 그런 능력도 없다면 몸을 팔지. 그러니 넌 내게 무얼 팔 것이냐 물었다.” 과거 일에 정신이 팔려서, 눈앞의 사내가 어떤 자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묘원각의 기생과 추잡한 정사를 벌인 후 죽여 살심을 해소한다던 희명군이었다. 춤이나 노래는 핑계고 결국 이 방에 들어왔다면 그와 몸을 섞어야 한단 뜻이었다. <6> 그가 세령에게 원하는 바는 짐작이 갔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여 머뭇거리니 인내가 짧은 희명군이 살짝 짜증을 섞어 눈을 찌푸렸다. “대체 너는 나와 무얼 하고 싶은 것이냐.” “……예?” “어제 제 발로 찾아온 연유가 있을 것 아니냐. 여태 제 의지로 찾아온 계집들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떨고 젖가슴을 내보이고 치마를 걷던데, 너는 억지로 예 앉은 양 가만있는 게 신기하여 말이지. 내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당최 알 수 없단 말이야.” 제법 노골적인 언사에 세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저 저더러 가슴을 내보이고 치마를 걷으라는 것만 같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나 고민하던 세령은 어쩔 수 없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나리께서는, 결국 정욕을 풀려고 저를 부르신 것이겠지요?” 구태여 답을 주지는 않았으나 비웃듯 올라가는 사내의 한쪽 입꼬리가 긍정을 표하였다. 그렇지만 세령은 개의치 않고 하려던 말을 이었다. “기실…… 저는 기생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와 밤놀이를 하여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생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도 저를 또 찾으셨단 말씀입니까?” “그래.” “어째서…….” “나는 이 묘원각의 주인이고 예서 일하는 사람을 부른 것뿐이다. 이곳에 속해 있다면 내게는 기생이나 방물장수나 별반 다를 게 없단 말이지. 한데 너는 그게 이상하다는 건가.” 어제는 상처만 치료하고 순순히 돌려보내 주기에 사내 경험이 없는 여인은 건들지 않는단 풍문이 사실이라 여겼거늘. 세령의 오지랖에 한번 봐준 모양인가 보다. 어쩌면 오늘 밤엔 정말로 그의 노리개가 되어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이 방에 발을 들였을 때보다 긴장감이 더하여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세령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저를 빤히 응시하는 사내를 흘끗거렸다.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살아서 나가는 게 중요한지, 아니면 원수로부터 정절을 지키고 죽는 게 나은 건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었다. 그 순간,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따위가 정절을 지킨다니. 다른 이가 들었다면 코웃음 쳤을 거야.’ 기생의 딸, 그리고 묘원각에 팔린 몸. 어차피 정체 모를 사내와 언제 동침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팔자였다. 한데 그런 것으로 죽을 생각을 한다니. ‘……어떻게든 살아야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고작 하룻밤을 보내고 세령만 남긴 부친을 이름도 모른 채 한평생 찾아다니던 어머니. 그 탓에 세령은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아야 했고 태어날 적부터 정해진 거처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의탁이 아닌 오롯한 제집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가족과 소탈하게 하루를 보내는 삶, 그것만이 꿈이었다. 유독 한 곳에서 오래 의탁한 적이 있어, 어린 세령은 그 소망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한데 그곳의 주인이 세령에게 손을 뻗치려 하였던 날, 어머니는 더부살이로 지내길 포기하고 묘원각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휘언을 만났다. 지난 삶에 유일하게 행복하던 시절이 있다면 그때였을 거다. 묘원각에서 어머니와 휘언 모자까지 넷이서 오순도순 지내던 날들. 아름다운 외양 때문에 휘언에게는 처음부터 눈이 갔다. 의외로 어수룩한 모습에 연민이 들었고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껴 가까이하였다. 그러다 금세 정도 주었다. 제게만 마음을 내어 주고 따르던 휘언은 평소에는 천생 아우 같다가도, 어미 없는 밤이 두려워 떨 때면 든든하게 곁을 지키며 오라비처럼 굴었다. 휘언이 있는 곳이 세령의 집이었고 네 사람은 가족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깨질 줄 누가 알았으랴. ‘뭐가 되었든, 어머니처럼 개죽음당할 수는 없어.’ 타인에게 의탁하기만 하면 결국은 목숨줄도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그게 어미의 죽음으로 깨달은 바였다. 만일 당장 제 미래를 눈앞의 사내에게 맡긴다면, 그의 입에서 죽음이 나온 순간 목숨 보전은 물 건너가겠지. 어차피 사내의 방에 들어온 이상, 세령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가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적어도 수지는 맞을지 모른다. ‘애초에 어머니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고 순순히 여기 온 것이었잖아. 그깟 지조, 양반도 아닌데 지켜 무얼 해.’ 오순도순 함께 살아갈 가족은 이제 남지 않았지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 나았다. 떠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보란 듯이 잘 살아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절개고 나발이고 세령에겐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억울한 죽음도 파헤칠 수 있을 터. 원수로 의심되는 자의 밤 시중을 드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두 어머니가 살해된 이유, 그리고 휘언의 행방까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랴. 복수는 진실을 알아낸 다음에 해도 충분하였다. 번잡한 마음을 다잡은 세령의 속내라도 읽었을까. 희명군의 기다란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뭔가 하기로 다짐한 모양인데, 멍석이라도 깔아 주랴?”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무얼?” “나리가 원하는 것을요.” 마음 같아서는 그가 마시던 술을 빼앗아 취하고라도 싶었지만, 그만한 담력이 있지는 않았다. 하나 적어도 타인의 손이 제게 닿는 것보다 자신이 상대에게 손을 뻗는 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하였다. 해서 세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게 못 박혀 있던 시선이 그대로 따라붙었다. 늘 무감하였던 눈동자엔 어쩐지 총기가 돌고 있었다. 새로운 놀이를 알려 줄 때 눈을 빛내던 소년이 일순 장성한 사내의 위로 겹쳐 보였다. 어째서 다른 사람인데도 이리 닮은 것일까. 무자비한 희명군에게서 순진한 휘언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세령은 피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한 발 더 다가갔다. 한데 희명군 위로 겹쳐 보인 모습이 이번에는 피 칠갑을 한 소년으로 변모하였다. 움찔하였으나 알량한 자존심이 원수 앞에서 뒷걸음질하는 걸 거부하였다. 하여 객기로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스로 앉았다기보다는 짙어지는 듯한 피 냄새에 다리가 풀린 거나 다름없었지만. ‘분명 방에 들어섰을 땐 맡지 못하였던 냄새인데, 환후각이라도 느끼는 건지…….’ 습관적으로 발발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며 세령은 상황에 집중하려 애썼다. 경험은 없으나 무얼 해야 하는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전부 처음이었으니까. 눈길을 사내의 바지춤에 박아 둔 세령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원하는 게 무어라고 짐작하였는지 참으로 궁금해지는구나.” 고민이 길어지니 슬그머니 눈치를 준다. 하여 세령은 결연을 다지듯 심호흡하고 희명군에게로 손을 뻗었다. 한데 그에게 닿기도 전에 손목이 탁, 붙들렸다. 날은 후덥지근한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에선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의 것처럼. 놀란 세령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언제 다가온 것인지 얼굴이 코앞이었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에 몸이 굳어 버려 고개를 무를 생각은 하지도 못하였다. 하여 유일하게 핏기가 도는 입술에서 새어 나온 숨이 제 뺨을 간질이며 속삭이는 걸 허하고 말았다. “누이는 내가 여전히 무서운가 봐.” 그 순간, 세령은 끔찍한 것을 들은 사람처럼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본인보다 어린 세령에게 자존심도 없이 누이라 불렀던 소년 휘언. 그건 진짜 휘언이 아니면 뱉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바, 방금 뭐라고…….” “왜 그리 놀라, 누이.” 확인 사살이었다. 제대로 들은 것이었다. 한 번 더 뱉어지는 누이 소리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마, 말도 안…….” 세령의 머릿속은 이곳에서 달아나야 한단 신호로 가득 찼다. 하여 무심결에 주춤, 물러서는데 사내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손목을 붙들었다. “가려고?” “…….” “내게 원하는 답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마치 세령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지껄였다. 그러고는 굳어 있는 모습이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엄지로 손목 안쪽을 느긋하게 쓸었다. 얇은 피부 위를 유영하는 손길이 얄궂게도 부드러웠다. 왜 이런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눈앞의 사내가 휘언인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이라는 호칭이 너무도 오랜만이라, 휘언이 다시 제 앞에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 탓에 제멋대로 믿고 싶은 걸까. ‘하지만 이 사내는 휘언이 아니야.’ 휘언일 리가 없다. 그 애는 눈앞이 캄캄해질 때마다 늘 제게 등불을 비춰 주던 다감한 소년이었다. 애정이 묻은 호칭을 들먹이면서 밤 시중을 유도할 만큼 저열한 사내는 결단코 아니었다. 희명군은 어찌 그 호칭을 알았을까. 누이라는 호칭이 흔하긴 하다만, 휘언과 저는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닐뿐더러 나이로 보아도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희명군이 어릴 적 휘언과 세령의 관계를 알고 있단 뜻으로 귀결된다. 휘언과 희명군이 쌍생아일지 모른다는 세령의 가정이 점차 확신을 얻어 갔다. 누이는, 희명군이 묘원각에 있지 않았다면 알 수 없을 호칭이니까. ‘그럼 진짜 이 사내가 어머니를 죽인…….’ <7> 요란 떠는 맥박이 느껴졌을까. 희명군이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더 놀렸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구나.” 놀리다니. 희명군에게는 이게 의미 없는 장난이었단 말인가. 누이라는 호칭을 입에 담을 때부터 그는 본인이 가진 패를 슬쩍 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패를 갖고 싶으면 어디 발악해 보라는 듯 기대에 찬 눈빛을 연신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 미끼를 던져 놓고 이제 와서 그저 놀린 것뿐이라고? ‘어쩜 사람이 이리 뻔뻔스러울까.’ 세령의 턱뼈가 설핏 불거졌다. 소중한 삶을 송두리째 앗아 가 놓고 홀로 살아남은 저를 사냥감 재 보듯 쥐락펴락하는 것이 분했다. 하나 세령은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솟구치는 울분을 조용히 삭이느라 세령이 아무 반응 보이지 않으니, 또다시 벗어날 궁리를 한다고 여겼을까. 희명군은 잡고 있던 손목을 홱 끌어당겨 세령을 도로 앉혔다. 그러고는 코앞까지 입술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달아나려고?” “아니…….” 간극이 순식간에 좁혀진 게 당혹스러워 입을 뻐끔대니, 사내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 그건 네 마음이다만, 유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도망치는 사냥감을 놓쳐 본 일이 없거든.” “…….” “그러니 무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지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이.” 끝이 올라간 입매는 네 어미를 죽인 살인자와 한방에서 노닥거리는 꼴이 참으로 재밌지 않느냐고 비웃는 것 같다. 일순 넌덜머리가 났다. 사내의 말처럼 오늘을 어찌어찌 넘긴대도 또다시 같은 걸음을 할 것 같았으니까. 하면 이 지독한 순회를 끊을 건 역시 정사를 치르는 것뿐이겠지.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거사를 치러야 할 운명이라면, 비루한 몸뚱이를 이리 지리멸렬하게 지킬 필요가 있을까. 빨리 해치우고 사내의 흥미를 거두든, 구음을 핑계로 양물을 물어뜯든 세령은 오늘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전에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지체…… 아니하겠습니다. 오늘은 밤 시중을 들 것입니다.” “허.” 여유롭기만 하던 희명군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댔다. “경험이 없는 탓에 분명 성에 차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 제가 서툴게 굴든 말든 그저 나리의 뜻대로 하십시오.” “내 의중을 우선하는 척하였으나 결론은 책임을 돌려 너 편할 대로 하라는 말이로구나.” “…….” “내 뜻대로 하면 평생 걷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정녕 괜찮겠느냐?” 이 말은 진심 같아서 살짝 겁이 났다. 하나 세령은 치맛자락을 말아 쥐며 답하였다. “……사, 상관없습니다. 다만, 일이 끝나면 여쭐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8년 전 이 묘원각에서 벌어졌던 살인 사건, 알고 계시지요?” “음.” 가타부타 답은 아니하였지만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긍정임을 표하였다. “그날의 진실…… 그것 하나만 거짓 없이 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나리께 원하는 전부입니다.” “고작 그런 것으로 네 몸을 내어 주겠다?” “예. 그것만 답해 주신다고 하면, 오늘 밤은 나리 뜻대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줄곧 호선을 그리고 있던 희명군의 입꼬리가 단박에 내려왔다. 무슨 일인지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지만 사내는 이내 무미건조한 눈을 하며 장죽을 물었다. 붉디붉은 입술에서 긴 연기가 흘러나왔다. “……진정 내 뜻대로 해라?” “…….” 되물은 사내는 깊은 눈으로 세령의 흔들리는 눈망울을 응시하였다. 그러더니 시선을 턱선 아래로 천천히 옮겨 가녀린 목을, 저고리 옷고름을, 그리고 치마까지 아주 느릿하게 더듬었다. 고작 눈길 하나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희롱당한 것처럼 몸이 흠칫거리고 입술을 절로 감쳐물게 되었다. “하면 해 봐, 뭐든.” “……무얼 말입니까?” “밤 시중이 어디 넣고 싸면 끝인 줄 아느냐? 내 음심이 먼저 동해야 할 것 아니야.” “…….” “뭐…… 네 베갯머리송사가 잘 통한다면, 내 8년 전 사건에 대해 주절대고 싶어 미칠지도 모르지.” 희명군이 제 입으로 그 사건을 직접 거론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로 어머니의 원수가 눈앞의 사내였던가. 세령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8년 전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 게 맞군요?” “네가 얻고자 하는 답이 휘언 그놈의 안위인가? 그게 아니면, 그날 죽은 이들이 왜 그리되었는지 궁금한 건가.” “어, 어찌 그걸 다…….” 그동안의 추측은 전부 제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 확신을 내리기엔 조금 부족했는데 이로써 분명해졌다. 진짜였어. 그날 일을 저지른 게 이자였던 거야. 치맛자락을 쥔 세령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평정을 유지하려 하여도 그가 어미를 죽인 진범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또 천치처럼 멍하니 있네. 원하는 게 뭐든, 내 대답을 빨리 듣고 싶으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텐데.” 충격에 휩싸인 세령과 달리, 그걸 바라보는 눈빛엔 그저 흥미만이 서려 있었다. 어쩜 저리 파렴치한 자가 다 있을까. 명백한 조롱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모자란데 자신은 그저 사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신세인지라 울화만 치밀었다. 가슴이 답답해 주먹으로 두드리고 싶어도 그런 행동마저 이 자리에선 제약이 걸렸다. “……그리 채근하지 않으셔도 할 것입니다.” 세령은 노여움으로 홧홧해진 눈가에서 혹여 물방울이라도 흘릴세라 눈에 공연히 힘을 주고 사내를 응시하였다. 부릅뜬 눈에 서린 원망을 느꼈을 것인데, 그마저도 희명군은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눈빛이 좋구나.” 안이한 태도에 속이 더 뒤집혔다. 하여 세령은 독기를 품고 사내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제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대도 여차하면 생식기쯤은 평생 쓰지 못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객기로 뻗은 손은 바지춤에 닿지도 못하고 사내에게 붙들렸다. “나는 왜 네가 내 좆을 물어뜯을 것만 같지.” “…….” “부정도 아니 하는군.” 이 사내는 머릿속을 읽어 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당황한 세령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가 손을 뻗어 엄지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변명이라도 하지 그래? 어째 이 건방진 입은 매번 열릴 때를 가린단 말이지. 열어도 허언뿐이고.” 입술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미끈하게 침범한 엄지는 아랫니를 살살 훑다가 혓바닥까지 꾹 누르며 들어왔다. “허으……. 무, 무슨 짓…… 흐…….” 타인의 손가락이 살면서 이리 입 안 깊숙이 들어온 적이 있었던가. 깨물 수도 뱉어 낼 수도 없는 상태라, 당혹감에 휩싸인 동공이 제 의지와 다르게 마구 흔들렸다. “내 너를 믿지 못하니 달리 방도가 있나. 일단 이게 좆이라 생각하고 빨아 보거라.” “……으에?” 세령의 뭉개진 발음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기세 좋게 몸시중을 든다기에 사내를 즐겁게 하는 방법쯤은 배워 놓은 줄 알았는데. 설마 객기로만 덤빈 것이냐? 아니면, 네가 물어보았던 양물에 비해 너무 작아서 성에 안 차느냐?” “우윽…….” 고개를 저을 새도 없이 엄지가 빠져나가고 검지와 중지가 입 안을 휘저었다. 행동에 주저함이라곤 보이지 않으니 손가락이 목구멍까지 들어올 것 같아서, 세령은 반사적으로 희명군의 팔을 붙들었다. 그 행동을 이제 좀 뭔가 하려는 것이라 여겼는지 사내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찰나에 세령은 많은 것을 고민하였다. 이걸 시키는 대로 빨아야 할지, 아니면 씹어야 할지. 수치심에 이대로 또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린대도 부름은 멈추지 않을 게 자명하다. 제 감정에 치우쳐 이 손가락을 깨문다면 알아내려던 진실은 멀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인데 선뜻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가 싫었다. 그러나 이리 고민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으니, 마냥 지체할 수도 없었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해.’ 어차피 구음하려던 게 맞긴 한 데다, 사내의 성기가 아닌 손가락을 문 것이니 상황은 좀 더 나았다. 하여 세령은 제 입 안을 침범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빨았다. 입술로 쪽쪽거리던 것을 혀도 살짝 내밀어 쭙, 쭈읍, 소리 내어 빨자 꽤 두꺼운 마디가 흠칫 떨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였다. 희명군은 화답하듯 세령의 혓바닥을 누른 채 밀어냈다가 당기며 정말 남근을 처박듯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흡…… 후으…….” 멋대로 밀려들 때마다 목구멍이 저절로 조여 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는 희명군에게 꽤 즐거운 유희였던 모양이다. 느릿하던 움직임이 점점 속도를 내었다. <8> “헉, 어윽…….”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조금 거칠게 혀 안쪽을 찌르자, 헛구역질이 밀려들었다. 하나 욕지기를 참느라 눈꺼풀을 바르르 떠는 모양조차 흥을 돋우는지, 희명군은 시종일관 세령의 눈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둥글렸다. 그러면서 봐주는 법 없이 여린 점막을 휘저었다. “어설프긴 하다만, 어젯밤 순순히 보내 준 기회를 허투루 날리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지만 그따위 칭찬이 달가울 리 없다. 세령은 남은 자존심을 부리듯, 언짢은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게 감히 주제넘다고 여겼을까. 그는 조소를 흘리며 놀고 있던 손으로 세령의 허리를 감아 단숨에 제 쪽으로 당겼다. “컥…….” 휘청이는 몸과 혀 안쪽을 푹 파고드는 손가락에 기침이 터져, 세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사내의 손을 뱉었다. 그러나 곧장 턱이 붙들려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멋대로 뱉으면 안 되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희명군은 입 안을 휘젓던 손가락에 세령의 옷고름을 걸었다. “자, 잠시만요. 나리.” 저고리를 벗기려는 걸 눈치챈 세령이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을 저지하였다. “왜. 내가 먼저 벗는 게 좋으냐?”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옵고…… 굳이 다 벗을 필요가 있나 하여…….” “하. 내가 네 건방을 언제까지 받아 주어야 하지? 뜻대로 하라고 한 것은 네가 아니었나?” “…….” 어차피 정사가 목적이라면 그저 배를 맞추기만 하면 끝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내의 목적에는 교합뿐 아니라 저를 발가벗겨 수모를 주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던 모양이다. 그가 강경하게 나온 이상, 제깟 게 무얼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하여 세령은 사내를 막으려던 손을 망연하게 떨어뜨렸다. 그러자마자 옷고름이 당겨졌다. 저고리 섶이 스르르 벌어지면서 새하얀 목 아래, 치맛말기로 꽉 조여 맨 둔덕이 드러났다. 사내는 잠시 눈길을 그곳에 두었다. 흥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눈동자였지만, 짧은 시간 닿았던 한 줄기 시선만으로도 세령은 귓가가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구음 다음엔 무엇일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혹 올라탈 계획이었다면 내가 자세를 꽤 잘 잡아 준 듯한데.” “…….” 그의 하반신에 바짝 붙어 앉은 꼴이었으니 조금만 움직이면 배까지 맞추는 것도 가능한 거리였다. 하나 사내 경험이라곤 조금도 없는 세령이 마음만으로 대담하게 움직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또 못 하겠느냐? 하면 지금이라도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거라.” “잘하는 일이라면…….” “나를 두고 떠나는 일 말이야.” 늘 도망치던 것을 비꼬는 줄 아는데,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8년 전 묘원각에 휘언을 두고 저 혼자 몸을 피한 일을 똑 닮은 얼굴로 탓하는 것만 같아서. “뭐, 가도 상관은 없다. 하나 이것 하나만은 알고 가야 할 것이야. 나도 이제 인내가 다하여 두 번은 봐주지 않을 거란 걸.” 갈피를 못 잡던 세령의 머릿속은 두 번이라는 단어로 그 순간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다음은 없어. 반드시 오늘 결판을 지어야 해.’ 시간을 지체할수록 제명만 줄이는 꼴임을 학습한 세령은 결연한 눈빛으로 사내와 시선을 얽었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두 번은 절대 아니 합니다.” 세령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트는 사내에게서 눈을 떼고 혹여 제 옷자락이라도 건들세라 바지춤으로 먼저 손을 뻗었다. 벗기기 위해 허리 부근을 더듬자, 사내는 작은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쥐었다. 저지하는 것인가 생각하기도 잠시, 그는 직접 세령의 손가락을 움직여 안쪽 속고의까지 붙들게 하였다. 한 겹 두 겹 천천히 걷어 낼 필요 없이 끌어당기기만 하면 곧장 맨살을 보게 될 터였다. “허세가 아니길 바라.” 그의 말에 잠시 주저하였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하게 두는 건 오히려 유리한 신호였다. 하여 세령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바지를 끌어 내렸다. 한데 무언가가 걸린 듯 한참 저항하던 허리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당겼을 때 육중한 물건을 퉁 뱉어냈다. “아…… 어……?” 헛것을 본 줄 알았거늘, 울퉁불퉁한 핏줄을 휘감은 남근이 제 존재감을 드러내듯 꺼덕거렸다. 굵기와 길이, 모양까지 전부 충격이었다. 사내들은 전부 다리 사이에 이리 흉측하리만치 묵직한 둔기를 달고 다니는 걸까. 눈앞에 나타난 비현실적인 양물에 놀란 세령은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뱉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희명군은 굳어 있는 세령의 손을 끌어가 제 양물을 쥐게 하였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니 그가 픽 실소를 흘렸다. “허락이 떨어지길 원하는 듯하여.” “무, 무슨…….” “뭐든 해도 좋으니 지루할 틈을 주지 말란 뜻이다.”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말하였지만 어서 빨리 흥을 돋우란 거였다. 그러나 남근을 처음으로 마주한 세령이 사내를 즐겁게 할 방법을 알 리 없었다. 여인의 정욕에 대하여서도 무지하니, 좁은 음문으로 사내를 받을 때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여 세령은 그저 무식하게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속곳을 옆으로 대충 젖히고 희명군의 위에 쭈뼛쭈뼛 자리를 잡았다. 뭉툭한 선단으로 갈라진 균열을 비비적대며 입구를 찾아보았지만, 당최 제 아래에 저런 물건을 받아들일 만한 틈새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황하여 희명군의 낯을 흘긋거리니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무얼 하느냔 표정이다. 세령은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귀동냥하였을 때 살짝 뒤쪽이라 하였던 것 같다.’ 기생들의 수다를 떠올린 세령은 귀두 부분을 더 안쪽으로 움직이며 하반신을 내렸다. 그러자 꾹 눌리는 느낌과 함께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훅 끼쳐 왔다. “읏……!”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아픔에 동그랗게 뜨인 눈을 끔뻑이며 몸을 도로 떨어뜨리니 앞에서 하하, 웃음소리가 났다. 전장의 야차답게 타인의 고통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오늘 안에 시작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 할 겁니다.” 명백한 조롱에 오기가 생겼다. 하여 세령은 다시 제대로 자리를 잡고 무식하게 큰 성기를 아래에 맞추며 있는 힘껏 하반신을 내렸다. 하나 생살이 찢기는 고통 탓에 생각보다 쉬이 들어가질 않았다. “으읏…… 흐…….” 허리를 기울여도 보고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았지만 식은땀만 흐를 뿐 기생들이 떠들던 쾌락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 아래만 화끈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들어가고 있긴 한 건지 사내의 양물은 조금도 짧아지지 않고 있었다. 전신을 파들파들 떨며 고군분투하는 꼴이 답답하였을까. 희명군이 손을 뻗어 왔다. 한 손으론 허리를 받치면서 다른 손으론 제 양물을 잡은 세령의 손을 감싸 쥐었다. 하나 세령은 배려를 가장한 그 손길이 썩 달갑지가 않았다. “제, 제가 할 것입니다.” “노력이 가상하여 나도 계속 지켜보려 하였는데, 어지간히 버거워 보여야지.” 그대로 질구를 꿰뚫을 것 같던 사내는 되레 세령의 손을 제 분신에서 떼어 냈다. 영문 모를 눈으로 쳐다보니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고 내가 봐줄 거란 생각은 접거라.” 예서 놓아주나 싶었던 일말의 기대를 짓밟으며 희명군은 세령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자, 잠깐…….” 더듬거린 곳에 애매하게 걸쳐 있던 속곳이 거슬렸던 걸까. 뚜두둑, 소리와 함께 천 쪼가리가 그대로 찢어발겨졌다. 하나 항의할 새도 없이 무자비한 손이 여린 살로 파고들었다. “아, 읏, 잠시, 잠시만요, 나리.” “너는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조금도 젖지 않았으니 내 걸 집어삼킬 수 있을 리 없지.” 버석한 거웃 아래를 더듬어 본 희명군은 타박하는 투로 중얼거리더니 세령의 몸을 아주 손쉽게 일으켰다. 본인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은 채였으니 들어 올렸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나, 나리. 이게 대체 무슨…….” “지금부터 치맛자락이 내 머리에 닿으면, 엉덩이를 때릴 것이야.” 치마를 걷어 올려 세령의 손에 직접 쥐여 주기까지 한 사내는 농이 아니라는 듯 둔부를 붙잡아 제 얼굴 쪽으로 당겼다. 그의 머리가 치마 안쪽으로 서슴없이 침범하였다. 옷감이 구겨지며 나는 바스락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생경한 곳에 닿아 있는 손가락이 어디까지 뻗어 올지, 어떻게 더듬을지, 또 사내의 눈은 어딜 응시하며, 입술은 어느 곳에 숨결을 불어 넣을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상상부터 하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망측한…….” 사내 낯짝에 맨 하반신을 드러낸 자세가 해괴하고 민망하여 세령이 바르작거렸다. 그러자 곧장 한쪽 엉덩이에서 찰싹 소리가 났다. <9> 아프게 때린 것은 아니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몸이 절로 굳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뒤늦게 깨달은 세령은 수치심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맨 엉덩이를 맞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붙들고 있기가 힘들면 입에라도 물든지.” 그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세령의 상태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둔부를 때렸던 손으로 거웃 아래를 파헤쳤다. 그리고 꽉 다물려 있던 균열을 비집어 그 사이를 엄지로 살살 간질였다. 사내에겐 몹시 자연스러워 보였으나 세령에게는 이 모든 행위가 죄다 충격이었다. “대체 왜 이런……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두 번은 아니 하겠다며. 하면 한 번은 제대로 하여야지 않나.” 오늘로 끝내고 싶다면 무슨 짓을 하든 가만히 있으란 뜻으로 들렸다. 하나 그 누구래도 가만히 있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리 서자라 한들 선왕의 아들인 희명군이 제 다리 사이에 입술을 묻고 혀를 내어 은밀한 곳을 핥는다면. “……나리!” 찰싹, 그가 또 엉덩이를 내리쳤다. 사내를 저지하려고 뻗은 손에 치마가 흘러내린 것이다. 세령은 마치 조련당한 개처럼 흘러내린 치맛자락을 허겁지겁 붙들었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속으로 발만 동동 굴리는데 다리 사이에 느껴지던 간지러운 감각이 일순 크게 튀었다. “힉……!” 좀 전에 양물을 넣으려고 하였던 곳을 그가 혀를 집어넣어 휘젓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츱, 츄읍, 소리까지 내며 여린 살갗을 흡입하기도 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사내의 정수리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둔부를 더듬던 손이 앞으로 옮겨 와 갈라진 부위를 훑었다. 그 탓에 세령의 전신이 움찔 떨었다. “아흣…….” 말캉한 혀가 아닌 군살 박인 손가락이 거웃을 헤집어 피가 몰린 공알을 짓눌렀다. 생경한 자극에 세령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걸까. 당최 상황 판단이 아니 되었다. 그저 낯설고 이상하였다. 하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아 몰랐던 자극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취기라도 오른 듯 기분이 이상야릇해지는 묘한 감각. 아픈 것은 아니었으나 음부에서 시작된 저릿한 느낌이 발끝까지 도달하여 발가락이 자꾸만 꼼지락거리며 모였다. 몸을 파들파들 떠는 와중에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는지 덥기까지 하였다. “착하구나. 반항도 아니 하고.” 교교하게 흘리는 웃음과 상반되게 사내는 아래를 게걸스럽게도 먹어 치웠다. 음부 전체를 핥아 올렸다가, 혀를 뾰족하게 세워 구멍을 쑤시고 둔덕에 입술을 깊게 묻으며 송곳니로 여린 살갗을 갉작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턱을 들어 오뚝한 코끝으로 공알을 비빌 땐, 소스라칠 만큼 자극적이라 몸이 연신 튀었다. “흐으…… 아…… 응…….” 세령은 신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제가 작금 어떤 민망한 행위를 하는지조차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이따금 제정신이 들 때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사내를 밀치고 싶었지만 치맛자락이 닿았다며 또 엉덩이를 내리칠까 봐 겁이 났다. 아파서 꺼려졌다기보다는 치욕스러웠다. 아마 희명군은 이런 식으로 다른 여인도 조련하였을 거다. 가만히 아래를 내보이는 것과 엉덩이를 맞는 일 중 선택하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하여 결국은 본인의 뜻대로 여인을 쥐락펴락하였겠지. 착하다는 말에 세령 또한 분하지만 안도를 느꼈으니 다른 여인이라고 다를까 싶었다. “히익!” 일순 손가락 하나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잘 견디던 세령은 반사적으로 사내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여지없이 한쪽 둔부를 내리쳤다. 안에 들어온 것을 느끼기도 전에 매를 맞아 세령의 무릎이 휘청이며 꺾였다. “쯧. 칭찬해 주니 금세 오만방자해져선.” 꺾인 오금을 살살 눌러 펴며 사내는 세령을 다시금 제대로 서게 하였다. 하나 다리 사이에 파고든 손가락은 빼주지 않고 안쪽 점막을 더 꾹꾹 눌러 댔다. “읏, 흐…… 나리, 대체 뭘 넣는…… 이런, 이런 거 말고 그냥 빨리해, 주십시오, 흐읏.” “이대로 내 걸 받았다간 찢어져 버릴 텐데.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 찢어져 버릴 거란 말은 사내의 양물 크기만 보아도 쉬이 신뢰가 갔다. 해서 대답을 머뭇거리니, 희명군은 예고하는 법 없이 손가락을 곧장 두 개로 늘렸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빠듯해졌다. “하으, 흐…….” 앓는 소리를 내니 사내는 거봐라 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세령은 분한 마음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가 선액을 질질 흘리며 꺼덕이는 양물에 시선을 빼앗겼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넣는다면 정말 찢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여 세령은 낯선 손길이 싫고 치욕적이어도 인내해야 한단 사실을 수긍하였다. “아읏, 흑…….” 더 저항하지 않으니 사내는 손가락을 넣었다가 꺼내며 내벽을 문지르기 시작하였다. 들어온 것만으로도 다리가 덜덜 떨리는데 여린 점막까지 그런 식으로 자극을 주니 몸이 연신 움찔 튀었다. 또한 공알도 부지런히 지분거려, 저릿한 열기가 고양감을 일으켰다. 숨이 가빠 오고 단순한 할딱임에 신음도 섞여 나왔지만 스스로 막을 길이 없었다. 희명군이 괴롭히는 방식은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지라 더 그랬다. “하아, 나리, 하으, 아…… 응…….” 사내는 아래를 그저 같은 방향으로 쑤시는 것이 아니고 입구를 갉작였다가 휘저으며 안쪽을 늘려 놨다. 그도 모자라 내벽을 긁어 올리면서 손바닥으로 공알을 문지르듯 치대니 그의 혀가 떨어진 지 오래인데도 다리 사이에선 찰박찰박 물소리가 났다. 지금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것이 사내의 타액이 아닌 제 흥분액이란 뜻이었다. “아……!” 아래를 괴롭히던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가 되자, 희명군은 내벽을 쑤시던 손가락을 세 개로 늘렸다. 얼얼한 통증에 그의 어깨를 붙들고 싶었지만 학습된 규칙에 공연히 치맛자락을 더 꽉 붙들게 되었다. 사내는 그게 기껍다는 듯 눈매를 휘영청 접었다. “유독 여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맞느냐?” 짓궂은 표정을 지은 희명군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접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세령의 약점까지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한 부근만을 집중적으로 갉작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온몸이 저릿해지고 극심한 요의가 밀려왔다. “흐윽, 나리, 나리, 잠시만요, 이거 이, 이상하, 읏…….” 머리칼이 죄 쭈뼛 서는 감각에 몸부림치던 세령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사내의 어깨를 붙들었다. 또 엉덩이를 내리칠까 봐 무심코 주춤하였지만 그는 음부를 괴롭히는 데 몰두하여 치맛자락이 본인 정수리를 간질이는 것도 모르는 듯하였다. 세령 또한 사내의 눈치를 볼 수 있었던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내부를 맹렬하게 휘저어 대는 움직임에 손끝 발끝이 절로 모이고 현기증이 일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으니. 무엇보다도 당장 사내의 손 안에서 음부가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실금이든 자신이 겪어 본 적 없는 무언가든, 타인의 얼굴 앞에서 실례해 버리겠단 직감이 불쑥 스쳤다. 하여 뒤늦게나마 저항하려 했다. “나, 나리, 저, 정말 이제 안 될 것, 히익……!” 물론 순순히 놓아줄 사내가 아니었다. 찰싹, 잊었던 벌을 내린 사내는 달아나지 못하게 둔부를 콱 움켜쥐고 질 안을 더욱 들쑤셨다. 제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앙알대던 세령이 기어이 절정에 오를 때까지. “아으응……!”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진 듯, 한순간에 무릎이 꺾이고 아래에서 무언가 팍 터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세령은 제 아래 희명군이 있단 사실조차 잊고 그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일순 눈앞이 하얘지고 현기증이 일어 제대로 인지 못 하였지만, 사내의 손에 창피하게 무얼 줄줄 흘려 댄 듯하였다. 그는 제 손을 적신 물을 빤히 바라보며 픽 조소를 흘릴 뿐이었지만. “후우.” 한참 뒤, 별안간 짙게 드리우는 연기 때문에 세령은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꿈결을 부유하듯 혼미했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온 것이다. 하나 그러든 말든 희명군은 제게 기댄 세령을 토닥이거나 치워 버리는 것 없이 그저 여상하게 장죽을 빨고만 있었다. “읏, 소, 송구합니다, 나리.” 이성을 되찾은 세령이 곧장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자, 두툼한 팔뚝이 허리를 감아 당겼다. 겨우 떨어졌던 뺨이 다시금 단단한 가슴팍에 뭉개졌다. 희명군은 달뜬 모습을 채 거두지 못하여 불그스름한 세령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였다. 입 밖으로 연기를 흘리던 그는 뜬금없이 세령의 뺨을 검지로 톡, 쳤다. “혼자 아주 즐거웠던 모양이로구나.” “…….” 세령의 낯빛이 더욱 붉어지자, 그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눈매를 휘었다. “설마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10> 사내의 눈길이 제 중심부로 향하였다. 세령의 시선도 덩달아 따라갔다. 어째 아까보다 더 팽팽하게 부푼 것처럼 보였다. 저런 게 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당장에라도 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놔줄 사내가 아니란 건 이미 잘 알고 있었고 두 번은 안 하겠노라 한 다짐 또한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어쨌든 그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을 세 개나 삼켰으니, 이번에는 스스로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명군도 그걸 원하는 눈치였고. “……그리 생각 안 합니다. 끝까지 할 겁니다.” “허. 쓸데없이 고집이 세구나.” 넘어가 줄 생각도 없으면서 저런 말은 왜 중얼거리는지 모르겠다. 세령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조심스레 사내의 분신을 쥐었다. 흥분의 증좌인지 살덩이가 뜨끈하였다. 파정이라도 한 것처럼 끈적한 물은 이미 핏줄을 따라 흘러내리기까지 하였고. 퍽 민망한 모양인 데다 한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는 굵기라 주저되었지만, 이렇게 못 볼 꼴 다 보이게 된 지금 당장 끝내 버리잔 마음이 들었다. 해서 세령은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금 치맛자락을 들어 올린 후 자세를 잡으려 하였다. 한데 별안간 희명군이 손을 뻗어 세령의 풀어 헤쳐진 옷고름을 쥐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세령은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을 저지하였다. “이건 언제까지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으려고.” “……벗으라는 말씀입니까?” “나야 괘념치 않다만, 구겨지고 더러워져도 괜찮다면 입고 있든가.” 세령은 옷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본론으론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치맛자락은 이미 사정없이 구겨진 채였고 속곳은 찢어져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제 후줄근한 옷이었더라면 아무렴 어떤가 하였겠지만, 상전을 모신다고 묘원각에서 내어 준 비단옷이었다. 정사를 나누다 희명군이 옷을 속곳처럼 찢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돌아갈 길 또한 막막해질 거다. “……제가 벗겠습니다.” 세령은 하는 수 없이 저고리를 먼저 벗고 치맛말기에 손을 대었다. 옷감이 맨살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가자, 하얀 피부가 수치심에 불그스레 변하였다. 그 순간 희명군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하였다. 그는 뭐에 자극을 받은 건지 불쑥 세령의 맨 허리를 감아 제게 밀착하도록 당겼다. “너, 천치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내를 동하게도 하는구나.” “……예? 그게 무슨, 읏!” 언제 제 물건을 세령의 다리 사이에 맞춘 건지. 뭉툭한 선단이 발갛게 부어오른 음부를 슬그머니 문질렀다. 이미 질척해진 두 성기가 미끈하게 서로를 유영하니 잊었던 열감이 다시금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나, 나리.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그래. 네가 하거라. 삼키는 것만 도와줄 테니.” “아니, 그것도 제가…… 아윽!” 일순 좁은 구멍에 주먹을 처넣은 것 같은 둔통이 일었다. 허리가 절로 둥글게 말리고 입에선 명치라도 얻어맞은 듯 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나 고개를 내려 접합부를 보았을 땐 고작 귀두만 머금은 상태였다. “으, 흐으…….” 아팠다.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른 무지근한 아픔이었다.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정말 생살이 찢긴 듯한 고통이라 등허리가 죄 뻐근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내는 언제든 세령을 끌어 내릴 수 있게 작은 골반을 붙들고 살살 어루만졌다. “스스로 할 여유가 없어 보이는데. 도와주랴?” “아니, 아니요. 읏, 제가…… 제가 할 것입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세령은 어떻게든 저 무식한 살덩이를 품어 보려 허리를 내렸다. 그러나 질구가 사방으로 벌어지는 통증은 도무지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화끈거리는 감각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안타까워 못 봐줄 지경이로구나.”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제 인내가 다하였단 뜻이었는지, 그가 세령의 골반을 확 잡아 내렸다. 그 순간, 도무지 들어갈 것 같지 않던 기둥이 끝까지 내벽을 꿰뚫었다. “악……!” 짧은 비명을 내지른 세령은 저도 모르게 사내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통증을 못 이기고 파들파들 떠는 몸을 귀찮다며 밀어낼 법도 하였는데, 희명군은 그러지 않았다. 되레 가엾은 등허리를 쓸어 내며 나직한 숨을 흘릴 뿐이었다. 움찔거리던 몸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그는 피우던 장죽을 세령의 입 가까이에 대었다. “빨아 보겠느냐.” 본인이 물었던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내미는 모습이 퍽 호색한 같았다. 아래를 비비는 상황에 이런 걸 따지는 것도 우스웠지만. “아, 아니요.” “통증이 잡힐 터인데.” 유독 냄새가 매캐하더라니, 역시 일반 담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령은 눈물 고인 눈을 애써 부릅뜨며 고개를 저었다. “괜, 찮습니다.” “싫으면 말고.” 세령을 향하였던 담뱃대는 태연하게 희명군의 입으로 들어갔다. 희뿌연 연기를 후우, 길게 뱉은 사내는 숨을 몰아쉬는 세령의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과실을 짓이기듯 엄지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어쩐지 세령은 그가 이다음에 무얼 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제 입술에 닿는 시선에서 정염을 느낀 세령은 천천히 간극을 좁혀 오는 사내의 입술을 반사적으로 막았다. 그러자 불만을 드러내듯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어. 그, 그것이…….” “……설명을 잘해야 할 것이다.” 냉랭한 눈빛에 입이 횡설수설 열렸다. 그러나 준비한 핑곗거리는 딱히 없었으므로 세령은 직설적으로 털어놓았다. “접문은…… 하기 싫습니다.” 손바닥에 짓눌러진 입술로 허탈한 실소를 흘린 그는 순순히 고개를 물렀다. “별 희한한 고집을 부리는구나.”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세령의 물음에 그는 수긍하듯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지만, 그렇다고 심사가 뒤틀리지 않은 건 아닌 듯하였다. 심통을 부리듯 세령의 둔부를 꽉 쥐며 읊조렸다. “하면 허리라도 제대로 흔들어 보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 비싼 입술이라도 뜯어 먹고 싶을 것 같거든.” 또 한 번 둔부를 내려칠 것 같은 기세에 조붓한 어깨가 흠칫하였다. 한데 희한하게도 이제는 사내가 저를 죽일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흉흉한 기세가 사그라든 적은 없지만, 희명군은 지금도 충분히 저를 봐주고 있었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뜻대로 하고 싶을 때마다 사나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장죽을 뻑뻑 빨아 대는 것처럼 보였더랬다. ‘사내 경험이 없는 여인은 안아 본 적이 없어 봐주는 것인가…….’ 잠시 의구심이 스쳐 지나갔지만 언제고 마음을 바꿔 멋대로 굴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내였다. 해서 세령은 엉덩이를 뒤로 물려 빠듯하게 내부를 채운 물건을 뱉어 냈다. “흣, 흐…….” 고작 빼내는 것인데도 흉악한 크기의 귀두 갓이 사방을 긁어내 비음이 절로 샜다. 그리고 다시 아래를 끝까지 맞췄을 땐, 한 번 들어왔던 굵기임에도 마치 처음 받아들이는 것처럼 거북하여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출납이 저만 버거운 건 아닌지 희명군의 미간에도 옅은 선이 생겼다. 허리 쓰는 방법을 대강 익힌 세령은 남근을 깔짝깔짝 넣었다가 빼길 반복하였다. 고작 손톱만큼의 움직임인데도 생소한 것이라 숨이 쉬이 가빠 왔다. 하나 그 어설픈 몸짓 따위론 정욕을 해소할 수 없었는지, 상체를 젖히고 세령의 모습을 가만 응시하던 희명군이 다시금 골반을 쥐었다. “뭐, 하시려고…….” “어지간히 감질나야 말이지.” “흡……!” 희명군은 세령의 골반을 물러 기둥을 거의 귀두까지 빼냈다가 끝까지 콱 처박았다. 내벽을 쳐올리는 묵직한 성기에 숨이 턱 막히고 허리가 꺾였다. 단전에서부터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내는 커다란 손자국이 하얀 살에 새겨질 만큼 둔부를 꽉 쥐더니, 접합 부위를 콱콱 쳐올리기 시작하였다. “흣, 아, 나, 나리! 천, 천천히…… 아읏!” 느리게 찌걱거리던 교접 소리는 철퍽철퍽 물소리를 내며 난잡하게 변하였다. 희명군은 내벽을 밀어 올리기 무섭게 몸을 물렀다가, 다시금 더 깊이 남성을 처박았다. 알알한 통증에 허리가 절로 휘었다. 밀어붙이는 속도를 견디지 못한 세령은 할딱거리며 가슴팍을 들썩였다. 고작 눈앞에서 흔들리는 살덩이로도 동하였던 걸까. 희명군은 세령 쪽으로 몸을 붙이며 가슴을 한 아름 물었다. “아흑……!”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도 아니고 다 자란 사내에게 젖을 물린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곤혹스러웠다. 혀끝으로 유륜을 살살 굴리는 게 낯간지러워 벗어나려 하니 희명군은 유두를 깨물며 주의를 주었다. “흣, 거긴 대체 왜…… 아!” “아래도 빨려 놓고 새삼. 그냥 입술 대신 내어 준다 생각해.” <11> 세령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그가 키득거리며 혀끝으로 가슴을 할짝댔다. 물지 않은 가슴은 투박한 손으로 전체를 터트릴 듯 쥐었다가 선단을 꼬집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하반신은 성실하게 속살을 헤집었다. 그리하니 자극이 쉴 틈 없이 가해져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뱉은 말처럼 입술 대신 가슴이라도 먹겠다는 듯, 희명군은 세령의 새하얀 가슴이 벌겋게 물들 때까지 빨고 씹어 댔다. 접문을 안 하겠다고 선언한 대가로 비틀린 속내를 받아 주어야 하는 제 처지가 이런 것이었다. “거기 그, 그만…… 아픕니다, 읏!” “아프다고?” 아프단 소리에 제가 만든 자국을 시선으로 훑은 사내는 별안간 몸을 뒤집었다. 제 위에 올라타 있던 세령을 단숨에 바닥에 눕히고 그 위를 점거한 것이다. 잠시 빠져나간 물건에 이만 봐주려나 기대한 것은 무용하였다. 희명군은 가녀린 다리를 가볍게 벌리더니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제 몸을 그 사이로 곧장 밀어 넣었다. “아읏, 흑, 나리, 아앗!” “몸이 죄 달구나. 하아, 단 건 질색이라 여겼는데, 입술을 맛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야.” “흣, 흐윽…… 제발 천, 천천히…… 아응!” 세령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지, 그는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살갗을 붙이고 종마처럼 허리를 흔들어 댔다. 평범하지 않은 크기에 내벽이 어느 한 곳 남김없이 자극을 받아 성감을 일으켰다. 저릿한 느낌은 이내 희락으로 바뀌었고 들쑤시는 곳에서부터 흥건하게 흘린 물은 사방으로 튀었다. 음란한 소리는 덤이었다. “하아…… 누이, 들려? 여기, 아래 입 우는 소리 말이야.” “아읏, 응! 아아, 앙!” “네가 내 좆을 어찌나 게걸스럽게 빨아 대는지 들리느냐고, 은세령.” 그가 귓가에 대고 연신 더러운 소리를 흘렸지만 세령은 무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극이 너무 버거워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다. 희명군의 분신이 기어이 제 뱃가죽을 꿰뚫을 것 같기도 하였다. “나리, 제발, 아, 아흐으, 읏, 으응!” “제발, 뭐. 더 달라고?” “아닛, 흐으…… 이상, 이상해요. 이러다가 진짜…… 읏!”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좋아 죽겠다는 뜻으로 들어도 될까, 누이?” “아니, 힉!” 어느 순간, 절벽에서 추락하기 직전의 고양감과 두려움이 전신을 감쌌다. 저릿한 감각이 무섭게 솟구치는 바람에 세령은 주먹으로 사내의 단단한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되레 세령의 위에 제 몸을 바짝 붙이며 짐승처럼 허리만 흔들었다. 그 집요하게 내벽을 짓이기는 자극은 수그러들 틈도 없이 겹겹이 쌓였고 결국 극한에 달하였다. “아흑, 아, 아앗!” 일순 눈앞에서 별이 튀며 시야가 새하얗게 바랬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곤두박질치려는 찰나에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세령은 파드득 떨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극심한 절정감에 전신이 튀어 올랐을 땐, 심한 경련을 이기지 못하여 민망한 교성까지 내지른 것도 같았다. “후…….” 강하게 조여드는 내벽에 사정감을 참을 수 없었는지 희명군 또한 나른한 숨을 뱉으며 온몸을 굳혔다. 이미 살덩이가 내벽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미지근한 것이 배 속에 꾸역꾸역 흘러들었다. 몸을 짓누르던 묵직한 무게는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떨어졌다. “으응…….” 허리를 물리는 가벼운 동작에도 점막이 긁혀 열꽃이 심겼다. 민망하게도 신음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 되었다. 사내는 몸을 떨어뜨리면서 움찔대는 허벅지를 커다란 손으로 쓸어 냈다. 그것만으로도 어째 야릇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또 비음을 흘릴 것만 같았다. 하여 세령은 정신을 부여잡고 상체를 꾸물꾸물 일으켰다. 맞붙어 있던 하반신이 온전히 떨어져 나가니 방금까지 흉흉한 물건을 물고 있던 질구가 뻐끔대며 희뿌연 파정액을 왈칵 토해 냈다. 참으로 봐주기 힘든 장면이었다. ‘……기어이 일을 치렀구나. 그래도 이만하면 금방 지나갔다.’ 탈력감과 공허함이 번갈아 밀려들었다. 그렇지만 힘든 것은 이제 끝났단 생각에 금세 안심이 되었다. 세령은 가물가물하게 감기려는 눈에서 애써 노곤함을 쫓아내고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고는 비척대며 벗어 둔 옷가지를 더듬었다. 할 일을 마쳤으니 곧장 옷을 걸치고 그에게 옛일을 들을 생각이었다. 한데 돌연 발목이 붙들려 희명군 쪽으로 죽 끌려 내려갔다. “……나리? 뭐 하십니까?” “참으로 성미가 급하구나. 자꾸 끝났다 단정 짓고 떠나려는 걸 보니.” 청천벽력 같은 말에 시선을 내리니 언제 파정했냐는 듯 사내의 성기가 우뚝 솟아 있었다. “부, 분명 한 번만 하겠다고…….” 더듬더듬 말을 뱉으면서도 본능적으로는 그에게서 떨어져야 한단 걸 느꼈다. 기겁한 세령은 몸을 뒤집고 엉금엉금 기어서 그와 거리를 두려 하였다. 그러나 고이 놔줄 사내가 아니었다. 다시금 발목이 잡혔다. “잠깐만요, 나리!” 도망치려는 사냥감을 잡아챈 사내는 엎어진 세령이 더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다리 사이에 제 것을 끼워 맞추며 어깨를 깨물었다. “힉……!” 좀 전에 잔뜩 사출한 것으로 삽입은 수월하긴 하였다. 하나 원체 익숙해질 만한 크기가 아닌지라 질구가 다시금 벌어지는 감각은 여전히 낯설고 두려웠다. 세령은 버둥거리며 희명군을 밀쳐 보려 하였다. 물론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제가 두 번은, 읏, 없다고…….” “그 한 번이 나를 만족시키는 횟수가 아니었나? 하면 아직 멀었어, 누이.” “아흑!” 퍽, 소리와 함께 가장 안쪽이 두툼한 귀두로 뭉크러졌다. 아직 절정의 느낌이 다 가시지 않아 몸이 예민한 탓에, 삽입 한 번으로도 다시금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세령의 상태가 어떻든, 희명군은 음경을 끝까지 욱여넣고 허리를 뭉근히 돌렸다. 그 느긋한 움직임에도 세령의 입에서는 쇳소리 섞인 교음이 흘렀다. “흐읏, 으…… 나리, 아으, 흣…….” “사내 경험은 없는데 재능은 있는 모양이구나. 금세 우는소리까지 달게 내니 말이야.” 일부러 수치심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걸까. 말을 뱉는 족족 속을 뒤집어 놨다. 울컥한 마음에 부정하고 싶었으나, 제대로 된 문장을 뱉을 수도 없게 배 속을 찔러 대니 입에선 반항 대신 교성만 흘러나왔다. “아니, 아, 응……!” “하하. 너도 인정하는 것이냐.” 희명군은 발갛게 물든 세령의 귀를 잘근거리며 손을 아래로 넣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뭉개진 가슴을 힘껏 주물럭거렸다. “흐으, 읏…….” 사내의 분신을 깊숙이 받아들인 내벽은 느릿한 움직임에도 금세 뚫릴 것만 같다. 그렇지만 세령의 심중에 두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피부가 스치는 곳이 죄 간지러웠다. 아래는 진작 흥분에 차 애액을 내보내고 있었고. 첫 정사는 분명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왜 이렇게 신열을 앓는 것처럼 몸이 달아오르는 걸까. “누이는 아우 좆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야.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침을 질질 흘려.” “그런 거 아니, 히익!” 주어진 자극에 적응해 버린 것을 어찌 알아챈 건지. 희명군은 별안간 세령의 골반을 끌어 올려 개처럼 엎드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그동안 봐줬다는 듯 뒤에서 질구를 거칠게 들쑤시기 시작하였다. “흐아! 아! 앗, 아앙!” “아니긴. 이리 앙알댈 거면서.” 퍽, 퍽, 살갗을 후려치는 소리가 대단하였다. 벌을 주겠다며 둔부를 내리치던 건 약과였다. 작금은 그의 전신이 곤장이라도 된 양 사정없이 볼기를 매질하였다. 그러니 꿰뚫린 점막은 오죽하랴. 불이라도 머금은 듯한 몽둥이가 내벽을 연신 들쑤시는데, 힘에 밀려 몸이 엎어졌다. 그러나 사내는 세령의 팔을 뒤로 꺾어 당기며 허리를 쾅쾅 쳐올렸다. 세령은 꼬챙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파드득 떨며 교성을 내었다. 그와의 정사는 마치 끝나지 않고 되풀이되는 듯한 시간 속에 갇힌 느낌을 주었다. 그는 씨물을 토해 내기가 무섭게 남근을 부풀렸고 기진맥진한 세령을 다시 일으켜 아래를 맞추었다. 세령이 도저히 못 하겠다고 애원할 땐, 다시금 음부에 얼굴을 처박고 쾌락을 심기도 하였다. 그리하니 허벅지 사이는 애액과 정액이 흘러 마를 틈이 없었다. 엎드려서 개처럼 붙어먹고, 벽에 밀쳐져 발이 허공에 들릴 만큼 하반신이 치받혔다. 바위산 같은 몸 아래 깔려 찍혀 눌리던 자세가 대부분이었지만, 살을 섞는 족족 절정에 올랐다. 정말 듣던 대로 짐승 같은 난잡한 정사였다. 그렇게 한 번의 파정이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던 세령의 예상을 뒤집고, 희명군은 밤새도록 제 정을 몇 번이고 쏟아 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여인 경험이 많은 사내임을 증명하듯 세령은 그보다 더 많이 황홀경을 맞았다. 자신이 이렇게 흥분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태어나 처음 깨달은 날이었다. <12> 별안간 눈이 뜨였을 땐, 푸른 빛이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새벽이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밤 시중이 그래도 끝은 났던 모양이었다. 언제 혼절하였는지는 기억에 없었지만. “으윽…….” 앓는 목소리마저 갈라져, 세령은 제 목을 공연히 더듬었다. 명이 붙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한 듯하여 뒤늦게 헛웃음이 나왔다. 세령은 상체를 일으키면서 다시금 끙끙거렸다. 묘원각에서 물도 못 마시고 종일 막일하였던 날에도 이리 고되지는 않았거늘,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천근만근이었다. 따지고 보면 살과 살을 수백 번 부딪쳐 댔으니 두들겨 맞은 게 맞긴 하였다. 하나 허리가 끊어질 듯 뻐근하고 가랑이가 찢어진 양 다리가 후들대는 경험은 이전에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세령은 혹여 희명군이 잠에서 깰세라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어기적어기적 일어섰다. “……미쳤구나, 정말.” 여기저기 죄 돌아다니며 붙어먹었으니 방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세령의 옷은 물론이고 그의 옷 또한 너저분하게 바닥을 굴렀으며 서안이며 창호지까지 희뿌연 정액이 튀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령의 새하얗던 피부는 몸 어느 한 군데 안 깨물린 곳이 없어 울긋불긋 엉망이었다. “하…….” 아무리 자처하였대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짐승도 아니고 사람을 왜 이렇게까지 잘근잘근 씹어 놓은 것인지 이해가 아니 되었다. 아니, 애당초 그가 이해할 만한 영역에 있는 사람이었던가. 소문처럼 죽어 나가지 않았으니 그저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목숨을 보전한 걸로 안도를 느껴야 하는 제 처지에 조금 씁쓸해졌다. 이 사달을 내어 놓고 배부른 맹수처럼 태평히 잠든 사내가 얄밉고 원망스러웠다. 당장에라도 무방비한 목에 날붙이를 쑤셔 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아직은 그에게 얻어 낼 정보가 있었다. 게다가 오만한 표정 하나 없이 얌전히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휘언이 연상되어 마음이 약해졌다. 아무리 쌍생아래도 어쩜 이리 똑 닮은 것일까. 눈웃음을 칠 때면 유독 어여뻐 보이던 왼쪽 눈의 점까지 같아서, 괜스레 그 애가 더욱 보고 싶었다. 이런 얼굴에 주저 없이 칼을 들이밀 수 있을 리 없었다. 해서 세령은 그저 긴 한숨을 흘리는 것으로 속을 달랜 후 두 사람이 싸지른 것으로 끈적이는 다리를 대충 닦았다. 그러고는 구겨진 옷을 주섬주섬 챙겨 방을 조용히 나섰다. * * * 자욱한 구름이 내려앉은 녹음 사이로 산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른 공터에 마치 정물인 양 꼿꼿이 선 사내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사내의 귀에 모든 소음이 멎는다. 활터로 다가오는 기척 또한 그에게는 그저 숨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집중을 위해 나직한 숨마저 참았을 때, 걸음 소리는 그가 몰두하고 있단 걸 깨닫고 자연스레 멈추었다. 이에 화답하듯 상처투성이의 손이 붙들고 있던 화살을 놓았다.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 그리고 쇠가 과녁에 꽂히는 소리. 놀라울 것도 없이 명중이었다. “휘언.” 약에 절어 흐리멍덩한 눈꺼풀은 걷히고 총명한 흑색 눈동자가 돌아본다. 옷깃은 마치 각도라도 잰 양 단정하고, 바람이 부는데도 잔머리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그런 고지식한 겉모습과 달리 제 수하로 부리던 이가 이름을 부르는데도 사내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금방 돌아왔군, 무혁. 행랑채만 들른 것인가?” “그래.” “이번에도…… 거절하던가?” “음. 이번 선물도 놓고 오긴 하였지만, 여전히 그 어떤 것에도 손을 대질 않는다네.” 무혁의 말에 수려한 낯이 착잡해졌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로군.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찾아갔다간 더욱 성만 돋구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를 어쩐다…….” 수심 깊은 눈이 멀리 산 중턱을 응시하였다.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닌가 보다. 상대가 어떤 이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휘언은 나흘째 제가 안은 여인에게 온갖 패물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 그때마다 경멸하는 얼굴로 거절하니 전달하는 무혁도 슬슬 심기가 불편하였다. 도화를 사칭하여 겁도 없이 왕자군의 거처에 발을 들인 여인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살수거나 멍청하게 한몫 잡아 보려는 기생이겠거니 하였다. 해서 그 방에 들일 때 도화가 왔노라, 알리지 않고 기생이 왔다고 신호를 주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 아니니 방 안에 있던 사내도 알아들었으리라. 해서 당연하게도 그날 밤은 시신을 치우겠거니 짐작하였다. 한데 무슨 수를 쓴 것일까. 그 여인이 맹수의 소굴에서 멀쩡히 살아 나왔다. 거기서 그쳤더라면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사내이니 한번 일탈한 거라 여겼을 터인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혁. 어제 그 아이를 불러.] [……무혁입니다. 한데 어제 그 아이라면.] [은세령 말이다.] 매사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사내인데, 심지어는 몇 년을 보필한 수하의 이름조차 되는대로 부르던 이인데, 은세령이란 이름을 콕 집어 데려오라고까지 명하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인을 품고 사지 멀쩡히 내보내 주기도 하였다. 뒤늦게 무혁은 깨달았다. 그 아이가 휘언이 주시하고 있던 여인이란 것을. 기껏해야 어찌 지내는지 보고 오란 명이었고 그마저도 한두 번 내리고 말았던 것이라,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데 묘원각에 있었다니. 심지어 곁에 누굴 두는 법이 없던 희명군과 밤까지 함께 하였다니. 익숙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하였지, 그 아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다. 어찌 보면 진작 눈치채지 못한 제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같은 여인에게 관심을 보일 수가 있는 걸까. 몸을 공유하면 취향 또한 같게 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둘로 나뉘기 이전 기억에 그 여인이 있기라도 하였던 건지……. 눈앞의 사내와 알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 무혁은 세령이라는 변수가 달갑지 않았다. 원래도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인 게 불안하였다. 제 선에서 수습이 불가할 것 같아 걱정부터 앞섰다. 마음 같아선 늘 하던 대로 휘언이 제 삶에 끼어든 이를 무시하였으면 싶었다. 그 여인이 은세령이란 걸 알면 충격이 클 것이니, 모른 척 각자의 삶을 살다가 잊었으면 했다. 하나 며칠이 지나도록 저리 신경 쓰니 계속 외면하는 것도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무혁은 세령의 말을 은근하게만 흘려 휘언을 체념하게 만들자고 다짐하였다. “패물 따위로 저와 약조한 걸 대신할 심산이냐고 성을 내던데.” “약조? 그게 무엇이지?” “물어도 말해 주지 않더군.” “……직접 마주하길 바라는 것인가.” “그런 것 같았네. 그러니 이제 더는 나서지 말게나.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니.” “그렇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는 없지…….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괴로워. 처음이라 그런 것인가…….” 무혁은 나흘 전, 난장판이 된 방 안에서 나신으로 망연하게 앉아 있던 휘언을 떠올렸다. 벌어질 일인 줄 알았지만 정말로 벌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허망한 모습이었다. [무혁. 내가 기어이 여인을 범한 것 같아.] 마치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뱉는 듯한 어투에 무혁은 코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군.] [살아는 있을까?] [사지 멀쩡히 나갔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 그 여인이 혹 원하는 건 없었나? 나라도 마땅한 보상을 하고 싶은데.] 당시에는 사고를 수습하려고만 하였지, 구태여 여인의 신상을 묻지는 않았으므로 무혁도 더 나서지 않았다. 휘언은 반대의 삶에 끼어드는 걸 꺼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이렇게까지 오래 잠들지 않은 적은 처음인 데다, 깨어 있는 내내 그 여인 걱정만 하고 있으니 무혁은 휘언이 어서 빨리 단념하길 바랐다. 하루라도 좀 마음 편히 지냈으면 싶었다. 해서 그답지 않게 조금 더 오지랖을 부렸다. “내 생각에는…… 알던 사이가 아닐까 싶은데.” “알던 사이? 무혁 자네 말고 가까이 지내는 이가 있었던가?”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더군. 나를 통해 마주한 것은 고작 이틀일 뿐인데, 사람에게 집념을 보인 건 처음이었어.” “그 여인이 대체 무엇이기에…….” “글쎄. 어쩌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맺은 옛 인연일 수도 있는 것이고…….” 대수롭지 않게 흘린 말에 휘언은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자에게 여인이라니. 자네도 알잖나. 그자가 곁에 누굴 두는 법이 있던가?” “자네와 내가 친해지기 전에 만난 여인일지도 모르지. 어릴 적이라든가.” “집념을 보일 정도라면 내가 몰랐을 리 없네. 아무리 어릴 적 연이래도 내가 알던 여인이라면…….” 일순 그는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을 굳혔다. 그때 무혁은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밝혔단 걸 깨달았다. “무혁, 혹…… 그 여인의 이름을 아는가?” “그게…… 중요한가?” “설마. 아니겠지?” “…….” “무혁!” “하아……. 그래. 은세령……이라고 하였네.” “뭐?” 쥐고 있던 활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삽시간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혼란에 물든 눈자위가 시뻘겋게 변하였다. “……휘언?” “서, 설마…… 그자가…… 세, 세령일…….” 휘언은 파르르 떠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지 죄 내팽개치고 묘원각 방향으로 향하였다. 산에서 내려가는 급한 걸음은 금세 뛰는 것으로 바뀌었다. 무혁은 사내가 제 옆을 지나치던 그때, 죽여 버리겠단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하나 곧장 따라가 말릴 생각은 못 하였다. 오랜 친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게 당혹스럽고, 이성을 잃은 모습을 처음 본 터라. 그 순간에는 휘언이 잠들고 희명군이 도로 깨어난 줄 알았으므로. <13> 보자기 매듭도 풀지 않은 패물이 방문 앞에 그득 쌓이기 시작한 게 벌써 나흘째다. 받지 않겠단 말도, 도로 가져가란 말도 죄 무시하고 그저 이렇게 두기만 하는데, 어째 더 놀리는 것 같아서 세령은 슬슬 인내에 한계가 왔다. “질문에 거짓 없이 답을 달라 청한 게 그리 어려운 거였나? 하…….” 가락지 표면을 갈다가 눈만 돌리면 보이는 패물 더미에 세령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화대도 아니고 저게 다 무슨 짓인지. 약조 따윈 잊은 듯한 태도에 화가 나 따지고 싶었지만,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엔 그는 너무도 높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귀빈채로 부르지도 않으니 사내를 만날 방도가 없었다. 만나게 해 달라고 그의 수하에게 청한 적도 있지만 당연하게도 거절당하였다. 세령은 이런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고 분했다. “그날 깰 때까지 기다릴 것을 그랬나…….” 너른 방 안이 엉망진창 될 정도로 원수와 밤새 몸을 섞었다는 것이, 심지어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였단 사실이 수치스러워 방을 박차고 나온 게 이제야 후회스러웠다. 속살을 전부 내보이고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였던 터라, 그때는 희명군이 쉬이 대면하기 어려운 사내란 걸 잠시 잊었다. 그저 정사의 냄새가 짙게 밴 곳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어, 귀빈채를 벗어나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런 제 행동을 사내도 괘씸하게 여겼을까. 지난 정사를 잊지 말라는 듯 그는 끝도 없이 패물을 들이밀었다. 만나 줄 생각도 없으면서. “저거나 먹고 떨어지란 건지…….” 제 방 근처를 지나는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한몫한 탓에, 세령은 여느 때보다도 예민해져 있었다. 그들은 세령이 지나갈 때마다 선망인지 조롱인지 모를 눈길로 흘긋거렸다. 등을 돌리면 속닥거렸고. 아무래도 저를 희명군에게 인도하던 영선이 패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여기저기 떠들어 댄 모양이었다. 다들 제가 누구의 밤 시중을 들었는지 아는 눈치였으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며칠째 이런 일이 반복되니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꾸만 시야 끝에 걸리는 패물은 또 어떻고. 볼 때마다 거슬려 도저히 작업에 집중이 아니 되었다. “하아.” 세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잔심부름이라도 받아 저 원수 같은 패물로부터 떨어질 심산이었다. 한데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그를 저지하는 행랑아범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고, 나리! 천천히 좀 가십시오. 이 늙은이 따라가기가 벅찹니다.” “따라올 필요 없네.”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걸음 하지 마시고 누구를 찾아온 것인지 제게 말씀만 하시면…….” “…….” 흙바람을 몰고 온 사내는 마루에서 막 내려온 세령과 마주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세령은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휘언은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로 호흡을 떨었다. “에, 에고. 만나려는 이가 세령이었습니까? 그럼 제게 말씀하시지…….” “떨어져 있게. 말을 엿듣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후일을 걱정해야 할 것이야.” 평소보다 부드러운 구석이 있어 의아하였는데, 역시 희명군은 희명군이었다. 나긋한 것 같으면서도 어째 선득하여 행랑아범은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그러나 행랑아범에게 비쳤던 기세와 달리 휘언은 선뜻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저 세령을 물끄러미 눈에 담을 뿐. 그렇게 응시하기를 한참, 그는 조심스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누이.” “하.” 저 사내가 저렇게 순진무구한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이였나. 인지할 새도 없이 세령의 입에선 헛웃음이 먼저 터졌다. 먹고 떨어지라는 듯 패물이나 보내올 땐 언제고 돌연 찾아와 보고 싶었다니. 기가 찼다. 처음 보는 사내에게 불나방처럼 달려든 연유가 단순히 휘언을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라 여겼을까. 만일 그리 생각하여 누이 소리를 지껄이는 거라면, 저급한 사고방식에 없던 정까지 죄 떨어질 지경이었다. 어떤 여인이 어릴 적 좋아하였던 사내와 얼굴이 비슷하다고 순순히 치마를 걷느냔 말이다. ‘누이’라는 호칭 하나로 휘언의 흉내를 낼 수 있다고 여긴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자신을 그리 쉽게 보았단 사실에 부아가 치밀었다. “누이, 내가 얼마나…….” “누이라 하지 마십시오. 다가오지도 마시고요.” “…….” 한 걸음 다가오려 하자마자, 세령은 경계심을 내비쳤다. 그러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나 의중을 모르겠던 사내의 표정이 어쩐지 오늘은 너무도 잘 읽혔다. 하나 그 감정이 진심이라기보단 누군가의 시늉을 하는 것 같단 생각만 들었다. 휘언에게 약한 걸 알아서, 이젠 하다 하다 연극까지 하는 걸까. 자신을 얕보고 기만하는 것 같아 속이 들끓었다. “패물을 거두러 온 것이면 어서 가져가십시오. 혹여 그게 아니더라도, 패물은 갖고 가시고요.” “아니야. 나는 저게 목적이 아니라…….” 해명하려는 휘언 뒤로 하인끼리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이래서야 저 패물 더미를 선사한 주인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리는 꼴이었다. 비록 멀어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진 않겠지만, 유언비어가 진실임을 스스로 내보였단 생각에 세령은 이마가 지끈거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게 목적이 아니라면, 제가 여쭈었던 것에 답을 주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미안하지만 그런 건 몰라.” “……모르다니요?” 휘언의 이름을 들먹이며 아는 척할 땐 언제고 모른다니.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나는 그저, 사죄하고 싶었어. 해서 온 거야.” 온몸의 피가 차갑게 굳는 느낌이었다. “무슨 사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를 속여 몸을 취한 일이요?” “…….”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에 세령의 눈꺼풀이 경련하였다. 어떤 마음으로 원수 앞에서 옷고름을 풀었는데, 당신은 그저 유희를 위해 허언을 한 것이었다고. 그리고 고작 패물과 사과 따위로 일을 무마하겠다고. “그날 밤이 퍽 마음에 차셨나 봅니다.” “……무어?” “아무리 그래도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든 사내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비록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지만, 제가 느낀 분노를 조금이나마 알길 바랐다. 하여 뻣뻣한 입꼬리를 애써 비틀며 울화를 토해 내었다. “아랫것을 시켜 부르면 그만이지, 이리 대놓고 찾아오시는 연유가 무어냔 말입니다. 설마, 다들 보는 앞에서 아는 체하면 제가 뭐 우쭐한 마음이라도 들 것 같았습니까? 해서 패물들도 보낸 겁니까? 그런 식으로 제가 뭐라도 된 양 치켜세워서 또 밤 시중을 들게 하려는 거라면…….” “아니야!” 휘언이 다급하게 언성을 높였다. 그는 가증스러울 만큼 억울한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오해야. 그런 짓을 한 건…… 내가 아니야.” 이번에는 발뺌인가.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걸까. 전장을 오래 굴러 타인의 감정 같은 건 중요치 않다고 여긴대도 정도가 지나쳤다. 역겨울 지경이었다. “이젠 모른 척까지……. 어쩜 사람이 그리 뻔뻔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리께 바란 게 그리 큰 것이었습니까? 고작 무엇 하나 여쭙겠다고 한 게 다인데. 아무리 제가 비천하다 하여도 어찌 이런 치욕을 주십니까.” “비천하다니. 그런 생각한 적 없다. 나는 정말 그저…….”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상대는 희명군이었다. 하여 울컥울컥 치솟는 노기를 겨우 가라앉히며 섭섭함만을 토로하는데, 사내는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을 하였다. 상전의 노리개, 제 신세는 겨우 이런 것이구나.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되었습니다. 어찌 감히 나리 탓을 하겠습니까. 안하무인에 저밖에 모르는 사내를 믿은 제 잘못이지요. 처음부터 당신 놀음에 가담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야. 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해. 패물을 보낸 건…… 농락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어. 정말이야.” “하면 설명을 해 주십시오. 이 기이한 행동들이 다 무엇인지.” 세령의 곧은 눈빛에 휘언은 풍랑을 맞은 촛불처럼 하염없이 흔들렸다. “난…… 나는…….” “뭐, 후사라도 필요했습니까?” “……뭐?” 체념하여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는데, 그는 어쩐지 심히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진짜였나. 세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 방에 찾아간 저를 살려 두신 겁니까? 패물도, 이리 직접 찾아오신 것도 전부 그런 연유였다면…… 예, 이해는 됩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 “한데 어쩌지요. 만일 잉태하였대도 나리께 보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남몰래 이곳을 떠나면 떠났지…….” 그다지 상처가 될 법한 말도 아닌 듯한데, 사내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14> 그러고 보니 휘언의 어머니가 그를 낳자마자 묘원각을 떠났던 연유가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부친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던 것 같다. 기생의 아이는 아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휘언의 경우였다. 희명군이 아니라. 그러니 그가 제 말에 마음 상할 리도 없다. 한데 닮은 얼굴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공연히 마음이 약해졌다. 가까이 다가온대도 세령이 어찌할 수는 없었을 터인데, 휘언은 다가오지 말라던 말을 지키듯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심란한 마음을 꾹 눌러 삼키는 듯하였다. 한참 후에야 그는 착잡하게 입을 열었다. “……떠날 필요 없다. 어차피 난 예부터 독을 많이 마셔서 씨 같은 건 남지 않은 지 오래니까. 네가 내 아이를 갖는 상황은 절대 오지 않을 거야.” “무슨…….” “그러니 나 때문에 뭘 하려고는 하지 마. 그러다 잘못되면, 하아…….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제발.” “…….” 이미 그와 엮인 것부터 일이 잘못 꼬였음은 자명하다. 하나 마른 얼굴을 쓸어 내며 속상함을 토로하는 모습은 정말 진심 같아서 세령은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시야에 담은 사내의 모습은 미심쩍을 정도로 초라하고 처연하였다. 희명군이 구태여 제게 이런 같잖은 가식을 떨 이유가 있던가. 아무리 저를 갖고 놀려는 목적이래도 지나치게 이상하였다. “왜 우리가 그리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 설명할게, 누이. 그러니까 나랑 대화를 좀…….” 기세가 주춤한 것을 눈치챘는지 휘언은 다시금 달래는 투로 말을 뱉었다. 그러나 누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세령은 지난 정사를 자연스레 복기하였다. [하아……. 누이, 들려? 여기, 아래 입 우는 소리 말이야.] [그 한 번이 나를 만족시키는 횟수가 아니었나? 하면 아직 멀었어, 누이.] 비윤리적으로 느껴질 만큼 상스러운 말에 아껴 두었던 애칭이 섞이니 참을 수 없이 치욕스러웠었다. 그 탓에 같은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누이 소리 또한 조롱처럼 다가왔다. 마치 우리가 정사를 나눴단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라는 것 같아서. 하여 세령은 더 참지 못하고 욱해 버렸다. “그놈의 누이, 누이! 제발 그만하십시오! 고작 호칭 하나 알았다고 제 과거를 짓밟으실 순 없단 말입니다!” “…….” 파르르 떠는 눈꺼풀, 어쩔 줄 모르고 달싹이는 입술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듯한 사람의 것이었다. 휘언과 닮은 얼굴에 어쩐지 세령의 마음도 미어졌지만, 추억을 능멸하는 그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속아선 안 돼. 그저 그 애가 그리워서 이런 가여운 마음이 드는 거야. 이 또한 희명군의 농간일 뿐이라고. “제가 청한 답을 내어 주실 생각이 없다면, 더는 저를 부르지도, 이렇게 찾아오지도 마십시오.” 그와 마주하고 있으니 별의별 기분이 다 들었다. 해서 세령은 사내의 옆을 냉정하게 지나치며 묘원각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근래 계속 날이 흐리더니 오늘은 달이 휘영청 떴다.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인 밤하늘에 후덥지근한 더위도 잠깐은 가시는 듯하였다. 하나 청명한 날씨와 달리 세령의 표정은 어두웠다. 건방진 축객령을 내린 그날로부터 벌써 사흘이 지났다. 제 말을 착실히 지키기라도 하듯 희명군은 세령을 방으로 부르거나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방 밖의 패물들이 회수되기는커녕 고스란히 놓여 있어 여전히 사내에 대한 생각을 끊기가 어려웠다. “하아. 일부러 이러는 거야 뭐야.” 멀뚱히 패물 더미를 응시하던 세령은 별안간 부아가 치밀어 중얼거렸다. 원하지 않는 패물 외엔 저는 얻어 낸 것이 없는데 사내는 편히 잠적했다고 생각하니 열이 뻗쳤다. “본인은 볼 장 다 봤다 이거야?” 그날의 기세로 보아 세령이 뵙기를 청하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원하는 답을 줄 때까지 보지 말자 한 건 저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8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괜히 먼저 숙이고 들어가 한 번 더 몸을 섞게 될까 봐 조금의 빌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해서 세령은 그저 분만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저거라도 치워 버리든가 해야지.” 세령은 애꿎은 패물 더미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부 값비싼 것들이니 냅다 버리기는 무엇하여 귀빈채 앞에라도 가져다 놓을 요량이었다. 그때, 시커먼 인영이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은세령.” “히익!”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세령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희명군 처소의 문지기 역할을 하던 무혁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시간을 내주었으면 하는데.” 영선을 거치지 않고 그가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 의아하였다. “……어쩐 일인데 그러십니까? 혹, 나리께서 저를 부르십니까?” “음…….” 희명군이 부르냐는 물음에는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이 작자가 저를 찾을 일이 어디 있나 싶었다. 해서 세령은 공연히 헛기침하고 답하였다. “이 꼴로 가도 상관없는 거지요?” 귀빈채에 갈 때면 늘 치장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저 묘원각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더분한 복장이었다. 당장 옷을 갖춰 입으라 하면, 또 놀아날 생각은 없다며 거절할 계획이었는데 웬일로 무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디어 제게 해 주실 말씀이 생각나셨나 보군요.” “…….”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일단 가지.” 무혁은 모호한 대답을 하며 귀빈채로 먼저 발을 돌렸다. 찝찝하긴 하였지만 어쨌든 긍정이라 받아들인 세령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귀빈채에 들어섰을 땐, 평소와 달리 내부가 왁자지껄했다. 지난번엔 희명군의 방 외에 다른 방은 불이 꺼져 있었는데 오늘은 모든 방에서 취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날 저번 같은 정사를 벌인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제 교성을 듣겠지. 그리 생각하니 공연히 낯이 뜨거워졌다. 하여 세령은 다시금 마음을 다졌다. 오늘은 절대 그가 무슨 술수를 부리든 넘어가지 않겠노라고. 희명군의 방 앞에 도달한 세령은 결연한 얼굴로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하나 무혁이 잠시 앞을 막아섰다. “실은…… 부름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예?” “네 도움이 필요하여, 독단적으로 너를 데려온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들어가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염치 불고하나 식사만 도와다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조차 나오질 않았다. 긴 한숨을 뱉은 세령은 한 발짝 물러나며 단호하게 답하였다. “돌아가겠습니다.” “은세령, 제발.” “…….” “휘언이 사흘간 밥도 잠도 거르고 있다. 이번만 도와주면 네가 원할 때 나도 너를 도와주마. 그러니 부탁한다.” 대체 상태가 어떻기에 밥도 잠도 거르는 걸까. 그것도 이상하였지만 세령은 무혁이 상전을 친근하게 부른 게 더 신경이 쓰였다. 또한 그 이름까지도. “……희명군 나리의 존함이 정말 휘언이 맞습니까?” “그래.” 원체 의뭉스러운 사내이니 저를 골리기 위해 이름을 속였을 거라 의심하기도 하였다. 한데 허언이 아니었다니. 굳게 닫힌 방문 쪽으로 시선이 절로 돌아갔다. 사내의 상태가 심각하든 말든 그저 무시하면 그만인데 왜 이리 마음이 쓰일까. 고작 배 한 번 맞췄다고 몸정이라도 생겼나. 그럴 리 없다. 세령은 여전히 희명군을 증오했다. 신경이 쓰이는 연유는 오직 그리던 이름 탓일 거다. 한데 제 추측처럼 과거의 소년과 희명군이 쌍생아라면, 두 사람은 왜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일까. 쌍생아가 같은 이름을 쓰는 경우는 여태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리고 희명군은 왜 제 앞에서 자꾸만 휘언의 흉내를 내는 것일까. 단순히 저를 갖고 놀기 위함이라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였다. 자신이 그저 수없이 안아 본 여인 중 하나일 뿐이라면 구태여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지 않나. 