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Truth will set you free
Chapter 1. Truth will set you free
테라스를 걸으며 란은 추위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신데렐라를 눈앞에 두고 있는 왕자의 약혼녀 같군.’
란은 피식 웃었다.
신데렐라 책 속에 떨어져서 왕자의 약혼녀가 되었는데, 드디어 그 무도회가 열리고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눈부신 아가씨가 되어 나타났을 때.
‘이런 느낌이겠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 괴로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우뚝, 테라스에 멈춰 서서 그녀는 탄식하듯 깨달았다.
‘나 정말로 유스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유스타프를 시나에게 넘겨주겠다거나 운명을 따르겠다거나 그딴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유스타프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래서 사랑을 하면 약점이 생긴다는 건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유스타프가 안전하고 행복하다면, 나는 괜찮아.
왜냐면 유스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기에, 이렇게나 괴롭다.
‘슬슬 들어갈까. 아니면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하나.’
하지만 너무 몸이 차가워져 있어도 유스타프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어딘가 들어가 있는 게 좋겠다.
‘술 창고나 털까.’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나는 슬슬 유스타프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는 걸 눈치챘다.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란 언니, 왜 안 오시는 거예요?’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란스 남작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남작님!”
그녀의 발랄한 어조에 란스 남작은 피식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란 언니― 아니, 로미아 백작님과 이야기 다 끝나셨나요?”
란스 남작은 의아한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아직 안 오셨습니까? 한참 전에 끝났는데요.”
“정말요?”
“네.”
“그 뒤로 다른 분을 만나신 건가요?”
“그건 모르겠군요.”
란스 남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힐끗 유스타프를 한 번 보았다가 잽싸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시나가 말했다.
“여성용 휴게소에 가 볼게요.”
혹시 배가 아프신 걸 수도 있고!
유스타프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해서 시나는 양 드레스 자락을 쥐어 올리고 빠르게 걸었다. 아니면 자꾸 드레스 앞자락을 밟게 되기 때문이었다.
시나는 똑같은 드레스인데 란은 어떻게 그렇게 가볍고 우아하게 걷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여성용 휴게소로 가 보았지만, 거기에도 란은 없었다.
쉬고 있던 다른 레이디에게 물어보니 온 적도 없다고 한다.
시나는 당황해 다시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만 봐도 유스타프는 란이 그곳에 없다는 걸 알았다.
“휴게소에 안 계세요. 물어보니 오신 적도 없대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들어 플로어에서 한창 콰트로움(4명이 짝지어 추는 빠르고 경쾌한 춤곡)을 추고 있는 키리에게 손짓했다.
키리는 쿵쿵 스텝을 밟다가 웃고는 재빠르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제 자리에 넣고 플로어를 빠져나왔다.
“가주님, 무슨 일이세요?”
“네 주인이 안 보여.”
“란 님이요?”
키리가 갸웃했다가 말했다.
“아까 나가시는 건 봤는데, 들어오시는 건 못 봤군요.”
“나가?”
유스타프의 말에 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뒷문으로 나가시던걸요. 전 휴게소에 가시나 했지요. 혹시 여성의 사정일지도 모르니 좀 더 기다리세요.”
“한 시간째?”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요?”
키리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낮게 말했다.
“따로 다른 보고는 없었습니다. 저택은 안전하고요.”
유스타프는 답 없이 손을 저었고, 키리가 싱긋 웃고 물러났다.
“제가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루미에의 말에 유스타프는 “아니.” 하고 손가락으로 시나의 정수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붙어 있어.”
시나가 당황해 말했다.
“저도 같이 언니를 찾아볼게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는 시나를 무시하고 그대로 연회장을 떴다.
아니, 뜨려고 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는 란을 보고 눈을 찌푸리며 빠르게 다가갔다.
“유스? 어디 가?”
“란을 찾으러요.”
“아― 괜찮은데. 미안.”
란이 미소 지으며 말했고, 유스타프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란.”
“응?”
“몰래 술 마셨습니까?”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여기서 마음껏 마실 수 있는데 왜 몰래 술을 마셔?”
“그건 그렇습니다만―”
뭔가 이상하다.
란이 키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시나를 혼자 두면 안 되지.”
“혼자 안 뒀습니다.”
유스타프가 대답했고, 돌아오는 란을 보고 시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 걱정했잖아요.”
“바깥 공기 좀 쐬었답니다. 이야기는 잘 했어요?”
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연회는 별문제 없이 이어졌고, 잘 끝났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유스타프와 시나, 그리고 루미에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그건 저택의 사람들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다.
딱히 란이 유스타프를 멀리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시나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카드를 보았다가 유스타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카드 룸에는 시나와 유스타프 단둘뿐이었다.
란이 잠깐 뭘 좀 가져오겠다고 짐꾼으로 루미에를 데리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란은 시나와 유스타프 둘만을 남겨두는 일이 잦았다.
시나는 카드를 슬쩍 덮으며 말했다.
“혹시 두 분 싸우셨나요?”
“아니.”
유스타프는 대답하고 시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렇게 란이 자리를 뜬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니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었다.
물건 가져오는 건 시녀를 시키면 된다.
란이 직접 가지러 갈 귀한 물건이라면 굳이 루미에가 짐꾼으로 필요할 만큼 큰 물건도 아닐 터다.
이게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벌써 여러 번째였고, 유스타프는 그게 손거스러미만큼이나 거슬렸다.
그를 더 짜증 나게 하는 건 도무지 란과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거였다.
그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말했다.
“란에게 뭔가 들었나?”
“아니오.”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눈앞의 공작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상당히 무서웠다.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의 눈동자는 무기질적인 느낌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친절한 것은 오로지 란이 그녀에게 친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둘이 남는 거 싫은데.’
시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신음을 삼켰다.
“안 오는군.”
“늦어지시네요…….”
유스타프는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그가 툭툭툭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들겼다.
결국 그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는 찰나, 문이 열렸다.
“미안,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란이 들어오며 사과했다. 루미에는 손에 큰 상자를 들고 있었다.
시나가 농담처럼 말했다.
“길 잃어버리신 줄 알고 찾으러 가려고 했어요.”
진짜로.
하지만 당연히 란은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란이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했어?”
“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했고, 시나는 “아뇨?” 하고 대답하려다가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유스타프가 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게 너무 빤히 보여서 시나는 그의 편을 들어 주었다.
“공작님이 재미있는 이야기 해 주셨어요.”
“정말? 그랬구나.”
란은 그러며 얼른 상자 뚜껑을 열어 표정을 감췄다. 거기에는 검은색 망토가 들어 있었다. 뭐로 짜여 있는지 고급스러운 광택이 자르르 흘렀다. 그리고 목을 감싸는 부분에는 풍성한 털이 달려 있었다.
모두가 망토를 바라보는 사이, 란은 표정을 정돈했다.
한 박자 숨을 들이마시고 란이 말했다.
“시나에게 선물로 줄게. 겨울에 따뜻할 거야. 라치아에서 살아가는 데 망토는 필수니까.”
“네? 하지만, 이거 비싸 보이는데요?”
시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걸로도 충분해요.”
“아냐, 시나에게 어울릴 거야. 말 탈 때는 모피 달린 망토가 꼭 필요하지요.”
유스타프가 그걸 보다가 낮게 말했다.
“이거 어머님 거 아닙니까?”
“어? 응.”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미에도 시나도 퍼뜩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이 웃었다.
“하지만 난 안 쓰는걸, 키도 안 맞고. 그래도 시나에게는 잘 맞을 거야.”
“하지만, 유품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꼭 시나가 받아주면 좋겠어.”
란이 그렇게 말하며 상자 뚜껑을 덮어 시나에게 밀어 주었다.
시나는 도로 그 상자를 란에게 밀었다.
“아니에요. 이런 건 못 받아요.”
“시나.”
“받아.”
유스타프가 말하며 상자를 시나에게 밀고는 란에게 말했다.
“란에게는 제가 새로 하나 맞춰 드리지요.”
“어?”
란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시나가 “아, 그런 거라면.” 하고 상자를 당겼다.
진짜로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유스타프에게 장단을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 망토 많은데.”
“방금 하나 줄었잖습니까?”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게다가 전부 란이 번 돈인걸요. 얼마든지 사치품을 사들이십시오.”
그가 손등에 입 맞추며 속삭였고 란은 웃었다.
시나가 씩 웃고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이번 게임에서 란 언니가 유스타프 님께 지면 망토를 받는 걸로요.”
“괜찮군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고, 란은 할 말이 없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가 피식 웃고 제 카드 패를 들었다.
“새 망토 디자인을 생각해 두시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당연히도, 유스타프는 게임에서 란을 이겼고 란은 새 망토를 주문하겠다고 약속했다.
✥✥✥
화창한 겨울날이 이어졌다.
그 후로 마수의 ‘마’ 자도 보이지 않아서, ‘단순히 우연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아니지.’
란은 오히려 평화로운 이 상황이 더 불안했다.
어딘가에서 적이 이미 부활해 힘을 비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란은 창문 밖으로 말을 타는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운동신경이 좋은 시나는 말을 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란보다 훨씬 더 말을 잘 탔다.
란이 그녀의 말을 시나에게 주겠다는 걸 주변에서 뜯어말리고, 유스타프가 다른 말을 시나에게 내주었다.
시나가 말을 타고 루미에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루미에가 제 검을 뽑아서 주자 그녀는 그걸 휘두르다가 바닥에 떨어트렸다.
란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루미에가 시나를 놀리며 검을 집어 드는 게 보였다.
‘사이좋네.’
“백작님? 뭘 그렇게 보세요?”
디모디아의 말에 란이 창에서 시선을 떼고 제가 어루만지던 귀걸이를 들어 올렸다.
“응, 아무것도 아냐. 디아, 이거 어때?”
“자수정 귀걸이네요. 포도 넝쿨 모양이 진짜 같은걸요. 예뻐요.”
“디아 줄게.”
“네?”
디모디아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란이 웃으며 귀걸이 한 쌍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보라색이니까 잘 어울릴 거야.”
“백작님.”
디모디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얼마 전부터 란은 이렇게 시녀들에게 조금씩 장신구를 선물하고 있었다.
란이 장신구를 사들이는 일 자체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녀의 장신구가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 말을 하면 란은 웃으며
“무슨 말이야, 공작가의 보물관이 있는데.”
하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라치아의, 공작 부인의 보물관이다.
란 로미아 개인의 물건은 아니라는 거다.
디모디아가 제 손에 올려진 귀걸이를 꽉 쥐고 물었다.
“역시 무슨 일 있으신 거지요.”
“으응?”
란이 당황해 디모디아를 보자 그녀의 보라색 눈이 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 오랫동안 란 님을 모셔 왔어요. 그리고 란 님이 절대 허투루 뭔가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아니, 나 의외로 허술한데.
하지만 그런 말이 나올 분위기가 아니라 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건 꼭―”
“신변 정리라도 하시는 것 같잖아요?”
키리가 그렇게 말하며 슥 끼어들었다. 란은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유스타프와 시나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고, 란은 그걸 견딜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스트레스 때문에 란의 몸무게는 줄어들고 있었다.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며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무엇이든 구해 오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란이 웃었다.
“아냐.”
키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로요?”
“응. 그냥, 좀.”
란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야.’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란 님, 저희는 바보가 아니에요.”
키리가 딱 잘라 말해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모디아가 놀라 키리를 보았다.
키리가 말했다.
“이거 시나 님이랑 가주님과 관계있는 거 아닌가요?”
“어?”
란은 너무 놀라 목소리가 살짝 뒤집히듯 올라갔다.
“역시.”
