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어느 쪽의 눈이 먼 것인가
Chapter 5. 어느 쪽의 눈이 먼 것인가
란이 기운을 차리자 그녀의 시녀들 역시 덩달아 기운을 차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장하고서 란은 시나를 만나기로 했다.
그 말에 루미에는 기묘한 표정으로 란에게 시나에 대해서 설명했다.
“자기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던데요.”
“그래?”
“네, 그리고―”
루미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정말 그럴 듯하다는 거죠. 그녀가 입은 옷이나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본 적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렇군.”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진짜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이니까 그렇지. 더불어서 란은 그의 목소리에 담긴 친근감도 눈치챘다.
‘어장의 물고기가 이렇게 들어가는 건가.’
란은 턱을 괴고 발을 까닥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알았어. 얘기 고마워.”
그녀의 말에 루미에가 빤히 란을 보았다.
“주인님.”
“응?”
“아직도 서랍 속에 그 상자가 있나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물어 와서 란은 눈을 깜박였다가 “응.” 하고 대답했다.
“사용할 생각은 없고요?”
란은 당황했지만 웃으며 물었다.
“왜? 루미에 줄까?”
“라치아는 위험하니까요.”
그의 말에 란은 “아.” 하고 살짝 입을 벌렸다.
그건 그랬다.
위험하지.
하지만―
“내 소중한 게 전부 여기에 있는걸.”
란의 말에 루미에가 한숨 비슷한 것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그는 대답하고 조심스럽게 이어 물었다.
“이동하는 걸 도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란이 손을 내밀었고 루미에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킨 후에, 자신의 팔에 그녀의 팔을 올렸다.
팔짱을 끼듯이 하고 둘은 걷기 시작했다. 란이 이모저모 해 본 바로는, 남의 팔을 잡고 걷는 게 가장 편했다.
계단이 나오면 유스타프도, 루미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안아 들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쑥스러웠지만, 싫은 것도 아니라 란은 얌전히 안겨 있고는 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부산하게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씩씩한 목소리도.
란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란 로미아라고 합니다.”
“시나라고 합니다. 이시나. 성이 ‘이’예요. 그냥 시나라고 불러 주시면 되어요.”
“저도 그냥 란이라고 불러 주면 돼요.”
루미에가 그녀를 의자로 안내해 줘서 란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시나 양도 앉으세요.”
란의 말에 시나는 그녀의 앞에 앉으며 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존예…….”
시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란은 어깨를 떨며 기침을 했다. 아니면 웃어 버릴 것 같았다.
“시나 양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이야기한다면서요?”
란의 말에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화급히 “네.” 하고 대답했다.
금발에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녹색 눈동자를 한 미녀는 어쩐지 그녀에게 우호적이었다.
시나는 침을 삼켰다.
여기서 잘해야 한다. 아니면 마녀 같은 걸로 몰리거나, 구경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시나는 몇 번이나 루미에에게 설명했던 대로 란에게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란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이며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라치아에는 마법사가 없다고 들었고요. 전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마지막 말을 필사적으로 덧붙이자 란은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말이요?!”
시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란은 깜짝 놀랐지만 시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잡은 손은 흔들며 말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흑, 으흑―”
목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이기 시작해서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시나의 어깨를 찾아 두들겼다.
“괜찮아요. 잘될 거예요.”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등을 두들겼고, 시나는 곧 그녀를 끌어안더니 와앙― 하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미소를 짓고 “괜찮아요. 이제 내가 도와줄게요.” 하고 속삭였다.
루미에는 그걸 보면서 자신의 과거가 생각났다.
‘또 나 같은 인간 하나가 생기겠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의 품에서 펑펑 우는 시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미소 짓는 란도.
가슴이 아릿해서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 감사합니다.”
시나는 란이 손수건을 건네주어 얼굴을 닦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겨서 펑펑 울었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불안이 어느 정도 씻겨가니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분은 얼마 전에 시각을 잃었다고 했지.’