뭐가 되었든, 휘언이 어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희명군에 대해 알아야 했다. 어차피 그날 밤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라도 다시 만날 필요는 있었다. 해서 세령은 무혁의 청을 빌미 삼아 방 안에 들어서기로 결심하였다. “끼니만 도우면 되는 것이지요. 혹여라도 다른 일을 하려 하시거든…….” “못 할 게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를 부르거라. 그리고 이거.” 무혁이 열쇠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뭡니까?” “휘언이 네게 손대지 못할 거란 증거. 갖고 있으면 안심이라도 될까 싶어 주는 것이다. 네가 쓰고 싶다면 써도 좋고.”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들어가면, 다 알게 될 거다.” <15> 세령이 들어가기로 다짐한 듯하니, 무혁은 그제야 길을 트고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은 늘 그랬듯 어두컴컴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까지는 방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옅게라도 끼쳐 왔는데 오늘은 아무런 향조차 나질 않는다는 거였다. 홀로 심각한 무혁도 그렇고 확실히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 듯하여 공연히 긴장되었다. 세령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자마자 나는 잘그락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창문을 열고 휘영청 뜬 달을 응시하는 등이 보였다. 장죽을 물지도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 너른 등은 어쩐지 평소처럼 호걸스럽지 않고 처연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틀어 올린 상투와 복장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갈하였다. 그런 사내의 등 뒤에 한 수저도 뜨지 않은 미음이 놓여 있었다. “무혁. 자네도 하늘 보았는가? 오늘 달이 참 밝네.” “…….” “아아,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어. 실없는 소리 말고 끼니나 챙기라 하겠지. 그리 낭만 없이 살면서 어찌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뭐,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 “어차피 저 달이 기울면 내 시간도 끝인 듯하니 더는 찾아와 살피지 말게. 고작 며칠 굶었다고 사람이 죽을 리도 없…….” “……희명군을 뵙습니다.” 크게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등이 홱 돌아갔다. 세령을 발견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이?” 사흘 전보다 살이 빠진 얼굴이었다. 하나 그보다 더 세령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사내의 손목에 칭칭 감긴 쇠사슬이었다. 보통 족쇄라는 이름으로 죄인의 발목에 채우는 형구가 어쩐 일인지 그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었다. 그제야 세령은 휘언이 제게 손대지 못할 거란 무혁의 말을 이해하였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어. 아, 내 기어이 잠든 것인가? 하하…… 하하하…….” “선녀라니요.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세령이 얼굴을 구기며 더 다가가자, 멍하니 바라보던 휘언이 꿈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황급히 시선을 갈무리하였다. “어어…… 저, 정말 꿈이 아니었구나……. 너무 어여뻐서 말이 먼저 나갔다.” “……예?” “이런 말…… 싫어?” 그답지 않게 뺨을 붉히는데, 마치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소년의 모습처럼 보였다. 할 말은 다 쏟아 내면서 수줍어하니 어째 세령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게 연기일 수가 있을까. 오늘은 대체 무슨 설정인 걸까. 볼 때마다 다른 모습에 좀처럼 적응이 아니 되었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꼴은 그게 무엇이고요.” 민망한 소리가 거북하였던 세령은 말을 돌리며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휘언이 눈을 잠시 끔뻑이다가 옅게 웃었다.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이라뇨. 제가 왜 나리를 걱정합니까?” “하면 원래 그리 누구에게나 다정한 건가.” 다정하단 평을 들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내의 의중이 이해되질 않았다. 하나 해괴한 소릴 지껄인 휘언은 딱히 말뜻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피로한 눈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실실 웃음만 흘릴 뿐. 드디어 미쳐 버린 것인가. 무례하단 것도 잊고 광인을 보듯 바라보는데, 흘러내린 소매 안으로 사슬에 긁혀 울긋불긋한 자국이 보였다. 잘그락대는 소리도 그렇고 사람을 짐승처럼 묶어 둔 게 영 거슬렸다. 그를 향한 증오와는 별개로 당장에라도 열쇠를 꺼내 들고 싶었다. 하나 이 괴상한 사내를 풀어 주기에는 아직 신뢰가 없었다. “무혁 그 사람이 이리 만든 겁니까?” “응? 아니야. 무혁에게 내가 부탁하였어. 내가 누이…… 아니, 세령이 너한테 또 실수할까 봐.” “실수요? 그날 밤을 실수라 여기시는 겁니까?” “……기분 상하였어? 그러려던 건 아닌데.” 그가 아양을 떨 듯 세령 쪽으로 몸을 기대어 왔다. 마치 어릴 적, 잘못한 것이 있을 때마다 제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렸던 휘언처럼. 세령은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리고 사내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입을 비죽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수작도 안 통할 것 같았는지, 이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손끝을 잡아 왔다. “미안해. 한 번만 봐주면 아니 될까? 내 말에 네 속이 상할 줄은 몰랐어. 참말이야.” “…….” “응? 세령아.” 순순히 숙이고 드는 모양새가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이라 하지 말랬다고 곧장 제 이름을 사근사근 부르는 것도 적응이 안 되었고. 무엇보다 순진한 척 눈을 깜빡이며 교태를 부리는 꼴은 봐주기가 힘들었다. “혹, 뭐 잘못 드셨습니까? 사람이 영 딴판이 되어선…….” “그리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그런 걸로 하자.” 모호한 답을 내어놓고 무에 그리 재밌는지 실실 웃기나 한다. “……왜 자꾸 웃으세요?” “고와서.” “대체 무엇이…….” “너처럼 고운 애가 내 앞에 있으니 좋아 그런다.” 진짜 뭘 잘못 먹었나. 당혹감에 세령은 커다란 눈을 빠르게 끔벅거렸다. 그러자 또 청아한 낯으로 배시시 웃음을 흘린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곱다는 건지. 며칠 전 제 속살을 무자비하게 헤집으면서도 오만방자한 태도를 버리지 않던 그 사내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낯선 사내가 더욱 생경하게 느껴져서 세령은 괜스레 그가 뱉은 말을 못 들은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시야 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미음이 걸렸다. ‘맞다. 저것 때문에 예 온 것이었지.’ 자꾸 유별난 언행을 하는 사내에게 홀려 무혁의 청도 잊을 뻔하였다. 그리고 제 목적 또한. 어렵게 만든 기회를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언제 또 희명군과 맞닥뜨릴 기회가 올지 몰랐으니까. 보아하니 휘언인 척 연기를 계속하고픈 모양인데, 비위를 맞춰 주면 8년 전 사건의 진실을 털어놓지 않을까. 세령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릇에 손을 뻗었다. “손이 그리되어서 식사를 못 하시는 거면, 먹여 드리겠습니다.” “으응? 아, 아니야.” 휘언이 잘그락대며 손을 허공에 마구 휘저었지만, 세령은 무시하고 숟가락에 미음을 듬뿍 떠 내밀었다. “아, 하세요.” “괜찮아, 그럴 필요까지는…….” “아.” “……으읍?” 냅다 들이밀린 숟가락을 얼결에 문 휘언은 침을 넘기듯 밥을 꼴깍 삼켜 버리고 본인이 더 놀란 눈을 했다. 금기라도 어긴 사람처럼 절망적인 얼굴이었지만 세령은 개의치 않고 다시 미음을 한 숟갈 더 퍼서 내밀었다. “더 드십…….” “싫어!” 팍 소리와 함께 미음을 퍼담은 숟가락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거부한 것은 본인이면서 휘언은 제가 더 놀라 창백한 낯이 되었다. “미, 미안, 세령아. 나는…….” “안 먹겠다 말로 하시지, 아까운 밥은 왜 버리십니까?” 마치 밥투정하는 아이를 다루는 느낌이라, 세령이 한숨을 쉬었다. 커다란 풍채 탓에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지만 세령은 모른 척 어질러진 바닥이나 치우려 하였다. 한데 손을 뻗기 무섭게 사내의 큼지막한 손이 세령의 손등을 탁 붙들었다. “치우지 마.” “금방 합니다.” “누가 너더러 이런 거 하랬어?” “네?”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미안. 내가 할게.” 매섭게 손을 낚아챌 땐 언제고, 멋대로 닿은 것에 대해 본인이 더 놀라서 사과한다. 그는 주춤거리며 다시 손을 놓아주더니 맨손으로 쏟아진 미음을 주워 담았다. 쇠사슬 탓인지 그 모습이 마치 패전국 노예 같아서 세령은 곤혹스러워졌다. “두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흘렸으니 내가 할게.” “제 일입니다.” “시킨 적 없어.” 세령이 적극적으로 나서려 했지만, 휘언은 제법 냉정하게 막아서며 쏟아진 미음을 전부 주워 담았다. 이를 가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세령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저 불편하라고 부러 이러시는 거지요?” “무어? 아니야! 나는 결코 그러려던 건…….” “어느 상전이 하인을 곁에 두고 이런 걸 치운답니까?” “넌 내 하인이 아니잖아.” “언제는 묘원각에 속해 있다면 기생이든 방물장수든 다 같다고 하셨으면서.” 그 말에 휘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딴 소리를 하였다고?” 그는 본인이 말해 놓고도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 세령과 눈을 맞추고 결연하게 말하였다. “명심해. 다음에도 내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면서 세령이 널 범하려고 하면, 그때는 주위에 있는 단단한 물건 아무거나 들어서 머리를 후려쳐.” “……네?” “내 뜻 아니라고, 그거.” “그게 대체 무슨.” “내가 널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두지 마. 식지 않은 미음에 네 손이라도 델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진짜 내 진심이니까.” <16> 느닷없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뱉는 바람에 하마터면 들이마신 숨에 사레가 들릴 뻔하였다. 아무리 휘언인 척하고 있다 해도 그렇지. 이런 말도 서슴지 않고 할 줄 아는 사내였나. 세령은 어쩔 줄 모르고 동그란 눈을 끔뻑거리다가, 정신 나간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말을 돌렸다. “……그, 손이나 이리 내십시오.” 세령은 구석에 굴러다니던 영견을 부자연스럽게 집으며 휘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 “손 닦아 드리는 것도 못 하게 하실 겁니까?” “아.” 그건 또 싫지 않은지 사내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손 내미는 훈련을 처음 받는 개처럼 조심스레, 아주 순종적으로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밥풀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꼼꼼히 닦아 주는 세령을 경애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릴 적 휘언이 꼭 이랬었지. 어른처럼 한없이 자상하다가도 내가 먼저 다가서면 숙맥처럼 안절부절.’ 희명군이 풍기던 위압적인 분위기가 없으니 공연한 감상이 따라붙었다. 하나 그렇다고 착각해서는 아니 되었다. 이자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내란 점은 변하지 않았으니. 그나저나, 미음을 죄 쏟아서 다시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한데 새로 끓여 온다고 입에 댈지도 미지수였다. 대체 왜 이리 미련한 짓을 하는 걸까. 그리고 저는 왜 이 사내를 매정히 지나치지도 못하는 걸까. 세령은 눈앞의 사내를 흘끗거렸다. 휘언이 장성하였다면 꼭 이 얼굴일 테지. 그래서일 거다. 자신이 이 사내에게 신경 쓰는 이유는. 지난 8년간, 그 애 홀로 묘원각에 두고 떠난 죄책감이 이따금 떠올라 가슴을 짓눌렀다. 저야 외숙이라도 있어 몸을 의탁하였다지만, 어미를 잃은 휘언은 어떤 어른의 보호조차 없이 끔찍한 나날을 보냈을 테니까. 끝내 세상을 떠났대도, 죽음에 이르는 시간 동안 이런 미음조차 얻어먹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이 사내는 휘언이 아니란 걸 안다. 그렇지만, 그리운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미련인 줄 알면서도 외면이 아니 되었다. “사흘간 밥도 잠도 거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잠들고 싶지 않아서. 배가 부르면 식곤이 올 것이고, 사방이 고요하면 졸음이 올 테니까.” 그렇다면 귀빈채에 객을 들인 것도 소란을 일으켜 잠들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나. “왜 깨어 있으려 하냐 묻는 건…… 결례입니까?” “답을 주면 네가 날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할 것 같아.” 이미 그리 생각하고 있었으나 세령은 차마 솔직하게 대꾸하지 못하고 빈말을 뱉었다. “……그리 생각 안 합니다.” “하하.” “왜 웃으십니까?” “세월이 흘러도 너는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서.” “그게 무슨…….” “빈말인 줄 알아. 이미 날 미치광이라 여긴다는 것도.” “…….” “너는…… 자신을 잃지 않았구나. 얼굴도 마음도 여전히 고운 것이, 나까지도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단 착각이 들게 해.” 이 작자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느물거리는 말과 제게 꽂히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세령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진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 “평소 같지 않아서요.” “네가 아는 내 모습은 어떠한데?” 좋은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하여 세령은 대충 얼버무렸다. “뭐…… 며칠 전과는 아무래도 좀, 다르지요.” “하면 그게 허상일 수도 있지.” 뜬구름 잡는 소리에 세령은 미간을 좁혔다. 이번엔 말장난인가. 사람을 갖고 노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하나 저를 놀린단 생각을 하면서도 쉽사리 발끈하지 못하였던 연유는 어째 말을 뱉을 때마다 애처로워지는 눈빛 탓이었다. 단순히 저를 놀리고자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촉촉한 눈망울은 그리던 정인을 만난 듯 애틋하기까지 하다. 그게 조금 부담스러웠던 세령은 고개를 돌려 그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였다. 하나 시선이 닿은 곳엔 움직일 때마다 잘그락거리며 손목을 긁어 대는 쇠사슬이 있었다. 그것만은 어째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해서 세령은 분위기도 돌릴 겸 쇠사슬에 걸린 자물쇠를 쥐었다. “나리, 이거 풀어 드릴까요?” “아니. 그러지 마.” “이리 지내는 게 좋으신 겁니까?” “하하. 좋을 리가.” “하면 대체 왜…….” “너무 다 알려고 하지는 마. 아무리 내가 걱정되어도 말이지.” 걱정이라니. 본인이 먼저 신경 쓰일 법한 일만 골라서 하지 않았던가.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세령은 괜스레 발끈하였다. “걱정은 무슨. 제가 아니라도 이 꼴을 보았다면 누구든 신경이 쓰였을 겁니다. 특히나 나리는 제게 빚진 것이 있잖습니까? 약조한 답을 듣기 전에 정신 줄 놓으면 저도 곤란하단 말입니다.” “답을 내어 줘야만 제정신이라 여긴다면, 오늘은 봐줘. 어차피 지금은 무얼 물어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 아, 어쩌면 내일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화하기 싫단 걸 잘도 돌려 말하십니다.” “하하. 그럴 리가. 내가 너와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였는데.” 처연해지는 눈빛에 세령의 눈꺼풀이 흔들렸다. 새카만 눈동자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나치면 큰일이라도 날 듯한 위태로움 같은 것. 어릴 적 저와 노닐던 소년, 휘언의 눈에서도 느낀 것이었다. 왜 이렇게 사내가 자꾸만 휘언처럼 느껴지는 걸까. 애절한 눈망울이 저를 알아봐 달라 호소하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자물쇠를 쥐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사내의 손을 붙잡았는데, 세령은 그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저를 예전부터 잘 알고 계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알았지. 아주 오래전부터.” “오래전부터?” “응. 혹시 조금이라도 기억나는 게 있어? 우리 어릴 적 일들 말이야.”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밝은 달빛이 들어와 사내의 몸을 비추었다. 늘 차갑고 매정하게만 보였던 그가 오늘은 어쩐지 청초하고 안온하게 느껴졌다. 왼쪽 눈 아래 점까지 교교해 보일 지경이다. 휘언이 제게 누이라 불렀던 걸 알고 있던 희명군. 과거 어딘가에 자신이 잊은 희명군이 존재하였던 건 아닐까. 휘언과는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세라 항시 붙어 다녔으나, 똑 닮은 소년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혹, 그가 휘언 대신 저와 놀았던 적이라도 있었나. 아니, 그 가능성 또한 애매하였다. 만일 두 사내와 어린 시절을 번갈아 보냈던 것이라면, 제가 아니더래도 누군가는 한 번쯤 같은 얼굴의 소년이 둘이란 걸 알아챘을 거다. 하나 그런 이야기는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희미한 과거를 헤집느라 골똘한 세령을 응시하던 사내는 나지막이 웃음을 지었다. “억지로 기억할 필요는 없어.” “…….” “꼴이 이 모양이니 마치 옥 창살 너머 연인을 둔 죄인이라도 된 것 같구나. 참으로 낭만적이야.” “……별게 다 낭만이라 하십니다.” “나도 원래 그러지 않았는데, 너와 있으니 감상에 젖게 돼. 네가 내게 낭만이라 그런 건가 봐. 이러한 나의 처지도 퍽 달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 제가 심각해지면 헤실거리며 긍정적인 상황을 그려내던 어린 휘언이 눈앞의 사내 위로 또 겹쳐 보였다. 며칠 전의 무도한 모습과는 정말 딴판이라, 세령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말 나온 김에 옛이야기나 해 볼까? 우리 예전에 가락지 놀음을 참으로 좋아하였지.” 사내의 말에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너는 늘 내게 가락지를 숨긴 이를 어찌 그리 잘 찾느냐며 억울해하였지만, 네가 무언가를 숨길 때면 짓는 표정이 참으로 귀여워 모를 수가 없었다. 빤히 답이 보이니 어찌 보면 참으로 시시한 놀음인데, 그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워 가락지가 네게 갈 때마다 내가 술래를 자처하고 싶었더랬지. 그에 비해 난 속이는 게 천직인지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고.” 그가 말하였듯 가락지 놀음은 술래가 다른 사람의 치마폭에 감춘 가락지를 찾는 놀음이었다. 하나 그것은 통상적으로 여인들의 놀음이었다. 정말 해 본 사내가 아니라면 알 수가 없을. 그리고 어린 휘언은 실제로 세령이 술래가 될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곤 하였다. “나리가 그런 걸 어떻게…….” 대체 희명군이 그런 과거까지 어찌 안단 말인가. 놀라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데, 사내는 그 질문만큼은 친절하게도 답해 주었다. “내가 너와 이곳 후원을 노닐던 휘언이니까.” “……예?” 손등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감각에 세령은 그제야 아무 이유 없이 손을 붙잡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였다. 뒤늦게 거두려 하니, 휘언이 세령의 손을 꼭 쥐었다. 빼내지 못할 만큼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엄지로 손등을 쓸어 내는 감각이 그 어떤 결박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말이다, 세령아. 단 한 순간도 너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17> 손등뼈를 훑어 내던 손가락은 어느새 손바닥을 비집고 들어와 손금을 덧그리다가, 손가락 마디마디 파고들어 조심스레 깍지를 얽었다. 그게 뭐라고 희한하게 가슴이 뭉클했다. 죽은 줄 알았던 휘언이 진짜로 제 눈앞에 나타난 듯하여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진작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못하였어. 네가 날…… 보고 싶어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고.” “나리가 정말로 그, 휘언이라고요? 하지만, 하지만…… 지난번엔 분명.” “나를 기억해?” “전, 저는…….” “기억하는구나. 하면 대답해 줘. 나를 보고 싶었던 적이 한 번쯤은 있었어?” 보고 싶다마다. 세령 또한 휘언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상대였다. 그 애의 세상엔 저뿐이었고 세령의 세상에서도 어미를 제외하면 휘언뿐이었다. 첫사랑이었으며 절대 헤어질 거라 가정해 본 적 없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쉬이 답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희명군의 농간에 휘말리는 것일까 봐. 그도 그럴 게 분명 지난번엔 휘언을 타인인 것처럼 떠들었는데, 지금은 마치 휘언이 자신인 양 태세 전환이지 않은가. 순전히 저를 골리기 위해서 정성스러운 연극이라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저는…… 나리가 휘언이란 사실을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내가 그리 많이 변하였나.” 씁쓸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린 사내는 당장에라도 달빛에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무슨 연유인지 아슬아슬한 분위기까지 자아내, 가만두었다가는 그가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해서 세령은 사내의 의중을 밝혀내기보다 급한 마음을 먼저 꺼내 놓았다. “증명해 주세요.” “증명? 어떻게?” “나리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다면, 그렇다면…… 내 어머니의 죽음. 그날의 진실을 말해 주세요.” 당신이 정말 휘언이라면,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청이었는지 휘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고는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놈, 아니, 나와 밤을 보냈어?” “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다 알고 계셨으면서.” 충격에 휩싸인 눈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불쑥 사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고 휘청였다. “난, 내가…… 억지로 범한 줄로만…… 으윽.” “나리? 괜찮으십니까?” “읏…… 나가.” “네?” “당장 나가는 게 좋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가! 어서! 그놈이, 윽…… 너를 또 탐하면 난 정말 견디지 못할 거야.” “대체 왜 그러십니까. 이러는 연유가…….” “빨리 가! 무혁! 거기 없나? 무혁!” 잘그락거리는 쇠사슬이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길 텐데도 휘언은 몸을 일으켜 세령을 밖으로 떠밀었다. 비명 같은 부름에 달려온 무혁이 당황한 세령을 방 밖으로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을 탁, 닫아 버렸다. 눈앞에서 굳게 닫혀 버린 문 안에서는 옅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 가거라. 어서.” “잠시만요, 나리가…….” “더 개입하지 말거라. 명이다.” 무슨 상황인지 판단할 새도 없이 무혁은 세령을 내쫓듯 보내 버렸다. 하여 세령은 이번에도 아무런 진실을 얻어 내지 못하였다. * * * 공들여 만든 가락지들을 방물 장수에게 팔고 묘원각의 이불 빨래를 도우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냈지만, 한가한 시간에 찾아오는 잡념은 제멋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유만 생기면 자꾸만 어제의 위태로웠던 희명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곡기를 끊고 잠을 자지 않으니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인가…….” 본인을 이따금 그놈이라 칭하는 것도, 어릴 적 추억을 나눈 휘언이 자신이라 주장하는 것도 무엇 하나 이해되는 점이 없다. 혹 광증이라거나, 귀에 씌기라도 한 건 아닐까. “하아…… 자꾸 그자 생각을…….” 요 며칠 새 그에 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몇 날 며칠이고 사내를 신경 쓸 게 뻔했다. 세령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해결되길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해서 여전히 마루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패물 더미를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제게 주어진 가장 유력한 단서는 희명군뿐이었다. 그가 제정신을 찾을 방도를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다. 어쩌면 의원님은 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르니, 약방에라도 가 볼 요량이었다. “허어, 오늘도 바쁘시구나.” 양반이고 상놈이고 명의를 바라는 마음은 다 같은지, 저자에서 알아주는 약방은 오늘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어릴 적부터 어미 심부름으로 자주 들렀던 세령은 늘 그랬듯 분주한 김 의원을 돕기 위해 자연스레 화로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기다리는 동안 탕약을 부채질하였다. 환자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던 김 의원은 한참 뒤에야 세령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가, 언제 왔느냐?” “방금 막 왔어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이런 거 하지 말래도.” 김 의원은 세령의 부채를 빼앗아 들며 그 옆에 앉았다. “기다리기 무료하여서요.” “무료하면 나가서 당과라도 하나 더 입에 넣을 것이지. 꼭 이리 일을 거들어야 직성이 풀리더냐? 내 너는 언제든 와서 편히 쉬다 가도 좋다 하지 않았느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허허 참, 어여쁜 것. 제 일만으로도 공사다망할 터인데 타인도 돌아볼 줄 아니 누가 널 미워할까.” “별것 아닌데 부끄럽습니다. 과찬이세요.” “뭐 더 알아낸 것은 없고?” “아…… 예, 아직은.” 도성에서 터줏대감 축에 드는 김 의원은 과거 사건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도화만큼이나 기대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8년 전 사건은 그 당시 어쩐 일인지 벌어지고 한참 후에야 누가 죽었다더라, 정도의 소문으로 끝났다고 하였다. 하여 그 사건에 세령이 연관되어 있단 것도 김 의원은 나중에 알았다고. 객사에서 기생이 죽는 것쯤이야 큰일이 아니었대도, 기이할 만큼 조용하게 묻힌 사건이랬다. 다들 속으로 높으신 분이 손을 썼겠거니 하여 겁먹은 탓에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단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게 8년 전 사건에 대해 김 의원이 아는 전부였고. “네게 잔혹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목매달지는 말거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압니다. 그렇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 보고 싶어요.” “네가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허허 참……. 한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묘원각에서 시킨 약은 없는데.” “아. 기력에 좋은 첩약이라도 지을까 해서요.” “왜. 어디가 안 좋은 것이야?” “제가 아니고 손님이.” “손님?” 김 의원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세령을 흘겨보았다. 여태 개인적으로 객을 챙긴 적은 없었으니 수상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 지나가는 객이 저를 불러 심부름을 시키셨거든요. 입맛도 없고 잠도 아니 온다고.” “그러냐. 하면 이것만 달이고 첩약 하나 지어 주마.” 무얼 기대한 건지, 김 의원은 김이 샜다는 얼굴로 부채를 펄럭였다. 세령은 의원 옆에 가만히 앉아 불씨를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김 의원은 픽 웃음을 흘렸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게야?”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멍석을 깔아 주니 머릿속에서 반복되던 의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오래 봐 온 가닥이 있어선지 김 의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자상하게도 물어봐 주었다. “하하. 그래, 무엇인데?” “혹,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도 합니까?” “음.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 “단순히 조금 변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면요? 심지어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변하기 전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같고요.” “간혹 쌍생아를 보고 그리 오해하는 이들도 있기는 한데…….” 역시 그것뿐인가. 성격이 워낙 달라, 세령도 그저 얼굴만 닮은 동명이인이거나 쌍생아가 아닐지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간혹 나타나던 어린 시절 휘언의 모습 때문에, 쌍생아라 단정 짓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특히나 어제는 정말 휘언처럼 보였고. “그것참 이상하네……. 정말 귀에 씌기라도 한 것인지…….” 중얼거리는 세령의 심각한 얼굴을 흘겨본 의원은 저도 덩달아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돌연 무릎을 탁 쳤다. “아아.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희한한 걸 물었었는데.” “희한한 것이요?” “그래. 몸 하나에 사람이 둘이라던가, 뭐 그런 말을 하였던 것 같구나.” “그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랍니까?” “으음. 나도 같은 반응을 보였었지. 귀신에 씐 것 같으니 의원이 아닌 무당을 찾아가라 하였거든. 한데 재작년 청나라에 갔을 때 그곳 의원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해서 그자가 쓴 서적을 좀 빌려 왔는데 말이지.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18> 김 의원은 옆방에서 얇은 서적 하나를 들고 왔다. 그러고는 접어 둔 부분을 펼쳐 한참을 읽고 또 읽었다. 아무래도 타국의 언어다 보니 뜻을 풀어 세령에게 쉬이 설명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말이다, 세령아. 정(精), 기(氣), 신(神)으로 구성이 되어 있거든. 한데 육신이 멀쩡한 자가 때때로 말투가 바뀌고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세를 보인다면 신이 혼미하여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라 하는구나.” “그렇다면 역시…… 귀에 씌었단 뜻일까요?” “혼백이 어지러우면 귀가 드는 법이라 하지만, 스스로의 고통에 짓눌려 혼이 갈라지는 경우도 보았노라고 쓰여 있단다. 갈라진 혼이 다투며 한 몸을 차지하려다 보니 귀에 씐 것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아니 됩니다.” “이해하였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법이지. 내 그간 별 희한한 환자를 다 봤다고 여겼는데 그런 병은 듣도 보도 못하였거든. 한데, 그런 이를 실제로 본 적 있느냐?” “네? 아, 아뇨. 저도 객이 하는 소리를 엿들은 것이라…….” “그런 사람은 나를 소개해 주어도 마땅한 방도가 없느니라. 기혈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침을 놓아 줄 수는 있으나, 심병에서 비롯된 것은 결국 원인을 찾아야 해결이 되는 것이거든. 간혹 광증이라며 비싼 첩약을 지어 주는 이들도 있긴 할 것인데, 그거 구 할은 다 돌팔이니라.” 결국 몸을 차지하려는 무언가에 씐 거나 다름없다는 건데 귀는 또 아니라니. 참으로 특이한 병이었다. 만일 그 사내가 이 병을 앓는 게 맞다면, 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그리되었을까. “그런 사람을 마주한다면…… 병을 앓는 사람인지, 쌍생아인지 어찌 구별할까요?” “쌍생아라도 아주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이름도 다를 것이고, 하다못해 점의 위치도 같지는 않을 게다.” 어제의 휘언은 저와 정사를 나눴던 희명군처럼 왼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다. 이름도 같았고. 하면 희명군과 휘언은 같은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8년 전 사건의 진범은 휘언일지도 모른다. 세령이 알던 혼이 아닐 뿐. 만일 휘언이 정말 두 어머니를 죽였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복수를 시도해 볼 수나 있을까. 가정을 덧입혀 갈수록 골이 아팠다. “그 사람들은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걸까요?” “날 적부터 그러진 않았을 테니 무언가 계기가 있었겠지. 심적으로 압박을 받았다거나, 큰 충격을 받았거나.” “하면 혼이 나뉘기 이전의 기억은 양쪽 다 가지고 있을까요?” “글쎄다. 사례가 많지 않으니 원, 나도 확실한 답을 주기가 어렵구나.” “고칠 방도는요? 침도 약도 안 듣는다면, 설마 쭉 그 상태로 살아야만 합니까?” “허허, 세령이 네가 나를 박식하게 봐 주는 건 고맙지만, 나도 다 아는 게 아니란다. 음, 그렇지. 청나라 의원에 의하면 혼 하나가 죽어야만 그 병도 낫는 것 같다고 하던데, 이달 말에 그 의원이 유랑을 오기로 하였으니 한번 물어보마.” “아……. 네, 고맙습니다.” 흔한 병이 아니니 당장 답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였다. 하나 세령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한데, 그 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유달리 애틋하구나. 아기 취급하다 보니 네가 이리 장성하였단 걸 매번 잊고 살지 무어냐.” “넷, 네? 아, 아뇨! 저는 그저 호기심으로……!” “껄껄, 호기심? 그래, 그런 셈 치자.” 건수를 잡았다는 듯 킬킬대는 의원 탓에 세령의 귓가가 난데없이 붉어졌다. 애틋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만일 사내가 저 병을 앓고 있는 게 맞다면, 그저 휘언이 신경 쓰여 이러는 거였다. 별안간 나타나 절 괴롭히는 호색한 희명군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공유하였던 휘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 * * “윽…….” 제법 이른 시간에 깨어난 사내는 두통이 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다. 눈꺼풀에는 추라도 단 듯하여 눈을 뜨기가 버거웠고. 습관적으로 더듬대며 손을 뻗은 곳에는 장죽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죽에 닿지도 못한 채 손목이 튕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잘그락, 요란한 소리는 덤이었다. “뭐야, 이건.” 눈을 찌푸리자, 흐릿한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며 손목의 구속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 그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별 시답잖은 짓까지 하는군.” 그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보았다. 한데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 있어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무현. 거기 있나?” “무혁입니다.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당장 들어와서 이 상황을 좀 설명해 보지 그래.”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방 안을 성큼성큼 가로지른 무혁은 굳은 낯으로 상관 앞에 섰다. 희명군은 보란 듯 제 손목을 흔들었다. “……허튼짓 못 하도록 묶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풀어.” 희명군은 가소롭단 감정마저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제 말을 들어야 한다는 오만한 태도였다. 무혁은 하고 싶은 말을 입에서 굴리는 듯하였지만 어쨌든 이쪽도 제가 모시는 자인 건 변함 없었으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여 열쇠를 꺼내 족쇄를 풀어 주었다. 희명군은 뻐근한 손목을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스스로 이딴 짓을 하고 얌전히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 피부가 울긋불긋하였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짓거리를 하였기에 몸이 이리도 피로한지 설명해 봐, 어디.” “……식음을 전폐하고 뜬눈으로 깨어 계셨습니다.” “내가 그 계집과 동침한 사실을 안 모양이지?” “…….” “하! 그놈답구나. 미련하기 짝이 없어.” 그는 픽 조소를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장죽으로 손을 뻗었다. 하나 이내 피울 약이 다 떨어졌음을 기억하고 짜증스럽게 장죽을 내던졌다. “제길. 약은?” “그것이…… 오늘 중에 들어온다고 합니다만.” “왜 이리 더딘 것이지? 그 계집이 이제 쓸모를 다하였나?” 도화를 두고 비아냥대었지만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무혁은 침착하게 대꾸하였다. “잘 아시잖습니까. 최근 검은약에 대한 조정의 관심이 쏠린 터라, 거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이 정도는 형님께서 조용히 눈감아 주었을 터인데. 어떤 새끼가 들쑤셔 놓았을까.” 약을 곧장 하지 못하여 짜증스러운지 지친 눈에서도 살기가 새어 나왔다. “선왕 쪽…… 사람인 듯합니다.” 선왕이라는 단어에 희명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교체한 것이 본인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더 얘기해 봐.” “선왕을 등에 업고 그쪽 시장을 독점하던 이들이 반란으로 끈이 떨어졌잖습니까. 해서 작당 모의를 하는 듯합니다. 아직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으나…….” “필시 나를 걸고넘어지겠군. 내가 밥줄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지.” “그렇습니다. 암암리에 유통되는 검은약을 약점으로 삼아, 금상께 줄을 댈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하…… 하하하……. 이놈이나 저놈이나 지루할 새가 없게 만들어 주는군.” “미리 싹을 자르길 원하시면…….” “아니. 예의 주시만 하거라. 어차피 한 놈 정도는 스스로 범의 굴에 들어올 테니 내 굳이 움직일 필요는 없지.” “그리하겠습니다.” “한데 오늘 중에 약이 들어온다 하였다고?” “예. 신시쯤일 듯합니다.” “하면 그때 깨워 줘. 몸이 천근만근이라 한숨 더 자야겠으니.” 당연히 은세령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희명군은 당장 눈을 붙이는 것 외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답지 않게 유난을 떨더니 역시 변덕이었던 건가. 괜히 그 때문에 휘언만 곤혹스럽게 되었다. 마음 약한 친우는 그 여인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할까 봐 몇 날 며칠 제 몸을 혹사하였는데. 그때, 곤한 숨소리가 났다. 금침에 눕고 얼마 안 되었기에 무혁은 제 눈을 의심하였다. 전쟁 중에는 수일을 잠 못 들 때도 있었는데, 희명군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피로를 몰랐다. 이리 수마를 이기지 못한 적 또한 없었으니 무혁은 내심 당황하였다. 낯선 모습에 잠든 게 확실한지 확인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하나 혹여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무혁은 호기심을 누르고 조용히 귀빈채를 빠져나왔다. . . . 그리고 신시쯤 되었을까. 귀빈채에 흐르던 숨소리가 달라졌다. * * * 약방에서 돌아온 세령이 행랑채에 들어서자, 패물 더미가 있던 마루 앞에 낯익은 인영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다른 곳은 결벽이 있나 싶을 정도로 단정한데, 걸치고 있는 비단 두루마기는 귀한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옷자락이 흙바닥에 나뒹구는데도 개의치 않고 사내는 발라당 누워 있는 고양이에게 강아지풀을 휘휘 저으며 놀아 주고 있었다. “나리, 예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세령아.” 세령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린 사내는 간지럽게 이름을 부르며 눈매를 접었다. 소매가 걷힌 부위에 고스란히 남은 쇠사슬 자국이 시선을 끌었다. <19>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 아직 괜찮다는 건, 의원의 말대로라면 ‘신(神)’이 안정을 되찾았다는 뜻이 되려나. “어제는 미안했다. 두통이 오면 과민해져서 그랬어. 네가 싫어서 내쫓은 것이 아니야.”   “별로 괘념치 않습니다. 한데 두통이 잦은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으응. 그렇지.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사내는 입술을 달싹였다가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병을 알리고 싶지 않은지 기어이 말을 돌렸다. “실은, 어제 너를 그리 보낸 게 마음에 걸렸어. 사과하고 싶은데 찾아가면 싫어하진 않을까도 걱정되었고. 한데 일각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예까지 와 버렸네. 혹 싫으면, 나 도로 갈까?”  “……나리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지, 무어 그런 걸 물으십니까.” “싫지는 않구나?” “…….” “기쁘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떨릴 지경이야.” 실실 웃으며 고양이에게 뻗은 팔에 뺨을 폭 기대는데, 햇빛을 받은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사내 얼굴에 약하였던가. “……실없는 소리도 참 잘하십니다.” 면구스러워 바닥을 툭툭 걷어차며 웅얼대니, 뭐가 그리 즐거운지 휘언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한데 움직임을 멈춘 게 심술이 났는지 앞에서 아양을 떨던 고양이가 돌연 사내의 손등을 콱 할퀴고 달아났다. “……앗!” 손등 위에 그려진 실금에 핏방울이 고였다. 평소라면 선혈을 보자마자 뒷걸음질하였을 터인데 그에 대한 염려가 무심코 먼저 튀어 나갔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손목을 붙들자, 사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세령은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안 괜찮은 것 같아. 피 나는 것 좀 봐. 어찌하지?” “이리 오십시오.” 세령은 휘언을 당겨 마루에 앉히고 방 안에서 깨끗한 천과 연고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제 앞에 세령이 앉자마자, 미음을 닦아 줄 때처럼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다행히도 작은 짐승의 짓이라 깊이 베인 것은 아니었다. 세령은 천으로 상흔을 꾹 눌러 핏물을 닦았다. “안 아프세요?” “아파.” “그런 것치고는 안색 하나 안 변하시는데요.” “진짜야. 따가워. 아야야…….” “…….” 아프다면서 서글서글 웃는 낯이 의심스럽다. 꾀병이 틀림없었다. 하여 눈을 가늘게 뜨니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거짓말하는 사내는 싫어? 아프다고 하여야 네가 봐줄 거 같아서 그런 건데.”   “무슨 그런 거짓말을……. 그리고 왜 갑자기 소곤거리십니까?” “비밀 이야기하는 것 같고 좋잖아.”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는 낯이 좀처럼 적응이 아니 되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세령이 알던 휘언이니 더 익숙할 텐데도, 언제 또 살벌한 희명군으로 변모할지 몰라서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지금 이 모습도 다른 쌍생아의 연기일 뿐일까. 그게 아니면 정말로 제가 알던 휘언의 혼일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하나 그와 동시에, 만일 후자라면 휘언이 어떠한 고통에 짓눌려 혼백이 흩어졌는지 또한 걱정되어 마음이 심란하였다. 여태 만난 사내가 전부 휘언이라면, 어린 시절 동고동락하였던 소년 또한 진짜 선왕의 아들이었단 사실이 된다. 평생 마주칠 일도 없을 줄 알았던 왕자군과 그리 가까이 지냈다니. 도무지 믿기질 않아서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세령은 확신을 갖고 싶었다. 해서 은근히 휘언을 떠보았다. “……며칠 전까진 무서운 야차 같더니 왜 이리 어린애가 다 되셨습니까?” “그러게. 희한하게 네 앞에 있으면 옛날로 돌아가게 돼. 그때가 참 좋았나 봐.” 생채기에 살살 연고를 바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내는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하긴, 어느 쪽이든 저라도 쉬이 사실을 털어놓지는 않았을 거다.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면 재회한 순간 모든 걸 말해 주었겠지. 어차피 당장은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세령은 일단 사내의 정체를 떠보는 걸 관두기로 하였다. “예 오신 용건은 무업니까? 제가 여쭈었던 답을 주려고 오신 겁니까?” “말하였잖아. 보고 싶었다고. 오직 그뿐이다.” “예? 아, 아니…….” “네가 물은 답은 나중에. 오랜만에 설렘을 느낀 사내를 봐서라도 오늘은 좀 넘어가 줘.”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느물거리는 소리를 한다. 순전히 저를 보러 온 것뿐이라는 게 진심임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새카만 눈동자를 빛내기도 하였다. 그 맹목적인 시선이 부담스럽고 적응이 아니 되었던 세령은 삐걱대며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체 저번부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네…….” 어수룩한 세령의 반응에 사내가 낮게 웃었다. “있지, 아까 그 고양이 말이다. 이름을 세령이라고 지어 주었다.” “예? 왜 남의 이름을 멋대로 고양이한테 갖다 붙이십니까?” “혼자 있는 나를 신경 써 주는 게 꼭 너 같아서.” “……나리를 할퀴었는데도요?” “그 또한 관심이니 황송하지. 네가 불구덩이에 나를 밀어 넣는대도 아마 난 겸허히 받아들일 거야.” “대체…… 왜요?” “좋아하니까.” “……예?” 그가 세령의 손을 꼭 감싸 쥐고 제 뺨으로 가져다 대었다. 입을 맞추듯 살짝 고개를 틀어 그의 숨결이 손바닥에 선연하게 느껴졌다. “원래 좋아하면 그 사람이 뭘 하든 다 예뻐 보이는 법이다.” “…….” 별안간 고백을 뱉으며 말갛게 웃는 모습이 단단했던 마음을 말랑하게 하였다. 아— 탄식이 절로 나왔다. 휘언이다.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휘언이야. 저 맹목적인 시선.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곁을 지키는 것으로 비 오는 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었던 그 소년. 다른 이들에겐 무심하면서 제 앞에선 사르르 풀어지던 그 애.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 잡은 손은 절대 놓지 않으려던 휘언이 몸만 자란 채 제 앞에 있었다. 새삼스러운 고백으로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니 세령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토록 그리던 이와 멀쩡히 살아서 만났으니 기뻐해야 마땅한데, 저 사내가 짓밟고 올라선 시체 더미에 어미 또한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신(神)이 흐트러지면 그사이의 기억은 잊기라도 하는 걸까. 그날 죽은 것은 제 어미뿐만이 아니었다. 휘언의 모친도 명을 달리하였다. 그렇지만 과거 일에 대해 물으려 하면 번번이 말을 돌리니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과거를 전부 알고도 내 앞에서 태연하게 있는 거라면…… 그럼, 어찌하지…….’ 세령은 그의 웃는 낯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리던 이라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다른 혼이 저지른 일이래도 어쨌든 같은 사람의 짓이 아니던가. “흠, 흠. 한데 세령아. 저것들은 언제까지 방치할 생각이야?” 길어지는 적막에 세령이 고백을 껄끄러워하는 줄 알았는지, 휘언이 대뜸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가 멋쩍은 얼굴로 가리킨 것은 패물 더미였다. 세령은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곧장 패물을 끌어다 사내에게 밀어주었다. “안 그래도 가져가라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음……. 밤 시중의 대가나 보상이 아니라, 그냥 내가 네게 선물하고 싶어서 주는 거래도 안 받아 줄래? 좀…… 화려한가?” 자신과 동침한 여인이 세령인 줄 몰랐을 적엔 휘언은 무조건 값비싼 걸 안겨 주어라 명하였다. 그러니 세령이 부담 가질 만도 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것으로 바꿔 주는 게 낫겠지. “화려하고 자시고, 제게는 죄 사치입니다. 치장해야 할 일도 없는데 가지고 있어서 무얼 합니까? 그냥 나리가 도로 가져가 주세요.” 사내가 다른 장신구를 고민하고 있단 걸 알아챈 세령은 먼저 선수를 쳤다. 패물 때문에 오해란 오해는 진작 다 받았으니 이젠 무얼 준대도 받기가 싫었다. “그치만…….” “아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주위에서 수군거립니다. 계속 오해받는 거, 이제 싫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 “예.” “내가 너를 곤란하게 하였구나.” “무어,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고요.” “하면, 이것도 싫어하려나…….”   그가 약간은 시무룩한 얼굴로 품에서 노리개 하나를 꺼냈다. 연분홍빛 실로 꽃 매듭을 지은 노리개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딱 보아도 값이 나갈 것처럼 견고하였다. “……이건 또 무업니까?” “보자마자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사 온 것인데, 거절할 거야?” “설마 이거 주려고 예까지 걸음 하신 겁니까?” “응.” 확실히 세령의 취향이기는 하였다. 수수한 차림에도 어울릴 법한 데다 색이 정말 고와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여 곧장 거절의 말을 뱉지 못하니 휘언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다. “기실 산호 가지가 달린 게 더 어여뻤는데, 그건 세령이 네가 거절할 것 같았다. 한데 혹 그게 더 좋다면…….” “아뇨! 되었습니다. 이것도 실은 필요 없…….” “정말 거절하려고?” “그야…… 좀 전에 말했듯이…….” “너무하구나. 저잣거리를 뒤져 찾아낸 물건인데. 내 정성도 몰라 주고…….” “…….” 행복해하던 표정을 순식간에 거둔 사내는 돌연 울상을 지었다. <20> “사죄는 받아 주지 않아도 되지만, 내 마음마저 단번에 자를 필요는 없을 터인데…….” “아니, 전…….” “네게 답을 달라 청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호의의 표시거늘…….” “…….” “내가 그리 싫을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가? 하나 그렇대도 이 노리개는 죄가 없을 터인데,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버려지겠구나.” 거절하려고 하니 짙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푹푹 쉬며 중얼댄다. 싫다는 말은 끝맺지도 못하였는데 저리 약한 소리를 퍼부어 대니 견딜 재간이 없었다. 하여 세령은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었다. “아, 알겠습니다. 하면 이것만 받을 테니 다른 건 다 가져가십시오.” “참말이지? 말 바꾸기 없기야.” 받겠단 말이 그리 좋은지 사내는 금세 신이 나서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커다란 강아지가 꼬리를 붕붕 흔드는 것 같았다. 그는 세령의 손에 노리개를 조심스레 올려 주고 치마허리에 다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러고선 한참 눈을 떼지 못하였다. 못박인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세령은 참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럼…… 저 패물은 이제 어찌할 생각입니까?” “일단 내 방에 가지고 가서, 무혁이 오면 그에게 주든 하여야지. 그자에게도 여인이 있으니.” 그리 무뚝뚝한 사내도 여인이 있긴 하구나. 세령은 싱거운 생각을 하며 무심코 사내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을 바르긴 하였지만 손등은 피가 맺혀 있고 두 손목은 처참하게 멍이 들어 있다. 저보다 힘이 센 줄은 알지만 혼자 패물을 옮기도록 두기에는 마음이 쓰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얼?” “저거 옮기는 거요.” “무어? 아니야.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제가 언제 다 든다고 하였습니까? 그냥 나리 가는 길 심심하실까 봐 같이 가 드리는 겁니다.” 퉁명스러운 답도 그리 기쁠까. 휘언은 어여쁜 눈매를 유려하게 접으며 피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래. 하면 이것만 들어 주거라.” 휘언은 부피만 크고 가장 가벼운 비단 궤를 세령에게 건네고 남은 것들은 전부 가져갔다. “더 들 수 있습니다.” “싫다. 이제 네 것도 아니잖아.” “허…….” 이미 반납하였으니 건들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세령은 휘언의 속뜻을 곧장 이해하였다. 제게 조금도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배려라는 걸. 저를 좋아하는 티는 이렇게나 내면서 본인 일은 왜 그리 꼭꼭 숨겨 놓는지. 답답함에 세령은 그 몰래 한숨을 흘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패물 더미를 나눠 들고 귀빈채로 향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행랑아범과 영선을 마주하였다. “아이구, 나리! 그리 많은 짐을 어찌 홀로 다 들고 가십니까? 은세령, 너는……! 이제 뵈는 것도 없는 게냐? 나리께서 이걸 다 들고 계시는데도 어찌 멀뚱히 있는 것이야!” 행랑아범은 상전이 더 많은 짐을 옮기는 것에 펄쩍 뛰었다. 세령이 움찔하며 눈치를 보는데, 휘언이 그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막아섰다. “혼내지 말게. 내 물건을 내가 옮기는데 무에 문제인가.” “그래도 이것은 아닙니다, 나리. 아랫것 하나를 너무 싸고돌면 제 주제를 모르게 된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내가 언제 이 아이를 싸고돌았지?” “그거 전부 세령이에게 준 선물이잖습니까. 다들 알고 있습니다.” 휘언은 웃음기를 싹 거두고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다들 안다고?” “어…… 예?” “어떤 한가한 자가 나에 대한 추문을 만든 것일까.” “…….” 휘언의 말에 행랑아범도 영선도 사색이 되어 서로 눈치를 보았다. “행수는 늘 일손이 모자란다며 우는소릴 하던데. 지금 누가 품삯을 거저 받는지 알아봐 달라 청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제가 단단히 감시하고 있…….” “하면 감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네 눈을 뽑으면 되는 것인가.” 분위기가 순식간에 선득해졌다. 세령마저 무심결에 흠칫 떨었을 정도였다. 세령은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휘언은 스산한 표정을 순식간에 지우고 다시 온화한 낯을 꾸며 냈다. 아주 찰나였기에 세령은 제가 보고 들은 것이 맞는지 긴가민가할 지경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나리! 부디 아량을…….” “농일세.” “예?” “내 들어온 패물이 많아 한 번에 옮기기 곤란하던 차에, 행랑채에서 가장 끝 방에 허락도 없이 가져다 둔 적이 있네. 지나는 인적도 없어 보였고 방 주인이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못하였거든.” “어…… 그러셨습니까?” “하여 지난번 소란은 이 아이가 패물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다짜고짜 찾아가려 하니 도둑놈이라 오해해 벌어진 일이었네. 지금은 그 오해를 풀어 도로 가져가는 길이었고.” “예에? 하, 하면 저희를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직접 이리 옮기시다니요.” “사사로운 일에 시끄럽게 구는 건 질색이라. 게다가 이 아이가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을 들겠다 나섰으니 내 손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 민망할 지경이었네. 한데 무슨 오해를 한 것이지? 뭐? 내가 누굴 싸고돌아? 그런 오해를 하면 내가 곤란하지. 아니 그런가?” “소, 송구합니다. 나리.” “주인 모를 물건을 잘 지키고 되돌려 준 자이니 나중에 칭찬이나 해 주게. 이만 가자.” 휘언은 세령을 질타하는 행랑아범의 입을 닫게 하였을 뿐 아니라, 소문의 시작이었던 영선까지 꿀 먹은 아이로 만들었다. 세령에게 쏟아지던 추문이 전부 오해였음을 몇 마디 말로 해결해 버린 것이다. 행랑에 찾아온 휘언에게 세령이 화를 냈을 땐, 다들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니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였을 거다. 그러니 그의 말을 반박할 수도 없겠지. 물론 그럴 용기가 있는 자도 없을 테고. 혹 제게 가장 커다랗고 가벼운 패물 보따리를 준 것도 이런 상황을 대비한 거였을까. 속이 깊은 휘언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세령은 앞서가는 사내를 흘긋거리다가 멋쩍게 감사를 표하였다. “……고맙습니다, 나리.” “무얼?” “오해 풀어 주신 거요.”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보았으니 응당 내가 해결해야지.” 역시나, 전부 계산한 일인 듯 그는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었을 겁니다. 제가 뭐 그리 특별하다고 사람들이 일일이 관심 두겠습니까.” 자조적인 세령의 말에 그가 불쑥 걸음을 멈추고 퍽 진지한 눈빛을 하였다. “나한텐 특별해.” “예?” “나한텐 너무 귀한 사람이라, 누가 잠깐이라도 손가락질하는 걸 못 견디겠어.” “…….” “그러니 고운 입으로 미운 소리 하지 마. 알았어?” “네에…….” 단호한 얼굴에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재채기가 나오기 직전의 코끝처럼 마음이 간지러웠다. 휘언과 있을 때 이런 기분이었구나.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하였다. “다음에 누가 네 기분을 상하게 하면, 세령이처럼 할퀴어 버려.” “세령이……처럼?” “그 고양이 말이야.” “……아.” “보았지? 놀아 주던 이의 손을 은혜도 모르고 가차 없이 할퀴던 거. 세령이 너도 네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걸 누구에게도 허하지 마. 설령 그게 나일지라도 말이야.” 사내가 시시껄렁한 농을 건네며 희게 웃었다. 어쩐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여 세령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귀빈채로 향하는 마음은 늘 무겁고 불편한 것이었는데, 패물을 나눠 들고 노을을 바라보며 나란히 걷는 오늘의 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묘원각에 온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안온함이었다. “세령아, 저것 좀 보아.” 패물을 방 한구석에 밀어 둔 사내는 커다란 창을 열고 후원을 가리켰다. 노을빛을 받아 불그스름해진 연못이 어여뻤다. “와아…… 예쁩니다.” 늘 캄캄한 밤에만 찾아왔던 터라 저런 풍경이 보이는 방인 줄도 몰랐는데 무척 아름다웠다. 지난밤 세령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밖을 쳐다보던 사내가 이해될 정도였다. “나가서 보면 더 좋아.” 휘언은 손을 습관처럼 쥐며, 세령을 방에 딸린 골마루로 이끌었다. 확실히 바깥에서 보니 후원에 핀 꽃이 미지근한 바람에 향기를 실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노을이 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고 말을 나눈 것도 아닌데 두 손을 꼭 잡고서. “저는 이 공간이 이렇게 바뀔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신경을 좀 썼지. 혹여라도 네가 묘원각에 들르게 되면 좋은 기억만 떠올리길 바랐거든.” “제가 언제든 올 수 있으니 부러 이리 꾸며 두었단 뜻입니까?” “네가 예전부터 바랐잖아. 의탁이 아닌, 온전한 네 공간을.” “제…… 공간이요?” “그래. 네 것이다.” <21> 시들어 가는 생을 보기 위해 꾸며 둔 후원을 부러 망가뜨린단 소문. 그건 역시 휘언의 병 때문이었을까. 다른 혼이 몸을 빼앗았을 땐 이곳이 자연히 방치되었을 테니, 남이 보기엔 비정상적으로 느껴졌을 거다. 그러니 그런 유언비어도 만들어졌을 것이고. 고작 자신 때문에 후원을 이리도 예쁘게 가꿔 두었다니. 게다가 그것 때문에 괴이한 소문까지 들러붙다니. 가볍지 않은 사내의 감정에 세령의 마음은 공연히 무거워졌다. 사내의 방은 이전에 세령의 어미가 거처하던 공간이었다. 살해당한 방은 허물어 없어졌지만 어쨌든 자주 가던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니, 묘원각을 돌아다니다 보면 끔찍하고 무서운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한데 휘언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이곳이 안온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길이 닿은 너른 후원에 전부 사내의 온기가 묻어 있는 것도 같았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늘. “제 공간이라니. 제가 어찌 감히 이런 후원을 탐한답니까?”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여긴 다른 사람도 워낙 많이 지나는 곳이라, 아예 집을 새로 구하는 게 나을 것도 같구나.” “그 또한 주실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네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내어 주지.” 장난스러운 말투에 어느새 세령도 덩달아 편해진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애석하지만 주신대도 갈 수가 없습니다. 묘원각에 매인 몸이라.” “하면 같이 야반도주할까.” “……농이 과하세요.” “진담이다. 참말이야.” 세령의 몸값쯤은 치를 능력이 있으면서도 사내는 함께 도망가자고 권하였다. 부담은 주지 않되 웃음이 나오게 하는 언사가 딱 휘언다웠다. 예전에도 그렇고 휘언은 세령의 좋지 않은 기억을 이렇게 늘 희미하게 만들었다. 강렬한 경험을 덧씌우는 것이 아닌데도. “나리. 이곳에서 제가 오길 기다린 적도 있으십니까?”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리 꾸며 두지도 않았을 거다. 심지어는 오늘도 네가 오지 않을까 고대하다가, 못 참고 뛰쳐나간 것이었어.” 만일 사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미를 죽였다면, 구태여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저를 위해 이 공간을 꾸밀 필요가 있었을까. 어쩌면 세령이 그간 믿어 왔던 대로, 어미를 죽인 원수는 휘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근거 따위 없지만,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리.” “응?” “이제는 말씀해 주시면 아니 될까요? 그날 어머니들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나리한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건지.” “……세령이 넌, 살인범이 나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살인범이 맞다면 제 끔찍한 기억을 없애려고 이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잖아요.” “…….” “나리?” “난…… 나는…… 잘 모르겠어. 기억이 온전치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간 일들도 전부 희미해져만 가서, 알던 것들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하나 그놈이라면…….” “그놈?” 그는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본인 기억이 온전치 않은데 다른 누군가에게서 답을 찾으려 하다니. 이 몸을 다른 혼이 차지하였단 가정이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런 병이 정말 존재하긴 하였구나. 하필 휘언이 그 병을 앓게 된 것이고. “세령아. 이런 나와 있는 게…… 끔찍하니?” 고개를 들어 바라본 사내는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엄연히 피해자는 저인데 사내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서 세령은 예서 과거 일을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휘언과 있으면 마음이 너무 쉽게도 약해졌다. “끔찍하였다면…… 제 발로 여길 따라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정말로 내가 그날의 진범이면 어찌하려고.”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그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단정하고 싶지 않아요.” “너도 참…….” “…….”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어쩌면 그가 진범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였고. 그래도 세령의 말에 안도한 것인지 휘언은 맞잡은 손을 꼼지락대며 나른한 숨을 뱉었다. “나는 말이야. 내 비루한 인생에 너라는 사람을 끼는 건 너무 과분한 게 아닌지 늘 생각하곤 해. 그런데도 내게 남은 건 오직 너 하나라, 좀처럼 놓기가 어렵더구나.” “……처한 상황이 고되어서 마음이 편치 않으니 그리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요?” “아니.” 단호한 부정, 그리고 얼굴에서 순식간에 흩어지는 온기. 행랑아범 앞에서 보였던 엄격한 시선이 세령의 솜털 하나하나를 훑었다. 그동안은 사내가 순한 양의 탈을 쓴 것이었나 의심될 만큼 소름 끼치는 변화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마음을 의심한 적 없다.” 확신에 찬 어조는 어쩐지 세령의 목을 죄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그, 그렇지만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잖아요. 저는 나리를 만난 게 아직도 얼떨떨해서…… 아직 제 감정도 잘 모르겠는걸요.” 말을 더듬으며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자, 휘언은 매섭게 쏘아 대던 눈빛을 거두고 청초하게 눈매를 휘었다. “괜찮아. 내 마음 강요할 생각 없으니.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다 좋다.” “……제 마음이 그저 동정이래도요?” “동정도 정이라 달갑기만 한걸. 그리고 어쨌든 아직은 기회가 있는 것이잖아.” “기회라니요?” “나를 전처럼 좋아하게 만들 기회.” “제가 대체 뭐라고…….” “뭐긴. 나의 전부지.” 그는 세령의 손을 제 입술까지 끌고 가 꾹 눌렀다. 부끄러운 접촉에 뺨을 붉히니,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다.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새카만 눈동자엔 애틋함이 그득 묻어나 있었다. 그걸 마주하고 있으니 세령은 되레 울적해졌다. 정말 휘언이 다른 혼에게 몸을 빼앗긴 것이라면, 그는 근 몇 년간 영문도 모른 채 삶과 기억을 강제로 잃어버렸을 거다. 그러니 본인 삶에 남은 건 세령뿐이란 말을 하였을 테고. 동정도 달갑단 말이 서글펐다. 저와 헤어진 후부터 그의 삶에는 온기 한 점 없었을 게 예측되어 코끝이 시렸다. 세령이 전부라며 희미하게 웃는 낯 또한 가엽기만 하였다. “나리.” “응, 세령아.” 마주 본 사내의 얼굴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문득 그를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해서 세령은 사내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동정도 정이라는 말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딱 한 번만 안아 드리겠습니다.” “……뭐?” “그냥 그러고 싶어졌습니다. 싫으면 말…….” 싫으면 말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가 폭 안겨 들었다. 나신을 문지를 때 나던 매캐한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꽃내음만이 가득 밀려들었다. 그는 세령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꼭 끌어안고 조붓한 어깨에 턱을 괴며 빈틈없이 몸을 밀착하였다. 그리고 살짝 물기 섞인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세령아.” “예, 나리.” “네가 너무 좋아.” “…….” “사무치게 좋아서…… 괴로워.” * * * 한갓진 하루였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휘언이 곁에 있었다는 것 정도. 옛날에 자주 하였던 놀이를 곱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후원의 꽃을 따다 귀에 꽂아 주며 놀다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편안함에 마루에 잠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이 저도 모르는 새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부스스 눈을 뜨니 휘영청 뜬 달이 후원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세령은 골마루에 앉은 사내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있었고. “헉, 소, 송구합…….” “더 있어도 되는데.”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으니 이번에는 사내가 상체를 기울이며 세령의 허리를 끌어안고 눕는다. 언제 상투를 푼 것인지 기다란 머리카락이 세령의 허벅지 위로 부채처럼 펼쳐졌다. 각이라도 잰 듯 곱게 갖춰 입었던 저고리도 앞섶을 풀어 헤친 채였다. 그러나 별안간 배에 들러붙은 사내 때문에 세령은 이상한 낌새를 곧장 눈치채지 못하고 숨을 흡, 참았다. “저, 저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우겨우 말을 뱉으며 그를 떼어 놓을 궁리를 하는데.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허리춤에 달린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보내기 싫다면?” “……네?” “이미 늦은 김에 자고 가는 건 어때.” “그게 무어 말도 안 되는…… 으앗!” 별안간 밀쳐진 힘에 발라당 누운 세령의 위로 결 좋은 머리카락이 쏟아져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차피 여기도 묘원각인 건 매한가지잖아.” 가두기라도 하듯 세령의 귀 옆을 짚고 올라탄 사내는 무얼 인지할 새도 없이 옷고름을 당겼다. 벌어진 옷섶 사이로 바깥 공기가 스미고 그 위를 솥뚜껑만 한 손이 덮은 순간, 세령은 정신을 차리고 사내의 손목을 붙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십……!” 어둠이 드리운 얼굴은 표정이 어떠한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음험한 눈동자만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세령은 떨리는 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당신…… 휘언이 아니구나.” 그 말에 꾹 다물렸던 희명군의 입이 가로로 찢어졌다. “제법 영리하네, 누이.” <22> 세령더러 영리하다고 말하였지만 희명군은 한 수 위였다. 그는 영리하다 못해 교활한 사내였다. “이거 놓으십시오! 제가 두 번은 없다고 말씀드렸…….” “누이가 내게서 얻어 갈 진실이 있을 터인데. 정말 그만할까?” 치맛말기와 함께 가슴을 덮는 손을 찰싹 내리친 세령은 그를 있는 힘껏 밀치고 일어나 앉았다. 희명군은 따갑다는 듯 장난스럽게 손등을 문질렀다. 그 행동에 더 부아가 치민 세령은 도끼눈을 뜨고 따졌다. “나리의 감언이설은 이제 안 들을 것입니다. 제 어미를 죽인 원수가 누군지나 말씀해 주십시오! 이건 저와 약조한 것이잖습니까.” “그래. 하였지, 약조. 한데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지 않나?” “허튼수작…….” “휘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하던데.” “그, 그게 뭐, 잘못되었습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휘언의 병에 대해 아는 티를 내고 말았다. 하나 세령은 이로써 확신을 얻었다. 두 사내는 쌍생아가 아니라는 것을. 신이 혼미해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혼이 두 개로 갈라졌단 사실까지도. 그렇다면 작금 마주한 혼은 그동안 세령이 알던 휘언의 시간을 모조리 앗아 간 이겠구나. “보아하니 이 몸에 두 사내가 있는 건 눈치챈 것 같고. 방금 막 잠든 놈을 깨울 방법은 알고 있나?” “…….” 깨울 방법이 따로 있는 거였을까. 사내의 말에 혹한 세령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희명군이 포착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본인의 옷고름을 풀어 헤쳤다. 언제 가져온 것인지 장죽을 물고 매캐한 연기를 후, 뱉기도 하였다. “나는 이번만큼 오래 잠들어 본 적이 없어.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었지. 왜 그랬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 “그동안은 그놈이 이 몸을 차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거든. 비겁한 놈이라 모든 전장에서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깨어 있는 날이 많았고. 한데 이번에는 뭐가 그놈의 의지를 자극하였는지 좀처럼 몸을 내어 주지 않더구나.” 김 의원에게 들은 것보다 훨씬 명확한 설명이었다. 하여 세령은 당장 위험한 사내로부터 달아나야 한단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그럼 부러 잠을 주무시지 않았던 연유가…….” 하늘을 향해 있던 공허한 눈은 세령에게 돌아가면서 묘한 빛을 띠었다. “무엇이겠어. 깨어 있어야 할 연유가 생긴 것이겠지. 지금 바깥에 저 앙앙거리는 소음도 잠들지 않으려고 그놈이 벌인 짓일 테고. 홀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추잡한 소릴 들으면서 아래는 안 세웠으려나 모르겠구나.”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세령이 경계심을 곧이곧대로 드러내자 희명군은 되레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다. “밖에서 헉헉거리는 놈들도 다 같은 사내새끼인데, 그놈이라고 뭐 다를 줄 아느냐?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지는 않더라도 정인을 목전에 두고 가만있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나와 같은 몸을 쓰고 있으니 너도 잘 알 것 아니야. 그놈이 불구는 아니라는 거.” “…….” “한데 어쩐다. 그놈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걸 내가 먼저 건드렸으니.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표정을 못 보는 건 조금 아쉽구나.” “……대체 왜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까?” “괴롭혀? 하하, 하하하! 괴롭히다니. 이 몸을 빼앗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게는 그놈이 불순물 같은 존재라고.” “하오나 원래 이 몸은 휘언 나리의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보았던 휘언 그 애는, 이렇게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과연 그럴까?” “……예?” “보아하니 그 유약한 놈을 참 애틋하게 여기는 듯한데, 네가 그놈을 정말 다 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아니지만…… 나리 같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쯤은 압니다.” “나 같은 사람이라…….” 희명군이 픽 조소를 흘렸다.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듯 킥킥거리기도 하였다. 심기를 살짝 건드린 것 같았으나 이제 세령은 그가 높디높은 상전이래도 아무 상관 없어졌다. 두려움보다도 희명군을 향한 견제와 원망이 더 컸으니. “하면 너는 그놈이 돌아오길 바라겠구나.” “예.” 주저 없는 대답에 희명군은 태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짓궂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내 무엇이든 거짓 없이 답해 주기로 하였지? 휘언 그놈의 안위든, 8년 전 희생자들이 그리된 연유든 말이야. 한데 그놈의 안위는 이미 아는 듯하니…… 나를 재우고 그놈을 깨울 방법을 묻는 건 어떠하냐.” “휘언 나리를…… 깨울 방법이요?” “그래. 언제 일어날지 모를 그놈을 마냥 기다리긴 싫을 것 아니야.” 그가 또 선택지를 주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과 당장 휘언을 불러올 방법 중 하나를 택하는 것.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원수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몸을 빼앗긴 휘언도 구하고 싶었으니까. 다 죽어 버린 줄 알았던 가족 중 하나, 휘언. 그 사내가 너무도 안타깝고 마음이 쓰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혹하긴 하오나, 그 제안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일 만큼의 신뢰가 없습니다.” “신뢰라……. 하면 나 외에 달리 방도는 있고?” “…….” 다른 방도 따위는 없었다. 그런 걸 알았더라면 그와 몸을 섞지도 않았을 터. 선택지 중 우선순위를 정하는 건 어려웠다. 하나 자신이 무얼 골라야 할지는 명확하였다. 지금 세상에 없는 어머니의 원수를 밝혀낸들, 저버린 명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지만 휘언은 예전으로 돌아갈 희망이 있지 않은가. 만일 어머니에 대해 알려 달라고 한다면, 그간의 모습으로 보아 희명군이 시원하게 털어놓을 것 같지도 않았다.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는 세령이 무얼 선택하던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짜 놓았을 테니까. 그만큼 희명군에 관해서는 신뢰가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휘언을 깨우고 그의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의 죽음을 파헤치는 게 수월할지도 모른다. 해서 세령은 결정하였다. 일단은 휘언을 구하자고. “알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나리를 잠재우고 휘언 나리를 깨울 방법을요.” 그러나 그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찢어졌을 때, 세령은 그게 희명군이 원하던 답이었음을 직감하였다. “기억하느냐? 내가 잠들기 직전 무얼 하였는지.” “잠들기 직전이라면, 설마…….” “너와 배를 맞추었지.” 희명군이 훅 거리를 좁히며 세령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삽시간에 사내의 허벅지에 올라타 버린 세령은 그 위에서 버둥거렸다. “거, 거짓말. 또 이런 짓을 하려고……!” “거짓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느냐.” 섶이 벌어진 저고리를 찢어 버릴 듯 당기는 통에 세령은 얼결에 벗기도록 두고 말았다. 그러나 치맛말기까지 손을 댔을 땐 저도 모르게 사내의 뺨으로 손이 먼저 나갔다. “그만하십시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희명군의 고개가 돌아가자마자, 세령은 제 실수를 깨닫고 굳어 버렸다. 아무리 적의가 강하였대도, 손찌검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하.” 사내도 황당하였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건수라도 잡은 듯 입꼬리를 비틀며 세령에게 더 들러붙었다. “네가 아끼는 얼굴에 이런 짓을 하면 어찌하느냐.” “…….” “누이, 나 아파.” 세령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가슴팍에 붉어진 뺨을 들이민다. 똑같은 얼굴, 익숙한 호칭, 심지어 아픈 걸 싫어해 칭얼거리던 모습까지 그대로 재현한 사내가 경멸스러웠다. 하나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약해지는 마음이 야속하였다. 이건 다 이 몸 안에 휘언이 잠들어 있기 때문일 터.  “……누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너는 내게 늘 하지 말란 소리만 하는구나. 네가 원하는 걸 다 말해 주고 있는데도.” “나리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두 번 다시는 나리 좋은 일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 맹랑하긴.” “…….” “어찌해야 네가 내 말을 신뢰할까? 설명이 부족하였느냐? 그렇다면…… 그래, 더 말해 주마. 내 네가 잠들어 있을 때 곰곰이 생각해 본 것인데 말이다. 간만에 그리 오랫동안 잠을 잤던 건 너와의 정사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인 것 같다.” “……제 귀에는 한 번 더 자 보려는 속셈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삶을 영유할 욕망이 사그라들면 잠을 자곤 해. 그건 확신할 수 있다. 전장에서 도망친 그놈, 끓는 피를 가라앉히니 잠을 자게 된 나.” “…….” “이래도 정 못 믿겠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도박을 걸어 보거라. 아니면 네가 더 좋은 방도를 떠올려 보든지.” 맞는 말이었다. 이 또한 그의 수작에 놀아나는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시 휘언을 만날 수 없게 된다 생각하니 고민하는 시간 또한 사치처럼 느껴졌다. 처음이 아니라 그러한가, 결정은 빨랐다. “휘언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나리를 증오할 겁니다.” 세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속곳을 내렸다. “무서워서 오금이 다 떨리는군. 하면 그 기세가 얼마나 갈지 어디 볼까.” 가증스럽게 맞받아친 그는 서 있는 세령의 손을 당겨 제 어깨를 붙들게 하고 치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어찌나 잽싼지, 저지할 틈이 없었다. <23> “잠깐, 나리! 안에서 히익……!” 안으로 들어가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벌어진 다리 사이로 사내의 혀가 파고들었다. “벌써 약한 소리 하는 게냐.” 혓바닥으로 균열을 비집으며 쓸어 낸 그는 세령을 도발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러고는 질구에 입술을 붙이고 물 많은 과육을 파헤치듯 살점을 빨기 시작하였다. 거만한 태도에 어떻게든 견디려 했지만, 처음 겪는 자세가 아닌데도 수치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자극을 참지 못한 세령이 몸을 바르작대자 그날은 첫날이라 봐주었다는 듯, 사내는 구멍을 벌린 혓바닥 뒤로 곧장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허리가 절로 꺾였다. “아! 너무 급하, 흑……!” “허벅지에 뺨을 비비며 잘 때부터 참았다. 먼저 자극한 건 너야.” “제가 언, 아흣, 아!” 깊이 파고들어 내부에 고였던 물을 뽑아내는 손놀림이 매섭다. 공알을 짓이기며 굴려 대는 다른 손도 다급함을 드러내듯 재빨랐다. 내벽이 들쑤셔지고 피가 몰린 음핵이 애액에 절여지기까지는 찰나였다. 느긋하게 열을 내던 전과 달리 세차게 가해지는 자극에 세령은 금세 절정감을 느꼈다. “아, 아흑…… 흐…….” 바르르 떨며 무너진 세령의 몸을 제 위로 앉힌 희명군은 치마 아래 손을 넣어 성난 물건을 다리 사이에 비비적거렸다. “너무 좁아서 더 달래야 할 것 같지만, 참은 지 오래되었으니 좀 봐주거라.” 풀린 눈으로 아래를 같이 응시하던 세령은 문득 이곳이 아직 밖이라는 걸 인지하고 사내의 팔을 더듬으며 저지하려 하였다. 그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지만. “나리, 제발 들, 들어가서…….” “어차피 이 후원은 아무나 못 들어와.” 희명군은 다물린 균열 사이를 벌릴 듯 말 듯 긁어 대다가, 어마어마한 압박감으로 꾹 누르며 파고들었다. 그 통증에 세령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읏, 그래도 싫…….” “알겠어. 들어갈 테니 그만 채근해.” “아아, 앗!” 질구를 뚫는 강한 힘에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받아들인 게 처음이 아닌데도 골까지 울리는 듯하였다. 그만큼 적응하기 어려운 굵기와 길이였다. “후…… 끊어 먹겠군.” 눈을 찌푸리듯 감았다 뜬 사내는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세령의 경직된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행동 같기도 하였지만, 상대가 휘언이 아닌 희명군이었으므로 세령은 그가 그저 여인의 몸을 만지고 싶어서 더듬는 거라 여겼다. “나리, 드, 들어가요. 네?” 밝은 달밤 아래 있으니 옷을 다 벗지 않았음에도 부끄러움이 몰려든다. 애써 참는 숨소리마저 누군가가 엿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해서 시종일관 세웠던 발톱을 숨기고 청하였는데 희명군은 그게 기꺼운지 입꼬리를 비틀었다. “더 해 봐.” “……네?” “더 아양 떨어 보라고. 방금처럼.” 대체 무엇이 아양으로 보였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세령이 눈만 끔뻑였다. 그러자 심술을 부리듯, 사내가 세령의 둔부를 양쪽으로 잡아 벌리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아흑! 흡…….” 불쑥 튀어나온 신음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희명군이 씩 웃으며 아예 골반을 잡고 세령의 몸을 들었다가 놓길 반복하였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제 몸 하나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사내의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꼴이 되었다. 벌어진 질구가 얼얼할 지경으로 거친 움직임이었다. “흡, 흐윽, 으읍…….” “소리 내.” 입을 틀어막고 싫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막무가내로 흔들어 대던 골반까지 별안간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거웃 아래를 파헤쳐 공알을 살살 문지르기 시작하였다. “으, 으응…….” 사내의 양물을 품은 채 음핵만 자극당하자 어쩐지 교접 부위뿐 아니라 발바닥이며 손바닥이 간질거려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정신없이 남근을 처박을 때가 나았다. 이리 여유 부리는 정사는 제가 어딜 만져져야 느끼는지, 어느 부위를 더 좋아하는지 속속들이 파헤쳐지는 것 같았으니까. 음핵을 부드럽게 문지르다 짓이길 땐 내부에 들어온 살덩이를 꽉 무는 게 선연하게도 느껴졌다. 이토록 적나라하게 성감을 드러내는 건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나, 나리. 제발, 그만 괴롭히고, 드, 흐으…… 들어가서…….” 세령은 입을 틀어막던 손을 쭈뼛쭈뼛 내리며 할딱거리는 숨과 함께 청하였다. 그러나 짓궂은 사내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제 양물을 퍽 쳐올렸다. “아앙!” 달을 대로 달은 몸에 강렬한 쾌감을 주자, 저도 모르게 교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뒤늦게 수치심이 솟구쳤다. 그 정도 크기였다면 분명 다른 방의 사람들도 들었을 게 뻔하였다. 세모꼴이 된 눈에 물기가 고이자, 희명군이 즐겁다는 듯 키득거렸다. “왜 그놈이 누이에게 죽고 못 사는지 알 것도 같아.” “……파렴치한 같으니.” “나를 즐겁게 하였으니 원하던 대로 들어가 줄게. 내 목을 안아.” “왜 그런 걸…… 싫습니다.” “다치고 싶으면 그러든지.” “으앗!” 사내는 세령의 오금 아래 팔을 넣고 둔부를 손으로 받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돌연 허공에 뜨게 된 세령은 짧은 비명과 함께 반사적으로 희명군의 목을 안았다. 끌어안은 목에서 낮게 진동이 울렸다. “싫다더니.” “…….” 자존심이 상해 다시금 그의 목에서 팔을 떨어뜨리려는데, 희명군이 성큼성큼 마루를 가로질렀다. 해서 세령은 어쩔 수 없이 사내에게 더 매달려야 했다. “읏, 으, 하아으…….” 배 속을 쿡쿡 찔러 대는 양물 탓에 몸이 제 의지와 달리 움찔거렸다.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내벽을 파고드는 거대한 물건에 세령은 딸꾹질하듯 헛숨을 들이켰다. 아니 그래도 가해지는 자극에 눈앞이 아찔한데, 자칫하여 사내의 목을 놓치기라도 하면 정말 속절없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흣, 흡, 나리, 잠깐, 천, 천천히.” “들어가자고 채근할 땐 언제고.” “무섭, 무섭습니다. 떨어질 것 같, 아읏.” “무서운 게 맞아? 누이 아래는 좋다고 꽉꽉 물어 대는데.” “으읏, 흐…… 참말인데…….” “하면 나를 더 안아.” 혹여 뒤로 넘어가 뒤통수가 깨질까 봐, 세령은 그가 시키는 대로 단단한 목을 꽉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하였다. 