키리가 흥, 하며 란에게 말했다.
“저택 사람들도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정말?”
“네.”
“키리.”
당황해 디모디아가 키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키리가 입을 내밀었다.
“물론 저흰 란 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어떤 뜻인지 몰라요. 하지만―”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키리는 입을 다물었다.
“란 언니?”
들리는 목소리에 란은 “들어와.” 하고 말했다.
시나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 말했다.
“같이 썰매 타러 가지 않으실래요?”
“썰매?”
“네. 전에 루미에와 함께 타셨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알아보니까―”
시나가 킥킥 웃었다.
“공작님이 썰매를 만들어 두셨다는데요. 같이 타러 가요, 네?”
시나가 졸라 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며 물었다.
“가주님도 같이 가는 거야?”
“아직 안 물어봤는데요.”
“그럼 물어보자.”
“네.”
시나는 경쾌하게 대답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고, 란이 갸웃하고 물었다.
“말하러 안 가?”
“아― 시녀를 시키는 게 낫지 않나요……?”
조심스럽게 시나가 되물어서 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다녀오죠.”
디모디아가 이어 “그럼 옷 먼저 갈아입으세요. 단단히 입으셔야지요.” 하고 말했다.
란이 파티션 너머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시나는 썰매가 너무 기대된다, 여기 설질 진짜 좋다, 스키나 스노보드 타고 싶다,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란이 칭칭 동여맨 차림을 하고 나왔을 때 키리가 돌아와 말했다.
“가주님도 함께 타러 가신답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나와 손을 잡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시나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진짜 너무 껴입지 않았어요? 계단에서 누가 밀면 통통 굴러갈 것 같아요.”
란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것도 조금도 아프지 않고.”
“그죠? 그죠?”
시나가 깔깔 웃었다.
내려가니 벌써 유스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란이 물었다.
“그렇게 얇게 입고 되겠어?”
“란처럼 입으면 걷지도 못할 겁니다.”
“아닌데, 잘 걷는데.”
란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현관 밖으로 나오니 쨍한 겨울 햇살이 눈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조금만 놀아야지.’
잘못하면 설맹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란은 루미에가 들고 있는 썰매를 바라보았다.
유선형으로 다듬어진 썰매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고, 양쪽에 잡을 수 있게 만들어진 끈에는 호두만 한 방울이 잔뜩 달려 있었다.
“예쁘다.”
란이 작게 탄성을 터트리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전에 썰매가 재미있으셨던 것 같아서.”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어…….”
란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정수리에 키스하고 말했다.
“란에 대한 거라면 뭐든 기억하지요.”
란이 살짝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녀가 재빠르게 루미에 옆에 가서 서며 말했다.
“그럼 유스랑 경주할래! 누가 먼저 내려오나 내기하자.”
루미에도, 시나도 순간 얼굴이 굳었다.
유스타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싫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더는 참을 수가 없군요.”
“유, 유스……?”
란이 당황해 말을 더듬자 유스타프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더니 란을 번쩍 안아 들어, 제 어깨에 멨다.
“유스타프?!”
비명처럼 란이 소리를 질렀다. 감자 포대마냥 그의 어깨에 얹혀져서 란은 버둥거렸다. 옷을 두껍게 입고 있어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사람들 앞에서?
유스타프가 한 손으로 그녀를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 루미에에게서 썰매를 받아 들며 말했다.
“둘이 나머지는 알아서 놀지.”
루미에는 어깨를 으쓱했고, 시나는 재빨리 루미에의 뒤에 숨었다.
그녀는 “말도 안 돼!”, “내려줘!” 하고 외치는 란을 씩씩하게 짊어지고 가는 유스타프를 바라보며 루미에에게 말했다.
“란 언니는 대단한 것 같아.”
“뭐가?”
루미에가 묻자 시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공작님을 평범하게 대한다는 게?”
그 말에 루미에는 피식 웃었다. 시나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다른 쪽으로 가서 놀까.”
“그게 좋겠지.”
루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결국 소리치며 버둥거리는 걸 포기했다.
요즘 제대로 먹지 못해서 힘도 없는데, 이렇게 발버둥 쳐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축 늘어진 란을 메고 유스타프는 별로 힘들지도 않게 설산을 올라갔다.
“유스.”
“네.”
“내려주면 안 돼?”
“싫습니다.”
“유스.”
“네.”
그녀가 상체를 끙끙거리며 들어 올려 그를 돌아보려 하며 물었다.
“화났어?”
“아직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 란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높이 걸어오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가 썰매를 눈 위에 꽂아 놓고 물었다.
“왜 이러시는지 이야기를 해 보시죠. 그 다음에 제가 화낼지 결정하겠습니다.”
“뭐가……?”
모르는 척 되물었지만, 유스타프는 팔짱을 끼고 란을 바라보았다. 회피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푸른 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란은 그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유스.”
“네.”
“만약에―”
“네.”
“내가…….”
대답 없이 그는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라치아에서 떠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그녀는 단숨에 질문을 내뱉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어떤 대답이라도 나는 괜찮으니까.”
“솔직하게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들어 유스타프를 보았다.
어떤 대답이든 솔직한 대답을 원했다.
사실은 시나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거나…….
그래서 가 준다고 하면 마음이 조금 가벼울 것 같다거나.
“못 떠나게 할 겁니다.”
“역시, 그러― 으응?”
유스타프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나지 못하게 할 겁니다. 떠났다고 해도 라치아로 돌아오셔야 하겠지요.”
멍하니 란은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제가 도망칠 기회를 드렸습니다. 그걸 차 버리신 건 란, 그대지요. 저는 한번 붙잡은 건 안 놓칩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낮게 으르렁거리며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팔을 쥐었다.
“이대로 도망치게 놔둘 줄 알아?”
“유스…….”
란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와 스러졌다.
“시나가 좋아지지 않았어?”
“그게 무슨 개소― 실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을 유스타프가 재빠르게 고쳤다.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립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혹시 유스타프가 잘못되면 어떻게 해?
“란?”
“나는, 난, 유스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유스는 시나랑 잘되어서―”
말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나 예쁘잖아, 나랑 달리 운동신경도 좋고, 명랑하고, 너랑 말도 잘 통하는 것 같고, 대화도 즐겁다며? 시나에게 친절하게―”
“란 로미아!”
결국 소리 지른 건 유스타프였다.
그가 그녀에게 낮고 빠르게 말했다.
“제 마음은 제 것입니다. 그렇게 적당히 짐짝처럼 다른 사람에게 밀어붙인다고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게다가―”
그가 이를 악물었다가 이어 말했다.
“제 의심이 진짜였군요. 그래, 그렇게 싫어지셨습니까? 도망치고 싶으실 정도로?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구는 게 아니라!”
란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
“그런 식으로―”
그는 이를 꽉 물었다.
멋대로 다정하고, 멋대로 상냥하고, 멋대로―
빗방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뿐이면, 영원히 구멍 난 바위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허탈해져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이제 적당히 다른 사람을 밀어붙입니까? 그게 당신의 잔인한 마지막 친절인가요?”
란은 눈이 화끈해졌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서 후두둑 떨어졌다.
“아냐, 유스. 난, 그런 게 아니라―”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따끔거리며 얼어붙었다.
“유스타프가 좋아.”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유스타프가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그녀의 손을 밀어내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냈다. 금이 간 유리를 다루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울지 마십시오. 다 얼어붙습니다.”
그녀의 젖은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스타프는 그 눈가에 키스하고 속삭였다.
“절 좋아하신다면 곁에 있어 주세요.”
“그럼, 하지만, 해피엔딩이 아닐지도 몰라.”
“그럼 떨어지면 해피엔딩이 됩니까?”
“그건…….”
란은 입을 벌렸다.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였다.
‘아, 제길.’
유스타프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서―
간신히 키스를 끝내자 란은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자 다시금 참을 수가 없어져 그는 거듭거듭 키스했다.
란은 숨에 허덕이면서도 그의 키스에 응했고, 그게 그를 더 짜릿하게 만들었다.
입맞춤을 끝낸 유스타프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고, 란이 그의 품에서 속삭였다.
“유스.”
“네.”
“내 이야기, 들어 볼래?”
유스타프는 “얼마든지요.” 하고 대답했다.
란은 한숨을 내쉬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럼 저도 같이 미치면 되지요.”
“유스.”
“진심입니다. 그러면―”
유스타프는 썰매를 들며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고, 근처의 오두막으로 가죠.”
“오두막이 있어?”
“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택으로 가서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지금의 용기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할 수 있을 때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유스타프 말대로 얼마 걷지 않아서 란은 오두막을 발견했다. 나무로 지어진 통나무집은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안쪽도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어서 란이 물었다.
“사냥용 오두막이야?”
“빙벽에서요?”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말했다.
“겨울 사냥 때 쉬는 용입니다.”
“아, 그런데 기사들이 다 묵기에는 작잖, 그렇군. 유스타프용이구나.”
란이 놀리듯 목소리를 높이자 유스타프가 태연히 대답했다.
“부상자용이지요.”
“아, 미안.”
오해했어, 하고 란은 얼굴을 붉혔다. 유스타프가 오두막 안 화덕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날씨가 갑자기 좋아지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요. 이런 오두막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렇구나.”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벽도 없는, 원룸이었다. 커다란 화덕은 다행히도 얼음수정을 사용하는 신식 물품이어서 순식간에 오두막 안은 따뜻해졌다.
벽에 붙어 있는 침대 겸 의자에는 이불도 한 채 있었다. 아무래도 ‘다사’ 같다.
란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사실 난 란이 아냐.”
유스타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란은 어색하게 미소 짓고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정령과의 만남, 자신이 읽는 자라는 거, 자신도 시나와 같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든가, 처음에는 책이라고 오해했던 것.
“이상한 소리 같지? 그런데 꿈에서 정령이 나와서―”
처음에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조금도 타박하지 않았고,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들었다.
집중해서 한 마디 한 마디 참을성 있게.
그렇게 듣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는 사람도 점점 침착해지기 마련이다.
란의 떨림은 멈추었고, 그녀는 좀 더 깊이 자기 내면의 이야기와 읽었던 내용을 이야기했다.
프하니아스, 정령의 이름을 아는 이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너와 시나가 이어져야 하거든. 그러면 제대로 해피엔딩인데…… 이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고 해서, 난 불안해서…….”
란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들었다. 유스타프는 여전히 변함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유스타프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란의 어깨가 작게 흠칫 떨렸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럼 원래 이름은 뭡니까?”
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작게 말했다.
“란.”
이름은 똑같아.
그녀가 그렇게 속삭이자 유스타프가 웃었다.
“그럼 적어도 틀린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 고백을 한 건 아니었군요.”
란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가 속삭였다.
“란.”
“응?”
“란, 란.”
그가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란은 가슴속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름이 같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알고 부르는 ‘란’과 그렇지 않은 란은 정말로 큰 차이가 있어서―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고,
란은 눈시울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그가 부르는 이름은 그녀의 심장 안쪽에서부터 진짜 그녀를 부르는, 그런 이름 같았다.
란.
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음악적인 이름이라고, 란은 부끄럽지도 않게 그런 생각을 했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마주 끌어안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부터라고요.”
“응.”
“역시.”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란은 눈앞의 란이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좋았지만.
“란.”
“응?”
“혹시 동정 때문에 저와 사귀는 겁니까?”
당신이 읽은 것 속의 그 소년이 불쌍해서.
“그럴 리가 없잖아. 유스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진작 도망갔을걸.”
그렇게 중얼거리고 란은 슬쩍 유스타프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게 전부야?”
“네?”
“다른 거 뭐 없어?”