그런데도 자신을 위로하다니. 시나는 란의 멘탈에 감탄했다. 이어 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시나 양이 왜 이 세계로 넘어왔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왜, 왜인데요? 뭐 때문이에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다시 자리에 앉아요.”
란이 손짓해서 시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던 문제였다.
왜?
왜 하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란은 헛기침을 하고 라치아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했다.
‘봉인된 어둠’과 ‘대현자 이브리아’.
시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열심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지금 그 봉인이 깨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무래도.”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누구를 찾는 걸까요?”
“이브리아요.”
별 고민도 없이 시나는 대답했다.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천 년 전 일이라면서요?”
“그렇죠.”
“그, 대현자라는 사람은 이미 죽은 거 아닌가요?”
“이야기에는 사라졌다고 전해지지만, 죽은 게 맞겠지요.”
시나는 침착하게 이야기하는 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눈을 그녀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시나는 어쩐지 가슴이 짜르르해졌다.
정말로 그녀는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었다.
이 낯선 곳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입술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자식이 착각했다는 거네요?”
“대현자 이브리아의 그림을 보면 그녀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더군요.”
“말도 안 돼! 설마 여기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대현자 말고 없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죠?”
“아니에요.”
란이 고개를 저었다. 유스타프만 해도 검은 머리니까.
“그냥, 시나 양이 운이 나빴던 거예요. 일종의 사고인 거죠.”
시나는 입을 떡 벌렸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이해가 되어서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사명 때문에 자신이 이곳에 온 거라면 정말로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엉뚱한 우연이라고 해도 분노가 일어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퍼뜩, 시나가 말했다.
“그, 그럼 그 자식만 절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차차 알아보도록 해요. 마법사들이나 엘프에게 연락을 해 보도록 하죠.”
“엘프요?”
“네.”
시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엘프가 있단 말이에요? 이종족? 인간이 아닌?”
“네.”
시나는 머리를 감쌌다.
“정말로 다른 세계군요.”
“그런 것 같네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시나에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시녀나 루미에를 통해서 알려 달라고 했다.
시나는 대현자의 그림을 보고 싶다고 말했고, 일행은 복도에 걸린 거대한 그림 앞으로 함께 이동했다.
빛나는 마법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대현자의 그림을 보고 시나가 말했다.
“하나도 안 닮았어요.”
루미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현자 쪽이 훨씬 미인이죠.”
“루미에.”
란이 눈을 찌푸리자 루미에가 시나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실례.”
그 밉살맞은 웃음에 시나의 눈썹이 슥 치켜 올라갔다.
란이 시나 쪽을 돌아보자 루미에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돌려 주며 말했다.
“이쪽이에요.”
“아, 미안해요. 시나 양, 내가 자주 찾아올 테니― 루미에, 이쪽 아니지.”
말하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나서 란이 눈을 부릅떴고, 시나가 “흐흐익.” 하고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란의 손을 잡았다.
“이쪽이에요.”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찾아올 테니까 마음 편하게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저기.”
“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시나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러고서 시나를 방으로 데려다 주고 란은 루미에에게 투덜거렸다.
“아니, 눈 안 보이는 사람을 놀리고 싶어? 내가 그림을 보고 떠드는 게 보고 싶었어?”
“화내시지 않을까 하고.”
루미에의 말에 란은 의아해졌다.
“내가 루미에에게 화냈으면 좋겠어?”
“계단이에요.”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란을 안아 든 후에 말했다.
“아뇨, 제가 아니라.”
루미에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낮게 말했다.
“너무 쉽게 가주님을 용서한 것 같아서.”
“……?”
란은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어져서 물었다.
“유스를?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공작이 주인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요.”
“루미에.”
란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부터 더듬어 뺨까지 올라갔다. 루미에는 그녀의 손가락이 주는 감각을 즐겼다.
“유스는 나에게 선택권을 줬고, 남은 건 나야. 그리고 눈은 곧 나을 거야. 정말로.”
루미에의 얼굴이 미심쩍게 변했다. 치료사도 고개를 저었는데, 눈이 낫는다고?
“주인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죠.”
“응.”
란이 고개를 끄덕여 루미에는 다시 물었다.
