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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라치아의 마력석


Chapter 3. 라치아의 마력석 겨울이 오고 있다. 9월이라면 슬슬 기온이 떨어지며 가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겠지만, 라치아에서 9월은 웃옷을 챙겨야 하는 계절이다. 10월이 되면 모든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 11월이 되면 본격적인 겨울에 돌입한다. 그리고 4월까지 겨울 속에 푹 파묻혀 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풍기와 전기장판이 꼭 필요해!’ 마법사가 지은 아름다운 저택이라고 해도 돌은 돌. 춥기는 어마어마하게 춥다. 여기에 와서 적응하기 어려운 게 바로 난방이었다. 벽난로는 근처만 따뜻하고 방 전체를 데워 주지 않는다. 침대 속에 따뜻한 물주머니를 넣으면 좀 낫지만, 그래도 그뿐. ‘올겨울은 전기장판과 함께 보낼 거야!’ 그리고 이걸 전 제국에 히트시켜 주겠어! 그런 야심을 품는데 가볍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누군지 묻지도 않으시고요.” 유스타프가 들어오며 말해서 란은 씩 웃었다. “어쩐지 유스 같아서.” “저 같았다고요?” “저녁 먹고 나서 날 찾을 사람이 뭐 더 있어야지.” 그 말에 유스타프는 잠시 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유스가 전하는 거야?” 손님이 왔다는 말을 전할 시종도 많구만. “좀 특별한 손님이라서요.” 유스의 말에 란이 고개가 더 기울었다. “특별한 손님? 누군데? 황제 폐하라도 오신 거야?” “아니오.” 독특한 억양으로 그렇게 말하며 유스타프의 뒤에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들어왔다. 유스타프는 란을 등 뒤로 두며 비켜섰다. 남자가 후드를 뒤로 젖히자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가 뾰족하다. 엘프! 짙푸른 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자른 엘프가 당당히 서 있었다. “날 불렀다고 들었소만?” “네, 제가 불렀어요.” “그리고 이것도 그쪽이 보낸 거고.” 엘프가 뭔가를 틱 퉁기는 걸 유스타프가 중간에서 낚아챈 다음 란에게 보여 주었다. 붉은색 마력석. 란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렇지, 입질이 왔구나. “네, 그건 제가 보낸 겁니다.” “어디서 난 거지?” “제가 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엘프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란은 허리를 쭉 펴며 말했다. “저는 대등하게 이야기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레쉬.” 남자의 말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 엘프어인가? 아니면― ‘아하.’ “란 로미아 드 라치아라고 합니다. 그냥 란이라고 불러 주시면 되지요. 저도 그냥 하레쉬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녀의 말에 하레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힐끗 유스타프를 보니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단지 붉은색 마력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만 빼면. ‘아이고, 아직 얘기 못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알려 줄 변명을 생각하다가 결국 생각해내지 못해서 미뤘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식도 없이 불시에 엘프가 나타날 줄이야. 란은 마음속으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건 라치아 공작가의 독자적인 무역이다. 마력석 채굴은 하지만, 마력석의 판매는 골든로즈 상단에 맡기게 될 터였다. 라치아 공작가는 전 대륙으로 뻗어 나갈 망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과의 교류는 다르다. 란은 라치아 공작가 안에서 작은 상단을 만들어 직접 그런 고급 물품들을 거래할 작정이었다. 그거라면 판매할 대상 역시 귀족들이라고 정해져 있으니, 대상단 같은 규모가 필요하지 않다. 이게 그 첫걸음이 될 터였다. “앉으세요, 하레쉬. 차를 드시겠어요?” “물이면 된다. 인간의 차는 질이 떨어져.” 그 말에 란은 웃음을 꾹 참고 유스타프를 보았다. 그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살짝 풀려 있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말한다. 즉, 사근사근하게 영업을 하는 상인적 마인드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쪽도 거래하기가 훨씬 더 쉽지요. 란은 싱긋 웃었다. ✥✥✥ 하레쉬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눈앞의 작은 인간 소녀는 생각보다도 훨씬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초는 우리도 만드는 양에 한계가 있고―”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수의 일부로 만드는 연고를 넣어주신다면, 다른 약의 열 배를 쳐 드린다는 겁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1년에 열 개밖에 만들지 않지만, 쓸 일이 없어서 쌓여 있잖습니까? 유용한 마력석과 교환해 버려요. 어차피 기간이 지나면 효력도 떨어지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그리고 물론 엘프 세공품도 받습니다. 목재를 다루는 기술은 아무도 엘프를 따라갈 수가 없지요.” 하레쉬는 기가 찼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거침없는 만큼 틀린 곳도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지나친 것을 요구했다면, 그는 말없이 이 테이블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란은 억지를 쓰는 것도 아니고 겉보기에만 반지르르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합당한 제의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왜 말려들어 간다는 기분이 드는 거지?’ 하레쉬는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세우며 몸을 뒤로 살짝 뺐다. 그 모습을 보고 란은 말을 멈췄다. 하레쉬가 잠시 숨을 내쉴 틈을 준 다음 란은 쐐기를 박았다. “저희는 드워프와도 거래할 생각입니다.” “그 땅딸보들과?” 노골적으로 콧잔등을 찡그리며 하는 말을 란이 정정했다. “듬직하다고 하는 거죠.” 하레쉬는 기가 차서 하,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드워프와 거래를 한다고? “그들에게도 마력석을 보낼 생각인가? 하지만 그들과 우리의 마법 체계는 또 달라. 같은 마력석으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파란 마력석도 있는 거랍니다. 하레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란이 담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프와 드워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쪽의 교류가 필요하지 않은가요? 절 가운데에 끼면 편하게 교류하실 수 있지요.” “…….” 하레쉬가 팔짱을 끼고 란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란은 어디까지나 생글생글 웃는 상인의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 거래는 그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공작가 사재(私財)를 이걸로 만들 거야.’ 마력석으로 큰돈을 벌 것이다. 그리고 그거 말고도 란은 하나 더 돈 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지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혹여나 영지에서 쫓겨나거나, 영지를 떠나게 되면 자금줄은 순식간에 막혀 버린다. ‘게다가 영지에서 나오는 재산은 전부 세금을 내야 하니까.’ 마력석만 해도 본격적 판매가 들어가면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기존 마력석 광산과 같은 세금 비율을 적용한다고 해도 상당 금액을 제국에 바치게 된다. 하지만 삼각무역은 다르다. 란이 주목하는 것은 마력석 그 자체를 엘프나 드워프에게 파는 게 아니었다. 그들과는 상거래를 트는 것 자체가 어렵다. 두 종족이 자급자족을 하고 있다는 것보다도, 그들이 인간을 불신하고 있는 게 상거래를 가로막는 제일 큰 문제였다. ‘마력석을 파는 건 시작으로도 충분해. 중요한 건 인간, 드워프, 엘프 사이의 삼각무역―아니 사각인가. 하여간 그거인 거지.’ 이거라면 영지를 떠나서도, 무슨 일이 생겨도 라치아 가주에게 소속되어 있는 재산이 생기는 거다. 말 그대로 개인 재산이었다. 물론 이 시대야 영지 돈=공작 돈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계는 명확히 존재했다. ‘어쨌든 가주에게만 한정 상속이 되니까.’ 장남이 아닌 다른 자에게는 돈 한 푼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 재산은 다르다. 얼마든지 개인적인 용도로 쓸 수가 있다. ‘그 사재를 탕진하고 땅을 담보로 한 사람이 바로 전 공작이지만.’ 그래서 란은 따로 라치아 가주를 위해 개인 재산을 마련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회계관의 결재 없이 공작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주머니가 필요하다 이거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분명 말이 나올 거다. 