그 또한 사내의 불순한 의도임을 아는데도 수틀리면 저를 바닥에 내리꽂을 것 같아서 더 저항할 수도 없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각도를 달리하여 이리저리 찌르는 통에 짐승처럼 박는 게 아닌데도 숨이 차올랐다. 하나 희명군은 무척 여유롭게 복도로 향하는 문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문 바로 옆에 세령의 등을 대었다. “내, 내려 주, 흐읏!”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귀두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내벽을 쳐올렸다. 절정에 오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배가 저릿하게 울렸다. “싫다, 무섭다, 내려 달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누이도 충분히 즐기는 것 같은데.” “제가 언제……!” “우리가 걸어온 길을 좀 봐.” 알알한 자극을 참지 못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있던 세령은 사내의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았다. 걸어온 길 대로 방울방울 체액이 떨어져 있었다. 그게 전부 자신이 흘린 거라 생각하니 낯이 화끈해졌다. 처음보다 교접이 수월해진 건 저도 느꼈던 탓이었나. 자신이 이리 예민한 몸이라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제 것이 아닙니다.” “그래? 하면 예서 내걸 뽑아 볼까? 질질 흘리는 게 누구인지 궁금해지는데.” “…….” 벽과 너른 가슴팍 사이에 세령을 가둬 두고 안쪽을 꾹꾹 누르는데 찌걱대는 소리가 그토록 음란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저릿한 감각에 희열을 느낀 안쪽은 남근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입구를 틀어막던 양물이 빠져나간다면 정말로 애액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세령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예민한 제 몸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찌할까. 정말 확인해 볼까?” 찔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툼한 기둥이 쑥 빠져나가며 귀두 끝에 턱 걸렸다. 전보다 미끈한 움직임이라, 구태여 보지 않아도 사내의 양물이 반질반질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여튼 성격 나쁜 사내였다. “그냥…… 하십시오. 빨리.” “바라던 바야.” 흉포한 살덩이가 다시금 퍽, 소리를 내며 치받쳤다. 그러더니 이때까지는 전부 봐준 것이라는 듯 거칠게 안쪽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흐아, 앗, 아! 나리, 잠깐, 아응!” 두들겨 맞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살과 살이 맞붙을 때마다 철벅대며 음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벽에 망치질하듯 강한 힘으로 내벽을 꿰뚫으니, 여린 몸은 곧이곧대로 흔들리며 사내와 벽 사이에 연신 부딪혔다. 정신없는 교접에 휘언이 선물한 노리개가 떨어졌는데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허공에 붙들려 강하게 저항할 수도 없고 퍼부어지는 자극이 버거워 그저 견디는 것만도 힘들었다.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앙알대던 세령은 불쑥 솟구친 요의에 퍼뜩 이성을 붙들었다. 복도로 통하는 문 바로 옆에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단 게 문득 의식된 것이다. 하여 다급하게 사내의 등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아으읏, 그만, 그마안!” “왜 또 앙탈이야, 누이.” <24> “하아, 하…….”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 희명군은 세차게 움직이던 하초를 멈추었다. 숨을 헐떡이느라 세령의 답이 늦으니,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면서 치아로 치맛말기 매듭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스르륵 떨어지는 치맛자락과 함께 드러난 봉긋한 가슴을 앙 물고는 대답을 채근하듯 쪽 빨았다. “여기서, 흣, 말고, 안에서…….” “들어가재서 안에 왔더니 어딜 또 가자고.” “흐으…… 복도에 다, 읏, 들릴 것 같단 말입니다.” “다른 놈들도 귀빈채가 떠나가라 앙앙대는데 그게 무에 어때서. 어차피 누가 누군지도 서로 모르지 않나.” 사내는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단 얼굴로 유두를 잘근잘근 물었다. 뾰족해진 선단이 치아에 긁힐 때마다 등줄기에 소름이 일어 몸이 절로 흠칫거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무혁 나리도 있을 테고…….” 무혁의 이름이 나오자 가슴을 쪽쪽대던 입술이 멈추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성질을 부리듯 아래를 퍽 쳐올렸다. “하윽!” “무혁? 그놈을 왜 신경 쓰지?” “무슨…… 아앗! 아, 아!” 다시금 퍽퍽, 내벽을 들쑤시는 통에 세령은 입을 채 막지도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좆 하나로는 부족했던 건가. 욕심도 많지.” “그런 뜻이 아니, 힉, 으읏!” “다른 휘언이 알면 슬퍼하겠는걸.” “아니, 아니, 아, 아앗! 아!” 가장 약한 부분만 후벼파던 사내는 이내 세령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움찔거리는 음부에 파정액을 가득 싸지른 희명군은 연약한 다리를 그제야 내려 주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세령은 휘청거리며 고꾸라졌다. 사내가 가볍게 받아 주어 무릎이 깨질 뻔한 것은 면하였지만 안도하기에는 섣불렀다. 희명군은 세령의 몸을 돌려 벽을 짚게 하더니 후들후들 떠는 다리 사이로 다시금 곧추선 물건을 들이밀었다. “잠깐, 좀 쉬었, 흐윽!” “다른 좆 찾을 땐 언제고 쉬잔 말을 해. 혹, 이 좆은 벌써 질렸어?” “그런 게 아니라, 아, 하으…….” 아직 예민한 몸은 남성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벽을 짚고 있던 팔에도 힘이 죄 빠져 휘청이자, 그가 뒤에서 세령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와 어깨를 잘근잘근 물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듯한 말을 짓씹으며. “내가 두 놈 몫을 할게. 그러니 다른 사내까지 눈독 들이지는 마, 누이.” * * * 또 혼절이었다. 희명군과의 정사는 두 번째래도 여전히 버거워 정신을 놓지 않고서는 견뎌 내기 어려운가 보다. 잠들었단 것도 모른 채 있다가 악몽에서 깬 사람처럼 숨을 들이켜면, 푸른 새벽빛이 스미는 귀빈채였다. [그놈이…… 너를 또 탐하면 난 정말 견디지 못할 거야.] 이제야 휘언이 중얼거리며 저를 내쫓았던 게 이해되었다. 휘언은 희명군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사특한 사내인지 알고 있었던 거다. 또 이리된 것을 안다면, 그게 본인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면, 휘언은 크게 상처받겠지. 혹여 휘언이 깨어났을 때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 꼴을 보고 지난밤 일을 유추하게 될까 봐, 세령은 제 흔적을 말끔히 지워 낸 후에야 귀빈채를 나섰다. 거친 교접에 뜯어져 버린 노리개를 잊지 않고 챙겨 온 세령은 온종일 저자를 돌아다니며 다시금 이어 보려 하였다. 하나 결국 비슷한 실을 구하지 못하였다. 속상했다. 달고 다니지 못하는 이유야 만들면 된다지만, 실망할 휘언의 얼굴이 머릿속에 문득문득 끼어들어 공연히 울고 싶어졌다. 이게 대체 뭐라고 우울해지는 건지. 세령은 입을 비죽이면서 시큰해진 코끝을 애써 외면하고 끊어진 노리개만 씁쓸하게 만지작거렸다.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왜 그리 울상이야?”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인기척 없이 다가온 휘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곁에 앉았다. 잔머리 하나 없이 번듯하게 틀어 올린 상투, 곱게 갖춰 입은 옷차림에 안도감이 들었다. 혼이 돌아왔구나. 적어도 희명군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세령은 손에 쥐고 있던 노리개를 어설프게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숨길 필요 없어. 끊어진 것 다 보았으니.” 이미 들켰구나. 멋쩍어진 세령은 소매에 구겨 넣은 노리개를 다시 주섬주섬 꺼내었다. “……송구합니다. 기껏 선물해 주셨는데.” “어쩌다가.” “튀어나온 못에 걸려서 그만…….” “어디 다치지는 않았고?” 휘언은 정말 믿는 얼굴로 세령의 손과 허리춤을 조심스레 살폈다. 너절한 핑계에 다정한 걱정이 돌아오니 죄책감이 짙어졌다. “괜찮습니다. 다치지 않았어요.” “하면 되었어. 그깟 거 더 좋은 걸로 사 줄 테니 울적해하지 마. 고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니 내가 다 마음이 아프다.” 실망할 줄 알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저를 위로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노리개가 어쩌다 뜯어진 건지 알게 되어도 저런 너그러운 얼굴을 할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겁도 없네. 내 마음이 무엇인 줄 알고 받겠다는 건지.” “네?” “좋아한다고 하였잖아.” “…….” 한 번 고백이 트이니 이제는 시도 때도 없었다. 그러나 정도를 모르는 고백에 매번 가슴이 들뜨는 저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비녀에 뒤꽂이에 떨잠까지 사 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그 마음까지 받겠단 각오로 말하는 거야?” 사내가 입에 올린 장신구들은 전부 혼인한 여인이 하는 거였다. 휘언의 말에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 깨달은 세령은 귓가가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능청스레 그런 말을 지껄인 것과 달리 마주 바라보고 있던 사내의 귀도 불그스레해져 있었다. 의외의 모습에 세령은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물러도…… 되나요?” “응?” “그건 전부 남편이 있는 여인이 하는 장신구인데, 혼인해 놓고 다른 사내에게 그런 선물을 받는 것은 조금 그렇잖아요.” “무어? 그 혼인, 나와 하는 게 아니었어?” 어색해진 분위기에 농을 섞었더니 충격받은 눈으로 내려다본다. 그 진심 어린 표정이 제법 귀여워 세령의 입에선 저항 없는 웃음이 픽 터져 나왔다. “농입니다.” “허.” 휘언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뒤늦게 안심하며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세령은 더 장난치고 싶어졌다. “한데 나리와 혼인한다고는 안 하였어요.” “진담이야?” “인생사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요?” “정말 너무하네. 옛날엔 먼저 혼인하자 해 놓고.” “제가요?” “다 잊어버렸어? 그 소년은 그때부터 한 여인에게만 순정을 바쳤는데. 나 정말 슬퍼지려고 해.” 소매로 눈가를 콕콕 찍어 바르며 우는 시늉을 하는 휘언 때문에 세령의 입에선 웃음이 와르르 터졌다. 희명군과 있을 땐 현저한 신분 차이가 느껴져 불편하기만 하였는데, 지금은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왜 이리 능청스러워지셨습니까?” “이런 거 좋아하지 않나.” “제가요?” “응. 아니야?” “나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요?” “무어,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한데 세령아, 너 나를 언제까지 나리라고 부를 셈이야?” “나리를 나리라고 하지 무어라 합니까?” “어릴 땐 이름으로 불렀잖아.” “어…… 이제는…… 그러면 아니 되잖아요.” “그래도 돼. 정 눈치 보이면 둘이 있을 때만 불러도 괜찮아.” “그러다 남들 앞에서도 습관처럼 불러 버리면 어찌합니까.” “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내게 시집와야지, 무어.” “네에?” “행랑아범처럼 너를 혼내는 이가 있으면 아니 되니, 부부의 연을 맺는 거야. 네가 내게 신분 막론하고 이름을 막 불러도 되는 이라 그런 식으로 공표하면…….” “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십시오!” “하하하.” 끝도 없는 장난에 세령의 얼굴이 달아오르자 사내의 입에서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무색하게 그와 있으면 이토록 편안하다. 무더위 날씨가 청량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휘언이란 존재 하나만으로 따갑던 햇볕도 기분 좋은 온기처럼 여겨진다. 이런 나날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령아, 한데 말이야. 어젯밤엔 별일 없었지?” “별일……이라니요?” 세령은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곤 바짝 긴장하였다. 그러자 휘언의 표정도 사뭇 심각해졌다. “어느 순간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아침이고 너는 없어서……. 내가 뭐 실수한 게 있었는지 묻는 거야.” 다른 혼이 또 세령을 범한 건 아닌지 염려하는 모습이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휘언은 자책하며 제게서 영영 달아날 것 같았다. 하여 세령은 하얀 거짓말을 하기로 하였다. “잠드신 걸 확인하자마자 방을 나왔습니다.” “정말?” “예. 깨울 것을 그랬나요?” “아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세령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다른 혼은 이미 어떻게 하여야 저 몸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확실히 희명군이 제시하였던 휘언을 깨우는 방법은 효과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휘언이 다시 잠들면, 이리 안온한 하루를 계속해서 영유하려면, 희명군과 또 그 짓거리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휘언에게 이 몸을 차지할 방법을 의논하기에는 지난밤 일을 우선 설명하여야 하는데…… 털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복잡한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으니 세령은 심란하기만 하였다. <25> ㅬ “세령아. 잠깐 뒤돌아볼래?” “왜 그러십니까?” “잠깐이면 돼. 머리에 뭐가 붙어 있는 것 같아서.” 상념으로부터 세령을 잡아끈 사내는 느닷없이 뒤를 돌아보라 시켰다. 커다란 벌레라도 붙어 있는가 싶어서 엉거주춤 뒤를 도니 휘언이 땋은 머리를 쥐고 사부작거렸다. “벌레라도 붙었습니까?” “벌레는 아니고. 좋은 거.” 조금 신난 목소리로 대꾸한 사내는 한참 뒤에야 땋은 머리를 세령의 한쪽 어깨로 톡 놓아주었다. 시선을 내리자 원래 하고 있던 누런 댕기가 아닌, 연초록 비단에 은빛 꽃을 수놓은 댕기가 머리끝에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어때, 예쁘…….” 깜짝 선물에 놀라 고개를 옆으로 트는데,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뜬 찰나에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세령은 순간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임을 인지하고 경직되었다. 기뻐하는 얼굴을 보려던 의도였겠지만,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휘언도 놀란 듯 굳어졌다. 넋을 놓고 뺨을 붉히는 것도 모자라, 쿵쾅대는 심장 소리며 마구 흔들리는 눈꺼풀까지 심히 동요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허공에 얽혔던 시선은 살짝 아래로 떨어져 세령의 입술에 진득하게 붙었다. 그를 따라 저도 모르게 내린 시야에 위아래로 꿀렁이는 목울대가 걸렸다. 닿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간지러워, 세령은 감쳐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으니까. “……어여쁘다.” 촉촉해진 눈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린 사내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더니 곧장 간극을 좁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세령의 심장이 쿵쾅쿵쾅 난장을 피웠다. 도로 제자리를 찾아간 사내의 입술 또한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놀라서 동그래진 눈을 응시하던 휘언은 한숨을 삼키듯 목울대를 또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세령의 굳어 버린 손을 가져다가 제 뺨에 대었다. “뺨, 때려도 돼.”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다시금 코끝이 닿았다. 사내는 고개를 살짝 틀어 쪽, 쪽, 짧은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고는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세령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떨어졌다. 이땐 떨리는 마음을 들켜 버릴 것 같아서, 세령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탓에 사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지 못하였지만, 너무나 조심스러운 접문이라 입술끼리 어떻게 스쳤는지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가 물러났는데도 수줍은 열기가 여전히 제 입술에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퍽 대담한 짓을 저지른 사내는 그러고선 또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진짜로 때려도 돼. 세령아.” 거절하란 뜻으로 뱉은 말이겠지만, 그를 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제 손등을 감싸 쥔 휘언의 손이 파들파들 떨고 있었으니까. 무자비하게 다리 사이를 파고들던 사내와 동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어. 너무 싫어서 그래?”   “……아뇨.” “하면 어떤데?” “…….” “싫지 않은 거면…… 좋다고 말해 주면 안 돼?” 측은함일까, 묻어 둔 마음이었을까. 제 속내를 확인하고자 하는 투정에 마음이 일렁였다. 사내치고 불그스름한 입술을 응시하던 세령은 그의 뺨을 붙들고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조금은 충동이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한. 스치듯 짧게 붙었다가 민망함에 느릿느릿 멀어지는 세령을 바라보던 사내는 벅차오른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세령의 뺨을 붙잡고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여 입술을 포개었다. “흡……!” 선뜻 다가갔던 게 도화선이 되었는지, 휘언은 흥분 어린 숨결을 흘리며 세령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파고든 혀가 세령의 혓바닥을 꾹 눌렀다가 여린 살갗을 어루만지듯 두드리고 지나갔다. “으음, 흐으…….” 쪽쪽거릴 때와는 달리, 입술이 더 깊이 맞물리고 타액이 얽혔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붙어 있는 건 입술뿐인데 가슴께로부터 고양감이 솟구쳐 얼굴 전체를 달아오르게 하였다. 옅은 신음을 흘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였다. 열기에 뇌가 잠식되어 무거워진 눈꺼풀이 절로 내려앉았다. 그리하니 입 안을 헤집는 사내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아, 읍…….” 벅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겨우 토해 낼 때, 문득문득 흘겨본 사내는 취한 사람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다만 끓어오르는 정욕을 곧이곧대로 토해 내지 않고 그저 시선으로만 세령을 더듬었다. 입술을 탐낸 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진작 쾌락을 배운 세령은 달아 버린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던 손을 휘언의 어깨에 얹었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살짝 당긴 것도 같았다. 휘언은 그 작은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하였는지 세령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읏!” 혀를 얽은 채로 제 다리 위에 세령을 앉힌 사내는 숨넘어가는 소리에 얼굴을 살짝 물리고 입술을 빨았다. 그러고는 다시 여린 점막을 혀끝으로 헤집으며 진득하게 농탕질하였다. 내달리는 박동이 벅찼다. 사내의 향과 피부, 그리고 맛까지 전부 감미로웠다. 달곰함에 녹아내린단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임을 깨달으며, 세령은 속절없이 사내에게 취했다. 그렇게 첫 접문을 나눈 입술은 한참 뒤에야 치솟는 열감을 참지 못하고 떨어졌다. 더하였다가는 큰일을 치를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그만둔 느낌이었다. 올라탄 허벅지에 닿은 무언가가 점점 단단해지던 찰나에 그가 고개를 물렀으니까. “……미안. 왜 이렇게 주체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휘언은 세령을 마루 위에 내려놓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사과하였다. “저도…… 싫지 않았습니다. 조, 좋았어요…….” 용기 내어 꺼낸 세령의 답에 휘언은 벌겋게 된 눈가가 따끔거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마치 사춘기 소년의 모습 같아서 세령은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하면, 한 번 더 입 맞춰도 돼?” “이미 다 하셔 놓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점잖은 체하고 싶어서.” 굳은 세령의 어깨를 어루만지던 휘언은 애써 농을 건네며 웃었다. 저도 긴장한 주제에 상대의 기색을 먼저 살피는 점이 참으로 그다웠다. “무어…… 마음대로 하십시오.” 공연히 수줍어진 세령은 웅얼거리며 답을 하였다. 그러자 사내가 짧게 쪽, 소리를 내어 입을 맞추었다. 더한 것도 해 놓고 가벼운 접문에 마음이 붕 떠서, 세령은 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더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새빨갛게 물든 귓가를 보고 초승달처럼 눈매를 접은 사내는 세령을 품 안에 당겨 안으며 중얼거렸다. “행복하다, 세령아.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이 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세령은 휘언의 말에 십분 공감하며 그의 허리를 꼭 움켜쥐었다. * * * 정사를 통해 휘언을 깨울 수 있음을 보여 준 희명군은 세령을 매일같이 귀빈채로 불러들였다. 본디 세령의 목적은 희명군을 오래 재워 휘언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한데 첫 교접 땐 며칠간 시간을 내어 주더니, 이제는 고작 한나절뿐이었다. 희명군의 의지가 강한 건지 휘언이 약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세령은 낮에는 오랜 정인과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밤에는 그와 닮은 사내에게 깔려 앙알거리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희명군과의 시간에서는 고작 정사를 나누는 게 다였지만, 휘언과 있을 때 세령은 8년 전 사건을 떠올리도록 부단히도 노력하였다. 두 사람이 어릴 적 하던 놀이를 재현하기도 하고 추억을 곱씹으며 묘원각을 거닐기도 하였다. 처음엔 지독했던 과거를 떠올려야 함에 망설이던 휘언도, 세령이 그간 얼마나 애를 썼는지 듣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잊힌 기억을 반추하려 노력한 것과 별개로 성과는 없었지만. 그게 벌써 수일이 지났다. 제 뜻대로 굴러가진 않았지만 세령은 내심 이런 나날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전에는 영영 못 만날 사람인 줄 알았던 휘언과의 시간이 꿈만 같았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묘원각 장사 준비를 도와야 해서 평소보다 일찍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게 못내 아쉬웠는지 휘언이 두 번째로 접문을 하였다. 행랑채로 데려다주겠다고 따라 들어오더니 담벼락 뒤로 끌고 가 어쩐 일로 박력 있게 입술을 포갰다. 벽 하나를 두고 하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어째 저번보다 더 대담해진 것 같아…….’ 첫 접문 이후로는 매번 만날 때마다 입술을 훔쳐보기에 몹시 의식되었는데, 수일이 지나도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아서 전혀 예상치 못한 접촉이었다. 하나 그만큼 설레기도 하였다. 달곰한 감각이 떠오른 세령은 일하다 말고 멍하니 입술을 매만지며 귓가를 붉혔다. 그때 불쑥 영선이 찾아왔다. “하아, 어딜 갔나 하였더니.” “까, 깜짝이야.” “나리가 부르신다. 채비해.” 또 희명군의 명이었다. <26> 무혁이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탓에 이번에는 영선이 귀빈채 안쪽까지 따라 들어왔다. 한데 귀빈채에 거의 다다랐을 때, 세령은 자신이 휘언에게 받은 댕기를 아직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바보같이 두고 오는 걸 깜빡하였다. 이대로 들어간다면 귀한 댕기도 노리개처럼 망가지거나 더럽혀질 터다. “얘, 뭐 하니? 안 들어가고.” 문 앞에서 주저하는 모습에 공연히 상전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걱정되었는지 영선이 불안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고민하던 세령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영선의 머리끝에 달린 잿빛 댕기였다. ‘어쩔 수 없나…….’ 그가 준 선물을 타인에게 맡기는 게 내키진 않았으나, 달리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세령은 별수 없이 제 댕기를 풀었다. “저기, 이거 잠깐 바꿔 줄 수 있어?” “어어? 이, 이걸?” 영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밤만 맡아 주면 내 사례는 반드시 할게.” “그래. 뭐, 그럴게.” 댕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영선의 모습에 어째 불안해졌다. 팔아 버리면 어쩌나 걱정되었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뿐이었다. 혹시 모르니 내일 아침 장이 서기 전에 영선을 찾아가 돌려받는 수밖에. “그거, 패물을 보관해 준 대가로 희명군 나리께서 하사하신 거야. 그러니 잃어버리거나 하면…….” “날 뭐로 보고 그런 소릴 하니? 걱정하지 말렴. 잃어버리는 일 따윈 없으니까.” 웬만해서는 희명군과 어떤 사이란 걸 내색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티 내지 않으면 댕기를 잃게 될 것 같았다. 해서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은 것인데, 영선은 걱정 붙들어 매라며 더 큰소리쳤다. 하여 세령은 영선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고 귀빈채 방문을 열었다. 역시나 방 안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세령은 인사를 올리는 것 없이 늘 앉던 자리로 발을 옮겼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사내는 세령 쪽을 본체만체하며 한 손에는 장죽을, 한 손으론 종이 쪼가리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는 세령이 자리를 잡고서도 독한 연기를 한참 뿜어내더니, 뒤늦게 입꼬리를 비틀며 눈길을 주었다. “낮 시간은 즐거웠나 보구나?” “……예?” “그러니 부름에 고분고분 답하였겠지. 그놈도……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낸 듯한데.” 무슨 소린가 하였더니 희명군이 제 손에 있던 종이를 뒤집어 세령에게 보여 주었다. <세령이는 건들지 마.> 정갈한 글씨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휘언이 희명군과의 정사를 눈치챈 것일까. 아니, 아닐 것이다. 알았더라면 휘언은 모르는 체하지 않고 제게 미안해하며 사죄부터 하였을 것이다. 그저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염려되어 다른 혼에게 경고했을 가능성이 컸다. “재미있지 않느냐? 네가 날 어찌 잠재우는지 그놈이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할까 궁금해지는데.” “끝까지 모르게 할 것입니다.” “모르게 한다? 과연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까.” “……나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요.” “허. 그리 날 세우지 말거라. 어쨌든 내가 한발 물러난 덕에 너도 그놈도 희희낙락하고 있지 않아. 내 조언이 들어맞았으니 너 또한 군말 없이 이 자리에 오는 것일 테고.” “…….” “자, 알아들었으면 움직여야겠지?” “무슨…….” “이젠 나를 즐겁게 해 줄 차례라고, 누이.” 쪽지를 단숨에 구겨 던진 사내는 이미 침의 차림이었던지라 양물을 꺼내는 것도 빨랐다. 바지춤을 끄르자마자 퉁 튀어 오른 물건은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안 되었다. 하나 주저해 봤자 결국 사내의 인내심을 시험할 뿐이란 걸 학습한 세령은 옷을 한 겹씩 벗어 옆에 개어 두었다. 그러고는 희명군 앞에 섰다.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흥미로운지 사내의 시선이 노골적이다. 그 눈길에 수치심이 몰려왔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옷이 망가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정말 창부와 다를 게 없단 회의감이 들었으나, 포악한 혼에 눌린 휘언을 떠올리면 망설임은 흐릿해졌다. “아!” 조금의 전희도 없이 사내의 위에 올라타려는 순간, 그가 세령의 손목을 잡아끌어 다리 사이에 엎어지게 하였다. 눈앞에는 곧추선 물건이 제 위용을 드러내듯 꺼덕였다. “무얼 물끄러미 보고만 있어? 빨아.” “……예?” “어찌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던가?” 희명군은 기둥을 쥐고 세령의 뺨을 툭툭 쳤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남근을 물리면 잘라먹을 것 같다며 손가락을 넣고 입 안을 희롱하였었지. 그 이후로는 구태여 요구하지 않기에 구음엔 딱히 흥미 없는 줄 알았거늘,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이 신체가 휘언의 것임을 알고 있으니 감히 물어뜯지는 못 하리라 여긴 건가. 그렇다면 그의 예측이 옳았다. 세령이 제아무리 희명군을 죽이고 싶대도 이제는 사내의 몸에 생채기조차 섣불리 낼 수 없었다. 이 몸은 본디 휘언의 것이니까. ‘이 커다란 게 입 안에 들어가긴 하려나.’ 기분 나쁘게 뺨을 건드리는 남근을 멈추기 위해 세령은 손을 뻗어 살덩이를 쥐었다.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고민은 잠시뿐이었다. 얼른 끝내 버리잔 생각에 세령은 기둥을 살살 문지르다가 입술에 갖다 대었다. 뭉툭한 끝엔 벌써 동그랗게 물이 맺혀 있었다. 선단만 혀로 한참을 할짝대던 세령은 기별도 안 온단 얼굴을 흘겨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의 분신을 입 안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우윽…….” 귀두를 머금은 것만으로도 입이 꽉 차고 숨쉬기가 버거웠다. 하나 올려다본 희명군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어설프게 하였다가는 또 어떤 괴팍한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므로 세령은 목구멍을 더 열고 사내의 분신을 받아들였다. 입이 한껏 벌어져 있으니 츱, 츄읍, 빨아 대는 소리가 컸다. 혓바닥으로 두둑한 살덩이를 자극하며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였지만, 버거운 크기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입술 아래로 침이 흐르고 자꾸만 헛구역질이 났다. “우읍, 흐…….” 벅찬 호흡을 뱉자, 희명군이 손을 뻗어 세령의 입꼬리를 살살 문질렀다. 시선을 드니 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입술을 혀끝으로 날름 축이더니 웃옷을 벗었다. 군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몸이 작은 등불에 근사한 음영을 뽐냈다. 제 몸에선 찾아본 적 없는 근육들이 가슴이며 배며 날카로운 붓으로 그린 듯 쪼개져 있었다. 툭 치면 주먹이 더 아플 것 같은 그런 몸이었다. “건들지 말라며 안 하던 경고까지 남겼는데, 이 광경을 보면 그놈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지는구나.”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을 감상하던 세령은 정신을 차리고 도끼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즐겁다는 듯 킥킥 웃음을 흘린다. “나중에 그놈에게 똑바로 전해 줘. 내가 아니라, 누이가 나를 잡아먹은 것이라고.” “…….” “왜 그리 원망스러운 눈이지? 맞잖아, 지금도 내 걸 맛있게 빨고 있으면서.” “…….” “혹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어 그래? 나만 재미를 보는 것 같아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 같아 외면하듯 시선을 피하자, 사내가 돌연 제 양물을 빼냈다. 그리고 옆에 거꾸로 드러눕더니 세령의 허리를 번쩍 들어 제 위로 엎어뜨렸다. “윽. 대체 또 무얼 하시려고……!” 가벼운 물건처럼 끌려가 별안간 사내의 몸에 반대로 올라탄 세령은 제 눈앞에 다시 자리한 남근을 보고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얼굴 앞에도 자신의 음부가 훤히 드러나 있을 게 뻔하였으니까. “누가 먼저 황홀경을 맞는지 내기해 보자.” “예? 흐윽!” 별안간 질구 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푹 파고들었다. 세령이 파르르 떨며 허리를 웅크리자 사내가 손가락을 깊이 넣은 채로 음핵을 둥글렸다. “하으읏, 나리, 갑자기 그리하면……!” “누이가 이기면 내 오늘은 그냥 보내 줄게.” “흣, 차, 참말입니까?” “대신 내가 이기면 온전히 혼자서 허리를 흔들어야 할 거야. 누이가 나를 범하는 것처럼 말이지.” “미, 미쳤, 아흑!” 희명군은 손가락을 모조리 빼냈다가 손등 뼈가 닿을 정도로 밀고 들어와 내벽을 긁었다. 그간의 정사로 세령이 어찌하면 쾌락을 느끼는지 전부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구음이 처음인 세령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볼이 불룩해질 만큼 사내의 것을 물고 어떻게든 빨리 끝내 보려고 손으로 기둥을 흔들었다. 하나 다리 사이에서 연신 치솟는 감각에 자꾸만 자세가 무너졌고 할딱이느라 양물을 뱉기 일쑤였다. 그러니 결국 내기는 희명군이 따 놓은 당상이었다. “아!” 물을 잘금잘금 흘릴 때부터 공알을 무자비하게 문지르던 손에 세령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희명군은 양물을 손으로 꼭 쥔 채 움찔움찔 떠는 가엾은 나신을 뒤집어 제 위에 앉혀 놓았다. 아직 쾌감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는데. 그는 쉴 틈도 주지 않고 터질 듯 부푼 물건을 질구에 지긋하게 눌러 넣었다. “흐윽!” 교접 부위가 끝까지 맞물리자마자 세령은 저릿한 향락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다. 가쁜 숨을 헐떡이는 뺨을 가만히 쓸어 보던 사내는 땀에 젖어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조금 기다려 주는 듯하였다. 그러나 인내는 길지 않았다. 도저히 못 참아 주겠는지 그가 세령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강한 자극이 되어 세령의 몸이 펄쩍 뛰었다. 그 찰나에 내벽이 조여 희명군의 미간도 구겨졌다. “아, 아으, 흐…….” “하아……. 누이, 아우를 범한 게 그리 흥분돼?” “그, 그럴 리가 없…… 으읏.” “그럴 리가 없기는. 엉덩이 한 번 때렸다고 좆이 끊어질 것처럼 물어 대면서.” <27> 희명군이 손을 내려 세령의 공알을 문질렀다. “아!” 고작 그 자극이 채 가시지 못한 향락에 불을 붙였다. 별다른 것도 하지 않았는데 또 가벼운 절정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사내는 경련하는 몸을 외면하고 계속해서 음핵을 꾹꾹 눌러 대었다. 괴로울 지경으로 감당이 안 되는 쾌감에 세령은 허리를 비틀며 할딱였다. “아, 하으, 나리, 으응, 이상해, 이거 그, 그만…….” 허우적거리는 손으로 겨우 손목을 붙들어 자제시키려 하였지만 사내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령은 물이 뚝 떨어지기 직전의 눈망울로 희명군과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애원이 먹힐 것 같은 사내였으면 이런 짓도 하지 않았을 테지. “누이가 아무것도 안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이런 식이면 내가 만족하며 잠들겠어?” “흐으, 아, 알겠으니까, 손, 으응…… 손부터 놓, 으십시오!” 그의 손을 뜯어내듯 치우고 혹여 다시 뻗어 올까 봐 곧바로 허리를 흔드니 픽 웃음을 흘린다. “성깔하고는.” 희명군은 문득 발갛게 된 세령의 뺨을 앙 깨물고 싶단 생각을 하였다. 깔짝거리는 허리 짓이 영 마뜩잖긴 하지만 제 딴에는 한다고 하는 것인지 할딱이며 진땀을 빼는 게 제법 귀여웠다. 그는 충동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몸이 뒤로 기운 세령이 흐응, 깜찍한 소리를 내니 남근이 더욱 뻐근해졌다. 불현듯 극심한 기갈이 솟구쳤다. 교음을 흘리는 붉은 입술을 맛보면 당장에라도 파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밀어내겠지. 강제로 입술을 물어뜯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건 내키지 않았다. 타인에게 욕을 뱉고 날붙이를 들이미는 게 일상이었는데, 세령에게는 막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장죽 연기에 눈을 찌푸릴 때도, 통증에 헐떡일 때도 늘 외면하기가 어렵고 신경이 쓰였다. 막무가내로 굴다가도 그런 기색만 보이면 저도 모르게 주춤하게 되어 마음이 번잡해졌다. 이 여인에게만 이토록 너그러워지는 것은 다른 혼의 성질이 남아 있어서일까. 첫 정사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몸뚱이를 내어놓는 게, 자신이 종용한 일인데도 마뜩잖았더랬다. 왜 그리 순순히 치마를 걷느냐고 묻고 싶었다. 제게 들러붙던 기생들에게 느낀 그런 더러운 감정이 아니라, 미묘하게 가슴이 지끈대는 불쾌감이 치밀어서. 이게 정말 제가 아닌 다른 혼으로부터 기인한 감정이 맞나. 만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여인을……. 새삼스러운 생각에 조금 짜증이 난 희명군은 세령의 새하얀 둔부를 콱 쥐었다. 그러자 자신이 거칠게 쑤셔 박기라도 할 줄 알았는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하여튼, 장난치고 싶게 생긴 얼굴이라니까. “이제부터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릴 거야.” “네에?” “그러니 열심히 요분질해 봐, 누이. 나를 제대로 따먹어야지.” 킥킥 웃으며 뱉은 소리에 기함하는 얼굴이 황홀하다. 근래 이렇게나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희명군은 저도 모르는 새 세령과의 시간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지길 바라게 되었다. 하여 사내는 오늘도 제 욕심대로 여인의 밤을 점유하였다. * * * 따가운 햇볕. 최근 들어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다. 예전 같았더라면 일어나자마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확인하고 절망하고 체념하는 게 일과였을 것이다. 경대를 바라보며 유리 너머의 사내가 자신이 맞는지 하염없이 가늠하다가, 광증을 앓는 사람답게 말을 걸고 화를 내기도 하다가, 느지막이 무혁을 불러 활터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고 다시 잠들었겠지. 다음엔 며칠이 지나 있을까, 그사이에 또 이 손으로 죽인 사람이 몇이나 될지를 걱정하면서. 때로는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하였다. 한데 그토록 바라던 여인을 만나고 나니 밤이 오는 게 아쉽다. 잠에서 깨는 게 늘 지옥이었는데, 이제는 그놈에게 몸을 빼앗긴 채 영영 잠들어 버릴까 두렵다. 의식이 없는 사이에 그놈이 세령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도 걱정되었고. 그렇지만 이리 깨어나는 것은 세령일 다시 볼 수 있단 신호였으니 달갑기도 하였다. 휘언은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였다. 고작 세령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애 존재 하나만으로 눈두덩에 쏟아부어지는 햇살이 반가워질 줄은 보름 전까진 꿈에도 생각 못 하였는데. 오늘은 저잣거리에 나가 무얼 사 올까. 요즘 반가의 여식들은 혼인 전에도 귀여운 뒤꽂이를 옆머리에 달기도 하던데.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청혼인 양 건네면 놀랄 얼굴이 기대된다. 하나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주저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노리개를 새로 사다 줄까? 저번에 그리 속상해하였으니…….’ 몇 주 전 기억을 반추하던 휘언은 어느새 세령과의 첫 입맞춤을 더듬다가, 뜨거웠던 어제의 두 번째 접문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다시 닿아 보고 싶던 입술이었는데, 재차 포갠 살점은 몹시도 달고 중독적이었다. 바깥에서 남사스럽게 입을 맞추어 이번에는 정말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세령은 너그러이 받아 주었다. 그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정말 깨기 싫은 꿈. 공연히 간지러워지는 마음에 모로 누웠다가 반대로 몸을 튼 휘언은 손끝에 닿는 온기에 의아하여 부스스 눈을 떴다. 하도 세령의 생각을 하여 이제 헛것이라도 보이는 걸까. 끔뻑, 끔뻑,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감았다 뜨기를 한참, 그는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 이게 무슨…….” 제 몸에서 홑이불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미끈한 상체가 드러났다. 하초는 이불에 덮여 가려져 있었으나 나신일 게 뻔하였고, 한 이불 아래에는 있어선 안 될 사람이 함께 있었다. 휘언은 제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얼얼한 감각이 선명한 걸 보니 꿈이 아니었다. 찰싹, 소리에 움찔하는 작은 몸을 흔들어 보려던 그는 제 손이 돌연 끔찍해져 그러지 못하였다. “……세, 세령아.”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한 음성. 꿈결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세령은 휘언의 목소리에 뒤척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듯 보였다. 하나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무거운 눈꺼풀을 꼼질꼼질 들어 본다. “세령아…….” 한 번 더 이름을 입에 담는 목소리에 세령이 눈을 번쩍 떴다. 아랫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씹고 있는 휘언을 시야에 담은 눈동자는 상황을 가늠하는 듯 몇 번이고 슴벅거렸다. 그러다 삽시간에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헛숨을 들이켜며 상체를 홱 일으켜 앉았다. 흘러내리는 이불 탓에 울긋불긋한 나신이 드러나자마자, 휘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독점하고픈 욕심에 그놈에게 쪽지를 남긴 게 실수였던 걸까, 아니면 어제 자신이 입을 맞춘 게 문제였을까. 그놈도 자신일 거라 여겨, 무도한 짓을 저질러도 세령이 참아 주었던 건 아닐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니 정인의 표정조차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세령을 추궁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으며 제 이불을 끌어다 가녀린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그 앞에 사죄하듯 무릎을 꿇었다. 순흔과 잇자국이 가득한 나신, 다리 사이에 흐르는 정수. 다르게 생각해 보려 하여도 그놈이 또다시 세령을 범하였단 사실만 명확해졌다. 휘언은 헐벗은 세령의 몸을 가려 주고서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벌벌 떨었다. ‘설마 고작 하루가 아니라 수일이 지난 건 아니겠지.’ 달력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가위표는 고작 하나 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휘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세령이를 건들지 말라고 남겼던 서신. 한껏 구겨져 있는 그 쪽지 옆에 반듯하게 놓인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늦었어.> * * * [미안…… 정말 미안해, 세령아. 내가 또……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아, 아뇨. 저,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행랑채까지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죄책감에 사죄만 반복하던 휘언을 두고 세령은 도망치듯 귀빈채에서 뛰쳐나왔다. 휘언은 세령이 강제로 당했으리라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어쩌면 사과는 자신이 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를 깨우기 위해 다른 혼과 몸을 섞은 건 오로지 제 독단이었으니까. 못 볼 꼴을 보이고 나니 휘언은 어쩌면 처음부터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을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라면, 어린 시절 즐거웠던 일들만 곱씹으며 꿈결을 거니는 게 나았다고 여길 테니까. “하아…… 왜 그리 깊게 잠들어선…….” 그간 늘 새벽빛에 깨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안심한 게 잘못이었다. 희명군이 몇 번이고 제 허리 짓을 종용한 탓에 몸이 평소보다 더 피로하였나 보다. 날이 밝은 줄도 모르고 잤다. 쓰러지듯 마루에 주저앉은 세령은 한숨과 함께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장이 풀리니 그제야 허리가 뻐근한 건 물론이고 어젯밤 사내가 사정없이 내리치던 엉덩이도 얼얼한 게 느껴졌다. 세령은 욱신거리는 몸을 두드리다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시금 매만졌다. 그러다 머리끝에 걸린 영선의 댕기를 보고 낮게 탄식하였다. 이렇게 널브러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영선이 혹여라도 귀한 댕기를 팔아먹기 전에 되찾으러 가야 했다. 세령은 돈 몇 푼과 자신이 만든 가락지를 챙겨 영선을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그 애는 멀지 않은 반빗간 앞에서 다른 계집종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게 참말 그 야차 같은 나리가 네게 준 것이야?” “그렇다니까. 내 요즘 그분 심부름을 하잖니. 나를 좋게 본 것이지.” “수고의 의미라면 몇 푼 더 얹어 주면 그만인데, 왜 구태여 이런 댕기를 주셨대?” “그러게. 내게 마음이 있으신 걸까?” <28> “무어? 푸하핫! 마음? 영선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손 하나 까딱하면 세상 여인은 다 불러낼 수 있는 사내가 우리 같은 천것에게 마음을 품어?” “허! 은세령 그 계집도 끼고도는데 나라고 안 될 건 무어야?” “세령인 피부도 하얗고 곱상하게 생겼잖아. 지난번에 꾸며 놓은 걸 보니 꼭 반가의 여식 같던데.” “곱기는! 앙칼진 고양이처럼 사납게 생겨선. 사내들은 그런 얼굴 안 좋아해!” “사내나 만나 보고 그런 소리 하는 것이야?” “뭐, 뭣?” 제 동기들이 킥킥 비웃자 영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리고 걔가 무어 우리랑 같니? 사기만 안 당하였어도 양갓집에 시집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어쩌다 그리되어선…….” “뭐가 달라! 그년 어미도 기생인데!” “무어? 그게 참말이야?” “아, 그렇다니까!” “하지만 첫날 기생으로 오해받았을 땐 도화 님까지 나서서 부정하였잖아.” “왜겠어! 그깟 노인네 주머니 여럿 터느니 거물 하나 잡는 게 나으니까 그랬겠지! 도화 님도 그걸 분명 아시고…….” “영선아.” 반빗간 뒤편에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세령은 도저히 더 들어 줄 수가 없어서 계집종들의 말을 끊고 나섰다. 그러자 모여 있던 이들의 얼굴이 전부 사색이 되어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뭐, 뭐야. 언제 왔니? 도둑고양이처럼 엿듣고 있었던 게야?” 저를 두고 수군대던 말에 부아가 치밀어 이까지 갈렸으나 괜한 소란을 피워 눈요기가 되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리고 이런 뒷담화쯤은 남의 집에서 빌어먹고 살던 세령의 삶에 익숙한 것이었다. 해서 세령은 들끓는 마음을 꾹 누르고 덤덤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댕기, 돌려받으러 왔어.” 영선은 순간 당황해서 제 주위의 계집종들을 흘겨보았다. 하나 그도 잠시, 이내 뻔뻔하게 나왔다. “얘는 대체 뭘 돌려받으러 왔단 거야? 이건 내 것이야.” 본인이 떠들어 댄 말이 있으니 순순히 주리라고는 생각 안 하였지만, 이리 당당할 줄도 몰랐다. 세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영선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알잖아. 맡아 달란 거였지, 가지란 뜻은 아니었다는 거. 사례할게. 그러니 줘.” “허.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래. 너도 뭐, 비슷한 댕기라도 선물 받았니? 한데 잃어버려서 혼날까 봐 지금 이러는 거야? 나, 나도 그분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나도 그분한테 받은 거라고.”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제 분명 내가…….” “너야말로 왜 남의 걸 제 것인 양 빼앗으려 들어? 이거, 이거, 어미가 기생이라더니, 아비는 도적놈이었던 거 아니니?” 말이 전혀 통하질 않았다. 양친에 대한 비난도 서슴없었다. 지난밤 새벽까지 희명군에게 시달리다가 쪽잠을 자고 이곳에 온 터라, 세령은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하여 슬슬 인내에 한계가 왔다. “내놔, 그거.” 연초록 댕기에 손을 뻗었지만 영선이 한 발 더 빨랐다. 제 친우들 뒤로 쏙 몸을 숨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어머머! 탐욕에 눈이 멀어 내 머리채까지 잡을 기세구나? 하긴 네가 애초에 욕심이 없었으면 귀빈채에 들락거리지도 않았겠지!” “얘, 세령아. 영선이 말이 다 사실이니? 네 어미가 기생이었단 거 말이야.” 무어라 지껄이든 무시하려 하였는데, 이제는 하다 하다 관련도 없는 다른 계집종까지 거들기 시작하였다. “그게 뭐 어쨌다고.”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하나 뒷담화에 걸려 긴장하던 계집종들은 이를 긍정이라 받아들이고 조소를 띠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기생 밑에서 허드렛일하는 처지에 그 누구보다도 기생을 업신여긴다는 게. “하면 예 팔려 온 첫날엔 왜 그랬어? 몸 파는 기생이 아니라고 펄펄 뛰었잖아.” “그러게. 도화 님이 하도 싸고돌기에 얼마나 대단한 계집인가 하였더니. 고작 사람을 가려 가며 치마를 걷는 것뿐이었잖아?” 묘원각으로 돌아온 날, 세령을 기생이라 오해해 덮치려던 사내로부터 구해 준 건 도화였다. 몸을 파는 여인이 아니라 가락지를 만들어 팔 것이라고, 행수 어른에게 지낼 방까지 따로 청해 주기도 하였다. 묘원각에서 가장 서열 높은 기생이 감싸고돌았으니 함께 행랑채에 지낸대도 하인들은 어느 정도 세령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 도화 덕에 세령이 안전한 생활을 하였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그 사실은 결국 누군가에게는 시기와 질투 거리로 느껴졌을 테지. 본인과 비슷하거나 나은 처지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업신여겨도 괜찮은 존재란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배신감과 그에 대한 혐오는 본디 더 거대해지는 법이었다. “댕기, 돌려줘.”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예서 큰소리를 내었다가는 다른 하인들까지 불러 모아 일이 커질 게 뻔하였다. 하여 세령은 계집종들이 제게 쏟아붓는 비난을 애써 외면하였다. 그러나 가만있으니 허튼소리를 전부 긍정이라 여긴 걸까. 영선 무리는 점점 세령에 대한 의혹을 저들끼리 진짜인 양 떠들기 시작하였다. “쟤 정말 뻔뻔하지 않니? 알고 보니 우리 모르는 사이에 저런 식으로 다른 애들에게 귀물을 빼앗은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머, 그러고 보니 그때 희명군 나리께서 실수로 쟤 방 앞에 패물을 둔 적이 있잖아! 그거 설마 자기가 훔쳐 놓고 나리를 속인 거 아니야? 어떻게든 접점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수작 부린 것 아니냐구.” “맞네. 그 귀한 것들을 방 안에 들이지도 않고 구태여 보란 듯이 마루에 내버려둔 연유가 무어겠어?” “이거 완전 여우 같은 계집이네. 너 그것들은 어찌 훔쳤니?” 해명할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설명한다 한들 믿을 것 같지도 않았고. 해서 세령은 대꾸하지 않고 영선에게 달려들었다. 하나 곧장 계집종들에게 앞이 막혔고 누군가에게 밀쳐졌다. “돌려줘!” “저리 안 꺼져?” “읏……!” 포기를 모르고 도로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는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밀쳤다. 안 그래도 밤새 학대당한 몸은 쉽게 무너졌다. “더러운 게 어딜 만져?” 다시 일어서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낯선 손이 뻗어 와 세령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웅크린 등을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아프고 서러웠다. 하나 댕기까지 빼앗기면 휘언이 정말로 슬퍼할 것 같아서, 포기가 아니 되었다. “돌려 달라니까!” 이를 악물고 일어나 제 주위를 둘러싼 계집종들을 죄 밀치는데, 짜악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순간 눈앞에서 별이 번쩍 튀어, 세령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얼한 뺨의 감촉이 느껴진 건 그 뒤였다. “흥. 뻔뻔한 계집애 같으니!” “천박한 것! 주제를 알아야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억울한 마음이 울컥 치밀었지만 울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세령은 뺨을 감싸 쥐고 입술만 잘근거리며 제게 쏟아지는 경멸을 감내하였다. 그때, 지척에서 엄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 하는 짓들이냐!”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계집종들은 히익, 소리 내며 주춤주춤 세령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곧장 향기로운 꽃 내음이 세령의 주위를 둘러쌌다. “세령아. 괜찮은 것이야?” 단정한 차림새와 꽃향기. 눈앞의 사내는 휘언이었다. 홧홧한 한쪽 뺨을 덮는 커다란 손은 더 기대고 싶을 만큼 시원하였다. 아침엔 넋을 잃을 정도로 망연자실해 있기에 오늘은 더 보기 어려울 줄 알았거늘, 다행히 금방 털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는 엉망이 된 세령의 얼굴을 살피며 당사자보다도 더 아픈 얼굴을 하였다가, 이내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고 계집종들을 노려보았다. 삽시간에 뿜어 나오는 냉기에 세령도 움찔 떨었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는 것이냐.” 그저 일어섰을 뿐인데도 사내에게선 숨 막히는 위세가 느껴졌다. 계집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 나리.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다? 그걸 알면서 행하였으니 목이 날아가도 불만은 없겠지?”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나리!” 제게서 등을 진 모습에 일순 8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죽은 어미들 앞에 서 있던 소년. 전혀 다른 상황인데도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대체 왜 그랬지?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그때, 유독 덜덜 떨고 있는 영선이 휘언의 시야에 들어왔다. 맞잡고 있는 두 손 안에 고이 담긴 땋은 머리와 연초록빛 댕기도. 이미 사납던 눈빛은 그 순간 뭐라도 찢어 죽일 듯 살벌해졌다. 혹, 혼백이 어지러워 갈라진 혼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는 걸까. 휘언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심상찮은 살기가 그에게서 뿜어 나오니 세령은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휘언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제가 알던 모습이 아닌 것 같던 선득한 느낌. 갈라진 혼은 한 몸을 차지하려 다투기도 한댔는데, 설마 작금 다른 혼이 휘언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는 건 아닐까. <29> “꺄아악!” 세령이 혼란에 빠진 사이, 사내는 성큼성큼 걸어가 주저 없이 영선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 비명에 세령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댕기, 어디서 났느냐.” “나, 나리!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 “주웠느냐?”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저…….” 머리채가 잡힌 탓에 엉거주춤 선 영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자신이 지껄인 말이 있으니 어찌 해명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하면 빼앗았느냐?” “그, 그것이…….” “변명도 아니 하는구나.” “컥!” 답할 새도 없이 휘언의 커다란 손이 영선의 목을 틀어쥐었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만 보아도 당장 목을 부러뜨릴 기세였다. 기겁한 세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쳐 죽여도 시원찮을 것. 감히 너 따위가 뭔데…….”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세령은 황급히 달려가 휘언의 팔에 바짝 매달렸다. “나리! 아니 됩니다! 그만하십시오!” 세령의 외침 한 번으로 휘언은 멈칫하였다. 낑낑대며 팔을 뜯어 놓으려는 세령을 내려다본 그는 잃었던 이성을 되찾은 듯 단숨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커헉…… 허으…….” 영선이 캑캑거리며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리자, 주위에 있던 계집종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부축하였다. 하나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오로지 세령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 아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굳어진 채로. “괜……찮으십니까?” “…….” 사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 조심스레 묻자, 그가 후회막심한 듯 세령의 눈치를 보다가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피로한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온갖 감정을 애써 눌러 삼키는 듯 턱뼈도 불거져 있었다. 아침에 그런 꼴을 보고 저를 찾으러 올 때까지 얼마나 무수한 고민을 하였을까. 기껏 마음을 다잡았는데 이런 일에 휘말렸으니, 또 어찌나 당혹스러웠을까. 세령은 난장판이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란에 달려온 하인 여럿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고 휘언은 장승처럼 그저 우두커니 서 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 연이으니 세령은 피곤함이 노도처럼 몰려드는 걸 느꼈다. 휘언 또한 지쳐 보였고. 하여 세령은 그도 자신도 지금은 좀 쉬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나리,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냥 가요.” “……괜찮다고?” 붉어진 한쪽 뺨,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매무새를 내려다본 사내는 눈을 찡그리며 본인이 더 속상한 얼굴을 하였다. “예. 댕기는 제가 잃어버린 것이 맞으니 어떻게든 찾아 놓겠…….” “되었다. 이미 남의 손을 타 더럽혀졌으니 개가 물어 간 셈 쳐. 이만 가자.” 휘언은 훌쩍이는 영선을 무섭게 노려보고는 세령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행랑채 가장 안쪽에 있는 세령의 방까지 숨 가쁘게 걸어 들어왔다. 세령을 마루에 앉혀 놓고 연고를 찾아온 사내는 입을 꾹 다문 채 상흔을 돌봐 주었다. 한껏 좁아진 미간이 할 말은 많지만 참는 듯 보였다. 세령은 그런 사내를 흘끗거리며 방금 일어난 일을 되짚었다. 분명 눈앞의 사내는 휘언이 맞다. 한데 모든 게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눈을 번득이며 영선의 목을 조르고 험한 말을 씹어뱉던 낯선 모습. 그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혹 자신이 희명군을 휘언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리 없건만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그래도 어색한 적막이 눈치 보였던 터라 세령은 슬그머니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어, 나리. 화나셨습니까?” “……지금 내 기분을 묻는 거야?” “귀한 댕기를 잃어버려 화가 나셨나 하여…….” “뭐, 댕기?” “…….” “그래 화났다. 한데 그것 때문이 아니야.” “하면 무엇 때문입니까?” “그깟 댕기, 망가지고 잃어버려도 새로 사면 그만이다. 수십 개는 더 사 줄 수 있어. 한데 너는…… 그게 아니잖아.” 휘언은 울컥한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늘 마음만 먹으면 널 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 한데 구태여 그러지 않았던 건, 네가 나 같은 놈이랑 멀어지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내 주변에는 나를 죽이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혹여 네가 그자들의 먹잇감이라도 될까 봐, 나라는 위험에서 멀리 두고 싶었어.” “…….” “해서 잘살고 있을 줄 알았다. 나와 떨어져 있으니 괜찮으리라 여겼다고. 한데 핍박당하고 깨져도 어쩜 그리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어찌 그리 덤덤해. 나를 떠나고선 어찌 살았기에…… 너보다 댕기 따위를 걱정해. 내가…… 내가 너한테 몹쓸 짓까지 하였는데도 어찌 내게 괜찮냐고 먼저 물어.” 세령에게 우선순위는 늘 남의 시선이었다. 타인의 집에 얹혀살아온 터라, 혹여 어머니나 저를 거둬 준 외숙에게 폐가 될까 봐 눈치 보던 게 익숙한 삶이었다. 그러니 저조차도 진짜 제 마음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한데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는 말에 코끝이 찡했다.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는지 세령을 담은 사내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마주한 감정에 동하였을까. 세령 또한 공연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릴 적에, 당신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런 것이었지. 아무런 쓸모를 보이지 않아도 내 곁에 남아 줄 것 같은 유일한 사람이라서. 이럴 땐 어찌해야 하는 걸까. 그의 품에 안겨 울어야 할지, 그를 품에 안고 보듬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리가……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내가?” “네. 아니 그래도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시는 분께 저까지 불필요하게 짐을 얹고 싶지 않았어요.” “짐이라니. 너는 내게 그런 존재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일까 봐 내 얼마나 전전긍긍하는데.” “같은 마음입니다. 저 때문에 나리가 해를 입거나 마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해서 괜찮다는 말을 한 것이고요.” “…….” “그리고 아주 거짓도 아닙니다. 혼자가 아니라 나리가 있어서…… 괜찮았어요. 정말로요.” 세령의 말에 씨근대며 울분을 토하던 사내의 숨이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눈치를 보더니 아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미워하지 마.” “제가 나리를 왜 미워합니까.” “아까 그런, 폭력적인 모습 보여서. 그런 거…… 싫어하잖아.”   세령에게서 나올 답이 두려운지 그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세령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으로 나리가 싫어지지는 않습니다.”   “……참말이야?” “네.” “위로해 준답시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참말이에요.” 그제야 제 말을 믿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옅은 한숨을 쉰다. “……미안해. 그런 꼴 보여서. 어젯밤 일도 그렇고.” 그는 다른 혼이 한 짓까지 사과하였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에 공연히 죄책감이 들었다. 실은 당신과 희명군은 다른 이나 다름없다는 걸 안다고, 그 추한 광경엔 제 의지도 있었노라고 털어놓고 싶었다. 하나 진실을 알게 된다면 휘언은 더욱 괴로워할 게 뻔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만든 것 또한 본인 탓이라 자책하며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고. “사과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네게는 자꾸 사과만 하게 되는구나. 너는 늘 괜찮다고만 말하고.” “정말 괜찮…….” “세령아, 이건 그냥 묻는 말인데.” 낙담한 낯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았는데, 돌연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너는 난폭하게 구는 사내보다 점잖은 사내가 좋은 것이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대답해 줘.” “구태여 따지자면 그렇……지요?” 어찌 보면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었는데, 세령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눈에 띄게 안도하였다. “그러니까, 너를 다치게 하는 사내보다 애지중지하는 사내가 더 좋은 것이잖아. 그렇지?” “어…… 예, 무어…….” “나 같은 사내 말이야.” “예? 아니, 뭐…….” 뜬금없는 소리에 세령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휘언이 초조해하며 세령의 손을 끌어가 제 양 뺨에 꽃받침 하듯 대었다.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 “세령아, 아무리 뻔뻔해도 이런 질문은 쉬운 게 아니야. 나 부끄러워. 얼른 대답해 줘.” “맞…… 맞아요. 맞다는 뜻이에요.” 교태를 부리는 사내에게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얼결에 동조해 버렸다. 한데 그 대답으로 놀리거나 기뻐할 것 같던 사내는 한시름 놓은 얼굴을 세령의 손에 묻고 웅얼거렸다. “그럼 되었어. 그거면 돼…….” 설마 갈라진 혼을 비교한 거였나. 희명군과 정사를 나눈 흔적을 두 번씩이나 들켰으니, 제 마음이 그쪽으로 향하였을까 봐 염려하는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도 제 마음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니. 손바닥을 간질이는 촉촉한 눈꺼풀이 그의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30> “나리.” “응?” 세령의 부름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들고 어여쁜 눈망울을 끔뻑였다. 주인에게 잘 보이려 아양 떠는 모양새였다. “솔직히 말하면요. 아까 조금 놀라긴 하였습니다. 평소의 나리 같지 않아서요. 그렇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이성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달리 대처하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은 의원이 아니니 그를 고칠 방도 따위는 모른다. 그렇지만 세령은 부디 휘언이 희명군의 혼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의원님은 혼 하나가 죽어야만 병이 낫는 것 같다고 하였지.’ 사라지는 것은 필시 휘언이 아니라 희명군 쪽이어야 했다. 해서 휘언이 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까 말했듯이 저는 난폭한 사내보다 점잖은 사내가 더 좋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내는 줄곧 당신이었다고. 그러니 다음에는 부디 몸을 쉽게 내주지 말라고. 그런 뜻으로 휘언을 북돋우려던 것이었는데…… 의도와 달리 사내의 얼굴은 어쩐지 잿빛이 되어 갔다. “놀랐…… 놀랐구나. 그렇지. 그럴 수밖에. 난폭한 모습도…… 보기 힘들었겠지.”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제 말뜻은…….” “미안해. 그리 이성을 잃어선 안 되는 건데. 네가 무서워할 걸 먼저 떠올려야 했는데…….” 말을 잘못한 것일까. 어째 계속 대화할수록 사내는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는 듯하였다. 하나 제가 뱉은 말을 곱씹어 봐도 어디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하여 세령은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말을 돌렸다. “저, 나리. 그 일은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시고, 다른 이야기 해요. 저 나리와 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하고 싶은 거?” “예. 내일 함께 저잣거리에 가요. 장이 선답니다. 가면 맛난 주전부리가 많을 거예요. 유과나 깨엿도 있고 또…….” “여전히 단 걸 좋아하는구나.” “무어, 그것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당패 공연도 보고 저, 댕기도 사고요. 이건 영선이가 쓰던 거라서…….” 잿빛 댕기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입매를 휘자, 휘언도 그제야 싱겁게 웃는다. “그래. 그러자.” 그의 수락에 세령은 안도하며 덩달아 웃음 지었다. 이제는 희명군과 정사를 나누다 먼저 혼절해 버리면 어떻게든 깨워서 돌려보내 달라 청해야겠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령은 그리 다짐하며 그날도 희명군의 부름을 기다렸다. 한데 희한하게 영선과 무혁, 그리고 그 어떤 누구도 그날 밤에 세령을 찾아오지 않았다. * * * 창에 들이닥치는 햇볕에 눈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킨 사내는 이내 킥킥 웃음을 흘렸다. “이놈이 또 밤을 새웠구나. 몸을 내어 주기 싫어서.”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니 가위표가 하나 늘어 있었다. 한데 그 앞에 둔 쪽지에는 그 어떤 경고도 청도 쓰여 있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며칠을 독점하였으니 하루 정도는 쉬이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긴 모양이지. 희명군은 습관처럼 장죽을 끌어당겼다가 문득 재미난 생각을 떠올리곤 도로 내려놓았다. “무영. 게 있느냐?” “……예, 나리. 무혁입니다.” 또 이름을 틀렸던가. 이 몸을 차지한 혼이 제 친우가 아님을 눈치챘는지 답이 한발 늦었다. 그렇다 한들 하루 이틀도 아닐진대. 떨떠름한 반응이 수상하였다. 저놈 또한 하루쯤은 몸을 빼앗기지 않을 줄 알았나 보군. 대체 왜. 무슨 즐거운 작당을 하려 했기에. 눈치 빠른 희명군의 입꼬리가 흥미롭게 비틀렸다. “들어와 보거라.” “예.” 무혁이 문을 열고 가볍게 묵례하였다. “오늘 중한 일정이 있던가?” “저자에 나가신다고 하였습니다.” “저자에는 왜.” “그게…… 가기로 약조하셨다고…….” “누구와. 은세령?” “예.” “흠. 여인과의 약조를 저버리면 참된 사내가 아니지. 아니 그런가?” “…….” “채비하지.” 무혁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으나 그럴수록 희명군이 더 짓궂어질 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해서 곧장 사내종을 불러 외출 준비를 도우라 명하였다. 치장하고 경대에 얼굴을 비춰 본 사내는 제 모습이 꽤 봐 줄 만한지 만족스럽게 입매를 둥글렸다. 무복이나 침의가 아닌 비단 도포를 걸치고 갓을 쓰니 사대부가의 곱게 자란 도련님 꼴이었다. 늘 지니던 검을 차지 않아 허전하였지만 속여 먹을 얼굴을 떠올리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답답하게 여민 옷깃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갑옷보다는 가벼운 편이니 좀 참는 수밖에. 희명군은 그렇게 한참 동안 제 외양을 손보다가 약조한 시간이 되었다는 무혁의 말에 행랑채로 향하였다. “이 너른 묘원각에 다 네 얘기뿐인 거 알아?” 함께 나가기로 하였으니 시간 맞춰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세령은 누군가와 있는 모양이었다. 안대문을 넘자마자 두런두런 말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아직 제가 도착한 줄은 모르는 것 같기에 희명군은 더 다가가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네가 그 무시무시한 묘원각 주인에게 꼬리를 쳐서 팔자가 폈대. 물론 영선이 그 계집애가 제 입맛대로 떠들어 댄 것도 있겠지만, 대체 어쩌려고 그래? 희명군이 얼마나 위험한 사내인지 몰라?” “알아. 아는데, 나리가…… 어머니를 죽인 자를 아는 것 같아.” “……뭐?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 “자세히 말해 준 적은 없지만,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그러니 가까이 지내면서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너 미쳤어? 당장 그만둬!” “아야!” 찰싹 때리는 소리에 희명군은 무심코 미간을 구겼다. “네가 8년 전 사건만 엮이면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건 알아. 하지만 희명군은 안 돼. 지금은 무슨 변덕으로 곁에 사람을 두는지 모르겠지만, 너 착각하지 마. 흥미가 떨어지면 분명 네 목숨줄 갖고 휘두를 거야.” “나 참말 괜찮아, 언니. 일단은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잖아.” “바보야, 네가 뭘 모르니까 그런 거야!” 도화가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세령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언니는 무얼 아는데? 나리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어?” “……뭐?” “아니, 그렇잖아.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방에 처음 들어간 날, 아무나 부른 게 아니라 언니를 알고 부른 것 같았어.” “내, 내가 예서 가장 오래된 기생이니 이름을 들어 본 것이겠지.” 두 여인의 대화를 엿듣던 희명군은 도화의 볼품없는 변명에 코웃음을 쳤다. 그날, 도화를 부른 건 특별한 연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귀한 객들에게만 들어가는 은밀한 약재를 도화가 관리하고 있으니, 진통약을 더 가져오라 명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늘 그랬듯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필 무혁도 자리를 비운 터였다. 해서 누구나 아는 특징을 거론하였다. 묘원각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기생. 그게 세령이 귀빈채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을 거론한 게 아니라 춤에 가장 소질 있는 자를 불렀는걸? 해서 내가 가겠노라 말할 수 있었던 거였어.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리께서는 언니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하아……. 그래, 맞아. 내 객이야. 한데 알잖아. 뭘 안대도 윗사람에 대해선 섣불리 말 못 한다는 거.” “하면…… 이전에 내가 물어봤던 사내아이 말이야. 그게 나리인 것도 알고 있었어?” “…….” “……역시 알고 있었구나. 나리가 엮여 있으니 여태 내게 아무 말도 안 해 준 거였어.” “세령아. 그러니까, 제발! 그 사내와 가까이 지내지 마. 정황만 보아도 네 원수일진대 어찌 자꾸 곁에 두려고 해. 그러다 너까지 죽는다니까!” 하, 희명군이 소리 없이 조소를 흘렸다. 세령과 저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수작이 괘씸했다. 기실 희명군이 세령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건 아니었다. 이휘언이 빌빌거리면서도 애타게 그리던 여인인지라, 이 몸을 차지하는 데 변수가 될 거란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해서 무혁도 모르게 주시하고 있었더랬다. 한데 무슨 이유인지 도화는 세령을 제게서 자꾸만 떨어뜨리려 한다. 아끼는 이가 광증을 앓는 사내와 가까이 지내는 게 그리도 껄끄러운 것인가. 어미들이 죽게 된 진짜 정황도 모르는 주제에. 그는 어금니를 으득 씹으며 담장 너머를 싸늘하게 응시하였다. 본시부터 저를 경계하는 줄은 알았건만 쓸데없는 짓을 하였다. 세령의 혼인을 중매하던 매파에게 손을 뻗쳐 묘원각으로 데려온 사람이 자신이거늘. 그 당시, 중매쟁이들이 혼기가 찬 여인들을 팔아넘기는 사기 행각이 만연하였던 탓에 세령 또한 피해자가 될 뻔하였다. 원래도 웬 다 늙은 영감에게 시집가기로 되어 있던 걸 사기까지 당해 질 떨어지는 기루에 갈 운명이었는데, 그가 가로채 묘원각에 붙여 놓았다. 희명군은 당시에 자신이 왜 세령을 구제하였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신경이 쓰였고 데려다 놓으면 까닭을 알게 되겠거니 하였을 뿐. 그러나 지금도 그는 왜 이렇게까지 세령에게 끌리는지 명확한 까닭을 몰라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권태롭기만 한 일상 속 유일하게 자극이 되는 존재라 그러한가. 도도한 고양이처럼 생겨서는 쓸데없이 다정하고,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휘언 얘기만 나오면 불나방처럼 달려드니 자꾸만 건들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든다. 세령과 있으면 이토록 알게 모르게 마음이 번잡해졌다. 희명군에게 세령은 본인의 광증만큼이나 이상한 존재였다. 그러니 외면하기 어려울 수밖에. <31> “나도 처음엔 많이 경계하였는데, 소문만큼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정황만 보면 의심스럽지만, 아무래도 진범은 나리가 아닌 것 같아. 그렇다 할 증좌는 없지만…….” “뭐? 너 진짜……! 아, 아무튼, 그 사내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불러도 모르는 체하란 말이야.” “내가 뭐 거절할 수 있는 위치인가.” “왜 못 해! 네가 수많은 희생자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 걸 모를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나 보군.” 이쯤 되니 입을 막아야 할 듯하여 희명군이 도화의 말을 끊었다. 그를 발견한 도화는 헛숨을 들이켜며 주춤 뒷걸음질하였다. “나, 나리. 오셨습니까?” “둘이 나가는 줄 알고 기대하였는데 불청객이 있구나. 그게 아니면 내 오늘 동행인을 전달받지 못하였던가?” “아……. 아닙니다. 언니는 잠시 들른 것입니다.” 희명군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도화는 무슨 다짐을 한 것인지 돌연 세령을 제 뒤로 숨겼다. “세령이를 놔주십시오, 나리.” “놔주다니, 무얼? 여태 붙잡고 있던 건 네가 아니었나.” “이 아이는 기생도 아니고 그저 가락지를 만들어 파는 상인일 뿐입니다.” “안다. 단 한 번도 기생이라 생각한 적 없어.” “한데 왜 매일 밤 처소에 불러들이십니까.” “내가 네게 그 이유를 말해야 하는 건가?” “그건…….” “주제넘다는 건 알고 있겠지?” 서슬 퍼런 시선에 도화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압니다. 한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그저 유흥 거리로 삼으시는 거라면, 저는 이보다 더 분수에 맞지 않은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언니! 왜 말을 자꾸 그렇게 해.” “넌 가만히 있어.” 희명군의 입에서 저항 없이 실소가 터졌다.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묘원각에서 가장 오래 버틴 기생답게 배짱이 좋았다. 마음 같아선 건방진 입을 찢어 주고 싶었지만, 곁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세령 탓에 사내는 비아냥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입매를 둥글게 올렸다. “다 자란 동생 걱정은 이쯤하고 가서 네 낭군과 놀지 그래. 내 오늘은 중한 약속이 있어 그자에게 자유를 준 참이거든. 상관인 나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자라 흔치 않은 기회일 터인데, 귀한 시간을 이리 낭비할 셈인가?” “상관? 어? 언니, 설마…….” “아, 아니! 대뜸 그걸 말씀하시면…… 아니, 세령아, 그게…….” 세령은 도화의 연애 소식만 알고 사내가 누구인지는 처음 들은 듯 놀란 눈치였다. 도화 또한 이렇게 밝힐 생각은 아니었는지 당황하였고. “아직도 안 갔나?” 썩 꺼지지 않고 무얼 하냐는 눈빛을 보내자, 끝이 올라간 도화의 눈매가 더욱 표독스러워졌다. “……갈 것입니다. 한데 나리, 염치 불고하고 한 가지만 청하여도 되겠습니까?” “들어 보고.” “세령이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가 입을 열기 전에 나리가 먼저 모든 걸 털어놔 주십시오.” “…….” 이 계집은 제 광증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세령 앞에서 내숭은 그만 떨고 미치광이의 본성을 드러내란 뜻일 거다. 이미 저 아이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대단한 비밀인 양 약점처럼 쥐고 흔들려 하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하였지. 역시 교만한 주둥이를 진작 찢어야 했다. “하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어…… 언니!”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 세령아.” 혹여 험한 말이라도 나올세라 희명군이 입을 꾹 다문 사이, 도화는 세령에게 다음을 약속하곤 황급히 떠났다. “나리, 진짭니까?” “음? 무엇이?” “도화 언니와 만나는 사내가 무혁 나리였습니까?” 아, 그놈 이름이 무혁이었지. 순간 생각이 안 나서 대충 낭군 같은 개소리로 얼버무렸는데 잘한 듯싶다. 안 그랬으면 진작 정체를 들켰겠지. 한데 은세령은 왜 저번부터 자꾸 그 새끼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지. “아직도 몰랐어?” “허어, 금시초문입니다. 설마 저만 모르고 있던 건 아니겠지요?” “흠……. 나를 목전에 두고 자꾸 다른 사내에게 관심 보일 거야?” “어엇, 그런 거 아닙니다!” “못 믿겠는데. 이 조막만 한 머릿속에 든 흠모하는 이가 누구일지 내 어찌 알아.”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나리야말로 제게 숨기는 거 있으시면서…….” “내가?” “아까 도화 언니가 뭘 털어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음……. 당최 무슨 말인지 아까도 이해 못 하였어. 내가 널 꽤 오래 가슴에 품었다던가, 그런 걸 이야기하는 건가?” “아, 아잇……. 괜히 여쭈었습니다. 얼른 가기나 하시지요.” 낯간지러운 휘언의 말투를 흉내 내려니 여간 토악질 나오는 게 아니었다. 하나 정사를 나눌 때와는 달리 경계심을 풀고 조잘대는 입술이나, 겸연쩍게 뺨을 붉히는 모습은 제법 볼만했다. 더한 즐거움을 위해 이 정도는 인내하여야겠지. 부자연스럽게 앞서는 세령을 따라가며 희명군은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소매로 감추었다. * * * 장날이라더니 저잣거리는 이 땅에 사는 이들이 모두 몰려든 듯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희명군이 기억하는 삶에서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 있던 적은 전장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무기도 없이, 적의도 없이 제 몸을 치고 가는 자들이 여간 생경한 게 아니었다. 군중 사이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해서 그는 세령을 따라가다 말고 번잡한 거리 한가운데서 길 잃은 아이처럼 멀뚱히 섰다. 길잡이를 놓친 것도 모른 채, 그렇게 한참을 멀거니 있었다. “나리!” 따라오던 기척이 사라진 걸 알아챈 세령은 뒤늦게 길을 되돌아 희명군에게 달려왔다. 낯선 이들 사이에서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이 보이자 그는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수많은 이들 사이에 오로지 저 아이의 얼굴만 등불이라도 켠 양 밝게 보이는 연유가 무엇일까. 반가움, 그 이상의 감정이 전신을 장악하여 그는 드물게 혼란스러워졌다. 쿵쿵, 심장까지 돌연 빠르게 뛰었다. 세령이 코앞에 섰을 때도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였다. 혹여 삿된 것에 홀린 건가 싶어, 사내는 손을 뻗어 뛰느라 발갛게 된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작은 체구가 움찔한다. “아니 오시고 예서 무엇 하십니까? 놀랐습니다.” 손을 뿌리칠 줄 알았거늘, 세령은 되레 뻗어 온 손등을 감싸 쥐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어여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놈에게는 늘 이랬겠구나.” “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중얼거린 말은 다행히 소란스러운 장사치들 목소리에 숨겨진 모양이었다. 해서 희명군은 무섭게 솟구치는 거북함을 누르고 다시금 사람 좋은 얼굴을 꾸며 냈다. “번잡하여 잠시 어지러웠던 모양이야.” “많이 안 좋으십니까? 하면 그냥 돌아가야…….” “이제 괜찮아.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 마.” “……그럼, 혹시 모르니 손을 잡고 다닐까요?” “손?” “다, 다른 뜻은 없고! 혹여 또 현기증이 일어 쓰러지셨는데 제가 못 알아챌 수도 있으니까요!” 퍽 귀여운 수작을 부리는구나 싶었지만, 희명군은 한편으론 거북함을 느꼈다. 이 모든 게 제가 아닌 다른 사내를 향한 마음이었으니. 그러나 기분이 나쁘다고 거절하기에는 너무도 달곰한 제안이었다. “그래. 내 쓰러지면 걸인 꼴이 될 터이니 이러고 가자.” 희명군은 샐쭉하게 웃으며 손깍지를 꼈다. 진달래 빛으로 물드는 뺨에 당장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세령은 무에 그리 부끄러운지 고개를 홱 돌려 앞서 나갔다. 그는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동그란 뒤통수를 하염없이 응시하였다. 정수리에라도 좋으니, 어디든 제 입술을 붙여 보고 싶었다. “어! 나리, 댕기입니다.” 조금 걷다 말고 세령이 대뜸 제 손을 당겼다. 순순히 따라가니, 제대로 된 상점도 아닌 가판대에서 파는 댕기를 구경하고 있다. 희명군은 세령의 땋은 머리를 슬쩍 흘겨보았다. 별 거지 같은 색의 댕기를 드리고 있는 게 본인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희명군의 눈에는 가판대 위의 댕기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런 곳 말고 방물장수를 부르는 게 더 나을 듯한데.” “제가 반가의 여식도 아닌데 무슨 방물장수까지 부른답니까? 전 여기 있는 것도 좋습니다.” 묘원각 기생들도 반가의 여식이 아니지만, 방물장수를 불러 화려한 머리 장식을 잘도 하고 다니던데. 얘는 왜 취향이 이 모양인 걸까. 정말 저게 좋아 보이나. 다 같은 여인이래도 모두가 안목이 좋은 건 아닌가 보다. “내가 골라도 되겠지?” “그리해 주시겠습니까?” 세령의 눈썰미를 의심한 희명군은 아무렇게나 놓인 댕기들을 휘적거리며 최대한 멀쩡한 것으로 골라 보려 하였다. 그러다 고른 것이 연초록빛 댕기였다. “이건 어때.” “아…… 이건…….” 촌스러운 색 중에서 그나마 고르고 고른 게 이것이었다. 한데 취향이 아닌지 세령은 우물거리며 말을 아꼈다.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같은 연초록색을 하면 영선이 가져간 것과 겹쳐서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영선?” 그게 누구더라. 계집종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하였다. 한데 그 계집과 이 연초록 댕기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32> “아, 그, 어…… 그러니까, 무혁 나리 심부름하던 아이 이름입니다. 어제 나리께서도 보셨던…….” 희명군은 그제야 계집종과 휘언, 그리고 세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였다. 여지껏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 상관 없었는데, 세령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이 알 수가 없고 캐물을 수도 없다 생각하니 돌연 기분이 나빠졌다. 휘언인 척하지 말 것을 그랬나. 그랬더라면 마음 편히 세령을 만지고 억지로 답이 나오게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나 그랬더라면, 적개심이 사라진 저 커다란 눈망울이 얼마나 어여쁜지, 조잘대는 입에서 나온 음성이 어찌나 고운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댕기를 도로 가판대에 내려놓고 세령의 손에 다시금 깍지를 꼈다. “음……. 여긴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데 더 둘러볼까?” “어…… 네.” 세령은 순순히 답하였다. 하나 희명군의 기분이 급격히 저조해진 걸 알아챘는지, 그 이후부터는 댕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먹는 데 눈을 돌렸다. [나리, 깨엿입니다! 하나씩 사 먹을까요?] [나리, 저 집 빈대떡이 그리 맛나다던데 하나만 사서 나눠 먹을까요?] [약과요? 그건 너무 값이 나가서……. 어어,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쳐다만 본 것인데……!] 제 아래 깔려 앙알대거나 대거리하는 모습만 보아서 그런가. 삐쩍 말라서는 끝도 없이 입에 뭘 넣어 대는 것도, 고소한 기름내와 단내에 쉬지 않고 고개가 돌아가는 것도 참 생소한 광경이었다. 