“오히려 의문스러웠던 부분이 풀려서 시원합니다.”
란에 대해 의심스러웠던, 하지만 덮고 지나간 부분들이 이걸로 다 풀렸다.
문득 유스타프는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루미에도 옛 지인이 아닌 거군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의 얼굴은 좀 더 밝아졌다.
란 역시 자신의 비밀을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그녀는 하나 깨달았다.
진짜 친밀감은 비밀을 사이에 두고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녀에 대해서 이제 모두 아는 유스타프가 있다.
그녀는 그제야 이 땅에 발을 딛고 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유스타프와도 더욱더 가깝게 느껴졌다.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게다가 제가 시나를 좋아한다는 오해는 어디서 오신 겁니까?”
“그렇지만…… 전에 신년회 때―”
란이 웅얼거렸다.
“같이 춤추면서 웃었잖아…… 그리고 시나도 유스를 보고 멋있다고 했고, 나만 없었으면 둘이서 잘되지 않았을까?”
“란.”
“응?”
슬쩍 그를 보니 어쩐지 유스타프는 웃고 있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웃었던 건 시나가 란 칭찬을 속사처럼 늘어놨기 때문입니다.”
“어?”
그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질투하신 거로군요.”
란은 눈만 깜박였고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닙니까?”
란은 반짝이는 사파이어 눈동자를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했어……. 조금…….”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저만 질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란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스가?”
“당연히 하지요. 제 것에 손을 대는 것 같은 작자가 있으면 말입니다. 그 루미에라는 놈도 그렇고―”
블레인도 너무 가까운 게 싫었다. 라벨도 그렇고.
하지만 뒷말을 삼키고 유스타프는 그녀에게 한 번 더 입 맞췄다. 그녀도 질투하는 일이 있다니.
그건 그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입맞춤을 끝낸 후 유스타프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예언은 이미 란이 아카데미로 절 찾아올 때부터 틀어진 겁니다. 이제 와서 제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일도 없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하게 되었다면,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게 된 거 아닙니까?”
“응.”
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는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란을 끌어안았다.
“정말로 걱정했습니다. 란의 마음이 변한 걸까 봐.”
“미안해.”
지금 이렇게 전부 다 고백하고 유스타프의 품 안에서 생각하니, 창피하기 짝이 없는 짓들이어서 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시녀들에게 한 소리 들었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그래요?” 하고 물었고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생각이냐고, 묻던데.”
유스타프가 그녀를 꽉 붙잡고 말했다.
“그래서, 정말로 그러실 생각이었습니까?”
란은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굴리고 솔직하게 말했다.
“응.”
유스타프는 기가 차서 그녀의 얼굴을 들게 하고 말했다.
“라치아에서 나가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셨습니까?”
돈 한 푼도 없이, 이곳을 나가서 어떻게 하려고?
그녀가 도망가는 것도 싫었지만, 어디 가서 그녀가 고생한다는 건 더욱더 싫었다.
란은 솔직해진 김에 마저 솔직해지기로 하고 말했다.
“마련해 둔 신분이 있거든.”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고요?”
“어, 도주용으로, 따로 파 놓은 신분이 있어서…… 그걸 쓰려고 했지.”
“언제부터인가요?”
“응?”
“언제부터 그 신분을 마련해둔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생각은 처음부터 했어. 본격적으로 마련한 건 유스타프의 성인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일까?”
유스타프는 짧게 신음을 내뱉고 말했다.
“누님이 술을 마셔서 다행이었군요.”
“어? 술?”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 날 취하셔서 저에게 조건을 이야기하라고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전 좀 더 있다가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란을 빤히 보았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란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게.”
란은 갸웃하고 웃었다.
“타이밍이 좋았네.”
유스타프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란은 지금 가볍게 웃고 있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전부가 걸린―
‘전부.’
유스타프는 생각을 멈췄다.
그는 눈앞에서 눈을 깜박이며 미소를 머금고 ‘왜?’ 하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부터 자신의 ‘전부’가 되었을까?
나의 라치아가 언제부터 란이 되어버렸을까?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유스타프는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정말이지.”
“유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 갑자기 실내가 단숨에 어두워졌다. 란은 ‘불이 꺼졌나?’ 하고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유스타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신음을 삼켰다.
“뭐야? 왜 갑자기 깜깜해졌어?”
란이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란은 입을 떡 벌렸다.
“눈 폭풍!”
그녀는 소리치고 저도 모르게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가, 몸이 문짝을 따라 휙 딸려 나가는 걸 느꼈다. 바람이 강해서 문짝이 열리는 걸 따라 손잡이를 붙잡은 란이 딸려 나간 것이다. 그걸 유스타프가 붙잡아 안으로 끌고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란은 숨을 헐떡였다.
그 잠깐 사이에 벌써 실내에 눈이 들어와 구석에 쌓였다.
“어, 어, 어떻게 하지?”
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급격히 오두막 안의 온도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유스타프는 오두막의 덧창을 전부 다 닫고 램프를 켰다.
덜컹덜컹 창문과 문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가 함께 섞여 들려왔다.
“폭풍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그가 장작처럼 가지런히 쌓여 있는 얼음수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사나흘은 버틸 겁니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 장작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야.”
“다행이지요.”
란이 제 옷을 벗으며 말했다.
“이걸로 창문이랑 문틈을 다 막자. 외풍만 줄어도 훨씬 나을 거야. 그리고 이 옷 너무 두꺼워서 움직이기가 불편해.”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도리에 망토, 털 코트, 그 안에 또 다른 코트, 카디건, 스웨터, 조끼, 셔츠.
이렇게 둘둘 만 차림이었으므로 란은 옷을 다 벗고 나자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스웨터와 조끼까지 벗어버리고 셔츠에 카디건 차림이 되었다.
“유스타프는 안 추워?”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냐고 물은 게 아니라 안 춥냐고 물었어.”
“안 춥습니다.”
“어떻게 코트만 입고 안 추울 수가 있어?!”
그녀가 비명처럼 되물어서 유스타프는 피식 웃었다.
“그다지 추위를 타지 않는 체질인 것 같군요.”
유스타프는 코트에 재킷, 조끼, 셔츠 차림이었다.
그 조끼가 자신의 조끼처럼 털 조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유스타프는 셔츠에 바지 차림이 되어서 화덕 온도를 더 높게 조절했다.
뜨거운 바람이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란은 제 털장갑도 벗어서 나란히 두었다.
“너무 온도 높인 거 아냐?
란의 물음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시작일 겁니다. 공기를 미리 덥혀 두는 게 좋습니다.”
“그래?”
란은 한숨을 내쉬고 화덕가로 다가왔다.
“그래도 마법 세공품으로 세팅해 놔서 다행이야.”
“다행이죠. 나무였으면 얼마 못 버텼을 겁니다.”
“큰일이다…….”
란이 중얼거려 유스타프가 “뭐가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아니, 유스타프가 여기 고립됐잖아. 지금쯤 밑에서 난리 난 거 아냐? 괜히 찾으러 온다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멍청이들은 아니겠지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불을 가져와서 나무 의자에 깔았다.
란이 흔들리는 덧창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빨리 그치면 좋겠다.”
“그렇습니까?”
“아냐?”
란이 놀라 그를 보자 유스타프가 희미하게 웃었다.
“모처럼 단둘뿐인데요.”
앗, 하고 란이 어깨를 움츠렸다. 유스타프가 의자에 앉으며 “이리 오세요.” 하고 팔을 벌렸고 란은 얼굴을 붉히며 머뭇머뭇 그에게 다가갔다. 유스타프는 그녀를 가볍게 다리 위에 앉히고는 이불을 감았다.
“저택에서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까요.”
그의 말에 란이 작게 웃었다.
“그런가? 하지만 단둘이 방에 있을 때도 있잖아? 적어도 그런 게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아.”
디모디아와 카라와 소다가 매일매일 눈을 부릅뜨니까.
키리만은 ‘그런 거, 뭐’ 하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곤 했다.
유스타프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참았지요.”
“응?”
“아닙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이어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읽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응.”
“좀 더 자세히 해주지 않겠습니까?”
“아,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기억하는 한 자세히 이야기했다. 유스타프는 린드버그 남작이 섭정한 이야기며, 그의 딸―즉 자신의 사촌과 자신이 결혼했던 이야기 같은 걸 표정 변화 없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럴 법한, 그냥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뒤로 갈수록 란의 이야기는 두루뭉술해졌고, 이후의 이야기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란은 제가 아는 걸 털어놓았다.
“델판토라고 했었잖아? 그 벽에 봉인된 어둠 말이야.”
“네.”
“그거 아마 블랙 드래곤일 거야.”
유스타프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가물가물한데, 분명히 그랬던 것 같거든. 원래는 둘이 연인 사인가? 그랬을 거야.”
“연인이요?”
“응, 그런데 이브리아가 마수로부터 대륙을 구했잖아? 그녀 자체가 굉장한 강자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희생은 컸지.”
란은 유스타프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델판토는 생각한 거야. 저 자식들이 없으면, 이브리아가 힘들 일도 없는데?”
“과연.”
유스타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드워프와 엘프.
종족간의 화합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사실 같은 종족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브리아는 그 모두의 영웅이었지만, 그래서 더 골치 아픈 일이 많았을 거라고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놈들 때문에 자신의 연인이 희생되고 있다면.
“그래서 이브리아가 델판토를 봉인한 거야. 정확하게 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델판토가 이브리아를 찾고 있는 거군요.”
“응.”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그럼 저희는 블랙 드래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거군요.”
“그렇지.”
“드래곤이라니.”
중얼거리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그게 아직도 드래곤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응?”
“드래곤이라도 수명은 있죠. 그 어둠 속에서 천 년.”
유스타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게 정말로 블랙 드래곤인 델판토일까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란은 그런가,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란이 작게 웃었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내려다보자 란이 몸을 세우며 말했다.
“유스타프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하고.”
“저도 그렇습니다.”
“사람 일은 정말로 알 수가 없구나.”
그녀가 몸을 완전히 돌려 제 무릎으로 지탱하고 몸을 세웠다. 유스타프가 그녀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녀가 유스타프의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엄지로 그의 입술을 훑었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그녀는 미소 지었다.
“사랑해.”
그의 눈이 커졌다. 란이 “아직 말 안 한 것 같아서.” 하고 속삭이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당겨 다시 깊게 입 맞췄다. 그의 다른 손이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셔츠 위로 그의 뜨거운 손이 느껴져 란은 숨을 삼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쓸며 다시 내려온 손이 그녀를 받치며 그대로 의자에 눕혔다. 란은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거친 키스를 받아들였다.
자극이 너무 강해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간신히 키스를 멈추고 그가 그녀의 눈물을 가볍게 핥아 올리고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둘이 있는데 저를 자극하고 싶으신가요.”
“결혼하지도 않고 자는 파렴치한은 아니라기에.”
그녀의 말에 그는 제 말에 발목을 잡힌 듯,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몸을 살짝 눌렀다.
그의 무게에 란은 “유스!” 하고 소리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유스타프가 짐짓 눈을 찌푸리며 그녀의 목덜미를 가볍게 물었고, 란은 “유스타프!” 하고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럼 봄이 되면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하죠.”
“뭐?”
란이 눈을 크게 떴다.
“란은요? 당기고 싶지 않습니까?”
그녀는 놀라 더듬거렸다.
“아니, 그야, 아니, 나는…….”
막상 결혼이라고 하니 좋기도 하지만,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반응에 다시 물었다.
“아니면 그냥 약혼할까요. 좀 빠르게?”
란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좋아.”
유스타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좋습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쉽게 란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더는 제가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서.”