일하지 않는 게 유한계급의 미덕이니 말이다. ‘그러니 적당히 누군가를 대표로 세워서 눈 가리고 아웅을 해야겠지만…….’ 하여간 딴 주머니! 돈주머니! 중요하다고. 제발 하겠다고 해 줘. 마이너스 내탕금을 어떻게든 플러스로 돌려놔야지 내 용돈도 나올 거 아냐? 마력석 필요하지? 필요하잖아? 란의 필사적인 마음이 통한 것인지 하레쉬는 팔짱을 풀고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물론입니다. 돌아가서 장로분들과 상담해 주십시오.” “그러지.” 대답하고 하레쉬는 비딱하게 물었다. “그래서? 진료비는 마력석으로 치르는 건가? 환자는?” “아, 환자는 제 가신의 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 늦었으니, 소식을 보내고 내일 찾아가도 될까요?” “찾아간다고?” “그야 환자니까요. 움직이게 할 수는 없지요.” 란의 말에 하레쉬는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이 따라 일어나며 “묵으실 곳은―” 하고 말을 꺼내는데 그가 대꾸했다. “인간의 집은 답답해서 싫다. 내일 동트면 다시 오지.” “네, 부디.” 라치아 영지의 숲을 즐겨 주세요.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휭 사라져 버린 하레쉬를 마음속으로 배웅하고 방문을 닫았다. 달칵. 돌아서니 유스타프가 테이블 위에 붉은 마력석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가 눈을 들어 란을 바라보았다. “그럼 설명을 좀 들어 볼까요? 누님.” “어, 음. 그러니까, 어― 요즘 린드버그 남작은 잠잠해?” 정말로 뜬금없는 말 돌리기에도 유스타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말씀 안 드렸나요? 얼마 전에 로비가 죽었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뭐?!” 정말로 깜짝 놀라 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유스타프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영지에서 추방당하더니 어딘가에서 도박하다가 싸움에라도 휘말린 거겠죠. 성기가 잘리고 목이 끊겨 죽었다던데요.” “으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란은 눈을 찡그렸다. 저절로 몸이 떨렸다. 그런 이야기를 태연자약하게 하는 유스타프가 대단해 보였다. “자업자득이죠.”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의자 등받이를 잡아 빼며 고갯짓을 했고 란은 느릿하게 걸어가 그가 빼 준 의자에 순순히 앉았다. “그렇게 죽다니, 가문의 수치 아닙니까. 그래서 숙부님께도 따로 연통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드디어 수치라는 걸 이해해 주신 듯하군요. 잠잠해진 걸 보니까요.” 어째 등에 식은땀이 흘러서 란은 고개를 꼬아 유스타프를 올려다보았다. “숙부님도 만났었어? 언제?” “글쎄요.”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맞은편으로 돌아가서 앉았다.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않으실 테니 잘되었지요.” “정말로 그럴까? 아들이 죽어서 더 날뛰게 되는 거 아냐?” “그래 줘도 고맙고요.” 유스타프의 대답에 란은 “그렇군.”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유스타프를 보았고, 그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마력석을 쿡 찌르듯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뭡니까?” “마력석입니다.” “방금 그 엘프는 뭐고요?” “그건―” 란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하다가 일단 붉은 마력석과 푸른 마력석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것 때문에 마법사가 라치아에 출입 금지라고요?” “그래.” “이걸로 이종족과 거래를 하신다고요?” “응.” “누님.” “응?” “어떻게 아느냐, 라는 질문은 미뤄두겠습니다. 그런데 저라면 이걸 어떻게 썼을지 아십니까?” 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타프가 손끝으로 피처럼 붉은 돌을 굴리며 말했다. “마법사를 공격하는 데 쓸 겁니다.” 팔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유스타프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위협하는 무기가 되겠지요. 마법사 근처에만 던져도, 마법사를 폐인으로 만드는 무기가.” “어, 음.” “누님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지요.” “어…….”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전쟁이 흔하지 않은 세계에서 왔기 때문일까? 물론 아프리카나 다른 내전이 많은 나라가 있다는 건 알고 있고, 당장에 한국 역시 휴전국이지만 그래도 전쟁을 경험한 건 아니었다. 유스타프가 느릿하게 말했다. “마법사는 전쟁의 양상을 바꿨고, 이것 역시 그렇게 될 겁니다.” “그걸 원한 건 아닌데.” 란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자, 유스타프가 느긋한 얼굴로 상체를 뒤로 붙이며 말했다. “하지만 마법사에게 위험하다는 건 알고 계셨지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일단 이 마력석은 비밀로 할 생각이었어. 그리고 마법사 협회에 사람을 보내서 이 마력석의 위험성에 대해서 알리려고 했고. 어차피 인간의 마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으니까, 불량품이라고 해서 따로 수집한 다음 이종족 거래용으로 쓰려고 했지.” 란의 설명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겠군요.” “그래?” “네. 마법사 협회 쪽에서는 누님의 제의가 더할 나위 없이 탐날 테니까요.” “어? 아, 하긴 그러네. 본의 아니게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겠는걸.” 우리에게는 이런 무기가 있어. 하지만 너희에게 쓰지는 않을 거야. 비밀로 하고 다른 종족과 교류할 예정이거든. 그러니까 너희도 이걸 비밀로 하는 걸 돕는 게 좋겠지? “좋아. 그럼 이건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음. 더 궁금한 거 있어?” “아뇨. 어차피 궁금한 건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꼬았다. 그의 푸른 눈이 그녀를 살폈다. “란 로미아 드 라치아.” 부르는 게 아니라 읊는 듯한 어조였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순간 란은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본 줄 알았다. 자신이 진짜 란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저 질문은 ‘당신은 대체 뭡니까?’ 같은 질문과 동의어다. 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네 누나지.” “그건 아니죠.” 간단하게 부정하고 유스타프는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그거 아십니까?” “뭘?” “누님은 거짓말에 서투르시네요.” “익숙하지 않아.” 한숨을 쉬며 란이 시인했다. 서류를 보고 쳐내고, 일을 진행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모략을 꾸며 사람을 속이는 건 도무지 익숙하지도,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작에게 서신을 보내죠. 내일 동틀 때라니, 엘프는 부지런하기도 하지.” 비꼬는 건지 아닌 건지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을 가볍게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뭔가 말할 듯이 란을 보았다가 다시 툭툭 테이블을 두들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응.” “그리고 누님.” “응?” “반격은 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고 유스타프는 휭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간 방에서 란은 잠시 생각하고서야 그가 한 말이 전에 했던 대화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네가 날 죽이려고 하면 반격할 거야.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반격은 하실 수 있는 겁니까? 란은 생각하고 “아앗.” 하고 작게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털썩 엎드렸다. “그야, 못 하지. 그거 하려면 내 편을 만들어야 하는걸. 내가 내 편 만들면 분명히 유스타프 파벌이랑 서로 견제할 거고, 그럼 원하지 않아도 싸워야 하는데.” 그래서 동맹을 맺은 거잖아! 다 알면서. 나쁜 자식. ‘역시 도망칠 구석은 만들어 두는 게 좋겠어.’ 눈을 가늘게 뜨며 란은 결심했다. ✥✥✥ 일루미니티 백작저는 라치아 영지에서 멀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타고 가야 하는 거리라 란은 마차를 불렀다. ‘말로 장거리는 무리야. 말로.’ 몸 쓰는 일에는 약한 란이었다. 게다가 드레스를 입고 옆 안장(드레스용 안장. 양다리가 한쪽으로 내려온다.)으로 세 시간을 달리라고 하면 그 사람을 노려봐 주리라. 하레쉬는 마차 안은 답답하다고 하며 자처해서 마부석에 앉았고, 마부는 어색한 얼굴로 옆에 엘프를 태우고 백작령으로 출발했다. 하늘 저택에는 유스타프를 남기고 가니 안심이었다. 그녀가 “나 갔다 왔을 때 문이 안 열리거나 그러면 안 돼?” 하고 말하는 걸 무시하며 “출발하시죠.”라고 하기는 했지만. 