저런 싸구려 주전부리가 무에 그리 맛나다고 환장하는지. 하나씩 입에 넣어 봤지만 몰래 뱉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한데 신나서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군침이 돌고 입술째 삼켜 버리고 싶은 욕구까지 들었다. [접문은…… 하기 싫습니다.] 별안간 세령이 뱉었던 말을 떠올린 희명군은 기분이 상했다. 당시에는 별 희한한 정조를 고집한다고 비웃었는데, 원하는 걸 갖지 못한단 생각에 아이처럼 골이 났다. 그러든 말든 세령은 또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리! 저기서 사당패 공연을 하나 봅니다! 얼른 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공연을 보는 사람들과 융화된 세령을 응시하면서, 희명군은 처소로 돌아가 저 말간 낯을 어찌 골려 줄지 고민에 잠겼다. 하나 공연을 보는 얼굴이 즐거움으로 가득 찼을 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랬다. ‘드디어 미친 것인가.’ 쿵, 쿵, 심장 뛰는 소리가 그 어떤 꽹과리 소리보다, 군중의 웃음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낯 뜨겁단 말이 어떤 뜻인지 그제야 이해하였을 정도로 얼굴에서 열이 났다. 더운 날씨에 사람들 틈에 있어 그런 것이겠지, 합리화해 보려 했지만 그게 아니란 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도무지 세령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으니까. 골려 주기는커녕 지금처럼 웃게 해 주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당장 여길 벗어나 세령과 둘만 있고 싶었다. 아니, 어디로 걸어갈 인내도 부족하였다. 이 자리에서 세령을 벗겨 구석구석 탐닉하고 싶었다. 하나 제멋대로 하였다간 결국 울게 될 얼굴이 상상되었고 그건 어쩐지 죽기보다 싫었다. 격변하는 감정에 현기증이 일어, 희명군은 세령의 손을 당겨 저를 보게 하였다. 세령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가, 사내의 창백한 낯에 놀라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신나게 보던 것도 잊었는지, 세령은 그보다도 먼저 발 빠르게 군중 밖으로 빠져나갔다. 손은 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꼭 쥐고서. “나리, 괜찮으십니까?” “……응.” 조금 한적한 담장에 등을 기댄 희명군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닦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령은 언제 챙긴 것인지 품에서 부채를 꺼내 사내의 얼굴에 살살 바람을 흘려 주었다. “아무래도 더위를 드신 모양입니다. 사람도 많아서 힘드셨지요? 제가 공연에 정신이 팔려서 눈치도 못 채고…… 송구합니다. 여기 잠시 계시면 물이라도 얻어…….” “세령아.” 당장 어디든 가 버릴 것 같은 모습에 희명군은 다급히 세령을 붙잡았다. “네, 나리.” “가지 마.” “네?” “어디 가지 말고 곁에 있어. 물 같은 거 안 마셔도 되니까.” “……많이 안 좋으십니까?” 우는소리 조금 하였다고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꼬리마저 축 늘어뜨리며 걱정한다. 그게 너무도 기꺼워서 희명군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괜찮지 않으면, 입이라도 맞춰 줄래?” “여, 여기서요?” “하하…….” 자리에서 펄쩍 뛰는 모습에 웃음이 피시시 흘러나왔다. 동정을 유발해서라도 가져 보고파 뱉은 진담인데, 싱겁게 웃는 모습을 보고 농이라 여겼는지 세령은 어이없는 한숨을 쉬었다. “몸이 안 좋으신 듯하니 이만 돌아갈까요?” “아쉬워 보이는데.” 사당패가 모여 있는 쪽을 눈짓하자, 세령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연이야 언제든 볼 수 있는 것이니 괘념치 않습니다.” “내가 아쉬운걸. 너랑 더 있고 싶어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낯간지러운 소리가 그냥 쏟아져 버린다. 분명 처음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는데 몇 번 하니 꽤 자연스러웠다. “그, 그건…… 뭐, 들어가서 더 이야기 나눠도 되는 것이고…….” 그놈이라면 이런 언사쯤은 숨 쉬듯 뱉었을 것인데, 세령은 그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입술을 감쳐물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어색하게 굴렸다. 그마저도 콱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어찌 이런 여인을 여태 바라만 본 것이지. 그놈은 불구인 게 틀림없었다. “나 혼자 방으로 돌려보낼 게 아니라면, 그래, 돌아가자.” “네에……. 아! 맞다, 심부름이 있었어요.” “심부름?” “행수 어른이 약방에서 첩약 지은 것 좀 받아 오라 하셨거든요. 잠시 계시면 제가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희명군은 매정하게 등을 돌리려는 세령의 손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답지 않게 불쌍한 척을 하였다. “싫어. 가지 마.”   “요 앞이라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면 같이 가. 나 혼자 있다가 무뢰배에게 끌려가면 어찌하려고?” “나리가요? ……가만 당하실 것 같진 않은데요.” 범상치 않은 풍채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나던 이들이 흠칫흠칫 놀라곤 하였으니 세령이 그런 말을 할 법도 하였다. 하나 희명군은 내심 섭섭하였다. 저를 시종일관 염려해 주고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더위 먹어 쓰러지면 나를 벼르던 자들이 와서 머리통을 깨부술지도 몰라.” “예?” 아, 이런 건 휘언이 하지 않을 법한 말이었지. 아차 싶었던 희명군은 세령의 손등을 살살 엄지로 문지르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되지도 않는 청승을 떨었다. “내가 미움받을 짓을 좀 했어야지……. 요새는 잠잠해졌다지만, 과할 때는 방에 들어오는 모든 식음에 독이 들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딜 가든 수하를 곁에 두었는데, 오늘은 그자도 없고 너는 나를 두고 자리를 비우겠다 하니 내 무서워서…….” “…….” 무섭다고 표현한 것은 조금 안 어울렸을까. 살살 눈치를 보는데, 여린 부분을 제대로 긁었는지 세령의 눈망울에는 이내 동정이 드리웠다. 하여 희명군은 더 처연한 체하였다. “혹 내가 많이 불편해? 하면 뭐 어쩔 수 없지. 내 어떻게든 혼자 있어 볼 터이니 다녀 와. 대신 빨리 갔다 와야 해.”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같이 가요.” 세령은 뭔가 미심쩍은 듯 눈썹을 구겼지만 자연스레 손을 뻗어 왔다. 하여 사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냉큼 손깍지를 꼈다. 희명군은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꼬리 흔드는 개처럼 세령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 * * 약방에 들어서니 사방에서 약재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향이 비슷한 것도 아닌데 그는 습관처럼 피우던 약을 두리번거리며 찾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좁혔다. ‘내가 오늘 약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던가?’ 깨어 있을 땐 살육하던 시간을 제하고 손에서 놓지 않던 것이었는데, 세령과 저자를 거니는 동안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선 세령과의 정사에 온 감각을 쏟다가 약을 건너뛴 날도 몇 번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대체 저 조막만 한 게 뭐라고 온 신경을 다 쏟게 하는 걸까. “아가, 왔느냐?” “안녕하세요, 의원님.” 퍽 생경한 호칭에 희명군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이 지긋한 노인네라 그런지 성인이 다 된 세령더러 아가란다. 한데 누이란 호칭을 질색하던 세령이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게 더 낯설었다. 아니, 심히 거슬렸다. “묘원각에서 주문한 약재 가지러 왔느냐?” “예.” “한데 오늘은 혼자가 아니구나.” “아, 그것이…….” 세령이 희명군을 쭈뼛쭈뼛 올려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만나는 사내라 소개하면 그만인데 왜 저리 고민하는 것일까. 확 그냥 끝까지 간 사이라고 말해 버려? <33> 불퉁한 마음에 무어라 해야 세령을 곤란하게 만들까 고민하는데, 대뜸 의원이 먼저 알은체하였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는데……. 아! 몇 년 전에 예 상담하러 오지 않았소?” “무슨 말씀인지.” 전장을 제하면 원체 이런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였으니, 저자의 약방을 제 발로 왔을 리 없었다. 어딜 가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외출은 고사하고 웬만해선 사람도 직접 마주한 적 없었고.  살의가 두려웠다기보다는 만사가 귀찮아서 피해 왔다. 그러니 연이 있었다면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이 의원이 본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혼일 테지. 한데 그놈이 약방을 찾아올 이유가 무에 있지. “두 분 아는 사이십니까?” “왜, 그 있잖느냐. 내가 말하였던. 복면을 썼다던 자 말이야.” “아…….” “풍채며 저 눈 밑의 점이며, 그자구먼.” 저를 바라보는 세령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치챈 것일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희명군은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가만 지켜보다가, 사람 좋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예 오늘 처음 온 것인데, 아무래도 의원님께서 다른 이와 착각하신 것 같군요. 뭐, 이 정도 풍채는 전장에 나가면 흔하디흔한 것이고 눈 밑의 점도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니 오해할 만도 합니다.” “흠. 정말 예 온 적 없소? 하면 내 결례를 범하였구려.” “아닙니다. 한데 저를 닮은 이에 대해 두 분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당사자도 아니라면서 그건 왜 궁금해하시오?” “내 여인이 다른 사내 이야기를 하는데 투기하지 않을 사내가 있을까요?” 맞잡고 있던 손을 끌어다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니, 세령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운다. “나, 나리!” 세령은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단 걸 까먹은 모양이었다. 홱 제 손을 거두어 갔다. 그게 심통이 나, 희명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왜. 내가 창피해?” “나리, 제발요!” “답은 왜 피하는 것인데.” 김 의원은 요즘 젊은이들 애정 행각이 참으로 대담하다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핫! 아이구, 내가 늙긴 늙었구먼. 세령일 아기 때부터 봐 왔는데 벌써 이리 커서 제 낭군도 데리고 오고 말이야.” “제 낭군 아닙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면전에 대고 그리 매정히 말하면 누구든 섭섭해할 거다. 해서 혼례는 언제 치를 것이냐?” “그래, 세령아. 우리 혼인은 언제 할까? 네가 원하는 날로 하자.” “아, 아니. 혼인이라니요. 의원님은 참말 저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나리는 가만히 좀 계셔요! 의원님이 진짜인 줄 아신다고요!” 두 사람의 농담 섞인 진담에 세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펄쩍 뛰는 발, 껄껄 웃는 웃음소리, 죽음이 아닌 삶의 대화들. 그놈은 선혈의 냄새가 다 가신 후에 깨어나 이런 것을 누리고 살았구나.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일상을 누렸던 기억조차 없는 희명군은 문득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심기가 거슬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겁만 많은 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 사랑스러운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 주는 걸까. 대체 그놈이 나와 무에 그리 다르다고 태도가 이리 달라지느냔 말이다. 생기 있는 세령의 시간이 욕심났고 질투가 일었다. 작금의 저 의원도 방해되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세령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세령아.” “예?” “이만 갔으면 좋겠는데.” 새끼손가락을 조심스레 쥐자, 제 기분이 저조해졌음을 단박에 눈치챈 세령이 움찔한다. 뒤틀린 제 심보 탓인데 착하게도 더위 먹은 것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하였다. 눈망울이 금세 걱정으로 물들었다. “아, 저, 의원님. 오늘은 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엔 경사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 그런 거 아니래두요.” “아가. 내 너를 얼마나 오래 보았는데 계속 부정하느냐. 내 앞에서는 숨겨도 소용없다. 하하핫핫!” 말문이 막힌 세령의 귀가 불그스레했다. 이 여인을 저리 부끄러이 만든 사내는 누구일까. 희한하게도 저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희명군은 어서 빨리 처소로 데려가 저 괘씸한 귓바퀴를 입술로 잘근잘근 씹고 싶단 생각만 하였다. 아이처럼 붙든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힘이 실렸을까. 세령이 작게 탄식하였다가, 희명군의 손을 달래듯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나리, 이제 가요.” “응.” 다정한 온기에 들끓던 노기가 조금은 가라앉아, 그는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 그렇게 세령을 따라 약방을 나서려는 그때, 김 의원이 뒤에서 희명군을 불렀다. 성가신 마음에 그는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내 세령이를 딸자식이라 생각한 지 오래되어 사위 될 사내와 한잔하고프니 언제 한번 놀러 오게나. 나눌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세령이에 대해서도, 자네를 닮은 사내에 관해서도.” 세령은 농담 좀 그만하라며 팩 소리쳤지만, 의원을 응시하는 희명군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예. 그러겠습니다.” 어떻게 눈치챘을까. 역시 그놈이겠지. 이 몸의 상태를 털어놓은 건. 그는 순순히 대답하였지만 저 의원을 볼 일은 다시는 없으리라 단정하며 등을 돌렸다. * * * 세령은 심부름이었던 약재를 가져다 놓고 오겠다 하여, 희명군 홀로 귀빈채에 돌아왔다. 그는 제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갓과 두루마기를 집어 던졌다. 그러고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아 저고리를 뜯어 버리려다가 한 번 참아 냈다. 희명군은 속이 답답한 것을 극심한 조갈이 일었다 여기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나 해결이 될 리 만무하였다. 해서 습관처럼 장죽을 집어 들었다. “씹…….” 사내는 약방에서부터 솟구치던 욕지기 대신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부친이 떠나고 현저히 줄어든 교전, 무료해진 일상에 시기 좋게 여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몸을 공유하던 다른 혼을 골려 주기 위해, 그리고 오로지 지루함을 달래려고 시작한 일인데 어째 시간이 흐를수록 저만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그는 턱뼈가 불거질 만큼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가, 장죽을 다시 내려놓고 창호를 죄 열어젖혔다. 답답하여 연 것인데 후덥지근한 바람이 목을 되레 조여 왔다. 그 어떤 것에도 취해 있질 않으니 두통이 인다. 이미 아문 팔의 상처와 재작년에 화살이 관통하였던 어깨, 몇 년 전 저를 사지로 내몰았던 등의 흉터와 독에 의한 내상까지 환상통으로 욱신거린다. 시시한 장난 따위 집어치우고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검은약을 잡으면 되는 것인데, 자꾸만 주저되는 마음이 야속했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딴 인내를 하고 있나 회의감마저 든다. 그러나 연기를 흘릴 때마다 찡그리던 여인의 고운 눈동자가 절로 떠오르니, 선뜻 입에 물 수가 없었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 듯 복도에서 기척이 들렸다. “나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지끈대던 머리가 식는 듯하였다. 희명군은 성큼성큼 다가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밋밋한 방 안에 세령이 들어서니 겨우 숨통이 트였다. 어쩐지 공기마저 산뜻해진 기분이다. “왜 이리 늦어.”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투정이 튀어나왔다. 날 선 목소리에 세령은 놀란 눈치였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그래. 목이 빠져 죽는 줄 알았다.” “오늘따라 왜 이리 보채십니까? 꼭 나리 어릴 때 같습니다.” “…….” 이젠 하다 하다 애새끼 취급이네. 별말도 아닌데 기분이 상했다. 분명 휘언 흉내를 내기로 한 것은 저인데, 세령이 제게서 그놈 모습을 찾을 때마다 심사가 뒤틀린다. 당최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 입을 꾹 다물고 대꾸하지 않으니 세령의 눈망울에 걱정이 어렸다. “나리.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아냐, 그런 거.” “이리 와 앉아 보십시오.” 아니라는 데도 세령은 희명군의 손을 잡아끌어 골마루에 앉혔다. 그러고는 옆에 바짝 붙어 유심히 바라본다. “보면 뭐, 알아?” “대충은요.” “뭘 어찌 안다는 거야.” “저한테 섭섭하신 거 있으시지요?” “뭐?” “역시…….” “…….”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하나 그렇다고 체통 없이 제 심경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희명군은 별천지 같은 눈동자에 저를 담는 여인을 가만 마주 보다가, 도저히 속에 담아 놓고만 있을 수가 없어 곁다리에 둔 마음만 톡 꺼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의원은 왜 너를 아기라 부르는 것이야?” “아기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아마 어릴 적부터 하던 게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 세령은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먼저 눈치챈 듯,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하면 나도…….” “안 됩니다.” <34> “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거절을 뱉는다. 희명군의 입에선 불퉁한 반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솔직히 너무하지 않은가. 자신도 어릴 적부터 누이라 불렀는데 그 친근한 호칭은 질색하고, 낯간지러운 아가 소리는 그러려니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아니 된다. 설마 뭐라 부르는 게 문제가 아니고 누가 부르느냐의 차이인 건가. “그것 때문에 계속 뚱해 있던 겁니까? 대체 그게 뭐라고.” “널 아가라고 불러 보면, 내 어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네?” 아무렇게나 지껄인 헛소리였는데 세령은 퍽 당황하였다. “이름을 숨기며 살던 어린 시절엔 당신께서 나를 아가라 부르셨거든.” “아…….” 저도 모르는 새 여린 마음을 건드린 걸까. 대충 둘러댄 말에 세령은 기분 상하지 않을 말을 고뇌하는 듯하였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 퍽 앙증맞았다. “그리 안타까워? 하면 세령이 네가 나더러 아가라고 불러 주든가.” “네에?” “왜. 이런 사내는 별로야?” 방금 제 입으로 한 소리가 맞나. 믿어지지 않는 와중,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은세령이 저를 어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농으로 건넨 말에 돌아올 대답이 이토록 긴장되는 걸까. 언제부터 이 여인의 기분이나 감정을 신경 썼다고……. “별로라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세령이 눈치를 본다. 한두 번 본 모습도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하찮은 생떼로 제게 실망하였나 공연히 초조해지기도 하였다. 다시금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홀로 심각해지는 제 표정에 세령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갸웃대며 희명군의 낯빛을 살폈다. “나리. 혹…… 참말로 저를 아가라 부르고 싶으신 겁니까?” “뭐…… 네가 누이는 싫다고 하니까.” “그, 그야…… 저는 누이도 아니고, 아기는 더더욱 아닌걸요. 꼭 호칭이 필요한 것이라면 다른 것도 많지 않습니까.” “하면 네가 호칭을 정해 줘.” “제가요?” “그래. 세령아, 너 나의 뭐가 되고 싶어? 각시? 정인? 그것도 아니면, 부인?” “…….” 농이었는데 갑자기 세령의 뺨이 진달래 빛으로 물들어, 희명군의 눈이 되레 휘둥그레졌다. “너…….” “아잇, 그만, 그만하십시오!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새침하게 손사래 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재밌기만 한데.” 파닥대는 손을 붙잡고 실실 웃으니, 세령이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 눈을 흘겼다. 참으로 희한하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인간에게 살심이 아닌 애정을 느낀다는 게 아직도 생소하기만 하였다. “하면 기분도 좀 풀리셨습니까?” “글쎄. 결국 호칭을 정해 준 것은 아니지 않아? 네 호칭을 정하는 게 어렵다면, 내 호칭부터 어떻게 좀 해 주어. 나리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잖아.” “왜 자꾸 저번부터 호칭에 집착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좀 그렇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설마 그놈은 이름으로 불러 달라 말한 건가. 기가 다 찼으나 희명군은 내색하지 않고 세령의 곤란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앙큼한 낯으로 휘언이란 이름을 입에 담는다면…… 씨발, 변태 새낀가?’ 상상만으로도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그놈은 진작 그걸 알고 세령에게 이름을 부르라 종용하였겠지. 고자인 줄 알았는데 순 호색한이 따로 없다. 제가 없는 곳에서 그딴 짓을 저질렀다고 여기니 기분이 상당히 잡쳤다. 어째 더 언짢아지는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세령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희명군의 소매를 조심스레 쥐었다. “흠흠, 저어, 그런 것보다 더…… 좋은 거 드릴까요?” “호칭보다 좋은 거? 그런 게 있나?” 뭘 준다는 소리에 절로 눈길이 갔지만 희명군은 공연히 딴청을 피웠다. 그 순간 세령이 두 손을 뻗어 희명군의 뺨을 감쌌다.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간 그때, 뭘 생각할 새도 없이 어여쁜 얼굴이 다가와 쪽, 입을 맞추었다. “…….” 전장에서 기습이란 기습은 다 받아 보았지만, 이토록 아무 대처도 못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입술을 맞댄 것은 처음이 아니던가. 사내는 바위라도 된 것처럼 굳어져서 끔뻑끔뻑 세령을 쳐다만 보았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세령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 너무 놀라시니까…… 제가 다 당황스럽습니다.”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않나.” “기분 푸시라고 한 것인데…… 별로였습니까? 저도 그냥 나리처럼 허락을 먼저 구할 걸 그랬나요?” “……뭐?” 접문은 싫다더니 그놈이랑은 이미 하였구나. 맨살을 비비적대는 와중에도 끝끝내 입술은 내어 주지 않더니. 고양됐던 심장이 세령의 말 한마디에 철렁 내려앉으며 바닥에 처박혔다. 한순간에 머리끝까지 불길이 치솟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희명군은 세령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포개었다. “흡…….” 순순히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혀를 집어넣자마자 말캉한 감촉에 전율이 일었다. 수없이 헤집던 속살만큼 부드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 존재한단 사실에 가슴이 두방망이질하였다. 온 신경이 숨소리에, 스쳐 가는 체액에 집중된다. 희명군은 무서운 희열을 느끼며 여린 점막을 헤집고 달뜬 숨과 달곰한 타액을 앗았다. 더운 날씨 탓인지, 뜨끈하고 말랑한 몸 때문인지. 입술을 물고 숨결을 탐할 때마다 신열이 들끓었다. “하아, 나리, 잠깐, 으읍…….” 할딱이며 멀어지는 입술이 혹여 달아나기라도 할세라, 뒤통수를 붙잡고 허리를 당겨 안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여인을 허벅지 위에 앉힌 사내는 정사를 나눴을 때보다 더 흥분하여 끝도 없이 혀를 얽고 입술을 깨물었다. 숨이 모자라 맞닿은 가슴팍이 크게 부풀면 쪽쪽, 거리며 부러 앓는 소리를 흘리게 두었다. “으음, 하으…….” 짐승의 교미 같던 교접 때보다 약한 신음인데도 머리꼭지가 쭈뼛 섰다. 정염에 사로잡힌 몸이 은세령을 간절히 원하였다. 불가항력. 이딴 나약한 단어가 제게도 붙일 수 있는 거였다니……. 세령을 만나기 전까지 희명군은 단 한 번도 여인에게 욕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같잖은 수작질로 방에 기생을 넣어 댔으나, 독약 탓에 불구라도 된 것인지 동한 적이 없었다. 한데 어째서 은세령에게만은 비루할 만큼 맹렬하게 반응하는 걸까. 불쑥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듯 추잡하게 혼자 발정할 게 아니라 오늘만은 함께 서로를 탐닉하고 싶단 욕심. 그러나 살면서 남의 마음을, 그것도 정염을 구걸해 본 적이 없으니 고민이 되었다. 그놈이라면 세령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겠지. 어찌하였을까. 어찌해야 세령을 자극할 수 있을까. ‘그놈은 절대 은세령에게 섣불리 손대지 않았을 거다. 신체를 빼앗겼다고 여기면서 나의 존재를 혐오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와 같은 짓은 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정사에서는 오로지 제 욕정만 토하였었는데, 멋대로 취하고 쏟아 내면 그만이었는데, 휘언의 흉내를 내어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가짐이 동화되는 것 같다. 폭발할 것 같은 제 음심보다 상대가 흥분에 차 매달리길 바랐다. ‘가만. 내가 왜 이 상황에도 그놈처럼 굴려는 것이지? 그놈은 은세령을 건들 깜냥도 없을 터인데. 하면 어차피 이 몸은 내가 더 잘 알지 않나? ……그래, 이 여인은 이미 나의 것이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씨근덕대는 말간 얼굴을 음험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몸을 뒤집어 골마루 위에 세령을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벌어진 입술에 다시금 제 것을 포개었다. “으, 흐읍.” 자세가 바뀌자 불편한지 바르작대는 세령의 무릎이 그의 다리 사이를 살짝살짝 건드려 자극이 심하였다. “하아, 세령아.” 하반신은 진작 한계까지 부풀어 있었다. 가녀린 몸 안에 당장에라도 파고들고픈 정욕이 희명군의 속에서 득시글거렸다. “하아, 나리. 너무…… 너무 급하십니다.” 숨통을 끊을 기세로 먹어 치우던 입을 놓아주자 발갛게 부푼 입술이 달싹였다. 그 외설스러운 모습에 머리칼이 쭈뼛 섰다. “지금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인데, 예서 더하면 화낼 거야?” “여, 여기서요? 방이 코 앞인데…….” 세령이 제 머리 위의 창호를 흘끗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한다. 그러나 전처럼 성을 내거나 애원하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너는 그놈이면 뭐든 허해 주는구나.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희명군은 더는 세령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저고리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놀라서 벌어지는 입에 쪽쪽, 입술을 붙였다. “읏, 흐읍…….” 봉긋하게 솟은 살덩이를 어루만지며 손끝으로 선단을 비비적거리자 가엾은 몸이 움찔 떤다. 그러나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세령은 다가오는 입술을 받아 줄 뿐이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희명군은 치마를 홱 걷어 올리고 속곳을 찢어발기듯 벗겼다. 그러고는 꽉 다물려 있던 균열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접문할 때부터 세령도 흥분하였는지 음부가 죄 흥건하였다. “기대하였나 봐. 이렇게 질질 싸고.” <35> “으…… 네?” 휘언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과 말이었다. 세령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달뜬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뒤로한 사내는 곧장 질구에 제 손가락 두 개를 푹 찔러 넣었다. “……아!” “누가 보면 실금한 줄 오해하겠다, 세령아.” “아, 아니, 아흑……!” 몇 번 쑤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손가락이 흥건하였다. 이미 세령의 약한 부분을 다 꿰뚫고 있기도 하였지만 매번 긴장한 몸을 공들여 풀어 줄 때보다는 확실히 반응이 빨랐다. 그 또한 자신을 휘언으로 착각해 그런 거라 여기니 도저히 분이 안 풀렸다. ‘어디까지 참아 줄까. 그놈한테는 어디까지…….’ 그는 저고리 고름을 당기고 치맛말기를 뜯어냈다. 삽시간에 나신이 된 여인의 오금을 잡아 벌리고 성급하게 양물을 꺼내 다리 사이에 비비적거리니 그제야 세령이 제 가슴팍을 밀어냈다. “나리, 하아, 잠시만요. 너무 빠, 빨라서…….” 희명군은 웅얼거리는 입술을 엄지로 살살 문지르다가 턱을 가볍게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네가 너무 고와서 못 참겠어.” “…….” “정녕 안 되겠어?” “그…….” 가증스럽게 애절한 척을 하자, 수줍어하며 눈을 피한다. 가슴이 지끈거릴 만큼 사랑스러운데, 도무지 언짢은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 작은 머릿속은 지금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까. 첫사랑의 결실로부터 오는 희열감일까, 아니면 다른 사내와 붙어먹은 기억을 덮을 수 있단 안도감일까. 뭐가 됐든 제게는 전부 마뜩잖은 상념이었다. 희명군은 세령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위에서 내리찍는 듯한 자세로 제 물건을 밀어 넣었다. “아, 아으읏!” 녹진할 정도로 내벽이 풀린 건 아닌지라, 없는 길을 새로 내는 듯한 감각에 등골이 오싹하였다. 전신이 쥐어짜이는 자극으로 둔부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곧장 파정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뒷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하…… 왜 이렇게 좁아.” “으응, 나리, 아, 아파요. 너무, 흐윽…….” “천천히 할게.” 칭얼거리는 입에 접문을 하며 허리를 부드럽게 물렸다가 다시금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잘 느끼던 부위만 쏘삭대자, 들썩이기만 하던 세령이 비음을 흘리며 동아줄에 매달리듯 사내의 목을 휘어 감았다. 희명군은 이토록 적극적인 반응이 반가우면서도 불쾌했다. 하여 조금 거칠게 내벽을 뭉개며 박아 대니 세령이 고개를 이리저리 피하며 교성을 터트렸다. “흐으, 아, 아응! 나리, 너무, 읏!” “피하지 마, 은세령.” 솟구치는 질투심에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떨어지는 턱을 붙잡고 입술을 포개며 발정 난 종마처럼 하반신을 퍽퍽퍽 때려 박았다. 사납게 몰아붙이는 희명군의 속도에 맞추기 버거운지, 호흡을 갈무리하지 못한 입에서 타액이 흘러넘쳤다. 사내에게 그건 어느 꿀물보다도 달곰한 독이었다. 그는 세령의 숨을 앗아 갈 기세로 맹렬하게 혀를 밀어 넣고 체액을 빨아 마셨다. 그런 와중에도 허리 짓은 멈추질 않았다. 제 의지가 아니라, 짐승이 교미하듯 본능에 맡긴 움직임이었다. “흐윽, 나리, 아으…… 흐으아, 앗!” 세령의 손톱에 긁혀 어깨에 생채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바둥거리는 여체를 무시하고 쿵쿵 여린 점막을 짓찧어 댔다. 그렇게 쉬지 않고 연신 밀어붙였으니 절정이 빠른 것도 당연지사였다. “흐아, 앗!” 양물을 터트릴 기세로 조여 대는 경련에 희명군은 갓 잡은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세령보다 한 박자 늦게 씨물을 가득 토해 내었다. “후…….” 그는 천천히 남근을 뽑아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쏟아 낸 파정액에 다리 사이와 음모까지 난잡하여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전신을 휘감던 정욕이 사출되자 뇌를 지배하였던 투기심도 조금은 가셨다. 그러나 세령에겐 과하였는지 색색 밭은 숨을 내쉬는 여인의 눈가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보내며 저 눈에서 눈물을 쏟게 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어쩐지 죄책감에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 생각을 거치는 것도 없이 세령의 턱을 들어 눈가와 뺨에 쪽쪽, 입술을 연신 붙였다. 기진맥진하여 축 늘어져 있던 세령은 아무리 기다려도 입맞춤이 멈추질 않자 피시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다 저질러 놓고 미안하십니까?” “……뭐?” 미안함, 그런 게 제게도 있는 것이었던가.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어 놓고도 죄의식을 느껴 본 적 없던 몸이었다. 한데 고작 거친 교접을 하였다고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얼떨떨한 표정이 신기한지 세령은 희명군을 빤히 바라보다가 짓궂게 웃었다. “밖에서 하는 게 그리 좋으셨습니까?” 이상 성욕을 놀리는 것이었지만, 희명군은 농을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며 대꾸하였다. “밖이 좋은 게 아니라, 네가 좋은 것이다.” “……예?” “네가 좋아서 이러는 것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것 말이야.” 진심이었다. 휘언인 척을 해야 한단 것도 잊고 뱉은 말이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 별안간의 고백에 발그레해진 뺨을 보자마자 아랫배가 다시 뻐근해졌다. “나, 나리. 설마 또…….” 도로 올라붙은 양물에 세령이 경악하였지만 희명군은 새삼스러울 뿐이었다. 고작 한 번으로 교합이 끝난 적은 여태 없었으니까. “지겨우면 후원이나 감상하고 있어. 내 얼른 끝내 볼 터이니.” 그는 세령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후원 쪽 기둥에 손을 짚도록 하고 골반을 제 쪽으로 당겼다. 사내에게 둔부만 내민 자세라 부끄러웠는지 세령이 발을 동동 굴렀다. “나, 나리. 이 자세는 좀…… 히익!” 언질 하나 없이 곧장 질구를 꿰뚫고 들어가자, 놀란 세령이 신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꺾었다. “후원 구경하라니까.” 희명군은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뒤에서 빈틈없이 끌어안고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내부에 싸질러 놓은 것들 덕에 움직임은 이전보다 수월하였지만 살이 섞이는 소리는 더욱 음란해졌다. “읏, 으응……. 흐으, 응…….” 흉포하게 쑤셔 댈 때는 비명에 가까웠던 교음이 작금은 달곰하였다. 사내는 새하얀 목덜미에 코끝을 묻고 달큼한 체취를 들이마시며 하초로 말랑한 엉덩이를 찰박찰박 두드렸다. 손은 자연스레 가슴과 배를 더듬었다. 분명 홀로 이 방에 들어섰을 땐 검은약이 절실하였는데, 지금은 세령의 향기만으로 숨통이 트이다 못해 황홀하다. 사내는 목덜미와 어깨, 날갯죽지 군데군데 순흔을 남기며 독한 약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세령을 탐하였다. 저만 흥분에 찬 것은 아닌지, 세령의 앙알대는 소리도 커져만 갔다. 그때, 복도에서 기척이 났다. 세령은 알아채지 못하였지만, 다가오는 발소리만으로 진작 눈치채고 있던 희명군은 어련히 가겠거니 싶어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불청객은 기어이 흥을 깼다. “저어, 나리, 영선입니다.” “흡…….” 세령은 할딱이던 본인 입을 반사적으로 틀어막았다. “어제 일, 사죄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놀라서 토끼처럼 뜬 눈동자가 희명군에게 향하였다. 어떡하느냐는 눈빛이었다. “신경 쓰지 마.” “으읍…….” 움찔거리는 내벽을 다시 느긋하게 들쑤시자 입을 감싸 쥔 손가락 새로 앓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세령은 한 손으로는 입을 더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사내의 몸을 밀어내려 바둥거렸다. 그러나 놓아줄 희명군이 아니었다. 바르작댈수록 더 강하게 결박하고 다리 사이를 빠르게 들락거렸다. “읍, 으응……. 흐으, 응…….” 이미 고양되어 있던 감각 탓에 세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신음을 흘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못 들은 거라 여겼을까. 영선이 다시금 목청을 높였다. “나리! 귀가하셨다고 들어 찾아왔습니다! 저, 그, 지난번 일 언짢으실 것 같아 사죄드리려고…….” “시끄럽다. 골이 울리니 목소리 높이지 마라.” 반응하지 않으려 하였건만. 기분 좋게 씨근대는 세령의 숨소리를 방해하는 탓에 희명군은 짐짓 엄하게 대꾸하였다. “아, 송구합니다. 저, 얼굴 뵙고 사죄하고 싶은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글쎄.” “네? 어…… 답을 주실 때까지 예서 기다릴까요?” “그러든가.” 희명군의 태평한 대답에 세령의 고개가 다시금 돌아왔다. 절대 아니 된다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었지만, 짓궂은 마음이 들어 입을 틀어막은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고 속삭였다. “어쩔까, 세령아. 네가 직접 답할래?” “…….”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냥 저대로 둘까? 하긴, 그래 봐야 계집종인데, 소리 좀 듣는다고 제깟 게 무얼 할 수 있겠어. 그렇지?” <36> 제 말을 진담이라 여기고 충격받은 눈망울이 퍽 귀엽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렁그렁한 눈이 더 하였다가는 정말 울음을 터뜨릴 기세라, 이 정도만 골려 주기로 하였다. “거기. 명선인지 뭔지, 지난 일은 잊었으니 돌아가거라.” “예? 하오나…….” “나의 휴식을 계속 방해할 셈이냐.” “아, 아니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영선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쯤 되어서야 희명군은 세령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손수 떼어 내며 표정을 살폈다. 많이 놀란 것인지 여전히 경직된 낯이었다. 아니, 뭔가 좀 이상했다. “많이 놀랐어? 이제 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왜, 왜…….” “음?” 물기 어린 눈에 원망이 차오른다. 그 순간, 희명군은 불안한 낌새를 느꼈다. 세령의 입에서는 교합 중에 내는 헐떡임이 아니라, 분개하여 떨리는 숨소리가 흘렀으니까. “어째서 당신이…….” “…….” 뭐야, 어찌 알아챈 것이지. “시, 싫어. 이거 놔!”  제 몸을 강하게 밀치는 힘에 교접 부위가 떨어져 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걸 잊었던 건지 세령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무엇이 그리 분하고 서러운지 훌쩍거리기까지 하였다. 온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에 희명군은 넋을 놓고 그런 세령을 내려다보았다. “흐윽, 대체 언제부터 나를 소, 속이고…… 그런, 우윽, 흐…….” 달래고 싶었다. 하여 몸을 낮추고 가까이 다가가자, 발끝이라도 닿을세라 웅크리며 저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무슨 짓을 해도 다 참을 땐 언제고, 이제야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 인식하는 게 불쑥 치가 떨렸다. 대체 그놈과 자신이 뭐가 그리 다르다고 이렇게까지 밀어낼까. 불쾌함, 아니 시기와 질투에 피가 자글자글 끓었다. 사내는 저항하는 세령의 손목을 붙잡아 눕히고 억지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배며 허리며 바둥거리며 걷어차기 시작하였다. 그래 봤자 미약한 힘이었지만 어쩐지 얻어맞는 부위보다 가슴께가 쓰렸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려 기어이 피를 보았을 땐, 허탈함에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정녕, 흡, 몰라서 물으십니까?” 별천지 같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렀다. 무에 그리 서러울까, 무에 그리 억울할까. “어차피 같은 몸이잖아.” “흐…… 언제부터였습니까. 귀가하고부터? 아니면, 저자에서도…….” 도저히 그딴 것이 왜 궁금한지 모르겠다. 네가 휘언이라 부르는 놈과 내가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처음부터. 그 기생과 있을 때부터 나였다.” “……왜, 대체 왜! 설마…… 서, 설마 휘언 나리를 기어이 죽여 버린 건 아니겠지요?”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던 눈동자에 경멸이 서리니 그 어떤 날붙이보다 날카로울 수 없다. 늘 느껴 오던 환상통이 여느 때보다 더 쓰라렸다. 희명군은 턱뼈가 불거질 만큼 이를 사리물었다. 그리하여도 치미는 화가 감당이 아니 되어 세령의 손목을 결박한 손까지 파들파들 떨렸다. “……죽여?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 그리하였어. 그놈은 스스로 달아난 것이다. 항상 그랬듯 미래에 닥칠 무언가가 두려워서.” “거짓말. 이제 나리 말은 못 믿겠습니다.” “…….” “후으, 윽……. 저를 가지고 노는 게 그리 재미있으셨습니까? 그러시겠지요, 저따위가 무어라고. 그저 한낱 노리개라 여겼으니 이런 짓을 하셨겠지요. 읏,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휘언 나리한테는 그러지 마시지……. 몸을 공유하는 사이면서 어찌 갈라진 혼의 처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와중에도 너는 너보다 그놈 걱정을 하는구나. “하……. 내가 나의 처지를 생각해 주어야 한다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떠드는 것이냐.” “……하긴, 아주 타인인 제게도 이리 구시는데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봅니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누군지 구별도 못 하고 감언이설에 멍청하게 속는 얼굴을 보면서 비웃었을 게 뻔한데 말이지요. 배려, 예의, 그런 걸 기대한 제가 천치입니다.” “……내가 너를 기만한 게, 그리도 억울해?” “예. 치욕스럽고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나리를 죽이고 싶을 정도예요.” “하……! 지금까지 좋다고 앙알거리더니 진실을 알자마자 파렴치한으로 보는 연유는 무얼까.” 저인 것을 알고 거절하는 모습에 마음이 저린 것과 별개로, 입에선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하면 뭐, 휘언 나리 시늉까지 하여 시간을 보내 주었으니 고마워라도 하란 말씀입니까? 저는 그딴 거, 바란 적 없습니다!” “웃기지 마. 내가 들키지 않았다면 넌 오늘 하루를 꽤 좋은 기억으로 남겼을걸? 같은 몸을 앞에 두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너인데, 누구더러 혼이 갈라졌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당신이…… 당신이 애초에 휘언 나리의 몸을 빼앗지만 않았어도……!” “나도 휘언이야!” 그가 마루를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쥐어박았는지 나무가 쪼개지며 사내의 손등을 찢고 상처를 냈다. 터져 나온 핏줄기에 놀란 세령이 흔들리는 눈으로 사내의 손을 흘긋거렸다. “너는 이 와중에도 그놈의 몸이 상한 걸 걱정하는 것이냐.” “…….” “내가 처음부터 그놈처럼 사근거리며 갖은 내숭은 다 떨었더라면, 달랐을까? 네가 염려하는 상대가 나였을까?” 세령의 심장이 동당거렸다. 하나 그 이유는 눈앞의 사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의 서글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동화된 탓이었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해. 어째서 그리 억울한 목소릴 내느냐고. “나도 휘언이다. 나도…… 이휘언이란 말이다.” 토해 내듯 설움을 쏟는 희명군의 음성이 떨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세령에게 시선을 박아 넣었다. 제 눈빛이 얼마나 연약하게 보이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내 진심이, 나의 고백이 네게는 그리 비참한 것이었느냐?” “…….” 진심이 닿길 내심 바라며 물은 것이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 어떤 부정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차니, 희명군의 속에서는 좌절감 다음으로 부아가 끓었다. “하, 그래……. 그렇게 그놈이 만나고 싶다면, 네가 잘하는 짓을 해.” “……예?” 네가 아는 나의 모습이 파렴치하고 망나니 같은 것이라면…… 그래, 보고 싶은 대로 행동해 주마. “지금 너, 내가 꼴도 보기 싫잖아. 하면 방도는 하나뿐이지 않나?” “…….” “이번엔 나를 제대로 재워야 할 거야.” 희명군은 기진맥진한 몸에 억지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읏…….” 그러나 가냘픈 저항이라도 할 것 같던 세령은 눈을 질끈 감고 제 상황을 참았다. 그 순간 희명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 하였나. 연모하는 이에게 내 마음을 몰라 준다며 겁간하려 들었다. 휘언을 들먹이니 세령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눈치였고. 그는 이따위 억지스러운 관계를 원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몸으로 거래를 한 게 문제였던 걸까. 상대의 마음을 얻어 본 적 없으니 첫 매듭부터 잘못 지었단 걸 깨달아도 해결할 방도를 몰랐다. ‘내 잘못이구나. 너를 이렇게 만든 것, 우리 관계를 망친 것 전부 다…….’ 무기력한 상대의 모습에 어쩐지 숨이 쉬어지질 않고 가슴까지 뻐근하였다. “……아프게 안 할게.”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하여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듣는 이도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닫았던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어차피 넌 나 같은 쓰레기보다 그놈이 보고 싶은 거잖아. 그러려면…… 어쩔 수 없잖아.” “…….” 약해진 기세에 연민이라도 느꼈는지, 분에 차 씨근대던 숨이 가라앉았다. 하나 희명군은 동정이라도 좋았다. 아직까진 자신을 봐줄 마음이 있다는 뜻 같아서. 그렇지만 결국 세령에겐 이 모든 게 이휘언을 불러내기 위한 행위 그뿐이겠지. 그간 세령에게 저지른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째 상처 준 일만 떠올랐다. 처음에는 몇 번 괴롭히다 말 생각으로 짓궂게 굴었던 것인데, 결국 이 모든 게 그에게는 덫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싫어도 조금만 참아. 네가 좋아하는 그놈 만나게 해 줄 테니까.”  참담하여 처음으로 세령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로 뻗어 오는 손을 거역할 배짱도 없었다. 그저 이런 수단이 되어서라도 곁에 남고 싶단 게 제 진심이었으니. 희명군에게도 세령에게도 그날은 멍울진 밤이었다. <37> 사내는 창 앞에 기대어 장죽을 뻑뻑 빨아 대다가, 제 곁에 잠든 세령을 참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나신 곳곳에 울긋불긋한 울혈이 가득하였다. 고단하였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끙끙 앓기도 한다. 눈가는 벌겋게 불어 만지지 않아도 따끔할 것 같았다. “……미친 새끼.”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지만 씁쓸한 마음은 무슨 짓을 하여도 해소되질 않았다. 그는 장죽을 내려놓고 한참 달밤을 응시하다가 대야를 끌어와 세령의 몸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그놈에게 더는 세령의 나신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새삼스러운 줄 알면서 사내는 여인의 몸 구석구석 싸지른 체액을 꼼꼼히 닦고 옷까지 입혀 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깨지 않는 걸 보니 참 많이도 괴롭힌 모양이었다. 그는 세령의 목덜미에 남은 순흔을 매만지며 제가 저지른 짓을 되짚었다. 어쩌면 이 짓도 마지막이라 느껴져서 그랬는지, 아쉬움을 느끼는 와중에도 참 징글징글하게 흥분하였다. 아프지 않게 한다 해 놓고 모든 힘을 교접에 쏟아 냈다. 심지어는 정사를 나누다 이성이 끊어졌는지 중간 기억이 없을 정도다. 마치 잠시 몸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혼절한 몸에서 빠져나와 씨물을 싸지르고 있었다. 그러니 세령은 오죽 버거웠을까. 아무리 이휘언을 깨우고 싶대도 당분간은 저를 보려 하지 않겠지. 오늘 정말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는데,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뻔뻔하게도 가슴이 저렸다. 당최 이휘언은 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이런 여인의 애정을 듬뿍 받는 것일까. 어느 때보다도 그놈을 죽여 없애고 싶었다. 이미 한 번 실패하였는데도 다른 혼의 흉내를 다시금 내어 세령과의 안온한 시간을 훔쳤으면 하였다. 그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곤 세령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부단히도 바르작대던 몸이 무방비하게 늘어져 있다. 제 짓인 줄 알면서 안쓰럽단 생각만 들었다. 하여 희명군은 평소 하던 대로 세령을 끌어안고 금침에 눕는 것이 아니라, 이불에 둘둘 말아서 갓난아기 안 듯 안아 들었다. 본인 방에 데려다 놓을 심산이었다. 세령이 제 옆에서 깨어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행랑채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하인에게 다녀오는 동안 방을 치워 두라 명하면서, 혹여 세령의 말간 얼굴을 보일세라 더 꼭 끌어안고선 헛웃음을 흘렸다. “너 때문에 별짓을 다 하는구나. 알아주지도 않을 것을…….” 이지러진 달처럼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간 듯 허하였다. 그러나 해소할 방도를 알 수 없으니 사내는 그저 착잡하게 허공에 한숨만 흘릴 뿐이었다. * * * “나리께서 지난 일은 잊겠다 하셨어……. 그러니 이 댕기는 내 것이야. 돌려줄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게 맞아. 그치만, 그치만 정말로 나를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는데…….” 계집종들 앞에서 목이 졸렸을 때 마주한 희명군은 울음이 절로 터져 나올 만큼 살벌하였다. 그런 사내에게 미움을 샀으니 영선은 응당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해서 댕기를 돌려주러 간 것이었는데, 돌아온 답은 예상외로 시큰둥하였다. 설마 저를 이미 죽이기로 결정하여 그런 것일까.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에 영선은 일과를 마치고 다시 귀빈채로 돌아와 마당을 서성였다. 섣불리 방에 찾아갔다가는 휴식을 방해하였다며 경을 칠 것 같고, 제 방으로 돌아가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차에 희명군이 불쑥 방에서 나왔다. 그의 품에는 이불로 꽁꽁 싸맨 무언가가 안겨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영선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저, 나리! 어디 가시는 길이셔요? 이불을 치우는 거라면 제게 넘겨주십…….” “됐고, 돌아올 때까지 방이나 치워 두거라.” 영선의 얼굴을 분명 보았는데도 무정한 눈빛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이전의 험상궂은 눈빛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무런 감정 없는 모습은 되레 산 사람 같지 않아서 더욱 섬뜩하였다. 해서 영선은 더 쫓아갈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쭈뼛쭈뼛 상전이 시키는 대로 몸을 돌렸다. 저 정도 위치에 있으면 아랫것들의 다툼은 소꿉장난이라 여겨지나. 해서 순간 끓어오른 증오도 그새 잊어버린 걸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연 순간, 영선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이게 대체…….” 좀 전에 고이 품고 있었던 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면서, 치욕스러워졌다. 창을 열어 두었는데도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와 정사의 냄새, 그리고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 안. 영선의 위치는 이 정도일 뿐이며, 은세령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상기하란 뜻으로 다가왔다. “……재수 없는 계집.” 영선은 방 안을 정돈하며, 이를 갈았다. 제가 차마 넘볼 수 없는 사내를 입에 담기보다 만만한 상대를 욕하였다. “저가 나랑 무에 그리 달라서. 기껏해야 기생과 다를 바도 없는 주제에…….” 묘원각은 원체 보안이 철저하여 사대부들이 음탕한 짓을 일삼는 장소이기도 하였는데, 뒷수습은 늘 영선처럼 오갈 데도, 말을 퍼 나를 데도 없는 아랫것의 몫이었다. 영선은 모시던 양반댁이 지난 숙청에 망해 버려 묘원각에 팔린 경우였는데, 이런 꼴을 볼 때마다 고상하던 주인댁 마님이 떠오르면서 기생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하나 그렇게 더럽다고 여기면서도 사내 하나 잘 잡으면 한순간에 팔자가 피니 내심 부럽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세령은 영선에게 갈망하던 일을 쉬이 이뤄 낸 사람처럼 그려졌다. 여러 사내에게 춤과 노래, 몸을 파는 것 없이 오로지 묘원각 주인의 눈에만 들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런 노력 없이 일궈 내었단 점에서 못마땅한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 처음이 아닐 거야. 처음인데 그 무시무시한 희명군의 마음을 홀랑 가져갔을 리 없지. 이 방에서 죽어 나간 기생만 수십이랬는데……. 그래,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 거야. 흥, 더러운 계집 같으니라구.” 방을 치우며 세령을 둘도 없는 창부로 만든 영선의 망상은 이내 머릿속에서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댕기를 돌려 달라던 것도 전부 사내 앞에서 내숭 떤 것이었겠지? 더 좋은 걸 뜯어내려고. 맞네, 맞아. 한데 이건 나리가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 하였으니 무어, 내 것이지.” 영선은 연초록빛 댕기를 다시 제 머리에 드리우며 히죽댔다. 그리 가벼운 마음이 되어 귀빈채에서 빠져나오는데, 문 앞에서 서성이던 낯선 사내와 딱 마주하고 말았다. “에고! 뉘, 뉘십니까?” 혹여 중얼거리던 걸 들었을세라 긴장하며 물으니, 처음 보지만 어째 익숙한 얼굴이 영선에게 향하였다. 나이는 불혹이 조금 안 된 듯하였으나 젊었을 적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은 외모였다. “아, 갑자기 찾아와 놀란 얼굴이구나. 미안해서 어쩐다.” “어…… 아니옵니다. 한데 어쩐 일로…….” “별건 아니고 귀빈채를 최근에 개방하였단 말이 있기에 궁금하여 기웃거려 보았단다. 한데, 안에서 나오는 걸 보니 여길 담당하는 모양이로구나.” “예에.” 미성인 데다 말투도 나긋하여 나이 차가 스물 가까이 날 것인데도 영선은 온 정신을 중년의 사내에게 빼앗겼다. “하면 너는 이 묘원각에서 꽤 신망받는 이겠고.” “아니옵니다. 저는 그저 시킨 일만 하는 것이어요.” “겸손 떨 필요 없다. 귀한 이가 귀한 일을 하는 법이니까.” “어유…… 흠흠, 그리 말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원래는 묘원각의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그때 개방하곤 합니다. 계실 적에 개방한 것은 며칠 전이 처음이고요.” 여태 제 일이 더럽고 추악한 것을 치우는 것이라 불만이 많았는데, 고고한 학 같은 선비가 그리 말해 주니 공연히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서 영선의 입은 여느 때보다도 더 가벼워졌다. “그래? 음……. 이곳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언제 한번 나와 다과라도 함께 해 줄 수 있겠느냐? 날이 너무 늦어 계속 붙들고 있으면 규수에게 실례이니.” “규, 규수라니요! 저는 그저 한낱 계집종일 뿐인데…….” “하는 일이 무에 중하겠느냐. 내 눈에는 그저 고운 여인일 뿐인데.” “네에? 제, 제가 곱습니까?”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느냐.” “어머…….” 뻔한 사탕발림일 거라 여기면서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던 영선은 뺨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내 해가 있을 때 다시 너를 찾아오마. 이름이 무엇이지?” “박영선입니다.” “영선. 그래. 내 이름은 은성호란다.” 순간 영선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퍼뜩 정신을 부여잡았다. “은씨가…… 흔한 성은 아닌데…….” “왜 그러지? 아는 이라도 있느냐?” “은세령이라고, 예서 일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음. 그래?” “아는 사이십니까?” “글쎄, 먼 친척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 아이는 어찌 지내느냐?” “가락지를 만들어 팔고 있기는 합니다만…… 음…… 뭐, 이젠 그런 건 안 하겠네요.” “그게 무슨 뜻이지?” “아, 요새 그 애가 귀빈채 주인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만…….” <38> “귀빈채 주인의?” “예. 한데, 이것은 비밀입니다.” 순순한 대답에 성호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다가 씩 올라간다. 그는 의미심장한 입꼬리를 손으로 살짝 가리며 다시금 중얼거렸다. “그래……. 총애를 받는단 말이지. 네가 들려주니 모르는 이의 소식인데도 괜스레 흥미가 생기는구나. 다음에는 더 길게 대화를 나눠 주련?” “다음에도요?” “그래. 너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단 뜻이야.” “어, 어머나…….” “하나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 내 이만 돌아가마.” “네, 나리! 살펴 가시어요.” 어찌 보면 선득한 미소인지라, 영선은 의뭉스러운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하나 사내의 다감한 인사에 금세 잊고 무에 홀린 이처럼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 * * 본디 기생이 낳은 아이는 대개 등쌀에 시달리다 어미와 떠나거나, 아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소위 군자란 작자들이 품은 기생의 운명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묘원각 기생의 자식 중 살아남은 이는 당시 세령과 휘언뿐이었다. 휘언은 절세가인이던 어미를 닮아 사내임에도 몹시 어여뻤다. 특히나 왼쪽 눈 아래 자리한 점은 참으로 매력적이어서, 그걸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을 정도였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두 아이의 어미와 세령은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휘언의 점을 콕콕 찌르며 놀기도 하였다. 방문 밖은 추잡한 일이 끊임없던 객사였지만 세령이 지내던 방 안에선 어느 가정보다도 화목한 웃음꽃이 피었더랬다. 하나 안타깝게도 주위를 둘러싼 불행을 영원히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날은 비가 참 많이도 내리던 날이었다. 밖에 나가는 즉시 쫄딱 젖을 정도라, 두 아이는 방 안에서 딱지놀이며 각시놀음을 하였다. 평소 같았으면 기생인 어머니들도 합세하여 놀거리가 많았을 터인데, 오늘은 어쩐지 두 분 다 자리를 비우셨다. 아직 일할 시간이 아닌 데도. 둘뿐이라 할 만한 놀이가 많지 않았고, 비 오던 날 의탁하던 곳의 주인이 저를 겁탈하려던 기억 때문에 세령은 좀처럼 놀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여 먼저 흥미를 잃고 나자빠졌다. “역시 둘이 하니까 흥이 안 난다, 그치?” “……재미없어? 하면 이거 말고 포수 놀음하자, 누이.” “그건 둘이서 못 하는걸.” “하면 가락지 놀음.” “그것도…….” “치. 하면 갈 거야? 나만 두고?” 이미 세령의 방인데 자신이 어딜 간단 건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울상이 되는 얼굴에 세령은 마음이 약해졌다. “아이참. 내가 휘언이 널 두고 어딜 가. 알았어, 알았어. 하면 무얼 하지?” “난 누이랑 하는 건 다 좋아.” “숨바꼭질은 어때?” “숨바꼭질? 비 오는데 나가도 괜찮아?” 휘언은 철없이 굴다가도 세령이 비를 무서워한단 걸 먼저 기억하고 염려해 주던 아이였다. 해서 자주 칭얼거려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 “비가 그래도 아까보다는 덜 내리니 괜찮을 거 같아. 처마 아래로 다닐 수 있는 곳까지만 가면 되지 않을까?” “누이가 괜찮다면 난 다 좋아.” 먹구름이 가득 끼어 어둡긴 해도 아직 날이 저물지 않은 시간이었다. 분주하지 않으니 묘원각을 쏘다녀도 혼나지는 않을 터다. 하여 첫 술래는 세령이 하기로 하였다. “이십구…… 삼십……. 찾는다!” 서른까지 숫자를 세고 방 밖으로 나가자 빗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비가 멎은 줄 알았는데 어째 아까보다 더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밤인 것처럼 사위도 캄캄하였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비 오는 날은 긴장이 된다. 스산한 분위기에 공연히 겁먹은 세령은 종종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다 때마침 방에서 나오던 기생에게 붙잡혔다. “얘!” “으악!” “뭐야, 왜 이리 놀라?” 세령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였다. 도화였다. 묘원각의 중한 약재를 관리하던, 세령의 어미 밑에서 보조로 일하던 새끼 기생. “아……. 안녕하세요.” “너, 어디 가니?” “휘언이 찾으러요.” “그래? 하면 가는 길에 행수 어른께 이 서찰 좀 전해 줘.” 행수의 방은 반대 방향이었다. 본인이 가기 귀찮으니 제게 떠맡기는 것일 테지. 하나 그걸 알면서도 세령은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애 딸린 기생, 그리고 그 기생의 자식은 어떤 시선을 받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밉보여 어머니에게 폐를 끼치면 아니 되었다. 그래야 쫓겨나지 않는다. “네에.” “그 언니도 참 웃긴다니까. 한가하게 뛰노는 애새끼 불러다 시키면 될 것을…….” “언니.” 짜증스럽게 중얼대는 걸 가만 듣고 있던 세령은 도화의 말허리를 잘랐다. 건방지다고 여겼는지 반듯한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넌 어른이 말하는데…….” “반빗간에 생강이 들어왔대요.” “뭐?” “저번에 목이 아프다고 한 걸 들어서요. 어머니가 그러셨는데, 생강을 차로 달이면 기침 삭이는 데에 그리 좋대요. 해서 제가 조금 덜어놔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가져오는 걸 깜박했지 뭐예요? 필요하면 지금 가져다드릴까요?” 역정을 내려던 날카로운 눈매가 고작 몇 마디로 사르르 풀렸다. “……흥, 약재 보조인 내게 뭘 가르치는 거야. 돼, 됐고! 어서 가 봐. 생강인지 뭔지 내 알아서 할 터이니.” 멋쩍은 얼굴로 가던 길 가라며 손을 휘휘 젓는데, 적어도 다음부턴 이유 없이 저를 미워하지는 않겠다고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기민한 눈치와 친절한 염려. 이게 세령이 기생의 아이로 살아남은 방법이었다. 번거로운 일을 떠맡았지만 세령은 고분고분 행수의 방으로 달려가 서찰을 전해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왔던 길을 가로지르는데, 누군가 세령의 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누구세요?” “혹…… 네가 세령이냐?” 어머니에게 구애하러 오는 어른은 많이 봤지만 저를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해서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인가 잠시 의심하였다. 그러나 고개를 주억거리자마자 안도의 웃음을 짓는 얼굴이 어머니와 닮아, 세령이 탄성을 내뱉었다. “외숙부님?” 어머니에게 배다른 남동생이 있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누구인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 갓난쟁이 때 보았는데 벌써 이리 컸구나. 누이, 아니 네 어미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종일 안 보이셔서.” 솔직하게 말하였을 뿐인데 외숙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더니 금세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부터 말하마. 내가 예 온 연유는 너를 데려가기 위함이란다.” “저를요? 왜요?” “네 어미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는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어 세령에게 보여 주었다. 글을 어미에게 배웠으니 필체만 보아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친근감 있게 ‘성호에게’로 시작한 서신은, 되도록 빨리 묘원각에 와서 세령을 데려가 달라 쓰여 있었다. 그러니 낯선 어른이래도 그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어, 어머니는 두고 가나요?” “그래.” “같이 가고 싶은데…… 그건 어려울까요?” “먼저 가는 것이란다. 이곳 생활도 정리할 게 많을 텐데, 너까지 챙기기엔 손이 부족하지 않겠니.” “으음. 네에.” 한평생 모친에게 방해되지 않는 존재로 남으려 노력하였으므로 세령은 내키지 않아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때는 잘 맞춰 온 것 같구나. 아, 그렇지. 여기 너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내아이? 휘언 말인가요?” “그래. 그 애도 함께 갈 것이다. 그 애, 지금 어디 있니?” “아, 맞다! 어디 있는지는 몰라요. 빨리 찾아야 하는데!” 숨바꼭질 중이었단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 세령은 빨리 가 봐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외숙이 난색을 보이며 세령을 진정시켰다. “그 애가 어디 갈 만한 데 없을까? 시간이 별로 없는데…….” “어어…… 그게…… 그것이…….” 세령은 머리를 팽팽 굴려 두 사람이 자주 갔던 곳들을 복기하였다. 아무리 묘원각이 넓다 한들, 눈칫밥을 먹던 처지라 사실상 갈 수 있는 장소는 몇 안 되었다. 가뜩이나 휘언은 낯을 심하게 가려 제 어미와 세령 모녀 외의 사람을 마주하는 건 꺼렸다. 늘 숨어 다녔으며 익숙하지 않은 장소엔 홀로 발 들인 적 없으니, 별채에 있는 제 어미의 방에 숨었을 확률이 높았다. “별채! 별채에 있을 거예요. 아이참. 비가 이리 오는데 게까지 갔단 말이야?” 곤란하게 중얼거렸지만 외숙의 모습이 애가 타 보여서 더는 귀찮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처마로 빙 둘러 갈 수도 있었겠지만, 어른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단 생각에 세령은 휘언을 데려오겠단 말을 남기고 비가 쏟아지는 마당을 가로질렀다. 역시나. 별채에 다다르니, 창호지에 우뚝 선 휘언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세령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휘언아!” 그 순간, 하늘에서 우르릉 쾅쾅 낙뢰가 쳤다. 청천벽력보다도 더한 광경에 그깟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지만. “……어, 어머니?” 바깥에서 불어오는 습한 흙냄새에 방 안을 가득 메웠던 혈향이 섞였다. 처참하게 감긴 네 개의 눈동자와 뒤늦게 등을 돌려 세령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 피가 튀어 잘 보이지 않는 살인자의 얼굴. 기이한 광경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피바다가 된 방 안에 쓰러진 두 기생은 세령의 어머니와 이 방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선혈을 뚝뚝 떨구던 칼을 쥔 사람은 다름 아닌 휘언, 그 애였다. <39> “왜…… 이게 무슨…….” 꿈이 아닐까. 좀처럼 상황 판단이 아니 되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 만일 숨바꼭질을 하자고 권하지 않았더라면, 심부름을 거절하였더라면, 외숙부와 대화를 나누느라 휘언을 잊지 않았더라면, 좀 더 빨리 왔더라면 이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무심결에 뒷걸음을 쳤다가 마루 끝에서 발을 헛디뎠다. 저 멀리서 외숙부가 세령을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는지 세령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눈을 뜨면, 낯선 집의 천장이 저를 반길 것이다. 그러면 진실을 찾을 시도조차 못 하였던 더부살이가 시작되겠지. 하나 지난 과거와 달리 눈을 뜨니, 사건이 벌어진 방문 앞에 자신도 휘언도 우뚝 서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그 휘언은 아주 작은 소년이었다가 무럭무럭 자라 풍채 좋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손에 기다란 장검을 든 그는 무정한 얼굴로 세령에게 다가와 가녀린 목을 틀어쥐었다. 컥, 숨이 막혀 그를 저지하지도 못하고 버둥대는데, 사내는 조금도 주저 없이 서슬 퍼런 날붙이를 들어 허공에 그었다. “허억!” 온몸이 썰리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세령은 그제야 잠에서 온전히 깨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래간만에 꾼 악몽이었다. 아니, 꿈이 아닌 기억이었다. 어찌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옷깃이 다 축축하였다. “으윽…….” 세령은 끊어질 것 같은 허리와 뻐근한 안쪽 허벅지를 뒤늦게 인지하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따끔따끔한 눈가가 불편하여 손등으로 꾹 누르니 한숨이 자연히 흘러나왔다. 지난밤 버거웠던 희명군과의 교합이 떠오른 탓이었다. 휘언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흥분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그는 수많은 밤을 통해 제가 느끼는 곳을 전부 파악한 사내였다. 그러니 머리와 달리 몸은 착실하게 달아올라 종국에는 제가 먼저 더한 자극을 갈망하였다. 게다가 어제는 절정 직전에 별안간 허리 짓을 멈춰 애를 태웠다. 하여 정신을 놓고 왜 멈추느냐, 더 해 달라, 칭얼거리기까지 하였다. 거기에 흥분한 건지, 사내는 미숙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무렇게나 들쑤셨다. 수도 없이 절정에 올랐던 몸이라, 세령은 그런 어설픈 자극도 좀처럼 견뎌 낼 수가 없었다. 전후 상황이 어찌 되었든 저도 결국은 정염에 무너진 것이다. “……내 방까진 어찌 온 것이지.” 휘언이 깨어나 저를 예까지 옮겨 주었나. 저잣거리 외출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또 험한 꼴을 당한 제 모습을 보았다면, 세령을 다시 보기가 죄스러워 방에만 넣어 두고 지금쯤 혼자 땅굴을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찾아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나을 것인데 어쩐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죄책감에 그를 어찌 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같은 사람이라며 소리치던 희명군의 모습 또한 자꾸만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같은 몸을 앞에 두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달리하는 것은 너인데, 누구더러 혼이 갈라졌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나도 휘언이야!] [나도…… 이휘언이란 말이다.] 붉어진 눈, 파르르 떠는 입술은 그가 얼마나 격분하였는지를 알려 주었다. 대체 왜. 그저 갖고 놀다 버리면 그만이라 여길 줄 알았는데 왜 그리 감정적으로 굴며 울분을 토하였을까. 세령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으나 사내는 울고 있었다. 자신이 대체 뭐라고, 휘언의 몸을 빼앗았다며 비난하는 말에 그리 상처를 받는 것인지. 마치 휘언이 제 또 다른 모습도 알아 달라 애원하는 것 같아서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마지막 운우지정인 것처럼 절박하게 구는 몸짓을 더 밀어내지 않고 받아 준 것도 그 탓이었다. “하아…… 머리 아파…….” 휘언이든 희명군이든 앞으로는 그 얼굴을 어찌 마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휘언을 다시 만난 것에 정신이 빠져서 그간 일을 지지부진 끌었던 게 문제였을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언제까지고 희명군과 몸을 섞어 휘언의 의식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휘언을 불러낸다 한들, 어머니에게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복수해야 할 대상은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러니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당장 기억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세령은 나갈 채비를 하고 곧장 약방으로 향하였다. “김 의원님.” 점심때와 겹쳐선지 다행히 환자는 없었다. “아가, 어제 오고 어째 또 찾아왔느냐?” “여쭤볼 게 있어서요.” “하루 만에 얼굴이 많이 상하였구나.” “……그런가요?” “같이 왔던 사내 때문이냐?” “…….” 역시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김 의원은 덤덤한 낯으로 밥상에 세령의 수저를 놓아주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하여 세령은 김 의원의 맞은편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그 사내가 네가 말하였던 객이지? 귀에 씐 것 같다던.” “눈치……채셨어요?” “이전에 복면을 쓰고 날 찾아온 사내, 그자가 확실해. 아니라 하니 동조하긴 하였다만, 어제와는 다른 혼이었으리라 짐작하였단다.” “……당시엔 무얼 여쭙던가요?” “증상을 말하기에 처음에는 단순히 기억 소실을 의심하였지. 본인이 출전병인데, 자고 일어난 장소가 다르다 하였거든. 잠에서 깨면 며칠이 지나 있고, 제 손으로 사람 목숨을 여럿 빼앗은 후랬으니까. 한데 한두 번도 아니고 잠들 때마다 전장에 나가는 사람이 어디 흔하더냐? 그럴 때마다 기억을 잃는 게 단순 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영 찝찝하더구나.” “해서 의원님도 귀에 씐 것이라 의심하셨군요.” “그래. 당연히 신병이라 여겼어. 그런데 이미 용한 무당을 찾아가 보았더구나. 원체 가진 기가 강하여 다른 귀가 들러붙을 틈도 없다고 하였다더라. 해서 나를 찾아온 것이고. 그렇지만 나라고 별수 있었겠느냐? 방도를 모르니 그저 돌려보냈단다. 뭐라도 알게 되면 연락을 주겠노라 하였는데, 그자가 거절하였어. 어떤 연락처도 남기질 않더구나.” 그건 아마 자신이 선대왕의 서자 희명군임을 밝힐 수 없어서였을 거다. 전쟁을 거치며 그 몸은 희명군이 거의 독점해 왔었고 휘언은 드물게 일어나는 편이었으니 들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거라 여겼겠지. 게다가 예전에는 죽음의 위협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니, 약점이 될 만한 단서를 남기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아마 다른 혼이 알게 될까 봐 그랬을 거예요.” “무에 두려워서? 방도를 알면, 몸을 완전히 빼앗기기라도 할까 봐? 그래, 그리 생각할 수 있어. 나 또한 혼 하나가 죽어야만 완치가 되는 병인 줄 알았으니까. 한데 그때 그 사내는 되레 몸을 포기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단다.” “포기라니…… 대체 어째서…….” “글쎄. 내 느낀 바로는 삶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병을 낫고 싶긴 한 건지 의심될 정도로 말이야.” “…….” 휘언은 병을 고치려던 것이 아니라, 그 몸을 다른 혼에게 내어 줄 방도를 찾고 있었던 건가. 그만큼 삶이 괴로웠던 걸까. “한데 아가, 양쪽 혼은 모두 만나 보았느냐?” “네.” “어떠하더냐?” “어떠하냐니요?” “쌍생아를 의심하였을 정도로 다른 사람 같다고 하였으니, 그 성격도 정반대였는지 묻는 게야.” 세령은 곰곰이 두 사내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니?” “제가…… 두 사람을 착각하였어요. 물론 부러 속인 것도 있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분명 제가 알던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다른 혼이었습니다.” “예전부터 그자를 알고 있었느냐? 그때는 신이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었고?” “네.” 그건 확실했다. 당시에는 하루를 통으로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 떨어져 있던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니까. “아가. 어쩌면 네가 그 사내를 고칠 방도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제가요? 어떻게요?” “아니 그래도 며칠 전 청나라 의원이 유랑을 왔다기에 만나 보았거든. 한데 그자가 그런 얘길 하더구나. 그 병을 앓는 자는 스스로 갈라내고 죽여 온 혼이 이미 수십 개는 될지도 모른다고. 해서 다른 하나를 죽이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이야.” “그럼…… 달리 해결책이 있나요?” “그런 자는 대게 오래전에 커다란 슬픔이나 공포를 겪었을 가능성이 커. 그 상처를 견디지 못해 마음이 쪼개져 버린 게지. 그러니 모든 혼이 한 사람의 자체, 떼어진 조각일 뿐이란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면, 온전히 그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구나.” 휘언도 희명군도 한 사람의 조각이라니.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착각한 적이 있대도 몸만 같을 뿐이지 둘을 하나라고 여기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않은가. <40> “의원님은 제가 그걸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래. 두 마음을 하나로 이어야 하는데, 서로를 부정하는 상황일 테니 혼자서는 쉽지 않을 게야. 그런 상태를 아는 주변인도 어느 한쪽을 부정하고 있을 테니 더더욱. 그러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그자가 의지할 법한 사람이 그들을 먼저 인정하고 설득해 본다면, 당사자에게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저는 제가 그만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걸요.” “만일 그자에게 가장 중한 사람이 너라면, 가능성은 충분하지. 대신 너부터 두 조각을 한 사람의 것이라 받아들여야 해.” “…….” “마음의 병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단다. 정인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큰 힘이 돼. 나는 아직까진 그보다 더 좋은 침도 약도 없다고 본단다.” 정인이라. 제가 휘언에게 그런 영향력을 행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일까. 사내가 저를 좋아하는 줄은 알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령아. 네 마음 상해 가면서까지 애쓰지는 말거라. 환자 곁에 있는 이가 먼저 무너져서는 아니 되니까. 알겠지?”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됐든 무리하지 않을게요.” “그래. 견디기 어려워지면 언제든 내게 오려무나. 내 사람 하나 거둬 줄 정도는 되니.”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의원님.” 씩씩하게 답하였지만 김 의원의 이야기는 결코 가벼이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하여 세령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반도 다 비우지 못하고 약방을 나섰다. * * * 묘원각으로 돌아가는 길, 세령은 고민에 빠졌다. 김 의원은 두 사내를 동일인이라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좀처럼 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희명군에게는 휘언을 죽였느냐 따져 묻지 않았던가. 그만큼 세령에게 둘은 전혀 다른 타인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한쪽을 부정해 왔던 사람이니 앞으로 그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세령아.” 익숙한 음성에 넋을 놓고 걷던 세령이 멈칫하였다. 언제 행랑채 마당까지 들어왔던 걸까. 생각에 잠겨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였는데 심란함을 몰고 온 당사자가 마루에서 일어나며 세령을 반겼다. ‘잠깐……. 누구지? 휘언? 아니면 희명군?’ 두 혼을 구분하는 데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한 번 당하고 나니 이제는 눈빛도 미소도 전부 헷갈리기만 하였다. 어제야 영선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걸 보고 눈치챘다지만, 그전까지는 깜박 속지 않았던가. “……언제부터 예 계셨습니까?” “방금 왔어. 너는, 어딜 다녀오는 것이야?” “잠시 약방에요. 행수 어른이 시킨 일이 있어서.” 어제 이미 심부름을 끝냈단 사실을 모른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걸 보고 세령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휘언이구나. 그렇다면 어제 방까지 데려다준 이는 희명군이었겠구나. 안 하던 짓을 하였단 게 괜스레 마음 쓰였다. 그때, 휘언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제 저자에 가지 못한 바람에 오늘 간 것이야?” 진실을 가늠하는 듯한 얼굴에 세령이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예? 아, 그……렇죠?” “나를 기다리다가 일을 미루게 되었구나.” 입꼬리가 올라가 있으나 전혀 웃고 있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 발 저려 그리 느낀 것일 수도 있으나, 닿아 오는 눈빛에 온기가 느껴지질 않아서 세령은 무심코 그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다지 급한 심부름은 아니었습니다. 어제는……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니고요. 바쁜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금세 돌아가 쉬었어요…….” “아―” 탄식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음성에 지레 찔려, 세령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내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세령의 뺨을 어루만졌다. 휘언은 옷깃을 매만지듯 쓸다가, 목덜미 뒤로 부드럽게 손을 옮겨 세령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온 신경이 그의 손길에 집중되었다. “세령아.” “……네, 나리.” 서슴없는 접촉이 어색하여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자, 시선이 얽힌 사내가 눈꼬리를 휘었다. 하나 세령은 휘언이 정말 웃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단 생각을 하였다. “기대하였을 것인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 댕기는 내가 꼭 새로 사 주려고 하였는데…….” 아쉬움일까. 아니, 그런 순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초창기 희명군이 제 거짓말을 가늠할 때 보였던 한기. 속내를 샅샅이 발라 먹으려던 예리한 눈을 지금 휘언이 하고 있었다. 설마 다 들킨 것일까. 하나 아무리 그렇대도 당신인 줄 알고 희명군과 저자에 가 신나게 놀았노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어, 어쩔 수 없지요. 다음에 가도 되는 것이고…….” 애써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는데, 어쩐지 시선이 살짝 벌어진 옷깃 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혹여 희명군이 남긴 울혈이라도 들킬세라 세령은 헛기침하며 공연히 옷깃을 더 여몄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묻지 않네.” “……네?” “내가 말했던가? 어제 나타나지 못하였던 이유.” 휘언의 눈빛이 조금 더 서늘해졌다. “아, 아뇨. 저…… 저는 그저, 공사다망한 자리에 계시니까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서…….” 기습이라도 당한 듯하여 세령은 되지도 않는 말로 얼버무렸다. “음. 아무리 그렇대도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척이라도 해 주면 아니 되는 거야? 이런 관심까지 갈구하려니 조금 섭섭하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한데 너는 별로 안 듣고 싶어 할 것 같네.”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을 만한 일이라니. 세령은 어쩌면 그가 정말 다 알아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들킬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부터 어떻게 꼬인 건지 몰라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만약에, 혹, 저 때문이라면…….” “왜 그리 생각해? 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저는…… 어…… 그게 그러니까…….”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인 채 빤한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추국장에 선 기분이 들게 하는 사내였다. 그러나 선뜻 꺼낼 수 있는 진실이 하나도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휘언이 픽 웃음을 흘렸다. “하하. 왜 그리 심각해지는 것이야.” “네?” “농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어제는 좀…… 기분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그런 상태로 너를 만나면 안 될 것 같았고.” “……지금은 기분이 괜찮으신 겁니까?” “당연하잖아. 네가 내 눈앞에 있는데.” 그는 정말 장난이었다는 듯, 단박에 온화한 낯이 되어 입매를 시원하게 늘였다. 여태 보였던 음산한 모습은 단숨에 거두면서.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하, 하…….” 그를 따라 어설프게 웃었으나 기실 마음은 조금도 편하질 않았다. 두 사내가 제게 가까워질수록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마치 한 쪽과 노닥거리는 것을 어디선가 다른 조각이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건 마치…… 외도라도 하는 것 같잖아.’ 희명군이야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전부 알고도 동조한다지만, 휘언은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그의 병에 대해 진작부터 알았단 사실조차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대책을 세워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렇지만 사내에게 제 몫의 죄책감까지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휘언이라면, 타개책을 찾는 것보다 제게 피해 주지 않으려 사라지는 쪽을 택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예서 더 상처 주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희명군과 정을 통하였단 사실을 들키는 건 두 번으로 족했다. 세 번째가 되면 분명 휘언도 자신이 그의 병을 안단 사실을 확신할 거다. 심지어는 갈라진 혼과 시간을 보내고 있단 사실까지도. 이럴수록 다시는 두 혼을 오인해선 아니 되었다. 제대로 된 대책이 필요하였다. “세령아, 한데 말이야. 어제는…….” “나리, 잠시 앉아 보십시오.” “으응?” 세령은 제 낡은 댕기를 당장에라도 빼고 싶어 하는 손을 감싸 쥐고 휘언을 마루로 이끌었다. 그가 무얼 말하려던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손 이리 줘 보십시오.” 가락지를 만들던 도구들을 전부 펼쳐 놓고 손바닥을 내미니, 휘언이 눈을 깜빡거리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수줍게 왼손을 얹었다. “가락지 만들어 주려고?” “예. 어떤 손가락이 좋으십니까?” “약지.” “약지요?” “응. 서국에서는 말이야. 청혼할 때 왼손 약지에 가락지를 끼워 준다지 뭐야.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아?” 손가락 둘레 길이를 재려던 세령의 손이 멈칫하였다. 어쩐지 희명군도 동일한 답을 할 것만 같았다. 그의 성정으로 보아 마음이 상하면 또 저 가락지를 악용하여 휘언의 행세를 할 수도 있었고. 그러니 휘언을 구슬려 두는 게 더 쉬운 방법일 테다. “왼손 약지는 조금…… 그렇고 오른손은 어떠십니까?” “왜?” 휘언이 섭섭한 얼굴을 하였다. <41> 기대에 찬 어깨가 한순간에 축 처지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하나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리 말대로라면…… 왼손은 가약 맺을 때를 대비하여 남겨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어차피 나와 혼인하는 것 아니었어?” “저,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싫다고도 안 하였잖아.” 그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삐친 척을 한다. 