란은 그 말이 농담처럼 들려 웃었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로, 조금도 농담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짙게 욕망이 묻어나고 있어서 란은 재빠르게 미소를 지웠다.
“넵.”
란은 얌전히 양손을 모으고 앉았고 유스타프는 벽에 몸을 기댔다.
란은 그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러 단정하게 넘어가 있고, 눈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푸르다는 걸 알 수 있는 선명한 파랑.
넓은 어깨와 큰 키에 비율도 완벽하다.
‘얼굴이 잘생긴 건 말할 것도 없고. 목소리도 좋지.’
낮은 목소리로 ‘란’ 하고 부르면 저절로 몸이 떨린다.
피아노도 잘 치고, 검술도 잘하고. 영주로서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한편, 동시에 안심되었다.
‘이런 완벽한 남자가 날 사랑한다니.’
“란.”
유스타프의 부름에 란은 “응?” 하고 놀라 그를 보았고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저 잡아먹겠습니다.”
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펄쩍 뛰었다.
“그, 그런 생각 안 했거든?”
“그럼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냥, 유스…… 잘생겼다고…….”
소리는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듯했지만, 그래도 그는 잘 알아들었다.
“누님 취향이라서 다행이군요.”
그의 말에 란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찬장 쪽으로 다가갔다.
“뭐 먹을 건 없나? 생각해 보니까 우리 식량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냐?”
며칠 굶는다고 죽지야 않겠지만.
그녀가 찬장을 열자 거기에는 보기에도 맛없어 보이는 네모반듯하고 딱딱해 보이는 빵 같은 게 있었다.
“이게 뭐야?”
“건량입니다.”
언제 왔는지 유스타프가 벽돌처럼 단단한 빵을 찬장에서 하나 빼냈다. 란이 그걸 받아 들고 혀를 내둘렀다.
“이걸로 사람을 때리면 다치겠는데? 이걸 어떻게 먹어?”
“물에 불려서요. 아니면 조금씩 떼어 씹어 먹지요.”
“……맛있어?”
“설마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한숨을 내쉬고 도로 빵을 제자리에 올렸다.
“진짜 필요해질 때 사용하자.”
유스타프는 가볍게 웃었다. 그가 다른 쪽 구석에서 차 봉지를 찾아내어, 두 사람은 차를 끓였다.
함께 있으니 이야기가 쉬지 않고 나왔다. 영지 문제에서부터 무역이나 사업, 앞으로의 계획까지.
한참 이야기하다가 란이 길게 하품했다.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눈꺼풀이 무거운 걸 보면 상당히 밤이 깊은 듯했다.
“주무세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가며 말했다.
“유스도 이리 와. 이불 하나뿐이잖아.”
“제 인내심을 시험하시려고요?”
“응. 추운 데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따뜻한 데 있는 게 나으니까.”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들기며 하는 말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거부할 마음은 들지 않아서 그는 란이 권하는 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자 란은 웃으며 말했다.
“잘 자.”
“네. 주무세요.”
그가 그녀의 뺨에 입 맞췄고, 란은 금방 잠들어 버렸다.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가, 자세를 고쳤다가, 다시 끙 하고 몸을 떼었다가 몸을 뒤척였다.
이튿날 란은 찌르는 듯한 햇빛에 눈을 떴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녀는 자신이 오두막에서 잤다는 걸 깨달았다.
“일어나셨습니까?”
“어, 응. 아― 눈 그쳤어?”
“네. 다행히도요.”
유스타프에 말에 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순간 휘청했다.
“란?!”
놀란 유스타프가 그녀를 잡아 주었고, 란은 눈앞이 빙빙 돌아서 한참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배고파서 어지러운가 봐.”
“너무 말랐습니다. 요즘 통 못 드시더니.”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려서 란은 웃었다.
“이제 잘 먹을 수 있어.”
“당장 내려가야겠습니다.”
그러며 그가 그녀의 옷을 입혀 주기 시작했다. 일곱 살짜리 어린애가 된 것 같아, 란은 스스로 옷 입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단단히 란에게 옷을 입힌 뒤 그녀를 안아 들었다. 란이 다시 “걸을 수 있어.” 하고 말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썰매에 란을 싣고 그 뒤에 앉았다. 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내내 유스타프가 저를 안고 가는 거였다면 참을 수 없었으리라.
동으로 만들어져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는 커다란 썰매 방울이 잔뜩 달린 끈을 란은 꽉 잡았다.
“갑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는 썰매를 앞으로 밀었다. 앞 코가 살짝 기울어지더니 스르륵 눈 위를 미끄러져 썰매는 순식간에 속도가 붙었다.
란은 비명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굴곡진 곳을 지날 때마다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니 이미 시종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앞장서서 달려온 것은 루미에였다.
“가주님! 주인님!”
유스타프가 발을 걸어 썰매를 멈췄다. 란이 아까의 어지럼증을 생각해서 좀 천천히 일어나려는데, 유스타프가 먼저 일어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상 입으신 건 아닌가요?”
루미에의 물음에 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둘 다 괜찮아. 오두막에 있었거든.”
루미에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다행이에요.”
유스타프는 “치료사를 불러.” 하고 말했고 루미에가 눈을 크게 떴다가 란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또 어디가 아프신 거군요. 왜 말을 안 하시는 겁니까?”
“안 아파! 그냥 아침을 못 먹어서 어지러웠을 뿐이야.”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게요?”
“진짜로 괜찮다니까.”
란의 말을 무시하고 루미에가 말했다.
“먼저 가서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휙 자리를 떠나서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에 도착하니 치료사가 대기하고 있어서 진찰을 받았지만, 역시 가벼운 빈혈이었다.
란은 곧 푸짐한 아침상―간으로 된 요리 포함―을 받았고, 모두에게 멀쩡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상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러고 나자 키리가 웃으며 후식을 들고 들어와 말했다.
“약혼하신다면서요?”
“어?”
란은 차를 따르다가 놀라 키리를 보았다. 디모디아와 소다, 카라가 ‘어머어머?’ 하는 얼굴로 란을 보았다가 키리를 바라본다.
“아까 가주님이 그러시던데요. 이번 주 가기 전에 약혼할 거라고.”
“빨라!”
란은 소리쳤다가 웃었다.
“응, 할 거야.”
키리가 환하게 웃으며 젤리를 내려놓고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디모디아 역시 얼른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말했다.
“경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카라와 소다도 재빠르게 이어 인사했다. 란은 어째 쑥스러워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고마워, 다들.”
카라가 갸웃하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주가 가기 전이라니. 맙소사, 이제 3일밖에 안 남았잖아요?”
소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네요? 세상에, 언제 다 준비하죠?”
“드레스는요?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는?”
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란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약혼식이잖아. 우리끼리 하는 거니까 간단하게 할 거야. 겨울의 라치아에 손님을 부를 수도 없고.”
“그래도 기본은 해야지요.”
키리가 고개를 저었다. 란은 붉은 푸딩을 한 스푼 떴다가 눈을 찌푸렸다. 감촉도 이상한데 묘하게 비릿한 냄새가 난다.
“이거 무슨 젤리야?”
“선지 젤리요.”
“…….”
란은 스푼을 내려놓았다. 간까지는 참아줬지만, 이건 무리다.
“빈혈이라고 해서 특별히 만든 거라고요? 얼른 드세요.”
“못 먹어, 안 먹어! 먹으면 아침 먹은 거 다 토할걸?”
“억지로라도 드세요.”
“못 먹어.”
“일부러 송아지 잡은 건데.”
“불쌍하게!”
“점심에 송아지 고기가 나오겠네요.”
디모디아의 말에 란이 “그건, 맛있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하여간 이건 못 먹어.”
란이 단호하게 접시를 밀어내자 키리가 아쉬운 얼굴로 젤리 접시를 들었다. 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선지 젤리라니.’
진짜 싫다.
✥✥✥
시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라치아 공작의 부름을 받았다. 평소에는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녀는 잔뜩 긴장을 한 채였다.
란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만 어쨌든 성주는 유스타프였고,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겨날 터.
그런데 그가 자신을 앉혀 놓고 하는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왜 나에게 묻지?’
유스타프가 그녀의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이세계에서는 약혼식 때 뭔가 하는 게 없나?”
“그, 글쎄요.”
시나는 열심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약혼식 때?
뭘 하더라?
시나는 드라마 내용을 열심히 떠올려 보았다.
“샴페인 타워?”
시나가 조심스럽게 말해서 유스타프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게 뭐지?”
“어― 유리잔을 탑처럼 쌓아 두고요, 위에서 술을 부어서 밑으로 넘치게 하는 거예요. 폭포처럼요.”
“흐음.”
유스타프는 한번 생각해 보았다.
비싼 술을 그렇게 붓는다니, 상당히 사치스럽지 않은가?
“하지만 이건 제가 온 세계 이야기고…….”
“그거면 돼. 다른 건?”
유스타프는 란이 시나와 같은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알았고, 그러니 그 세계에 맞춰서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는 거지만 시나는 정말로 ‘왜 이러나?’ 싶은 기분이었다.
뺨을 긁적이며 시나가 말했다.
“사실 저희 세계에서 약혼은 흔하지 않거든요.”
“흔하지 않다고?”
“네, 다들 바로 결혼해요.”
“그런가……?”
유스타프는 툭툭 팔걸이를 두들겼다. 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보통 연애를 2년 정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서 프러포즈를 하고―”
“그게 뭐지?”
“네?”
“프러포즈.”
“아, 청혼이요. 어라? 여기는 없는 개념인가요?”
결혼의 대부분이 정략결혼인 사회에서 프러포즈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다.
시나는 신나서 열심히 프러포즈에 대해서 설명했고, 유스타프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
란은 카라가 흐뭇한 얼굴로 가져온 드레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한 녹색 드레스에는 자잘한 수정들이 달려서 7월의 빗방울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가주님이 주문해 두고 계셨더라고요.”
“진짜?”
란이 놀라 되묻자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주문하신 거랍니다. 하지만 사이즈는 본격적으로 맞추지 못해서 아직 가봉 단계이기는 하지요. 그래도 이거면 약혼식에 맞출 수 있어요.”
“조금만 고생하면요.”
소다가 잽싸게 말을 잇고 웃었다.
란은 부드러운 흐린 민트색 드레스를 어루만졌다.
‘세상에.’
수정을 어찌나 섬세하게 꿰맸는지 그냥 옷에 수정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하나하나 다른 모양과 크기로 세공이 되어 있어서, 말 그대로 눈부시게 빛났다.
“얼른 입어 보세요.”
“맞아요.”
‘빨리빨리 입은 걸 보고 싶다!’ 하는 눈으로 시녀들이 달라붙어 란의 옷을 벗겨내고 드레스를 입혔다.
디모디아가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 잘 어울려요.”
“진짜로 아름다우세요.”
주인이 이쯤 되면, 옷을 가봉하는 쪽에서도 저절로 힘이 나기 마련이다. 카라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핀을 들었다.
“이제부터 고정할 테니까 가만히 계세요.”
“응.”
란은 얌전히 팔을 들고 대답했다. 키리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 비단 망토 말이에요, 어깨에 붙여서 늘어트리면 어떨까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
“다이아몬드 브로치로 고정해요.”
소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이나 있겠어? 무리하지 마.”
키리가 히죽 웃었다.
“이럴 때는 좀 무리를 시키셔도 되지요. 디모디아 님, 액세서리는요?”
“이쪽에요. 이것도 가주님이 같이 주문하신 주문품이랍니다.”
노래하듯이 말하며 디모디아가 잽싸게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왔다.