다녀오세요, 가 아니라 출발하라니, 하면서 란은 투덜거리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덜컹거리는 길을 달리면서 란은 반드시 돈 벌면 길을 재정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상도를 개척하는 건 길을 개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괜히 로마군이 전투보다 토목공사로 길을 만드는 걸 더 많이 했겠는가? 모든 길은 라치아로 통한다,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길 정도는 다듬어 놔야겠다.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하려면 일단 겨울이 지나고 자금이 좀 생기면 해야겠지. ‘이건 내년이나 내후년에나 할 수 있겠다.’ 란은 창문을 열고 모처럼의 외유를 만끽했다. 마차 양쪽으로 따라오는 호위 기사들 역시 즐거운 얼굴이었다. 라치아 가문의 상징인 문과 눈꽃 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휘날리며 마차는 라치아 영지를 벗어나 곧 백작 영지에 도착했다.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내리자마자 란은 신음을 흘릴 뻔했다. 엉덩이와 허리가 뻐근했다. 다음에 마법 물품을 만들 때는 흔들림 없는 마차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일루미니티 백작이 나와 있었다. 백작 부인은 5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백작 정도라면 재혼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럴 낌새가 없어 보였다. 그의 옆에는 백작의 후계자인 장남이 나와 나란히 서 있었다. “반갑소, 백작.” 란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하레쉬를 보며 말했다. “이쪽이 내가 초빙한 엘프 치료사인 하레쉬라네.” 인사하기도 전에 하레쉬는 툭 내뱉었다. “환자는 어디?” 란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인간이 아니니 무례한 건 이해해 주게.” 란의 말에 일루미니티 백작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딸을 고쳐 주기만 하면 상관없습니다. 환자는 이쪽입니다.” 일루미니티 백작저는 하늘 저택에 비하면 단출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중간에 백작은 란에게 따로 쉬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백작 영애의 방은 3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약 냄새가 확 풍겼다. 여자아이 방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랑스러운 파스텔 톤의 방이었다. 하레쉬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환기 좀 시키지.” 백작 영식이 “찬바람이 환자에게 좋겠소?” 하고 말했지만 하레쉬는 코웃음을 치며 “이 공기가 더 안 좋아. 다 열어.” 하고 명령하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녀들이 머뭇거리자 백작이 “창문을 열어라.” 하고 명령하고는 말했다. “딸아이는 침실에 있소.” 침실로 들어가자 시녀 한 명이 백작 영애가 상체를 세우는 걸 도와주고 있는 게 보였다. 하레쉬는 인사도 없이, 인간적 관점에서 보자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침대가로 다가가 말했다. “손.” 백작 영애는 겁을 먹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레쉬만 보고 있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그의 귀를 보고 있었다. 열 살쯤 되었을까? 일루미니티 백작을 닮은 빨강머리를 했지만 생긴 건 완전히 다른 가냘픈 소녀였다. 눈이 움푹 들어가 있고 창백해서, 병세가 완연했다. “쯧.” 하레쉬는 혀를 차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옆에 있던 시녀―유모가 기겁해서 “무슨 짓입니까!” 하고 외쳤지만, 백작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하레쉬가 진찰하는 동안 침실은 놀란 백작 영애의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레쉬는 손을 탁 뿌리치듯 놓더니 영애의 눈도 뒤집어 보고, 입도 벌려 보았다. 그러더니 뭔가 엘프어로 중얼거리고 물었다. “계속 약을 먹은 건가?” “네, 네에.” 영애는 눈을 깜박이며 작게 대답했다. 하레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란을 돌아보았다. “‘쉼르흐하’다.” “음, 그게 뭐죠?” 발음도 어렵다. 란의 물음에 하레쉬가 갸웃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몸이 약해서 약을 먹이기 시작했지? 그 약이 몸에 독이 된 거지. 약을 몇 년이나 먹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차곡차곡 몸속에 쌓인 거다. 인간들은 필요 없이 강하게 약을 쓰는 경향이 있어.” “그럼 약을 멈추면 나아지는 거예요?” “그럴 리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일단 몸에 쌓인 독을 빼고 약을 점차로 줄여가야겠지. 반년 정도면 돌아올 거다.” “그럼 병이 아니라고?” 일루미니티 백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레쉬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래.” “그, 그럼 저 건강해질 수 있는 거예요?” 백작 영애가 손을 뻗어 하레쉬의 소매를 잡으며 묻자 처음으로 엘프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감사합니다!” “별말을.” 그렇게 말하고 하레쉬는 란을 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결제는 나중에 청구해요.” “제가 내겠습니다.” 백작의 말에 하레쉬가 고개를 젓고 란을 가리켰다. “이 녀석과 나와의 거래다. 금이나 은은 필요 없어.” 그래, 마력석으로 계산해야겠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처방전을 쓸 테니 종이를 줘.” 하인이 얼른 종이와 펜을 가져오자 하레쉬는 갈기듯 처방전을 길게 적어 나갔다. ‘혹시 엘프어거나 악필인 건 아니겠지?’ 걱정했지만 받아 보니 상당히 유려한 글씨체로 꼼꼼하게 처방이 적혀 있었다. “그럼 난 돌아간다.” “네? 결제는.” “내가 나중에 찾으러 가지.” “알겠습니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엘프는 종잡을 수가 없다. 하레쉬는 “3개월 후에 확인하러 오지.” 하는 말만 남기고 휙 가버렸다. 백작이 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응접실에 가 계시겠습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백작 영식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나가며 힐끗 돌아보니 백작과 딸이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살짝 보였다. 일루미니티 백작 영식은 상당히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루루가 건강해지기만 하면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은혜라니. 군신간에 당연한 거지.” 란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응접실은 은빛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잠시 백작 영식을 상대로 대화하고 있으려니 일루미니티 백작이 돌아왔다. 아버지의 눈짓에 아들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벽난로 위 유리 선반의 문을 열며 하는 말에 란은 피식 웃었다. “축하주는 루루가 건강해지면 마시도록 하지.” “그렇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까요?” 백작이 돌아서서 벽난로에 기대어 섰다. 검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는 듯 보였다. “뭘 원하십니까?” “호의.” 란 역시 즉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호의적인 미소가 아니라, 예의상 짓는 그런 미소였다. “제 호의로 뭘 하시려고요?” 란은 여유롭게 보이기 위해서 응접실 의자에 몸을 최대한 묻으며 허리를 기댔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려 상체를 비스듬히 기대며 란이 대답했다. “백작의 연줄을 사용하고 싶어서 그렇소.” 일루미니티 백작은 뒤쪽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범죄 조직이나 그런 것들 말이다. 백작이 눈매를 좁혔다. 탐색하듯 란을 보며 그가 천천히 말했다. “제 연줄보다 공작가의 연줄이 나을 텐데요.” “불행히도 그쪽에는 연줄이 없어서 말이지.” “그런가요? 어떤 연줄을 말하시는 겁니까?” “뭐든지 앞면이 있다면 뒷면도 있는 거 아닐까.” 우회적이지만, 일반적인 귀족간의 대화에 비하면 상당히 노골적인 말이었다. 란의 대답에 백작은 “뒷면이라.” 하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공작가의 능력에 감탄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가주님의 능력에 감탄해야 하는 걸까요?” “어느 쪽이든 상관이 있나?”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 말씀을 드리면 어쩌시겠습니까?” 란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순순하시군요.” “호의는 압박으로 얻어내는 게 아니니까.” 