소름 끼칠 만큼 서늘하던 낯이 이럴 땐 꽤 귀엽게 변모한다. 그 간극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지난밤, 같은 얼굴에 혹사당해 놓고도 이런 감정이 들다니. 어쩌면 희명군의 말처럼 혼이 여럿인 것은 저일지도 모르겠다. 세령은 토라진 사내를 내버려두고 미리 작업해 둔 가락지 중 하나에 꽃 모양 각인을 새겼다. 그러고는 휘언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 주며 중얼거렸다. “그, 나중에…… 진짜로 하게 되면요. 왼손에 끼워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혼수로 주겠단 뜻이야? 나…… 청혼받은 거야?” 도대체 어디까지 앞서가는 건지……. 그저 가정일 뿐이니 넘겨짚지 말라고 말하려 하였다. 하나 휘언의 표정 변화를 본 순간 말문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아…… 어…….” 매섭게 찢어진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모자라 진달래라도 머금은 듯 뺨을 물들이고 낯빛까지 환하게 밝힌다. 단칼에 자르지 못하니,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세령을 꼭 끌어안고 얼굴 군데군데 쪽쪽 입까지 맞추었다. 이러니 어찌 부정하랴. “기쁘다, 세령아.” “아, 아니. 나리! 그런 뜻이…… 흣!” 목덜미까지 내려온 입술에 몸을 흠칫 떨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더 파고들었다. 바르작대는 몸을 품에 더 당겨 안으며 서슴지 않고 등허리를 지분대기까지 하였다. 대낮부터 탁 트인 마당에서 이게 무슨 짓인지. 낯이 뜨거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에는 참말 왼손에 끼워 주는 거야. 나도 그때는…… 네 왼손에 쌍가락지를 끼워 줄게. 아니, 내가 가진 전부를 줄게.” 한참 입술을 퍼붓던 사내는 아주 기분이 좋아진 말간 얼굴로 세령에게 약조하였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소년일 때와 같은 휘언을 마주하면 저 또한 그 시절로 돌아간 양, 어떤 근심도 잊혔다. 하나 세령에게 혼인이란, 심지어 상대가 왕자군일 경우에는 쉽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알겠으니 이것 좀 놔주십시오. 대낮에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나는 괜찮은데. 무어라 하는 놈이 있다면 내게 언질 주어. 경을 칠 터이니.”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더 혼납니다.” “네가 잘못한 것이 무에 있다고 혼을 내? 이리 추근대는 것도 나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텐데. 분명 자신이 사내를 꾀어낸 거라고 여길 것이다. 하나 휘언은 그런 건 염두에 두지도 않는 눈치였다. 휘언이 이 정도니 희명군은 더 하겠지. 마음이 향하는 것과 별개로 현저한 신분 차에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었다. 사내와 있으면 제 혼을 쏙 빼 두니 그간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렇게 가락지까지 선물하며 미래를 논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렇지만 헛된 희망을 품게 두는 것도 상대에게 못 할 짓이 아니던가. 그동안은 그가 어떤 미래를 그리든 내버려두었지만 이제는 정말 확실하게 말해야만 했다. “나리.” “응, 세령아.” “그…… 혼인 말입니다. 좀 어렵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뱉은 말에 꽃이 만개한 것 같던 사내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왜? 내가 네 마음에 안 차?” “아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제게 과분하지요.” “하면 왜.” “나리 정도면 곁에 더 좋은 배필을 둘 수 있을 테니까요. 어여쁘고 현명하고 집안도 좋은 분 말입니다. 그에 비해 저는 가진 것도 없고, 무에 하나 잘난 것이 없어서…….”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 없는 목소리를 내자, 휘언이 코로 한숨을 쉬며 세령의 두 뺨을 감쌌다. 그러고는 억지로 눈을 맞추었다. “내게 너보다 어여쁘고 현명한 여인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집안?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어? 나도 너처럼 묘원각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 뭐가 다르다고 그래.” “하지만 사람들이…….”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 세령아. 내가 그만큼 부족하단 것도 알지만, 한 번만 나 믿어 주면 아니 될까?” “무얼 믿으란 말씀이신지…….” “다른 사람들 시선, 신경 안 쓰게 해 줄게.” “아이, 어찌 신경을 안 쓴답니까. 나리는 그래도 왕자군이신데요.”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시선이 마뜩잖은지 휘언은 세령의 입에 제 입술을 짧게 대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니 영원할 것 같은 따스한 눈빛을 보내며 미소 지었다. “도성에서 먼 곳으로 가서 살자.” “예?”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고을에 가서, 우리 둘만의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사는 거야. 네가 원하면 이름도 바꿀게.” “이름을 저 때문에 바꾸신다고요?” “그래. 내가 왕자군인 걸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네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지어 줘.” “저는 그런 재능은 없는데요…….” “상관없다. 천치라고 짓는대도 네가 부르면 달곰하기만 할걸.” “네에? 이름이 그게 무업니까!” “천치가 어때서. 내 아는 거라곤 너뿐이니 틀린 말도 아닌데.” “아니, 그래도, 그게 말이, 아휴…….” 히죽 웃는 모습이 장난기 어린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엉뚱한 예시에 세령은 그를 따라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 그리고 매매 명문의 가주 이름은 세령이 네 것으로 해. 내가 미운 짓을 하여 집에서 내쫓고 싶어지면 법으로 그리할 수 있게.” 집을 주겠단 소리를 참 심상찮게 표현하는 사내였다. “……그런 구체적인 것도 생각해 두신 겁니까?” “이 정도로 무얼. 내 얼마나 그날이 오길 바랐는데.” “…….” “만일 내 원이 이뤄진다면, 그때는 네가 내게 휘언이라 불러도 다들 그러려니 하겠지? 하면 나도 너를 내 정인이라 소개하면서 남들 앞에서 마음껏 입을 맞추어야겠다.” “으음……. 남들 앞에서 그건 좀 그렇습니다…….” 새삼 내외하며 얼굴을 붉히자 휘언이 말갛게 웃었다. “혼인 못 하겠단 소리는 이제 아니 하네.” “예? 아, 아니…….” “됐어. 아직 정식으로 청한 게 아니니 답하지 마. 네 마음이 완전히 준비되면, 그때 멋지게 청혼할 테니까.” “…….” “혹 내가 혼인 상대로는 성에 차지 않아 그래?” “예? 그럴 리가요. 오히려 과분하지요. 다만…….” “하면 되었어. 답을 채근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 어여쁜 입으로 좋다고 말해 주기야.” 그가 약조하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세령이 주저하자, 휘언이 손을 가져가 멋대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웃었다. 청혼이라니, 혼인이라니. 부끄럽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저 또한 덩달아 들뜨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초를 쳐 단꿈 젖은 사내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세령은 더 반발하지 않고 그를 따라 애써 미소 지었다. 하나 그런 와중에도 희명군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자신도 휘언이라 호소하며 약하게 굴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마음이 괴로웠다. 휘언의 몸을 빼앗아 어미를 해친 원수라고만 여겨 왔는데, 그가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애초에 그가 진범이 맞긴 할까.’ 이제야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살육에 소질을 보였대도 제 어미까지 아무런 연유 없이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희명군은 단 한 번도 그날 일을 본인이 저질렀다고 한 적 없었다. 자신이 그리 여겨 왔을 뿐. 만일 그가 정말로 진범이라면, 세령은 눈앞의 사내 또한 잃어야 한다. 제아무리 애달픈 첫사랑이라곤 하나, 희명군 또한 휘언에게서 갈라진 조각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같은 사람이 저지른 일임은 자명하지 않은가. ‘정말 당신을 어쩌면 좋지…….’ 말갛게 웃는 낯을 바라보면서 세령은 가슴이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휘언을 앞에 둔 와중에 다른 사내를 떠올리는 게 너무도 죄스러웠다. 아니, 다른 사내가 아니었지. 같은 사내였지. 습관적으로 둘을 완전한 타인으로 여기게 된다. 이러는데 어찌 자신이 사내의 병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가만……. 휘언 나리의 원이 이루어지면 내 미래는 어찌 되는 것이지?’ 신분을 숨기고 다른 고을에 가 오순도순 사는 것쯤이야 사내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닐 터다. 한데 그렇게 되면 자신은 누구와 한집에서 살게 되는 걸까. 휘언? 아니면 희명군? 그런 상황을 두 혼 모두 용납할까. 아니, 어느 한쪽도 순순히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되질 않는다. 무엇보다도 세령이 둘 중 하나를 택할 수가 없었다. 희명군더러 휘언을 위해 사라져 달라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휘언에게 희명군과의 관계를 모두 털어놓기도 힘들었다. 처음엔 분명 희명군을 쫓아내고 휘언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사내를 찾아간 것이었다. 한데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어쩌다가 희명군마저도 외면할 수 없게 돼 버린 걸까. 어미의 죽음을 밝히려고 나선 일에 쉬이 맺어질 수 없는 사내 둘, 아니 혼이 둘인 사내가 얽혀 버렸으니 마음은 더욱 산란해져만 갔다. <42> [귀한 손에 이런 조촐한 것을 끼워 드려 부끄러우니 다른 이들에게는 보여 주지 말고 저와 있을 때만 해 주세요.] 세령은 가락지를 널리 널리 자랑하고 싶다던 휘언을 말리며 당부, 또 당부하였다. 들떠 있긴 하였어도 제 말을 무시하는 사내는 아니니 분명 잠들기 전에 어딘가 숨겨 두었을 것이다. 하여 세령은 휘언을 믿고 똑같은 가락지를 만들어 그날 밤, 희명군의 방으로 향하였다. 따로 부르지 않았는데도 워낙 들락거렸던 탓에 무혁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길을 터 주었다. “나리. 세령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방 안에선 덜커덩하며 소란이 일었다. 창을 열어젖히는 소리 다음으로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독한 연기가 자욱할 정도로 낀 걸 보아 희명군이 맞는 듯하였다. 오른손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오늘은 부르지 않았는데.” 헐레벌떡 달려온 걸 드러내듯, 안 그래도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옷섶을 열었다가 막 여민 것인지 고름도 희한하게 매여 있었고. “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들어와.” 그는 의아한 듯하였지만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지난 말다툼에 눈치가 보이긴 한 걸까. 제 방인 것처럼 먼저 가 앉는 세령과 달리, 희명군은 졸졸 그 뒤를 따라오다가 쭈뼛거리며 곁에 자리하였다. 세령을 흘긋거리며 눈치 보던 희명군은 방을 메웠던 연기가 창밖으로 흩어질 때쯤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줄 것이라니. 대체 무엇이기에 네 발로 예까지 온 것이냐.” 짐짓 엄하게 물었으나 살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늘 넘치던 여유마저 없어 보였다. 이에 세령은 내심 놀랐다. 휘언의 시늉으로 저를 속이고 멋대로 범하기까지 한 것에 대해 죄의식이라도 느낀 걸까? 그런 감정은 없는 줄 알았거늘. “제가 가락지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알지.” “해서 이걸 좀 만들어 보았습니다.” 세령은 품에서 휘언의 것과 똑같은 가락지를 꺼내었다. 희명군은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이걸 내게 주겠다고?” “예.” “왜?” “그냥 생각이 나서 만든 것이니 받으십시오.” “……진짜 내게 주는 것이라고?” “싫으시면…….” “싫지 않다.” 그는 세령의 말을 단호히 자르며 손에 있던 가락지를 채 갔다. 당연하다는 듯 왼손 약지에 끼우기까지 하였다. 그러고는 입가를 잘게 씰룩이며 한참을 가락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 내 손에 딱 맞구나. 한데…… 왜 갑자기 이런 것을 주는 거지?” “나리께서 저를 속이긴 하였지만, 저도 어제 욱하여 심한 말을 하였으니까요. 사죄의 뜻입니다.” 먼저 사과를 건넬 줄은 몰랐는지 희명군은 놀란 얼굴이었다. 한참 가락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이내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세령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나도…… 줄 것이 있다.” 사내는 서안을 열어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세령에게 건네주며 턱짓하기에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여니, 청색 비단에 은빛으로 나비 모양 자수를 새긴 댕기가 있었다. “이건…….” 휘언이 주었던 건 수수했다면, 희명군의 댕기는 대놓고 사치스러운 장식이었다. 낮에는 휘언이 깨어 있었으니 시간이 없었을 것인데, 제게 주려고 그 짧은 사이에 이걸 산 걸까. 놀란 세령이 어쩔 줄 모르고 들고만 있자 사내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왜.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아, 아니요. 그렇다기보다는…….” “이 시간에 저잣거리까지 나가 댕기를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급히 방물장수를 불렀는데, 죄 화려한 것들뿐이라……. 아, 너한테 화려한 게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 아니고 부담스러워할 듯하여 그나마 덜 튀는 걸로 골랐단 뜻이다.” “허…….” “받아 줄 거지?” 구구절절 변명하는 모습이 늘 알던 희명군과 딴판이라, 세령은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예. 고맙습니다, 나리.” 솔직히 이것 또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거절하면 심히 낙담할 듯하여 세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경직되었던 그의 입꼬리가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어제는…… 내가 과했다.” 차마 사과까지는 건네지 못하였지만 제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생경하여 세령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쩐 일로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상처받은 게 뻔히 보였는데도 그리 몰아붙였으니…… 다시는 네가 나를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하였어. 그게 참…… 답답하더구나.” “나리 한마디면 언제고 저를 후원에 무릎 꿇릴 수 있을 텐데요. 새삼스럽습니다.” “너한테는 뭐든 억지로 하는 게 싫어졌어. 아무래도…… 네 마음을 얻고 싶은 것 같다.”   “……예?” “그놈이 받는 애정까지 탐내는 것은 사치란 걸 안다. 해서 그냥…… 네 곁에 나를 두어주기만 하여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하였어.” “…….” “그저 곁이라도 조금만 내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그리 생각하던 중에 이리 네 발로 찾아와 귀한 것까지 선물해 주었으니 내 지금 얼마나 기쁜 줄 아느냐?” 답지 않게 처량한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에서 휘언이 겹쳐 보였다. 두 혼을 한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단 말이 어렴풋이 이해될 것 같으면서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 눈으로 괜히 연민하는 척할 필요 없다. 네가 여기 온 이유, 그놈 때문이란 거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사내는 가락지 낀 손을 펼쳐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어쩐지 우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미워 죽겠으면서도 그놈을 깨워야 하니 온 것이잖아. 내가 싫다고 울고 화를 낸 후이니 이런 구실이라도 만들어야 찾아오기 수월했을 테지. 그래도…… 그놈 덕에 이런 것도 받아 보았으니 오늘만큼은 모른 척 네 장단에 맞춰 주고 싶구나.”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희명군은 씩 웃더니 세령이 쥐고 있던 댕기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댕기를 세령의 눈에 씌운 후 머리 뒤로 매듭을 지었다. “……나리?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졸지에 시야가 가려진 세령이 댕기를 더듬거리자 그가 벗기지 못하도록 손목을 쥐고 내렸다. “나를 그놈이라 생각해.” “네?” “나 같은 개차반 말고 그놈이랑 뒹굴고 싶잖아. 어차피 섞어야 하는 몸,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볼 테니 상상해 봐.” “……지금 휘언 나리인 척을 하겠단 겁니까?” “그래. 겪어 봐서 알잖아? 나 흉내 잘 내는 거.” “아, 아니. 잠시만요, 나리!” 그는 세령의 의도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해명하기 위해 거세게 저항하려는데,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당연히 막무가내로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리라 여긴 세령은 바짝 긴장하였다. 한데 희명군은 쪽쪽, 짧은 입맞춤을 하며 느긋하게 저고리 고름에 손을 대었다. 벌어진 섶 안으로 손을 넣은 사내는 치맛말기 위로 부드럽게 가슴을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머리로는 동조하여야 할지, 거부하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하나 몸은 달랐다. 차츰 끓어오르는 정염을 이기지 못하여 이내 희명군의 옷자락을 꼭 쥐고 달뜬 숨을 터트렸다. 그 틈을 놓칠세라 사내의 날렵한 콧대가 세령의 코끝을 문지르듯 미끄러졌다. 그리고 벌어진 입술에 제 것을 포개었다. “흐읍…….” 성급하지 않은 접문은 입술 주름 하나하나를 탐닉하는 듯 느긋하게 살갗을 문질렀다. 눈이 가려져 있으니 다른 감각이 온통 예민했다.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 혀가 마찰하며 내는 타액 섞이는 소리, 그리고 젖은 점막을 빨아당기는 야릇한 소리까지 고막을 자극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흘리는 한숨 같은 신음도 너무 잘 들려, 평소보다 더 부끄러웠다. “흣, 으읏…….” 기척을 느끼지도 못하였는데 아래로 내려간 손이 치마를 걷고 다리 사이에 파고들었다. 하나 속곳을 젖히고 냅다 질구를 후벼파는 것이 아니라, 속곳 위를 살살 문지르며 아래를 적셨다. 간질간질하게 몸을 달구는 손놀림이 적응되지 않아 세령은 흠칫흠칫 떨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늘 그랬듯 어서 빨리 매서운 자극이 들이닥치길 바랐다. 하나 애석하게도 희명군은 곧장 파고들기보다 세령의 입술을 놓아주고 치맛말기를 내려 새하얀 가슴을 물었다. “읏.” 그는 질척한 혓바닥으로 유두를 문지르다가 쪽쪽거리며 감질나게 굴었다. 그러다 변주를 주어 잘근대면 등골이 쭈뼛 서는 감각에 입에선 딸꾹질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 으응…… 나리. 아, 안 보여서 무서, 무서워요…….” “더 천천히 할까?” “으, 아니, 그게, 흣…….” “하면 어찌할까, 세령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으…… 아래가, 간지러워서…….” “여기?”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사내는 속곳을 젖히고 공알을 살살 문질렀다. 되레 성감에 불만 붙인 꼴이었다. “으읏, 아니, 아……!” “여인을 품어 본 적 없는 몸이라 네가 무얼 원하는 건지 모르겠어, 세령아. 그러니 고운 입으로 차근차근 알려 줘, 응?” <43> 되지도 않는 소리까지 하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지만 이게 다 세령을 애태우려는 목적이었다면 성공이었다. “흐으, 하……. 거기, 그만…….” “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찔걱거릴 정도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사내는 열기로 간질간질한 질구는 건드리지 않고 공알만 비벼 댔다. 게다가 가슴에 들러붙어 있던 입술로는 츱, 츄읍, 소리가 날 정도로 뻑뻑 빨아 대고 있으니 위아래로 가해지는 간지러움에 정신이 혼미하기만 하였다. 그저 빨리 절정에 올라 부글부글 끓는 감각을 터트리고 싶은데, 늘 강렬한 쾌감만을 내어 주던 희명군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온 살갗을 붓으로 그리듯 놀려 대기만 하였다. 원하는 대로 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배 속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흐으, 읏, 나리, 제발, 제발요.” “어딜 어떻게 해 달라는 건데, 응?” 참으로 성격 나쁜 사내였다. 곁에 있는 거로도 괜찮다며 동정심을 유발하던 건 전부 수작질이었던 게 분명하다. 결국은 짓궂게 굴 거였으면서. “그냥, 해 주세요…….” “그러니까 무얼.” 세령은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제 공알을 문지르던 사내의 손을 겹쳐 쥐었다. 살포시 누르는 힘에 사내의 손끝이 질구에 닿았다. “여기…… 끝까지 해요…….” “하…… 그놈 앞에서 이런 모습이구나, 넌.” 이 또한 힘겹게 뱉은 것인데 심사가 비틀린 음성에 더 정확한 단어를 요구할까 봐 어찌나 조마조마하였던지. 하나 다행히도 사내는 휘언의 흉내를 내야 한단 사실을 잊지 않았는지, 순순히 세령을 눕혔다. 그러고는 다리 사이에 뜨끈한 살덩이를 갖다 대었다. 희명군은 양물을 쥐고 질척하게 젖은 균열에 선단을 살살 문질렀다. 그러나 곧장 쑤시고 들어오기보다 뭉툭한 끝으로 세령의 음핵을 꾹 누르며 자극하다가, 입구에서 미적거리며 답답하게 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언제 파고들지 알 수가 없으니 세령은 몸이 더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후으…… 나리, 어, 언제까지 계속…… 히익!” 보채려던 그때, 굵직한 사내의 분신이 배 속을 푹 파고들었다. 달을 대로 단 몸이 삽입 한 번으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세령은 쇠꼬챙이에 꿰인 물고기처럼 허리를 뒤틀며 헐떡였다. 전신을 집어삼키는 저릿함에 이어 강렬하게 밀려들 허리 짓이 자연스레 예상되었다. 그러나 광포하게 쑤셔 대는 삽입 대신, 사내의 물건은 느릿하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느긋하게 점막을 밀고 들어왔다. “흐으, 응……!” 본디 정신없이 살을 섞을 땐 명확한 감각을 모른 채 헐떡였는데, 뭉근하게 내벽을 긁어 대니 느낌이 몹시 생경하였다. 그의 분신이 어디쯤 들어와 있는지, 어떤 부근을 두드리며 열꽃을 심는지 전부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처음 교합을 할 때처럼, 후일을 예상할 수 없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세령은 보이지 않는 앞을 더듬거리다 사내의 가슴팍 부근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골반을 어루만지던 손이 세령의 손을 겹쳐 쥐곤 위로 끌어당겼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손끝에 뜨겁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그게 혀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희명군은 세령의 손가락을 할짝대며 아래로는 여린 점막을 파헤쳤다. 마치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그대로 느껴 보라는 것 같았다. 꾹 짓누르는 힘에 내벽을 조일 때마다 사내도 손가락을 혀로 휘감아 빨아 댔으니까. “하아, 하으, 읏…… 아!” 교접 부위를 끝까지 맞춘 채로 하반신을 돌리자 깜깜한 시야에 별이 튀었다. 가벼운 절정을 맞이한 줄도 모른 채 손끝 발끝을 오므리며 교성을 흘리는 세령의 손을 희명군은 그제야 놓아주었다. 그러곤 힘이 빠진 팔을 당겨 제 목을 안게 하고 몸을 더 깊이 밀착하였다. 가슴이 뭉개지고 배가 닿아 전신을 짓눌렀다. “하윽, 나리, 아, 으으응…….” 예민한 몸을 다시금 파고드는 자극에 솜털이 쭈뼛 섰다. 세령은 허공을 휘젓던 다리를 무심결에 사내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자 기특하다는 듯 뺨에 입술이 쪽쪽, 들러붙었다. “아프진 않아?” 희명군이 이런 걸 묻는 게 새삼스럽다고 여겨져야 정상인데, 그가 하는 놀음에 익숙해졌는지 마치 휘언에게 안긴 기분이 들었다. 하여 동화된 세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곧장 닿아 오는 입술을 느끼고 순순히 입을 열어 주었다. 발간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혀도 기꺼이 받아 주며 타액을 섞었다. “하아, 세령아. 은세령.” 그는 세령의 이름을 읊조리며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다시금 입을 포개었다.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흥분에 차서 눈앞의 상대를 더 갈망하는 음성이었다. 자잘하게 내부를 들쑤시던 움직임도 슬슬 박차를 가하였다. “흐읍, 흑, 으읍…… 하아, 흐읏…….” 찰박찰박 물소리만 나던 하초에서 살을 후려치는 소리가 섞이기 시작하였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어째 숨통 또한 막힌 것처럼 평소보다 호흡이 부족하였다. 그걸 눈치챘는지 희명군은 세령의 입술을 놓아주곤 목덜미와 귓불같이 예민한 살을 연신 빨아 댔다. “으응…… 나리, 흣…….” “더 천천히 할까.” “아, 아니, 더…… 빠, 빨리…….” 사람은 본디 익숙한 것을 찾기 마련이라, 절정에 오를 듯 말 듯한 감각이 답답하여 기어코 입 밖으로 뱉고 말았다. 의외의 답이었는지 잠시 멈칫하였던 사내는 픽, 웃는 소리를 내더니 세령의 오금을 벌려 잡으며 자세를 고쳤다. 그러곤 양물을 귀두 아래까지 뽑아냈다가 한 번에 콱 처박았다. “……힉!” 벼락처럼 떨어진 둔통에 세령의 손톱이 사내의 팔뚝에 박혔다. 하나 사내는 살점이 꿰뚫리는 고통 같은 건 모르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의 내벽을 쾅쾅 거칠게 두드렸다. 살갗이 쩍, 들러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아! 아, 흑, 나리, 나리이…….” “그리 채근하면, 후우, 네가 원하는 사내처럼 하기 힘들잖아.” “흐으, 아!” 눈앞이 또 번쩍 튀었다. 극심한 자극에 발작을 일으키며 남근이 뽑혀 나가자, 세령은 몸을 파르르 떨며 옆으로 웅크렸다. 하나 사내는 뱉은 말이 진실임을 드러내듯 세령의 다리 하나를 들어 올리곤 뜨겁게 발기한 물건을 그대로 쑤셔 박았다. “아앙!” 예민한 상태에서 바로 자극을 가하니 입에선 민망한 교음이 터졌고, 손에 잡힌 방석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하나 이번에는 희명군 또한 이성을 잃었는지 휘언의 시늉을 내던 것도 잊고 본래 하던 대로 여린 점막을 퍽퍽 후려쳤다. “으응, 아앗, 아, 아!” 해일처럼 밀려드는 자극에 관절이 사정없이 곱아들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절정이 이어졌고 기어이 세령은 깜박 정신을 잃고 말았다. “……세령아.” 제가 혼절하였단 사실조차 나긋한 사내의 음성을 듣고 알아챈 세령은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가리던 댕기는 이미 벗겨진 채였다. “으…….” 목이 다 쉰 세령이 얼굴을 찌푸리자, 곁에 모로 누운 희명군이 젖은 눈가를 살살 닦아 주며 멋쩍게 웃었다. 목구멍이 까끌까끌하여 불편한데,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희한하게도 거북하지 않고 안온하기만 했다. 세령은 저를 애틋하게 응시하는 사내를 바라보다가, 홀린 듯 손을 뻗어 눈 밑의 점을 만지작거렸다. “……예쁘다.” 무심코 튀어나온 어릴 적 습관에, 사내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하나 이내 기다란 눈매를 유려하게 접으며 웃었다. “네가 좋아하는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네.” 뻗어 온 손에 뺨을 기대고 입을 맞추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세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눈앞의 사내는 희명군이었지. 하나 그걸 인지하였음에도 매정하게 손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냥 작금의 상황이 어쩐지 좀 안락하였다. 제 곁의 사내가 휘언이 아닌데도 이런 기분이 드는 연유는 무얼까. 몸을 하도 섞다 보니 이런 가벼운 접촉쯤은 아무렇지 않게 된 걸까. 공연한 감상에 빠져 있던 세령은 이내 제정신을 붙잡고 후들거리는 팔로 상체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자 그가 곧장 허리를 받쳐 주며 앉는 걸 도왔다. 체액으로 난잡하였던 몸은 이미 깔끔하게 닦인 후였다. 스르륵 흘러내린 땋은 머리엔 눈을 가렸던 댕기가 드리워 있었고. 정사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늘 제 몫이었는데, 그게 참 새삼스러웠다. “벌써 돌아갈 것이냐?” 예상치도 못한 물음에 세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번 그가 잠들어 있을 때 떠났지만 아쉬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방금 깨운 것도 볼 장 다 보았으니 이미 돌아가란 뜻인 줄 알았다. 한데 어째 저를 응시하는 눈빛이 더 있어 달라 말하는 것 같았다. “……예서 잘 순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좀 더 있었으면 하는데…….” 그가 의외로 솔직하게 답하며 가락지 낀 손으로 세령의 빈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44>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보답은 댕기로 충분합니다.” 빈 손가락을 매만지던 게 가락지를 선물하려던 심산이 맞았는지 희명군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보답이 아니라 그냥 내가 주고 싶은 것인데도?” “예.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요.” “직접 만든 걸 준 게 대단치 않다면 대체 무엇이 대단하단 거지?” “…….” “……고맙다.” “네?” “이런 거, 처음 받아 보았어.” 그는 제 약지에 낀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이 사내가 정말 희명군이 맞나?’ 오늘은 정말 희명군의 생경한 면모를 수도 없이 본 것 같다. 그간 제가 알던 모습은 전부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라, 세령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와 권력을 다 가진 사내가 보석 하나 박지 않은 밋밋한 가락지를 소중히 여기는 게 좀 짠해 보였다. 사람을 처리만 해 보았지, 곁은 내준 적 없는 반쪽짜리 삶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감히 상상되어서. 정사로 인한 고단함 탓에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세령은 더 있어 달란 그의 청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어…… 나리.” “응?” “기실 저는 오늘 휘언 나리를 깨우려고 억지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면?” “나리와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예.” “……무슨 대화가 하고 싶었는데.” “나리에 대해 알고 싶어요.” “나를?” “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 다음으로 입술을 꾹 문 채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입꼬리가 씰룩였다. 작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으나 기분은 좋아 보였다. “흠. 이 땅에 나에 대해 모르는 자도 있나.” “그런 것 말고 나리의 어린 시절이요. 나리의 기억 속에 혹…… 제가 있습니까?” 희명군이 미간을 좁혔다. 첩자를 대하듯, 무슨 의중인지 파헤치려는 것 같았다. 아마 습관적으로 나온 행동이었을 거다. 하나 그는 세령에게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지 이내 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순순히 답하였다. “있다.” “하면…… 그 당시에도 이 몸 안에 둘이 있던 겁니까?” 희명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몰라. 온전히 내 기억을 갖게 된 건 5년 전, 전장에서부터야. 내가 무엇인지, 왜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 채 적군을 베고 찔러 죽였다. 하나 그 와중에 떠오른 게 너였어. 나보다 어린 소녀에게 누이라고 불렀던 것, 너를 조롱했던 놈에게 살의를 느꼈던 일, 내 형님을 바라볼 때 빛나던 네 눈. 그리고…… 망가진 내 모습을 혹여라도 네가 볼까 봐 걱정하는 나. 그게 가장 이상한 점이었지. 당시에는 말이야.” 그가 읊은 과거는 전부 어릴 적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희명군은 완전한 타인이 아니라 진짜 휘언의 일부였던 것이다. “하면 그날 일도 나리의 기억 속에 있나요?” “8년 전 사건 말이냐.” “예.” 그는 세령을 가만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털어놓았다. “애석하게도 그건 몰라. 어머니와 네 모친이 쓰러진 후부터 기억이 시작되었으니까. 나를 보고 놀라서 뒷걸음치다 마루 뒤로 떨어지던 너 또한 기억나지만, 그전의 기억은 없다.” “하면…… 나리는 제가 도화 언니 대신 이 방에 오기 전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거네요?” “알았지. 그놈이 기억 속 여자애를 그리워하고 또 갈망한단 걸 우연히 알게 되었으니까. 해서 나는 이 저주가 네게서 비롯된 것이 아닐지 의심하였어. 이 광증의 변수가 너일 것 같아서, 너와 마주하면 사라지는 건 결국 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수하도 모르게 감시하고 있었다.” “…….” “다 아는 것처럼 굴어서…… 그걸 빌미로 너를 속여서, 기분이 상하였느냐?” 그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허언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하나 세령은 사내의 허언 때문에 홀로 심각해진 것이 아니었다. 바람대로 희명군이 어머니들을 죽인 자가 아니라는 것은 기쁘지만, 그날의 진실조차 모른다니. 갈피를 잃은 기분이었다. 만일 희명군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다면, 모든 실마리는 희명군이 아닌 휘언에게 있겠지. [이제는 말씀해 주시면 아니 될까요? 그날 어머니들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나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건지.] [난…… 나는…… 잘 모르겠어. 기억이 온전치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간 일들도 전부 희미해져만 가서, 알던 것들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하나 그놈이라면…….] 그때 진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아는 것은 다 털어놓으라고 채근하여야 했는데. 휘언에 대한 믿음이 컸던 터라 당연하게 의심을 거두었다. “……나리. 궁금한 것이 또 있습니다.” “말해.” “나리가 그런 것처럼, 휘언 나리, 그러니까…… 다른 혼도 어릴 적 기억 중 일부만 갖고 있을까요?” “그건 그놈에게 물어야겠지.” “…….” “왜, 물어봤는데 답하지 않더냐?” 말문이 막혀 대꾸하지 못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명군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그랬군. 물어도 저 불리한 내용은 거짓으로 답하였겠지.” “…….” “내가 말하였잖아, 비겁한 놈이라고. 네가 궁금해하는 것, 그놈은 전부 알고 있을 거야. 켕기는 것이 있으니 입을 다물었을 것이고.” 예전 같았더라면 헐뜯지 말라고, 당신 말은 믿지 않겠노라 항변하였을 것인데,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언젠가 희명군이 제게 하였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놈을 정말 다 안다고 생각하느냐?] 세령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알던 휘언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또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나. 함께였던 기간보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긴데, 정말 자신이 휘언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게 맞나. 알았다 한들 8년이라는 시간 후에도 한결같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에 대해 자신이 정녕 다 알았다면, 희명군이 휘언의 흉내를 내었을 때 속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령은 자신의 믿음이 순식간에 깨어지는 것을 느끼며 탄식하였다.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곁에 있던 희명군은 그런 세령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덩달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끼니때가 지난 묘원각의 낮은 제법 한갓졌다. 반빗간에서 손님에게 나가던 다과를 몰래 챙겨 나온 영선은 어느 객당 문을 열고 조심스레 들어갔다. 그 안에는 성호가 앉아 있었다. “나리,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혹 출출하실까 봐 주전부리 좀 챙겨 왔습니다.” “아니다. 내 멋대로 원하여 온 것이니 몇 시진이고 기다려도 괜찮다.” “이것 좀 드셔 보셔요. 귀한 객이 오실 때마다 내어가는 약과인데 제가 부탁하여 받아 왔습니다.” “그래? 너는 정말 이 묘원각에서 중한 사람인가 보구나.” “아이, 그 정도는 아니옵고…….” “하하. 겸손은.” 시원하게 찢어지는 입매가 제법 근사하였다. 나이 차는 열 살도 훌쩍 넘을 것인데, 선비다운 흰 피부와 때 묻지 않은 얼굴이 본래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해서 사내와 단둘이 차를 마시는 게 처음인 영선은 공연히 낯을 붉혔다. 영선은 열 오른 뺨을 문지르며 차를 홀짝이는 성호를 따라 찻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연신 사내의 눈매를 흘끗거렸다. 그러자 곧고 집요한 눈길이 찻잔 너머에서 뻗어 왔다. 일순 영선은 화들짝 놀라, 눈꺼풀을 내렸다. “너무 긴장할 것 없다. 내 네게 그저 묘원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이니.” “묘원각 돌아가는 이야기요?” “빌미는 그러하고, 네가 어찌 지내는지도 궁금하여 겸사겸사.” “어머나.” 영선은 손끝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내숭을 떨었다. 속으로 나이 차이가 무에 중하냐 따지면서. ‘저 정도 나이라면 슬슬 본처가 질릴 법도 하니 첩을 새로 들이고 싶겠지? 한데 때마침 나를 만나신 거야.’ 어느 집안 사내인 줄은 모르지만, 주렁주렁 매단 장신구와 질 좋은 두루마기는 풍족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눈이 먼 영선은 별 추잡한 생각까지 해 가며 헛된 욕심을 가졌다. 그러고는 그에게 들려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마구 떠올렸다. 혹여 재미가 없으면 금방 자리를 뜰 것 같았으니까. 기실 제 일상이랄 건 허드렛일하는 게 전부였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 영선은 곰곰이 생각하다 성호와 같은 성을 가진 계집을 떠올렸다. “그, 저번에 말한 은세령이란 아이 말입니다.” “음.” 성호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척 찻잔을 만지작거렸지만 대충 보아도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화 주제를 잘 고른 듯하였다. 이에 영선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요즘 묘원각 주인과 사이가 무척 좋아진 모양입니다.” “원래도 총애를 받는다고 하였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좋아졌단 말이냐?” “그땐 그래도 한때의 변덕일 줄 알았지요. 시간이 흐르면 흥미가 줄어들 터이고 그리하면 버려질 노리개일 뿐이라고 다들 예측하였을 겁니다. 높으신 분의 총애라기에는 좀 수수한 댕기나 노리개 같은 걸 받았으니까요. 한데 어째 근래 들어 그 방에 값비싼 패물들이 매일 같이 들어가지 무업니까? 본인은 원하지 않는다고 돌려보내려는 것 같았는데, 그럴수록 마루에는 패물이 그득그득 쌓여 가서…… 이거 뭐, 애라도 들어선 게 아닌지 의심…….” “무어?” “헙, 소, 송구합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려던 건 아닌데.” <45> 나불대던 입을 뒤늦게 틀어막는 척하자, 성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몸을 살짝 기울여 왔다. “계속 이야기해 보거라. 두 사람이…… 그런 깊은 관계가 된 게 확실하느냐?” “흠흠, 그건 제가 장담하옵니다. 묘원각 주인의 방을 치우는 것도 제 몫이니까요. 하루가 멀다고 이불을 갈아야 할 정도라니까요.” “허! 하면 네 추측도 일리는 있겠구나. 아이라…… 팔자는 확실히 피겠군.”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성호의 눈에 어떠한 욕망이 그득 피어올랐다. 영선은 그 순간 성호가 호기심을 갖는 게 저인지, 아니면 세령인지 긴가민가해졌다. “한데…… 은세령 그 아이에게 꽤 관심을 보이십니다.” “음? 무슨 소리 하는 게야. 나는 그저 네가 말을 재미나게 하니 흥미가 일었을 뿐이란다.” “제 이야기가…… 그리 재밌습니까?” “그뿐이냐. 목소리도 고와 계속 듣고 싶어져.” “어머……. 그리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뭐든 다 내어줄 듯한 온화한 낯으로 제가 무어라도 된 듯 바라봐 주는 사내는 생전 처음이었다. 남녀 관계에 면역이 없던 탓에 영선은 그를 의심하던 것도 잊고 주책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소매로 감추며 헤실거렸다. “그나저나 너처럼 귀한 아이가 그런 곳에서 방 치우는 일이나 하고 있다니, 힘들지는 않느냐?” 영선은 성호가 어설프게 말을 돌렸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감격에 찼다. 그저 제 일이라고만 생각하여 이런 걱정을 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초를 겪는 것을 딱하게 여겨 묘원각에서 빼내 주려나, 하는 기대마저 들었다. 감동하여 코끝까지 찡해진 영선은 당장 눈앞의 사내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애써 처량한 모습을 가장하였다. “힘들지만 무어 어쩌겠습니까. 저 같은 계집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내 안타까워 그러지.” “제가…… 안타까우셔요? 어찌하여서요? 저는 그저 한낱 계집종일 뿐인데.” “사람에게 마음이 쓰이는데 이유가 있겠느냐. 뭐, 구태여 들어야겠다면 내 말 못 할 것도 아니나, 사내의 속내를 표현하는 건 이 나이 들어도 여전히 쉽지 않은지라……. 네가 내 마음을 먼저 헤아렸으면 하는 심정인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제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하나 신분도 그렇고 나이 차도 있으니 아무래도 직접 표현하기엔 쉽지 않을 테지. 영선은 그리 지레짐작하며 홧홧해진 얼굴에 부채질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땀이 삐질삐질 났지만 입술은 절로 씰룩였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나리.” “그래. 고맙구나. 영특하여 알아들을 줄 알았다. 아, 그렇지. 내 너만 괜찮다면 네가 지내는 곳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제가 지내는 곳을요? 그런 누추한 곳에 어찌…….” “별다른 뜻은 없단다. 그저 너를 알고 싶은 사내의 호기심이라 여겨 주면 좋겠구나. 겸사겸사 함께 산보도 하고.” “조, 좋습니다! 하면 지금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래.” 살다 살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입이 귀에 걸려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영선은 감정을 감추는 것을 포기하고 으쓱 어깨를 세운 채 사내와 나란히 묘원각을 둘러보았다. 성호가 유독 행랑채에서 지내는 이들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았지만, 그 또한 저에 대한 관심이라 여기고 신이 나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기도 하였다. * * * 두 혼에게 같은 가락지를 선물한 것은 꽤 효과가 좋았다. 눈앞의 사내가 다른 조각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가락지 놀음하듯 만날 때마다 손을 먼저 보고 상대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버릇이 생겼지만, 두 사내는 그저 세령이 선물한 것을 찾는다 여기고 순순히 가락지를 내보였다. 무엇보다도 희명군이 가락지를 선물받은 이후로 순한 양이 되었다. 물론 정사를 나눌 땐 여전히 짓궂었지만 그 외에는 휘언과 헷갈릴 정도로 다정해졌다. 다만, 예전에 휘언이 그랬던 것처럼 온갖 패물을 포기하지도 않고 매일 한가득 보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되돌려 보낼 때마다 곱절로 안겨 주는 통에 세령이 먼저 나자빠졌다. 고집이 어마어마하여 별수 없이 받아 두기로 한 것이다. 한데 하나같이 사치스러운 것들이라 방구석에 쌓아 두고만 있으니 희명군은 거기서도 심통이 났다. [왜 내 선물을 처박아 두고만 있는 게야? 마음에 차지 않아?] [아닙니다. 제가 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것들이라…….] [내 너를 생각하면서 고른 것이다. 안 어울릴 리 없어. 설마 나 몰래 조금씩 팔아 버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본인을 만나러 올 때 새 패물을 달고 오지 않으면, 제 입으로 하고 오겠단 말을 뱉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아서 힘든 밤이 되었다. 해서 세령은 그가 준 것을 방치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휘언 쪽이 안녕한 것도 아니었다. 장날 놀러 가지 못한 게 한이라도 된 듯, 그는 요즘 들어 세령을 데리고 쏘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우리가 지낼 집 말이야. 오래 머물기에는 산이 가까이 있는 것이 좋으려나? 음……. 짐승이 내려올 수 있으니 위험할 수도 있겠구나. 세령이 네 생각은 어때? 한 번 가서 보고 올까?] [지금요?] [그래. 나간 김에 새로 열린 가구점에도 한번 들러 보자. 서역에서 들인 물건이 있다던데 거기 네 취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좋은 것을 발견하면 누가 사 가기 전에 미리 선점해 두는 것도 좋겠어.] 그는 뜬금없이 세령의 취향을 속속들이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살림을 차릴 기세였다. 세령은 8년 전 사건을 캐물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그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녹초가 되어 깜박 잊기 일쑤였다. 그뿐이랴. 요즘은 휘언도 꽤 담대해져서, 교접까지 가지는 않아도 접문을 하다 옷 위로 가슴을 더듬는다거나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비비적대는 등 유사 행위가 늘었다. 그 감질나는 접촉에 애가 달아서, 무심코 희명군에게 하듯 양물을 조르게 될까 봐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세령은 되레 실내에 있을 때 정신이 더 없어져서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할 수는 없었다. 하여 세령은 오늘도 외출을 마치고 귀빈채에 돌아오자마자 입을 맞추는 휘언을 애써 밀어냈다. “하아, 흐…… 나리, 잠시, 잠시만요.” “왜, 세령아. 나 급한데.” “이따가 하면, 읍…….” 고개를 물러도 곧이곧대로 따라와 쪽쪽거린다. 기어이 벽까지 밀린 세령이 미약한 힘으로 밀어내니 입술 선과 뺨에 사내의 입술이 뭉개졌다. “피하지 마.” “얘기, 얘기 좀 해요. 네?” “무슨 이야기? 지금 이보다 더 중한 거야?” 그가 꽃사슴 같은 눈망울로 밀어내지 말라고 아련하게도 호소하였다. 그에 반해 못된 손은 이미 세령의 허리를 지분거리며 언제고 저고리 안으로 들어올 것처럼 굴었다. 훤히 보이는 수작질인데도 수려한 낯은 다잡은 마음을 자꾸만 흔들었다. 이러다가는 또 홀라당 넘어갈 게 뻔하였다. “중합니다……! 저한테는요.” 그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죽였지만, 세령이 눈을 질끈 감고 밀어내니 하는 수 없이 방석을 가져와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세령의 손을 끌어다 앉혔다. 본인은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무얼 이렇게까지 하는지. 귀빈 대접이 따로 없었다. 하긴, 원하면 제 입을 막고 계속 접문이나 해도 될 법한 위치에 있는 사내인데 이리 말을 들어주는 것부터가 과분하긴 하였다. “해서, 할 말이 무엇인데?” 그는 조금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세령의 두 손을 꼭 잡고 당장에라도 입술을 포갤 수 있을 만큼 간격을 좁혀 왔다. 열렬한 눈빛 탓에 또 사내에게 휘말릴 것 같아서, 세령은 슬금슬금 고개를 물렀다. “그…… 예전에도 여쭈었던 것인데요.” “응?” “8년 전 사건 말입니다.” 일순 굳어지는 얼굴에 세령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것이…… 왜?” “여전히 그날 기억이 온전치가 않으십니까?”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사내는 세령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응. 본디 기억이라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법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흐릿한 기억이라도 듣고 싶은데…… 말씀해 주시면 아니 됩니까?” 휘언은 세령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곧게 폈다. “말해 줄 이야기 같은 건 없어.” “네?” “나한테는 없는 기억이야. 그저 주변에서 내 짓이라 떠드니 그리 받아들였을 뿐.” 수상할 정도로 단호한 음성이었다. 선뜻 말해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칼같이 자를 줄도 몰랐다. 하여 세령은 표정에서 실망감을 지우지 못하였다. “하면 그날…… 저도 못 보셨겠네요.” “……뭐?” “그 일이 벌어진 걸 처음 발견한 사람이 저였다는 걸, 나리는 모르고 계셨겠네요. 그렇다면 저는 그날 대체 누굴 본 걸까요?” “…….” “제 기억까지 부정하실 겁니까?” <46> “난…….” 달싹이던 휘언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불신 어린 세령의 낯이 당혹스러워 가슴이 벌컥벌컥 뛰었다. ‘고작 그걸 숨겼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잖아. 너도…… 너도…… 나를 속였으면서…….’ 솔직히 말하면, 세령이 다른 조각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하나 그놈은 비열하기 짝이 없으니 분명 세령의 약점을 쥐고 휘두르고 있으리라 여겼다. 귀한 여인을 아끼지 않고 마음껏 괴롭혔겠지. 그러니 세령이 그자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없어. 그렇게 확신하였다. 그런데 웬걸. 세령과의 저자 나들이를 놓칠까 봐 밤을 새웠던 날, 하루를 통으로 그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루 정도야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던 제 실수였다. 그래도 멀쩡히 깨어났더라면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하필 세령의 나신에 몸을 묻었을 때 깨어나고 말았다. [흐읏, 나리…… 왜 갑자기 멈추십니까.] 눈앞에 펼쳐진 장면만으로도 충격이었으나 고운 입에서 나온 말에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 도대체 몇 밤이나 함께 하였을까. 얼마나 이 여린 몸을 탐닉하였기에 밀어내지도 않고 이리도 갈구하는 걸까. [나리, 하아, 나리이, 아!] 칭얼대는 음성에, 온몸을 쥐어짜듯 옥죄는 내벽의 감촉에 더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쾌락에 이성을 잃은 휘언은 요령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그런데도 세령은 흥분에 차 그의 몸을 더욱 끌어당겼다. 처음 품은 여인의 몸은 달고 중독적이었으며 전신이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다른 혼을 원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파정과 동시에 몸에서 튕겨 나가 버렸다. 희명군 그자가 저 대신 저자에 갔단 사실쯤은 다음 날 무혁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해서 저를 기다리다가 그저 쉬었다는 세령의 거짓은 극심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대체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이 상처받을 걸 우려한 게 아니라, 다른 조각과의 행복한 시간을 숨기고 싶은 거라면……. 자신이 순순히 잠들어 주어야만 세령이 희명군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다. 해서 그 때문에 저와의 시간을 애써 참아 주는 것이라면 정말로 어찌하지. “나리, 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까?” 말? 대체 무슨 말. 세령아. 나는 네가 듣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이제는 말씀해 주시면 아니 될까요? 그날 어머니들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나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건지.] [난…… 나는…… 잘 모르겠어. 기억이 온전치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지나간 일들도 전부 희미해져만 가서, 알던 것들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하나 그놈이라면…….] 휘언은 세령이 추궁하였던 과거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이 그때 어떤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하였던가. 그간 세령이 꺼리는 인간의 특징은 모조리 희명군의 것인 양 살아왔다. 난폭하고 사람을 해치는 데 스스럼이 없으며 제멋대로인 사내. 그게 희명군이자 제게서 뜯어져 나간 조각이었다. 해서 같은 몸으로 저지른 일이래도 비도덕적인 짓은 희명군이 이 몸에 멋대로 붙어 있는 탓이라 여겼다. 그러다 보니 세령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사내의 탓을 하였다. 말을 끝맺지는 않았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임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 그랬다. 그렇지만 그날 일을 재차 묻는 말에 더 단호하게 무관을 주장하니, 세령은 자신이 누굴 본 것이냐고 추궁한다. 이에 휘언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였다. 네가 기억에 없단 거짓말을 어떻게 해. ‘그렇다고 내 짓이 아니라 말하면…… 그놈의 무죄를 밝혀 주는 꼴 아닌가?’ 그리하면 세령의 동정은 제가 아닌 그놈에게 갈지도 모른다. ‘일말의 동정이라도 붙들지 못하면 내 곁에 너를 붙들어 맬 방도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지금 세령이 8년 전 사건에 대해 묻는 것도 희명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함인 것 같아서, 자신을 두고 그놈에게 마음을 쓰는 것 같아서 가슴이 선득해졌다. 새삼스럽게 검은약이 당겼다. 진작 손을 뗐는데도. “……나리? 어디 안 좋으신 겁니까?” 휘언은 세령의 동공에 비친 자신의 딱딱한 표정을 발견하였다. 늘 정인의 앞에선 다감한 얼굴을 하고 있다 확신하였는데, 지금은 제 입꼬리도 눈빛도 멋대로 되질 않았다. 하여 사내는 제 얼굴을 숨기는 것을 택하였다. “하아, 세령아…… 생각을 많이 하였더니 머리가 아파.” 약한 소리를 하며 세령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자, 가녀린 몸이 움찔하였다. 다행히 조금의 애정은 남아 있는지 제 등을 안아 주기까지 하였다. “……무리하게 과거 일을 떠올려 그러시는 겁니까?” “그런 듯해. 솔직히 죽어 가는 모친을 떠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 지척에서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세령은 이내 캐묻길 포기한 모양이었다. 약한 소리를 한 게 역시 효과가 좋았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질 않았다. 세령이 이런 식으로 계속 흐지부지 넘어가 주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놈이 8년 전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만일 그 모든 것을 그놈이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세령이 저를 찾을 이유가 영영 없어질 것 같았다. 한데 대답을 회피하는 제게 구태여 묻는 것을 보면, 그놈은 진실을 모른단 뜻이겠지. 하면 끝까지 함구하는 게 나을까. 아니, 그깟 진실보다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세령을 붙들어 맬 수 있을 만한. “세령아.” “네, 나리.” “사람을 찢어 죽이는 자는 나쁜 놈이지?” “네? 뜬금없이 그런 건 왜…….” “그렇잖아, 응?” 그러니까 너는 과거 일과 상관없이 나를 좋아해야 하는 게 맞잖아. 그는 순진한 눈망울을 가장하고 고개를 살짝 틀어 세령을 응시하였다. 눈이 마주친 세령에게 대답을 채근하듯 더 파고드니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동조해 주었다. “뭐,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러나 얼버무리며 내거는 조건에 휘언의 입가가 뻣뻣해졌다. 기어이 그놈 역성을 드는 것 같아서. “세령아, 이런 얘기 그만하고 접문하자.” “……예?” “접문해 줘, 응? 얼른.” 그의 언행은 자신이 보아도 억지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게 뜻대로 되질 않아서 세령의 입술이라도 물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제 과오를 캐묻는 듯한 입을 이렇게라도 막고 싶었고. 해서 넋이 나간 여인에게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고 입술을 열어 파고들었다. 흡, 하며 삼켜지는 소리와 혀끝에 닿는 타액이 달고 씁쓸하였다. 전에는 달곰하기만 하였는데,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오늘은 이렇게 모면하였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딴 것보다 세령의 마음이 그놈에게 향하였을까 봐 더 신경이 쓰인다. 대체 왜. 그놈의 어느 구석도 좋은 점 따윈 없잖아. 그는 쉬이 연민을 느끼고 저를 받아 주는 여인을 다행스레 여기면서도 그 마음이 다른 쪽에도 향하였을까 봐 목이 탔다. 해서 세령의 입안을 헤집으며 기갈을 축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날은 아무리 혀를 빨아 대도 좀처럼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 * *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내는 각자의 시간 동안 세령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질 않았다. 희명군은 늘 그랬듯 세령의 기력을 다 빼놨고 휘언은 혹여 8년 전 일을 또 물을세라 밖을 더 나돌며 다른 것으로 시선을 끌었다. 둘 다 자신을 만나지 않는 시간에는 세령이 곯아떨어져 내심 상대 혼을 만나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나 어떤 혼이든 휘언은 휘언이었다. 세령이 피곤하여 곯아떨어지기 직전이래도 무조건 제 곁에 두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다 보니 세령의 하루는 일각처럼 바삐 흘러갔다. 어느새 끈적이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벌써 아침저녁으론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하아. 휘언 나리를 앉혀 놓고 과거 일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하는데…….’ 무얼 여쭐 새도 없이 매번 어딜 가자, 무얼 사자, 정신없이 굴고 분위기가 좀 잡힐만하면 입술부터 들이대니 틈이 없었다. 온기가 다 사라진 낯으로 무섭게 바라보기에 당황하여 그날은 흐지부지 넘어가 버린 제 탓도 있긴 하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거짓말한 것을 인정하고 진실을 털어놓으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라 여겼다. 해서 그땐 회피하는 사내에게 맞장구쳐 주고 먼저 입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그렇지만 휘언은 이후에도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고 있었고 이대로 영영 묻히게 두려는 속셈인 듯하였다. 그러니 자신이 먼저 불편한 주제를 꺼낼 수밖에. 이제 슬슬 올 시간이니, 세령은 그를 마중 나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한데 때마침 행랑채에 들어서는 영선과 한 사내를 맞닥뜨렸다. “……외숙부님?” <47> 예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라, 세령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영선 또한 놀란 얼굴로 성호와 세령을 번갈아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세령아.” “예는 어찌…….” 세령이 말을 다 뱉기도 전에 영선이 끼어들었다. “나리, 분명 은세령은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내가 오해한 모양이야. 먼 친척 중에 동명이인이 하나 있거든. 난 당연히 그 사람이겠거니 하였어. 왜냐하면 세령인 내가 직접 시집을 보냈으니까. 생각해 보거라. 이 손으로 직접 꽃가마에 태웠는데, 어찌 예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느냐.” 당황한 여인들과 달리 성호만이 이 자리에서 평온한 낯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하면…… 두 사람이 외숙과 조카 관계라고요?” “그래. 나도 놀랐단다. 설마 저 아이가 예 있을 줄이야…….” “……그렇군요.” 미심쩍은 얼굴이었던 영선은 성호의 말은 뭐든 신뢰한다는 듯이 곧장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작금의 상황을 여전히 이해 못 하는 것은 예서 세령뿐이었다. “영선아.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좀 피해 주겠느냐?” “아이, 왜 미안해하십니까. 오랜만에 만난 조카이니 응당 말씀 나누셔야지요. 하면 필요한 게 있을 때 불러 주셔요.” 성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청하자 영선은 허리를 배배 꼬며 수줍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떠났다. 그 모습이 어째 예사 관계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세령아. 밖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도 되겠느냐?” “아, 네. 차라도 내어 올까요?” “아니다. 내 금방 가 봐야 하니 짧게 이야기나 나누자꾸나.” 세령은 성호를 방 안에 들였다. 정리되지 않은 패물에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성호는 눈길만 슬쩍 줄 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제 방인 양 편하게 자리를 잡는 성호와 달리, 세령은 남의 방에 온 듯 쭈뼛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저어, 영선이와는 무슨 사이십니까?” “아까 그 계집종 말이냐?” “예.” “허. 내 멀쩡히 처자식이 있는데 계집질을 의심하는 것이냐? 장사꾼이니 그저 오며 가며 안면을 튼 게 다다. 그뿐이야. 한데 너는 보자마자 안부보다도 그런 것을 묻는 게냐.” 거의 질색하며 손사래 치는 모습에 세령은 말실수하였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먼저 연락을 드려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아니다. 보아하니 잘 지낸 모양이로구나.” “다른 여인들에 비하면 운이 좋았지요. 줄곧 연통을 넣고 싶었는데, 제게 닥친 상황을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시간이 이리 흘러 버렸습니다.” “부러 이곳으로 달아난 것이냐?” “……예?” “네가 매파까지 속이고 묘원각으로 다시 돌아왔을 줄은 몰랐다.” 다 알고 온 줄 알았거늘, 외숙부는 본인이 매파에게 사기를 당했단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해서 세령은 더듬더듬 오해를 풀었다. “아, 그게…… 제 발로 온 것이 아닙니다. 중매쟁이가 저를 이곳에 팔았습니다. 외숙부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많이 속상해하실 것 같아서 말을 아꼈던 것이고요. 상황이 좋아지면 그때 연락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 “예.” 본래도 무던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어째 성호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되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러다 쌓인 패물 더미에 시선을 박고 대뜸 코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음.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알던 것보다 네가 욕심이 많았던 모양이야.” “그게 무슨…….” “저것을 전부 팔면 묘원각에서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인데, 이곳 생활이 잘 맞았던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저건 제 것이 아니고 돌려주어야 하는 물건들입니다.” “네 것이 아니면서 네 방에 둔 연유가 무엇인데? 훔치기라도 하였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게 아니면, 치마폭이라도 들춰 사내에게 받아 낸 것이냐?” “……네?” 웬만하면 사사로운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던 외숙의 눈동자에 경멸이 어렸다. 처음 보는 모습에 세령은 심히 당혹스러웠다. 하여 선뜻 대답하지 못하니, 성호의 반듯한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8년 전, 너를 내 집에 데려왔을 때 묘원각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한참 난리를 피웠더랬지.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체념하는 듯하여, 이곳이 이제는 꼴 보기도 싫어졌겠거니 하였다. 해서 연락이 끊긴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어. 예서 내 누이와 똑같은 짓거릴 하고 있으리라곤 더더욱 예상치 못하였고.”  “……똑같은 짓이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하나 오해가 아니었음을 알려주듯 성호는 처음 보는 눈빛으로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말을 덧붙였다. “내 너를 거둔 것이 사무치게 후회가 되는구나. 그렇게 가 버린 네 어미가 불쌍하여 너를 내칠 수 없었던 것인데. 네 어미의 부탁만 듣고 그날 여길 왔던 게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어머니가 화두에 오르자 세령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풍족하지도 않은 살림에 군식구까지 데려와 눈치 보였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귀한 자식이라 여겼다. 내 처자식이 혹여 널 홀대할까 봐 별채에 따로 지내게까지 하였어. 기껏 그리 여염집 규수처럼 키워 놨거늘, 천박한 핏줄은 어딜 가지 않나 보구나. 어차피 이리될 줄 알았으면 그날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가 보호하지 말 것을 그랬다.” 여염집 규수라니, 정녕 그리 생각해 왔던 것인가. 별채라 하였지만, 기실 곳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좁고 바람도 제대로 막아 주지 않던 낡아 빠진 공간. 그래도 군식구인 것을 알았기에, 누이를 잃은 원흉이라 여길 수도 있었기에 외숙이 저를 온전히 품을 수 없음을 이해하였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고 지낼 뿐 아니라 나서서 집안일도 거들고 밉보이지 않으려 부단히도 노력하였다. 성호가 없을 때마다 그의 처자식이 온갖 집안일을 전부 제게 미루며 폭언을 일삼았지만, 굶기거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손찌검도 없었고. 성호가 있을 땐 가족처럼 대해 주는 척이라도 하였으니, 세령은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라고 버릇처럼 되뇌었다. 어머니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저는 진즉 죽은 목숨이었으리라고, 그러니 감사히 살아 내야 한다고 합리화를 하였더랬다. 해서 뜬금없이 제안한 혼사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혼인할 상대가 나이 지긋한 노인이라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도성에 산다고 하니 묘원각과는 가까워지겠구나 싶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조사해 볼 기회가 있을 테니 그걸로 참아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제는 장성하였으니 더 신세 지는 것도 염치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고. 혼례를 원한 적은 없었지만 자식도 아닌 제 혼처까지 알아봐 준 마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늘 도성에 가고 싶어 하였으니 외숙께서 그나마 그쪽에 시집을 보낸 것이 아닐까, 여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믿었을 만큼 외숙은, 제게 이런 무뢰한이 아니었다. 하여 작금 제게 쏘아 대는 멸시는 너무도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외숙부님, 뭔가 오해가…….” “오해? 무슨 오해. 아아, 저 패물이 네 것이 아니라는 거 말이냐? 하면 예는 어느 사내의 곡창이겠구나. 해서 너와 같이 이곳에 보관해 두는 것이겠고.” “…….”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게 이리 날을 세울 정도라면 사정이 많이 안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하나 충동이라기엔 자꾸만 외숙의 시선이 패물 더미로 향하였다. 탐욕을 그득 드러낸 채로. 저런 낯으로 치마폭을 들췄다느니 천박한 핏줄이라느니 하는 소릴 지껄이는데, 순수하게 키워 준 은혜에 감사를 표하겠노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절 인연이란 것이 있듯이, 외숙과 저의 연은 그 집을 나올 때 끝나야 했다. 이렇게 빚이라도 남은 양 구질구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얼마 되지는 않지만 가락지 팔아 모은 돈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도 가락지 판 돈이 조금 모이면 기가 막히게 알고 우는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이를 안타까이 여겨,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긁어다 드렸었다. 하나 세령은 더 이상 그때의 순진한 아이가 아니었다. 외숙의 목적 정도는 이제 뻔히 보였다. “얼마 아니 된다? 그것으로 8년의 양육비를 대신할 생각이었느냐? 하하, 하하하! 방에 패물은 잔뜩 쌓아 놓고 하는 말이 고작?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다 나오는구나. 부모 없이 자란 게 이런 데서 드러나는 것인가.”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린 듯 보였으나 세령에게는 칼로 벤 것처럼 쓰라린 독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방 안에 있는 모든 패물을 전부 내어 주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나 희명군에게 받은 물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었다. 패물을 줘 버리고 그 행방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이해해 줄 사내였지만, 이건 순전히 자신의 문제였다. 그러니 제 선에서 해결해야 했다. “저 물건은…… 전부 돌려주어야 할 물건이에요. 저것 말고, 은혜를 달리 갚을 방법이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세령은 응어리진 감정을 꾹 누르고 애써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성호의 입에서는 비소가 터졌다. “이 많은 것 중 양부인 내게 줄 것이 단 하나도 없더냐? 하! 배은망덕한 것. 이제야 네가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몇 번 호사를 누려 보니 돈독이 오른 게야, 응?” “…….” “그래 뭐, 갚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만…….”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는 성호의 낯이 기이할 정도로 음산해졌다. 세령은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으나 기세에 밀려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있지. 아주 중한 일이. 저 패물을 네게 준 사내에게 내 볼일이 조금 있거든.” <48> “……패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어찌 모르겠느냐. 이 묘원각에 네 소문이 파다한 것을.” “…….” 소문이라니. 일개 장사치가 묘원각 주인과 그 하인에 대한 소문을 어찌 듣는단 말인가. 입이 가벼운 영선의 짓이란 것쯤은 추측할 수 있었지만, 좀 전에 외숙은 분명 세령이 동명이인인 먼 친척인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또한 거짓이었겠지. 작금의 태도로 보아 처음부터 외숙의 목적은 묘원각의 주인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게 자신인 걸 알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고. “네가 정녕 키워 준 은혜를 갚겠다면, 묘원각의 주인을 만나게 해 다오.” “무슨 연유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내끼리 큰일을 도모하고자 함이니 한낱 계집은 알 필요 없다.” 아무렇지 않게 여인을 깎아내리는 모습에 세령은 말을 잃었다. 그 집에 몸을 의탁할 땐 눈치가 보여 최대한 시키는 일만 하고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살았으니 외출이 잦은 외숙부와 마주칠 일은 흔치 않았다. 우연히 마주하더라도 외숙은 안부 정도만 묻는 게 다였으며 어미의 죽음을 파헤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세령을 달래 주기도 하였다. 그러니 그가 무심한 듯 보여도 속은 다감할 줄 알았다. 한데 전부 착각이었다. 오늘 본 모습은 전부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세령의 직감은 두 사내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연유를 알지 못하면 저 또한 자가께 자리를 청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리 갑갑하게 구는 것이냐? 그저 네가 찾아뵐 때 나와 동행하면 되는 것을.” “그래도 제 마음대로 그럴 수는 없는…….” “하아.” “…….” 짜증을 가득 담아 내쉬는 한숨에 세령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거라. 키워 준 은혜 따위 네 알 바 아니라고.” “아닙니다, 저는 그런 뜻이…….” “내 네게 양부 노릇을 8년이나 하였다. 한데 금은보화 중 일부도 내어 주기 싫다, 만나고 있는 사내도 보여 주기 싫다. 하면 너를 거둔 나를 등신 취급하는 게 아니고 대체 무어란 말이지?” “시간…… 시간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어떻게든 돈을 더 모아서…….” “그럴 바엔 저 패물을 주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어차피 넌 나를 두고두고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말씀드렸듯이 저 물건은 제 것이 아니라…….” “거짓말 좀 작작 하거라! 이런 건 발에 챌 만큼 가졌을 사내가 돌려받을 생각이나 하겠느냐? 그럴수록 네가 탐욕스러워졌단 걸 인정하는 꼴밖에 더 되느냐는 말이다!” “…….” 별다른 방도가 없어 세령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자 저를 무시한 거라 여겼는지 그가 역정을 냈다. “하아, 되었다! 내가 네게 무얼 바란 것이 문제지! 나도 이제 네가 꼴도 보기 싫구나. 알아서 챙겨 갈 터이니 신경 끄거라!” 외숙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패물에 손을 뻗었다. 8년이란 세월 동안 본 적 없는 외숙의 모습에 얼떨떨해 있던 세령은 그가 값비싼 것만을 골라 주섬주섬 챙기는 걸 보고 뒤늦게 팔을 붙들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놔라!” “읏.” 팔을 뿌리치는 힘에 세령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꽤 강하게 밀쳐졌는데도 이 상황이 당혹스러워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게 가끔 돈을 요구한 적은 있어도,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하며 조심스레 도움을 청하였던 게 다였다. 이렇게 대놓고 탐욕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한데 본성이 이렇게나 포악한 모습이었다니. “사치스러운 것. 이리 쌓아 둔 패물 중 몇 개 가져간대도 표도 아니 날 것을, 쯧!” 세령이 넋이 나간 사이, 성호는 품과 소매, 그리고 가져온 주머니에 패물을 그득히 챙겨 일어섰다. 그러고는 매정하게 방을 나섰다. “아, 안 돼.” 후일을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급히 나가느라 발이 꼬인 세령은 외숙의 앞에 거의 엎어지듯 넘어졌다. 마당에 무릎이 갈렸지만, 세령은 손을 뻗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악착같이 쥐었다. “놓지 못하겠느냐?” “모아 둔 것은 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시일이 걸리겠지만 저를 키워 주신 은혜 또한 전부 갚겠습니다. 그러니 가져가신 것들은 전부 돌려주십시오. 제가 감히 손대서는 아니 될 물건들입니다.” “하! 내가 감히 손대서는 안 된단 뜻이 아니고?”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어찌 저 같은 게 그런 것을 감히 탐한단 말입니까.” “네가 차고 있는 그 화려한 비단 댕기나 풀고 말하거라. 우리 집에 있을 때보다 때깔도 고와진 것이 이런 패물쯤은 수십 개는 더 뜯어낼 낯짝으로 보이거늘, 왜 그리 집착하느냐? 왜 그리 욕심이 많아졌어!” “욕심을 내는 것은 외숙부님이십니다!” 세령이 언성을 높이자 성호의 이마빡에 핏줄이 서고 눈에는 불길이 일었다. “천한 계집이 감히 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게냐!” 기실 성호는 세령을 꼬드겨 희명군에게 물건을 팔아먹을 작정이었다. 패물 더미를 보자마자 탐이 나기는 하였지만 후일을 생각해 꾹 참았다. 그러나 고분고분하게 제 말을 들으리라 여겼던 세령이 협조하지를 않았다. 해서 패물을 인질 삼아 제 뜻대로 구워삶아 보려던 것인데, 콧대 높아진 계집이 감히 대거리까지 하니 짜증이 치밀어 더는 인내할 수가 없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구제를 말랬는데, 딱 이 건방진 계집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사내 하나 꾀었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느냐? 하, 요분질에 소질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 노인네에게 시집보낼 것이 아니라 네 어미처럼 진작 묘원각에 팔아 버릴 걸 그랬구나!” 패물을 빼앗으려던 시늉은 진심이 되어 버리고 그간 숨겨 두었던 괄시까지도 속절없이 터져 나왔다. “어찌…… 어찌 조카인 제게 그리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하! 조카? 내가 무어 너를 그깟 핏줄 때문에 데려온 줄 아느냐? 어차피 처음부터 성인이 되면 돈이 될 만한 집에 보내 버릴 목적이었다. 그 정도도 객식구에게는 크게 신경 써 준 편이지. 기생 밑에서 자란 계집이 멀쩡한 집안과 혼사를 맺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야.” “……처음부터 돈을 받고 저를 시집보낼 생각이었다고요?” 한 번 이성의 끈을 놓은 사내는 멈출 줄을 모르고 진실을 독하게 쏟아 냈다. “그래. 마침 웬 부유한 노인네가 새 장가를 들고 싶다기에 내 기회를 덥석 잡았다. 한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신부가 사라졌다더구나.” “…….” “혹 그때부터 그분을 꾄 것이냐? 해서 내가 베푼 것은 전부 하찮다고 여긴 모양이지?” “……그런 거 아닙니다.” “뭐, 결론적으로는 그 치마폭에 사내를 들였으니 다를 바 없겠지.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 봤자 너는 그분의 노리개일 뿐이란 걸. 한낱 유희거리일 뿐이란 말이다!” “…….” “결국 너도 회임하게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게 되겠지. 네 어미처럼. 아니 그러냐?” 세령의 속에서 울분이 들끓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앞의 사내를 죽이고 싶은 생각만 그득하였다. 하나 그리할 힘도 배짱도 없으니 세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호가 든 패물을 잡아당겼다. “이리 내십시오.” “어딜!” “어차피 저를 시집보낼 적에 이득을 취하셨을 것 아닙니까! 이런 것까지 챙기는 건 그저 강도질입니다!” “내 네 몸값만 받았지, 키워 준 값은 받은 적 없다!” “그런 걸 받을 생각으로 저를 판 것도 아니잖습니까!” “노망 난 영감에게 받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 값을 치러!” 순순히 놓아줄 사내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실랑이를 하였다. 그러는 중에 소매 안에 넣어 둔 패물이 하나둘 떨어지자 성호도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세령을 강하게 밀쳐 넘어뜨렸다. “이 독한 것, 썩 꺼지지 못해!” “아!” 그가 씩씩거리며 놓친 패물을 주우려는데, 언제 넘어졌냐는 듯 세령이 바짓가랑이를 도로 붙들었다. 분개한 성호는 기어이 뺨을 갈겼다. 세령은 소리도 못 내고 풀썩 쓰러졌다. 하나 성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격앙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웅크린 등에 발길질까지 하기 시작하였다. “이, 천한 것이, 탐욕만 가득하여,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흐윽, 윽…….” “원래 같았으면 쳐다도 못 볼 사내가 오냐오냐해 주니 네년이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하나 착각하지 말거라! 좀 잘해주니 천박한 핏줄이 고귀해진 줄 아는 모양인데, 추락은 누구보다도 비참할 것이야! 그러니 시건방 떨지 말고 정신…….” “이 찢어 죽일 새끼가 감히!” “으아악!” 그때, 세령의 등으로 쏟아 내던 무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욕설을 쏟아 내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패물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 다음으로 뻑, 소리가 났다. <49> “하악! 이, 이보시오! 나리, 진, 진정 좀……! 나, 나 은성호요! 욱!” 성호가 뭐라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그는 곧 말을 잃었다. 그리고 돌 깨는 듯한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윽, 어흐윽…….” 마당에 울려 퍼지는 게 죽어 가는 신음과 주먹질 소리임을 뒤늦게 깨달은 세령은 욱신거리는 몸을 비척비척 일으켰다. 고개를 드니 커다란 덩치 아래 외숙이 찍소리도 못 내고 깔려 있었다. “나, 나리? ……나리! 나리, 안 됩니다!” 순간 죽인 게 아닐까 싶어서, 세령은 기함하며 황급히 사내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허공으로 들어 올렸던 주먹이 멈칫한다. 인정 없는 구타에 당연히 희명군일 줄 알았거늘, 들어 올린 오른손 약지에 가락지가 끼어 있었다. “꺄악!” 제일 먼저 달려와 비명을 지른 것은 영선이었다. 그 소란으로 근처에 있던 하인들도 우르르 달려와 경악하였다. 피떡이 되어 혼절한 사내를 보고 다들 희명군이 사람을 맨손으로 죽였노라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살인이 아님을 알리듯 성호가 곧장 쿨럭 숨을 토해 내었다. “커헉, 끄으…….” “아이구야. 저걸 어째…….” 하인들은 기함을 토하였으나 저들끼리 수군거릴 뿐, 쉽사리 다가오지는 못하였다. 게서 감히 누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설까. 마주한 이들의 겁먹은 모습만 보아도 사내가 얼마나 섬뜩한 꼴을 하고 있는지 훤한 것을. 이런 와중에 침착한 것은 휘언뿐이었다. “거기. 데려가 치료하거라.” 덩치 좋은 사내종들에게 눈짓으로 명하자, 그들은 허겁지겁 달려와 성호를 부축하였다. “나, 나리. 이것들은 다 어찌할까요?” 그중 하나가 떨어진 패물을 가리키며 용감하게 물었다. “버릇없는 개새끼가 혀로 핥은 고기인 셈 칠 테니 치료비로 챙겨 주든 버리든 마음대로 해.” 무정한 음성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선득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상황에 그렇게나 침착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그러나 등을 돌려 허리춤에 매달린 세령을 안아 들 때, 휘언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깨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고. 그렇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처소로 성큼성큼 향하니, 세령 외에 그 누구도 사내의 동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 * * 귀빈채로 돌아온 휘언은 말없이 세령의 까진 무릎과 손바닥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터진 입술에 약을 바르다가, 이를 으득 물었다. 노여움이 들끓는 눈이었으나 그는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나리 손도 까졌습니다.” “…….” “제가 치료해 드릴…….” “되었어.” 쌀쌀맞다고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제게도 화가 난 것일까. 가끔 의뭉스러운 행동을 하여도 세령의 손길 하나면 사르르 풀어지던 휘언인데, 오늘은 노기가 풀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갑갑하고 앉은 자리가 불편해져서, 세령은 공연히 말을 돌렸다. “아까 그 패물들…… 줄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다. 한데 그걸 빌미로 네게 또 접근하는 게 싫어.”   “그래도…….” “선물한 내가 괘념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혹 아쉬운 게 있으면 말해. 새것으로 전부 다시 사 줄 테니.” 분명 오른손에 가락지를 끼고 있는데, 휘언은 희명군이 선물한 패물을 제가 준 것처럼 말하였다. 휘언은 늘 이렇게 희명군이 저지른 일들을 제 일인 양 이야기하곤 하였다.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일들까지 제 죄라 여기고 스스로를 학대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제게 사실대로 먼저 말해 줄 수는 없는지, 아픔을 공유하기엔 자신은 아직 미덥지 않은 사람인지, 수도 없이 생각하였다.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희명군이 휘언의 흉내를 내는 것 같단 생각이 물씬 들었다. 외숙을 죽일 듯이 팬 것도 그렇고, 저를 곁에 두고 살의를 계속 숨기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그 패물을 선물한 이가 자신이라 말하는 것 또한 진짜 같아서 어째 혼란스러웠다. “나리, 저…….” “저고리 벗어 봐.” “……예?” 그간 유사 성행위를 할 때도 옷은 벗긴 적 없는 사내였다. 하면 정녕 희명군이 또 휘언의 행세를 하는 걸까. 그렇지만 가락지는 분명 오른손에 있었다. 혹 세령이 가락지의 위치로 조각난 혼을 구별한단 걸 벌써 눈치챈 걸까. 하긴, 혼이 언제 바뀔 줄 알고 제때 가락지를 숨긴단 말인가. 한 번쯤은 위치가 달라진 가락지를 수상하게 여길 법도 하다. 이젠 어린애도 아니니 이런 기만적인 놀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없고. 희명군이라면 분명 이를 괘씸하게 여겼을 거다. 해서 되갚아 줄 요량이었는데 세령이 궁지에 몰린 걸 보고 무심코 본성을 드러냈던 거라면, 어느 정도 상황이 이해되었다. 요즘 잠잠하다 싶었는데 얌전해진 범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제 발로 술래를 자처한 가락지 놀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놈이 네 등을 발로 찼으니 상처가 있는지 봐야겠다. 그러니 보여 줘.” “아니, 괜찮습니다. 등은…….” “어서.” “…….” 단호한 목소리에 세령은 쭈뼛쭈뼛 등을 돌려 저고리를 벗었다. 맨 등을 보이자 뒤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 그 자리에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려야 했는데…….” 휘언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법한 험한 말이라 세령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역시, 희명군이 분명하였다. [너는 늘 내게 가락지를 숨긴 이를 어찌 그리 잘 찾느냐며 억울해하였지만, 네가 무언가를 숨길 때면 짓는 표정이 참으로 귀여워 모를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난 속이는 게 천직인지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고.] 그래,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어린 휘언은 어른들의 눈도 깜빡 속일 정도로 연기를 잘하였더랬다. 해서 세령은 눈앞의 사내가 희명군이라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흉측합니까?” “아니. 상처는 없지만…….” 그가 손을 뻗어 세령의 목뒤를 살살 어루만졌다. 손끝이 척추를 따라 내려가며 날개뼈까지 쓰다듬는다. 살갗을 쓸어 내는 감촉이 간지러워 몸이 절로 수그러들었다. “내일이나 모레 멍이 들지도 모르겠구나.” “흣.”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무언가 말캉한 것이 등에 꾹 짓눌렸다. 온기가 지척까지 가까워졌음은 알았지만, 등줄기에 입을 맞출 줄은 몰랐던지라 세령의 입에서 놀란 신음이 새었다. 