란은 고개를 돌리다가 핀에 찔렸고 “아얏.” 하는 그녀에게 카라가 “얌전히 계세요.”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쩐지 장난친 사내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서 란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모디아는 란이 잘 볼 수 있게 상자를 그녀 정면으로 가지고 와서 뚜껑을 열었다.
란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로 구성된 세트였다.
샘물처럼 투명한, 연녹색의 토파즈가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드레스 색과 맞춘 거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너무 예쁘다.”
란의 말에 디모디아가 웃었다.
“드레스와 잘 어울리실 거예요.”
카라가 마지막 핀으로 옷을 고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한시름 놨네요. 역시 가주님이 아무런 준비 없이 약혼식을 명령하셨을 리가 없지요.”
약혼이 아니라 결혼에 써도 손색이 없을 만한 물건들이었다.
일국의 공주가 가져올 혼수품과 같은 옷과 보석이었지만, 시녀들은 ‘우리 란 님에게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핀으로 잡은 곳을 표시하고 재빠르게 다시 드레스를 벗겨내어 카라는 침방 시녀들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지시를 남겼다.
키리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자, 그러면 드레스는 끝났고, 이제 우리 아가씨 차례네요.”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란은 “나?” 하며 갸웃했다.
잠시 후 란은 “약혼식만 할 뿐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며 웅얼거렸고, 시녀들은 “해야지요.” 하고 입을 모았다.
란은 설탕과 아몬드 가루, 꿀을 섞은 것으로 전신을 문질러 제모하고, 알 수 없는 온갖 요상한 민간 화장 요법들을 경험했다.
“겨울이라 염소젖이 적네요.”
“어쩔 수 없지, 이거라도 쓰자.”
그런 대화를 하며 염소젖으로 목욕을 시키거나, 뜨거운 증기가 가득한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게 하고 알 수 없는 맛이 나는 차를 잔뜩 마시게 했다.
시녀들은 “시간이 부족해요.” 하는 말을 입에 달며 란의 머리카락에 진흙 같은 것을 덕지덕지 바르기도 했다. 그 기세에 란은 뭐인지는 묻지도 못했고 말이다.
음식 역시 콜라겐이 잔뜩 든 듯한 미용 보양식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틈만 나면 지독한 향기가 나는 사탕 같은 것을 계속 먹게 만들었다.
덕분인지 란의 피부는 삶은 계란 흰자처럼 매끈해졌고, 광택이 흘렀다. 머리카락도 여우의 털처럼 반지르르해져서 광채를 두른 듯이 빛났다.
‘그리고 몸에서 향기가 나.’
그 이상한 사탕 때문인지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약혼식을 할 뿐인데 이게 필요한가.’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요즘은 계속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시간은 전부 미용에 쏟고 있고.’
거기에 잠을 충분히 자고 맛있는 것을 먹으니 저절로 혈색도 좋아졌다.
시나가 보더니 진지하게 “언니, 언니는 어쩜 갈수록 여신이 되어 가요?” 하고 말해서 란을 다시 웃게 만들었다.
시나가 란에게 속삭였다.
“언니.”
“응?”
“만약에 공작님이 뭐 이상한 거 하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이상한 거?”
“네.”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는 제 세계의 풍습을 이야기해 준 거니 이쪽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대체 왜 유스타프가 이세계의 풍습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란에게 미리 경고는 해 두어야 한다.
시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약혼식이 내일이죠?”
“응. 실감이 안 나.”
란의 중얼거림에 시나가 씩 웃었다.
“그래도 결혼식처럼 화려하게 하지는 않으니까요. 여기 결혼식은 7일 밤낮으로 이어진다면서요?”
란은 저도 모르게 “정말?” 하고 되물을 뻔했다.
시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약혼식은 하루면 끝나니까 다행이죠.”
“그러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결혼식을 7일 밤낮이나 한다고? 대체 뭘 하기에?
의아함은 일단 미뤄두고, 란이 시나에게 말했다.
“지내기에는 어때? 괜찮아?”
유스타프와 완전히 재결합(?)한 후에 란은 시나에게 제대로 시간을 내지 못한 걸 반성했다.
시나가 씩 웃었다.
“언니가 항상 챙겨주시는데요, 뭐. 괜찮아요.”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그런 거 없어요.”
시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문득, 궁금한 게 생겨 입을 열었다가 얼른 다물었다. 이건 란에게 물어볼 것은 아니다.
시나는 란에게 쉬라고 하고 그녀의 방을 나왔다.
시나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저택을 나와 기사단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쉽게, 아직도 훈련에 몰두하고 있는 루미에를 찾을 수 있었다.
유스타프와 란의 약혼 발표가 있은 후부터 루미에가 훈련에 열중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시나는 망토에 달린 털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쓰고 근처 울타리에 기대어 그가 훈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이 추워 그의 어깨와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한참 검을 휘두르다가 루미에가 짤막하게 말했다.
“뭐야?”
“구경.”
루미에가 눈을 찌푸리고 시나를 돌아보았다.
“저리 가.”
“싫은데.”
“난 구경거리가 아냐.”
“딱히 구경거리로 삼고 있는 것도 아니거든.”
말하고 시나는 정정했다.
“아니, 구경하고 있는 게 맞기는 하네.”
루미에는 시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구경거리가 실컷 되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 말은 굉장히 불쾌했지만, 시나와 눈이 마주치니 어쩐지 그 불쾌감이 사라졌다.
유흥을 위한 구경거리를 보는 눈은 아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손을 까닥했다. 오라는 뜻이라 시나는 울타리를 껑충 뛰어넘어 가볍게 그에게로 뛰어갔다.
“한판?”
그의 말에 시나가 “좋아.” 하고는 얼른 무기 거치대로 가서 제 몫의 목검을 가져왔다.
이제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시나는 대련을 좋아했다. 어차피 이런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것, 할 수 있는 건 전부 배워 갈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루미에는 시나와 대련하며 자세를 하나씩 지적했다.
시나는 목검을 수없이 떨어트리면서도 다시 줍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오른발, 빨라.”
“생각하면서 검을 휘둘러야지.”
“여기, 비었고.”
악 소리가 날 만큼 맞아 검을 떨어트리고도 시나는 다시 검을 주웠다. 지적하는 소리와 검을 떨어트리는 소리, 그 소리만 들린 지 30여 분이 지나서야 시나가 손을 들었다.
“그만.”
헉헉 하고 숨을 몰아쉬며 시나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시나는 실전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관록 있는 권투 선수도 30분을 링 위에서 싸우는 건 힘들었다.
그런데 30분간 검을 휘두르며 대련을 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차원 이동자 버프인가. 전보다 체력이 붙은 것 같아.’
예전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체력이었다.
망토는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턱을 타고 땀이 뚝뚝 떨어졌고, 숨은 어깨까지 차올랐다.
루미에가 그녀가 벗어놓은 망토를 들고 돌아와 시나에게 던지듯 덮어 주었다.
“몸 식어.”
“아, 진짜 덥다. 죽을 것 같아.”
그러면서도 시나는 망토를 뿌리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순식간에 감기에 걸려 버릴 테니까.
“루미에.”
“왜?”
“란 언니 좋아해?”
이렇게까지 직설일 수가 없는 질문이라 루미에는 시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해.”
순순히 대답이 나왔고 시나는 쓰게 웃었다.
“그럼 마음 아프겠네.”
루미에는 그녀의 앞에 털썩 마주 앉았다. 이민족들이 이렇게 앉는다고 들었는데, 시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앉고는 했다.
시나의 말에 루미에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웃었다.
“그래. 좀 힘드네.”
시나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자 루미에는 다시 웃었다.
감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가 란을 좋아하는 건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시나에게는 그런 장벽이 없다.
정말로 닮았다고 루미에는 생각했다. 시나와 란은 닮았다.
닮았으면서도 아주 다르다.
‘이 무슨 모순이람.’
“루미에에게도 좋은 사람이 또 생길 거야.”
시나는 그렇게 말하고 란을 떠올렸다. 그래, 그런 미인은 상당히 드물지.
‘하지만 유스타프 쪽이 캐릭터가 강하다고 해야 하나.’
란과 나란히 서 있으면 흑금의 대비가 강렬하다.
루미에도 물론 눈에 탁 띈다.
주홍색 머리카락에 주홍색 눈동자.
저도 모르게 빤히, 시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노을 같은 빛깔은 물론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빠져드는 것 같은 감각이…….’
시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화급히 시선을 뗐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하여간. 힘내! 내가 같이 술 한잔 해줄 테니까!”
“술?”
루미에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스쳤다. 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그럴 때는 한잔하는 거야. 울고 털어버리는 거지. 내가 살게!”
호기롭게 외치고 시나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 술집이 있나?”
루미에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장 가까운 술집은 말을 타고 30분은 가야 할걸.”
그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나가 히죽 웃었다.
“그럼 다른 곳을 털자.”
“다른 곳?”
“기다려 봐! 방에 가서 기다려!”
시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후다닥 뛰어서 사라졌고 루미에는 우스운 기분이 되어 서 있다가 천천히 움직였다.
기분이 훨씬 나아져 있었다.
가볍게 씻고 방으로 돌아가니 커다란 술병을 든 시나가 입을 비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만 씻고.”
“그 술병은 어디서 났어?”
술은 귀한 물건이다.
술 창고 열쇠는 집사에 의해서 엄격하게 관리되며, 술 창고 열쇠를 맡긴다는 것은 신뢰의 표시였다.
“달라고 해서 받았지.”
의기양양하게 말한 후 시나가 속삭였다.
“란 언니의 손님이란 특권은 굉장하거든.”
루미에는 피식 웃고 그녀의 품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묵직한 술병의 크기는 상당해서 적어도 2리터쯤은 되어 보였다.
‘하긴 약혼식 준비 중이니, 술 한두 병 정도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개를 뽑았다.
독한 술 냄새가 확 올라왔다. 북부가 자랑하는 엄청난 도수의 증류수다.
“마시고 죽자!”
시나는 그렇게 외치며 품에서 잔을 꺼냈다. 커다란 맥주잔이라 루미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맥주잔을 가득 채우자 시나는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꼴깍 삼켰다. 술 냄새가 장난 아니다.
“엄청 독한 것 같아.”
“아무래도.”
“맥주잔으로 마시면 죽지 않을까.”
“술 마시고 죽는 사람도 있나?”
“있어!”
시나가 주장했다.
“마시고 죽자며.”
“그건 비유지.”
시나는 투덜거리며 조심스럽게 한 모금 술을 마셨다. 마시자마자 목구멍 안쪽에서 화끈한 기운이 확 올라오며 위장을 타고 알코올 기운이 휘몰아쳤다.
“으-”
시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루미에가 재미있단 얼굴로 그녀를 보며 훌쩍훌쩍 술을 마셨다.
독하긴 하지만 깔끔하다. 역시 술 빚는 기술은 북부가 가장 나은 듯싶다.
얼마 마시지도 않아서, 시나의 입에서 혀 꼬인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루, 루미에는 잘생겼으니까-애인은 또 생겨!”
그런 칭찬은 처음이라 그는 픽 웃었다.
“그거 고맙군.”
“지인짜로? 짱, 짱!”
엄지를 치켜들며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칭찬인 것 같다. 그런데…….
“너 술 마시자고 먼저 말한 사람치고 너무 빠르게 취하는 거 아니냐.”
그 말에 시나가 힛힛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루미에는 아무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자 루미에는 자신도 좀 취한 것 같다고 느꼈다.
왜냐면 술술 자신의 과거를 시나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예로 팔린 일, 노예 생활, 불법 투기장에 간 일, 사람을 죽인 일.
란에게도—
아니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일이었다. 말하다 루미에는 시나를 바라보고 손을 뻗었다.