“정말, 정말이지요?”
“정말, 정말로.”
루미에는 계단 벽에 등을 툭 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진짜.”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미에가 물었다.
“가주님도 이 사실을 아시나요?”
“아니, 아직.”
어쩌다 보니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보다는 잔소리 들을 것 같아서…….’
정령과 거래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래했으니까.
‘근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한데?’
란이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루미에가 속삭였다.
“그냥 비밀로 하면 안 돼요?”
“잉?”
“공작님은 속 좀 타셔도 될 듯.”
란이 피식 웃었다.
“사적인 감정은 빼고?”
“사적인 감정은 약간만 넣어서요.”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고 허리를 숙여 란의 이마에 키스한 후에 벽에서 등을 떼고 걷기 시작했다.
“루미에.”
당황한 란이 이마를 문지르며 그를 부르자 루미에가 말했다.
“저는 차였고 깨끗하게 승복했고, 그래도 주인님이 좋아요. 이게 어떤 방식의 좋아함이냐고 묻는다면 말하지 못하겠지만.”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그는 복도를 걸었다.
“루미에…….”
“그런 동정은 싫습니다.”
“동정하는 게 아닌데―”
“미안해하는 것도 싫어요.”
“그건, 알았어.”
란이 고개를 끄덕여서 루미에는 피식 웃었다. 그가 그녀를 방문 앞에서 내려주고 문을 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에 달려 있는 거지만요.”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란은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 그의 얼굴을 더듬어 본 다음 말했다.
“충고 고마워.”
지금 그걸로 유스타프에게 말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루미에가 미간을 찌푸리는 게 손끝에 느껴져서 란은 웃었다.
“루미에, 시나를 부탁할게.”
“알겠어요.”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는 이세계에서 왔다는 그 여자가 싫지 않았다.
아니, 정신이 나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란과 비슷한 곳이 있었다.
특히 자신을 보는 눈이.
같은 인격체라는 걸, 사람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 그 시선.
‘신분이라는 게 없다는 세상에서 왔다고 했었지.’
루미에는 그건 대체 어떤 세상일까, 하고 갸웃하며 방을 나섰다.
란이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시나의 붙임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고, 그녀는 쉽게 하늘 저택에 받아들여졌다.
유스타프는 란의 설명을 듣고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계로부터의 납치란 말입니까?”
“응, 그 봉인 말인데. 예전에 하레쉬에게 자료가 있다면 보내 달라고 했었거든. 그게 도착해 있어서…… 요즘 읽고, 아니 듣고 있어.”
키리에게 읽어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 봉인이라는 게 개미굴 같은 데에 가둬 둔 건가 봐.”
“개미굴이요?”
“응, 복잡한 미로 같은 거. 입구는 라치아에 있는 ‘문’ 하나뿐이야. 하지만 갈림길이 100개가 있고, 그 갈림길은 다시 100개의 갈림길로 연결되고, 그런 식으로―”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짜 입구가 잔뜩 있다는 거군요.”
“응, 그런데 이제 어둠은 진짜 문의 위치를 발견한 거지.”
“그렇게 된 거군요.”
유스타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여간 문 너머는 그런 개미굴 같은 세상이고, 그래서 다른 세계와의 단절이 약한 부분인가 봐.”
란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자신이 라치아로 넘어왔으며, 그건 시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스타프, 나 조금 할 이야기가 있어.”
“말씀하세요.”
“내 눈 말인데―”
유스타프가 그녀가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날이 풀리면 하레쉬를 부르지요. 엘프 의사라면 분명히 손쓸 방도가 있을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고쳐질 거야.”
란이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유스타프는 그녀가 희망사항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고쳐진다고요?”
“응. 정령이 약속했어.”
“정령과 거래했습니까?”
저도 모르게 유스타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란은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대신 우슬라의 참격을 불렀던 이야기는 빼고, 그냥 아는 정령을 불렀다는 이야기만 내놓았다.
그래서 정령이 꿈이 나타나서 빙벽에 대한 이야기와 제 눈이 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 줬다고 말하자 깊고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유스?”