백작은 느리게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무슨 연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걸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디에 쓰시려고요?” “사람을 찾고 싶어서.” “그거라면 공작가의 능력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쪽에 연줄이 있다면 훨씬 쉬우니 말이지.” “만약 말이지요.” “그래, 만약에.” 제발! 란은 자신의 절박함이나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면서 다리를 꼬았다. 뭔가 동작을 하는 편이 좀 더 나을 것 같았다. “어떤가? 호의를 베풀 마음이 있소? 아니면.” 이놈의 하오체로 말하는 것도 슬슬 어려워지고 있었다. 백작이 탐색하듯 란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명령을 내리시면 제가 그 사람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가능한 힘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란은 어깨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려는 걸 참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둘만의 비밀로 하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순순한 대답에 란은 만세를 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딸이 완쾌하기를 비네.” “감사합니다.” 란은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드레스에 웬 주머니냐고 하겠지만, 드레스에도 주머니가 있었다. 란도 여기서 직접 드레스를 입어볼 때까지는 주머니의 존재를 몰랐다. 드레스를 입기 전에 주머니를 먼저 차고, 그 위에 드레스를 입는 구조였다. 드레스 양쪽에 트인 곳이 있어서 거기로 손을 넣어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낼 수 있었다. 허리 주름 때문에 구멍은 보이지 않고 말이다. “부탁하지.”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란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그 대사는 어울리지는 않네요, 아저씨. 일처리가 잘되어 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백작가를 나왔다. 루루는 나을 거고, 난 루미에를 찾을 단서를 얻을 거고. 란은 잠시 서브 남주를 생각했다. 사실 여기는 그녀가 만든 세상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가 겪는 일도 어쩔 수 없는 탓. 그렇게 생각하면 쉽지만 란은 영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 이야기를 읽었고, 썼고, 그래서 애정이 있었다. ‘게다가 굳이 그렇게 힘든 길을 가지 않아도 되는걸.’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니 구해 주고 싶다. 그게 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약에 란이 스물두 살까지, 유스타프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곳에 있는다면 분명히 루미에를 만나게 될 거다. 그리고 시나도 만나게 될 거고.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자신은 분명히 죄책감에 시달릴 거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에게 그럴 힘이 있으니까, 루미에를 그곳에서 구해 내고 싶었다.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실 란도 원작 시작 전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나마 남주―는 아니지만 하여간 유스타프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알지만 루미에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았다. ‘으으, 좀 더 상세하게 써 둘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년쯤 그가 불법 지하 검투장으로 넘어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을 겪는지도. 그러니까 그 전에 찾고 싶다는 게 그녀의 바람이었다. ‘제발 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스타프는 느리게 서류를 넘겼다.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가운데 벽난로만 가끔씩 탁탁 터지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때 어두운 구석에서 낮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유스타프는 서류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남자 형체가 설핏 보였다. “란은?” “무사히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래. 엘프는?” “송구스럽게도 놓쳐 버렸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군.” 하고 짧게 대답했다. 훈련받은 인간이라 해도 숲 속에서 엘프를 따라잡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유스타프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게 질책처럼 들렸는지, 남자는 더욱 몸을 낮추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냐. 상대는 엘프니까.” 유스타프는 살짝 손을 저었다. 그게 아니라 어째서 란은 이렇게까지 안전불감증일까, 하는 생각을 한 참이었다. ‘그야 평범한 귀족 여자라면 그렇지.’ 그건 당연한 거다. 온실 속의 꽃처럼 귀하게 자란 영애에게 위험을 알아채는 감각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하지만 란의 행동을 보면 균형이 맞지 않게 삐거덕거렸다. 어떤 때에는 정치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가도, 어떤 때는 한없이 순진한 아가씨 같다. ‘게다가 정말로 마력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 백작의 딸이 아프다는 것에 대해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아 유스타프는 청염을 움켜쥐었다. 청염이 그녀를 선택했다. 그것부터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라치아 가문과 함께해온 청염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라치아 핏줄이 아닌 자를 용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란은 용납했다? ‘넌 뭔가 아는 건가.’ 차가운 청염의 표면을 매만지다가 유스타프는 짧게 숨을 내뱉고 말했다. “란이 떠난 후 백작이 뭘 하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존의.” 대답과 함께 남자는 녹아들듯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본래라면 가주에게 소속되어 있어야 할 라치아가의 정보 단체인 ‘녹영(綠影)’이었다. 가주가 녹영의 첫 번째 그림자―그냥 첫 번째라고 부르는―를 소가주에게 소개시켜 주는 식으로 가주에게만 알려져 오는 단체였다. 그런데 란은 특이한 위치다. 유스타프는 첫 번째를 알았다. 아버지가 알려 줬기 때문이다. 당연히 란은 소개받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주는 란이었지만, 첫 번째는 이 사태에 당황하지 않고 유스타프를 찾아 왔고, 그는 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임시 가주니까.’ 그런 마음도 있었고, 굳이 자신의 전력을 노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쏠쏠하게 써먹고 있고. ‘만일 란이 없었다면 녹영도 해체되었을 테지.’ 비밀 단체를 유지하는 건 충성심만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돈이다. 숨어 있기 위한 자금, 몸을 숨기는 자금, 그런 자금은 일반적인 기사단을 굴리는 것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다. 가끔 유스타프는 그가 쓰는 용돈에 대해서 란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자신에게 용돈을 달라고 주장하던 모습이 떠올라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내탕금 걱정은 하면서.’ 자신이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덕분에 수월하기는 하지만.’ 도박으로 유혹해 뒷골목에서 로비를 죽이는 것도, 숙부를 협박하는 것도, 너무나 쉬웠다. 린드버그 남작을 협박했을 때 그 얼굴이 떠올라 유스타프는 픽 웃었다. 그래, 이런 일도 란이 알 필요가 없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끌어당겼다. 란이 돌아온 것은 저녁 늦게가 되어서였다. 유스타프는 아직 식사 전이라고 말했고 란은 “아직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나 기다렸구나?” “그렇지요.” 순순한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멈칫했다가 다시 웃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요리사는 뒤늦은 저녁을 잽싸게 만들어서 올렸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정찬은 아니었고, 간소한 저녁이었다. 