“왜 우는 거야?”
“하지만, 하지마안-”
눈도 깜박하지 않고, 시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너무하잖아. 루미에, 너무 고생했고. 진짜 사람들 나빴어.”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눈가를 훑었다.
“울라고 한 이야기는 아냐.”
“울려고 우는 것도 아냐.”
시나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과 루미에의 잔을 채우고 말했다.
“이제 행복해질 거야. 루미에, 꽃길만 걷자!”
루미에는 픽 웃고 잔을 받았다. 시나는 눈물 콧물이 흐른 제 얼굴을 싹싹 닦고 잔을 들었다. 너무 마시면 내일 약혼식에 참석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루미에가 더 중요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시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쭉 잔을 마셨고, 그게 그녀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
약혼식은 단출하게 열렸다.
아니, 유스타프의 생각으로는 단출하게 열렸다.
가신들을 초대해서 연회를 베풀고, 둘이 약혼했음을 선포하고 약혼반지를 교환했다.
연회장 상석에 란과 나란히 앉아 유스타프는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연회장 문이 열리면서 유리잔이 층층이 피라미드처럼 쌓인 커다란 카트가 들어왔다.
손님석에 앉아 있던 시나는 숙취로 아직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있다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내가 말한 건 저렇게 큰 게 아닌데?!’
사람의 키보다 높은 탑이었다.
란 역시 눈을 휘둥그레 떴고,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유스타프가 신호하자 시종이 사다리를 가져와 그 옆에 서서 샴페인을 따서 붓기 시작했다.
첫 잔이 채워지고 그 아래쪽 잔들이 채워지자, 사람들은 그제야 하려는 게 뭔지 눈치챘다.
‘하지만 병이 너무 작지 않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샴페인이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세 번째, 네 번째 단을 채우면서 계속 샴페인이 흘러넘치자 이제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란 역시 입을 떡 벌렸다.
마지막 단까지 채우고 흘러넘치고서야 시종은 샴페인 병을 들었다.
란은 그제야 그 시종이 프란체라는 걸 깨달았다. 3일내내 시달려 프란체는 샴페인이 계속 흘러나오는 와인 병이란 마법 세공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고, 란 역시 열심히 박수를 쳤다.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마음에 드시나요?”
“응?”
“시나 말에 따르면 저런 걸로 약혼식을 축하한다고 하던데요.”
그 말에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비슷하기는 한데― 시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람?
“응, 맞아. 고마워.”
키득거리며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마음에 드신다면 저도 기쁩니다.”
그러고서 맨 꼭대기에 있던 잔과 그 아랫잔을 유스타프와 란에게 올리도록 지시하고 나서, 나머지 잔들을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루미니티 백작이 가볍게 잔을 두들겨 시선을 모으고서는 말했다.
“두 분의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그 말에 모두가 잔을 들어 올리며 “축하합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고서야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약혼 선물이 빼곡히 그녀의 발치에 놓였고, 모두가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시나 역시 란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네는데,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 란이 “시나, 괜찮아?” 하고 묻자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제 술을 좀 독한 걸 마셨더니 숙취가 있나 봐요.”
그렇게 말하는 시나에게서 아직 술 냄새가 나서 란은 ‘저런.’ 하고 납득했다. 시나가 란에게 나뭇가지와 깃털로 만든 드림캐처를 건네주었다.
“손재주가 없어서 엉성하지만, 그래도 축하해요. 언니.”
란은 그걸 열심히 만들었을 시나를 생각하니 마음속이 꽉 죄여드는 걸 느꼈다.
“정말 고마워. 예쁘다.”
“악몽을 막아주는 부적이에요. 창문가에 걸고 자면 된대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가 자리를 뜨는 걸 란이 유심히 바라보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약혼식 하루라도 저에게 집중해 주시면 안 됩니까?”
“충분히 하고 있지 않나요? 약혼자님?”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좋습니다. 지금처럼 말이지요.” 하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납니다.”
“그 사탕 때문인가 봐.”
“사탕이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때는 지독한 냄새의 사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향기가 옅어진 게 지금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 아닌가 싶었다.
“좋지만, 다음에는 그냥 먹이지 말라고 해요. 란의 원래 향기가 더 좋으니까요.”
유스타프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으며 말해 란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틀었다.
“유스타프! 다들 보잖아!”
“보라고 하죠. 제 약혼녀인데.”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거든.”
란이 몸을 빼자 유스타프는 “그럼 아무도 안 보면 되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아무도 안 보고 있을 리가 없잖아. 연회장 한복판인데.”
유스타프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전부 몸을 잽싸게 돌렸다.
“이제 아무도 안 보네요.”
“…….”
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스타프를 본 후에 가까워지는 그의 이마를 꾹 손끝으로 눌렀다.
“시선으로 협박하는 거 그만둬.”
나도 그거 예전에 당해 봤었는데 정말로 무섭거든?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고, 란은 얼른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려 거리를 확보했다.
샴페인을 비우고, 란은 꿀 술로 시선을 돌렸다.
긴장해서 그런지 술이 술술 넘어간다. 인사하러 오는 사람 중에는 술을 채워 주는 사람도 있어서 평소보다 좀 더 페이스가 빨랐다.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춤출까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앉아만 있는 것도 고역이다. 유스타프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둘은 플로어로 향했다.
발이 가벼웠다.
땅이 아니라 공기를 밟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 란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란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유스?”
“아뇨.”
유스타프는 눈동자를 돌렸다가 다시 란을 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못 들었습니다.”
란이 입을 내밀었다가 다시 말했다.
“어때, 내 춤 솜씨 많이 늘지 않았어?”
“네, 많이 느셨네요.”
갸웃하고 란이 중얼거렸다.
“이 대화 어쩐지 전에도 한 것 같아.”
“했습니다.”
“했었나? 역시?”
“네.”
란이 다시 웃었다. 그녀가 빙글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그럼 그때보다 더 잘 추는 것 같은 기분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때처럼 취하셨다는 것만 알겠습니다.”
“에이.”
란은 투덜거렸다.
두 사람은 연거푸 네 곡을 연달아 췄고, 이어 콰트로움 차례가 되자 란은 간신히 한 곡을 끝낸 후에 도망치듯이 플로어를 나왔다.
그녀가 빠지고 나자 좀 더 춤이 빨라지면서 제대로 추는 게 느껴졌다.
‘콰트로움은 안 느네.’
하긴 평소에 연습을 안 하니까.
그때 누가 잔을 내밀어 바라보니 루미에였다.
“축하드려요.”
싱긋 웃으며 그가 말해서 란은 잔을 받았다. 한 모금 마시고 그녀는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이거 뭐야?”
“술이죠.”
“독해.”
“제 마음이랄까요.”
“루미에!”
란은 소리치고 눈을 치켜올렸다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자 오히려 놀란 건 루미에였다.
“주인님!”
투명하고 독한 증류주를 큰 컵으로 비우고 란은 후욱 올라오는 취기에 눈을 깜박인 후에 루미에에게 잔을 내밀었다.
“잘 받았네요.”
루미에의 얼굴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란이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다가 휘청했다. 루미에가 그녀를 붙잡았다.
“우와, 지금 그거 진짜 독했나 봐. 아니, 루미에. 표정 안 좋아서…….”
말하고 그녀가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냥, 내 약혼 때문이 아니라, 뭔가…… 무슨 일 있어?”
루미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녀를 놓아 주며 말했다.
“주인님께 말할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단지 제가 정말로 축하드린다고, 말하고 싶었답니다.”
란은 흔들리는 시야를 몇 번 눈을 깜박여서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고마워.”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허리를 획 잡아챘다. 등허리가 단단한 뭔가에 부딪쳤다.
“내 약혼녀에게서 떨어져.”
루미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내 주인님에게서 떨어져, 라고 할 수 없는 게 유감이네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다니.
루미에는 어쩐지 즐거워졌다.
유스타프는 그의 여유에 더더욱 짜증이 나서 내뱉었다.
“방금 시나가 연회장을 나가던데. 따라가 보지?”
순간, 루미에의 얼굴이 굳었다.
파란 눈과 주홍색 눈동자가 서로 마주 보았다가, 루미에가 먼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절 도발하지 말아, 란?”
갑자기 몸이 축 늘어져 유스타프는 당황해 그녀를 꽉 붙잡았다.
“란, 괜찮습니까? 왜―”
쌕쌕 건강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유스타프는 단번에 전신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되었다.
‘잠들다니.’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주변의 가신과 기사들은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주님이 로미아 백작에게 푹 빠져 있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게 유스타프의 차가움에 거리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안겨 주었다.
유스타프가 쯧 하고 혀를 차자 모두 재빨리 얼굴을 돌리며 표정을 고쳤다.
그래도 가주님은 무서웠다.
‘더워…… 답답해…….’
란은 끙끙거리다가 눈을 떴다. 이마에 땀이 흐른다.
뭔가 답답하게 묶여 있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 건 십여 초가 지나서였다.
‘유스타프?!’
유스타프에게 안겨 있다. 그래서 더운 거다. 팔로 나를 꽉 끌어안고 있으니까.
머릿속 논리 회로가 딱딱하게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경종이 울렸다.
‘나, 옷은?’
없어!
드레스 어디 갔어?!
슈미즈? 슈미즈뿐이야?
잠깐, 약혼식이잖아? 약혼식인데 한 침대 괜찮은 건가요?
나 기억도 안 나는데? 어라? 뭐지?
어젯밤 뭐 있었나?
“풉…….”
그때 머리 위에서 작은 소리가 나서 란은 엉망으로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유스타프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란은 입을 떡 벌렸다. 유스타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유스타프가 웃음을 간신히 멈추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코를 툭 눌렀다.
“조금은 제가 남자라는 게 실감 나셨습니까?”
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이불을 끌어당겨 제 앞을 가리며 말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유스타프가 그 말에 눈을 깜박였다. 란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다가 침대를 반으로 가르는 레이스 커튼을 발견했다.
“저 커튼은 대체― 꾸왁!”
갑자기 팔을 홱 잡아당겨져서 몸이 다시 침대에 처박혔다.
지금 엄청 괴상한 소리 나왔다.
란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찌푸리는데 정면에 유스타프의 얼굴이 있었다.
“언제부터입니까?”
“뭐?”
“언제부터 제가 남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하려다가 란은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숨을 삼켰다.
란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유스타프.”
란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야?”
뭘 그렇게 확인하고 싶은 거야?
“유스타프를 좋아해.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내가 있던 곳에서 사랑 없이 결혼하는 건 없는, 일은 아니지만 하여간 난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야. 아직 약혼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란이 손이 부드럽게 그의 뺨을 쓸고 손끝이 가볍게 그의 입술을 눌렀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야.”
유스타프는 눈을 크게 떴다가 확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한심하네요.”
“유스?”
“이래서야 란이 연하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네요.”
“!”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
“당연히 신경 쓰지요.”
“유스타프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말에 그가 상체를 세웠다.
“항상 의식하고 있습니다. 란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인가 하고요.”
“나?”
란의 에메랄드 색 눈이 꿈벅거린다. 유스타프가 조용히 말했다.
“얼마든지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죠. 숙부님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밤늦게 쓰러질 때까지 일하고, 가신들도 전부 다 푹 빠져 있는 데다가 항상 그런 눈으로 보니까―”
이쪽을 꿰뚫어 보는 듯한 투명한 눈.
탐색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탐색하는 것 같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전부 란이 준 겁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란의 얼굴이, 목덜미에서 귀 끝까지 전부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난 그렇게 대단하지는―”
“그렇게 말한다는 점까지 대단하지요. 그러니까 믿음직스럽게 보이고 싶었는데 말이죠.”