그는 여인의 등을 훑던 손을 천천히 내려 가녀린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상흔에 입김을 불듯 척추를 따라 계속해서 쪽, 쪽, 입을 맞추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진작 올라타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을 것인데, 치맛말기 부근에서 느긋한 입맞춤만 이어지니 공연히 마음이 간지럽고 영 어색하다. 설마 스스로 치맛말기도 끌어내란 뜻일까. 아니, 그 뜻이었다면 직접 말로 하였을 것이다. 벌써 이로 뜯어 버렸을지도 모르고. 휘언도 아니고 희명군과 이런 진지한 분위기 속에 있는 건 조금 낯간지러웠다. 제가 얻어맞는 꼴을 보고 연민이 일어 이러는 줄은 알겠는데, 안 하던 짓을 하니 도저히 가만있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해서 세령은 살짝 짓궂은 투로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다. “나리. 이번엔 어떤 연유로 저를 속이려 하십니까?” “…….” 사내는 어쩐지 답이 없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제 등을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적막이 어색하였던 세령은 주책없이 더 지껄였다. “왜 답이 없으십니까?” “네 물음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이제 와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습니다. 두 번은 안 속습니다.” “내가 무얼 속였는데?” 이미 들킬 짓은 다 해 놓고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던 세령은 헛웃음을 흘리며 등을 돌려 그와 마주하였다. 결백을 주장한 사내의 눈빛은 우습게도 연약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또 휘언…… 그러니까, 다른 혼의 흉내를 내고 계시잖아요. 아주 재미 들이셨나 봅니다.” “…….” 당황한 티를 내듯 사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나 새카만 안광에서 삽시간에 걷히는 온기에 세령은 불안한 기운을 감지하였다. “왜…… 그리 아무 말도 아니 하십니까?” “……이제는 나조차도 그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렇게나 그놈을 바라게 된 거야?” “…….” “난폭한 사내보다 점잖은 사내가 좋다며.”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눈앞의 사내는 희명군이 아닌 휘언이었다. 외숙을 두들겨 팬 것도, 살벌하게 욕을 짓씹은 것도. 두 조각을 구별해 보겠다고 가락지 위치를 정해 줘 놓고 제 꾀에 자신이 걸려든 꼴이었다. 그리고 휘언은 진작부터 세령이 그의 병에 대해 알고 있단 걸 눈치채고 있었다. <50> ㅬ “어…… 나, 나리…… 그게…….” “사람을 찢어 죽이는 자는 나쁜 놈이라며. 하면 그놈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잖아.” 휘언이 당황한 세령의 팔을 콱 붙들며 중얼거렸다. 음산해진 눈빛 하나로 온몸이 새까만 덩굴에 결박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나리…… 저는, 그러니까…….”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해? 어찌해야 그놈 자리를 빼앗을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 해야 네 머릿속을 온전히 나로 채울 수 있을까?” “…….” 붙들린 팔이 아파서 눈을 찡그렸지만 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목전에서 서서히 미쳐 가는 사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였으니까. “난, 나는 모르겠어, 세령아. 네가 싫어하는 모습은 전부 떼어 낸 지 오래인데, 그딴 걸 네가 원한다는 게 혼란스럽고 믿기질 않아. 어찌해야 나만 봐 줄래? 그놈처럼 사람을 죽여야 봐 줄래? 했잖아. 이 손에 방금 사람 하나 엉망으로 만들고 왔잖아. 한데도 너는 왜 그놈을 찾는 거야? 이걸론 부족해? 하면 네가 아프건 말건 내 좋을 대로 너를 휘두르면 그땐…… 으윽…….”  혼돈으로 가득 차 횡설수설 말을 쏟아 내던 휘언은 일순 앓는 소리와 함께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과호흡이 온 듯 숨을 헐떡이며 휘청였다. “나, 나리? 나리!” “비, 켜…… 아윽……!” “왜 그러십니까? 괜찮으세요?” “저, 저리…… 윽…….” 세령을 밀어내려던 손은 허공을 힘없이 휘젓다가 툭 떨어졌다. 한순간에 혼절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리!” 황급히 다가가 휘언의 몸을 흔들었지만 미동 하나 없었다. 숨을 쉬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고요하게 쓰러져 있던 터라 덜컥 두려움이 앞섰다. 세령은 사내의 코 밑에 떨리는 손가락을 대었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미약하였다. “나, 나리……. 가, 갑자기 왜…… 의원, 의원을…….” 경황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세령은 의원이든 무혁이든 불러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한데 그 순간 강한 힘으로 손목이 당겨져, 다리 풀린 사람처럼 다시 풀썩 주저앉게 되었다. “……나리?” “으음……. 깨자마자 네가 보이는 건 좋다만, 왜 이리 수선이야. 으…… 머리통이 쪼개질 것 같다.” 눈을 잔뜩 찌푸린 사내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는 두통의 여파가 남은 듯 다른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희명군 나리십니까?” “그게 아니면 내 방에서 누굴 찾는데.” 깨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마뜩잖다는 듯, 그가 미간을 구기고 시비조로 말하였다. 그저 혼이 바뀐 것이었구나. 세령은 망연한 탄식을 터뜨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뭐야. 무슨 일 있었느냐? 그러고 보니 너 얼굴이…… 설마 그 새끼 짓이냐?” “아, 아니, 아니요…….” “하면, 옷은 왜 벗고 있는 것인데. 너를 어찌해 보려다가 안 되니 손찌검하고 달아난 것이야?”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뭐야, 이건 또 왜 여기 있고?” 그는 뒤늦게 오른손에서 가락지를 발견하고 다시 왼손으로 옮겨 끼우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놈이 이 가락지를 찾아내 음침하게 끼고 있던 모양이구나. 한데 저는 받은 기억이 없을 테니 투기심에 너를 어떻게 해 보려던 것이고!”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참말, 아니에요.” 대답할 기력이 없어 고개만 절레절레 저으니 머릿속으로 무슨 망상을 하였는지 희명군이 노발대발하였다. “하면 왜 이런 꼴을 하고 있느냔 말이야! 잠깐. 너, 다른 데도 맞았느냐?” 세령의 상흔을 하나둘 살핀 희명군의 눈에선 이제 불길이 치솟았다. 하나 분노가 극에 달한 사내는 되레 차분하게 세령의 앞에 자리를 잡고 물었다. 물론 턱뼈가 불거진 게 보일 만큼 속으로는 분개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놈이 네게 손을 올린 것이지?” 세령은 고개를 저었다. “휘언 나리가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제가 가락지를 두 사람에게 다 주어서…….” “뭐?” “…….” 가락지 위치가 바뀌어 있던 연유를 알게 된 사내의 낯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너, 나를 두고 가락지 놀음을 하였구나.”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구태여 꺼낼 필요도 없었는데, 왜 생각 없이 가락지 이야기를 털어놓았을까. 하나도 모자라 두 혼에게 전부 상처를 준 꼴이었다. 어째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외숙부가 찾아왔던 것, 어머니와 저를 모독하던 말들, 무자비한 발길질, 휘언의 난동, 그리고 혼란에 휩싸여 저를 몰아붙이던 모습까지. 짧은 사이에 있던 일들이 모조리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순간 울컥, 참고 있던 감정이 치솟았다. 모든 일이 정신없이 휘몰아친 바람에 그제야 제 마음을 직시한 탓이었다. 툭 치면 멍울진 물기가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세령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자 당장에라도 누구든 죽일 것 같던 사내의 얼굴이 삽시간에 온순해졌다. 부풀렸던 덩치도 가라앉히고 손을 뻗어 세령의 터진 입술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상한 모양이구나.” 물고 있던 입술이 떨어진 순간, 세령의 눈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아, 그게, 흡…….” 당황하여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렸지만 한번 터져 버린 둑은 틀어막을 길이 없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설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푹 숙이자 희명군이 두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 봐, 은세령.” “흐윽, 제가, 패물을 뺏겼…… 흑, 외숙부가 저를 밀치고…… 읏, 휘언 나리가, 나리가…….” 횡설수설 토로하는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사내는 세령을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지금 얘기하지 않아도 돼. 일단 울어.” “제, 제가 나리를 두고 가락지, 흐으엉…….” “그 얘기는 되었어. 너도 생각이 있어 그런 것이겠지.” 사방을 감싸는 온기에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자 희명군은 제 가슴팍에 이마를 묻게 한 뒤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헐떡이는 등도 토닥여 주었다. “은세령. 한데 이것 하나만 묻자. 네 슬픔의 원인 중에 나도 있어?” “…….” 울음을 참느라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희명군은 얼굴을 굳히고 쉽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달싹였다. 죄책감이 서린 눈이었다. “하…… 그래, 그렇구나…….” “…….” “때릴래? 욕해도 좋고.” 본인은 알고 있을까. 달래는 건 저리 엉성하여도 이미 얼굴엔 미안함과 후회가 그득하단 걸. 저보다도 더 슬퍼하는 낯을 하고 있다는 걸. “혹여 다른 게 연유더라도 자책 말고 나를 탓해. 널 슬프게 하는 건 나라고, 나처럼 재수 없는 놈이 곁에 있어 그런 거라고 여겨.” 달뜬 소리로 울던 모습이 아니라, 엉엉 구슬피 통곡하는 세령의 모습은 또 처음이라, 보는 희명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여 사내는 여인을 품에 더 끌어당겼다. ‘그래. 그렇게 내 품에서만 울어. 어디 가지 말고. 내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더라도 이렇게 곁에만 있어. 떠나지만 마라. 불행도 내 곁에서 해.’ 희명군은 가엾은 등을 도닥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8년 전, 충격에 빠진 눈으로 뒷걸음질하다 추락하던 세령에게 자신이 건네려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으리라고. * * * 덩치 큰 사내 넷은 들어가고도 남을 법한 커다란 목간에 몸을 담근 세령은 찰박 소리가 요란하게 날 만큼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홀로 들어가도 될 것인데, 구태여 함께 들어와 제 몸 위에 세령을 앉혀 놓는 희명군 탓이었다. “저어, 나리. 이것은 좀……!” “가만있거라. 곧 쓰러질 것처럼 울어 대더니 왜 이리 기력이 좋아?” “이, 이런 자세일 필요는 없잖아요. 혼자 씻어도 되는 것이고…….” 세령은 제 귓가가 붉어진 것도 모른 채 웅얼거렸다. 자꾸만 엉덩이에 단단한 게 닿아 오니 습관처럼 야릇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세령이 전부 벗고는 못 들어가겠다고 난리를 피워 두 사람 다 욕의를 입었는데, 어째 젖은 옷이 맞닿으니 맨살보다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반항하는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던 희명군은 세령의 턱을 붙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하였다. 그러더니 씩 웃는다. “머리 감겨 줄 땐 가만있더니 이제 와 내외하는 연유가 무엇인데?” “…….” “허. 내일이면 얻어맞은 곳이 쑤실 것 같아 오늘은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런 눈으로 보면 나더러 어찌하라는 거야?” “제, 제가 무슨 눈으로 봤다고 그러십니까.” 세령이 고개를 틀며 외면하자 사내는 다시 턱을 부드럽게 돌리곤 입을 맞추었다. 담백하게 붙었다가 떨어지는 순간이 왜인지 짧게 느껴졌다. “사내를 잡아먹고 싶어 안달 난 눈.” “네에?” “지금도 아쉬워 죽겠단 눈빛.” “…….” 그는 말문이 막힌 세령의 몸을 돌려 마주 보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큰 저항이 없는 게 귀엽다는 듯 눈을 접어 웃기도 하였다. 씻고 난 후라 말간 얼굴이 오늘따라 더 반지르르해 보인다. 그저 품에 안겨 조금 위로받았다고 사람이 달라 보일 일일까. 두렵고 밉기만 했던 존재가 이제는 단단한 울타리 같다. 어릴 적 휘언으로부터 받았던 그 안도감이 이제는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졌다. “나를 그리 원하면 어디 한번 동하게 만들어 보거라.” “……저보다 나리께서 더 원하시는 것 같은데요.” “맹랑하긴.” 조금 건방진 대꾸에도 그는 희게 웃으며 세령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51> 자연스레 하복부가 맞닿았다. 속곳은 벗고 들어온 터라 세령에겐 옷감에 살덩이가 맞닿은 꼴이었다. “나, 나리…… 이건 좀…….” “처음도 아니고 왜 이리 수줍어할까.” “물에서 이러는 건 이상…… 흣…….” 왼쪽 허벅지 쪽 두둑하게 부푼 곳에 균열이 문질러졌다. 세령은 제 허리를 잡고 움직이는 사내의 팔을 반사적으로 붙잡았지만 그런다고 그만둘 희명군이 아니었다. 그는 기어이 바지춤을 끌러 양물을 꺼내고 세령의 다리 사이에 비비적거렸다. “하아, 흐읏, 읏…….” 그의 뜻대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마치 사내 위에 올라타 방아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근한 유사 행위가 때로는 더 야한 법이라, 세령은 낯이 뜨거워졌다. 하나 희명군은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능숙하게 몸을 붙여와 가벼이 입을 맞추고 더운 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려 쇄골에, 어깨에, 그리고 가슴에 새 부리 쪼듯 입술을 쪽쪽거렸다. 물속에 있어 미끈거리는 탓인지 아니면 온수로부터 올라오는 열기 탓인지 야릇한 기분에 질식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염이 동하여 스스로 허리를 흔든 것도 같다. “……들어가고 싶어. 그래도 돼?” 혼몽한 와중, 희명군이 귓불을 입술로 잘근 물며 속삭였다. 향락에 정신이 흐물흐물해진 건 다행히 저뿐만은 아닌지, 음성이 탁하였다. 마치 휘언처럼 허락을 구하는 모습에 기분이 묘해졌으나, 맞닿은 하초를 뭉근하게 눌러대는 통에 세령은 더듬더듬 붉어진 입술을 열었다. “어, 언제부터 그런 걸 물으셨다고…….” “오늘은 그러고 싶어서.” “제가 울어서요?” “우는 건 수도 없이 봤는데 오늘은 정말 슬퍼하기에. 더 속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 “그게 내 탓이면 나 또한 마음이 아플 것 같거든.” 자신도 휘언이라며 울분을 토하던 그가 정말로 제가 알던 소년처럼 굴었다. 여느 때보다 따스한 눈빛에 쿵, 쿵, 심장이 뛰었다. 그 순간, 세령의 뇌리에 번뜩이는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휘언이 두 갈래로 찢어진 걸 가장 부정하던 사람은 바로 세령 자신이었다. 같은 사람인 걸 알면서도 가락지를 주어 구별하려 들지 않았던가. 휘언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무얼 하여도 변하지 않던 애정이었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쓸모를 보여야만 미움받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내키지 않아도 착하게 굴어야 했다. 잘 나가다가도 마음을 조금 상하게 하면 뒤도는 것이 타인이었으니까. 한데 휘언은 남들에게 하던 대로 하였을 뿐인데도 세령에게 더 큰 애정을 주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도 맹목적인 시선을 보내며 저를 좋아해 주었다. 세령을 놀리는 이에게 대신 불같이 화를 내 주던 모습이 든든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혹여 해라도 입진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손가락질하는 이가 어느 높은 분의 자식이어도 괘념치 않았다. 자신이 무슨 못된 짓을 하여도, 무슨 부조리한 일을 당하여도 그 애만은 곁을 떠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때 세령은 어머니보다도 휘언을 의지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휘언이 보인 연정만으로 감정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애가 좋았다. 왼쪽 눈 밑에 별 같은 점을 박고서, 그보다 더 빛나는 눈망울에 저를 담을 때마다 가슴이 술렁였다. 어쩌면 마주한 첫날부터 그를 마음에 두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점잖든 난폭하든 성격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어떤 기질을 가졌든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희명군처럼 자랐어도, 휘언처럼 자랐어도. 어차피 전부 당신이니까. 어떤 모습이든 이렇게 내 편이 되어 주었을 테니…….’  이제는 취사선택할 수 없었다. 지금의 휘언도, 도망쳐버린 다른 휘언도 모두 제 사랑이었으니. 저를 거둬 주었던 지난 몇 년과 아주 딴판이었던 오늘의 외숙부처럼,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면모가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강제하는 것은 오만이다. 세령은 휘언의 마음이 나눠진 것이 어쩌면 저와 같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았다. 이제야 깨달은 게 미안하면서 한편으로는 눈앞의 희명군 또한 제가 알던 휘언임을 확인하니 코끝이 찡하였다. 누구보다 강하고 냉철한 듯 보이지만 험한 것들로부터 달아난 휘언 대신 당신이 상처와 고통을 떠안았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북받친 세령은 사내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놀란 입술이 잠시 굳었다가 이내 호선을 그렸다. “착하게 구니 이런 날도 있네. 설마 이걸로 대신하려는 것은 아니지?” “제가…… 해 봐도 되겠습니까?” “무어?” 세령이 사내의 양물을 쥐며 묻자, 그리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지 희명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웬만한 것엔 놀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반응이 꽤 재미있었다. 하여 세령은 몸을 살짝 들어 귀두를 질구에 맞추었다. 그러고는 꾸역꾸역 허리를 내렸다. “읏, 흐…….”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등골이 쭈뼛 섰다. 이미 흥분하고 있던 상태임에도 물속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뻑뻑하였다. 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 희명군이 입을 맞추며 세령의 손을 기둥에서 떼어 내고 제 어깨를 쥐게 하였다.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기에 접문에 화답하며 안도하는데, 그 순간 내벽이 단숨에 꿰뚫렸다. “흐읍!” 강렬한 통증에 사내의 몸 위로 무너지자 바르르 떠는 뺨과 입에 연신 입술이 들러붙었다. “아픈가 보구나.” “으읏, 조, 조금…….” “거짓말. 아파 죽겠으면서.” “…….” “나 봐, 은세령.” 사내는 푹 숙이고 있던 세령의 고개를 들어 올리곤 입술을 포개었다. 질척거릴 만큼 타액을 입안 곳곳에 나누면서, 손을 내려 음핵을 연신 간질였다. 그러자 두꺼운 기둥을 겨우 삼키고 있던 음부에서 질금질금 물이 새었다. “하아, 흐…….” 희명군이 입술을 떼어 내자 세령의 입에서 가쁜 호흡이 터졌다. 하나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사내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말랑한 둔부를 터뜨릴 듯 쥐고 늘 그랬듯 제 입맛대로 세령의 몸을 휘둘렀다. “하으, 흣, 아아, 나리, 읏!” 바다에 해일이 밀려오듯 목간을 채운 물이 철썩철썩 피부를 때렸다. 분명 느릿하게 삽입을 이어 가고 있는데 물에서부터 피어오른 수증기 탓에 평소보다 숨이 모자라 세령은 정신없이 헐떡였다. 한데 사내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입술을 내려 세령의 가슴을 물고 빨아 댔다. “흡, 나, 나리, 하아! 숨이…….” “숨?” 그는 눈꼬리를 세워 세령의 헐떡대는 모습을 흘겨보더니 고개를 들어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숨결을 나눠 주듯 빈틈없이 입술을 삼켰지만, 되레 호흡이 더 달려서 저릿한 감각에 전신이 집어삼켜졌다. 정말 혼절하기 직전이라, 세령은 희명군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하니 그가 별안간 세령의 몸을 안아 들었다. “히익!” “꽉 잡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세령은 쇠꼬챙이에 꿰뚫린 물고기처럼 파드득 떨었다. 틈만 나면 이렇게 힘자랑을 해 대는데, 몇 번을 겪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세령은 물에 풍덩 빠질까 두려워 사내의 목을 꽉 끌어안고 그가 쑤시는 대로 앙알거렸다. “흐으읏, 아, 아아!” “은세령. 무서워?” 쾅쾅 내벽을 들쑤시던 사내는 전혀 힘들지 않은 얼굴로 세령에게 입술을 비비며 물었다. 대답할 기력도 없어 고개를 주억거리니 그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세령을 목간통 모서리에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양 무릎을 접어 음부에 파고들었다. “아, 으응!” 찌걱찌걱 소리는 이제 목욕물 탓이 아니었다. 목간 안에는 순전히 그와 자신이 흘린 애액 때문에 음란하고 난잡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민한 부위만 뭉크러뜨리는 사내의 분신도, 허리와 가슴을 어루만지며 입을 맞추는 부드러운 온기도 죄 자극이 되었다. “하아, 앗, 아앗!” 너른 희명군의 어깨를 쥔 채 겨우 매달려 있던 세령은 노도처럼 북받치는 감각에 사내의 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입술을 포개며 교성을 흘렸다. “나리, 아!” 질끈 감은 시야에 번갯불이 번쩍이고 전율에 휩싸인 전신이 강하게 경련하였다. “윽…….” 희명군 또한 낮은 탄성을 흘리며 세령의 안에 희뿌연 씨물을 울컥 토해 내었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허리를 물렀다. “으, 응…….” 느릿하게 빠져나가면서도 뭉툭한 귀두는 잘게 떠는 내벽에 자극을 심고 지나갔다. 절로 샌 앓는 소리에 픽 웃음을 흘린 사내는 반질반질한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세령을 안아 다시금 목간 안으로 들어갔다. 식지 않은 물이 온몸을 감싸니 나른함에 힘이 풀렸다. 세령은 의식하지 않은 채 사내의 몸에 폭 기대었다. 그는 제게 몸을 기댄 것이 사무치게 기쁜지 세령의 몸을 꽉 끌어안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 말이다.” “네?”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뭐가 재밌는지 사내가 킥킥거렸다. “사람이 낯설어 끼니를 챙겨 주고 인사를 건네도 처음에는 무시하기 일쑤거든. 한데 그게 몇 날 며칠이 계속되면 기대하지 않은 찰나에 손등에 이마를 비비는 순간이 와. 그게 꼭 지금 같구나.” “제가 고양이 같단 뜻입니까?” 휘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기시감이 들었다. “그보다 더 앙큼하지. 네가 좀 덜 어여뻤다면 봐주지 않았을 거다.” <52> “……봐준 적이 있긴 합니까?” “네가 뭘 모르는구나. 내 방에 들어선 이들은 다 죽임을 당하였는데 너는 이리 목숨 보전하고 있지 않아. 그게 다 네 외모 덕이야. 그러니 너를 어여삐 낳아 준 모친에게 감사하거라.” “……별 해괴한 소리를 하십니다.” “진담인데.” 상기된 세령의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그가 키득거렸다. 날갯짓하는 나비라도 삼킨 듯 배 속이 간질거려서, 세령은 공연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돌렸다. “그, 그나저나, 나리, 그 소문은 정말 다 사실이었습니까?” “무슨 소문?” “귀빈채에 들어서면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소문이요.” “아, 그거? 아주 거짓은 아니지.” “하면 매번 다른 여인을 불렀다는 것도…….” 어째서 갑자기 이런 게 궁금한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하지 않나. 기억이 없던 이 사내도 어쨌든 휘언인데……. “왜, 내가 정말 여인들과 난잡하게 놀았을까 봐? 혹, 투기하는 것이야?” “무, 무, 무슨! 아닙니다, 절대로요!” “한데 왜 그리 말을 더듬어.” “…….” 희명군은 더 발갛게 달아오른 세령의 뺨을 살짝 꼬집으면서 짓궂게 웃었다. “죽어 나간 이들은 나를 죽이러 온 자들이었다. 거처가 묘원각이다 보니 기생도 몇 있었지. 그들은 내게 검을 들이밀 때도 있었고 술을 들이밀 때도 있었는데,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지 늘 독이 있었다. 검에도, 그리고 술에도.” “아…….” 의외의 답이라, 세령은 멋쩍은 탄식을 뱉었다. 새삼 그가 안타까웠다. “왜. 그걸 다 이겨 낸 내가 징글징글해?” “그럴 리가요. 그냥…… 힘드셨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글쎄, 익숙한 일이라.” “…….” 하도 독을 접하여 씨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던 휘언의 말이 왜 지금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많이 고단하였겠구나. 저와 소꿉장난이나 하며 놀던 소년이 선왕의 서자란 걸 알았을 땐, 호의호식은 아니더라도 기생의 아이일 때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으리라 여겼거늘. “개중에는 솜털도 안 빠진 어린 기생도 있었는데, 들어올 때부터 사시나무 떨듯 떨기에 그냥 살려 보내 준 적이 있어. 한데 그게 사내 경험 없는 기생은 내쫓는단 소문이 되어 있더구나. 뭐, 덕분에 네가 제 발로 날 찾아오게 되었지만.” “……그랬던 거군요. 한데, 누가 그런 사주를 하였답니까?” “나의 아버지.” “아버지라면…….” “선왕 전하 말이다.” “선왕 전하요? 대체 왜.” “그 어린 기생 말로는 나의 어머니, 그러니까 선왕이 품에 안았던 여인을 죽인 살인자이니 죽어 마땅한 놈이라 하였다더구나.” “…….” “하하……. 나를 병기로 키운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하다니……. 쓸모를 보이라며 진창에 떠밀 땐 언제고, 힘을 얻으니 두려웠던 모양이지. 정작 나는 그 사람 눈에 들기 위해 괴물이 되었는데 말이야.”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세령은 그저 측은하게 사내를 바라만 보았다. “이 땅의 주인이 나를 죽이려 무수한 사람들을 보내오는데 내 어찌 태평하게 유흥이나 즐길 수 있었을까. 누굴 믿을 수 있었을까. 믿지 않으니 동침하였을 리는 더더욱 없지.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내게 여인은 너뿐이니.” 심각해지는 세령의 표정을 살핀 사내는 끝에서야 나직하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하였다. 하나 이미 마음이 닳고 닳아 별거 아니라 여기는 모습이 더 가슴 아팠다. “……걱정 같은 거, 아니 하였습니다.”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따라 웃지 못하니 침울해하는 걸 눈치챈 걸까. 희명군이 세령의 뺨을 감싸 쥐곤 말을 돌렸다. “한데 말이야. 내 기억 속 그 어린애는 이 정도로 절세가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예?” “만일 내 부친이 너를 살수로 보냈다면, 내 순순히 목을 내어 주었을지도 모르겠어. 대체 무얼 먹고 이리 어여쁘게 자란 것이냐?” 주접이 지나쳤다. 이 정도면 칭찬이 아니라 놀리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과하단 걸 알면서도 낯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해서 세령은 몸을 바르작거리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였다. “무, 무슨 말을……. 이제 다 씻었으니 나가시지요. 이러다 몸이 팅팅 불어날 거예요.” “조금만 더 이대로 있자.” 일어나려는 세령의 허리를 감아 도로 앉힌 사내는 짓궂은 표정을 거두고 어깨에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풀어 헤쳐진 머리끝을 느긋하게 만지작거렸다. “진작 이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평온을 진작 알았더라면…….” “…….” 치열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나른한 얼굴로 여유 부리는 사내가 가련해 보였다. “내 후회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네 존재를 알았을 때 곧장 곁으로 데려오지 않았던 일이다.” “제 존재는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그놈은 늘 달아나느라 바빴으니 이 몸은 거의 내 것이었다. 한데 한 번은 아주 긴 잠을 잔 적이 있었지. 내 부친과 함께 독약을 나눠 마셨던 그때.” 두 해 전, 이 땅의 임금이 제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여 나라가 떠들썩하였다. 호적에 오르지도,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은 서자, 희명군이 저지른 일이었다. 하나 함께 독주를 들이켠 그 또한 선왕과 함께 생사의 갈림길에 오른 탓에 후대는 결국 세자가 잇게 되었다. “나는 이 지리멸렬한 생이 그때 드디어 끝나겠거니 하였어. 당연히 더 이상 눈뜰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무래도 임금을 시해한 죄는 형님이 그 자리의 적수인 나를 치워 버리기에 적절한 사유니까. 한데…… 나를 살려 두셨다.” “어째서 그러셨던 걸까요?” “적국을 섬멸해 견고히 세운 이 나라의 치안을 맡기기엔 당장 대체할 자가 없단 연유를 대었다더구나. 아버지처럼 나를 검으로 쓰겠다며 대신들을 설득하였다고.” “……나리를 그런 식으로 또 이용하기 위해 살려 두셨단 겁니까?” “대외적으로는.” “……대외적? 그러면 진짜 연유는요?” “기실 반란을 먼저 제안한 것은 형님이셨다. 나야 뭐,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배신을 당한대도 어쩔 수 없다 여겼으니 따랐던 게지. 한데 잔정이 많은 사내라 나를 살려 두었어. 이 나라의 군주가 참…… 물러 터졌지.” 당시에는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고을에서 지냈고, 어디에도 끼지 못한 군식구로 눈치 보며 지내던 터라 정세가 어떻든 별세계인 양 여겨졌다. 한데 막상 당사자의 입으로 듣게 되니 이런 사내와 어찌 유년 시절을 함께하였는지 새삼 믿기질 않았다. “그놈은 내가 사경을 헤매던 그때 깨어났다. 부친이 시키는 대로 살아온 건 마찬가지이니 삶의 갈피를 잃었겠지. 해서 너라는 동아줄을 떠올린 모양이야. 네 행방을 조사해 달라고 무영에게 청하였다더구나.” “……무혁 나리 말씀이지요?” “그래. 무혁인지 뭔지가 그 명을 받고 널 찾아내긴 하였어. 한데 그땐, 공교롭게도 내가 다시 몸의 주도권을 잡은 후였다. 해서 우연히 네 존재를 알게 되었지. 꿈이라 착각하였던 기억에 등장하였던 소녀가 실재한단 것도, 그놈이 깨어날 때마다 널 그리며 귀빈채 후원을 가꾼단 것도 차차 알게 되었고. 한데 당시의 난, 그놈이 그렇게까지 그리워하면서 데려오지 않는 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휘언 나리는…… 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그랬다고 하였습니다. 나리를 주시하던 적이 많았으니 제게 위협을 가할까 봐 무서웠던 게 아닐까요?” 그럴싸한 추측이라 여겼는데 희명군은 코웃음을 쳤다. “적이 무섭기는. 그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게 아니면, 너를 만나는 게 무서웠거나.” “……저를 만나는 걸 무서워한다고요?” “그놈은 네게 미움받는 걸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해. 너도 보았으니 알 거 아니야. 이 몸으로 저지른 악행은 모조리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것. 그만큼 비겁한 새끼다, 그놈이.” “…….” 어떻게 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느냐며, 애걸하던 모습이 머릿속을 채웠다. 자신이 무어라고 그리 예쁜 모습만 보여 주려 아등바등하였을까. 제 애정이 무어라고 죽을 듯 목을 매는 것일까. 마음이 무거웠다. “한데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쪽이 더 맞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 내 만일 그때 한 번이라도 호기심에 널 직접 보러 갔더라면, 달랐을 것 같거든. 처음 본 순간부터 네게 흥미를 느꼈으니까.” “처음부터요?” “그래. 기실 얼굴을 보기 전부터, 네가 신경 쓰였다. 그놈과 만나기라도 할까 봐 무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시켜 주시하고 있던 차에, 웬 추잡한 노인네와 혼인하기로 했단 소식을 들었어. 한데 그것도 기실 위장이고 더러운 기루에 팔릴 신세라기에 내가 손을 좀 댔다.” “……하면 저를 산 게 나리셨습니까?” “그래. 기생이 아니래도 여긴 일거리가 많으니까 기루보다는 낫겠거니 하였다.” “그렇지만 휘언 나리와 만나는 걸 경계하셨잖아요.” “그건 나도 설명 못 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거든.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네가 자꾸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였던 거 말이야. 한데 어쩌면, 결국 이리될 걸 예상한 내 직감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어.” <53> “…….” “좀 더 적극적일 것을 그랬어. 그냥 네 낯짝이나 보자며 한번 찾아갔더라면, 곧장 데려와 너를 이 땅의 어떤 여인보다 호화롭게 살도록 하였을지 모르잖아. 사내놈들이 득시글한 곳에서 일하게 두지 않고, 친척이랍시고 웬 머저리가 너한테 그리 쉽게 접근하는 걸 허하지도 않았을 거고.” 열망 어린 눈으로 퍽 진지하게 가정을 뱉는 모습에 세령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나리였다면, 다른 혼을 골려 주려고 저를 더 괴롭혔을걸요.” “그럴…….” 반박하려던 희명군은 멈칫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해 왔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휘언의 심기를 건들기 위해 세령과 몸을 섞고 쪽지까지 남기며 깐족댔던 위인이었다. 그뿐이랴, 휘언인 척을 하며 세령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지난 과오가 후회막심하였던 사내는 슬그머니 세령의 눈치를 보다가 제 위에 올라탄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세령의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답지 않게 아양을 떨었다. “염치도 없이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할게. 한데 그래도 나는 네가…… 나도 욕심내 주면 좋겠어. 내게 아주 조금이라도 정이 있다면,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으면 해.” “무슨 말씀이신지…….” “희명군이니 금상의 아우니, 내게는 전부 허울뿐이니까…… 우리 관계에 있어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한다고. 우리 사이를 그저 사내와 여인으로만 봐 주면 좋겠어. 나는 너를 절대 노리개 따위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물론…… 그보다 못한 취급을 하긴 했었지만…….” 외숙이 하였던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으니 세령은 어쩐지 더욱 심란해졌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과 별개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본다면 누구든 그리 생각할 터였으니. 하나 그런 상념이 들었다는 것에 세령은 내심 놀랐다. 자신이 그래도 눈앞의 사내와 잘 되길 바라는구나 싶어서. 휘언이라면 몰라도 희명군에게까지 이리 마음을 주게 될 거라고는 상상치 못하였는데……. 그렇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 사내도 어쨌든 휘언의 한 조각인 것을. 전에는 두 사내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나 고민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늘 둘로 나뉘어 구분하던 혼의 경계는 세령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은세령.” “네, 나리.” “……미안해. 그동안 했던 개짓거리 전부 다.” 그가 우물쭈물하더니 어렵게 사과를 뱉었다. 진심이 맞는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세령을 담은 눈망울이 순순하였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처음 뱉어 본 사람처럼 어색해 보이기도 하였다. 살을 맞대다 보니 몸정이 제대로 든 걸까. 그마저도 어째 좀 귀여워 보였다. 하여 세령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희명군에게도 너그러워지기로 하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눈앞의 사내도 제가 사랑하는 사내의 한 조각이니까. “오늘 추하게 울던 저를 달래 주신 것, 그걸로 지난 일은 잊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나리를 원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야?” “나리도, 다른 혼도 전부 한 사람인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뭐?” “지금의 나리는 조금 미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당신도 휘언이잖아요.” 놀란 얼굴을 한 사내는 생각이 많아진 듯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기다란 눈매가 휘어지는 모습이 퍽 근사하였다. “세령아.” “네.” “만일 내가 이 몸에서 사라지면 어떨 것 같아?” “……예?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 겁니까?” “그냥. 당장은 아니어도 영영 이런 상태로 살아가진 않을 것 같아서.” 착각일까. 사내의 눈동자가 조금 촉촉해진 듯 보였다. 해서 세령은 선뜻 입을 떼지 못하였다. “대답해 봐. 조금이라도 아쉬울 것 같으냐?” “…….” “아니다. 대답하지 마라.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된다지? 그러니 너는 내가 그저 명하는 대로 따르면 돼.” “그게…….” “무슨 뜻이냐고? 아쉬워하라고.” 씩 웃는 사내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도 더 온화하였다. 장난기가 가득한데도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자, 그럼 물이 식는 듯하니 이제 들어갈까. 할 일도 남았고.” “할 일이요?” “아직 한 번밖에 운우지정을 나누지 않았잖아.” “……또 하신다고요?” “언제 한 번만으로 끝난 적이 있던가?” “히익!”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볼 새도 없이 별안간 사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또 허공에 들려 놀랐지만, 이번엔 단단하게 세령의 둔부를 받쳐 주고 있어 몸이 휘청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아이처럼 키득거리며 세령과 제 몸 위에 커다란 두루마기를 걸치고 목간을 나섰다. 귀빈채를 전부 비워둔 덕에 볼 사람도 없건만, 공연히 부끄러워진 세령은 희명군의 품에 꼭 매달렸다. [아가. 어쩌면 네가 그 사내를 고칠 방도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복도를 지나는 동안 김 의원의 말을 떠올린 세령은 이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다른 조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결연을 다졌다. 만일 자신이 두 조각을 하나로 이어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면, 한번 해 보겠노라고. 오만방자하게 몸을 독점하려던 조각은 제 고집을 내려놓은 듯하니, 이제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느라 바빴던 그 혼을 보듬을 차례였다. * * * “으으으…….” “나리, 많이 아프시지요? 어쩜 사람이 그리 무자비할 수가 있답니까? 나리가 무얼 그리 잘못하였다고 죽일 듯 패느냔 말입니다.” 사내종들에게 부축을 받아 사랑채에 겨우 몸을 뉜 성호의 옆에는 영선이 찰싹 붙어있었다. 아니 그래도 얻어맞은 곳이 욱신거려 골까지 울릴 지경인데, 곁에서 희명군과 세령의 욕을 쉬지도 않고 조잘대니 성호는 슬슬 짜증이 밀려들었다. 어차피 정보나 얻자고 살갑게 대해 준 계집, 당장에라도 썩 꺼지라 내쫓으면 그만이었지만 성호는 후일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그저 조카 덕 좀 보려고 한 것인데 이렇게 치욕을 주었으니 가만 당하고만 있진 않으리라. 그러니 제 복수에는 저 계집종이 필요하겠지. “영선아. 너, 도화란 기생을 아느냐?” “도화 님이요? 알긴 합니다만…….” “지금 당장 데려올 수 있겠느냐.” “그 기생을 왜…….” “부탁할 것이 있어 그러니 불러 다오. 너는, 할 수 있지?” “……예.” 영선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곤 방을 나섰다. 혼자가 된 성호는 그제야 얻어맞은 곳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으으……. 한데, 희명군이 나를 어찌 못 알아보는 것이지? 제 계집을 건드렸다 이건가…….” 성호는 한때 선왕 쪽으로 검은약을 유통해 희명군과는 안면이 있었다. 그와 거래를 트기 위해 도화를 협박하여 몇 번 자리를 가졌더랬다. 그러나 오늘 본 사내는 어째 저란 사람을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선왕 쪽 사람이라 여겨 냉대하는 건가. 아니면 세령에게 손찌검하여 그런 걸까. 제게 저지른 만행이 여전히 이해가 아니 되었다. “원체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사람을 잘 기억 못 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 대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본 것이니 기억을 못 하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자신이 그 아이의 외숙인 걸 모르니 더욱이 무례를 저지를 수 있었을 테지. 이걸 너그러이 넘어가 주고 혼인을 빌미로 휘둘러야 할지, 성호는 내심 고민이 되었다. “아니, 아니지. 고작 선왕의 서자일 뿐, 제대로 된 끈도 아니잖나. 하마터면 썩은 동아줄을 쥘 뻔하였군. 선왕도 시해한 놈일진대, 현왕이라고 다를까. 분명 나라님께서도 그놈을 처치 곤란이라 여기고 있을 테다.” 성호는 본디 지금의 임금을 구슬려 잘 나가던 예전 모습을 되찾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원대한 일에는 희명군이라는 희생양이 필요하였다. 금상 전하야말로 본인 자리를 가장 위협하는 이로 희명군을 뽑을 게 뻔하니까. 그를 골칫거리로 여겨 정리하고 싶겠지만, 당장에 마땅한 연유가 없어 저리 방치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서 연유를 만들어 준다면 그 공을 마땅히 치하할 터. 근래 묘원각을 기웃거려 보니, 희명군은 호위 하나 외에는 곁에 사람을 두지 않은 듯하였다. 딱히 외출을 하는 것도, 후일을 도모하지도 않는 듯 보였다. 계집 뒤꽁무니나 따라다닐 뿐. 그러니 저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힘을 모은다면 사내 하나 잡아다 전하께 바치는 정도야 식은 죽 먹기일 거다. 거기에 은세령은 좋은 미끼가 되어 줄 것이고. “원래는 패물 조금 뜯어내고 희명군 쪽으로 다시 거래를 틀 요량도 있었지만…… 사내가 되어서 꿈은 크게 꾸는 법이지, 암! 그놈 약점이 무엇인지도 알아냈으니 써먹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그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는 쓸모를 다하면 그때 내 반드시 팔아 주마. 흐흐…… 으윽! 염병할.” 성호는 비열하게 웃다가 맞은 턱의 통증이 느껴져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사랑채 문이 열렸다. <54> “오랜만입니다, 나리.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도화는 묘원각 제일가는 기생답게 뻣뻣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부름에 응한 주제에. 성호는 코웃음을 치며 도화에게 앉으라 턱짓하였다. “영선이 너는 나가 있거라.” “예, 나리.” 사랑채 문이 닫히고서야 성호는 도화와 시선을 맞추었다. “낮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더니, 그 풍문의 주인공이 나리셨습니까? 세령이와 한 핏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역시나. 제가 제대로 본 모양이군요.” “허! 무슨 뜻으로 지껄이는 게냐?” “아무래도 두 사람, 성품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예의를 차린 듯하지만 비아냥이 물씬 묻어났다. 반감을 숨기지도 않는 모습에 성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사내 하나 잡았다더니 기세가 등등하구나. 때깔은 더 고와졌고. 누구는 잡은 줄을 다른 놈이 끊어 먹어 패가망신하게 생겼는데 말이지. 하여간에 계집들은 세상 살기 편하다니까.” “기생이 편해 보인다니, 나리께선 어지간히 여유가 없는 모양입니다. 하면 어디 남첩이 되어 보시렵니까? 요새 비역질 맛을 본 객들이 좀 있습니다만.” “뭐라? 이년이……! 으윽…….” 손을 올리려던 성호는 얻어맞은 곳이 욱신거려 헐떡였다. 그런 사내를 바라보던 도화는 표정에 경멸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일 때문에 몇 년을 봐 왔지만, 참으로 악독한 인간이었다. 겉으론 선비인 척 굴지만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면 영락없는 파렴치한이었다. 이런 자도 외숙이라고 제 처지를 알면 걱정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세령이 떠올라 공연히 씁쓸해졌다. “용건이나 말씀하시지요. 분주한 시간이라 오래 못 있습니다.” “흥, 그래 봤자 치마나 걷고 가만 누워 있으면 되는 년이 바쁜 척은. 그래, 본론부터 말하지. 귀빈채로 들어가는 검은약, 지금도 네가 맡고 있지?” “…….” 이렇다 저렇다 답은 하진 않았으나 눈을 찌푸리는 도화를 보고 성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면 옛정을 생각해…….” “옛정이라니. 나리와 제가 무슨 정이 있다 하시는지요.” “예민하게 굴 것 없다. 그저 최근에 좋은 약을 청나라에서 들여왔는데 좀 팔아 보고자 하는 것이니.” “이제 저를 통해 그쪽 약을 구하는 이는 몇 없습니다. 돈이 안 될 거란 뜻입니다.” “그중 거물이 하나 있지 않나? 이 묘원각의 주인 말이야.” “약을 찾지 않으신 지 꽤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과연 나리께 약을 살까요? 오늘 뵈었을 텐데요.” “이건 오해가……! 크흠! 뭐, 꼭 그분께 팔려는 게 아니다. 가끔 귀빈채의 문이 열리는 날, 나를 좀 들여보내 달란 것이지. 그쪽 객들이 분명 좋아할 만한 약일 거거든.” “하면 행수 어른과 거래하면 될 일이지, 구태여 제게 말씀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묘원각의 주인께서 기미를 보셔야 일이 수월할 것 아니냐. 내 술을 한 병 줄 터이니 네가 슬쩍 넣어 주거라.” 언제 준비해 둔 것인지, 성호는 제 짐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 도화에게 들이밀었다. [희명군께선 은성호가 그대를 찾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 묘원각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으니 당장 무슨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부디 그자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 도화는 한 시진 전, 무혁이 제게 언질 준 말을 떠올렸다. 무혁의 말대로라면 저 술병은 제게 덫이 될 게 분명하였다. 해서 도화는 술병을 다시 성호 쪽으로 밀었다. “하지 않겠습니다.” “뭐라?” “무엇이 든 줄도 모르는 술을 어찌 전한답니까. 전 오래 살고 싶습니다, 나리.” “허. 몇 년 전엔 참으로 잘 따르더니……. 좀 더 나은 사내가 생겼다고 너도 다른 계집들처럼 나를 버리는구나.” “나리께선 제게 사내였던 적, 없습니다. 그저 묘원각의 객이었지요. 지금도 그나마 세령이의 외숙이라 이만큼 상대해 드리는 겁니다.” “하면 술은 전해 주지 않아도 되니 귀빈채 출입이나 한번 허락받아 보거라.” “그것도 아니 할…….” “은세령. 그 아이는 8년 전 사건에 대해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였다더냐? 네게 분명 제 어미의 죽음에 대해서 수도 없이 물었을 터인데.” “…….” “그 애는 알까? 네가 만일 서찰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본인이 고아가 되는 것만은 면하였을지도 모른단 걸 말이야. 그렇게 해서 묘원각의 약재 담당을 몇 년째 독점하고 있단 건 알고 있으려나? 그게 돈이 꽤 된다는 것까지는 모르겠지?” “……그런 의도로 서찰을 외면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나 결론적으로는 은세령의 어미가 죽어 네년이 가장 이득을 취하게 되었지. 안 그러냐? 이제 와서 결백을 호소한다 한들 과연 누가 네 말을 믿어 줄지 모르겠구나.” “…….” 도화가 쥔 치맛자락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일부러 죄책감을 심어 주려 저러는 것을 안다. 하나 그걸 알면서도 도화 또한 8년 동안 그날의 일을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었으므로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도움을 청하는 서찰 내용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건 사실이니까. “무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내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줄 수 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바쁘다 하였으니 보내 주어야지. 하면 자알 생각해 보거라.” 성호는 비웃음을 띠며 도화가 나가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영선이 들어섰다. “나리,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 그래, 이야기해 보거라.” “그 술병…… 제가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하겠습니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부터 이미 엿듣고 있단 것쯤은 알았다. 게다가 제 입맛대로 반응해 주니 이 순진하고 멍청한 계집을 어찌 내칠 수 있을까. 저 대신 나서 준다면야, 누구든 그게 무에 중할까. 성호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영선을 어느 때보다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아주 생생하게 반복되는 기억은 늘 뒤죽박죽 얽힌 채로 악몽이 되어 휘언을 덮쳤다. [휘언아. 네, 네가 한 거야.] [네가 죽인 것이다.] [네가 죽였어! 네가!] 여성 편력이 심한 그의 부친은 세자 시절 몰래 사들인 묘원각에서 유흥을 일삼았다. 겉으론 행수를 내세워 관리하였지만, 잠행을 일삼으며 난잡하게 씨를 뿌려 댔다. 그런 와중에도 혹이 붙는 건 싫었는지 아이를 갖게 된 기생과 자식은 전부 명줄을 끊어놓았다. 해서 휘언의 어머니는 회임 사실을 알자마자 묘원각을 떠났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주막이나 작은 기방에서 일을 하였고 어떨 때는 동냥도 하였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어머니의 이름은 계속 바뀌었다. 하나 휘언의 이름은 그저 ‘아가’였다. 이름이 있는데도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물어보아도 이름이 아직 없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얌전히 지내거라. 누가 무얼 묻든 아무 대꾸도 해서는 아니 된다. 특히 신상에 관해서는.” “하, 하면 저는 누, 누구와 대화를 하, 합니까?” “어머니가 있잖니. 그러니 어머니 외에는 전부 경계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네에, 어머니.” 말을 배우자마자 어머니는 휘언에게 입을 열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하였다. 그러니 말이 어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대화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모자는 주기적으로 지내는 곳을 바꾸었지만, 가끔은 꽤 길게 한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대개 혼자 사는 사내의 집이었는데, 그럴 땐 집주인과 어미가 무얼 하든 못 본 척, 못 들은 척 밖으로 나가 웅크리고 시간을 죽이는 게 휘언의 일이었다. 그렇게 열두 살이 되던 해, 배가 고파 설거지 그릇에 붙어 있던 밥풀을 긁어 먹는데, 그걸 본 집주인이 빈대 새끼라며 휘언의 목을 졸랐다. 살겠다고 잡은 놋그릇으로 그자의 머리를 후려쳤는데, 그 마을 사내들이 싹수가 노란 새끼를 때려죽여야겠다며 들고 일어섰더랬다. 어머니는 그때,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당신이 나고 자랐던 묘원각에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즉위한 부친이 그맘때쯤 묘원각을 적자에게 물려주었으므로 더는 우리를 찾지 않으리라 여긴 듯했다. “애 이름은?” “휘언이요. 성은 몰라요. 아이 아빠가 누군지 몰라서…….” 묘원각으로 돌아가면서 휘언은 이름을 되찾았다. 그러나 못 먹어 왜소하고 배우지 못한 탓에 그는 금세 묘원각을 드나드는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성정이 유순하진 못하여서, 처음에야 똑같이 패악을 부렸다. 한데 개중에는 상단 아이들뿐 아니라 반가의 자식들도 여럿 있던 모양이다. 무슨 이야길 들었는지 어머니가 우셨다. 울면서 제발 얌전히 있으라 당부하였다. 늘 강인한 줄 알았던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해서 휘언은 그날부터 정말 가만있기로 하였다. 괴롭힘은 더 심해졌지만 모든 일에 무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힘들게 돌아다니거나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것 외에, 처지는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제 위치가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휘언의 돌파구였나, 그것 또한 아니었다. 거처를 대가로 일을 시작한 어머니는 휘언이 깨어 있을 때면 늘 주무시고 계셨다. 물론 한번 연약함을 내비친 어머니에게 따돌림당하였다며 칭얼거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묘원각에서도 휘언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서당엘 다닌다며 글솜씨를 뽐내던 아이들 뒤에서 기웃대었는데, 녀석들이 ‘천치’라는 글자가 휘언의 이름이라 속이고 놀려 댔다. 한데 그날은 어쩐지 처음 보는 여자애가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동생 놀리지 마, 이 비열한 놈들아!” 그 애는 작은 몸으로 호통을 치며 아이들을 쫓아내 주었다. <55> “이름이 뭐니? 나는 은세령.” “……휘, 휘언.” 어미가 아닌 제게 직접 이름을 물은 이는 처음이었다. 아리따운 어머니에게 관심 보이는 이는 많아도 그 뒤에 달린 혹까지 궁금해하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한데 그 애는 무에 그리 호기심이 많은지 이것저것 캐묻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누이를 자처하며 글을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휘언아. 저것들이 또 너를 놀리면 누이한테 와서 말해. 내가 혼쭐을 내 줄 터이니.” “네, 네가 왜 내 누, 누이야?” “음……. 누이가 동생을 지켜 주는 게 이치에 맞으니까?” 당시에는 이 또한 괴롭힘의 일종인가 싶었지만, 그 애는 정말로 제게 글을 알려 주고 또래 아이들이 하는 놀이도 알려 주었다. 곁에서 시종일관 대화를 걸어오니 더듬던 말투까지도 자연스레 고쳐졌다. 그뿐이랴. 단 걸 좋아하면서 주전부리가 생기면 그에게 반 이상을 떼어 주었고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으면 꼭 데려갔다. 진짜 친누이처럼 살뜰히도 챙겼다. 저 외의 사람들에게도 또 어찌나 싹싹한지. 어른들 앞에서 기죽지도 않고 되레 그들을 구워삶았다. 그런 모습이 어린 휘언에게는 몹시 멋있어 보였다. 해서 어느 새부턴가 그는 세령이 하는 걸 전부 따라 하게 되었다. 그리 행동하니 그를 예뻐하는 어른도 생겼고, 아이들의 괴롭힘도 줄었다. 세령은 휘언을 사람 구실 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쁨과 다정함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어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던 억겁 같은 하루도 세령과 있으면 찰나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휘언아! 어머니들이랑 가락지 놀음하자!” “……내 어머니도?” “응! 같이 해 주신대. 얼른 와!” 세령은 침투력이 참으로 대단하여서 그의 어머니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화를 내고 미안해서 울기만 하던 어머니가 많이 웃게 되었다. 덕분에 세령의 어머니와 휘언의 어머니 또한 둘도 없는 친우가 되었다. 한참 후에야 세령이 저보다 두 살이나 어리단 걸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누이라 부르는 게 타당하다고 여겼을 정도로 그 애는 눈치가 빠르고 영특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령이 휘언아, 하며 제 이름을 사근사근 불러 주는 게 너무도 좋았다. 해서 영원히 그 애가 제 누이이길 바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령도 아이는 아이였다.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는 밤, 혼자 있길 무서워하여 곁을 지켜 주었더니 그에게 기대 왔다. 고작 같이 있어 주는 게 뭐라고, 기뻐했다. 그게 너무도 달았다. 제게도 쓸모가 있는 것 같아서. “휘언이 네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너랑 있으면 비 오는 게 하나도 안 무서워.” “하면 내가 계속 누이 곁에 있을게.” “참말?” “응!” 헤헤, 웃는 얼굴은 평생 같이 있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어여뻤다. 해서 서로의 어미가 없는 밤, 두 아이는 같은 방에서 노닥거리다 잠드는 날들이 많아졌다. “나는 커서 꼭 우리 가족만 지내는 집에서 살 거야.” “왜?” “얹혀살기만 해 봐선가. 그게 참 좋아 보였어.” 세령 또한 휘언처럼 묘원각 기생에게서 태어났지만 타지를 전전하다 돌아온 아이였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세령이 원하던 대로 이 묘원각을 떠나면 저는 어찌 되는 걸까. 불쑥 불안해져서,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하면…… 나는?” “뭐가?” “나랑도 따로 살게 되는 거야?” “무슨 소리야. 같이 살아야지!” “우린 진짜 가족이 아닌데…….” “나랑 혼인하면 되지. 무에 문제야?” “……무어?” “싫어 ? 나랑 혼인하면 우리 어머니도 너희 어머니도 다 같이 살 수 있는데?”  두 살은 더 어렸으니 저보다 혼인에 대해 무지한 게 당연하였다. 아마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겠지. 하지만 싫지 않았다. 되레 갑작스러운 청혼에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하여 휘언은 제대로 답도 못 하고 고개만 마구 저었다. 싫지 않아. 너무 좋아. 그때부터 휘언의 꿈은 세령과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밖에서 파는 싸구려 간식이 아니라, 수라상에 올라갈 법한 음식을 배워서 직접 해 주어야지. 그걸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술에 묻은 부스러기를 능청스레 훔쳐야겠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꼭 손을 붙잡고 산과 들을 산책하며 일과를 나누는 거야. 휘언은 그런 행복한 상상에 시도 때도 없이 빠져 있곤 하였다. 늘 세령만을 향하던 눈길, 시선이 마주치면 떨리는 가슴, 미소를 볼 때마다 덩달아 씰룩이던 제 입꼬리가 사랑이었음을 그는 곧 깨달았다. 살아서 처음 느낀 행복이 그 애였으니 헷갈릴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여느 평범한 아이들처럼 지내며 두 해를 보냈다. 작았던 키는 이제 세령을 따라잡았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세령을 누이라 칭하며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한데 그게 마뜩잖았을까. 세령을 흠모하는 것 같던 사내놈이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두 사람을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와하하! 누이? 누이가 맞느냐? 저놈이 두 살이나 더 많다며! 키도 비슷한데 징그럽게 누이라니!” “흥, 네가 무슨 상관이야?” “기생년 딸이라 사내놈을 그리 끼고도는 것이냐? 계집 놀이나 하는 풋내기 꼬맹이가 무에 볼 데 있다고. 아아, 꼬맹이 너, 혹 은세령을 돈 주고 샀느냐? 은세령 너는 네 어미처럼……” “뭐야? 이 버러지 같은 게……!” 제게 손찌검하는 건 참아도 세령을 욕하는 것만큼은 조금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하여 몸이 먼저 반응하였다. “히익!” “휘언아, 안 돼! 그러지 마!” 쓰레기 같은 놈을 흠씬 두들겨 패 주기 위해 달려든 그때, 세령이 그를 막았다. “누이를 괴롭히는 것들은 내가 다 찢어 죽일 거야!” “하지 마! 똑같은 사람 되고 싶어서 그래? 난 그런 거 싫어 ! 넌, 너는 좋은 애잖아.”   고작 그 말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좋은 아이는 이리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구나. 누이는 그런 걸 싫어하는구나.   쥐었던 주먹이 맥없이 풀렸다. 휘언의 기세에 주춤 물러서던 사내놈은 주먹질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겁쟁이라며 또 비아냥거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세령에게 밉보이기 싫어서 그는 화를 꾹 눌러야 했다.  그때, 묘원각의 실질적인 주인이 나타났다. “저 아이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 말을 밉게 하는구나. 자신보다 힘이 없으니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냐?” “아, 아니…….” 키가 크고 서 있는 자세가 무척 올곧은 사내였다. 약관은 아직 지나지 않은 듯 보였지만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어른스러운 자태였다. 또한 조곤조곤 뱉는 목소리는 감미로울 정도로 부드러웠는데, 그 속에는 어쩐지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 “약한 것을 알고 발톱을 세우는 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지. 이는 결국 모자란 사내임을 자랑하는 것이고.” “…….” “오늘 학식이 높은 집에서 도령 하나를 데리고 왔다던데, 댁에서 아드님이 이런 사내인 것을 알면 꽤 놀라겠구나. 기생년이니 계집이니, 이처럼 상스러운 단어를 입에 올리는 걸 군자의 도리라 여기실까?” “자, 잘못했습니다! 부디 어른들께는 비밀로…….” “나 말고, 저 아이들에게 잘못을 빌어야지.” 댁 어르신들에게 말이 들어갈까 봐 사색이 된 소년은 수치심을 느낀 듯하였지만, 결국 우물쭈물 사과를 건네고 줄행랑을 쳤다. 말 몇 마디로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단 사실이 대단하였다. 한데 그런 그가 휘언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네가 휘언이지?” “……저를 아십니까?” “역시. 한눈에 알아보았다. 앞으로도 자주 보았으면 좋겠구나.” 그가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그날 밤 어머니께 들어 알게 되었다. 제 부친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것도. “모를, 모를 줄 알았어. 애가 이리 크는 동안 찾질 않았으니 전부 잊은 줄…….” 휘언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출신을 말해 주었지만, 속은 덤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잠든 사이, 어머니는 세령의 모친에게 횡설수설 진실을 털어놓았다. 울먹이는 소리에 잠에서 깬 휘언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저하께 휘언이를 들먹이며 그리도 비교하였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배다른 형제를 데려와 그 자리에 대신 앉히겠다며 입버릇처럼……. 그래서 다 알고도 여태 살려 둔 거야. 그런 와중에 제 발로 돌아오기까지 하였으니 무어라 생각하겠어? 새 세력이라 의심하고 조만간 처리하려 들면…….” “저하께선 전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셨다며. 그러니 기다려 보자. 분명 방도가…….” “과연 그럴까? 내게는 그리 말하였어도, 제 자리를 가장 위협하는 게 휘언일 터인데…….” 어쩐지 심상찮은 대화를 들은 것 같았지만, 어린 휘언에게는 그저 이해 못 할 꿈결 같은 소리였다. 얼굴도 모르는 부친보다 직접 마주한 형님의 존재가 그에게는 더 크게 다가온 탓이었다. 온 신경이 형님의 외양과 말투, 성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또한 세령이 이유였다. 약관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 커다란 객사의 주인이란다. 그보다 고작 세 살이 많을 뿐인데 풍채도 좋고 미소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얼굴은 꽤 닮은 편이었지만 나고 자란 환경이 달라선지 어조에는 그가 선망해 왔던 다정함과 능숙함이 있었다. 곁에 있던 세령의 시선이 그에게 박힌 것은 당연지사였다. 형님처럼 되길 바랐다. 세령의 시선만 가져올 수 있다면, 형님처럼 다정하고 여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휘언은 그 나이대의 아이들처럼 그런 한가한 생각이나 하였다. 형님 뒤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그림자가 서자인 자신을 마냥 달가워할 리 없단 사실도 모른 채. <56> “숫자 센다! 하나, 두울…….” 어느 늦은 저녁, 세령과 숨바꼭질하던 휘언은 어머니의 장롱에 숨어들었다. 한데 기다리던 술래가 아닌 두 어머니가 별안간 방 안에 들이닥쳤다. “너와 휘언일 죽이지 않으면…… 세령일 적군 포로들에게 던져 주겠다 하였어. 어떻게, 어떻게 그 어린애를 가지고 그런 협박을…….” “미안, 미안해, 언니. 언니와 세령이에게까지 피해가 갈 거라곤 생각 못 하였는데……. 내가, 내가 미안해, 언니…….” 나갈지 말지 고민하던 차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휘언은 숨을 죽였다. 조금 잠잠해지면 멋쩍게 문을 열까 하였는데, 되레 상황은 더 나빠졌다.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다 동시에 눈물을 터뜨린 것이다. “나는 괜찮아.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 살려야지. 응?” “어, 어떻게…….” “아우를 불렀어. 행랑채로 가는 걸 확인하였으니, 곧 아이들을 데리고 빠져나갈 거야.” “무어?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전하의 사람이지. 그렇지만 측근 축에도 못 끼는 데다, 그리 충성스러운 인간도 아니야. 그저 돈이면 뭐든 하지. 아마 어떻게 해야 제 미끼로 쓸지 고심하느라, 한동안은 우리 애들 잘 지켜 주긴 할 거야.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나와도 꽤 오랫동안 연을 끊고 살았으니 그쪽에서도 금방 찾기는 어려울 거고.” “……한동안? 하면 나중에는?” “저하께도 같은 방법으로 서찰을 남겼어.” “저하를 믿어도…… 괜찮은 걸까?” “지금으로선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 거, 알잖아. 늦어도 지금쯤이면 서찰이 닿았을 테니…… 도와주실 거야. 그러니까, 우리만, 우리만 마음먹으면 돼.” “나는 그렇다 쳐도 언니는……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내가 살아 있으면…… 필시 세령일 쥐고 나를 흔들려 할 거야. 어쩌면 내 손으로 휘언이 목을 조르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저하뿐이야. 우리 아이들을 도와줄 사람은.” “…….” “시간이 없어. 하인 아이가 조금 전에 수상한 자들이 묘원각을 살핀다고 하였단 말이야.” “미안해……. 언니, 정말 미안해…….” 눈물을 쏟던 두 사람은 별안간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어쩐지 휘언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두 사람을 말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상황 판단이 느렸다. 그리고 목으로 술을 넘긴 두 어머니가 입에서 피를 토한 순간,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확신하였다. “어머니!”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롱에서 뛰쳐나가자, 어머니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먼저 쓰러져 버린 세령의 어미를 흘긋거린 후 그를 다시 바라본 어머니는 찰나에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곁에 두었던 단도로 세령의 어미를 찔렀다. 그러고는 제 옆구리에도 칼을 쑤셔 넣었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무슨 힘이 남은 것인지 휘언의 어깨를 꽉 쥐며 연신 속삭였다. “휘언아. 네, 네가 한 거야.” “……예?” “네가 죽인 것이다. 알겠느냐?” “아니, 아닙니다…….” “네가 죽였어! 네가! 누가 묻거든, 네가 하였다고 말해야 해! 컥…….” “어머니!” “사, 살아야 해, 휘언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니 네가 죽, 죽였다고…….” 몸이 기우뚱 넘어가는 와중에도 휘언의 손에 피 묻은 칼을 쥐여 주던 다급한 손. 시체처럼 차가워 그까지 저승으로 데려갈 것 같던 손이 바닥에 떨구어졌다. “아…… 어…….” 휘언은 너무 놀란 탓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굳었다. 밖에선 천둥이 치는데, 그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단두대에 오른 사람처럼 그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휘언아!” 그때, 이 모습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세령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좋은 애잖아.] 자신을 좋은 아이라 맹신하던 그 눈빛이 두려움으로 물드는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변명하고 싶었다. 내 짓이 아니란 말을 먼저 꺼내고 싶었다. 주춤 물러서는 네게 가지 말라 사정하고 싶었다. [네가 죽인 것이다.] 한데 유언 같은 말이 그의 입을 막고 목을 틀어쥐어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절하는 세령 다음으로 휘언 또한 정신을 잃었다. 그 이후부터는 기억이랄 게 없었다. 장정들에게 끌려가 문초를 당하였던 것 같다. 입을 열지 않으니 맞기도 하고 며칠을 굶으며 광에 가둬져 있기도 하였다. 한데 중간중간 혼절한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무엇 하나 또렷하게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 형님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손에 끌려가 처음으로 부친이란 사람 앞에 서게 되었다. 형님 또한 그를 데려가면서 어머니와 같은 말을 하였다. 살고 싶으면 네가 죽였다고 말하라고, 그리고 추후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살아남는 데만 신경 쓰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네 어미를 아주 잔악하게 죽였다지?” 아내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에서 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건 이 사람이구나, 짐작이 갔다. 해서 그는 입을 여는 대신 부친을 노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휘언의 눈에서 본인의 포악한 모습이라도 보았는지 기이한 미소를 띠었다. “아주 잘 컸구나.” 어머니를 죽인 불효자더러 잘 컸다니. 흡족해하는 낯을 마주한 순간, 휘언은 어머니가 제게 살해 혐의를 뒤집어씌운 연유를 깨달았다. 부친은 줄곧 제 야망을 채워 줄 검을 찾아다녔던 거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는 휘둘리지 않을 병기를. 그때부터 그의 삶은 저승보다 더한 지옥이 되었다. 호화로운 궐로 거처를 옮겼지만, 휘언의 방으로 들어오는 음식에는 간간이 소량의 독이 들어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앓다 깨어나면 밥상을 옮기거나 차린 하인이 죽임을 당한 후였다. 그러니 그의 주변인은 하루가 멀다고 바뀌었다. 운이 좋아 정들 만큼 오래 지내게 되면, 부친은 그에게 직접 검을 쥐여 주고 보필하던 사람을 죽이라 명하였다. 휘언이 하지 않으면 본인이 칼을 들었고 어떨 때는 하인을 하나 더 불러 하나를 죽이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렇게 곁에서 죽어 나간 이가 몇인지 셀 수 없다. 부친은 벼랑 끝에 그를 세워 두고 살수로 키우려던 모양이었지만, 기실 휘언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결국 임금의 손에 무고하게 죽어 나간 이들만 늘어날 뿐이었다. “네 어미는 그리 잘 처리해 놓고 왜 망설이느냐? 저 천것들의 명이 더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냐?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 “아니면, 네가 죽였다는 건 전부 거짓이었느냐?” 자질을 의심받게 된 어느 날, 휘언은 무어라도 핑계를 대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머니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 알게 된다면, 세령과 저를 살리기 위함이었단 사실도 들킬 것 같았다. 하면 세령의 안전 또한 보장할 수 없으리라. “어, 어머니께서는 저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저놈들도 다 너를 죽이려 독을 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 체질이 음식과 상성이 맞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고 들어, 함부로 의심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저자들은 적어도 어머니처럼 달려들지는 않았기에…….” “아아, 그래? 눈에 보이는 위협이 있어야 움직이는 놈이었구나, 네가.” 위기를 모면한 줄 알았는데, 그게 잘못된 핑계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부친이 관군 속에 그를 밀어 넣었다. 신분을 숨긴 채. 근본을 모르니 휘언은 자연히 천민 취급을 받았고 그 사이에서도 갖가지 폭력과 따돌림을 당하였다. 감내하는 데 익숙하였음에도 이런 상황에 끝까지 살아남을 방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다시 묘원각에 돌아가 세령을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애를 마주한다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먼저 해명하고 싶었다. 오해를 풀고 다시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제 편이 하나 없는 곳에선 그리움과 후회만 짙어졌다. 하나 탈주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훈련은 고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전쟁터에 내몰렸다. 관군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례적일 만큼 빠른 참전이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짐작이 갔으니 거부할 수도 없었다. 솟구치는 선혈과 비명 속에서 목을 꿰뚫기 위해 달려오는 적군들, 도망만 치지 말고 반격하라 고함을 내지르며 압박하는 아군들. 숨이 막힐 정도로 극한의 공포에 내몰린 순간, 휘언의 귓가에 어머니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네가 죽인 것이다.] [네가 죽였어! 네가!] 이명과 함께 반복되는 죽음의 속삭임. 그 순간, 구역질이 날 만큼 극심한 두통이 일었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와아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휘언은 잘라 낸 수장의 목을 쥔 채 시체 더미 위에 서 있었다. <57>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지만 그때부터 같이 훈련하던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를 우러러봄과 동시에 두려워하였다. 휘언의 공치사를 들은 부친 또한 그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였다. 형님을 앞에 세워 두고 비교하며 세자 자리를 위협하였을 정도로. 형님은 그런 자리가 익숙한지 담담하였으나 휘언은 크게 낙담하였다. 그동안은 세령에게 그저 오해라며, 나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한데 이제는 제 손으로 누군가의 숨을 거뒀단 게 진실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스스로가 끔찍했다. 세령이 다른 이들처럼 자신을 두려워할까 봐 무서웠다. 저를 더는 좋은 사람이라 여기지 않을 것 같아서 암담해졌다. 그러나 삶은 게서 끝이 아니었다. 연이은 전쟁에 휘언은 점점 신(神)을 잃어 갔다. 검을 쥐면 자꾸만 이성이 끊겼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상흔을 얻었고 그보다 몇 곱절은 더 많은 사상자를 이 손으로 내었다. 살육에 미친 사내, 두억시니, 광증……. 별 수식어가 다 붙는 와중에도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했던 기억 따윈 없었다. 정말 부친이 원하던 대로 병기라도 된 걸까. 당신께서 내준 독을 곧이곧대로 삼킨 탓에 정녕 미쳐 버리기라도 하였나. 전장에서 자신은 대체 어땠느냐고 물어보면 부하들은 그저 칭송만 할 뿐이었다. 그게 제 주변인이 원하는 모습이라 생각하니, 어리숙하고 나약한 자신을 원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니, 점점 아무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 고립되어 갈수록 자연히 세령만 떠올랐다. “요즘은 정말 옛 모습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찌 그리 강해지신 겁니까? 계기라도 있던 겁니까? 마치 다른 사람 같아 흠칫 놀라곤 합니다.” “그런가…….” “한데 혹……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지요? 가끔 위태해 보여 말입니다.” “……내가?” “예. 오지랖이었다면 송구합니다.” 갓 관군이 되었던 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 중 무혁만이 휘언의 변화에 의구심을 가졌다. 다른 이들은 전부 달라진 그의 모습을 칭송하느라 급급하였는데, 무혁은 걱정하는 눈치였다. 외로움이 길어서였을까.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상태를 털어놓고 말았다. 미친 소리라 여길 법도 한데 무혁은 진지하게 듣고 믿어 주었다. 해서 궁지에 몰릴 때마다, 영판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귀신에 씌었다니. 제가 그걸 의심해 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이미 용하다는 무당은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도성에서 제일가는 약방에 찾아가 몰래 알아보았지만 의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중에야 타국에서 심병으로 혼이 갈라진 사례가 있단 걸 듣게 되었지만, 이 병은 약도 침도 소용이 없단다. 절망스러웠다. 해결할 수 없단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 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있단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제일 어려웠다. 그러나 자다 일어나면 며칠이 지나 있고, 그사이에 누군가가 저를 해치러 왔다 되레 변을 당하는 일이 잦아지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해서 확인해야 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며칠을 살아가는 그 혼이 정말 존재하는지. <내 이름은 이휘언이다. 넌 누구지?> <둔하기는. 이제야 눈치챈 것이냐.> 긴가민가하며 남긴 쪽지에 답변이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둘로 쪼개졌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혼의 자아가 얼마나 강력한지도. 전장에서 얻은 상처는 이따금 바로 치료하지 못했으니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편을 피우는 병사들이 흔하였다. 휘언 또한 그중 하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편을 입에 대면 정신을 잃었다. 시작은 아닐지언정 그게 다른 조각을 부르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놈은 아편에 강하게 의존하는 편이었다. 휘언이 끊으려 해도 한쪽이 협조하지 않으니 몸은 중독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그 탓에 전쟁터가 아닐 때도 모든 생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경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유리 너머에 자신이 아닌 다른 괴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의가 기본적으로 깔린 눈은 반대편에서 휘언을 응시하며 그마저도 죽이고 싶은 기색을 보였다. 단순히 광증이라 흘려 넘길 것이 아니었다. 제 몸의 입지를 차츰 잃어 가는 걸 느꼈으니까. 그러나 아득바득 이 몸을 차지하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만간 나는 사라질지도 모르겠구나, 휘언은 그리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의원이 이 병을 고칠 방도가 없다 하였을 때부터, 내심 안도하였던 것도 같다. 이 지긋지긋한 생을 제 의지와 상관없이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부터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계속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면 적국 하나를 제패한 이가 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깨어 있어도 생시가 맞는지 분간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게 그저 꿈 같았다. 깨어나면 극심한 고독을 이겨 내는 게 힘겨워 세령과의 추억만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 애가 지내던 묘원각 방을 빌려, 그곳에 틀어박혀 잠을 청하는 게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안 부친은 그런 휘언의 연약한 모습이 꼴 보기 싫었는지 이따금 기생을 보내오기도 하였고 살수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기생으로 둔갑한 살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물론 오는 족족 다른 혼의 손에 전부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임금께서 붕어하셨습니다.” 그렇게 휘언이 망가져 가는 사이, 세상이 또 달라져 있었다. 이번엔 제법 센 독을 먹었는지 꽤 오래 앓았었는데, 깨어 보니 부친이 돌아가셨단다. 그렇게 저를 괴롭히던 이가 자신이 잠든 사이 허무하게 사라졌단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온종일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였다. “다행히 깨어났구나. 네가 고생이 많았다.” 사건의 전말은 그가 일어났단 소식에 찾아온 형님에게서 듣게 되었다. 성군이 되지 못하였던 부친은 적통인 세자에게도 잔악한 아비였으니, 단단해 보였던 형님 또한 반역을 계획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역에는 다른 혼이 있었다. 그놈이 형님과 손을 잡고 임금의 목숨을 끊었단다. 어미를 저승으로 보낸 그 술로. 상대가 우선 기미를 보지 않으면 절대 입에 뭘 대는 법이 없던 부친은, 독에 내성이 생길 대로 생긴 희명군이 먼저 술을 넘기자 안심하고 술잔을 기울였단다. 참으로 어리석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죽인 사람은 또 저였고. 그렇게 휘언은 몸뿐만이 아니라 복수할 기회마저 허무하게 빼앗겼다. “방금 행수에게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제 묘원각은 네 것이야.” “……묘원각이 제 것이라니요?” “계속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이 묘원각을 갖고 싶다고. 혹,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헛웃음이 났다. 어미의 원수에게 날붙이를 들이밀어 본 적도 없이, 죽을 고비만 거듭하다 남은 게 고작 묘원각이라니. 제 삶을 망가뜨린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그렇다고 부나 명예를 얻고 싶었느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다. 형님처럼 나라의 주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 몸에 두 사내가 들어 있는 미치광이 임금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나. 휘언은 그저 살기 위해 부친의 말을 들었던 것뿐이며, 딱히 아비의 곁을 탐낸 적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제고 한 번쯤은 생애 유일한 행복을 앗아 간 부친에게 복수할 기회가 오리라 믿었을 뿐이었다. 한데 삶의 이유가 사라지니 고작 묘원각 하나만 갖고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때 떠오른 건 오직 세령이었다. 혹 묘원각에 머문다면 언젠가 세령을 볼 날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좋은 기억은 아니더래도 한 번쯤은 제 어미가 죽은 곳에 찾아와 보지 않으려나. 기대와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다른 혼도 저와 같은 생각으로 묘원각을 달라고 하였던 건 아니었는지. “여쭐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가 묘원각 하나만을 원하던 이유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추억이 많다고 하였잖느냐. 어릴 적의 행복이 온통 묘원각에 묻어 있으니 여생도 그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참으로 특이한 청이라 생각하였는데,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맞는 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때는 그런 게 아니라며 잡아떼더니.” “제가 무어라 하였기에…….” “기억 안 나느냐? 왜 묘원각이냐 물으니, 그때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더 좋은 거처를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게 묘원각이 미련처럼 남는다고. 아마 얼마 없는 좋은 기억 때문인 것 같다고. 해서 숨겨 둔 여인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 하니 그럴 리 없다며 정색하지 않았더냐.” “…….” 무얼 미련에 둔 걸까. 정말 세령일까. 다른 조각이 가진 기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의중 또한 알 수 없었다. 형님은 심란한 제 표정을 보더니 나긋하게 웃으며 물어왔다. “혹 내가 너를 처음 보았던 날, 곁에 있던 소녀를 찾는 것이냐?” <58> “……그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그때 조막만 한 것들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역시 내 눈에 예쁘면 남의 눈에도 예뻐 보이는 걸까. 그 순간에 든 생각은, 세령을 찾게 되더라도 절대 형님께는 보이지 말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조각을 떠올렸다. 성격은 다를지언정 어쨌든 제게서 쪼개진 사내이니 세령을 본다면 필시 반할 테지. 그는 세령을 그리며 귀빈채를 꾸리는 대신, 구태여 만나거나 불러내지는 않기로 하였다. 그저 외숙의 집에 몸을 의탁 중이며, 아직 혼인하지 않았단 사실 하나로 안심하면서 마음을 다독여 왔다. 가끔 세령의 소식이 궁금하면 묘원각을 드나드는 보부상에게 잘 지내는지, 배필이 생겼는지만 보고 올 것을 시켰다. 직접 찾아가면 도저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언젠가 이 병이 고쳐지면 그때 찾아가자.’ 휘언은 그리 다짐하며 당장에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죽였다. 후원을 꾸몄다가 다시 긴 잠을 자느라 방치하고. 8년 전 사건을 아는 이가 세령의 접근을 막는 건 아닌지 의심하여 내쫓기도 하고. 언제고 슬그머니 찾아올 수 있게 괴로울 만한 그날의 흔적을 지우면서……. 그렇게 두 해를 버텼다. 한데 다른 한쪽이 세령을 찾아냈다. 저보다도 먼저 손을 뻗었다.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지켜 오던 것인데. 잔악하고 무자비한 사내답게 세령을 마음껏 탐하였다. 그자는 탐심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고 욕망을 그대로 표출하였다. 죄스럽고 분했지만, 그놈을 몰아낼 힘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떠나자니 세령을 가까이서 보는 게 황홀하여 포기도 아니 되었다. 그래도 세령이라면, 그런 무도한 작자보다는 제게 더 마음을 쓸 거라 여겼다. 그랬는데…… 어쩐지 어느 순간부터는 그자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세령이 원하던 건 다정하고 어른스럽게 곁을 지켜 주는 사내가 아니었던가. 어릴 적 형님을 선망하던 모습을 보고 줄곧 그런 사내를 좋아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리되려고 본성을 부단히도 죽여 왔었는데. 그놈에게 운우지정을 조르는 걸 목도한 그때부터, 휘언은 도무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졌다. “세령아, 한데 말이야. 어제는…….” “나리, 잠시 앉아 보십시오.” 어쩌다 다른 혼과 그런 사이가 된 것인지 떠보고 싶었지만, 하필 세령이 대화의 주도권을 뺏어 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손 이리 줘 보십시오.” “가락지 만들어 주려고?” “예. 어떤 손가락이 좋으십니까?” “약지.” “왼손 약지는 조금…… 그렇고 오른손은 어떠십니까?” “왜?” “그, 나중에…… 진짜로 하게 되면요. 왼손에 끼워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혼수로 주겠단 뜻이야? 나…… 청혼받은 거야?” 처음 받는 가락지 선물이 기뻐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상념까지 잊고 말았다. “도성에서 먼 곳으로 가서 살자.” “예?” “혹 내가 혼인 상대로는 성에 차지 않아 그래?” “그럴 리가요. 오히려 과분하지요. 다만…….” “하면 되었어. 답을 채근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 어여쁜 입으로 좋다고 말해 주기야.” 