버터와 꿀에 시나몬 가루를 뿌린 층층 토스트와 진한 차를 곁들인 식사를 하며 란은 간단하게 백작과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루미에 이야기는 빼고. “그럼 백작의 딸은 고쳐지는 거군요.” “응.” “껄끄러운 상대이니 이 정도 은혜를 베풀어 두는 게 좋지요. 그나저나 그 엘프는 다시 온다고 했다고요?” “응, 하지만 언제 오려나?” “내일 또 동틀 때 오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정말로 설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해 보시는 말입니까?” “그, 그냥 해 보는 말이요.” “그렇군요.”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와 나이프로 제 몫의 토스트를 일정하게 덜어서 란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어떻게 자르는 건지 단정하게 잘린 토스트는 각이 살아 있었다. “수고하셨으니 더 드십시오.” “어? 괜찮아.” “안 괜찮을 것 같거든요. 드시는 속도를 보아하니.” 그렇게 말하고 유스타프는 자기 몫의 냅킨을 접고 찻잔을 들었다. 란은 슬쩍 그를 보았다가 슬그머니 토스트에 포크를 가져갔다. 사실 좀 배가 고프기는 고팠다. 나가서 일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란은 토스트를 마음껏 즐겼다. 그때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프는 현관으로 들어오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겁니까?” 그의 날카로운 말에 “귀찮아.”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스타프는 창문을 열어 주기 싫은 얼굴로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쪽은 경비가 허술하네.” “베란다도 없는 3층 창문으로 들어올 사람을 걱정할 정도의 여유가 없어서 말입니다. 충고는 명심하죠.” 유스타프가 날카롭게 말했다. 하레쉬는 그런 반응에도 별말 없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 털고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그가 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금.” “잠시만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은 얼음수정은 극비리에 다루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란은 하레쉬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후에 직접 자신의 방으로 가서 주먹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상자를 들고 왔다. 안에는 납 칠이 되어 있는 상자였다. 납 칠이 되어 있으면, 마력석의 마력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레쉬는 상자를 열어 마력석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소식으로 다시 뵙죠.” “누구에게 좋은 소식?” “모두에게요.” 싱긋 웃으며 란이 하레쉬에게 엘프식 인사를 했다. 주먹을 쥐고 이마와 가슴을 가볍게 두들기는 인사 방식이었다. 하레쉬는 묘한 표정으로 마주 인사하고 역시나 창문으로 떠나갔다. ‘엘프란.’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제대로 교역을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드워프와는 어떻게 접촉하실 생각입니까?” “마법사 협회를 통해서. 그쪽은 광물 때문에 드워프와 교류가 있으니까. 내일쯤 연락을 보낼까 해.” “내일 마법사 협회장을 볼 수도 있겠군요. 아니, 빙벽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으니 모레쯤이려나요.” “어?” 란이 놀라 그를 돌아보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이번에는 같이 만나도록 하죠.” “그렇게 빨리 연락이 올까?” “마법사에게는 생명이 걸린 문제니까요.” “으응?” “아직 마력석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죠.” “응.” “마법사가 순순히 드워프와 저희를 연결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어― 하지 않을까?” “안 할 겁니다.” “왜? 우리가 얼음수정을 생산하니까 마법사도 우리와 잘 지내는 게 좋잖아?” “네, 하지만 그것과 드워프를 연결시켜 주는 건 별개의 문제지요.” 마법사라는 족속들이 얼마나 콧대 높은 족속인가.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샘플로 커다란 얼음수정을 가져가면서 빈말로도 고맙다고 하지 않는 작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순순할 거라고 그는 생각할 수 없었다. “편지에 꼭 푸른 얼음수정에 대해서도 쓰십시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착한 누님이로군요.” 유스타프가 놀리는 건지 그렇게 말해 란은 입을 비죽였다.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나갔다. 유스타프의 예언은 맞아 들어갔다. 마법사 협회에 연락을 넣자마자, 그 날 저녁에 파발이 도착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여러 번 해서 완전히 시들시들해진 마법사의 사자가 하늘 저택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꼭, 꼭! 꼭! 라치아 가주를 만나야겠다는 말과 함께 이미 마법사 협회 원탁 의원들이 인근에 도착해 있다는 말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 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자에게 하룻밤 유숙하고 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굳이 답을 가지고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란이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진짜로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자기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하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빠르게 다시 결전의 날이 왔다. 마법사와의 협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들 나이 많은 마법사들이니 자신 같은 애송이는 휘리릭 말려 버릴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같이 가는 겁니다.” 유스타프가 다시 말해 와서 란은 어깨에 힘이 빠졌다. “응, 꼭 같이 가.” 란의 말에 그는 피식 웃고 목걸이를 풀어 청염을 꺼내더니 손을 내밀었다. “……?” 의아한 얼굴로 란이 그의 손에 손을 올리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가락에 청염을 끼워 주며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란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푸른 눈은 여전히 고요하고 동요가 없었다. “마법사는 검사와는 다른 족속이니까요. 청염을 끼시는 게 나을 겁니다.” 만에 하나 공격이 와도 청염이 그녀를 지켜 줄 거다. “그럼 유스는?” “전 괜찮습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청염의 푸른 보석에 입 맞추며 말했다. “청염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청염과 하나인 듯한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란은 순간 말을 잃었다. 간신히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유스타프가 그녀의 손을 놓은 후였다. ‘우, 우와.’ 란은 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남주. 그녀는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꼬맹이 주제에.’ 사람 설레게 하는 데가 있다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살짝 청염을 굴려보았다. 어쩐지 용기가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아.’ 할 수 있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의 힘을 뺐다. ✥✥✥ 카라는 긴장한 얼굴로 손을 뗐다. 상급 시녀인 그녀는 무섭도록 시녀의 수가 줄어든 와중에 살아남은, 충실한 시녀였다. 시녀의 수가 줄어서 드는 생각은 가주님을 곁에서 섬기는 시녀 수가 너무 적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란은 꾸미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까지는 품이 들 일이 없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아직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른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화려한 옷을 입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아무렇게나 입을 수는 없다. “어떠신가요? 가주님.” 카라의 물음에 란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장례식 때에 맞췄던 검은색 드레스에 진주 브로치. 머리는 있는 힘껏 화려하게 땋아 올리고 그 위에 흑진주가 줄줄이 달린 검은빛 헤어밴드를 올렸다. 상복치고는 화려하지만, 이 정도 화려함은 있는 게 좋으리라. “마음에 들어.” 란이 싱긋 웃자 옆에서 거들던 소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색 때문인지 란의 피부는 더 희게 빛나는 것 같았고 살짝 칠한 입술도 요염하게 보였다. 