란이 테이블 위를 더듬어 손을 뻗었다. 유스타프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독한 안도감이 그를 덮쳤다.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맞잡은 손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참 후에 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돼?”
“말씀하세요.”
“피아노 쳐 줘.”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피식 웃었다.
“그러지요.”
“정말?”
“정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유스타프는 란을 제 옆에 앉히고 가볍게 깍지를 끼어 손가락을 쭉 늘리며 물었다.
“어떤 걸 쳐 드릴까요?”
“아무거나.”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잠깐 생각했다가 곧 피아노 건반을 두들겼다. 익숙한 동요였다.
가벼운 곡이라 란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우리 가주님, 피아노도 잘 치시네요.”
유스타프는 기댄 란을 힐끗 보았다가 좀 더 빠르고 복잡하게 스케일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손을 더듬어 피아노 앞쪽을 만져보았지만 악보 같은 건 걸리지 않았다.
“안 보고 치는 거야?”
“네.”
“유스, 진짜 대단하다.”
란은 연신 감탄했다.
유스타프는 연달아 세 곡을 내리 쳤고, 란은 끝날 때마다 열심히 박수를 쳤다.
“우리 유스는 손가락도 예쁜데 피아노도 잘 치네.”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는 피식 웃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겨주었다. 이어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살며시 뒷목을 감쌌고, 란은 다가오는 그의 키스를 즐겼다.
부드럽게 와 닿는 입술도, 자신을 붙잡는 그의 손도 전부 좋았다.
입술을 떼고 서로 이마를 맞댄 채 잠시 있다가 란이 말했다.
“고마워.”
“뭐가 말입니까?”
“시나 말이야. 잘 대해 줘서.”
유스타프가 시나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란에게도 들어왔다.
“란의 손님이니까요.”
“응.”
대답하며 란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것뿐이지만, 아니게 될 수도 있지.
불안하지만 막을 수 없었고, 괴롭지만 말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유스타프와 시나에게 커다란 실례고, 자신이 속 좁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스타프.”
“네.”
“전에 봄 되면 약혼하기로 했던 거 있잖아.”
“네.”
“조금만 더 미루면 안 될까?”
유스타프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째서.’ 라든가 ‘왜?’ 하는 질문이 돌아오지 않아서 란은 안도하면서도 불안했다.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란이 애써 웃었다.
“그때 정령의 말에 의하면 이제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눈이 보이게 될 거야.”
“그렇습니까.”
“응.”
“그럼 성대한 연회라도 준비해야겠네요.”
란이 웃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제가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작은 걸로.”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러죠.”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아까보다 좀 더 깊은 키스였다. 유스타프는 불안감을 지우려는 듯 파고들어 그녀를 탐했다.
란이 숨을 거칠게 내쉴 때가 되어서야 유스타프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방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란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유스, 걸을 수 있어.”
“압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까지니까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런가, 하고 얌전히 안긴 채로 방으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세상이 새까맣게가 아니라 하얗게 보였다.
‘보이나?’
란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하얗게 보일 뿐, 보이지는 않았다.
‘안 보이는 건가? 아냐,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은데…….’
란은 자리에 누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뿌옇게 안개 낀 듯 보였다.
‘조금 더 기다리자.’
초조함을 억누르며 란은 누운 채로 눈을 깜박였다. 끈기 있게 기다리니 안개가 걷히듯 점점 더 시야가 밝아져서 모든 게 깨끗하게 보였다.
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려 왔다.
“백작님?”
놀라 디모디아가 달려왔고, 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빙빙 돌았다.
“이제 보여!”
디모디아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표정이 우스워서 란은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보인다는 게 이렇게 멋진 거였구나!
햇빛의 반짝임도, 눈부신 색채도, 다시 보는 얼굴들도, 너무 좋아서 란은 흥분이 멈추지 않았다.
“디모디아? 무슨 일이에요, 백작님?”
“키리도 이리 와! 소다랑 카라도!”
