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15화
#15
‘정말 아름다우세요.’
‘너만 할까.’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세요.’
스타테이라의 머리를 다듬어 주던 난나가 시선을 떨어트리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밝은 금발이 여느 귀한 가문의 영애들과 달리 물결처럼 고부라지지 않고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장미유를 발라 촘촘하게 땋아 금과 에메랄드로 월계수 이파리를 흉내 낸 장신구를 꽂아 주니 이럭저럭 볼만한 모양이 되었다.
비록 스타테이라의 마음에 들어차지는 않겠지만. 난나는 조금 더 머리 다듬는 솜씨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방긋 웃어 보였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정말로 아름다우세요.’
‘……그래.’
스타테이라가 따라 웃었다. 평소처럼 새파란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웃음은 아니었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겠지. 난나는 그녀의 마음이 울적한 이유를 알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얼마 전부터 에버하르트 공작과 그녀의 약혼자인 황제가 다투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듣긴 했으나 난나는 정치적인 사정뿐만 아니라 세상일에 어두운 여자였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그저 근래 들어 스타테이라의 심기가 편하지 않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밤잠을 다 못 이루실까. 하긴 결혼식까지 늦춰지고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대관식도 취소될지 몰라.’
그리 말하는 하녀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혼약이 깨질지도 모르겠다고. 새로운 황제에겐 약혼녀보다 중요한 게 천지로 널렸으니까.
그러나 난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타테이라의 약혼자가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보는지 하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시선을 제대로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하니까. 실은 난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미천한 신분이라 시녀라고 해도 귀족 신분의 시녀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주인의 약혼자가 그녀의 처소에 행차하면 그녀는 다른 시녀들과 달리 늘 한 걸음 물러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평민 신분은 감히 허락 없이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타테이라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아버지는 내일 돌아오신다고 했지?’
자리에서 일어난 스타테이라가 난나를 향해 물었다. 난나는 영지 시찰을 나간 에버하르트 공작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안겼던 밤이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사타구니 사이가 쓰렸다.
‘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아픔을 삼키며 대답했다. 문득 거울 속에 자신을 살피던 스타테이라가 난나를 돌아보며 ‘고마워, 난나.’ 하고 말했다. 시선을 바닥에 두던 난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난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자신이 에버하르트 공작의 시침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스타테이라는 어떤 표정을 할까. 그러니까 자매처럼 아낀다고 말하던 시녀가 아버지와 동침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는 자주 난나에게 ‘너는 나의 자매와 같은 친구’라고 말했다. 난나는 사실 자신이 그녀의 자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시녀가 주인을 그처럼 아낄 수도 있다고 들었으나 주인이 시녀를 그만큼 아끼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난나는 그녀의 다른 시녀들과 달리 무척이나 미천한 신분이다. 스타테이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매음굴에서 창부로 썩어 갈 팔자였다. 그러니…….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같지 않았을 거야.’
‘네?’
‘너는 늘 나를 아름답다고 하잖아.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카를의 옆에 서기에 부족하다는 걸.’
‘그렇지 않아요.’
난나는 도리질했다. 스타테이라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궁정에 그림 같은 여자들을 두고 그녀를 비교하여도 스타테이라는 그리 미흡하지 않았다. 그저 스타테이라가 자신을 꾸미는 데 솜씨가 조금 부족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치장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그녀는 건강이 회복되던 성장기부터 꾸준히 외부 활동을 했었다. 보통의 아버지와 달랐던 에버하르트 공작은 그런 딸의 유다른 면모를 자랑스러워하면 자랑스러워했지, 결코 나무라지 않았다.
덕분에 스타테이라는 귀족 처녀의 신분으로 승마며, 사냥이며, 제 약혼자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어울렸다. 그녀의 약혼자 역시 그녀의 남다른 면모를 사랑했다. 하긴 그는 전쟁터에 갑옷을 입고 등장한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으니까.
구제국의 황제를 처단하기 위해 직접 칼을 뽑아 들어 그에게 내밀지 않았나. 난나는 효수된 황제의 목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 그 아래를 지나갈 때면 늘 시선을 바닥에 박고 구역감을 참으며 걸어갔는데, 스타테이라는 잘린 목을 빤히 쳐다보더니 직접 성벽에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여자였다. 그 자그마한 몸이 안타까울 만큼 용맹한 아가씨였고. 과연 황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런 스타테이라가 황후가 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황후가 된다는 말인가.
‘아가씨.’
‘사람들은 벨라르데 가문의 독녀가 카를의 아내가 될 거라고 말해.’
벨라르데 가문은 3년 전 알라타이아 회전 당시 에버하르트 공작과 손을 잡은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에버하르트 공작 가문이나 혹은 새로운 황가가 된 카디스 가문은 구제국을 통틀어 가장 오래되고 강대한 가문 중의 하나였다. 근래 들어 황제와 공작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돌아 정말로 그리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벨라르데 가문의 독녀가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확신하니?’
스타테이라가 물었다. 난나는 마른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리 물어보았자 자신 같은 천치는 답할 수 있는 게 없음에도 스타테이라는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나름의 근거를 갖고 논리적으로 대답해 주길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뻔한 말이라도 듣고 싶나. 모르겠다. 난나는 황제를 생각했다.
스타테이라의 약혼자는 재작년 황제가 되었다. 구제국. 그러니까 부패했던 귈란 제국은 새로운 황제의 손에 멸망했다. 그는 직접 구제국의 황제를 처형했다. 친히 목을 베었고 그 목을 제 약혼녀의 말대로 성벽에 매달았다. 황후를 비롯한 황제의 총비들과 황자들 역시 나란히 효수되어 성벽에 매달렸다.
그를 벼랑 끝에서도 감쌌던 이들은 모조리 남김없이 처형되었다. 처형되기 전 백성들을 돌팔매질에 죽었다는 이들도 무수했다. 난나는 그 참혹한 현장을 잊지 못했다. 스타테이라는 그들은 그런 짓을 당해도 괜찮을 만큼 부패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나 같은 여자의 눈에는 그들이나 에버하르트 공작 같은 귀족이나 매한가지로 두렵고 어려운 귀족들이었다.
대체 무엇이 부패이고 당연한 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값비싼 보석을 걸쳤을 때 스타테이라나 그녀의 약혼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번쩍거리는 금과 진주, 청옥을 깎아 만든 보석들로 가슴과 머리를 치장하지 않았나. 그래도 다르다면 다른 거겠지. 난나는 애써 그 현장을 잊으려 노력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문득 황제가 떠올랐다. 그가 스타테이라를 쳐다보던 눈빛. 한없이 냉혹하고 가혹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볼 때만큼은 다정했다. 하염없이 따뜻하며 선량했다. 그러니까 황후가 되는 것은 스타테이라였다.
‘……폐하께선 아가씨를 사랑하시니까요.’
난나는 정치적인 이유 같은 것은 몰랐다. 그녀는 알지 못하는 게 많았다.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던 하인들도 있다던데. 난나는 직접 스타테이라가 글을 가르치기 전까지는 문맹이었다. 그러니 아둔하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래도 황제가 스타테이라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눈빛을 보면 모를 수 없었다. 그러니 둘은 결혼하여 서로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부부가 될 것이다.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난나는 스타테이라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사랑하시는 건 아가씨밖에 없으세요. 그러니까 불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
스타테이라가 픽 웃었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난나는 가만한 시선으로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문득 문밖에서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