얼마 전 장례식 때 창백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겉모습은 중요하니까.’ 괜히 우습게 보일 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카라를 치하해 준 뒤 방을 나섰다. “유스?” 기다리고 있던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란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옷차림이……?” 유스타프는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띠에 매달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일단 호위니까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란을 바라보았다. 란은 자신의 헤어밴드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너무 화려한가?” 상중인데. 힐끗 그의 눈치를 보자 유스타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렇게 누님이 미인이셨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엑.” 뭐지? 왜지? 갑자기 무슨 칭찬이야? 란의 반응에 유스타프의 눈썹이 슥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별말 없이 그녀에게 로브를 입혀 주고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밀었다. 란은 그의 팔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서늘한 금속 건틀릿(gauntlet 손과 팔목을 함께 감싸는 방어구) 감촉이 기분 좋게 와 닿았다. “누님.” “응?” “칭찬할 때 딱히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의 말에 란은 눈을 깜박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고마워.” “별말씀을.”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날씨가 좋아 마차는 뚜껑을 접고 있었다. 오픈카처럼 위가 열리고 접히는 마차(landau)는 란이 좋아하는 마차였다. 마차도 종류가 많다는 걸 여기 와서 알았다. 나란히 두 사람이 올라타자 마차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히 마차 뚜껑을 열었나 했는데, 산을 내려가 평지를 달리기 시작하자 열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별로 높은 것 같지도 않은데, 산 공기 때문인가 위쪽이 더 춥구나.’ 평지로 내려오자 마차의 속도가 더 붙었다. 빙벽에서 10km 떨어진 숲 속이 마법사가 마련한 회의 장소였다. 비밀리에 접촉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숲 근처에 도착하니 마법사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라치아 가주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마차 위에서 란이 대답하자 마법사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청염을 떨치시길.” “불꽃의 가호가 있길. 이 근처에서 만나 뵙는 건가요?” “네, 절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마법을 걸어 놨습니다.” “그렇다면 안내해 주세요.” 란의 말에 마법사가 멈칫하고 조심스럽게 이어 말했다. “가능하면 가주님만 독대하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호위로 따라온 블레인이 강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희가 가주님을 해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마법사가 불쾌한 얼굴을 했다. 란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말했다. “저 혼자는 가지 않겠어요. 유스와 둘이 가죠. 어떤가요?” “가주님.” 블레인이 눈을 찌푸렸다. 란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괜찮지?” 유스타프에게 말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내가 양보 가능한 한계예요. 얼마나 내가 양보해 주는지 알아주면 좋겠군요.” 란이 마법사에게 말하자 마법사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기사들에게 기다리라고 한 후에 마법사의 뒤를 따라갔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탁 트이며 새하얀 천막이 나타났다. 다가서니 저절로 천막 문이 양쪽으로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둥근 원탁과 함께 마법사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좋아.’ 란은 미소 지으며 선전하듯이 로브를 벗었다. 드러난 우아한 검은빛 드레스와 어우러진 그녀의 미모에 순간 시선이 쏠렸다. 몇몇이 흔들린 얼굴을 하고 란을 보았다. 란은 더욱 짙게 미소를 지으며 양해 없이 유스타프가 빼내 준 의자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분들.” 란은 다리를 꼬며 몸을 깊이 묻었다. 자, 게임을 시작하죠. 원탁의 제1 마법사인 리젠드는 눈앞의 소녀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처음부터 근거 없이 쉽게 생각했던 것은 자신들 쪽이었다. 마력석에 대해서 압박을 넣으면 쉽게 일이 풀릴 거라고 대부분의 원탁 마법사들이 생각했다. 어차피 가주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계집애다. 마법사들은 설마 자신들과의 싸움마저도 불사할 상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가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지요.” 붉은 입술 사이로 매끄러운 말이 쏟아져 나온다. “마법사 협회에서 저와―라치아와 적이 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적이라니, 무슨 말을.” 화급히 리젠드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사실 보통 저 말은 마법사 측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저런 협박을 자신이 받게 될 줄이야. ‘게다가 거슬려.’ 가주 뒤쪽에 서 있는 남자아이도 거슬린다. 일반적인 호위라면 존재감이 희미해야 하는데 그는 오히려 묵직하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낼 때는 과장된 말이나 행동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저 나이 대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저 호위는 그걸 하고 있었다. 찌르는 듯한 존재감이 마치 라치아의 전력을 말해 주는 듯했다. 언제든지 너희와 싸움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젠드는 문득 두려워졌다. 저 호위가 푸른 얼음수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걸 우리 사이에 던져 넣으면 어떻게 될까? 그는 그런 뉘앙스의 말도, 행동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마법사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건 확실했다. 왜냐면 목소리가 높아지려다가도 힐끔 그 호위를 보고 다시 목소리를 낮추니 말이다. “알겠소.” 결국 리젠드는 손을 들었다. “리젠드 님!” 다른 마법사 몇몇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리젠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요구에 부당한 점은 없다고 생각되오.” 그 말에 마법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부당한 점은 없다. 없지만, 마법사가 일방적으로 이렇게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드워프와 연결해 주시면 그 뒤는 저희가 알아서 진행할 겁니다. 대신 마법사 협회에 마력석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걸로 하지요.” “좋소. 대신 색 있는 얼음수정의 효능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거로 하지요. 그리고 연구용으로 우리에게도 조금씩 공급해 주길 원합니다.” 어떻게든 파훼법을 찾고 싶어서 리젠드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좋습니다.” 란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저택을 비워두고 싶지 않아서요.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리젠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가 란을 천막 밖으로 배웅하며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가주님.” “네.” “그 호위는 라치아 가문의 기사입니까?” 그 말에 란이 화사하게 웃었다. 리젠드는 그제야 그녀가 오늘 진심으로 웃는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제 동생이에요.” 목소리에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다. “아.” 차기 라치아의 가주. 리젠드의 시선이 옮겨가자 유스타프는 무심하게 목례를 했다. 리젠드는 오늘 협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라치아는 당분간 건재할 듯하니 말이다. “그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리젠드 님.” 