란은 유스타프의 멋쩍은 얼굴을 보았다.
아, 이런 얼굴은 처음이다.
본 사람도 나밖에 없을 거야.
나밖에 모르는 유스타프의 표정. 말, 온도, 손길.
사랑스러움이 꽉 차올랐다.
“항상 의지하고 있는걸.”
정말, 정말로.
란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고 힘주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어쩜 이렇게 멋있는데 귀여운 거야? 아니, 귀여운데 멋있는 거야?’
유스타프의 팔이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등을 쓸어 올렸다. 얇은 실크 잠옷 너머로 유스타프의 손길이 정말 너무 기분 좋아서…….
‘잠깐, 나 지금 속옷 한 장뿐인가?’
“유, 유스…….”
저절로 불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스타프는 멈칫하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무섭네요, 란은.”
“어어?”
“사람을 이렇게까지 휘두르고.”
“내가 언제?”
란이 항의하자 그가 피식 웃고 침대에서 내려와 레이스 건너편으로 향하더니 털썩 누웠다.
“유스?”
“약혼식이니까, 이 커튼 너머로 넘어오면 안 되는 겁니다.”
“방금 넘어와 놓고서!”
“그건 란의 옷을 벗겨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이거 유스가 벗긴 거야?!”
“그럼 술주정뱅이 옷을 누가 벗깁니까?”
란은 얼굴이 붉어져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제 넘어오지 마.”
“네, 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란이 말했다.
“손은 넘어와도 괜찮아.”
유스타프는 웃으며 레이스 커튼 너머로 손을 내밀었고 란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
시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이시나!’
그녀는 커다란 침대에서 좌로 세 번, 우로 세 번 굴렀다.
‘이렇게 구르고도 떨어지지 않다니 침대 정말 굉장하다. 이세계 최고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나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내가 진짜 미쳤지. 미쳤어!’
루미에를 위로한답시고 술 창고에서 가져온 독한 술을 연신 들이켠 것까지는 좋았다.
‘루미에의 과거 이야기도 들었지.’
다시 생각해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 이야기까지는 기억난다. 그런데 그 뒤로 건배를 한 후에 중간부터 필름이 끊기고…….
‘깨어나니 알몸으로 한 침대.’
상황이 너무 뻔해서 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황망해서 허둥지둥 옷만 챙겨 입고 도망치듯이 루미에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 후로 루미에와 마주치는 일은 죄다 피하고 있다.
‘란 언니에게 상담하고 싶은데.’
약혼식을 치르는 란에게 가서 징징거릴 수도 없었다.
시나는 입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으며 깃털베개를 마구 후려쳤다.
‘내일. 내일은 꼭 언니에게 이야기를…….’
똑똑.
그때 노크가 들려 흠칫하고 시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누, 누구세요?”
“나.”
자신을 루미에라고 밝히지도 않는 저 당당함.
뻔뻔스러운 자식.
시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고 말했다.
“나 자는 중이야.”
하지만 문은 거침없이 열렸고 시나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왔다.
깃털베개를 방패처럼 꽉 끌어안고 시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자, 자는 중이라고 했잖아.”
“자는 중인 사람은 자는 중이라고 대답하지 않지.”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빤히 시나를 바라보았다.
“왜 피하는 거야?”
“……뭐……?”
순간 벙쪄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미에가 이어 말했다.
“날 피하는 건 그렇다고 쳐. 너 약혼식도 엄청 기대했잖아. 드레스도 몇 번이나 다시 입어 보고. 그랬는데 춤도 안 추고 연회장을 나가 버리고.”
루미에가 슬쩍 허리를 숙이며 그 특유의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요? 시나 양?”
그 순간 시나가 깃털베개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다 너 때문이잖아!”
어찌나 강하게 쳤는지 깃털베개가 그대로 터지면서 사방으로 깃털이 흩날렸다.
시나가 몇 번 더 터진 베개를 휘두르려는 걸 루미에가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아, 역시.”
“뭐? 아, 역시?”
시나는 화가 치밀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미에가 혀를 찼다.
“깨 보니 알몸이어서 놀란 거 아냐?”
“…….”
루미에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시나를 보았다가 말했다.
“안 잤어.”
“!”
시나의 온몸이 움찔했다.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미에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술 취해서 네가 옷 벗은 거야.”
“무슨…….”
“진짜거든. 기억 안 나냐. 덥다고 옷 벗어 버리고, 내가 그만두라고 말해도 듣지도 않고, 그래서 내가 이불로 널 둘둘 싸매 놓은 거잖아. 알몸으로 덥다고 나가겠다고 그래서.”
“……!”
순식간에 시나의 얼굴이 불타오르듯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진짜야? 그, 그럼 넌 왜 벗고 있었는데?”
“네가 나에게 술 쏟아서. 윗옷만 벗은 거거든……?”
“아!”
그러고 보니 벗은 상체만 보고 하체는 못 봤다. 왜냐면 옷을 벗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라서.
시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그러면 따로 자야지. 한 침대는 너무 파렴치한 거 아냐?”
“가지 말라고, 같이 자자고, 아니면 소리 지르겠다고 한 게 누굴까요?”
“거짓말!”
“진짜다. 너 어디 가서 술 그렇게 마시지 마라. 정말이지.”
기절시키지 않은 게 내 인내심의 한계였다, 하며 루미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는데 아침에 사라져서 없지, 보이지도 않지, 어쩌다 마주치면 도망쳐 버리지. 오해하고 있는 게 뻔해서 일부러 만나러 온 거야.”
“미, 미리 말해 주면 좋았잖아…….”
다리에서 힘이 빠져서 시나가 주르륵 미끄러지는 걸 루미에가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나, 진짜 놀랐단 말이야. 그, 그리고 약혼식도 다 놓쳐 버렸잖아아―”
루미에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닦아내고 말했다.
“그러니까 왜 평소처럼 물어보지 않고.”
시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너라면 물어보겠냐? 잤냐고? 아니, 잠깐. 그래도 너 내, 그, 다 본 거잖아!”
“아.”
루미에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시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몰라, 진짜!”
시나가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지고 민망함을 이기려 빽빽 소리쳤다.
“진짜! 나 시집 다 갔어!”
루미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예뻤어?
아니지.
보기 좋았, 도 아니고.
“잘 안 보였어.”
“뭐?”
루미에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나도 술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아리까리하고, 그냥 잘 기억이 안 나니까…….”
“진짜……?
시나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고 루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럼 그런 걸로 해 둘까?” 하고 되물어서 루미에는 다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혀, 조금도, 기억 안 나.”
시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살그머니 침대에서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이다. 진짜.”
“그러네.”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에서 깃털을 떼어주다가 포기했다. 시나는 털투성이가 된 제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무도회 가는 건 안 되겠지?”
“깃털 이불을 털다가 온 아가씨 같겠지.”
게다가 파장 시간에 가깝다.
시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루미에가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출까?”
“뭐?”
“춤.”
시나가 눈을 깜박였다.
“정말?”
“그래. 아직 드레스도 안 벗은 채였네.”
“그야…….”
모처럼이니까, 예쁘니까 계속 입고 있고 싶었다. 내려다보고 시나는 문득 루미에뿐 아니라 자신도 완전히 깃털투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헐? 완전히 깃털투성이잖아?”
“깃털베개가 터졌으니까.”
“다 루미에 때문이잖아. 아, 이거 어떻게 하지? 내일 시녀분들이 보면―”
그제야 당황해 시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미에와 자신뿐 아니라 사방에 온통 깃털이 잔뜩 붙어 있었다.
루미에가 피식 웃고 말했다.
“나중에 치워 주겠지.”
“그게 문제야.”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여기서는 못 추겠고. 베란다에서 추자.”
시나는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가 베란다로 나갔다. 라치아치고는 바람 없는 온화한 날씨였다.
루미에는 예전에도 이렇게 베란다에 나온 적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란이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었던 그때.
하지만 지금은 시나와 나와 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깃털투성이로 정중히 물어 와서, 시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물론이지요.”
좁은 베란다에서도 더블릿은 추기 어렵지 않았다.
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괜찮아?”
“뭐가?”
“란 언니 약혼 말이야.”
루미에는 잠시 시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걱정이 많았을 텐데, 그게 해소되자마자 남 걱정.
“어제 같이 마셔 준 덕분에 괜찮아.”
“정말?”
“응, 덕분에 진짜로, 제대로 축하한다고 할 수 있었어. 고마워.”
솔직한 인사에 시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상하지.’
시나가 울어 줘서, 뭔가 후련해졌다. 누군가가 대신 울어 준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 했는데.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울어 줘서 괜찮다.
루미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춤을 추었다.
✥✥✥
제투라는 란이 입을 떡 벌린 걸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제 수염을 당겼다.
“어때? 굉장하지?”
“굉장해. 세상에.”
란은 연신 감탄했다.
“겨울에는 광산 일을 안 한다니까 말이야. 인간은 약해 빠져서는……. 하여튼 손이 비어 심심하니까 만들었지.”
그러며 제투라는 마갑을 탕탕 두들겼다. 다른 드워프들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겨울 내내 풀무를 밟아서 만든 마갑은, 말에게 씌우자 더더욱 그 빛을 발했다.
새까만 마갑으로 전신을 무장한 말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무시무시했다.
‘여기에 청염 기사단 갑옷도 검은색이잖아?’
그야말로 칠흑 같은 중갑부대다. 심지어 마갑의 무게는 가벼웠다.
즉, 경갑옷을 입었을 때와 말의 기동력이 거의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이거 몇 개나 만든 거야?”
란의 물음에 제투라가 “30개 정도?” 하고 말했고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투라가 슬쩍 란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원하면 기사단 전원에게 만들어 줄 수도 있지.”
“꼭 좀! 부탁할게요.”
란의 말에 제투라는 다시 큰소리로 웃었다. 그래, 이렇게 하니 좀 은혜를 갚는 것 같다.
“나디움과 미스릴과 강철을 적절히 섞은 거거든. 봐 봐. 가장 큰 곳도, 이렇게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거뜬하고 강철로 만든 창칼은 박히지도 않지.”
제투라의 설명을 란은 열심히 들었다. 청염 기사단원들 역시 몸이 저절로 그쪽으로 기울 정도로 제투라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블레인은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가고 싶어져서 몸이 근질거렸다.
새로운 마갑의 성능을 당장 알아보고 싶었다.
제투라가 얼음수정을 넣는 공간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얼음수정을 딱 끼워 넣고, 이 부분을 발로 탁 차면 마법이 발동된단 말이야. 말의 스태미나와 속도도 올려주지. 이 부분은 프란체의 도움을 받은 거야. 인간치고는 쓸 만하던걸.”
“어쩐지 프란체가 혹사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란은 프란체에게 주는 연봉을 두 배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제투라가 와하하 웃었다.
“뭐 이제 봄이라서 광산도 다시 움직일 테고, 우리가 알려준 대로 잘하나 감시 정도만 하니까. 마갑을 마저 만들 시간은 되겠지.”
“고마워.”
“별말을. 그보다 우리 쪽에 자료가 없어서 미안하구만. 대현자 이브리아에 대한 자료들은 전부 반출 금지라서 말이야.”
“괜찮아.”
란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하레쉬가 준 자료도 극히 일부분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자료는 반출 금지라고.
‘뭐, 그래도 릴리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고.’
릴리와 루미에는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날마다 건강해져서 올해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예측도 함께 말이다.
‘봄인가.’
란은 고개를 들어 빙벽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왔다. 더 이상은 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칼바람이 아니었다.
‘다시 수도로군.’
