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복수는 보름달이 뜨는 날에
Chapter 3. 복수는 보름달이 뜨는 날에
배 아래 선창은 깜깜했다.
유스타프는 제 숨을 깊게 내쉬기 위해서 애썼다. 쓰러진 채로 란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란, 란, 란 로미아.”
몇 번이나 애원하듯 불러 봐도 그녀에게서는 작은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고, 그게 그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유스타프는 기둥에 제 뒷머리를 부딪쳤다. 분노와 짜증과 불안이 뒤섞여서 제대로 사고하는 게 어려웠다.
잡혀 있다는 사실 자체는 걱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뒤로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않는 란은?
“……달…….”
그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유스타프는 숨을 삼켰다.
“란?!”
“…름……달…….”
“란!”
란은 몽롱한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그 목소리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합쳐져서 들렸다가 다시 나뉘어졌다.
란은 천천히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과 동시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흐윽―”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소리를 냈다가 다시 신음을 삼켰다.
“란, 괜찮습니까?”
란이 상처 입은 작은 짐승처럼 몇 번 숨을 가파르게 내쉬다가 대답했다.
“유스……?”
그녀는 몸을 일으키다가 컥 하고 숨을 삼켰다.
‘뭐야……?’
더듬더듬 목 주변을 더듬으니 쇠줄로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으…….”
팔을 움직이니 팔도 너무 아팠다.
“란, 정신이 드십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란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또 시력을 잃은 건지.
란은 눈을 꽉 감았다.
“유스, 나 아무것도 안 보여.”
목소리가 와들와들 떨려서 나왔다. 자신이 들어도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두워서 그럴 겁니다.”
그러나 유스타프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란은 용기를 얻어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주변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를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살폈다. 창고는 어두워서 어둠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란은 지끈지끈한 머리로 어떻게든 기억을 조합하며 말했다.
“납치당했다는 건 알겠어.”
그녀의 침착한 목소리에 유스타프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 그대로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니면 일어난다고 해도 부상이 심할까 걱정했다.
“지금 배 밑입니다.”
유스타프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고 란은 비명을 질렀다.
“청염을 강에 던졌어?!”
“네.”
“뭐가 그렇게 당당해!”
“아니면 란이 더 심하게 다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청염이 없으면.”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게다가 너마저 잡히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말하다가 란은 기침을 했다.
‘아.’
피 맛 난다.
란은 숨을 골랐다. 아직도 전신이 욱신거렸다. 아파서 더 신경이 날카로운 건지도 모른다.
란은 손으로 제 몸을 더듬어 보았다.
‘팔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발목이 너무 아파.’
왼쪽 발목이 아팠다.
‘그래도 낙마해서 이 정도니 다행인가. 안에 갑옷을 항상 착용하길 잘했네. 머리를 다치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괜찮으니 내출혈은 없는 것 같고…….’
몸뚱이는 나디움 갑옷이 보호해 줬지만 보호받지 못한 다른 부분들은 엉망이었다.
왼팔도 욱신욱신해서 살피니 뭔가 상처가 있었다.
‘엉망이네.’
“유스타프는 괜찮아? 다치지 않았―”
그쪽으로 다가가다 다시 목이 졸려 란은 신음을 삼켰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줄을 당겼지만, 기둥에 걸린 쇠줄이 끊어질 리가 없었다.
란은 멍하니 있다가 물었다.
“보름달은 언제 뜨지?”
유스타프는 엉뚱한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말했다.
“얼마 전이 달 없는 밤이었는걸요. 2주는 더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가.”
란은 크고 둥근 보름달을 떠올렸다. 자신은 날개가 없고, 보름달이 뜨는 날 날아오르면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 날 거다.
하지만 보름달이 뜨니까.
‘어쩔 수 없는걸.’
“내가 정령을 부를게.”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미쳤습니까?” 하고 말했고 란은 “그럼 어쩌려고?” 하고 되물었다.
“부하들을 믿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입을 떡 벌렸다.
“뭐?”
유스타프가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녹영이 절 놓쳤을 리가 없습니다. 저에게 마법 추적기 같은 걸 달아 놓는 놈들인데요.”
그 말에 란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정말?”
“네.”
“다행이다…….”
란은 안도했고, 유스타프는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지간히도 단단히 묶어 뒀다.
뒤로 꽉 당겨진 어깻죽지가 시간이 지나서 불타듯 아프다가 이제는 고통마저 무뎌진 상태였다.
란이 말했다.