란은 무릎을 가볍게 굽혔다 펴서 인사를 하고 다른 마법사의 안내를 받아 장소를 떴다. 란과 유스타프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던 기사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블레인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가 같이 있어 줘서 괜찮았어.” “원하시는 일은 무사히 끝내신 겁니까?” “응.” 란이 씩 웃었다. 기다려요, 단장님. 이제 무기랑 갑옷도 싹 다 바꿔 줄게요. 새것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은 마차에 올랐다. “오늘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일이 풀렸는걸.” 란의 말에 턱을 괴고 있던 유스타프가 고개를 돌렸다. 란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난 분명히 중간에 마법사가 날 협박하거나 마법을 쓰거나 아니면 적어도 소리를 지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마법사들은 중간중간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다시 이성을 되찾은 얼굴을 했다. 역시 마법사란 이성적인 생물인 것인가. 감탄하는데 유스타프가 말했다. “그럴 줄 아셨다고요?” “응.” “그런데도 기사를 두고 가고 싶으셨습니까?”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으니까. 그야 굳이 끌고 가려면 갈 수도 있겠지만 감정이 상한 채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어.” 거래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다. 라치아의 얼음수정이 사라질 때까지 마법사 협회와의 관계는 지속될 거다. 대등한 듯하면서 약간 우위. 그 정도가 오래가기에는 가장 편한 관계였다. “그리고 유스가 같이 가 줬잖아.” 헤헤 웃으며 하는 말에 유스타프는 눈을 찌푸렸다가 웃었다. “정말이지.” 란이 껌벅이다가 말했다. “유스 요즘 잘 웃네.” “누님이 절 웃게 하니까요.” “좋은 의미지?” 그녀가 짐짓 진지하게 묻자 유스타프가 “글쎄요.” 하고 모호하게 대답하며 자신의 망토를 벗어 란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산을 올라가는 사이 온도가 더 떨어질 겁니다.” “고마워.” “별말씀을.” 해가 지기 시작하는 때여서 란은 사양하지 않고 얼른 망토를 담요처럼 덮었다. 빙벽 너머로 서서히 넘어가는 해가 장엄하게 보였다. 눈부심에 눈을 가늘게 뜨며 란은 생각했다. ‘정말로 곧 겨울이 오겠구나.’ ✥✥✥ 언제 봐도 굉장하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창문가에 바싹 붙어 섰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리고 있었다. 쌓인 눈만 해도 1m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중에 눈 치우는 제설차도 만들어야겠어. 뜨거운 열기가 나오게 해서 눈을 다 녹이게 한다거나?’ 마력석을 어떤 에너지로 바꿀지는 무궁무진하니까 방법도 여러 가지로 찾을 수 있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창문에서 물러섰다. 벌써 그녀가 임시 가주직을 맡은 지 7개월, 약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초반부터 대대적으로 벌인 일이 많아서 아직도 허덕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 기초를 다지는 단계가 끝나 가고 있었다. 란은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 몸을 이불 사이로 쏙 집어넣었다. 전기장판―마법장판― 덕분에 침대 안이 뜨끈뜨끈했다. ‘행복하다.’ 프란체가 만든 이 마법 도구는 훌륭했다. 이불 안에 있는 공기를 따뜻하게 덥혀 주고 깃털을 부풀어 오르게 해서 푹신푹신하고 따끈따끈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고민하다 이름을 ‘다사’라고 지었다. ‘다사롭다’에서 따온 말이었다. 그렇다고 마법장판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은가? ―올 겨울 ‘다사’는 필수지요. 이런 편지와 함께 여러 개 더 만들어서 유스타프에게도 주고, 일단 황실에 올렸다. 물론 이것만 올린 것은 아니다. 마법장판을 쓴다고 사교계에 말을 꺼내는 건 별로이지 않은가? 말이 아니라 보여 주는 게 최고의 광고다. 그래서 고심해서 란은 첫 번째 선물을 황후에게 보냈다. 걱정도 되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여기서 이방인이었고, 그녀가 알고 있는 지혜를 쥐어짰지만 한 끗 차가 다르다거나 할 수 있으니까. ‘한국인이 미국인 니즈를 맞추는 것도 어려우니까.’ 한숨을 삼키며 란은 양손을 꼭 쥐었다. ‘성공적으로 발표되게 해 주세요.’ 물론 그 전에 신년회가 있지만. 12월이 중반쯤 지나고 있었다. 레버리는 이미 수도에 올라가서 한창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란은 여기서 가주로서 일을 끝내야 했다. 문을 찾아가 살피고, 돌아와 가신들과 신년회를 연다.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가늘게 내쉬고 눈을 감았다. 유스타프는 모피 망토까지 두르고 뒤뚱뒤뚱 걸어 나오는 란을 보고 피식 웃었다.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말이나 타실 수 있겠습니까?” “탈 수 있어.” 말하고 란은 힐끗 블레인을 돌아보았다. “도와주면.” 블레인은 싱긋 웃고 “영광입니다.” 하고 말한 후에 그녀가 말에 올라타는 걸 도와주었다. “그 정도면 말에서 떨어져도 아프지 않겠네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확실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드레스가 아니라 솜바지를 입고 조끼에 외투에, 그 위에 모피 망토를 걸치고 손에도 장갑을 끼고, 머리에도 단단히 모자를 눌러썼다. “추운 건 싫어.” 란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하자 유스타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에 올라타자, 유스타프도 말에 탔고 기다리던 기사단도 잇따라 말에 올랐다. 여기서 문까지 올라가는 길은 험난하기는 하지만 눈은 없었다.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현자 이브리아.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얼음 같은 차가운 미인이었다고도 하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고도 한다. ‘내가 상상― 아니, 읽은 바로는 미인이었지만.’ 허리 아래까지 기른, 긴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법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라치아 공작가에도 그림으로 남아 있다. 평지에서 산맥이 솟구치게 하는 장면을 주제로 한 대작이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대단하지.’ 마법으로 산맥이 솟구쳐 오르게 하다니. ‘그리고 문.’ 란은 그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으로 가는 길은 항상 긴장됐다. 가주인 란을 선두로 해서 일행은 줄줄이 산에 올랐다. 란은 그래도 옆 안장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며 이를 악물고 말 위에서 버텼다. 경사가 심하고 길도 험하다. 말은 당연히 등에 올라탄 사람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걷고 있고, 위에 앉아 있는 짐인 란은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위태위태해서 블레인은 움찔거리며 손을 뻗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반복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란에게 뭔가 말을 건넬 분위기도 아니었다. 당연히 다른 기사들도 침묵했다. 가끔 작게 “앗.” 하는 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삼십여 분에 걸쳐서 문에 도착했을 때 란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제 더웠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란은 블레인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란은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블레인은 그걸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기사들이 전부 그런 눈으로 란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을 못 탄다고 한심하게 생각하거나 놀리는 게 아니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면이 란에게 있었다. 섬길 주군이라고 하면 언제나 우뚝 솟은 산 같은 존재를 생각했지만, 블레인은 지금의 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유스타프가 다가와 팔을 내밀어서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낮게 말했다. “무릎이 떨리네요, 누님.” 란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멀쩡하거든요, 동생님.” 유스타프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 올려 보이고 걷기 시작했다. 란은 내일 분명히 근육통에 시달릴 거라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모두가 타고 온 말에 단단히 옷을 입히고 말의 몸이 식지 않게 빙글빙글 돌게 할 터였다. 