란이 큰 소리로 외쳐서 얼결에 불려 들어온 시녀들의 손을 잡고 란은 빙글빙글 돌았다.
의아해하던 그녀들도 란이 눈이 보인다고 말하자 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 돌다가 결국 상황이 우스워 웃음이 터져 나왔고, 모두가 웃으며 도는 걸 멈췄다.
디모디아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무리하시면 안 돼요. 치료사를 부르죠.”
“맞아요.”
카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급히 란을 자리에 앉혔다.
소다가 직접 치료사를 부르러 쪼르르 달려 나가자 키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시 보이게 되어 정말로 다행이에요, 백작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란이 웃으며 말했다.
“다시 보게 돼서 기뻐, 키리.”
씩 웃으며 란이 말하자 키리도 웃었다.
“저도 다시 보이게 돼서 기쁩니다.”
디모디아가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시야가 일그러져 보이거나?”
“아니, 그런 건 전혀 없어. 예전이랑 똑같아.”
카라의 눈에 눈물이 글썽 고였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말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응.”
란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표범 정령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다시는 함부로 정령의 힘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날아오듯이 치료사가 달려왔고, 이어 유스타프와 루미에가―그리고 시나가― 쫓아왔다.
치료사는 진찰판을 펴서 란을 살피고 눈을 살핀 후에 말했다.
“정말로 이제 보이시는군요.”
“그렇다니까요.”
란이 웃으면서 말하자 치료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조심하십시오. 하여간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는군요.”
치료사는 제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란 님께선 완치되신 것 같습니다.”
시나가 달려와 란을 꽉 끌어안았다.
“언니, 진짜, 진짜 잘됐어요―”
그러며 제 일인 것처럼 엉엉 우는 시나를 란은 웃으며 달랬다.
타이밍을 놓친 유스타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나를 바라보았지만, 란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 지었다.
루미에가 혀를 차고 새끼 고양이를 끌어내듯이 시나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란에게서 떼어 놓았다. 시나는 루미에를 향해서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가 그가 내미는 손수건에 얼굴을 북북 닦았다.
란은 그제야 떨어져서 시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미인이었다.
새까만 생머리는 차르륵 윤기가 흘러서 등허리까지 길게 떨어지고, 눈동자도 크고 까맣게 반짝거린다.
게다가 그녀는 기사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셔츠에 바지 차림.
생각했던 시나 그대로라 란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가워요.”
“네, 저도 반가워요.”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이후에 하늘 저택의 분위기는 단숨에 밝아졌다.
이방인인 시나는 그 분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열리지 않을 것처럼 미뤄졌던, 뒤늦은 신년회가 열리고 저택은 활기를 되찾았다.
✥✥✥
시나는 드레스를 입은 제 모습을 거울에 몇 번이나 비춰 보았다.
‘굉장하다…….’
연푸른빛의 산뜻한 드레스는 그녀에게 잘 어울렸고, 란이 빌려준―선물해 준다는 걸 시나는 거절했다― 머리 장식도 아름다웠다.
달랑이는 백금 장식이 무수히 달린 머리핀은 별의 폭포처럼 보였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꼭 맞는 한 쌍 같았다.
“계속 본다고 예뻐지는 것도 아닌데.”
시나가 흥 하고 루미에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그쪽의 홍당무 같은 머리카락보다는 낫죠.”
“홍당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루미에는 입을 떡 벌렸다.
“그나저나 라치아 공작가는 대단하네요. 아니, 공작이라서 그런 건가…….”
온 집 안에 장식이 달렸다. 은가시나무와 금사가 수놓인 벨벳 리본들, 녹색에 붉은 열매가 달린 가지를 엮어 만든 거대한 리스들.
현대 호텔의 크리스마스 장식도 이렇게까지 화려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에 마법 램프들까지 더해져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온풍이나 온수가 나오는 시설도 그랬다.
‘전기장판 같은 이불도 있고.’
시나가 지내기에 불편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무도회!
여자라면 설렐 수밖에 없는 단어다.
“늦기 전에 가요.”
시나가 그렇게 말하며 싱글싱글 웃어서 루미에는 픽 웃었다.