제게 행복이 그리 쉬이 와 줄 리 없는데. 홀로 꾸려 낸 망상에 도취하여 방심하였다. <길게 말 안 해. 은세령한테서 떨어져.> 다른 조각이 제게 처음으로 먼저 쪽지를 남겼다. 세령일 어찌해 보겠다는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되레 안심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애가 탄 모양이었으니. <떨어져야 하는 건 네놈이지.> 해서 오만한 답신을 남겼다. 솔직히 말하면, 세령이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저를 당연히 더 좋아할 거라 여겼다. 당장은 달라진 지위 탓에 표현하지 못할지언정, 바라보는 눈이나 표정 같은 것에서 저를 마음에 두고 있단 걸 숨기지 못하였으니까. 혹여 그놈에게 조금의 정을 주었대도, 그저 동정에 지나지 않은 감정일 줄 알았다. 세령이 8년 전 사건을 캐묻기 전까지는. “세령아.” “네, 나리.” “사람을 찢어 죽이는 자는 나쁜 놈이지?” “네? 뜬금없이 그런 건 왜…….” “그렇잖아, 응?” 그러니까 너는 그런 놈을 싫어해야 마땅하잖아.   그간 쌓아 올렸던 ‘좋은 사람’의 정의가 무너지니 세령의 연심이 향하는 사내 또한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온갖 것들로 세령과의 시간을 채우는데도 허전하여 미칠 것 같았다. 다른 혼의 시간까지도 강탈하고 싶었다. 세령이 그놈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 속여 볼까도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하나 그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되었다. “나리. 이번엔 어떤 연유로 저를 속이려 하십니까?” “…….” “왜 답이 없으십니까?” “네 물음의 의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이제 와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습니다. 두 번은 안 속습니다.” “내가 무얼 속였는데?” “또 휘언…… 그러니까, 다른 혼의 흉내를 내고 계시잖아요. 아주 재미 들이셨나 봅니다.” 그놈은 이미 저질렀구나. 내가 하려던 짓을. 그렇게 내 모습까지 빼앗아 세령의 마음을 전부 채 가려는 속셈이었나. “……이제는 나조차도 그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렇게나 그놈을 바라게 된 거야?” “…….” “난폭한 사내보다 점잖은 사내가 좋다며.” “어…… 나, 나리…… 그게…….” “사람을 찢어 죽이는 자는 나쁜 놈이라며. 하면 그놈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잖아.” 그놈에게 전부 빼앗긴 것 같아서 세령을 미친놈처럼 몰아붙였다. 눈이 뒤집혀서 제 얼굴이 얼마나 험악한지 인지도 못 하였다. “나, 나리…… 저는, 그러니까…….” “나는 이제 무얼 해야 해? 어찌해야 그놈 자리를 빼앗을 수 있어? 어떻게, 어떻게 해야 네 머릿속을 온전히 나로 채울 수 있을까?” 여태 보여 주던 애틋한 얼굴은 전부 자신이 아니라 너머에 있을 그놈에게 보인 것이었나. 몸은 진작 섞었어도 마음만은 내어 주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연모라도 하게 되었나. 하면 대체 얼마나 깊어졌을까. “난, 나는 모르겠어, 세령아. 네가 싫어하는 모습은 전부 떼어 낸 지 오래인데, 그딴 걸 네가 원한다는 게 혼란스럽고 믿기질 않아. 어찌해야 나만 봐 줄래? 그놈처럼 사람을 죽여야 봐 줄래? 했잖아. 이 손에 방금 사람 하나 엉망으로 만들고 왔잖아. 한데도 너는 왜 그놈을 찾는 거야? 이걸론 부족해? 하면 네가 아프건 말건 내 좋을 대로 너를 휘두르면 그땐…… 으윽…….”  어쩌면…… 세령의 눈앞에서 사라져야 할 혼은 그자가 아닌 나일지도 모른다. 그런 깨달음을 얻자마자 휘언은 쪼개질 듯한 두통에 휩싸였다. 지난 세월 세령만을 위해 다듬어 온 모습을 죄 부정당한 것 같아서, 극심한 혼란에 호흡이 가빠 오고 정신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놈은 세령이 나약한 혼 따위 원하지 않으니 꺼지라는 듯, 때맞춰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 * * [네가 죽인 것이다.] [네가 죽였어! 네가!]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어. 그래……. 내가, 내가, 내가……!] 되풀이되는 악몽 속 외침은 번잡스럽다. 매번 무시하려 해 보지만, 휘언에게 살인범의 낙인을 찍는 손가락들이 곧장 달려들어 숨통을 조인다. 무력하게 받아들이며 헐떡이던 휘언은 한순간에 초점을 잃었고,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때가 되어서야 꿈에서 빠져나왔다. “허억! 헉…… 헉…….” 시끄럽던 꿈과 달리 사방은 고요했다. 해가 비치는 창호문 밖에선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사내는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하아, 제길…….” 또 깨어났구나. 어쩜 이리도 지리멸렬하게 생을 이어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세령과 재회하고선 그런 생각은 잠시 잊었는데 다시금 지옥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하나 상황은 그전보다 더 암울하였다. 세령이 저를 원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혹독한 삶을 지탱하게 해 준 존재를 손에서 놓게 되니 세상이 전부 잿빛으로 보였다. 휘언은 텅 빈 눈으로 옷을 챙겨 입고 비척비척 활터로 향하였다. 산새 우는 소리, 열기가 가셔 선선해진 바람에 사아아,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제법 근사한 풍경이었으나 그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였다. 활시위가 드드득 소리를 내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과녁을 노려보는 휘언의 턱뼈가 불거졌다. 차라리 과녁 앞에 서는 게 낫지 않을까. 정신을 빼놓고 있으니 눈은 정중앙이 아닌 그 너머 어떤 허상을 응시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손을 떠난 화살은 중앙에서 아주 벗어난 곳에 박혔다. “하.” 휘언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상인 내 모습도 맞추지 못하니, 등신이 따로 없군.’ 쓸모없는 인간의 표본이 있다면 자신이 아닐까. 다른 혼처럼 근거리에서 사람을 제압하는 건 어려워, 일부러 활 쏘는 법을 배웠다. 물론 써먹을 기회는 없었지만 재능을 보여 꽤 잘 맞는 취미가 되었다. 한데 이마저도 못 하게 되었으니 당최 제가 살아 있는 연유를 모르겠다. 휘언은 파르르 떠는 손을 꾹 쥐며 씁쓸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환청 같은 것을 들었다. “나리.” <59> 기어이 자신이 미쳐 버린 걸까. 그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목소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휘언 나리.” 만일 귀기가 저를 현혹하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면, 휘언은 그대로 당하였을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으니. “……세령아.” “한참 찾았는데…… 예 계셨군요.” “너, 왜…….” 세령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뒤에 서 있는 무혁을 쳐다보니, 멋쩍은 얼굴로 묵례한다. 본디 이곳엔 무혁과 저 외에 아무도 들인 적 없었으므로 휘언은 그저 얼떨떨하였다. “네가 어찌 이곳에…….” “무혁 나리를 졸라 따라왔습니다. 나리를 뵙고 싶어서요.” “나를?” “예.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요.” 다른 조각과 마음을 나눈 세령이 저를 찾아올 이유가 무엇일까. 그동안은 제가 두 갈래로 찢어진 걸 모르는 체하며 곁에 있어 주기라도 하였거늘. 다 밝혀진 작금, 세령이 제게 어떤 용건이 있는지 좀처럼 예측되질 않았다. 지금껏 순순한 모습에 동정이라도 내어 주었는데, 지난번 무섭게 몰아붙였으니 오만 정이 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면 이 몸을 다른 혼에게 내어 달라 청할지도 모른다. 불안감에 심장이 쿵쿵, 요동쳤다. 휘언은 무심결에 주춤 뒷걸음을 쳤다. 그러자 세령의 표정이 굳어진다. 온기를 거두는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령에게서 나올 말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 “나리!” 그는 회피를 택하였다. 세령의 옆을 지나치고 묘원각으로 돌아가는 길로 향하였다. “나리! 잠시만요! 헉…… 나리!” “따라오지 마.” 뒤에서 세령이 쫓아오며 간절하게 부르는 탓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멈칫멈칫하였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별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휘언은 세령을 애써 외면하며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산에서 내려갔다. “읏!” 한데 중간쯤 왔을 때, 뒤에서 털퍼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간 무시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령아!” 저 때문에 넘어진 모양인지 세령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휘언은 달아나고 있었단 사실도 잊고 곧장 발길을 돌렸다. “세령아, 다친 것이야?” 주저앉은 세령의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살피려 했지만 고개를 들지 않는다. 많이 아파서 소리도 못 내는 것일까. 또 나 때문에 네가 다쳤구나. 죄책감에 속이 쓰렸다. “어, 업힐래? 그래, 업히자. 그리고 내려가서 치료를…….” 손을 뻗은 순간 탁, 하고 손목이 붙들렸다. 부러 넘어진 체한 건가 의심할 새도 없이, 세령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바람에 휘언은 움찔 떨었다. “왜 도망치십니까? 뭐가 그리 두려우신 건데요.” “…….” “제가 나리의 상태를 모르는 척하여 화나셨습니까?” “아니야. 내 어찌 네게 화를 내.” “그럼 제게 질리신 겁니까? 외숙부 말대로 이제 저 같은 천출과 지내는 게 싫증이 나셨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면 대체 왜 저를 피하시는 건데요!” “…….” 그놈을 연모하는지 묻고 싶었다. 이 몸을 내가 포기하길 바라는지도 궁금하였다. 본디 이 몸은 내 것인데. 그럼 차라리…… 차라리 그놈 행세를 한다면, 너는 빈껍데기인 나도 봐 주지 않을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휘언은 세령의 입에서 제가 예상한 답이 나올까 두려워, 다문 입술을 차마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나리.” 세령이 휘언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쌌다. 차디찬 저와 달리 체온이 따뜻하였다. 고작 그 온기 하나에 설움이 밀려왔다. “……네가 밉고 싫어서, 질려서 피한 게 아니다. 절대로.”   “하면요?” “내가 모자라서 그래. 내가…… 겁쟁이라.” “…….” “너를 해칠까 봐 무섭고 내 사소한 행동으로 네가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워.” “해서 먼저 절 떠나기로 하신 겁니까?” “…….” 너도 그걸 바라고 있잖아. 속에 있는 말은 이것이었지만 뱉어지지는 않았다. 음울한 얼굴을 응시하던 세령은 답을 듣기를 포기하였는지 한숨을 길게 쉬고 입을 열었다. “저는요, 나리. 아주 오랫동안 나리를 생각하였어요. 8년 전에 묘원각을 떠났을 때부터 나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세령에게 자신은 어미를 죽인 원수일 테니. 하나 휘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령은 이를 곧장 부정하였다. “8년 전 그 사건, 나리가 한 짓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해서 걱정하였어요. 괜한 누명을 써 벌을 받진 않았을까, 그러다 죽진 않았을까 하고.” “……내가 한 짓이 아니라 생각하였다고?” “네. 그럴 이유가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놈이 무고하단 걸 짐작하고 있었던 건가. 하면 역시 그놈을 좋아한단 뜻인가. 세령의 말뜻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아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자 휘언을 달래듯 세령이 손을 더 강하게 쥐었다. “나리, 저 똑바로 보세요. 저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나리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 “전 몇 번이고 묘원각에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 애는 나와 숨바꼭질하였을 뿐이라고, 분명 크나큰 오해가 있었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한데 눈을 떴을 땐 도성에서 이미 먼 곳으로 이동한 후였고 저 같은 어린애가 혼자 묘원각에 돌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죠.” “처음부터 나를…… 두둔하려 하였다고.” “예.” 부친의 병기로 자라면서 누군가 맹목적으로 제 편에 서리란 생각은 묻은 지 오래였다. 그런 와중에도 쓸모를 보여야 하니 저를 거치지 않은 죽음도 전부 제 일이라 받아들였었다. 옳은 줄 알고 걸었던 길엔 결국 휘언 혼자 남아 그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러니 제 편에 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단정하였다. 한데 본인 어머니의 죽음이 걸린 일인데도 지금까지 휘언이 한 짓이 아니라 여겼다니. 세간에 알려진 만행을 전부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해 주는 세령이 생소하다. 빈말일지도 모르지만, 뭉클하였다. 지난 세월 나는 네게 미움받을까 봐, 하여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해서 내게 일어난 일조차 남의 일인 양 다른 조각에게 전부 떠넘기고 외면하기에 급급했는데……. 속에서 뜨끈한 것이 울컥 솟구쳤다. “희명군 나리를 만났을 땐 너무 놀랐고, 제가 알던 모습과 달라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지내다 보니 같은 사람이구나 싶어 내심 반갑기도 하였어요. 살아 있어 다행이란 생각 또한 하였습니다.” “내가 이리 사람 구실을 못 하는데도…… 살아 있어 다행이라고?” “사람 구실이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건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는데요.” 세령이 설핏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난…….” “쉬이 믿지 못할 걸 압니다. 한데요. 제가 나리의 두 혼을 두고 가락지 놀음까지 하였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요. 전 이제 알아요. 그 사람도 나리도 모두 이휘언일 뿐이란 걸요.” “…….” 말도 안 돼. 그자도 나도 같은 사람이라니,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내 한마디면 그 애가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텐데, 하며 나리를 떠올린 게 무려 8년이에요. 이미 늦었단 생각에 나리만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지요. 한데 이렇게 장성한 상태로 만날 수 있어 제가 얼마나 기쁜지 아십니까?” “…….” “옛일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나리의 결백을 믿으니까.” 세령은 휘언의 오른손 약지에 있던 가락지를 빼내 왼손 약지에 끼워 주었다. 이제는 다른 자리에 끼워 구태여 혼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듯. “그리고…… 너무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요. 살아 있어 줘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나리.” 어지러이 엉키는 생각과 별개로 어떤 예고도 없이 휘언의 눈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지던 것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후드득 설움을 떨구었다. “내, 내가…… 안 했어.”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휘언은 더듬더듬 진실을 토로했다. “내가, 내가 안 죽였어. 세령아.” “…….” “네 어머니, 그리고 나의 어머니…… 내가 아니다. 참말이야……. 배후에 내 아버지가…… 해서 복수, 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난…….” 휘언을 바라보던 세령 또한 울컥하였는지 눈가가 붉어졌다. 하나 세령은 캐묻지 않고 너그럽게도 손을 뻗어 휘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럴 것 같았어요. 나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제가 잘 아니까.” “그렇지만 내가…… 이 손으로, 사람을 수도 없이 죽였어. 더는 좋은 사람이, 아닌데도…… 그, 그래도 내가 살아 있는 게 다행이야?” <60>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걸 어, 어찌 확신해?” “여전히 그런 죄책감을 지니고 있단 게 나리가 좋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방증이니까요.” “읏…….” 속절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이 버거워, 사내는 조붓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다 자란 사내가 이러는 것이 흉한 줄 알면서도 좀처럼 감정이 추슬러지질 않았다. “줄곧 후회하였어요. 그날 그 장면을 보고 혼절할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와서 결백을 풀어 줄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얘기할 것을, 하면서.” “…….” “그러니 그동안 아프지 말고, 밥도 잘 먹고, 누가 핍박하여도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괴로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터이니, 당신을 의심하는 사람들 틈에서 꼭 나를 기억하라고. 나는 끝까지 믿을 거라고. 그렇게 얘기해야 했는데……. 그 말을 못 하여 몇 년이고 나리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어요.” 당시에는 듣지 못한 말이었지만, 세령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에게 대단한 위로가 되었다. 듬뿍 밀려드는 포근한 향마저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느껴져 뺨이 속절없이 젖어 들었다. 그간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이유는, 세령이 저를 믿어 줄 거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론 믿어 주는 척하여도 아주 조금의 의심이라도 내비칠까 봐, 싸늘해질 눈초리를 마주하는 게 두려워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더랬다. 한데 너는 나보다 더 나를 믿어 주고 있었구나. 그런 말을 속삭이는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휘언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작은 몸을 결박하였다. 불편할 텐데도 세령은 군말 없이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제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저보다도 먼저 마음을 알아채 주고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아 주었다가, 그래도 모자란 것 같으면 이렇게 꼭 안아 주기도 하던 그때로. 물기 어린 감정이 자꾸만 북받치는 탓에 휘언은 눈을 질끈 감고 세령의 체향에 집중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달고 향긋한 냄새에 금세 정신이 아득해졌다. 단 음식을 즐기지는 않지만 세령의 살이면 몇 날 며칠이고 핥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사랑스러워 사내를 안달 나게 하는 몸이었다. ‘달려온 삶은 고단하였지만, 전생에 아주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너라는 빛이 있으니. 한데…… 세령이 넌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거야?’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세령은 다른 조각도 자신도 모두 이휘언이라 여긴다고 하였지만, 이렇게라도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하였지만, 양쪽에게 동일한 마음을 갖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만일 희명군에게서 느끼던 감정이 연정이고, 자신은 어린 시절의 추억 탓에 그저 연민하는 것뿐이라면……. “……흣.” 그는 취한 사람처럼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러 소유욕을 드러냈다. 그러자 품에 들어온 몸이 움찔하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이러면…… 싫어?”   입술을 떨어뜨리고 묻자, 세령이 머뭇거렸다. 싫구나. 그놈과는 더한 것도 하였으면서. 속에서 미운 감정들이 솟구쳤지만, 휘언은 세령이 저를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그 자신을 다독이며 꾹 참았다. 그는 묻었던 고개를 들어 가냘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음이 약해졌는지 세령이 고개를 젓는다.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면 접문해도 돼?” 갑작스럽다고 말하는데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입술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 않나. 발갛고 도톰한 입술이 먼저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을.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지 않으면 자신이 그저 어린 시절 나잇값 못하던 소년일 뿐이란 걸 확인 사살당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도 내심 이게 억지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입을 맞춘다고 해서 세령의 마음이 온전히 제 것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고작 접문 하나로 마음을 전부 알게 될 수는 없었으니.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들어 어깨가 축 처졌다. 한데 그런 번뇌의 과정을 지켜보던 세령은 무슨 결연을 다졌는지 돌연 휘언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쪽, 입술을 부딪쳤다. 예상하지 못한 휘언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세령이 픽 웃음을 흘렸다. “해도 되냐 물으실 땐 언제고 왜 그리 놀라십니까?”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꿈인가 해서.” “생시입니다.” “응. 그래서 무서우리만치 행복해.”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는 참지 못하고 커다란 손으로 세령의 목덜미를 감싸며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물리자마자, 예상하였다는 듯 감기는 속눈썹에 휘언 또한 눈꺼풀을 지그시 내렸다. * * * 휘언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진득했던 접문을 복기하였다. 부드럽게 시작하였던 입맞춤은 다디단 독처럼 갈망을 일으키는 바람에 점차 거칠어졌다. 세령뿐만 아니라 제 호흡도 가빠졌는데, 그런 걸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방심하면 틈이라도 벌어질까 봐 허겁지겁 혀를 섞고 입술을 빨아 댔다. 어쩌면 세령에게는 조금 가혹한 접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상 전하께 검은약을 언급한…… 이보게, 자네, 듣고 있나?”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휘언은 서안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혁이 수상쩍단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에 상대를 두고 잡생각을 하였으니 미안해야 마땅한데 휘언은 되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실 한낮의 접문을 끊은 것도 무혁이었다. 정신이 혼몽해질 만큼 세령을 탐닉하던 순간에 하필 그가 급한 전갈이 왔다며 달려왔더랬다. 그 소리에 휘언보다 이성이 남아 있던 세령이 가슴팍을 밀쳤다. 그게 어찌나 섭섭하던지. 당장 돌아가잔 말에 세령과 남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러니 무혁에게 전에 없던 괘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잠시 다른 생각을 하였네. 무어라 하였지?” “허락도 없이 여인을 활터에 데려간 것도 모자라, 좋은 시간까지 방해하여 화가 났나?” “……그런 거 아닐세.” 부정하였지만 기실 맞았다. 격한 접문을 하던 와중 흥분이 극에 달한 그는 지난 기억을 자연히 떠올렸다. 누군가 머리채라도 잡아끈 것처럼 갑작스레 깨어났을 때, 세령의 안에 들어가 있던 경험. 쾌락과 별개로 처참하였던 심정까지. 그날 이후 바람이 하나 생겼다. 다른 혼이 달궈 놓은 세령을 안는 대신, 온전히 저 스스로 처음부터 세령과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자신이 만지면 세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 또한 그날처럼 갈구해 줄지 궁금하였다. 해서 그 원을 오늘 풀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는데, 무혁이 산통을 깨 버렸으니 달가울 리가 없지 않나. 이렇게 자꾸만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는 세령의 마음을 여전히 확신할 수 없어서겠지. 세령은 두 조각을 동일한 사람이라며 저를 위로하였지만, 느끼는 감정 또한 같을지는 미지수였다. 그 부분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희명군과 휘언은 분명 성격도 다르고 나누었던 기억 또한 다를 테니까. 그에게 연정이란 세령을 알게 된 이후부터 무려 10년간 가슴에 쌓아 온 감정이었다. 다른 이는 눈에 담은 적도 없다. 제 처지가 그렇다 보니 두 사내를 품을 수 있다는 세령의 말이 좀처럼 이해되질 않았다. “마음 상한 건 알겠으나, 나도 급히 전하는 게 맞다고 여겨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게. 은세령, 그 여인과도 관련이 없진 않으니.” “……뭐?” 세령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흐리멍덩하였던 눈이 총명해진다. 이에 무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조정에서 검은약을 뛰어넘는 신약에 대해 말이 나왔다더군. 기존 아편에 무얼 섞은 것인지 요즘 유통되는 것들은 야만적인 범죄에 쓰이고 있다고 해. 하여 근절해야 한단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그게 세령이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끝까지 듣게. 유통하는 무리를 다스리는 자가 자네라 언급되는 모양이야.” 휘언이 미간을 좁혔다. 당연히 저는 결백했다. “……설마 그자가?” 무혁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쪽도 요즘은 약을 입에도 대지 않더군. 그러니 허튼 소문일 뿐이야. 게다가 이 일은 희명군 쪽에선 이미 예상한 바라네. 선왕 쪽에 붙었던 놈들이 언젠가는 희명군의 약점을 쥐고 금상께 줄을 댈 거라 여겼거든. 한데 그 말을 흘린 것이 누군지 조사해 보니…… 은성호까지 닿더군.” “은성호라면, 설마…….” “그래. 은세령의 외숙 말일세. 그쪽에 꽤 오래 발 담그고 있었거든. 당연히 기억 안 나겠지만, 희명군이 한참 약에 의존하던 시절엔 그자와 직접 대면한 적도 있었네.” “……그자에 대해 아는 게 더 있나?” <61> “그쪽 무리가 선왕 쪽 사람들이었으니 지금은 끈이 떨어져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야. 한데 그중 탐욕스러운 자들이 어떻게든 재기해 볼 요량으로 새 임금에게 접근하는 모양이더군. 바로 희명군을 적으로 만들어서.” “새 임금을 세운 공이 희명군에게 있는데, 어찌 나를 적으로 돌려 권력을 쥔단 말인가.” “자네가 역모를 저지를 마음이 없단 건 전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만, 남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네. 선왕을 그리 만들었는데 두 번은 어려울까, 그리 의심하겠지. 아무리 서자래도 자네 또한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단 사실은 자명하니.” “…….” 주먹을 쥔 손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이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은성호가 휘언을 표적으로 정한 이상 세령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세령을 보호하기 위해 은성호를 죽사발 낸 전적이 있으니, 아마 심상치 않은 관계란 것 정도는 눈치챘을 테지. 그럼 세령을 약점 삼아 저를 휘두르려 할 게 분명하였다. 은성호 혼자 일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 그자 하나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이쪽을 예의 주시하는 자에게 들켜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고. 게다가 혹여 실수라도 하면 세령까지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조용히 일을 벌여야겠지. “도화에게 부탁하여 그 무리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 줄 수 있겠나?” “음……. 예전에 거래를 텄으니 명부 정도는 갖고 있을 게야. 그중 새 약에 손을 댄 이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쯤은 잔뼈 굵은 여인에게 식은 죽 먹기일 테니, 내 부탁해 보겠네.”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네.” “물론.” 내심 제 여인을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휘언은 뻣뻣해진 어깨를 조금 풀 수 있었다. 자연스레 세령이 떠올랐지만 한가하게 정인을 그릴 때는 아니었으니 그는 다시 결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형님을 만나야겠네. 검은약을 유통하는 무리에 대해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으니 시간을 내 달라 전해 주게. 최대한 빨리.” “그러지.” “아, 그리고 혹여 내가 아닌 다른 혼이 깨어났을 때도 이 일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 줘. 내가 공공의 적이 될 법한 증좌가 나오기 전에 직접 그 무리를 처단해야 한다고 말이지. 세령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하면…… 분명 협조할 걸세.”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고 세령을 앗아 갈까 봐 걱정하였던 조각에게 결국 협조를 구하다니. 그래도 세령을 누구보다도 목숨 바쳐 지켜 줄 이임을 알기에, 휘언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잠시 묻어 두기로 하였다. 이를 아는 무혁도 코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네. 하면 나는 연통을 넣으러 이만 일어나겠네.” “그래.” 무혁이 떠나고 나니, 방 안이 지독하게 고요해졌다. 휘언은 창을 열어 달빛이 비치는 후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구슬픈 가락처럼 들려왔다. 아직 못다 한 말이 많은데 세령은 어쩌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8년 전 사건의 전말도, 그간 살아온 이야기도 다 나누지 못하였는데 궁금해하지는 않으려나. 나는 지금도 네가 무얼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은데. 부디 너도 나를 궁금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낮에 보았는데도 여전히 세령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물어볼 것이 너무도 많았다. 가슴에 품은 사내는 대체 어느 쪽인지, 만일 둘 다 있다면 어찌 마음 하나에 둘을 담을 수 있는지, 감정의 크기가 달라 가능한 건지 전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곤란해할 얼굴이 자연히 상상되니, 그 또한 제 욕심인 것만 같다. 이리 문제 많은 사내 곁에 남아 준 것만으로도 감읍하여 모자랄 판에 마음을 닦달하려 하다니. 제가 생각해도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저…… 지금은 다시 볼 수만 있어도 좋겠구나.” 휘언은 밤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움직이던 땋은 머리가 절로 연상되어, 사내는 무심결에 픽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무어라고 고양이 꼬리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던지…….” “나리, 은세령입니다.” 너무 그리워하여 이젠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인가. 문 쪽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주무시기 전이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시금 들리는 황홀한 음성. 휘언은 서안이 덜컹거릴 정도로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세령아.” 놀란 세령이 주춤 물러나는 바람에 들고 있던 주안상의 잔이 흔들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잔을 붙잡았다. “오…….” 순수하게 감탄하는 소리가 귀엽고 어처구니없어서 휘언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붙든 잔을 주안상 위에 올려 두고 세령의 손에서 상을 빼앗았다. “이 시간에 사내 방엔 어인 일이야.” “아까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듯하여 찾아왔습니다.” “한데 술을 가져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구나.” “아……. 기실 그냥 오려고 하였는데요. 때마침 술도 들어왔고 나리 생각이 나서…….” “내 생각을 하였어?” “으음……. 네.” 뺨을 진달래 빛으로 물들이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는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손에 들린 주안상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꾹 참아야 했다. 대신 기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나도 네 생각을 하던 참인데.” “제 생각을요?” “응. 사람이 너무 보고프면 미쳐 버릴 수도 있겠단 생각.” “노, 농이 지나치십니다…….” “참말이야.” “…….” “실랑이는 이쯤하고 들어가 이야기할까?” “예.” 주안상을 내려놓고 방석을 놓아 주자 세령이 자연스럽게 앉는다. 다른 조각과도 항상 이리 자리하였겠지. 못난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이내 상념을 지워 버렸다. 어쨌든 작금 세령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자신이니까. “술병이 참 고급스러워 보이네. 도화가 준 것이야?” “아……. 그게요…….” 별거 아닌 질문이었는데 우물쭈물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 답을 기다리자, 세령이 하는 수 없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털어놓았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사과하면서…… 영선이가 주었습니다.” “……영선? 네 댕기를 앗아 간 그 아이 말이야?” “예. 저도 받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 애가 솔직하게 말하더라고요. 매일같이 어여쁜 장신구를 하던 기생들을 흠모하던 차에, 본인과 같은 처지인 제가 좋은 댕기를 하고 있기에 탐이 났다고. 게다가 무릎까지 꿇고 미안했노라 하기에…….” “네 마음이 불편하였겠구나.” “아, 뭐…….” 제 마음을 헤아릴 거라 생각은 아니 하였는지 세령이 놀란 눈으로 말을 얼버무린다. 상대는 고작 이런 물건 따위로 마음이 편해졌겠으나 압박에 못 이겨 사과를 받은 피해자는 거북할 수밖에 없거늘. 제 마음도 보듬지 못하는 여인이 가여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상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세령아. 네 불편한 마음을 나눠 주어서 기쁘다고 말하면, 듣기 거북하니?” “……껄끄럽지는 않으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얼굴이 눈치를 본다. 제가 선물한 댕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도적질한 이에게 배알 없이 술을 받아 왔다 자책하고 있을 테지. “전혀. 이걸로 네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면, 그보다 더 달가운 건 없을 거야.” 미안하지만 늘 네게 조금의 쓸모라도 있길 바라던 나는, 그 짐을 덜 수 있단 사실이 어찌나 기꺼운지 몰라. 휘언은 술병을 기울여 술을 제 잔에만 채우고 먼저 들이켰다. 쌉싸름한 맛 뒤로 복숭아 향이 퍼졌다. 마무리가 눅진하여 깔끔한 맛은 없지만, 하인이 구할 만한 술치고는 제법 수준이 높은 듯하였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세령은 조금 편해진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휘언은 그 잔에 술병을 기울이며 넌지시 물었다. “술은 해 보았어?” “어쩌다 한두 잔 정도 입에 댄 적은 있지만, 이렇게 누구랑 제대로 마셔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술을 많이 먹어 보진 않았단 말은 사실인지 세령은 아주 조금 들이켜고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찡그리는 눈도, 반듯하던 미간에 지는 주름마저도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세령이 다른 이와 술을 마신 적 없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런 모습을 저만 보았다는 것이 기뻤다. “쓰면 이것을 먹어.” 가져온 주안상에 놓인 호두곶감말이를 입가에 들이밀자 순순히 입을 열고 오물오물 씹었다. 예나 지금이나 단것에 동그랗게 뜨이는 눈은 여전하여 절로 웃음이 새었다. “나리도 드십시오.” 똑같이 입가에 대 주는 모습에 가슴이 떨렸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세령이 혹여 변심이라도 할까 봐 손목까지 붙들고 느릿하게 다과를 삼켰다. 얌전히 받아먹는 모습에 세령이 설핏 웃었다. 어여쁘게도. ‘이 시간이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금의 순간이 행복하여 놓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의문이 해소되질 않으니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해서 사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평온을 깰지언정, 꼭 묻고 싶은 말이었으니. <62> “세령아. 아까 네가 그랬지, 그자도 나도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랬지요.” “어떻게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어?” “제가 다른 혼에게 휘언 나리 행세를 하지 말라고 역정을 낸 전적이 있습니다. 한데 그 혼이 그때 그러더라고요. 자기도 이휘언이라고.” 그랬겠지. 그놈이 이 몸을 어찌나 독점하고 싶어 하는데. 한데 세령은 지금 그 호소에 넘어갔다는 걸 이야기하는 걸까. 그렇게 쉽게? “그때부터 두 사내 다 이휘언이라 여긴 거야?” “아뇨. 이후에 그 혼이 나리와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어요. 저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했고, 제 마음에 들려고 본래의 성격을 죽이는 게 보였어요. 그러다 보니 경계가 흐릿해져서, 저는 점점 더 두 사람을 구분하는 게 어려워졌고요.” “그래서 그날, 내게 또 흉내 내는 거냐고 물었던 것이구나.” “네. 한데요, 나리. 지금은…… 그런 짓도 전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단 걸 깨달았어요. 두 분 다 휘언 나리인데 구태여 나눌 필요가 없잖아요.” “나는…… 잘 모르겠어. 어찌 그런 생각을 해? 어떻게 그렇게 너그럽게…….” “저도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는데요. 어릴 적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좋은 사람’에 나리가 여전히 갇혀 있단 걸 알고 문득 깨달았어요. 나리의 병은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무어? 아냐, 너 때문이라니…….” “내가 싫어할까 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기질을 전부 마음에서 뜯어 버린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든 거죠. 어찌 되었든 그 또한 휘언 나리인데, 그런 모습이어도 나는…… 나리를 좋아했을 건데 말이에요.”  “……뭐?” 얼빠진 반응에도 세령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요, 나리. 이제 정말로 다 괜찮아요. 지금의 나리도, 그리고 다른 혼일 때의 나리도.” “…….” “어차피 어떤 모습이든 전부 제가 연모하는 나리인걸요.” 혀끝이 말릴 만큼 입이 단 것은 안주 탓일까, 아니면 네게서 옮겨 온 다디단 마음 탓일까. 분명 세령이 오기 전까진 캐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조곤조곤 뱉는 고백 하나로 머릿속을 좀먹던 근심이 사그라든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불편할 터이니 언제까지고 둘로 나뉘어 있을 수는 없겠지요? 의원님이 말씀하시길, 마음이 조각난 것을 이어 붙이려면 두 모습 다 자기 자신임을 인정해야 한대요.” “……그자가 나의 일부라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한단 뜻이야?” “예.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더라고요.” “…….” 다른 혼의 특징을 떠올린 휘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그걸 인정할 수 있을까. 희명군은 자신이 단 한 순간도 갖고 싶지 않았던 기질의 집합체였다. 그런 사내가 제 몸속에 있다는 걸 그토록 외면해 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인정하란 말인지……. “이리 살아온 지 꽤 되었으니 어려울 거란 걸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나리를 믿는 만큼 나리도 저를 믿어 주시면 좋겠어요.” “믿는다니, 무얼?” “어떻게 자랐든 저는 나리를 연모했을 거란 사실을요. 지금은 못 믿겠지만 제가 곁에서 계속 말해 줄게요. 다른 한쪽도 나리의 일부이기에 좋아할 수 있었단 걸.” 취기 탓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세령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휘언 또한 전신에 피가 도는 듯 열이 올랐다. 당장이라도 제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가슴이 벅찼다. “응. 믿을게. 그리고…… 나도 네가 좋아, 세령아.” “…….” “아주 오래전부터 연모했어, 너를.” 나긋한 속삭임에 방 안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고백할 때는 그리 대담하더니, 본인이 받는 것은 어색하였던지 세령은 눈동자를 빠르게 깜빡이다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 또 입을 달싹이길 한참이었다. “……조금 부끄럽네요.” 휘언은 솔직한 정인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말없이 술을 홀짝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평생 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한데, 어째 조금 더운 것 같습니다.” 슬슬 취기가 도는지 세령은 묵직한 한숨을 쉬며 괜스레 말을 돌렸다. “나도 조금 덥구나. 이제 아침저녁으론 쌀쌀하여 군불을 땐 모양이야.” 술기운에 낯부끄러운 고백까지 나누어 더운 것이겠지만, 휘언은 세령의 말에 동조하며 옷깃을 펄럭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세령이 저도 따라서 옷깃을 쥐고 흔든다. 아이가 어미의 행동을 따라 하듯 아무 생각 없이 모방한 것이겠지만, 벌어지는 옷감 사이로 보이는 흰 피부에 머리꼭지가 쭈뼛 섰다. 일순 온몸에 열이 화르르 올랐다. “흠, 흠……. 세령아. 날도 늦었는데 이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음…….” 세령이 우물쭈물하더니 고개를 푹 떨군다. 부끄러워 고개를 처박은 것이라 여겼는데, 취기에 잠이라도 오는가 보다. 고개를 꾸벅꾸벅하더니 별 대꾸 없이 치맛자락을 쥐고 주먹으로 허벅지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세령아?” “으으음…….” 술 취한 사람답게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한다. 무언가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자들을 그간 혐오하였었는데, 세령이 하니 사랑스럽기만 하다. 이게 병이라면 중증이었다. “세령아.” “…….” “방까지 데려다줄까.” “…….” “걷기 힘들면 업어 줄게.” “…….” “세령아?” 답이 없어도 너무 없어 주안상을 옆으로 미뤄 두고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으로 떨구어진 뺨에 손을 대니, 신열이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뭔가 상태가 이상했다. 하여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저를 보도록 턱을 들어 올리니 몽롱한 눈동자가 금세 그렁그렁해졌다. “나리이…….” “세령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은 것이야?” 술주정인지 아니면 정말 몸이 안 좋은 것인지 몰라 당황한 가운데, 세령이 불쑥 휘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별안간 폭 안긴 여인이 달갑긴 하였으나, 열 오른 뺨을 제 가슴팍에 비비적거리며 그르렁대니 전신이 절로 굳었다. “세, 세령아?” “나리, 너무 더워요.” 더위가 해소되질 않는지 차가운 제 손을 끌어가 뺨에 대고 웅얼거리기까지 한다. 몹시 해로운 장면이었다. 사내라면 누구든 세령의 교태를 참아 내지 못하였으리라. 하나 휘언은 이를 악문 채 세령의 어깨를 잡고 몸에서 떨어뜨렸다. “너, 너무 취하였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내일 이야기하자, 응?” 그러자 발갛게 부푼 입술을 비죽인다. “밀어내지 마세요.” “……뭐?” “나리랑 같이 있고 싶어요.”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여인이 정말 제가 알던 세령이 맞나. 자신이 다른 혼으로 등장하였을 때 세령이 어찌나 혼란스러웠을지 십분 이해되었다. 하여 그는 숙맥인 걸 조금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더듬거렸다. “가, 같이, 있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 어차피 내일도 볼 것이고, 또…….” “제가 가 버리길 바라세요?” 여전히 물기 어린 눈, 그리고 붉어진 뺨과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고 또한 멈춰 버리게 하였다. 제게 이렇게나 매달리는 세령의 모습은 아무래도 흔치 않으니 이성을 붙드는 게 고달팠다. “저, 진짜 갈까요?” 휘언이 적극적으로 내치지 못하자, 세령은 다시금 품에 안겨 들며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었다. 별을 빼다 박은 듯한 눈망울을 마주하니 입가가 절로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여야 했으나, 잠시 불거진 턱뼈는 더 인내하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쪽,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니. 안 갔으면 좋겠어.” 휘언이 살짝 물러나며 속삭였다. 잠깐 닿은 입술이 달아 인내하기 힘들었으나, 실수할 것이 더 두려웠다. 하여 세령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조심스레 시선을 올리니 몽롱한 눈을 하였다가 배시시 웃는다. 꽃망울이 터지는 듯한 미소를 본 그 순간, 휘언의 자제력은 툭 끊어져 버렸다. “흐읍!” 그는 세령의 몸을 빈틈없이 당겨 안으며 입술을 삼켰다. 순순히 벌어지는 입술 새로 무자비한 혀를 밀어 넣고 점막을 농탕질하니, 등골이 쭈뼛 설 법한 비음을 흘린다. 그 탓에 주책없이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접문이 처음도 아닌데 후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고양감이 치솟았다. 첫 당과를 입에 댄 아이처럼, 온몸의 솜털이 죄 기립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열 오른 숨결이 입안 가장 여린 부분을 간질이니 눈두덩에 뜨끈한 기운이 몰아쳤다. 세령을 당장 갖지 못하면 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나 수년간 다스려 온 인내는 사내를 배신하지 않았다. 입을 맞춘다고 다치지 않는단 걸 알기에 성급하게 타액을 섞곤 있으나, 혹여 제 악력에 세령이 부서질까 봐 골반에서부터 갈비뼈를 천천히 짚으며 저고리 안으로 손을 넣었다. <63> 굴곡진 가슴 아래 손끝이 닿자 품에 들어온 작은 체구가 움찔하였다. 포갠 입술 새로 흡, 소리를 낸 것도 같다. 이런 사소한 반응마저 휘언에게는 큰 자극이 되어 하초에 열감이 자글자글 고였다. 싫다고 밀어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스칠 새도 없었다. 세령이 휘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맞댄 혀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하였다. 바르작대는 통에 자연스레 둥근 가슴이 손 안에 전부 들어왔다. 치맛말기가 겹쳐 있었으나 그 위로 닿는 살갗이 몹시도 부드러웠다. “흣…….” 살덩이를 살짝 힘주어 쥐자, 사내의 몸과 달리 말랑한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더 닿고 싶었다. 조금 더 내밀하고 실오라기 하나 없는 상태의 몸을 온전히 취하고 싶었다. 하여 사내는 옷고름을 당겨 드러난 쇄골에 입술을 내렸다. “으응…….” 간지러워 내는 소리마저 야릇하다. 자꾸만 심한 짓을 하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눈앞에 보이는 가슴골에 코를 묻고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치맛말기를 물어뜯어 나신 구석구석 잇자국을 남기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였다. 세령이 제 생각을 속속들이 읽는다면 둘도 없는 파렴치한이라 생각하겠지. “하아. 세령아.” 마지막 인내를 끌어모은 휘언은 고개를 들고 세령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어깨를 살짝 물리게 하였다. 입술 사이로 타액이 은색 실처럼 늘어났다가 끊어졌다. 짧은 접문에 미련이 남는지 세령은 말없이 휘언의 입술을 바라보며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그 달뜬 얼굴에 사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꿀렁였다. “지금이라도 네가 그만하자 말하면 나는 참을 수…….” “그만두지 마세요.” “…….” “계속해요.” 세령이 휘언의 뺨을 감싸며 쪽쪽, 짧은 입맞춤을 하였다. 일순 눈앞이 벌게지는 충동이 일어, 휘언은 세령의 뒤통수를 감싸며 몸을 뒤집었다. 푹신한 이부자리에 세령을 눕힌 사내는 그 위로 바위산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보이는 살갗마다 쪽쪽,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러면서 벌어진 세령의 저고리와 치마를 벗기고, 본인 옷 또한 하나둘 벗어 던졌다. 저는 속고의 하나 남겨 두고 세령 홀로 나신을 만들었을 땐, 그는 잠시 현기증이 이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도 진정이 아니 되어, 떨리는 입술을 세령의 입술 위로 포개었다. “으음…….”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여느 접문보다 얽히는 혀가 뜨겁다. 더 깊이 닿고 싶어 이리저리 기울이는 고개에 코끝이 비벼지니 서로의 숨결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얄팍한 입술 살갗이 뭉개지며 자극적인 소리를 내니, 흥분감은 곱절이 되었다. 인내고 뭐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여인의 솟아오른 가슴을 한 움큼 쥐었다. “흐읍…….” 알알한 통증을 느낀 듯 세령이 목울음을 냈다. 하여 아귀힘을 풀고 손끝으로 선단을 둥글게 굴리다가, 할딱이는 입을 놓아주면서 고개를 아래로 옮겼다. 그러고는 흥분하여 꼿꼿해진 젖꼭지를 입에 물고 접문하듯 혀를 놀렸다. “흐으…… 나, 나리…….” 웬만한 술이든 독이든 더는 취할 일 없으리라 여겼는데, 세령의 살갗이 미치도록 달아서 정신을 못 차렸다. 휘언은 정말 광견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을 빨아 댔다. 뭐가 나올 리도 없건만, 지분댈수록 강한 중독성이 있는 향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아서 가엾은 피부에 잇자국을 내고 가슴 곳곳에 순흔을 남겼다. 그러고도 야욕이 해갈되지 않아, 손을 내려 세령의 다리 사이를 파헤쳤다. 다행히 세령도 저만큼이나 흥분한 것인지 갈라진 부위가 미끈거렸다. 함부로 탐해서는 아니 되는 곳, 귀한 몸에서 가장 내밀한 부분을 더듬으니 머리꼭지가 쭈뼛 섰다. 정사 도중 별안간 혼이 바뀌어 한 번 침입한 적 있었으나, 그때는 남의 시간을 훔쳐 겪은 것이라 마음이 괴로웠었다. 한데 지금의 세령은 자신과 몸을 섞길 바라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홀한 기회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질구 안으로 넣어 저를 받아들이는 세령의 반응을 살폈다. “아으, 흣…….” 부드러운 속살이 손가락 전체를 감싸는 감각과 제 어깨를 붙들며 떠는 세령의 모습. 이 땅에 이보다 자극을 주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제 몸을 전부 안으로 밀어 넣어 세상 누구보다도 깊은 관계가 되고 싶었다. 세령이 저를 가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온 정신을 지배하였다. 하여 휘언은 넣었던 검지를 꺼내고 이번엔 검지와 중지를 한 번에 찔러 넣었다. “흐윽……!” “이 정도는…… 버거운 것이야?” 내부가 예상보다 좁디좁았다. 흉포한 제 물건도 잘 삼켰으니 괜찮을 줄 알았거늘. 손가락을 조여 대는 감각에 살짝 겁이 났다. “괘, 괜찮습니다.” “네가 말하면 나는 믿어야 해.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 줘.” “참말이에요. 이 정도는, 흐, 아읏……!” 넣었던 손가락을 한 마디만 남기고 빼내었다가 손등뼈가 닿을 때까지 찔러 넣으니 세령이 허리를 둥글게 말며 목에 매달려 왔다. 하여 휘언은 세령의 뺨과 눈두덩에 쪽쪽 입술을 들이밀며 내벽도 꾹꾹 눌러 댔다. 그러자 전신을 파르르 떨며 앙증맞게 헐떡거렸다. 별게 다 가엾고 사랑스러웠다. “하아, 아, 나리, 좀 더…… 더…….” “더?” 아니 그래도 후퇴한 손가락으로 애액이 흘러, 개수를 늘릴까 고심하던 차에 세령이 더 달라 채근하였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나 싶어 되물으니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보챘다. 아, 정말 어쩜 이리 야하고 어여쁜 생명체가 있는 걸까. 휘언은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세령의 발간 입술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원하던 대로 손가락을 세 개로 늘려 조금 흐물흐물해진 내벽을 푹푹 찔러 댔다. “흐읍, 으, 응!” 찰박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세령의 신음성도 높아졌다.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고 있단 걸 알았지만 휘언은 세령이 더 흥분하길 바랐다. 지금보다도 더 저를 원하길 바랐다. 하여 질벽을 긁어내던 손을 빼내고 세령의 두 다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비부에 고개를 묻었다. “히익!” 거웃 아래에 얼굴을 파묻고 츱, 츄읍 소리 내어 빨자 위에서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젖을 대로 젖은 점막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을 작정으로 핥아 대니 이마를 밀치던 손에 힘이 빠지고 앙알거리는 소리만 커졌다. “하아, 나리, 아, 아앗, 으으응!” 혀를 쑤셔 박은 질구가 경련하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쉬이 절정에 도달하였는지 휘언의 머리를 터뜨릴 기세로 허벅지를 조여 대기도 하였다. 그 탓에 코끝이며 입술까지 조금의 틈새도 없이 음부에 뭉개졌는데, 숨이 막힐 것 같으면서도 짜릿함에 골이 울렸다. 당장 질식사하여도 좋으니 저를 더 끌어당겨 주었으면 하였다. “하아, 세령아.” 흥분에 찬 목소리가 의도치 않게 갈라졌다. 그제야 다리 사이에 휘언이 있단 걸 인지하였는지 세령이 화들짝 놀라며 힘을 풀었다. 하나 사내는 아쉬운 마음에 허벅지를 붙들고 살살 쓰다듬으며 안쪽에 입술을 쪽, 쪽, 붙였다. “읏……. 이제, 이제 입으로는 됐…… 됐습니다.” 입술에 닿는 살결이 보드라워 살짝 깨무니 버둥거리며 몸을 뒤집는다. 하나 휘언은 기갈이 났다. 엎드려서 엉금엉금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제가 핥던 부위가 훤히 드러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엎드린 세령의 뒤에서 자세를 낮추고 다리 사이에 다시금 입술을 붙였다. “흐읍! 나, 나리!” 둔부를 내민 자세가 민망한지 아까보다 저항이 컸다. 그 또한 커다란 몸을 구길 듯 숙인 상태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여 잽싸게 세령의 무릎 사이에 누워 골반을 끌어내렸다. “흐앗!” 별안간 휘언의 얼굴에 앉아 버린 세령은 경악하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사내가 손자국이 날 만큼 허벅지를 쥔 터라 쉽지 않았다. 그저 붙들려 아래를 빨리는 수밖에. “아, 으으응, 흣, 이거 싫…… 흐윽!” 입으로는 싫다 하였으나 게걸스럽게 핥아 대며 자극하니 세령은 저도 모르는 새에 허리를 흔들었다. 입술에 비벼지는 속살이 그토록 달곰할 수가 없었다. 계속 음미하고 있는데도 더 탐하고픈 욕구가 일었다. 하여 그는 꿀물이 나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뻐끔대는 질구로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아!” 한두 번 느릿하게 긁어내던 행위는 찰박찰박 소리가 날 만큼 거칠어졌다. 질척해진 손으로 음핵까지 둥글리니 세령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물을 줄줄 흘려 댔다. 그리하면 휘언은 사막에서 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입술을 붙이고 공알이며 날개, 그리고 회음부까지 샅샅이 발라 먹었다. 아직 교합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수도 없이 절정에 오른 세령은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쓰러졌다. 기실 진작 혼절해 버리고 싶은 것처럼 보였는데 휘언이 놓아주지 않아 억지로 버틴 듯하였다. 몸을 일으켜 앉은 사내는 제 곁에 모로 누워 가슴을 헐떡이는 여인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64> “흐으, 응…….” 성적인 의도 없이 그저 피부 위를 쓸어 내는 것뿐인데도 연이어 황홀경을 맞은 몸은 움찔거리며 비음을 흘렸다. “세령아.” 휘언이 부르는 소리에 가물가물하던 눈동자가 이쪽으로 향하였다. 그는 땀에 젖어 들러붙은 세령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힘들면 예까지 할까.” 정말 마지막 인내였다. 속고의의 왼쪽 허벅지 부근이 젖었을 정도로 흥분이 극에 달해 있었으나, 제멋대로 하였다가 미움받을 것이 더 두려웠다. 다른 조각, 그놈이라면 분명 세령이 거절을 생각할 새도 없이 밀어붙였겠지. 하나 그런 식으로 도적놈처럼 세령을 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짓은 지난 한 번으로 족하였다. “……나리.” 세령은 힘없는 손을 뻗어 휘언의 뺨을 어루만졌다. 작은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니 비척비척 고개를 들어 입술에 제 것을 대었다. 그리고 찰나의 황홀함을 선사한 입술은 기어이 당과 같은 말까지 속삭였다. “끝까지 해요.” 밀어내지 않았단 사실에 감격이라도 하였을까. 응어리진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어쩌면 그는 이 순간마저도 세령이 답을 해 주길 바라며, 거절을 회피하고 있던 것일지 모른다. 이런 나약한 마음까지도 알아차리고 용기를 내어 주는 여인이 더할 나위 없이 기껍고 고마웠다. 휘언은 세령의 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속고의를 내렸다. 한껏 덩치를 부풀린 양물이 퉁 튀어 오르며 선단에서 침을 주르륵 흘렸다. 이대로라면 세령의 안에 들어가자마자 파정할 것 같았다. 하여 그는 세령의 거웃 아래에 제 물건을 대고 허리를 움직였다. 들어갈 듯 말 듯 균열을 긁은 귀두가 미끄러지며 공알을 짓이겼다. 그러고는 물러났다가, 다시금 질구 부근을 꾹꾹 눌러 감질나게 하였다. “흐으, 읏…… 나리, 나리이…….” 세령이 채근하듯 휘언의 목에 매달렸다. 그는 고개를 내려 세령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러면서 속살 위를 연신 유영하였다. 성기끼리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몰리고 숨이 가빠 왔다. “하아, 미치겠어. 어느 하나 부드럽지 않은 구석이 없어서…….” 그는 마치 삽입이라도 하듯 세령의 허벅지를 모아 쥐고 그 사이에 남근을 끼워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하초를 부딪쳤다. 그럴 때마다 단단해진 기둥이 세령의 외음부와 마찰하여, 맞대고 있는 피부가 녹진하게 달아올랐다. “나리, 나리이, 히익!” “하…… 세령, 윽…….” 두 사람은 달뜬 얼굴로 헐떡이며 서로를 애타게 부르다 동시에 가벼운 절정을 맞았다. 새하얀 배 위로 진득한 씨물이 흩뿌려졌다. 예상한 대로 빠른 파정이었다. 만일 곧바로 삽입하였더라면 체면 따위 죄 구겼겠지. 휘언은 색색거리는 세령의 입술을 앙 물었다가 놓아주며 뺨과 턱에 새 부리 쪼듯 입을 맞추었다. 황홀경에서 겨우 벗어난 듯한 눈은 피로해 보였다. 혹 너무 고되다 하면 예까지 해야 하나, 아쉬움을 느끼던 차에 세령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웅얼댔다. “계속 이렇게…… 애만 태우실 겁니까?” “……뭐?” “왜…… 끝까지 아니 하시냔, 으읍…….” 귀엽게 칭얼거리는 걸 보니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휘언은 하초에 다시금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세령의 입술을 머금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넣고 점막을 파헤쳤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세령의 양 무릎을 열었다. 언제 사출했냐는 듯 뜨끈해진 물건을 내밀한 곳 위에 툭 얹자 기대한 것인지 질구가 뻐끔거렸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거늘, 선단을 좁은 구멍에 맞춘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휘언은 세령의 오금을 쥔 채 아주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입구가 벌어지자 세령의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전신이 씹어 먹히는 듯한 조임에 휘언의 입에서도 큭, 소리가 튀어나왔으나 다행히 세령이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긴 전희에 삽입이 수월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고환이 세령의 둔부에 닿을 정도로 물건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 천천히 빼내었다. “흐으…… 아, 앙…….” 흉포한 것이 극점을 건드렸을까. 사내를 돌게 하는 신음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세령아.” “읏, 네에.” “귀여운 소리 더 내 봐.” “그게 무, 으응!” 퍽, 소리와 함께 남근을 끝까지 처박자 가녀린 허리가 홱 꺾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파서 낸 것이 아닌 고양감에 흘린 신음임을 방증하듯 내벽이 조였다. “너는 어찌 느끼는 소리마저 이리도 어여쁠까.” “흐으, 그만 놀리고 어, 어서…….” 조금의 감상을 흘리는 시간마저 못 견디겠다는 듯 세령이 하반신을 꾸물꾸물 붙여 왔다. 그 모습이 너무도 외설적이라 분신이 더 부푸는 것 같았다. 이제 휘언도 더는 태연하게 중얼거릴 여유가 없어졌다. 그는 세령의 손 마디마디에 깍지를 껴 바닥에 결박하고 허리를 물렸다가 쳐올리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내부를 쏘삭이던 움직임은 파고들수록 열락을 일으켜 의지와 상관없이 점차 속도를 더하였다. “흐윽! 앗, 아앙, 아! 하아, 아!” “하아, 세령아, 세령아…….” “흐읍! 으으응…….” 그는 고개를 내려 입술을 포개었다. 손은 여전히 깍지를 낀 채, 내벽 가장 깊은 곳을 바쁘게 두드리면서 혀로는 점막을 거칠게 문질렀다. 할딱이는 호흡과 달곰한 타액이 먹고 먹히는 것은 마치 하초의 움직임과 비슷하였다. 위아래로 섞이는 속살은 작금의 순간 두 사람이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단 걸 알려 주는 듯하였다. “아앗, 나리! 나, 하앗, 읍, 으음, 응!” 그는 입술을 포개었다가 귓불과 목덜미를 물었다가 다시금 입술을 삼키며 정신없이 세령을 탐닉하였다. 닿을수록 달아오르는 체온도, 쏟아 내는 체액도 그리고 세령이 흘리는 교성도 전부 치사량이 넘는 쾌락으로 느껴졌다. 세령의 몸 더 깊이,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저를 새기고픈 충동이 치솟았다. 하여 허공에서 파닥거리는 발을 제 어깨에 얹고 위에서 하반신을 쿵쿵 내리찍었다. 이미 향락으로 찔꺽찔꺽 음란한 소리를 내는 교접 부위를 더 집요하게 탐하였다. “아, 앗! 너무, 흐으, 아!” “후으. 혹, 싫은 것이야?” 도리질을 치며 손을 허우적대기에 다시금 깍지를 끼고 세령의 머리 위에 붙들어 맸다. “하아, 아니, 너, 너무 깊어서, 흐응……!” “그럼 좋다는 거야? 읏……. 좋다고 해 줘, 응? 세령아.” “흐읏, 아앙!” 세령을 느긋하게 애태우면서 답을 듣고 싶었지만, 휘언은 조금의 여유도 부릴 수가 없었다. 가장 깊고 비좁은 곳을 맛본 물건은 더 탐욕을 부리며 세령의 내벽을 뭉크러뜨렸다. 그러니 거친 움직임으로 표현을 갈구할 수밖에. “좋다고 말해 주면 아니 돼? 제발, 하아, 윽…….” “아, 아흑, 조, 좋아. 앗, 하읏……!” 억지로 끄집어낸 말인데도 짜릿한 희열에 전신이 집어삼켜졌다. 하여 심히 격앙된 휘언은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였다. 찰박대며 물이 튈 정도로 이미 두 사람 다 흥분한 터라 삽시간에 감각이 예민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저릿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극에 달한 쾌감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아읏!” “윽…….” 두 사람은 포개어진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신음을 흘렸다. 휘언은 뻣뻣하게 경직된 채 세령의 안에 울컥울컥 토정하였다. 정액을 쏟아 내는 와중 세령의 내벽이 경련하며 양물을 강하게 조여 대는 통에 뇌수가 뽑히는 것처럼 골이 얼얼하였다. 하여 제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깜박깜박 점멸하던 시야가 온전히 돌아왔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살면서 본 어떤 장면보다 뇌쇄적이었다. 눈두덩이며 뺨까지 발갛게 물들인 채 할딱이는 얼굴, 깨끗하던 피부에 울긋불긋 새겨진 흔적, 포말이 인 듯 난잡한 다리 사이에 깊이 파고든 제 분신, 그리고 슬며시 허리를 무르니 흘러나오는 희뿌연 씨물까지. 어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으읏, 하으…….” 질구를 틀어막고 있던 남근이 전부 빠져나가자, 세령이 숨을 가쁘게 쉬며 움찔거렸다. 내부를 가득 채운 사정액이 흘러나오는 게 어쩐지 아쉬웠다. 번식의 능력은 잃은 지 오래임을 아는데도, 쓸데없이 욕심이 났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곁을 떠날 일은 영영 없을 텐데, 하는 소름 끼치는 가정까지 들어 휘언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장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런 불구의 몸이라 세령을 저 같은 문제 많은 사내에게 억지로 매여 둘 기회조차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나리.” 그런 휘언을 깊은 상념으로부터 꺼내 준 것은 세령이었다. <65> 그는 정인의 음성을 듣자마자 곧장 곁에 누웠다. 그러고는 힘이 죄 빠진 손을 끌어다 입술에 대었다. “고되었지.” 곧장 잠들 기세로 눈을 가물가물 뜨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젓는다. 듣기 좋은 답만 들려주는 게 참으로 세령답다고 생각하였다. 네가 이리 너그러우니 나처럼 온전하지 못한 사내가 꼬이는 것이다. 그는 공연히 세령의 탓도 해 보았다. 참으로 못났단 걸 알면서도 태생부터 비루한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다. “으…….” 한데 세령이 별안간 몸을 끙끙대며 일으켰다. 그러더니 휘언을 바로 눕히고 위에 슬그머니 올라타지 무언가. “세령아, 너 지금 뭘 하는…….” “더 해요.” “무어?” 휘언의 가슴팍 위에 쓰러지듯 몸을 밀착한 세령은 입술을 쪽쪽, 맞대며 사내를 자극하였다. 그저 닿기만 하여도 정욕이 샘솟는 그를 자극하였으니 결과는 불 보듯 훤하였다. 휘언은 위에 올라탄 세령의 머리통을 당기며 새빨간 혀를 옭아맸다. “흐읍, 음…….” 힘 좋은 혀가 뿌리째 뽑을 듯 달려드니 버거워하면서도 착실하게 타액을 넘겨주는 게 기특하였다. 코로 내뱉는 숨마저 다디달아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벌컥 솟구치는 욕정에 휘언은 제 몸에 들러붙은 가슴을 꽉 움켜쥐고 무릎을 세웠다. “으응……!” 저릿한 자극이 도는지 세령은 허리를 비틀면서 단단한 사내의 허벅지에 제 비부를 문질렀다. 어쩜 이리 요염한 여인이 있을까. 평소와 달리 교태를 부리는 게 전부 술 탓인 줄은 알지만, 제게 조금이라도 춘심을 느꼈다는 게 기뻤다. 해서 세령의 가랑이에 낀 다리를 꾹꾹 위로 누르며 음부를 자극하니 순식간에 허벅지가 질척거렸다. “세령아. 왜 이리 흥분하였어.” “흐으, 모르, 모르겠어요…….” “넣고 싶어?” “으응…….” 앙탈을 부리듯 휘언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주억거리니, 아까부터 곧추서 있던 양물이 꺼덕였다. 그렇지만 세령만 무어라 할 것이 아닌 게, 제 분신 또한 이미 기둥을 따라 선액을 흘리고 있었다. “하면 직접 넣어 봐.” “……직접?” “응. 네가 잡아먹고픈 만큼 나를 삼켜 줘.” 세령은 몽롱한 눈을 내려 주섬주섬 휘언의 남근을 쥐었다. 그러고는 질구에 귀두를 맞추기 위해 여린 살을 뭉크러뜨렸다. 이미 질척거리는 성기끼리 마찰하니 그마저도 대단한 자극이 되어, 휘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참지 않았더라면 바로 파정해 버렸을 테다. 그 와중에 마침내 입구를 찾았는지, 세령이 숨을 흡 참으며 엉덩이를 내렸다. 둥근 선단부터 꺾이는 귀두 갓, 그리고 치솟은 기둥까지 차례로 품는 그 순간엔 휘언 또한 호흡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찔한 감각이었다. “아흑…….” “하아…….” 서로의 체모가 엉길 만큼 끝까지 맞물렸을 때, 휘언은 깊은숨을 토해 냈다. 세령은 어쩐지 바로 절정에 오른 듯 내벽을 꽉 수축하였다. 양물을 쥐어 터트릴 듯이 씹어 대는 통에 휘언 또한 미간을 찡그렸으나, 애써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령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계속해도 괜찮은 것이야?” 어여쁜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여인은 오기를 부리듯 고개를 주억거리곤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금 내리꽂았다. 그러고는 방아질을 시작하였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휘언의 입에선 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으, 응, 으응, 나리, 나리이, 읏, 응…….” “하아, 세령아, 조금만 천천히, 윽…….” 혹여 허리에 무리가 갈까 봐 바람과는 다른 말을 뱉었지만, 세령 또한 저만큼이나 열락에 취하였는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하여 휘언은 상체를 일으켜 세령의 허리를 감싸고 아까부터 눈앞에서 자신을 현혹하던 유두를 한 아름 물었다. “하으읏…… 너무 깊어…….” 휘어지는 세령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을 뻑뻑 빨던 그는 바들바들 떠는 허벅지와 다리로 손을 내려 살살 어루만졌다. 왼손에 낀 가락지가 세령의 살갗 위에 문질러지는 것을 본 사내는 문득 변태 같은 생각을 하였다. “세령아, 내 것이 깊이 들어가서 버거우면 나중에는 가락지를 예 끼워 줘.” 그가 제 남근 뿌리를 가리키자,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세령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가락지를 끼워 두면 내 흉측한 물건이 네 안으로 전부 들어가는 걸 어느 정도 막아 줄 것 아니야.” 그 또한 희락에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되는대로 지껄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말하면 할수록 정말 세령이 제 양물에 그런 식으로라도 소유를 표해 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능청스레 입술을 쪽쪽대던 휘언은 세령의 엉덩이를 더 당기며 채근하였다. 그러나 흐응, 소리를 내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왜. 무에 문제야. 어차피 나도, 이 좆도 네 것인데. 가락지로 임자를 정해 두면 좋잖아.” 다리를 천천히 세우게 한 뒤, 오금 뒤에 팔을 넣어 온전히 제 팔 힘으로 세령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꽂았다. “아응!” “찬성한 거야.” “아, 아니…… 아!” 사내 위에 올라타 있으나, 애석하게도 세령은 제 의지로 교접을 이어 가는 게 아니었다. 오롯이 휘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내벽을 꿰뚫리는 꼴이었다. 하여 신음성은 더욱 높아졌다. “힘들면 솔직하게 말해. 천천히 해 볼 터이니.” 휘언은 세령의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나 세령은 되레 휘언의 목에 매달렸다. “하으, 조, 좋아요. 그러니까…… 으응, 계속…….” “하…….” 휘언의 턱뼈가 불거졌다. 어쩜 이리 사내의 인내심을 계속 시험하는지. 그는 조금 더 사납게 음부에 파고들었다. “아아, 앙! 좋아, 하아, 앗!” 원래 이리 거친 것이 취향이었나. 해서 희명군과의 교접을 그토록 좋아했던 걸까. 별안간 투기가 일었던 사내는 금침 위에 세령을 엎어뜨리고 뒤에서 제 물건을 쑤셔 박았다. “아응!” 하초로 둔부를 철썩 부딪치자 간드러진 소리가 튀어나온다. 일순 휘언은 제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부터는 배려 따위 없었다. 마치 전장을 휘어잡던 희명군이 튀어나온 듯, 두 사람의 정사는 무자비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새하얀 둔부가 발갛게 될 때까지 탄탄한 뱃가죽을 부딪치다가, 땅을 짚은 팔에 힘이 풀려 쓰러진 세령을 번쩍 들고 허공에서 교접을 이었다. 그러다 그 자세가 무섭다고 칭얼대는 통에 도로 눕혀 다리를 활짝 열고 내밀한 곳에 제 몸을 쉴 새 없이 밀어 넣으니, 자지러질 듯 울어 댔다. 듣기 좋은 신음성에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하여 휘언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세령을 마음껏 탐닉하였다. 귀빈채는 오늘도 객을 받지 않았으나, 한 쌍의 남녀가 내는 방탕한 소리만큼은 여느 객사 못지않게 난잡하였던 밤이었다. * * * 창호지로 스며드는 푸른 빛에 휘언은 눈을 깜빡거리며 부스스 잠에서 깼다. 언제 잠든 것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또 혼이 바뀌고 하루가 지난 것인가. 세령과 제대로 된 첫날 밤을 보내고 뒤처리는 하였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호흡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는데 어쩐지 더웠다. 기분 좋게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고개를 내리니, 등을 졌으나 헐벗은 세령이 품 안에 들어와 있다. 혼이 바뀌지 않았구나. 정인을 보자마자 가슴이 뛰고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맨 어깨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세령이 끙끙 소리를 내었다. “아…….” 하복부가 뽑힐 듯한 감각에 그제야 세령의 안에 들어간 채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심조심 허리를 무르며 여인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새 또 싸질렀는지 세령의 다리 사이가 축축하였다. “……미친 새끼.” 천천히 여유롭게 세령의 몸 구석구석을 음미하면서 함께 기분 좋아지려 하였는데, 끝에 가선 제 욕정에 못 이겨 연약한 여인을 너무 몰아붙였다. 세령이 계속 몸이 뜨겁다며 제게 붙어오기도 하였지만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이니 저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는데. 도가 지나쳤다. 휘언은 몸을 일으켜 복도에 준비된 세숫물을 끌어와 세령을 닦아 주고 옷을 가지런히 입혀 주었다. 지난밤이 버겁긴 하였는지 손을 탈 때마다 낑낑거렸다. 그게 귀여우면서도 안타까워 마른 뺨과 이마에 입술을 쪽쪽 붙이는데 체온이 조금 높게 느껴졌다. 그는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세령의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열이 펄펄 끓었다. “……세령아?” 휘언은 다급히 세령의 몸을 흔들었다. 하나 깨는 기척은 없고 앓는 소리만 커질 뿐이었다. “세령아. 일어나 보아.” 세령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하였다. 온몸이 불덩이 같은데 입술은 새파랗게 질렸고 꾹 닫힌 눈꺼풀은 파들파들 떨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혹, 저 때문에 이리된 것인가. “세, 세령아. 세령아!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무혁!” 휘언의 절박한 외침에 복도 끝에서부터 무혁이 달려들어 왔다. 방문을 열자마자 혼란을 못 이겨 울먹이는 사내, 그리고 그 품에 얼굴이 잿빛이 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무혁은 더 고민할 새도 없이 의원을 불러오겠다며 묘원각을 뛰쳐나갔다. <66> 그날은 정말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랬다. 제 마음이 다른 조각에게 모조리 넘어갔다고 오해한 채 잠든 휘언을 만나야 했기에,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방을 나서는데 문 앞에 도화가 떡하니 서 있었다. “어, 언니? 아침부터 예는 어쩐 일이야?” “내가 못 올 데 왔니?” 도화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세령을 끌고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영문 모르고 쫓아 들어온 세령은 도화 옆에 앉으며 살살 눈치를 보았다. “아침엔 피곤하다고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 무슨 급한 일이기에 그래?” “너.” “으응?” 홱 노려보는 바람에 세령이 움찔하였다. “희명군 나리와 여태 만나고 있는 게지?” “…….” “그것 때문에 어제 네 외숙이 나리께 된통 당하였고.” “그건 외숙부께서 먼저…….” “알아. 한데 나리와 그리 길게 연을 잇지 않았더라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니? 그 사내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언니. 언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리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어릴 때 그렇게나 끼고 놀던 사내아이가 희명군이란 건 안다며. 그 애가 네 어머니를 죽인 유일한 용의자인 것도!” “…….” “그동안은 그래, 정황일 뿐이니 사람을 섣불리 의심하지 않겠단 건 이해했어. 한데 아직도 네게 진실을 밝히지 않은 연유는?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뭐?” “마땅한 이유는 설명 못 해. 나도 나리가 왜 그러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물론, 언니가 보기에는 한심하겠지. 그렇지만, 나리는 정말로 어머니를 죽일 사람이 아니야. 그건 내가 장담해.” 뚜렷한 증좌도 없으면서 사내를 맹목적으로 믿는단 사실에 도화는 복장이 터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세령에게는 휘언이 무고하단 정황과 신뢰가 있었다. 그러니 그를 두둔할 수 있었다. 하나 증명할 수 없으니 제삼자에겐 미친 사람처럼 보일 테지. 제 입가를 만지작거리는 도화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옅게 내쉬는 한숨마저도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희명군으로부터 완전히 정을 떼도록 만들 각오를 하고 왔다는 듯, 결연한 얼굴로 여태 해 주지 않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너, 그날 네 어머니가 내게 전해 달라고 맡긴 서찰 기억나? 내가 네게 떠넘겼잖아. 그거, 넌 열어 보지 않았었지?” “어? 어…….” “네 어머니가 행수 어른을 통해 세자 저하께 보내려던 거였어. 부디 우리 아이들을 보호해 달란 짧은 서찰이었지. 언니는 그저 행수 어른에게 가져다주라고만 하였는데…… 나중에 행수 어른이 그러더라고. 내가 서찰을 주면 그걸 꼭 저하께 전해 달라 하였다고.” “하면 어머니는…… 그렇게 될 걸 이미 알고 계셨단 거야?” “그래.” “어, 어떻게…….” 그토록 물어봐도 말하지 않던 이야기가 순순히 흘러나와 세령은 내심 놀랐다. 한데 여태 입을 다물다가 이제야 과거를 꺼내는 연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몰라. 그래도…… 언니의 죽음 정도는 내가 막을 수 있던 일이었어. 언니가 그 서찰을 전해 달라고 한 건 한참 전이었으니까.” “한참 전이었다고?” “그래. 구태여 변명하자면…… 언니가 내게 서찰을 부탁한 건 그게 처음이 아니었어. 네 외숙에게도 서찰을 보내 달라 하였으니까. 첫 서찰은 바로 전하였지만 또 부탁하니 당시에는 좀 귀찮았어. 행수 어른에게 줄 걸 왜 나를 거치느냐고 투덜댔지. 해서 무슨 내용인가 열어 보게 된 거야. 그걸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미뤘던 거고. 심지어는 잊어버렸어.” “…….” “언니가 그렇게 된 날…… 내게 서찰을 전한 것이 맞는지 묻길래 그랬다고 거짓말을 해 버렸어. 해서 부랴부랴 네게 떠넘긴 거였고. 그래서…… 그동안 네게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 “난 지난 8년간 그 일을 곱씹으면서 수백, 수천 번을 후회하였어. 그 서찰을 간과하지 않고 바로 전하였다면 무고한 죽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 도화의 말대로 만일 그 서찰이 제때 세자에게 갔더라면, 적어도 어머니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여 말이라도 새어 나갈까 봐 여러 사람을 거친 것이 되레 일을 그르친 꼴이었다. “용서받지 못할 걸 알아. 그렇지만…… 여태 말하지 않은 것도, 그때의 일도 전부 미안해.” “……왜 그동안 내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어?” 도화의 잘못만은 아니란 걸 알지만 도저히 괜찮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많이 늦었지만…… 언니의 청을 들어주고 싶었어. 너를 지키려고 그랬어. 진실에 다가갈수록 넌 희명군 나리와 가까워질 거고, 그리되면 너까지 네 엄마 꼴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숨겼어.” 허탈한 웃음이 절로 비집고 나왔다. “난 언니한테 지켜 달라고 한 적 없어. 진실을 알려 달라고만 하였지. 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하였지만 언닌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 보려고 내 눈을 가린 것 아니야?” “세령아, 난…….” 도화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 제삼자가 당사자의 알 권리를 주물렀다는 것이 괘씸하여 차갑게 말하였지만 어찌 보면 도화도 피해자였다. 별 관련도 없는데 서찰 하나 때문에 수년 동안 자책하며 살았으니. 저를 지키려고 했다던 도화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거다. 그렇지만 눈만 가리기 급급하였던 지난 일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언니가 정말 내게 미안하다면, 이제는 휘언 나리와 8년 전 사건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 줘.” 죄인처럼 눈치를 보던 동공이 세령의 말에 심히 흔들렸다. 도화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였지만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실…… 내 선에서 해결해 보려고 했어. 진짜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정말 전부 털어놓으려고…… 그렇게 미루다 보니 이 지경까지 온 거야.” “언니는 휘언 나리가 진범인 걸 확신해? 그날 어머니를 잃은 건 나리 또한 마찬가지인데도?” “그래. 나리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거니?” “…….” “난 몇 번이고 이 묘원각을 떠나고 싶었어. 그런데도 이곳에서 꾸역꾸역 버텼던 건, 나 또한 진범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놈 목구멍에 독이라도 들이부어야 언니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았으니까.” 진심을 담은 듯, 도화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하였다. 그리고 줄곧 털어놓지 않던 옛날 일들까지 술술 불기 시작하였다. “관군들에게 끌려갔던 그 아이는 몇 년이 지나 다시 묘원각에 모습을 드러냈어. 한데, 그 이후부터 희한하게 그날 일을 아는 이들이 하나둘 묘원각을 떠나기 시작하더라. 죽거나 다치거나, 그게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그리고…… 기어이 행수 어른까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어. 이러니, 내가 의심을 안 하겠니?” “…….” “그날 일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나만 남게 되었어. 내가 은밀한 약을 거래하는 역할을 맡은 데다, 무혁 나리와 깊은 관계가 되었으니 내버려두었는지도 몰라. 그게 아니면 나를 말려 죽이고 싶었거나. 물론 나는 당연히 후자라 생각하였지만.” 도화가 왜 그리 휘언을 세령에게서 떨어트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과거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난 범인. 모든 목격자가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 속, 저 혼자 남게 된다면 경계심은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 나리에게 그날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어?” “있지, 왜 없겠어.” “……답을 얻었어?” 도화는 조소를 픽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들으면 화날지도 모르는데…… 뻔뻔하게도 기억을 못하더라.” “…….” “허. 이미 알고 있구나?” “……응.” “하면 그 사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도 아니?” “어?” 세령의 동공이 흔들렸다. 설마, 조각난 혼에 대해 언니도 알고 있었던 걸까. 그건 생각도 못 한 것이라, 도화에게 품었던 배신감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훤히 보이는 세령의 반응에 덩달아 놀랐는지 도화의 눈도 동그랗게 뜨였다. “뭐야. 희명군 나리가 그걸 순순히 말했어? 본인이 광증을 앓고 있다는 거? 너, 그럼 그분의 다른 모습도 본 것이야?” “그걸 어떻게…….” “너, 너어, 그걸 다 보고도……! 진짜 제정신이야? 난 다른 모습 같은 건 몰라! 그냥 어쩌다 들은 것뿐이야. 내가……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괘씸해서 죽을 각오로 덤빈 적이 있는데, 그때 무혁 나리가 나를 말리면서 말해 주었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광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원치 않게 과거를 잊은 것뿐이라고.” 그럼 도화는 휘언의 혼을 만나지는 못하였겠구나. 하면 역시나 그날 일의 진실은 휘언만이 알고 있을 테지. <67> “언니도 참…… 무모하다.” “너는 무어 안 그런 줄 알아? 그분의 비밀을 다 알고도 지금 곁에 있는 너야말로 겁대가리 상실하였지! 하아, 너나 희명군 나리나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도화 또한 충격이 말이 아니었는지 풀 죽어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본디 제 성격으로 돌아와 노발대발하였다. 그러더니 골이 다 아프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누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진실을 숨긴 도화에게 화가 났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해서 세령은 거기서 도화를 더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그럴 때가 아니기도 하였고. “걱정되는 마음 이해해. 한데 언니. 나, 나리와 가까이 지낸 지도 벌써 한 계절이나 지났어. 그렇지만 나리는 단 한 번도 나를 해치려고 한 적 없어. 오히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해서 더 혼란스러워. 너한테만은 좋은 사내란 걸 알지만, 그분은 일단 적이 너무 많잖니, 세령아.” “그건…….” “그래. 8년 전 사건도 그분의 선택이 아닐지 몰라. 그렇지만 그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이후에도 평범하게 살아갔을까? 8년간 걸어온 길이 시체 더미 위였던 사내가? 그때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그 손에 피를 묻혔을 거야.” “…….” “나는 그날 일이 두고두고 후회돼. 막을 수 있는 일이었던 거잖아. 해서 나는 네가…… 부디 그분 곁에서 멀어졌으면 좋겠어. 좀 더 안전하고 평범한 사내와 미래를 함께 하였으면 좋겠다고.” 묘원각으로 팔려 왔을 때부터 도화가 저를 끼고돌았던 걸 안다. 동고동락하던 동료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그 여식에게라도 속죄하고 싶었을 테지. 도화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렇지만 세령은 고작 타인의 설득으로 변심할 만큼 가벼운 다짐을 한 게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할 어린애가 아니지 않은가. “언니. 언니도 분명 신분 때문에 무혁 나리와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알잖아. 다른 사람이 뜯어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너…….” 세령은 도화의 손을 꼭 잡고 침착하게 속마음을 전하였다. “나, 나리가 좋아.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그리고 이 마음은 나리가 무결하다는 확신에서 지속된 거야. 만일 나리가 정말로 어머니를 해쳤다면, 난 더는 내 마음 욕심낼 생각 없어. 그러니까…… 내가 직접 나리와 대화할 수 있게 해 줘. 그날의 진실을 직접 밝힐 수 있게 도와주었으면 해.” 윽박보다는 설득과 회유. 