그사이 란과 유스타프, 그리고 기사 몇몇은 함께 은으로 만든 듯 빛나는 둥근 아치 밑을 지나, 새하얀 조약돌이 깔린 길을 지나서 동그란 입구를 가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직사각형으로 똑바로 다듬어져 있었고, 그 길 끝에 바로 새하얀 문이 있었다. 문 가운데에는 마름모꼴 여섯 개가 꽃잎처럼 모여 있었다. 이게 라치아 가문의 문장이기도 하다. 새하얀 문에는 아무런 틈도 문양도 없다. 거기 새겨진 문장이 전부. 란이 손을 내밀자 유스타프가 목걸이를 벗어 란에게 건넸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청염을 손가락에 끼웠다. ‘아.’ 고요하다. 전처럼 푸른 불꽃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란은 반지를 낀 손을 문장 위에 올렸다. 문장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사형으로 빛나는 문양이 문 전체에 새겨졌다. 란은 눈을 찌푸렸다. 바람이 불 공간이 아닌데 바람이 불어 그녀의 망토와 머리카락이 펄럭였다. 그리고 점점 바람이 가라앉고 빛이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푸른빛이 사라졌다. 란은 천천히 손을 떼고 반지를 빼서 유스타프에게 돌려주었다. 유스타프는 목걸이에 꿰어 반지를 착용했다. 이 간단한 절차가 매년 해야 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란과 일행은 얼른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나온 걸 보고 기사들은 말에 입혔던 옷을 벗겨냈다. ‘큰일 났다.’ 란은 등이 축축해졌다. 올라오는 건 어떻게 했지만, 이제 말을 타고 삼십 분을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누님.” “응?” 돌아보니 유스타프가 손을 까닥하고 말했다. “저와 같이 타시죠.” “어?” “아니면 혼자 타고 가시겠습니까?” 란은 고개를 저었다. “태워 줘, 아니 태워 주세요.” 유스타프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하고 짧게 말하고 기사에게 손짓해서 자신의 말에서 안장을 내리게 했다. 유스타프가 먼저 말에 올라타자, 블레인이 란을 가볍게 안아 들어서 그 뒤에 타는 걸 도와주었다. “고마워요, 블레인 경. 힘이 아주 세시네요. 그리고 대부분 옷 무게예요.” 블레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렇겠죠. 겨울옷은 무거우니까요.” “그렇죠.”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는 피식 웃더니 란의 양손을 잡아당겨서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했다. “단단히 잡으세요.” “으응.”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타프가 가볍게 말을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등자도 없는 말 등 위라 기댈 곳이라고는 유스타프밖에 없었다. 란은 유스타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 “유스타프.” “네.” “키 또 컸어?” “또라뇨, 아직 많이 커야지요.” “그야 그렇지만…… 너무 빨리 자라는 거 아냐?” “관절이 삐걱거리고 아프기는 하네요.” 성장통인가. “많이 먹어.” “그러고 있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크니까, 유스타프도 크겠구나.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많이 자라라. 란은 슬그머니 한쪽 손을 풀어서 유스타프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뭐 하시는 겁니까?” 드물게 당황한 기색이 섞여 있어서 란은 웃었다. “누님의 사랑?” “필요 없습니다.” “너무하네.” 말하고 란은 아쉬움을 달래며 손을 뗐다. 장갑을 끼고 있어서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흐트러진 머리를 유스타프가 대충 쓸어 넘겼다. 하하, 그래 봤자 가주는 나인데 네놈이 어쩔 것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은 심술궂게 다시 유스타프의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그는 드물게도 당황한 듯하더니만 그녀의 손길을 살짝 피하며 혀를 찼다. “쯧.” 혀를 차자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몸이 확 뒤쪽으로 쏠렸다. “엄마야!” 작게 소리를 지르며 란이 유스타프를 꽉 끌어안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소리 내서 웃은 거야? 유스타프가? 얼굴을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세로는 불가능하다. 아쉬움을 달래며 란은 유스타프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유스타프는 다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물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머리카락을 문지르는 게 왜 사랑입니까?” “어? 어, 음. 애정 표현이잖아?” “이게요?” “응, 어머니가 안 해 주셨어?” 저도 모르게 묻고 란이 덧붙였다. “내 어머니 말고.” 유스타프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안 해 주셨습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유스타프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 “유스타프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물론 미인이셨겠지만.” 유스타프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기처럼 길게 입김이 스러졌다. “프라이드가 높은 분이셨습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몸이 좋지 않으셔서, 북부의 날씨를 좋아하지 않으셨죠.” 특히 겨울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다. “그건 내 어머니도 마찬가진걸.” “그러네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했다. 북부의 날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지. 란이 머뭇머뭇 물었다. “그럼 병으로 돌아가신 거야?” “네.”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힘든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럼?” 유스타프는 허리를 세웠다. 뒤에서 꼭 끌어안고 자신에게 찰싹 붙어 있는 란의 온기가 옷을 넘어서 느껴지는 듯했다. 실제로는 느껴질 리가 없는데도. 매달리고 있는 건 란 쪽인데도, 어째서인지 자신이 받쳐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제 어머니가 죽어 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다른 여자에게 구혼 중이라는 사실이었죠.” 란이 숨을 삼켰다. “그걸 죽어 가는 어머니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요.” 사후세계에 반쯤 발을 걸치고, 비쩍 말라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저주를 퍼붓던 어머니. 평소에 귀족적인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람이어서 더욱 그 간극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뭐야, 공작 각하 진짜 나쁜 사람이잖아?” 란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했다. “네, 그렇죠.” 유스타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문득 유스타프는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기억이 살짝 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유모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것 같습니다.” “그지? 역시?” 뭐가 잘난 건지, 듬뿍 자랑스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란이 말하는 게 유스타프는 우스웠다. 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유모를 내쫓았다. 그를 너무 응석받이로 키운다는 게 이유였다. ‘완전히 잊고 있었군.’ 란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이 났다. 올라갈 때보다 좀 더 빠르게 일행은 저택에 도착했다. 블레인이 얼른 란이 내리는 걸 돕고 나서야 유스타프도 따라 내렸다. 란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모두 고생 많았다. 얼른 말을 넣고 옷은 갈아입고 와. 신년회는 금방 시작하니까.” 가벼운 말에 기사들은 모두 경례를 붙이고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다렸던 신년회가 드디어 시작하는 거다. ‘빚도 다 갚았고.’ 상환 날짜가 다가와 원금과 이자를 전부 갚자 채권자들은 이 돈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개중 눈치 빠른 자들은 한 발 걸치고 싶다고 운을 뗐지만, 란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웃었을 뿐이었다. 올해 신년회는 소박하게 준비되었다. 내년에는 영지민에게도 선물을 베푸는 커다란 신년회를 할 수 있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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