신년회는 다이아몬드 홀에서 열렸고, 올해도 풍성했다.
란은 “몇 년 전만 해도 우리가 빚에 시달렸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하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곧, 유스타프의 짤막한 신년사가 끝나자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고, 란은 유스타프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미끄러지듯 나갔다.
이제 그녀의 춤 솜씨도 상당히 나아져 있었다.
‘역시 뭐든 연습을 하면 늘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능숙하게 더블릿을 춰 보였다.
둘이 첫 네 마디를 추자, 곧이어 사람들이 플로어로 들어와 함께 간격을 맞춰 춤을 추었다.
란은 루미에와 시나가 같이 춤을 추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스타프는 빙글 돌아서, 란이 루미에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란.”
“어?”
“지금 란과 춤을 추고 있는 건 접니다.”
“아, 응.”
‘아, 응.’이라니?
유스타프의 눈이 더더욱 가늘어졌다. 그가 힐끗 루미에와 시나를 보았다.
“둘이 춤을 추고 있군요.”
“맞아.”
란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물론 자신은 루미에를 찼으니까, 루미에가 시나와 어떻든 상관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서브남으로 괜찮은 건가?’
두 번 차이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란.”
유스타프가 힘주어 다시 그녀를 불러 란은 그제야 시선을 떼어 유스타프를 보았다.
어색하게 그녀가 말했다.
“시나, 예쁘지 않아?”
“예쁘네요.”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나에게 준 드레스와 장식이 다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었고, 여자들이 그런 걸 신경 쓴다는 것 역시 풍문으로 들었다.
“머리 장식도 참 잘 어울리고요.”
그래서 그는 힘주어 란이 선물했을 장식을 칭찬했고, 란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며 그녀가 덧붙였다.
“다음 춤은 시나랑 추는 게 어때?”
유스타프는 잠시 머뭇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란이 시나를 신경 쓰고 있고, 그녀가 저택에서 호의를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주가 환대해 주는 거다.
‘이미 란 덕분에 환대는 충분한 것 같지만.’
어째서 저 여자를 저렇게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하고 유스타프는 생각했지만, 란이 원하는 거라면 눈사람이라도 극진히 대접할 생각이었다.
첫 춤이 끝나자 유스타프는 시나에게 가서 춤을 신청했고, 시나는 뺨을 붉히고 란을 한 번 보았다가 유스타프와 함께 춤을 추었다.
란과 달리 시나는 운동 신경이 좋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은 레슨으로 금방 춤에 익숙해진 후였다.
“백작님,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공손하게 루미에가 춤을 청해서 란은 그 손을 잡았다.
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저번에 내가 춤 가르쳐 주려다가 실패한 거 생각나는데.”
“남자 쪽 스텝은 전혀 모르신다면서 말이죠.”
“맞아. 이제 루미에도 잘 추네…… 어째 나만 못 추는 것 같아.”
“잘 추시는데요?”
“더블릿만 이 정도야. 다른 춤은 영― 그냥 실수만 면할 정도지.”
란의 말에 루미에는 피식 웃었다. 그가 유스타프와 춤추는 시나를 바라보고 속삭였다.
“둘이 즐거워 보이네요.”
그 말에 란이 힐끗 유스타프를 보았다. 그는 드물게도 웃고 있었다.
시나는 그에게 재잘재잘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네.”
란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도무지 똑바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루미에가 잠시 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
“가주님과 주인님 말이지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 가주님이 다른 여자랑 춤을 춘다고요?”
“내가 춰 달라고 했으니까.”
그 말에 루미에가 눈을 찌푸렸다. 란이 시나를 챙기는 건 알고 있지만 그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란은 루미에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미안.”
“뭐가요?”
“시나가 마음에 든 거 아니었어?”
그 말에 루미에는 눈을 크게 떴다.
“저 봄날 망아지 같은 여자를 말이에요?”
“어― 아니야?”
“아닙니다.”
