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91화
#91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화가 난 게 아니야.”
“…….”
“사실은 느끼고 있었어. 너는 난나만 보면 좆을 세우니까. 그런 게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네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으니까.”
테아가 조금 웃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정말 우습기라도 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오레스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테아는 다시 일그러지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거나,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매달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오레스터.”
“너를 폐하거나 쫓아낼 일은 없을 거야.”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알고 있지 않아?”
테아는 노여움을 짓씹어 삼켰다. 사실은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았다. 태후는 매번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 깊은 마음을 갖고 있으니 연금술을 써서까지 그녀의 죽음을 막고자 한 것이라고.
그러나 태후가 틀렸다. 오레스터는 그저 이기적이고, 뒤틀린 성애를 품고 있는 남자일 뿐이다. 난나를 향한 그 마음조차 순수한 사랑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여 테아는 난나가 부럽지 않았다. 질투심이 들다가도, 이렇게 부서진 여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 비정상적인 성애의 대상이 되어 오레스터에게 갈망 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적어도 자신은 저만큼 내몰리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난나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무엇일까. 오레스터가 선심 쓰는 척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테아가 필요했다. 그녀가 필요하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진심이겠지.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테아는 비죽 웃었다. 어쩌면 그리 긴 시간, 자신을 재워둔 것 역시 정치적인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겠지. 지금도 그랬다. 황후의 위에서 그녀를 폐하고 나면 그 역시 곤란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시 난나를 황후로 복귀시키는 것도 어려운 상황인 데다 황후의 위를 비워두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니 테아는 제 신변이나 안전에 관해서 불안해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사과해.”
“…….”
“우리의 지난 모든 것들에 대해 용서를 구해.”
테아는 넘실거리는 감정을 차근히 누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다행히도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테아 역시 그에게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애나, 비통함. 혹은 미련 같은 것……. 이 따위 뒤틀린 괴물에게 쏟을 마음 같은 것은 진즉 작살 내버렸으니까.
그러나 사과는 받아야 했다. 그녀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기만하고 농락한 것에 관해. 그들을 결속시켰던 그 모든 시간과 세월에 관해……. 오레스터는 그녀를 길게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바닥에 눕혔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미안해.”
* * *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을까. 난나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도무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현실이 아득했다. 여전히 꿈결을 헤매는 것 같았고……. 그래서 말라붙은 목에 물을 흘려 넣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난나는 멍하니, 움직이지 않고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맥이 뛰는 목을 더듬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게 맞았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녀는 살아 있었다. 제릭스는 그녀를 떠났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남녀가 요란하게 붙어먹던 침실을 떠나 제 처소로 그녀를 데려온 황제는 그녀를 침상 끄트머리에 앉혀 두고 머리를 차분히 쓸었다.
‘보았지?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
‘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일은 없어. 제릭스 로투시는 자신이 품었던 여자와 살아가게 될 거야. 네가 내 아이를 품은 것처럼, 그 여자를 임신시킬 거다. 그리고 어느 아이의 아버지가 되겠지.’
‘…….’
‘난나.’
그가 난나의 이름을 속삭였다. 난나는 그가 하는 말을 차분히 들었다. 이상하게도 맥이 고요했다. 그녀는 일그러지지 않았다. 찢어질 것처럼 울음을 터트리거나, 그에게 매달리는 일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를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오레스터의 짓이었다. 제릭스를 그렇게 만든 것도.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사실은 죽이는 데 실패해서 그런 걸까.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난나와 그를 떨어트려 놓은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그의 수작이라고 한들, 제릭스가 다른 여자를 품었고, 그 여자와 아이를 만들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레스터가 그것을 원하니까. 어쩌면 훗날 난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겠지.
난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꾸만 제릭스의 벗은 몸이 떠올랐다. 근육으로 울퉁불퉁한……. 그녀가 사랑했던 몸. 다정하고, 따뜻했던……. 정중했던 손길. 말간 웃음과 넉넉하고 따뜻한 품. 난나는 그 모든 것을 잃었다.
뿌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졌다. 피가 식었다. 오레스터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난나는 결코 그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부인?”
문득 물 주전자를 가져다 놓기 위해 침소를 찾은 하녀가 눈을 뜬 난나를 보았다. 그녀가 빠르게 다가와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물을 좀 드릴까요?”
하녀가 빠르게 물었다. 난나는 시선을 돌려 물 주전자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가 물을 따라 그녀의 입술에 대 주었다. 목을 축인 난나는 밝아지고 있는 하늘을 보다가 커튼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에요. 폐하께…….”
“혼자 있고 싶은데 그만 나가 주겠어?”
“아. 네.”
하녀가 잠시 멈칫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난나는 침소를 나간 하녀의 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후 일어났다. 창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커튼을 만지작거렸다.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난나가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 그녀는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잘못한 것은 없었다. 살면서 나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고통을 겪을 만큼. 이 모든 것을 견뎌내야 하는 만큼 악한 짓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다. 누구를 다치게 하거나, 살해하거나, 폭언을 퍼부어 마음의 상처를 입힌 적도 없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커튼 자락을 쓰다듬었다. 커튼은 아주 화려한 직조물이었다. 쉽게 끊어지지는 않겠지. 난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잘못이 없었다. 원해서 가진 적도 없었지만 아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해서 난나의 배속에 자리 잡은 것도 아니겠지.
‘가여운 것.’
딱하고 안쓰러운 것. 그럼에도 난나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제는 품고 있는 것도 지겨웠다. 넌더리가 나고 어떨 때는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제릭스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도 괜찮다며, 저로 인해 불러온 배가 아니라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사랑스럽고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우리가 기르면 좋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좋은 아빠가 되어 줄 수 있을 텐데. 가끔은 그렇게 말했었다. 난나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가 좋았다.
제릭스가 아이를 그렇게 사랑해 준다면 자신 역시 그렇게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지. 그렇게 될 수는 없지.
오레스터는 제릭스가 자신이 그녀를 임신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여자에게 아기를 가지게 할 거라고 했다.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게 할 거라고. 남의 아이를 갈취하지 못하도록.
‘자기 여자를 만들어 주면 그럴 생각은 들지 않겠지. 안 그래?’
오레스터는 조악하게 웃었다. 눈두덩이 잘게 떨렸다. 난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품는 남자를 다시 생각했다. 그에게도 사타구니 사이 물건이 있어, 여체를 꿰뚫는 일이란 특별한 일도 아니라지만, 그가 그런 방식으로 여자를 안을 줄 아는 남자라는 것은 그때야 알았다.
난나에겐 언제나 조심스러워서. 그러니까 그녀의 몸을 만지고 포옹하는 것도 쉽게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아기를 낳고 나면, 언제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녀는 커튼을 움켜잡은 채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릭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도 잃어버렸으니까. 그러니 배반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난나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캄캄한 머릿속에 아득한 외침이 울렸다.
그래. 돌이킬 수 없었다. 제릭스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는 것은……. 그 여자와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은 오레스터의 뜻이니까. 그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난나가 돌아갈 곳은 전부 부숴버리겠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옆에 머물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피가 천천히 식었다. 난나는 커튼을 움켜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