그게 세령이 살아온 방식이자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도화는 눈시울을 붉히며 입을 달싹였지만, 본인 또한 무혁과 맺어지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던 걸 떠올렸는지 이내 두 손을 들었다. “……계집애. 넌 네 엄마랑 똑같아. 평소에는 욕심 하나 안 내다가 뭐에 꽂히면 사람 말 절대 안 들어.” “칭찬이지?” 세령이 샐쭉 웃어 보이자 도화도 픽 실소를 흘렸다. “안심하지 마. 만일 나리가 네 어미를 죽인 게 맞다면, 그땐 누가 뭐래도 내가 먼저 널 나리로부터 떼어 낼 거야. 알았어?” “응.” 분명 휘언이라면 당장 저를 보지 않으려 할 게 뻔하였다. 그러니 무혁의 도움이 절실하였다. 해서 세령은 도화에게 무혁 나리를 만나게 해 달라 청하였다. 그러자 순순히 무혁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휘언은…… 지금쯤 활터에 가 있을 터인데.” “그곳이 어디입니까? 알려주십시오. 지금 나리를 만나야 합니다.” “아니 된다. 활터는 본디 휘언의 사적인 공간이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심지어 오늘은 내게도 찾아오지 말라 당부까지 하였지. 한데 내 어찌 너를 그곳에 데려갈 수 있겠느냐.” 단호한 거절에 세령은 주춤하였으나, 당장 밀어붙이지 않으면 휘언은 더더욱 마음의 대문을 걸어 잠글 것 같았다. 하여 세령은 일전에 무혁이 제게 약조하였던 것을 꺼내었다. “예전에 휘언 나리의 식사를 도우면, 제가 원할 때 도움을 주겠다 말씀하셨지요.” “…….” “지금 도와주십시오.” “……꼭 지금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냐.” “예. 지체하면 나리는 점점 더 저를 보려 하지 않을 겁니다.” “하아…….” 제가 뱉은 말이 있으니 무혁은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나 지금은 그의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당장 휘언을 만나 대화를 해야만 했으니. 무혁은 세령이 강경하게 나오니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저를 따라오라 하고 뒷산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휘언을 만났다. 세령은 도망치려는 그를 자빠진 척하며 붙들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사내에게 담아 두었던 마음 또한 고백하였다. 비록 급한 일이 있다며 무혁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지만, 세령은 이제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는 데는 이골이 났다. 하여 대화가 충분히 끝났을 무렵에 다시금 방을 나섰다. 그때, 귀빈채로 가는 길목에서 영선을 마주하였다. “얘, 귀빈채 가니?” 못 본 체하고 제 갈 길 갈 줄 알았는데, 영선은 세령의 앞길을 막아서며 물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어 대꾸 없이 미간만 좁히니, 그 애는 시선을 불안정하게 허공에 굴리다가 본론을 툭 꺼내었다. “그땐…… 내가 미안했다.” “……뭐?” 새삼스러운 사과에 세령의 입에서는 반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네 댕기를 탐하고 흉을 본 것 말이야. 그냥 네가 부러워서 그런 것이었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가 싶었다. 하나 말을 뱉을 때마다 주저하듯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며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까지, 충분히 자존심을 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퍽 당황스러웠다. “부럽다니, 내가 무어라고 그런 생각을 해?” “네가 나와 같은 처지라 여겼는데 도화 님이며 희명군 나리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죄 너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겠지만, 내 눈에는 그게 참 질투가 났던 것 같다. 미…… 미안해.”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았던 이가 순순히 치부를 드러내니 되레 얼떨떨해졌다. 작금 내비치는 모습이 진심인가 의심할 정신조차 없었다. “되었어.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무어.” “대, 댕기도! 매번 어여쁜 장신구를 바꿔 가며 하는 기생들을 그리 흠모하였었는데, 네가 좋은 걸 하고 다니니 탐이 났어. 용서해 줘!” 되었다는데도 구태여 무릎까지 꿇었다. 세령은 곤혹스러워져서 덩달아 몸을 낮추었다. “왜, 왜 이래. 이러지 마.” 아니 그래도 저 때문에 영선이 휘언에게 크게 혼났던 점이 마음에 조금 걸렸더랬다. 한데 이렇게까지 과할 정도로 사과하니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미안! 용서해 줄 때까지 사죄할게.” “이러지 말래도……!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어나.” 예서 조목조목 따지며 화내는 것도 저만 우스워질 듯하였다. 해서 세령은 영선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세령은 댕기 일을 그저 단순한 사고라 생각하기로 하였다. 사과까지 받은 마당에 구태여 담아 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 그렇지! 아니 그래도 네게 사과하려고 주안상을 만들던 참이었다.” “주안상?” 세령이 어영부영 사과받겠다고 하니, 영선은 환한 낯을 하며 더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였다. “그래. 네게도 그렇고 나리께도 폐를 끼쳤으니 뭐,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라는 의미로…….” “오, 오붓한 시간이라니…….” “무에 그리 놀라고 그러니? 귀빈채를 담당하는 계집종인 내가 너와 그분의 사이를 몰랐을 거라 생각한 거야?” “…….” 일순 영선이 그동안 희명군의 방을 치웠으리란 생각이 들어, 세령은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희명군이 스스로 방을 치웠을 리도 없거늘. 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참으로 부끄러웠다. 한데 영선은 되레 그런 건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를 온전히 용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주안상이라도 받아 주면 아니 될까? 그래야 네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이것도 내 이기심이겠지만, 어떻게…… 아니 될까?” 오히려 난잡한 방의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용서만을 비니 덜 민망하긴 하였다. 제게 사과하려고 주안상을 준비했단 것도, 당장 제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 아닌 듯 들렸고. 잠깐이나마 순수한 사죄를 의심하고 잰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자존심 강한 아이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하여 세령은 영선이 차려 준 주안상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귀빈채로 향하기 전에, 제 처소로 돌아가려는 영선을 붙들었다. “영선아.” “으응?” “내 외숙부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는 마.” <68> “무, 무슨 소리야? 가까이 지내다니.” “무려 8년을 같은 공간에서 지냈는데도 본성을 보이지 않았던 분이야. 조카인 나도 이용하는 사람이 타인이라고 덜할까 싶어서 그래.” “…….” “그리고, 사과하기 어려웠을 것인데, 용기 내 줘서 고마워.” “……뭐?” “어쩌면 좋은 친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깟 댕기가 무어라고 우리끼리 그리 날을 세웠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 평생 척지고 지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맙다고. 이건…… 잘 먹을게.” 고맙다는데도 영선은 어쩐지 더 심란해진 얼굴이었다. 세령은 이만 가 보겠다며 어색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한데 몇 걸음 못 가 영선이 세령을 불러 세웠다. “은세령!” “응?” “너, 그거 술, 많이 마시지 마.” “……무어? 왜?” “그, 술이 세니까! 너, 술 많이 안 해 봤을 거 아냐.” “어? 어어……. 그렇지.” “내 말 명심해. 그거, 조금만 마셔. 아주 조금만, 알았어?” 영선은 그리 외치고는 저가 먼저 홱 등을 돌려 멀어졌다. 나리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들려 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마시지 말라는 게 의아하였다. 하나 세령은 그게 저 아이만의 또 다른 사과 법이라고 단순하게 넘겨짚으며 귀빈채로 향하였다. 술을 마셔 본 적이 손에 꼽으니 제 몸이 이리 달아오를 줄은 몰랐다. 많이 마시지 말라던 영선의 당부가 뒤늦게 떠올랐지만 그땐 이미 늦은 후였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 다리 사이가 자꾸만 뭉근하게 달아오르고 저릿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휘언에게 매달렸다. 나를 안아 달라고, 끓어오르는 열기를 해소해 달라고 칭얼댔다. 이 혼과는 처음 몸을 섞은 것이었지만, 역시 같은 사람이라 그런지 밤은 길고도 집요하였다. 사그라들 새가 없는 정력에 지쳐 먼저 혼절한 것도 희명군 때와 같았다. 하나 아무런 의심 없이 주안상을 받은 것부터가 문제였던 걸까. 열락에 잠겼던 몸은 운우지정을 나눈 이후에도 신열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하아…… 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었다. 몸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와중, 약재 냄새가 가득 들이 차는 걸 느끼고 제게 무슨 일이 벌어졌단 걸 깨달았다. 하나 그 외의 사고는 상당히 더뎠다.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질 않을 만큼 눈앞이 어지러운 탓이었다. “……령아, 세령아…… 은세령!” 몸은 불덩이고 제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런 와중 곁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애처롭게 부르는 걸 느꼈다. 분명 휘언일 터인데, 귀가 먹먹하여 목소리가 아득하기만 하였다. “으…… 후으…….” 얼굴엔 열이 펄펄 들끓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데 손발은 차갑고 이상하게 오한이 들어 전신이 떨렸다. 늘 차갑게만 느껴졌던 손이 세령의 손을 따스하게 감쌌다. 흐리멍덩한 시야에 휘언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잘 보이지 않아도 저를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나리, 저, 괜…….” 경련하는 입술로 괜찮다고 말하려 하였으나 쇳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마저도 힘에 부쳐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세령은 정신이 다시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걸 느끼며 또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 * *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어. 도대체 언제쯤 괜찮아지는 것인가.” “열도 많이 내렸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 “하아, 제길…….” 휘언이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바닥으로 툭 떨어뜨린 손끝이 잘게 떨고 있었다. 김 의원은 며칠 사이에 피골이 상접한 사내를 흘기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세령이 사경을 헤매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독이 든 술을 건넨 영선은 관아에 끌려갔고 모든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하였으나, 도화가 나서서 검은약을 유통하던 무리를 발고하였다. 배후에 은성호 패거리가 있음을 알린 것이다. 하여 영선이 건넨 술에 아편과 알려지지 않은 성분이 들었단 게 밝혀졌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의금부에서 나서서 그들을 찾고 있었다. 특이한 병을 앓는 사내와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세령이 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견은 하였건만, 실제로 그 상황을 맞닥뜨리니 김 의원은 속이 문드러졌다. 문제가 되었던 술은 함께 마셨는데, 독에 내성이 있던 탓에 홀로 멀쩡한 휘언이 조금 밉기도 하였다. “저것은 또…… 내가 부순 것인가?” 휘언이 다리가 부서진 탁자를 씁쓸하게 응시하였다. 의원은 희명군이 저지른 행태를 떠올리고 덤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돌팔이가 아니냐며 자네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겠군.” “정확히 그리하셨습니다.” “……내가 대신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라도 답답한 마음에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세령이 누워 있던 며칠 동안, 눈앞에서 혼이 변모하는 걸 실제로 목도한 의원은 자초지종을 전부 듣게 되었다. 혼백이 두 갈래로 찢어진 경위와 사내의 출신, 그리고 그가 희명군이란 사실까지도. 하여 그가 꼴도 보기 싫다가도 한편으로는 측은지심을 느끼게 되었다. 쉬이 미워할 수도 없는 사내.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령의 마음이 이해될 것도 같았다. “다른 일은 없었는가?” “당장 옥에 갇힌 영선을 끌어내 목을 베겠노라 난동을 부렸는데, 세령이 잠깐 깨어나 화를 면하였습니다.” “……내가 잠들었을 때 세령이 깨어났다고?” 휘언은 이를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얼굴이었다. 영선은 진작 관아에 끌려가 죄를 고하고 옥에 가둬졌으니 제 죗값을 치를 것이다. 찢어 죽여야 할 사람은 배후에 따로 있었으니, 불필요한 살인이 벌어지지 않아 안도는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잠든 사이 그놈이 세령을 만났다는 것에 투기가 일었다. 제게는 원망이라도 하듯 단 한 번도 눈꺼풀을 들어 주질 않았는데……. 유치한 질투를 누르느라 사내의 턱뼈가 잠시 불거졌다 가라앉았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의원이 먼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 주었다.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금방 또 잠들었으니까요.” “……그런가.” “예. 그러고선 분을 못 이겨 부순 게 저 탁자입니다.” “그자라면, 그리 화낼 만도 하지. 기실 그는 나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네. 한낱 객사의 하인이 준 술에 그리 치명적인 독이 있을 거라고 의심도 못 하였다니……. 어찌나 한심스러웠겠어.” 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세령이 누워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제 탓이라 여기고 있을까. 김 의원 시선을 사로잡은 처량한 눈에 물기가 고인 듯하였다.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이제는 행복을 누리게 해 줄 법도 하거늘.’ 의원은 불쌍한 사내의 인생을 되짚으며 공연히 하늘 탓을 해 보았다. “누구든 그 상황에선 큰 의심 없이 술을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령이도 고스란히 받아 온 것이겠지요.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이 손으로 세령이의 잔에 독을 따랐네. 그래 놓고 나 홀로 이리 멀쩡한 것이 미치도록 화가 나. 대신 앓을 수만 있다면 수백 번이고 그리할 터인데.” “시간이 걸릴 뿐, 차도가 좋으니 세령이는 이겨 낼 것입니다. 너무 염려 마시지요. 또한 나리께는 세령의 안위만큼이나 중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인데, 내 주책없이 너무 징징거린 것 같군.” “아닙니다. 답답하신 속, 제게라도 털어놓으십시오.”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을 다독이니 사내는 미안하고 고마운 얼굴로 입꼬리를 힘겹게 올렸다. 그때, 약방 문이 열리며 무혁이 들어섰다. 그 또한 휘언만큼이나 수척한 얼굴이었다. 검은약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본인이 약을 유통한 사실을 털어놓은 탓에, 도화 또한 옥에 가둬졌다. 휘언이 의금부에 도화의 처벌을 미뤄 달라 이야기해 두어, 신변에 위협은 없었으나 무혁은 하루빨리 제 정인을 옥에서 빼내고 싶어 했다. 하여 의금부와 함께 며칠간 밤을 새워 수색하더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혁. 무슨 소식이라도 있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만으로도 현재 혼이 누구인지 가늠한 듯, 무혁은 조금 긴장을 풀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시진 전쯤 약초꾼들이 묘원각 뒷산에서 은성호의 용모파기와 닮은 이를 보았다더군. 소식을 접하자마자 관군들이 수색에 나섰네. 두어 명이 잡혔는데 그 무리가 맞는가 봐. 해서 나도 뒤를 따를까 해.”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부터 의금부와 결탁해 은성호 무리를 추적하고 있던 덕에 다행히 진척이 빨랐다. 아마 곧 있으면 죄다 추국장에 세울 수 있을 테지. “한 시진이라면 멀리는 못 갔겠군. 하면 나도 가겠네.” “자네가? 하나 곧 어두워질 터인데.” “그러니 한 사람이라도 더 거드는 게 낫지 않겠나.” 마냥 앉아서 기다리기는 이제 싫었다. 세령을 이리 만든 놈을 붙잡아 당장에라도 해독 방법을 추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면 어서 채비하지. 활이며 검이며 전부 묘원각에 있으니 서둘러야 할 것이야.” 휘언은 세령 쪽을 흘끗 바라보고는 의원에게 다가갔다. “자릴 비운 동안 세령이를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두 사내는 그렇게 약방을 떠나 묘원각으로 향하였다. <69> 휘언은 활과 화살통을 챙기고 쓸 수나 있을지 모를 검을 허리춤에 찼다. 말에 올라타 무혁의 뒤를 순순히 따르며 뒷산을 오르던 그는 시야 끝에 관군이 모인 것을 보고 속도를 높였다. 하나 그곳에는 은성호 무리 중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약초꾼으로 보이는 사내 몇이 벌벌 떨고 있을 뿐. “무슨 일인가. 수색은 어찌하고.” 휘언과 무혁이 말에서 내리자, 관군 무리 중 가장 높아 보이는 자가 다가와 묵례하였다. 그러고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속은 듯싶습니다.” “……뭐?” “한 시진 전, 이 약초꾼들 앞을 눈에 띄게 서성거린 것은 맞으나 신고하러 가는 걸 보고 그대로 고삐를 돌린 듯합니다.” “두어 명을 붙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잡혔던 이들은 그 무리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아마 미끼로 던진 것이겠지요.” “근방에 숨어 있을 가능성은 없나?” “둘러보았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일단은 목격한 곳에서 더 나아간 흔적이 없어, 역으로 추적 중입니다. 선발대는 이미 출발하였으니…….” “젠장!” “휘언, 잠깐만! 어찌하려 그러나.” 관군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잽싸게 말에 올라타는 휘언을 무혁이 막아섰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으니까. “약방에 가 봐야겠어.” “약방에 간다고? 선발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쫓지 않고?” “세령이에게 일이 생겼을까 봐 불안해. 노의원 홀로 여인 하나를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왜 그리 안일하게 생각하였을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호위라도 고용해 두는 것인데…….” “쫓기는 마당에 약방까지 들를 여유를 부렸겠나? 괜찮을 걸세.” “그래도 확인해야겠어. 자네는 먼저 가게. 나는 세령의 안위를 살피고 호위를 부탁할 만한 사람을 구한 후에 뒤따를 테니.” “그래, 알겠네. 부디 몸조심하게.” 휘언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저잣거리 약방으로 향하였다. 한데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약방 문이 어쩐지 훤히 열려 있었다. “세령…….” 뒷산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던 불안감이 급격히 치솟았다. 사내는 말에서 날다시피 뛰어내려, 약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세령아!” 안으로 들어서니 온갖 약재며 도구들이 바닥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세령이 누워 있던 이부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김 의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세, 세령…… 세령아!” 휘언은 황급히 약방 밖으로 나갔다. 무슨 발자국이라도 남았으면 좋으련만, 캄캄해진 길목에선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때, 멀리서 의원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휘언을 불렀다. “나, 나리! 허억, 헉…….” “김 의원! 대체 무슨 일인가. 세령이는……!” “세, 세령이가…… 잡혀갔습니다. 그놈, 은성호 그놈이……!” 쿵, 가슴이 내려앉으며 현기증이 일었다. “어, 어디로, 대체 어디로…….” “묘원각 뒷산은 관군들이 수색하고 있어 그런지 이 앞산으로 말을 타고…….” “알겠네.” 휘언은 주저 없이 가져온 말에 올라타며 고삐를 쥐었다. 은성호 혼자가 아니니 조심하라며 김 의원이 소리쳤으나, 그의 귀엔 이미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 * * “분명 뒷산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봤다면서! 어찌 저리 빨리 따라오는 것이오!” “난들 알 리 있나? 속도나 높이게! 이럇!” 추격자가 따라붙은 걸 알자마자 은성호 무리는 속도를 높였다. 부친으로 인해 억지로 나갔던 전쟁터에서 익힌 것이 이런 때에 도움 될 줄이야. 추적술을 펼쳐 금세 무리의 꽁무니를 붙잡은 휘언은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다른 손으로 활을 만지작거렸다. 전쟁광인 희명군이었더라면 이미 앞서가는 말에 화살을 박아 넣었을 것이다. 하나 작금의 휘언은 이런 경험이 별로 없었으므로 좀처럼 실행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칫 잘못하여 세령이 화살을 대신 맞는다면……. 그런 가정만으로도 끔찍하였다. ‘왜 하필 지금…….’ 희명군의 혼이 세령을 마주하는 걸 그토록 시기하고 꺼렸건만, 지금 이 몸을 차지한 게 그자가 아닌 저라서 한탄스러웠다. 세령의 목숨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어찌 그 조각이 사라지길 바랐던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한데 혼자 온 것인가?” “그런 듯싶은데.” “하면 할 만하지 않은가?” “만만히 보지 말게! 혼자서도 적군의 목을 다 베던 사내이니!” “그런 것치고는 우리를 너무 봐주고 있지 않은가. 나였다면 필시 말 다리에 화살을 먼저 박아 넣었을 터인데.” 휘언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은성호 무리는 저들끼리 떠들며 쫓아오는 사내의 역량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성호는 제게 기대어 앓고 있는 세령을 흘끗 쳐다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이 계집 때문인 듯싶은데.” “그 계집이 다칠까 봐 참는 거라고?” “그래. 그 말인즉슨, 이 계집을 이용하면 저 괴물 또한 우리 손으로 잡을 수 있단 뜻이 되겠지. 이리 도망칠 필요도 없이 말이야.” 본디 성호는 세령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두고 희명군으로부터 거금을 뜯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순순히 협조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든 세령을 구실로 그에게 아편 유통의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현왕 쪽에 줄을 댈 계획까지 세워 두었다. 현 군주를 교체할 수 있는 유일한 자, 희명군. 그가 검은약에 중독되어 있단 사실은 이쪽 계통에 종사하는 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 저 무시무시한 학살자를 쥐락펴락할 수만 있다면, 꺾였던 제 삶도 다시금 날개를 달리라. 한데 성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현 임금이 희명군을 견제하여 묘원각에 가둬 둔 줄 알았거늘, 두 형제 사이엔 다른 이들이 모르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던 모양이다. 저와 뜻을 모은 이들 중 몇이 희명군과 아편에 대해 조정에 언급하였는데, 희한하게 모조리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희명군 쪽에서 진작부터 성호 무리의 움직임을 읽기라도 한 듯, 관련자들 신상이 죄다 의금부로 넘어갔다고 하였다. 해서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고. ‘어차피 틀어진 계획. 저놈 탓에 이 땅에서 장사하기란 글러 먹었으니 돈이라도 제대로 뜯어야겠어. 그래, 타국에 넘어가 새로운 약을 유통해 보는 거야.’ 세령을 숨길 새도 없이 쫓아온 희명군 탓에 안 그래도 난감하던 차였다. 한데 계집에게 조금이라도 흠집이 날까 두려워, 제 패거리에게도 해코지를 못 하는 것을 보니 당장 세령을 이용해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듯싶었다.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만 적당히 손을 봐 준 뒤에 몸을 숨기자. 그러고선 계집을 인질로 밑천까지 뜯어내는 거야. 하하, 이리 머리가 잘 돌아가서야.’ 성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따라오던 무리에게 외쳤다. “어차피 저쪽은 한 사람 아닌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봐 주게!” “무어? 야차 같은 사내를 상대하라고?” “하면 계속 저리 따라붙게 둘 건가?” 불안감에 볼멘소리가 튀어나오자, 성호는 먼저 고삐를 당기고 말에서 내려왔다. 세령은 짐짝처럼 말 위에 풀썩 엎어 놓았다. “아아니, 자네, 왜 이러는가.” “대체 어쩌려고 이런 무모한……!” 태평한 모습에 따라오던 이들도 말을 세웠지만, 뒤를 힐끔거리며 초조함을 내비쳤다. “내가 이 계집을 볼모로 잡아 둘 터이니 걱정 말게.” “그게 정말 먹힌단 말인가?” “우릴 당장 죽일 작정이었더라면 저리 힘들게 따라왔을까? 다들 그 정도는 짐작하고 있지 않아.” “…….” 서로 눈치를 보았으나 성호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다들 긴가민가하여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긴 듯하였다. 하나둘 말에서 내려왔다. “대신 죽여서는 안 되네. 이제부터 우리의 사업 자금을 대어 줄 사내이니.” “하면 어찌…….” “어차피 지금은 계집에 미쳐 대화해 봤자 듣지도 않을 걸세. 이리 계속 따라붙는 것은 우리 쪽에서도 지치는 일이니, 몽둥이로만 살짝 손봐 주게. 그럼 그때 내가 협상을 하지.” 다들 날붙이 없이 두억시니를 상대한다는 게 불안한 눈치였지만,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어쩔 도리가 없다 싶었는지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추격자가 지척에 도달하여 말에서 내린 순간, 성호는 검을 꺼내어 의식 없는 세령의 목에 가까이 대었다. 그러자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던 상대가 새파랗게 질려 한 발짝도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 모습에 자신을 얻은 무리는 휘언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래도 이 아이가 나리께 대단한 쓸모를 보이긴 하였나 봅니다.” 비아냥대는 성호의 말에도 휘언은 차마 검을 뽑지 못하고 허리춤에 매단 검집만 꽉 쥐었다. <70> “세령인 돌려보내거라. 어차피 용건은 나에게 있을 것 아니냐. 지금 몸도 성치 않은데…….” “희명군 자가께서는 상황 파악이 아직 덜 된 모양입니다. 지금 해야 할 말이 고작 그것뿐입니까?” “……무얼 원하는 것이냐.” 본론을 묻자, 성호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찢어졌다. “그렇게 나오셔야지요. 앞으로도 그리 고분고분 구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저희가 타국에서 사업을 좀 크게 할까 하는데, 조카 혼자 이곳에 두기 심히 걱정되어 데려가려 합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자가께서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지요.” “세령이를 데려가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말했잖습니까. 제 조카라고.” “세령이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면 예 홀로 두란 말씀입니까? 자가와 지내다가 이리 병이 난 아이를?” “…….” 휘언이 어금니를 으득 갈았다. 검집을 쥔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그리 걱정되신다면 타국에서 지내는 동안 심심치 않도록 지원이나 해 주십시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시겠지요?” 성호의 같잖은 요설이 본인들 사업 자금을 대란 뜻임은 진작 알았지만, 그중 조금도 세령에게 가지는 않을 게 뻔하였다. “네놈을 어찌 믿고?” “믿으셔야지요. 고아 된 세령일 8년간 보살펴 준 게 바로 저 은성호입니다, 자가.” 뻔뻔하게 떠드는 낯에는 탐욕이 그득하였다. 패물을 빼앗으려 세령의 뺨을 친 게 고작 얼마 전이다. 그런 자의 거처에서 세령이 8년 동안 잘 지냈을 리 없었다. 지금도 조금의 주저 없이 가녀린 목에 날붙이를 들이밀고 있는 것을 보면, 세령은 이전에도 보살핌 하나 없이 홀로 자랐을 거다. 그간 세령의 안위를 살핀 보부상 놈들은 대체 무얼 보고 잘 지낸다고 떠든 걸까. 자신은 또 왜 그리 안이하게 세령을 내버려두었나. 원망이 어느 쪽으로 향하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아, 부아만 들끓었다. “애석하지만, 세령이는 못 보내겠네. 그러니 자네들도 타국에 못 갈 것이야.” 더부살이만 해 오던 세령이 제 거처를 갖고 싶어 했단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휘언이었다. 제 곁에 둔다고 세령이 행복할 거란 장담은 못 하여도, 이대로 가게 두었다가는 귀한 삶을 또다시 진창으로 처넣는 꼴이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순순히 보낼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혼이 있었더라면 좀 더 쉽게 세령일 데려왔겠지. 이런 상념이 작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단 걸 알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렇지만 잠자코 세령이를 데려가는 걸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제 정인을 구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검집을 꽉 쥔 사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허. 이리 말이 안 통해서야……. 하면 어쩔 수 없군요. 알아듣게 하는 수밖에.” 성호가 무리에게 눈치를 주자 다들 기합을 넣고 휘언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재빨리 검을 뽑아 둔탁한 몽둥이를 쳐 냈다. 다른 혼이 튀어나와서가 아니라, 수많은 전쟁 경험이 몸에 내재해 있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여유 부릴 새도 없이 다시금 사방에서 몽둥이가 덤벼들었다. “으윽!” “악!” 맞섰더라면 검은 진작 부러졌겠지만, 휘언은 밀려오는 힘을 반동 삼아 물러서고 잽싸게 무리 사이로 파고들어 저들끼리 발이 꼬이도록 만들었다. 하여 누군가는 제 편의 머리를 후려쳤고 누군가는 발에 걸려 자빠지기도 하였다. 본디 구를 만큼 굴러 본 자들이라 저 정도로 둔한 편은 아닌데, 희명군이 언제 돌변할지 몰라 몸을 사린 것도 한몫한 듯하였다. “저, 저 모자란 것들 같으니…….” 희명군 쪽에서는 전혀 공격하고 있지 않은데 다들 정신을 못 차리니 지켜보던 성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한데 돌연 의구심이 들었다. ‘왜 단 한 사람도 검으로 베지 않는 것이지?’ 성호는 얼기설기 엉켜 있는 사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상대를 벨 기회가 있었는데도 희명군은 그저 물러설 뿐이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마치 살육을 기피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성호는 희명군을 둘러싼 수많은 소문 중 하나를 떠올렸다. 광증이 하도 심한 탓에 가끔 본래의 모습을 잊고 선비처럼 구는 때가 있다고. 소문처럼 무서운 사람은 아니더라, 점잖기만 하더라, 떠드는 이들은 모두 희명군이 회까닥 돌아 버린 순간을 본 것이라 하였다. 하면 지금이 그때인 건가. “허. 천제께선 오늘 나의 역성을 들어주려는가.” 제정신이 아닌데도 제 정인을 구하겠다고 덤비는 꼴이 참으로 갸륵하였다. 두 사람이 애틋할수록 성호에게 유리하였으니 그의 입에선 자연스레 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쯧쯔, 한심한 놈들. 제 발로 굴러들어 온 기회를 잡을 줄도 모르고.” 성호는 세령에게 들이밀었던 검을 내려놓고 몽둥이를 꺼내었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뒤엉킨 사내들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의미한 격투 판 안으로 들어간 그가 휘언의 뒤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데는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구가 휘청였다. 성호는 사내가 비틀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가격하였다. 뻑 소리와 함께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사내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후으…….” 휘언은 나지막이 신음하였다. 두개골이 깨질 것 같은 통증보다도 세상이 징, 하고 울리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그는 무릎이 꺾여 바닥에 주저앉았단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머리를 부여잡았다. “멍하니 뭣들 하는가! 밟아 버리게!”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으나, 그딴 감상은 사치라는 듯 사방에서 발길질이 이어졌다. 등과 어깨, 다리까지 어느 한 곳 빠짐없이 구타가 이어졌다. 휘언은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검을 다시금 쥐었다. 그러나 곧장 휘두르지는 못하였다. 왜 주저하는 것이지. 어차피 세령인 의식도 없는 상태인데. 그래, 저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의 사지를 모조리 잘라 죽이자. 한데 제 외숙을 베는 순간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제 혈육의 피를 묻힌 나를 맞닥뜨린다면? 살심이 폭증하는 걸 느꼈지만, 휘언은 습관적으로 세령의 시선을 의식하고 본능을 억눌렀다. 그 바람에 식은땀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리 고민하는 사이, 옆구리가 강하게 걷어차였다. “컥…….” 숨이 턱 막혔다. 머리를 맞은 것도 아닌데, 불쑥 뇌가 찢기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그때, 어떤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혔다. 서로를 죽이고 밀치는 병사들에게 밀려 중심을 잃은 순간, 무언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힌 기억. 강한 통증에 정신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달려드는 적국의 병사. 생각할 겨를도 없이 휘두른 검에 사방으로 튀는 피. 어머니의 생명을 앗아 간 색을 본 순간 귓속에서 울리는 소리. [네가 죽인 것이다.] [네가 죽였어! 네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였던가. 그렇다면 극한 상황에서 스스로 최면을 거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는 것인가. 귓전에서 울리는 말처럼 그래, 나는 살인범이었지. 납득하게 되었다. 살육이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하게 여겨졌다. 끓어오르던 살욕을 억누르지 못하여 전쟁터를 날뛰던 기억이 흘러들었다. 그렇게 이 손에 적국 병사들이 죽고 아버지가 죽었다. “왜 이러는 것이지? 상태가 이상한데?” “한 대 더 때려 보면 다르겠지.” “이보게, 죽이는 건 절대로……!” 누군가 성호를 밀치고 휘언의 뒤편으로 가 머리통을 후려쳤다. 허억, 터뜨리는 신음과 함께 휘언의 뺨에 흙바닥이 닿았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감각과 함께 새로운 기억이 머릿속에 공격적으로 박혔다. [이름은 무어냐. 이건 답할 수 있겠지?] [……도화, 이옵니다.] [거짓말. 다시 묻지. 이름이 무엇이냐.] [……은세령입니다.] [은세령. 내 이름은, 궁금하지 않으냐?]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특별히 알려 주마. 내 이름은…… 휘언이다.] 이깟 계집이 무어라고 그리 매달리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아니 되었다. [나리께서는, 결국 정욕을 풀려고 저를 부르신 것이겠지요?] [접문은…… 하기 싫습니다.] 벌벌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게 발칙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제법 흥미로웠다. [당신…… 휘언이 아니구나.] [휘언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나리를 증오할 겁니다.] 별것도 아닌 말인데 심히 불쾌해졌다. [……하면, 혹시 모르니 손을 잡고 다닐까요?] [제 낭군 아닙니다!] [왜 자꾸 저번부터 호칭에 집착을……. 흠흠, 저어, 그런 것보다 더…… 좋은 거 드릴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에게 탐욕, 정욕, 애욕, 소유욕…… 욕망이 포함된 모든 단어의 감정을 느꼈다. [어째서 당신이…….] [흐윽, 대체 언제부터 나를 소, 속이고…… 그런, 우윽, 흐…….] [당신이 애초에 휘언 나리의 몸을 빼앗지만 않았어도……!] 치솟는 분노는 그저 드러난 감정 중 하나일 뿐이요, 실상은 서럽고 질투가 나 울고만 싶었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갈구하게 될 줄 몰랐거늘,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쪼개진 나의 다른 한 조각, 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상대를 향한 마음이 같아진 순간, 기억이 뒤죽박죽 섞였다. <71> [살아 있어 줘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나리.] [내가 싫어할까 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기질을 전부 마음에서 뜯어 버린 거구나…… 그 또한 휘언 나리인데, 그런 모습이어도 나는…… 나리를 좋아했을 건데 말이에요.]   [나리도, 다른 혼도 전부 한 사람인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는요, 나리. 이제 정말로 다 괜찮아요. 지금의 나리도, 그리고 다른 혼일 때의 나리도.] [지금의 나리는 조금 미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당신도 휘언이잖아요.] [어떤 모습이든 전부 제가 연모하는 나리인걸요.] [나리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극심한 이명에 금방이라도 혼절할 만큼 정신이 혼미하였다. 그리 사경을 헤매던 중, 누군가 뒷머리를 잡아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였다. 흐릿해진 시야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은성호였다. “허, 이게 전장을 금수처럼 누볐다던 작자가 맞나? 볼품없구먼.” “…….” “잘 들으십시오. 이제부터 자가께서 할 일은, 제가 연통을 넣으면 그리로 물자를 보내 주는 것입니다. 계집을 빨리 되돌려 받고 싶거든, 처신을 잘하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시겠지요?” “…….” “알아들었단 건지 아니란 건지 원……. 이거 머리를 너무 세게 맞아 천치가 된 거 아닌지 모르겠네.” 성호는 무어라 한참을 비아냥댔으나, 제멋대로 끼어드는 기억과 감정 탓에 그의 음성은 그저 윙윙거리는 잡소리일 뿐이었다. 휘언은 제 상태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고 호흡이 가빠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짜 상태가 왜 이러는 것이야?” “아, 그러기에 왜 머리를 또 가격하고 그러나!” “자네가 먼저 후려쳤으면서……!” 사경을 헤매는 듯한 모습에 성호는 미간을 구기고 휘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하나 따끔한 감각과 함께 주변의 웅성거림이 심해지니, 머리가 깨질 듯하였다. “허억, 헉…….” 비정상적인 호흡과 함께 날카로운 꼬챙이로 두개골을 쑤시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한데 기이한 잡음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리……!” 평소보다 힘이 없고 작은 소리였지만, 휘언은 그 순간 고막을 사로잡던 소음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수군대는 이들 사이로 파고든 자는 휘언의 머리채를 잡은 성호를 밀쳤다. “윽……! 뭐야!”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예상치 못한 돌진에 성호는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붙잡혔던 뒷머리는 자유를 찾고 다시금 흙바닥에 처박힐 줄 알았거늘, 누군가 부드러운 손길로 휘언을 끌어안았다. “나리! 나리, 괜찮으십니까?” 늘 갈망하였던 체향. 시야는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저를 품에 안은 사람이 세령이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머리를 잘못 맞기라도 한 것인지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세령…….” “나리, 왜 이러고 계십니까. 정신 좀 차려 보십…… 꺄악!” “이 계집은 매사 도움이 안 되는군.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린 것이냐?” “이거 놓으십시오!” 눈앞에서 세령이 은성호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그러나 다시금 시작되는 이명과 울렁대는 속, 그리고 희미한 의식 탓에 사지가 자꾸만 무너졌다. 몸을 일으키려던 휘언은 기어코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세령이…… 구해야 하는데…….’ 뺨에 닿는 차가운 흙바닥이 그리도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제 몸을 이리도 가누지 못한 것은 처음이라, 자괴감이 일었다. 한데 그때, 전과는 다른 진동이 느껴졌다. 두두두두, 땅을 치는 소리도 나는 듯하였다. “잠깐, 이거 무슨 소리지?” 다가오는 무언가를 느낀 게 휘언뿐만은 아닌지 패거리도 저마다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성호는 그게 곧 말발굽 소리란 걸 깨닫고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이런 젠장.” “악!” 그는 세령의 머리채를 당기며 제가 데려온 말로 뛰어갔다. “어어, 자네 어딜 가나!” “내 손에 인질이 있으니 먼저 출발하겠네. 자네들은 저놈이 일어나지 않는지 지켜보다가 따라오게나!” “이보게, 은성호!” “아악! 이거 놔! 나리가…… 나리!” “지랄 말고 따라와!” 땅이 울리니 골 또한 울렸다. 바닥에 누운 휘언은 어지러이 흩어지는 정신에 눈꺼풀까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안식에 든다면 지리멸렬한 생을 끝낼 수 있을까. 아니면 영영 다른 혼에게 몸을 빼앗기려나. “윽…… 허억…….” 세령이를 구해야 하는데. 호흡조차 비정상이라 뭐 하나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나리, 제발…… 정신 잃으시면 아니 됩니다, 아악!” 이대로 정인까지 불행에 처넣고 죽는 것인가.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너를 놓치기만 하는구나. 너 하나 제대로 지키는 것조차 못 하는 한심한 놈이었구나. 빈말일지언정 너는 나 같은 놈도 끝까지 믿는다고 말해 주었는데……. ‘……진즉 그자 또한 나라고 받아들였더라면 달랐을까?’ 미움받더라도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피 냄새 나는 과거쯤이야 몇 번이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스운 줄 알지만, 당장 세령을 살릴 수만 있다면……. 시야가 흐릿해졌다. “나리!” “…….” “휘언 나리!” “…….” “……이휘언!” 그때, 절규에 가까운 호명에 번쩍 눈이 뜨였다. “하아, 하…….” 얻어맞은 머리에서 흐른 피가 눈까지 흘러내렸는지 세상이 벌겠다. 하나 귀신에 들린 듯 혼탁하기만 하였던 정신은 이상하게도 여느 때보다 또렷하였다. 그는 세령을 구해야 한단 일념 하나로 땅바닥에 손을 짚고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몸이 평소보다 무거웠으나, 이 정도 통증은 전쟁에서 겪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편 따위에 의존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저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왈가왈부하던 무리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휘언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는 걸 발견하고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정적을 깬 것은 그중 가장 겁이 많은 이였다. “뭐, 뭐야. 정신을 차린 겐가?” 손을 툭 떨어뜨린 휘언의 얼굴은 핏자국이 번져 기괴하였다. 흡사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은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여태 밟는 대로 순순히 밟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털끝 하나라도 건든다면 목이 고스란히 날아갈 것만 같은 분위기에 모두가 압도되었다. 하여 사내가 떨어뜨린 검을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휘언은 그런 주변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휘적휘적 제가 타고 온 말 쪽으로 향하였다. 곁에 떨어뜨렸던 활을 줍고 짐승에게 올라타려는데, 뒤늦게 저를 둘러쌌던 무리 중 몇이 다가와 검을 겨누었다. “어, 어딜 가려는 건가.” “…….” “가 봤자 소용없네. 이런 몸으로는 쫓아가지도 못…… 으아악!” 검을 쥔 손목이 잘린 건 순식간이었다. 휘언이 날붙이를 휘두르는 장면조차 포착하지 못한 사내들은 별안간 서걱,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 신체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거나 뒷걸음쳤다.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이들도 그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기함을 토하였다. “나와 더 놀고 싶다면 이제부터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인데. 어때, 하겠느냐?” 휘언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사내들을 하나둘 눈에 담았다. 마치 사냥감을 재는 듯 섬뜩한 시선이었다. 이를 마주한 이들은 오금이 저려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하였다. 휘언은 싱겁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말에 손쉽게 올라타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의 말은 죽을 만큼 얻어터진 사내가 올라탔으리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숲길을 가로질렀다. “……찾았다.” 허겁지겁 달아나는 은성호의 말을 발견한 휘언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시야 끝에는 언제 결박하였는지 두 손이 묶인 채 말에 짐짝처럼 엎어져 있는 세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보니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 사내는 말의 엉덩이를 더 강하게 질렀다. 따라오는 것을 느꼈는지 은성호도 말이 달리는 속도를 올렸다. 가까워질 듯하면서 멀어지는 거리에 휘언은 주저 없이 허벅지에 힘을 주고 고삐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챙겨 온 활을 쥐었다. 사내는 화살을 한 대 뽑아 활시위에 걸고 앞서가는 말의 다리를 조준하였다. 한데 하필 그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으윽…….” 몸 구석구석 얻은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나 머리를 가격당한 것은 그래도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정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세령을 구해야 했으니. 그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젓고 다시금 집중하였다. 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도, 스쳐 지나가는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팽팽하게 늘어난 활시위. 그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사내는 온 감각을 표적에 맞추었다. 그리고 바람 소리마저 멎은 듯한 느낌이 왔을 때, 화살을 쏘았다. <72> 허공을 내지른 화살은 당연하게도 명중이었다. 앞서가던 말이 히힝 소리를 내며 중심을 잃고 날뛰었다. “아아악!” “꺄악!” 깍짓손을 놓자마자, 휘언은 쥐고 있던 활을 집어 던지고 말을 더 빠르게 몰았다. “세령아!” 가능할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하였지만, 휘언은 내달리는 말에서 날다시피 뛰어내려 몸을 던졌다. 그리고 떨어지던 세령을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퍽, 소리와 함께 나무 기둥에 등짝을 강하게 부딪쳤다. “윽…….” 어딘가 잘못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 나긴 하였지만 휘언은 그게 세령의 몸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하며 끙, 신음을 흘렸다. “……나리?” 그 소리에 품 안에서 꿈틀대던 작은 몸이 고개를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는 눈동자가 잠시 슴벅이더니 물기를 머금었다. 휘언은 세령의 뒤통수를 제 가슴팍으로 당기며 쓰다듬었다. “하아, 무서웠지. 이제 다 괜찮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제, 제가 문제가 아니라 나리, 나리가…….” 휘언은 울먹이느라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세령을 토닥였다. 얼굴을 맞대고 연정을 속삭이고픈 마음이 컸지만, 놀란 세령을 달래는 것이 먼저인 듯싶어서 그리 안아 주었다. 꽤 가까이에서 무혁이 타던 말발굽 소리와 다른 이들의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났구나 싶어 안도하는데, 세령의 어깨 너머로 다리를 절뚝이며 숲길로 향하는 인영이 보였다. 참으로 질긴 생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쉬이 죽어 버리면 재미가 없을 터이니. 휘언은 조소를 흘리며 세령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세령의 뒤통수를 제 쇄골에 바짝 붙여 뒤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품에 챙겨 온 단도를 꺼내 은성호가 향한 방향으로 강하게 던졌다. 날붙이는 화살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허공을 질러 은성호의 귓불을 자르고 바로 앞에 있던 나무 기둥에 박혔다. “허억……!” 겁에 질린 은성호는 제 귀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귀신이라도 따라온 듯한 공포였을 것이다. “……그냥 목에 쑤셔 박아서 죽일 걸 그랬나.” “나, 나리.”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세령은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이었다. 그는 아차 싶어서 애써 입꼬리를 둥글게 올렸다. “미안. 말 예쁘게 할게.” “아니, 아니요. 나리, 피가…….” 험악한 언사에 놀란 줄 알았는데, 제 몰골을 보고 기함한 듯하였다. 세령은 휘언의 머리에 손을 뻗으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아까 닦아 두긴 하였는데 상흔이 더 벌어졌던가. 이마와 뺨을 타고 선혈이 다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땀을 닦듯 손등으로 대충 문질렀지만 어쩐지 출혈은 점점 더 심해졌다. “곧 멎을 거다. 별거 아니야. 세령이 넌, 다친 데는 없어?” 휘언은 사색이 된 세령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결박된 손목을 풀어 주었다. “이 와중에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제 꼴은 생각도 아니 하는 게 속상한지 세령은 울상이 되었다. 하여 휘언은 피가 묻은 손을 제 바지춤에 쓱쓱 닦고 세령의 눈가를 살살 만져 주었다. “오래 앓았잖아. 이제 괜찮은 것이야?” “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나리가, 나리가…….” 사내들과 뒤엉켜 피를 본 것뿐 아니라, 제 외숙에게 칼을 집어 던지기까지 하였는데 세령은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피범벅이라 흉측할 텐데도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 너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로 나를 다독인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어떤 모습이래도 상관이 없었던 거구나. 진실로 세령의 연정을 믿게 된 휘언은 여느 때보다도 기쁘게 웃었다. 여러 사람이 탄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기에 고개를 드니 무혁과 관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다 끝났구나, 안도가 되어 사내는 조금 더 편하게 세령을 바라보았다. 네가 괜찮다니 되었다, 난 그거면 되었어, 그리 말하려 하였다. 안심할 수 있도록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려고도 하였다. 한데 어째 시야가 흐려지고 세령이 둘, 그리고 셋으로 보였다. “괜찮다니 다행이다…… 다행…….” 세령이 네가 여럿인 건 참 좋긴 한데……. 사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리!” 먼발치에서 저를 부르는 다디단 음성이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하나 그는 이길 수 없는 수마에 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잠들었다. * * * 세령은 약방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휘언의 뒤통수에 습관적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더는 피가 묻어 나오지 않는데도 그의 죽음을 확인하게 될 것만 같아서 매번 섬찟하다. 호흡도 안정적이고 잠든 사내의 표정도 평온하였다. 김 의원 말로는 회복도 빠르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이레째 일어나지 않는 연유가 무엇일까. 세령은 그가 슬슬 야속해졌다. “언제까지 주무실 생각입니까? 이러고 또 저를 죄 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서글퍼 세령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날, 휘언이 혼절하자마자 도착한 의금부에 의해 은성호 무리가 붙잡히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나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 휘언 때문에 자신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사내는 절대 모를 것이다. 두려움에 오열하다 저까지 혼절해 버린 것도 모르겠지. 무혁이 아니었더라면 상황 수습도 못 하였을 것이다. 해서 일어나면 욕이라도 한바탕해 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력 없이 누워만 있는 걸 며칠째 보고 있자니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치밀었다. 지금도 또 울 것 같았다. 하여 세령은 사내의 커다란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그 위에 이마를 묻었다.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같이 살자면서요. 제가 온전한 제 공간을 원하니 그리해 주시겠다면서요.” “…….” “저는…… 의탁이 아닌 제 공간이 필요했다기보다, 가족이 있길 바랐던 겁니다. 그 집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애정을 주는 존재가 있길 바랐어요.” “…….” “제 오랜 소망을 이뤄 줄 이는 이제 나리뿐인데, 계속 이리 주무시고 계시면 어찌합니까.” 세령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이 핑 돌아서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이제 다 필요 없습니다. 저를 잊어도 상관없어요. 제가 다 기억나게 해 드릴 터이니 그냥 무사히 눈만 떠 주세요.” 세령은 사내의 손을 살살 어루만지다가 그 위에 다시금 축축해진 눈두덩을 묻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웅얼거리는 혼잣말까지 물기가 묻어났다. “……나리가 다른 갈래로 찢어진대도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어떤 조각이든 다 연모할 거니까.” “…….” “혹여 나를 아주 모르게 되더라도…… 슬프겠지만 괜찮아요. 그 조각 또한 다시 저를 좋아하도록 만들게요. 그러니 이제 그만…….” “음……. 그건 좀 곤란한데.” 세령은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온몸을 굳혔다. 그러자 환청이 아니라는 듯 다정한 음성이 다시금 귓가에 닿았다. “세령아.” 저만 붙들게 될 줄 알았던 손이 느릿하게 세령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찾아 파고들었다. 네가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라는 듯, 손깍지에 힘을 싣기도 하였다. 세령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언제 저를 바라봐 주려나, 고대하였던 눈이 잠기운을 묻힌 채 끔뻑거리며 세령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리? 저, 정말…… 깨어나신 겁니까?” “이게 내 꿈속이 아니라면.” “하면 지금은…….” 세령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방금 막 깨어난 사람에게 어떤 혼인지 묻는 것은 어느 쪽이든 기분이 상할 게 뻔했으므로. 그런데도 휘언은 세령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답해 주었다. “지금의 나는…… 희명군이자 이휘언이지.” “그게 뭐…….” 순간 그의 말이 이해되질 않았던 세령은 멀거니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나리, 서, 설마…….” “기억이 전부 돌아왔다.” “차, 참말입니까?” “왜. 혹 어느 한쪽을 기다린 것이야? 그게 누군데?” “나리!” 앞뒤 잴 것 없이 머리보다 몸이 사내에게 먼저 와락 달려들었다. 세령은 휘언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여 있던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하하…… 기뻐서 이러는 것이 맞지?”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네 일처럼 이리 기뻐하리라곤 생각 못 하였어. 내 잠시 네가 선호하는 쪽을 흉내 내야 하나 고민도 하였는데…….” “그런 말은 농으로라도 하지 마십시오! 어느 쪽이든 전부 제가 좋아하는 나리일 뿐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래도 좀 더 마음 가는 쪽이 있었을 것 아니야. 어느 쪽이었어? 네가 바라던 혼은.” 집요하게 물으며 기다란 눈꼬리를 휘는 모습이 얄궂어 눈물이 쏙 들어갔다. 하여 세령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반격하였다. “제 대답을 듣고 싶으시면 나리 먼저 답해 주세요. 누이 행세를 하던 어린 저와 다 커 버린 지금의 저 중에 누가 더 좋은지를요.” “무어?” <73> 그는 한 방 먹은 듯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더니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부러졌던 갈비뼈에 통증이 왔는지 이내 옆구리를 붙잡고 신음하였다. 그러고는 또 피실피실 실소를 흘린다. “어서요. 골라 보십시오.” “하아, 세령아. 그건 내게 너무 가혹한 처사잖아.” “그리 어려우십니까? 그럼 희명군으로 만났던 저와 휘언으로 만났던 저 중에 고르라면요?” “너무해. 그런 거 말고 그냥 접문이나 해 주면 아니 돼?” “말 돌리지 마시고요.” “접문해 줘, 누이. 휘언이 소원.” 다 큰 사내가, 심지어 저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누이 소리 하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밉지 않고 귀여워 보인다. 연정이란 것은 참으로 답도 없는 감정이었다. “……예서요?” 환자의 투정을 못 이기는 척 들어줄 법도 하였지만, 세령은 멀쩡한 저라도 체면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한발 물러섰다. “응. 나 아픈데. 이런 것도 안 들어주나…….” 휘언이 세령의 손을 당기며 간극을 좁히고 가련하게 쳐다보았다. 되지도 않는 아양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저 또한 그를 향한 마음이 중증인 탓이었다. 그가 청한 대로 순순히 입을 맞출지 잠시 고민하였던 세령은 예가 김 의원의 약방이란 걸 인지하고 몸을 물렸다. “그래도 여기선 조금 그렇습니다.” “호― 해 준다 생각하고. 응?” 칭얼대는 꼴이 좀 많이 어여뻐 하마터면 넘어갈 뻔하였다. 하여 세령은 공연히 큼큼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 그나저나…… 어떻게 혼이 합쳐진 것입니까?”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아니 듣는 건 도화 행세를 할 때와 똑같구나. 뭐, 너그러운 내가 이번에도 넘어가 주어야겠지?” “…….” “은성호 무리에게 머리를 맞으면서 기억이 시끄럽게 엉켰어. 한데 그 와중에도 둘 다 너를 지키고 싶었나 봐. 네가 위험에 처하니 너 나 할 것 없이 네 부름에 눈을 뜨더구나.” “정말 그런 것으로 낫게 되었다고요?” “오죽하였으면 그랬을까. 둘이 있을 땐 온갖 핑계를 대며 내 이름 절대 아니 불러 주었잖아. 한데 남들 앞에선 잘만 부르더구나?” “……정신을 잃으면 영영 죽어 버릴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무례는 널 구해 준 이에게 입도 맞춰 주지 않는 네 고집을 말하는 거고.” “…….” “그리 질색하며 노려보지 마. 양물 설 거 같으니까.” “아잇 좀!” “하하! 아…… 으…….” “자꾸 농담하시니까 이리 아픈 것 아닙니까. 제발 진중하게 좀 계십시오.” “내가 아프다고 끙끙대면, 울어 버릴 거잖아.” “…….” 픽 웃음을 흘리며 중얼대는 말에 코끝이 찡했다. 환자 주제에 대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뭐, 어쨌든 나를 고쳐 줘서 고마워, 세령아.” “……의원님께 해야 할 인사를 잘못하신 거 아닙니까?” “그거 말고 광증 말이야. 너와 떨어진 후부터는 늘 네가 나를 더 찾지 않을까 봐, 나의 과오를 꺼릴까 봐 염려하였거든. 한데 어떤 조각이든 상관없이 너한테 내가 필요하단 걸 느꼈어. 나 또한 어떤 혼이 이 몸을 차지하든 상관없으니 너를 구하고 싶단 생각을 하였고. 그러니 네가 나를 고친 것이나 다름없지.” 온갖 학대로 고단했을 소년이 홀로 달아난 제가 무어라고 그리 마음을 썼을까. 멀쩡한 사내의 혼백을 깨 버린 근본적 원인이 자신이 맞았단 생각에 세령은 되레 속상해졌다. 살아남기 급급하였던 그에게 저까지 마음의 짐을 얹어 준 듯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나 휘언은 원망 한 점 없이 손을 뻗어 와 세령의 그렁그렁한 눈가를 훔쳤다. 뿌옇던 시야가 걷히니 다정한 낯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세령아.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이 울었어?” “……하나도 안 울었습니다.” “거짓말.” “…….” “말하였을 텐데. 네가 거짓말할 때의 얼굴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그런 건 모른 척 좀 해 주세요.” 겸연쩍어 불퉁한 소리를 뱉으니 그가 피시시 웃음을 흘렸다. “이리 와 봐, 세령아.” 휘언은 침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평소처럼 강한 힘으로 당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던 세령은 순순히 침상 위로 올라가 그와 모로 마주 보고 누웠다. 그러나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사내는 세령의 깍지 낀 손에 입을 맞추고 근사하게도 미소 지었다. “난 말이다. 이제 모른 척 아니 할 거다. 앞으로는 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기대와 염려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평생 함께할 거야.” “……평생?” “응. 도성과 멀리 떨어진 고을에 집을 지어 두었어. 경치도 좋고 해도 잘 드는 따뜻한 곳이야. 너와 지낼 날을 상상하며 살림을 하나둘 장만하였는데, 내 멋대로 들인 가구도 많아서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혼인하자, 세령아.” 당황한 세령과 달리 휘언은 일말의 주저함이라곤 없었다. 예전부터 몇 번이고 이 순간을 그려 온 사람처럼. “아, 아니. 나리, 깨어나자마자 대뜸…….” “네가 나의 누이를 자처하였을 때부터 연모하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연심은 속절없이 깊어져만 가서, 너와의 시간을 하루라도 건너뛰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 여생은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 있자.” “…….” “오롯한 우리의 집에서 오순도순 지내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 보자, 나랑.” 세령이 줄곧 바라 왔던 일, 어릴 적 흘러가듯 뱉었던 말을 사내는 아직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약방에 이리 나란히 누워 청혼을 받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하였지만, 되레 그건 사내가 하루도 못 참겠단 말의 방증 같아서 진실로 다가왔다. “세령아. 이제는 의동생 말고, 왕자군 따위나 나리 같은 것도 말고, 네 낭군이 되게 해주면 아니 될까.” “…….” “원래는 멋있게 청혼하려 했는데……. 이리 누워서 볼품없는 고백인 줄 알지만, 산전수전 겪고 나니 하루도 못 미루겠어. 대신, 이 땅의 어떤 여인보다 찬란한 미래를 줄게.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경험해 본 적 없는 모든 좋은 것은 다 네게 안겨 줄 거라 약조할게. 그러니 이제 앙증맞게 다문 입술 좀 열어서 답을 주면 안 될까.” 휘언의 청대로 꾹 물었던 입술을 뗀 세령은 흐어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참았던 눈물이 온갖 감정에 뒤섞여 뚝뚝 흘러내렸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예상 못 한 사내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울음소리에 섞여 웅얼대는 세령의 말을 유심히 듣고는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가엾은 사랑에게 낙원이 될 기회를 준다는데 어찌 손을 내밀지 않으랴. 그는 진작부터 세령의 낙원이었거늘. 의심할 것도 없는 승낙이었다. * * * “탐욕에 눈이 먼 죄인 은성호는 무해한 약을 퍼트렸으며, 무고한 백성을 중독에 이르게 해 민생을 위협하고…… 대역죄는 아니나, 정세를 어지럽혀 그에 준하는 죄를 저질렀기에 장 백 대를…….” “배, 백 대라니! 나더러 맞아 죽으란 소리요? 그건 너무하지 않소! 내가 무에 그리 잘못하였다고! 나는 그저 물건을 구하려는 자들의 수족이었을 뿐이오! 무에 쓰는지도 모른 채 그저 건네주기만 했단 말이오! 아, 그리고 내 잘못이 그리 크다면 묘원각의 기생년과 계집종은 참형에 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락바락 고함치는 성호의 목소리에 금부도사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니 그래도 외부에서 압박을 넣어 오던 사건인지라 대충 처리하기도 찝찝하였던 차인데, 죄인까지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골이 아팠다. 하여 지끈대는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래, 장 백 대는 너무한 것 같군.” “누가 감히…….” 외부인을 들였다는 사실에 짜증이 확 밀려들었던 금부도사가 눈을 부라렸다. 한데 제 여인을 데리고 도성을 떠난 줄 알았던 사내가 추국장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었다. 합죽선으로 하관을 가리고 있어 긴가민가하였던 금부도사는 그가 희명군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희, 희명군을 뵙습니다. 한데 자가께서 어찌…….” “나의 일이기도 한데 어찌 지나치겠나. 한데 듣자 하니, 처사가 부당한 것 같군그래.” 휘언은 묶여 있는 죄인을 내려다보며 너그러운 얼굴을 하였다. “뭣…….” 항의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은성호는 지레 겁을 먹었다. 형벌이 과하다며 역성을 들어 주는데도 불안감이 먼저 엄습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뒤바뀌었다. 제게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혹…… 은세령 그 계집이 나를 봐 달라고 하였나? 그,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내가 저를 키워 준 세월이 얼마인데. 혼례를 치르더래도 집안 어른이 한 명쯤은 필요할 테니 자가께 나를 부탁하였을 거야.’ 그는 제멋대로 세령이 자신을 용서하였으리라 확신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자, 자가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제가 죄를 지은 것은 맞다만, 어디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인사랍니까. 부디 금부도사께 말씀 좀 잘해 주십시오.” “아니 그래도 그러려고 왔네.” <74> 성호는 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붙들었다. 약을 찾던 시절에는 분명 눈길만 스쳐도 머리통을 날려 버릴 것 같은 살기를 지녔었는데, 세령을 만난 후부터는 어딘가 부드러워진 사내였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그러니 제게도 아량을 베풀어 살길을 내어 주리라. “하면 어떤 벌을 내려야 합당한지 자가께 의견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금부도사의 물음에 희명군이 고심하였다. 그 여유롭고 신중한 모습에서 성호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은세령. 키워 준 값을 이렇게도 갚는구나. 기특한 것.’ 영 딴사람이 된 듯한 모습에서 광증도 별 희한하게 오는구나 여겼는데, 세령의 영향이 성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된 듯하다. 해서 그는 얌전히 희명군의 변호를 기다렸다. “같은 약을 유통하였으나 기생 도화는 제 죄를 자백하고 그 무리의 뿌리를 뽑도록 도왔으니 풀려나는 것이 마땅하고. 하인 영선은 사람을 해치려던 고의가 다분하나 약의 효능을 다 알지 못하였으며, 그 횟수가 단 한 번인 데다 죄를 뉘우치는 점을 참작하여 장 열 대를 내렸었지?” “예, 그리하였습니다.” “하면 약의 효능을 명확히 아는 상태로 수백 번 유통한 은성호가 죄를 뉘우치기에 장 백 대는 부족한 듯싶은데.” “……예? 자,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에 그리 잘못하였다고!” 상황이 제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자, 은성호가 뒤늦게 소리쳤다. 그러나 희명군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죄인을 내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죄를 뉘우칠 생각도 없어 보이고.” “……아, 아닛.” “아, 거기다 내가 갖다 바친 죄목은 왜 묻지 않는 것이지? 8년 전 묘원각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쓰인 독, 이자의 무리에서 유통하던 성분이 들어 있지 않았던가?” “아…… 그것이, 시일이 너무 지난 사건인지라…….” 이번에는 금부도사가 쩔쩔맸다. “같은 약을 내가 이자에게 구해 선왕을 시해한 것도 모르는 체할 셈인가? 내 분명 자백하였을 텐데.” “예에?” 알고는 있었지만 대놓고 추국장에서 떠들 줄은 몰랐으므로 금부도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리되면 본인 죄도 만천하에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아니, 선왕은 이미 죽고 새 군주가 그 일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상관이 없는 것인가. 성공한 반역은 혁명이 되는 법이니. “그래, 뭐, 이미 지난 사건까지 끌고 올 필요는 없지. 하나 내 머리통을 깬 죄까지 넘어가는 것인가? 내 반려를 해하려 든 죄는?” 반려란 말을 입에 올릴 땐 진심으로 험악해지는 낯에 금부도사는 기함을 토하였다. 그에게는 역모죄보다도 제 여인 상하게 한 것이 더 심각한 일인가 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 백 대는 너무 너그러운 처사인 듯하네. 당장 찢어 죽여도 모자란데.” 그가 합죽선을 착, 접으며 성호의 목에 들이댔다. 일순 성호는 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줄 착각하고 숨을 들이켰다. 고작 부채일 뿐인데도 살기가 실려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왼손 약지에 끼워 둔 옥가락지 또한 어쩐지 저주라도 실린 듯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크흠, 흠……. 자가께서는 참형을 내려야 마땅하다 여기시는 겁니까.” “참형이라니? 나 그리 매정한 사람 아닐세.” “예? 하면…….” “참형이고 장 백 대고 전부 하루아침에 개죽음이잖나. 이자가 어디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죄인이던가? 내 생각으로는 하루에 열 대씩 백일을 맞게 하고, 백일 동안에는 옥에 가두어 의원을 보이지 않는 게 딱 좋을 듯싶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내가, 내가 세령의 외숙이라는 걸 잊었소? 자가께서 내게 그런 벌을 내렸단 걸 세령이가 알게 되면……!” “그 더러운 입에 감히 누구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냐.” 너그러운 척하던 음성은 사라지고 음산한 기운이 목소리로부터 뻗어 나왔다. 일순 저승사자라도 목도한 것처럼 성호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어디 금부도사가 이야기해 보게. 이게 부당한 처사 같은가? 백일을 참아 인간이 된 웅녀처럼 이 짐승 새끼도 백일은 속죄하여야 인간으로서 이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을 듯한데. 내 말이 틀린 것인가?” 어디 반박할 수 있는 배짱이 있다면 덤벼 보라는 듯 형형한 눈동자가 금부도사를 집어삼켰다. 하여 그는 제 체면도 잊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희명군의 말에 순응하였다. “……합당한 처사라 여겨집니다.” 더 끔찍한 형벌이 들이닥치자, 성호는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말이 옥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준단 뜻이었지, 얻어맞은 둔부는 백일 동안 서서히 썩어 문드러질 것이고 종국에는 합병증까지 불러일으켜 제 목숨을 위협할 게 뻔하였다. 긴 고통이 절로 그려지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어라 항의하려는데, 그보다 희명군의 입이 더 빨랐다. “혹 불평등하다고 여기는가? 아니 그래도 방금 내 머리통을 깼던 다른 동료 놈의 손가락을 마디 하나하나 분질러 주고 온 참이네. 만일 의금부의 형벌이 싫어 죽겠다면 그놈들에게 하였던 것처럼 내가 직접 움직여 줄 수도 있어. 호화로운 귀빈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보호하면서 말이지.”  “…….” “대신 나는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야. 아니 그래도 내 심약한 정인이 놀랄까 봐 손에 피를 묻힌 지 오래되어 몸이 근질근질한 참이거든. 나에 관한 소문은, 알지 않나?” 사내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찢어졌다. 위에서 내리꽂히는 섬뜩한 웃음에 성호는 단전에서부터 밀려드는 공포를 느꼈다. 세령을 만난 후로 사람이 변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완전히 잘못 생각하였다. 그는 여전히 살육에 미친 잔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이걸 깜빡하였군. 혹시 모르니 입에는 꼭 재갈을 물려 주게나. 수틀려서 혀라도 깨물고 한순간에 죽어 버리면, 그래도 외숙인데 내 정인이 슬퍼할지도 모르잖나.” 가증스럽게 애처가의 면모를 드러냈지만, 절대 성호를 쉬이 죽도록 두진 않겠단 뜻이었다. 사나운 금수를 대면한 초식동물처럼 얼어붙은 성호는 결국 거기서 단 한 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관군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저도 모르게 바지를 적셨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이를 지켜보던 추국장의 모든 이들은 사내가 제 짝을 만나 도성에서 멀리 떠났단 사실을 매우 감사히 여기며 몸을 떨었다. 하나 그곳에 있던 이들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아침, 세령으로부터 새 가락지를 선물 받아 휘언이 몹시도 기쁜 상태였다는 것을. * * * “세령아―” 당장에라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음성에, 세령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이곳이 도성의 약방이란 것을 깨닫고 큼큼 헛기침하며 표정을 갈무리하였지만. “나리, 오셨습니까?” “응.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희명군의 등장에 약방은 일순 얼어붙었지만, 제 여인 앞에서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고 환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숙덕거리는 것도 잊은 듯하였다. 다들 두 사람을 주시하는 듯 고요하였다. 해서 세령은 되레 더 눈치가 보였다. “아휴…… 떨어진 지 두 시진도 아니 되었는데요.” “두 시진? 그럴 리가. 내게는 꼭 일삭처럼 느껴졌단 말이다. 한데, 몸은 어떻다던?” “괜찮다고 하십니다. 독은 진작 다 빠졌고 아픈 곳 없이 건강하대요.” “다행이다.” 휘언이 나긋하게 미소 지으며 세령의 손등을 끌어다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은 세령의 약지에는 제 것과 똑같은 옥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일부러 과시하고 싶어 그런 줄은 알지만,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도 접촉이 서슴없었다. 마치 그의 눈엔 세령만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니 민망함은 세령의 몫이었다. “나, 나리. 밖에서는 자중하십시오.” “왜?”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요…….” 휘언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흐음. 참 이상하네. 오늘 아침엔 배복들 앞에서 내 뺨에 입을 맞춰 주었잖아. 심지어 예는 실내이고 거긴 마당이었으니 오히려 그게 밖이…….” “나, 나리!” “허헛, 하하하핫!” 막 환자를 돌보고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목도한 김 의원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세령의 낯은 산수유 열매처럼 벌겋게 익었다. 휘언은 그런 세령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뜨거워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공연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움츠리니, 그가 가까이 다가와 제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얼굴은 왜 그리 붉혀. 밖에서 진짜 못 볼 꼴 보고 싶어서 그래?” <75> ㅬ 그가 눈짓으로 제 바지춤을 가리켰다. 두루마기에 다행히 가려져 있었지만,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자연히 상상되었다. “…….” “더 빨개지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호색한.” “나리가 먼저……!” “하하.” 말갛게 웃는 모습에 약방 안 사람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하여도 두려웠던 존재라, 저렇게나 수려한 외양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눈길이 제 여인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어찌 변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므로 다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주었다. 공연히 방해하였다가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연인이 아옹다옹하는 동안 약방의 환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김 의원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러다가 장사 망하겠습니다. 뭐, 때맞춰 잘 온 듯하니 이리 앉으시지요. 온 김에 진맥이나 봅시다.” “진맥 보아 무얼 하나.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아픈 곳 하나 없네.” “그러다 요절하는 수가 있습니다. 미리미리 대비하여 나쁠 것 없지요. 세령이와 오래 살려면 더더욱.” 세령뿐 아니라 김 의원도 휘언을 다루는 데 도가 튼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휘언은 잠자코 환자용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저 외에 다른 이에게 고분고분 구는 걸 처음 본 터라, 세령은 설핏 웃으며 그의 곁에 앉았다. “의원님. 한데 말입니다. 혼이 다시 나뉠 수도 있을까요?” 맥을 짚고 몸 구석구석 살피는 걸 가만 지켜보던 세령은 불쑥 그가 앓았던 병에 대해 궁금해져 물었다. “혹 그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적 있으십니까?” “전혀. 기억 소실 또한 없었네.” “음. 아직은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게 아니라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합니다. 작금의 모습으로는 갈라졌던 혼이 자리를 잘 잡은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리 곁에는 명의가 있지 않습니까.” 김 의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세령을 바라보았다. 휘언 또한 그를 따라 제 정인에게 시선을 보내더니 픽 웃었다. “그래. 내 집에는 세상에 둘도 없는 명의가 있어 걱정 같은 거 안 한다네. 그러니 그만 조몰락거리고 놔줄 수 없겠나?” 안 그래도 점점 여기저기 더듬기에 불쾌해진 사내는 의원의 손을 멋대로 털어 버렸다. 제 몸을 이리 쓰다듬을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라는 듯, 곧장 세령에게 찰싹 들러붙기까지 하였다. 김 의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허헛, 웃음을 흘렸다. 제가 아끼는 아이를 저리 좋아하는 이가 있단 건 다행인 일이지만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의원님. 맥은 어떤가요? 나리 몸에 이상은 없나요?” “세령아. 이런 거 아니 해도 튼튼해 보이지 않아? 나를 대체 얼마나 나약하게 보는 것이야?” “겉은 그래 보여도 속은 상하였을지 어찌 압니까.” “왜 몰라.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 주고 있는…….” “아잇, 나리!” 한 마디를 지나치지 않고 장난 짓이라, 세령이 그의 단단한 팔뚝을 밀쳤다. 물론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김 의원은 세령을 쥐락펴락하는 휘언이 공연히 괘씸해져서, 진맥 결과를 말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였다. 그렇지만 대답을 늦추니 세령이 염려 가득한 얼굴을 하였다. “왜 말씀을 미루십니까? 혹……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지요?” “병은 아니고…….” 세령이 걱정하니, 휘언 또한 게서 더 농지거리할 수 없던 모양이었다. 덩달아 진지한 낯이 되었다. “병이 아니면. 뭐가 있긴 한 건가?” “음. 제 기억이 맞다면, 나리께선 독에 장시간 노출되어 생식 기능이 없어졌다고 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네.” “일전에 부러진 곳을 치료할 때도 긴가민가하긴 하였습니다만…….” 조심스레 상태를 털어놓는데, 휘언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알아듣지 못하겠단 얼굴이었다. 기어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기능을 아예 잃은 건 아닌 듯합니다.” “……뭐?” “그간 꽤 오래 약을 끊으셨으니 어쩌면 억눌려 있던 기가 되살아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내가 불구가 아니란 말이지?” “예.” “허…….” 휘언도 세령도 놀란 얼굴이었다. 둘 다 넋이 나가서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김 의원은 뜻밖의 소식에 혼란스러워하는 젊은 연인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상기된 낯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서로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할지 모르니 반응을 고심하는 얼굴들이었다. 한데 세령은 그렇다 쳐도 휘언까지 저런 표정이라니. 그리 능청을 떨어도 여전히 제 여인의 속내에 전전긍긍하는 게 여지없는 보통의 사내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고 싶었지만, 이곳은 제 약방이었다. 하여 김 의원은 둘을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자, 자. 이제 다른 이들도 돌봐야 하니 나가 보십시오! 희명군이 예 떡하니 자리하고 있으니 아픈 환자들이 밖에서 서성이지 않습니까.” “어어…… 알겠네. 가자, 세령아.” 건방진 축객령인데도 휘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세령의 손을 붙잡고 약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김 의원은 또다시 박장대소를 터뜨렸는데, 진맥 결과에 정신이 팔려 그조차도 듣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 “…….” 세령과 휘언은 말을 타고 이사 간 고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실 세령은 재회하고 얼마 안 되어 휘언의 몸 상태를 알게 되었으므로 아이에 대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닮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어떨까. 잘은 모르지만 외양은 무조건 특출날 듯하였다. 어릴 적 그 소년은 사내를 모르던 세령의 시선을 모조리 사로잡았을 정도였으니. 그렇지만 휘언 또한 제 아이를 갖고 싶어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게는 세상 둘도 없는 완벽한 사내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 다 아비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으니 휘언은 기꺼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리.” “으응?” “저는 다 괜찮습니다.” “……무엇이?” “아이가 생겨도,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 깍지를 낀 사내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러니 나리가 하고 싶으신 대로…….” “세령아.” 그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세령의 몸을 돌려 마주 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어쩐지 긴장되어서, 세령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야말로 진짜 원하는 걸 말해 봐.” “……네?” “만약에,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제 생각을 말해도 괜찮은 걸까. 혹여 사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어 세령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속내를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배려한답시고 하였던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저는…… 예쁠 것 같아요. 나리를 닮았으면요.” “……걱정되지 않아? 나 또한 너를 닮은 아이라면 미치도록 사랑스러울 것 같지만, 내가 좋은 아비가 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누구나 처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리한테 제가 있고, 저한테는 나리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나리가 내킬 때 가졌으면 해요. 저도 나리도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니,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 진심을 표하기 위해 빙긋 웃으며 읊조리니, 휘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그는 세령의 두 손을 끌어당겨 품에 꼭 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내키지 않을 리가 없잖아.” “……참말입니까?” “난 혼이 불안정할 때도 네게 혹을 달고 싶단 생각까지 한 음침한 놈인걸.” “…….”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세령의 말문이 막혔다. 진작 우리 아이를 갖고 싶었단 뜻이긴 하였지만, 어째 좀 표현이 망측하였다. “색시야. 오늘부터 밤낮없이 바쁘겠다. 저녁엔 씨암탉이라도 잡아 달라 할까?” “네에? 나리!” “하하하.” 이번엔 넘어가나 하였더니 또 농지거리였다. 세령이 낯부끄러워 그를 밀치니,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허리를 더 당겨 안으며 얼굴 군데군데 쪽쪽 입술을 붙여 댔다. “한데 세령아. 농 아니야.” “……네?” “네가 선물해 준 가락지, 오늘 써야지.” 하도 졸라 대기에 두 사람의 가락지를 맞추면서 제작한 은밀한 가락지. 손에 낀 것도 좋아하였지만, 그걸 받고 더 상기되었던 아침의 얼굴이 떠올랐던 세령은 하얗게 질렸다. 오늘 밤이 얼마나 길지 예상되어서.     <가락지놀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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