란은 한숨을 삼켰다.
수도에 올라가면 올리비아와 라벨이 기다리고 있겠지.
‘아, 리제를 보는 건 기대되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설핏 웃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를 생각하면 다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냥 만나볼걸.’
올리비아가 보자고 했는데, 만나지 않고 바로 라치아로 내려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혹시 만났다면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그녀를 기피한 걸까?
‘아냐, 진짜 무서웠다고.’
어떤 방식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란은 하나 궁금함이 들었다.
‘루스는 올리비아가 치운 걸까? 아니면…….’
“란.”
“흐힛!”
란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고, 유스타프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그렇게 놀랄 줄 몰랐습니다.”
“아, 아냐. 미안.”
‘아니면―’
란이 빤히 그를 바라보아 유스타프가 제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뭔가 묻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대답하니 유스타프가 미심쩍다는 얼굴을 했다가 그녀의 뺨에 입 맞춰주고 말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평소랑 똑같거든.”
“그러니까요.”
싱긋 웃고 유스타프가 고개를 들어 무장한 말을 바라보았다.
“라치아에 평지가 많다는 게 다행이군요.”
“대부분 자갈밭이지만.”
란의 중얼거림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유스타프가 이어 제투라에게 예의를 표하자 제투라가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너 좋으라고 한 거 아니니까 말이야.”
인사 받아도 곤란해, 하며 말이다. 유스타프는 “그럼 누님께 인사해야겠네요.” 하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가지고 싶은 걸 말씀해 보세요.”
란이 웃었다.
“딱히 없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제투라에게 물었다.
“지금 전부 입혀 봐도 되는 완성품입니까?”
“물론이지.”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블레인에게 말했다.
“입혀서 한 바퀴 돌아보지.”
“존의.”
블레인은 들뜬 얼굴로 잽싸게 사라졌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저도 함께 다녀와야겠습니다.”
“응, 조심해.”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제 말을 데리러 갔다. 제투라가 떠나기 전에 “참.” 하고 란에게 손짓했다.
“전에 그 기사에게 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었지?”
“아, 응!”
제투라에게 루미에의 검을 부탁했었다.
“완성했거든. 내가 직접 줄까 했는데, 주문자는 어쨌든 자네니까 말이야.”
기다려 보게, 하더니 곧 제투라는 검을 가지고 돌아왔다.
“고마워.”
란이 검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었다. 제투라가 히죽 웃고 말했다.
“기다려, 그 기사도 불러줄 테니까.”
“응.”
란이 고개를 끄덕였고, 제투라는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갑옷을 입고 있는 루미에가 나타났다. 그가 란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부르신 게 주인님이신가요?”
“응.”
“그랬군요.”
“뭐야? 왜? 실망했어?”
란의 말에 루미에가 빙긋 웃으며 “그럴 리가요.” 하고 물었다.
“어쩐 일이신가요? 지금 전 마갑 때문에-”
“아, 바로 가 봐야 하는구나. 이거!”
란이 그의 품에 밀어붙이듯이 검을 내밀어서 루미에는 얼결에 검을 받아들었다.
“제투라가 만들어 준 거야. 드워프제 검이니까, 분명히 마음에 들걸.”
루미에는 가만히 검집을 바라보다가 검날을 뽑았다. 새파란 검날은 제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검이군요.”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요.”
“다행이다.”
란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를 떠밀었다.
“얼른 가 봐. 마갑도 시험해 본다며.”
루미에가 떠밀리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란은 그를 배웅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백작님.”
집사가 그녀를 불러 공손히 은쟁반을 내밀었다.
“마법사 협회에서 편지가 와 있습니다.”
“드디어!”
란은 잽싸게 편지를 집어 들었다.
“시나는?”
그녀의 물음에 집사가 “방에 계십니다.” 하고 답해서 란은 시나의 방으로 향했다.
“시나! 마법사 협회에서 답장이 왔어.”
란이 방으로 들어서며 하는 말에 연습용 날 없는 검을 휘두르고 있던 시나가 검을 소파에 던지고는 달려왔다.
“정말이요? 뭐라고 해요?”
“나도 아직 안 열어 봤어.”
란이 그렇게 말하고 편지를 내밀었다. 시나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가 도로 란에게 내밀었다.
“저 못 읽겠어요. 언니가 보고 알려주세요.”
란은 그 말에 시녀에게 편지 칼을 받아 들어 편지를 개봉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
“언니……?”
란이 편지를 접고 “시나야.” 하고 작게 부르자 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안, 안 된대요?”
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나가 란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정신없이 편지를 읽고 시나가 이를 악물었다.
“아예 안 된다는 건 아니네요? 그렇죠? 조금이라도 확률은 있다는 거잖아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시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 엄마, 엄마 보고 싶―”
란은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끼며 시나를 꽉 끌어안았고 시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어엉―”
“언니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란은 스스로에게 되뇌듯이 말하며 시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원래대로라면 시나는 돌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바뀌었으니 그녀라고 돌아가지 못하라는 법이 있나?
란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 고였다.
어떻게든 모든 방법을 다 수소문해 보리라.
✥✥✥
아직 상복을 벗지 않은 올리비아의 얼굴은 창백했다. 슬픔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참지 못하고 화장대의 향수병을 던져 거울을 깼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은세공을 넣은 비싼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올리비아는 손끝을 깨물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날 유스타프와 잤어야 했어.’
올리비아는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리젤로티 백작 부인의 연회가 열리던 그날 밤, 올리비아는 황궁에서 유스타프와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였다.
황궁에 오겠다는 말도 없이 나타났기에, 그걸 빌미로 올리비아는 유스타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올리비아는 미녀였고, 그녀는 그걸 잘 이용할 줄도 알았다.
미인과 권력.
양쪽을 다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어느 남자가 그걸 거부하겠는가?
“처음 봤을 때부터, 공작님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달콤한 말을 내뱉으며 올리비아가 킥킥거리고 그의 허리띠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유스타프의 새파란 눈이 어스름 속에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심장이 두근거려 올리비아는 웃었다.
“제 아이의 아버지가 되실 수 있지요.”
의미심장하지도 않게 직설적으로, 올리비아가 붉은 입술로 속삭였다.
“차기 황제가 당신의 아이가 되는 거예요.”
제국과 저를 둘 다 손에 넣는 거지요.
올리비아는 드반이 주었던 약을 떠올렸다. 확실하게 임신이 된다는 그 약.
하룻밤, 아찔한 유혹에 그저 실수로 그가 넘어온 거라 해도, 아이를 가진다면 자신의 승리다.
그녀가 발돋움하며 그에게 입맞춤하려는데 유스타프가 몸을 뺐다. 그가 제 허리띠에 걸린 그녀의 손가락을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떼어내며 말했다.
“저는 선약이 있어서.”
“제국의 지배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있나요?”
올리비아가 입을 비죽이며 묻자 유스타프는 고저 없이 대답했다.
“있지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방을 나섰다. 올리비아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가 유혹해서 실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유스타프가 란을 만나러 리젤로티 백작 부인의 연회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자신과의 만남을 거부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격렬한 화가 솟구쳤다.
새까만 질투와 분노가 란을 향했다.
그녀만 없었으면, 자신이 수치를 당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때 임신했다면 모든 게 다 잘 풀렸을 거야!’
자신도 이렇게 친정으로 돌아와 있지 않아도 됐을 거다. 미로 공작가와 라치아 공작가를 등에 업고, 제국의 상속자를 품에 안은 채로 황궁의 정점이 되어 있었겠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순진하고 착한 척하는 얼굴을 해서는, 뒤로 남자를 꼬셔대는 여자. 올리비아는 그런 여자를 아주 잘 알았다.
란도 그 한 꺼풀만 벗기면 똑같은 것을.
‘그리고 내 초대를 거절해?’
란이 했던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계속 떠오르며 올리비아의 분노를 부추겼다.
올리비아 자신이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정말로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거나 선의로 사람이 움직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선의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면, 올리비아에게는 멍청이로 보일 뿐이었다.
올리비아는 란이 저를 짓밟고 지금쯤 승리의 웃음을 짓고 있다고 믿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올리비아는 다시금 굳게 결심했다.
드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도무지 제 여동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남편이 죽었다는 건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녀의 슬픔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자식이 좋은 남편도 아니었고.’
제국의 황제만큼이야 못하겠지만, 왕국의 왕비를 재취 자리로 알아보는 중이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너무 연연하지 않고, 새로 시집을 가서 남편과 해로하면 좋을 것을.’
드반은 루스가 죽은 후 올리비아가 며칠을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했다.
딸처럼 키운 여동생을 잃을까 봐 그는 제발 일어나서 뭐라도 먹으라고 애원했고, 올리비아가 그런 오라비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그 계집 때문이에요.”
움푹 들어간 보라색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그 라치아 계집 때문이라고요!”
드반은 도무지 그게 왜 그렇게 연결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사교계에서 사소한 대립은 있었지만, 루스가 죽은 직접적인 원인은 마약 과다 복용 때문이었다.
제 애첩인 코르티잔과 그녀의 저택에서 또 진탕 놀고 술에 약을 타서 마시다가 죽은 거다.
심지어 알몸이었는데 뭘 했는지, 성기가 베어져 피투성이였다. 그것 때문에 처음에는 타살인가 했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아무래도 루스가 약을 하고 스스로 칼을 휘두르다가 그랬다고밖에 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
제국의 황제라고 하기에 그야말로 너무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모두가 쉬쉬했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 만큼 퍼져 있었고, 드반은 제 손으로 남은 코르티잔과 그녀의 자식을 베어 버렸다.
“들어가마.”
드반의 말에 “들어오세요.” 하고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미로 공작가 저택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새카만 상복으로 전신을 휘감은 올리비아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고, 동시에 오싹한 뭔가가 있었다.
“정말로 이걸로 되겠니?”
드반의 말에 올리비아는 새빨간 입술로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구해 주신 건가요?”
“그래. 하지만― 난 그렇게 믿을 만한 자 같지 않다. 너도 알겠지만 이민족은―”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드반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저 때문에 무리해 주신 거 알아요.”
드반이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널 위해서는 뭐가 어렵겠니?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어. 굳이 네가 하지 않아도.”
“제가 제 손으로 꼭 하고 싶어요. 그러면 원하는 곳에 다시 시집가겠어요.”
“올리비아.”
드반이 조심스럽게 제 누이를 불렀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왕국이 아니라 다른 곳을 알아보마.”
올리비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국에서 제가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겠어요.”
드반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올리비아가 먼저 몸을 떼며 싱긋 웃었다.
“그럼 그 사람을 들여보내 주세요.”
드반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는 걸 보고 올리비아는 비죽 웃었다.
드반이 자신을 아끼는 걸 알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은 여동생인 자신을 좋은 혼처에 보낸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최고의 혼처는 사라졌어.’
제국의 황후.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인데.
올리비아의 드높은 자존심은 깊이 상처를 입었다.
분명히 그녀 앞에는 탄탄대로가 있었다. 올리비아는 착실히 그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 계집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가 이긴 줄 알지.’
올리비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라치아 공작을 차지하고, 이제 제 세상이 열렸다고 생각하겠지? 올리비아 자신이 그를 유혹했지만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터였다.
란의 비웃는 얼굴이, 올리비아에게는 또렷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기는 건 나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전신을 천으로 가린 작은 사람이 들어왔다.
올리비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옛 트라반 왕국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이방 억양이 강한 말투에 올리비아는 경멸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더더욱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뭐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들었네만.”
“뭐든은 아닙니다.”
“동물이나 인간을 다룰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네에, 그 정도는…… 가능하지요……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올리비아가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되었네. 우리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