그의 말투는 단호하다 못해 사나울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당황한 란이 시나를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나는 괜찮은 아이야. 좋은 아이고, 명랑하고, 운동 신경도 좋고, 말도 잘 타고―”
루미에는 아차 싶었다.
지금 자신은 그 말을 ‘여자로 좋아하냐’고 받아들었다.
하지만 란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던 거다.
루미에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야 좋은 아이지요. 제가 오해했네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루미에가 란을 빤히 보았다. 그녀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보는 게 좋았다.
“어딘지 주인님을 닮았어요.”
“뭐?”
내가?
여주인공이랑?
어디가?
란이 눈을 크게 뜨자 루미에가 웃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점이 말이죠.”
“그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아뇨, 다르게 보지요.”
루미에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여기서 겉돌아요.”
“루미에―”
“아뇨, 자조적인 게 아니라, 진짜로요. 기사단원들은 귀족의 자식들이죠. 둘째든, 셋째든, 넷째든 말이에요. 저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 왔고 그건 건널 수 없는 뭔가예요.”
“…….”
란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루미에가 그녀의 얼굴에 싱긋 웃었다.
“그런 얼굴 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런 식의 겉도는 건 시나도 똑같지요. 그런 느낌의 동지애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게다가.”
루미에가 짐짓 눈을 찌푸렸다.
“제가 과거에 노예였다고 말하니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그거 진짜 힘들었겠네요.’라고 하더군요.”
란은 입을 벌렸고, 루미에는 히죽 웃었다.
“저 진짜 배를 잡고 웃었다니까요. 그런 개념이 없는 거죠, 저 아가씨는.”
그런 게 당신과 이상하게 비슷하고, 그게 마음에 든다.
루미에는 뒷말은 삼켰다.
춤이 끝나고 플로어 밖으로 나오자 시나와 유스타프가 다가왔다.
시나가 웃으며 치맛자락을 붙잡고 우아하게 인사를 해 왔다.
“백작님.”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우리 사이에.”
“아뇨, 이런 인사를 해 보고 싶었거든요.”
시나의 말에 란은 다시 웃었다. 맞아. 자신도 어릴 때 많이 해 봤다.
“뭔가 마시지 않겠습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들은 음료를 가지러 떠났다.
시나는 란과 둘이 남자 속삭였다.
“공작님 진짜 멋있어요.”
란은 심장 어디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만약 원래 흐름대로 흘러간다면 란은 막지 않을 거다. 그녀에겐 막을 권리가 없었다. 유스타프는 행복해질 거다. 살아남을 거고.
“그렇지?”
“네.”
시나가 씩 웃으며 이어 뭐라고 하려는데, 저쪽에서 일루미니티 백작이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고 말했다.
“부상이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네, 다행히도 늦었지만 신년회도 열게 되었네요.”
일루미니티 백작이 고개를 돌려 시나를 보았다. 란은 시나를 ‘문 너머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이라고 표현했고, 그 말에 백작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인간입니까?”
“인간이에요.”
시나가 씩 웃으며 대답하자 백작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차례로 시나를 소개했고, 호기심에 더해서 란과 유스타프의 호의 덕분에 부드럽게 시나는 받아들여졌다.
어쨌든 라치아 공작이, 가주가 신원 보증한 손님이다.
그렇다면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대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란이 궁금한 점을 주고받는 시나와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란스 남작이 란에게 속삭였다.
“잠깐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란이 웃고 시나에게 말했다.
“유스타프랑 루미에가 돌아오면 맡아 줘요.”
“네.”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란은 란스 남작과 이야기를 나눴다. 큰 문제는 아닌, 내년 란스 남작령에 큰 보수가 필요한데 돈을 융통해 줄 수 있겠냐는 이야기였다.
란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될 것 같아요. 유스타프에게도 이야기해 둘게요.”
“네, 감사합니다.”
란스 남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란은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유스타프와 시나, 루미에 셋이 서서 이야기하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세 사람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다. 그곳에만 핀 조명이 떨어지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유스타프와 시나가 잘된다면, 흐름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고 그렇다면 유스타프도 안전하겠지.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란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슬며시 테라스로 빠져나왔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