“유스타프는? 괜찮아?”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가든파티에 참석하러 왔지요. 란 혼자 황태후를 상대하러 보낸 게 걸려서.”
“……유스.”
복잡한 심경이 되어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와줘서 기쁘기도 했고, ‘왜 왔어!’ 하는 기분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올리비아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아.”
란이 작게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그래?” 하고 되물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을 노릴 만한 사람, 그리고 굳이 살려서 끌고 오게 하는 오만함. 미로 공작 영애나 할 법한 생각이죠.”
게다가.
유스타프는 범인을 고민하다가 뒤늦게야 올리비아를 거절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멍청한 여자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하지만 정황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군…… 그리고 카트야 황태후께서―”
란이 그녀의 상태가 이상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유스타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신기하네요.”
“그지? 사람을 조종하는 마법인가.”
그때 위의 선창 문이 열리고 거친 발소리를 내며 선원 한 명이 내려왔다. 배불뚝이 선원이 안으로 등불을 비추며 큰 소리로 외쳤다.
“뭘 이리 떠들어!”
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배불뚝이는 아래로 내려와 란에게 등불을 들이댔다. 마법 램프라 뜨겁지는 않았지만, 눈이 부셔 란은 고개를 돌렸다. 배불뚝이가 란의 턱을 붙잡으며 말했다.
“야들야들하네, 아주 그냥.”
란은 있는 힘껏 그의 뺨을 때렸다. 철썩하는 소리가 나고 램프가 한쪽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이년이!”
그가 란을 걷어차자 란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그가 기둥에 걸린 목줄을 홱 당기자 란의 상체가 강제로 들리며 란은 컥컥거렸다.
배불뚝이가 그걸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얼굴 못 들고 다니게 될 거다. ―윽?!”
유스타프가 뒤에서 선원을 걷어찼다. 정확하게 발목 부분을 걷어차서 배불뚝이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벌러덩 넘어졌고, 이어 유스타프가 그의 머리를 뒤꿈치로 강하게 찼다.
빡, 하는 묘한 소리와 함께 선원의 몸이 축 늘어졌다.
“란, 란, 괜찮습니까?”
란은 목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갑옷 때문에 아프지 않았지만, 당겨진 목이 아팠다.
란은 떨리는 눈으로 쓰러진 선원을 바라보았다.
“주, 죽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외침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위에 있던 다른 선원이 선창 문을 열며 외쳤다. 하지만 쓰러진 선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이, 이봐, 괜찮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검을 빼 들고 그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바닥에 나뒹군 마법 램프가 아직 꺼지지 않아서 선창 내부는 희미하게 밝았다.
그는 쓰러진 선원을 보고 움찔하더니 검을 도로 꽂아 넣고 다가와 검집으로 유스타프를 후려쳤다.
란은 비명을 삼켰고, 유스타프는 피를 흘리며 히죽 웃었다.
“왜? 묶여 있는 인간에게 당한 멍청이가 동료인 게 창피해서?”
선원은 일단 쓰러진 동료의 숨을 확인했다. 숨을 쉬지 않는 걸 확인한 그가 이를 빠드득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 새끼가! 넌 죽여도 상관없는 덤이야! 살려 오라는 건 저 여자뿐이라고!”
그러며 그가 유스타프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란은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유스! 유스!”
선원은 숨을 몰아쉬며 피에 젖은 검집을 도로 검대에 차고 란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저 여자가 네 약혼녀라지? 씨x, 이제 도착하면 저 여자가 어떻게 되는지 네 눈으로 전부 다 보게 될 거다.”
그가 퉤 하고 침을 뱉고는 쿵쾅 발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가고, 선창이 닫혔다.
“유스타프, 유스, 괜찮아?”
흐느끼며 란이 물었고, 유스타프가 퉤 하고 피를 뱉어 낸 후에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일부러 도발을 했다. 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게 나으니까.
이 정도는 익숙하다.
“안 괜찮아―”
란이 울며 말해서 유스타프는 “울지 마세요.” 하고 작게 속삭였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쓰러진 선원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는 저자가 죽었을까 무서웠는데, 유스타프가 맞는 것을 보자 그런 게 조금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열쇠를 혹시 저 자식이 가지고 있지 않을까.”
란은 그러며 더듬더듬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후경직이 일어난 뒤에 만지는 것보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지금이 더 만지기가 나을 것 같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만, 란은 꼼꼼하게 옷을 뒤졌다.
“없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유스타프가 말했다.
“부츠 안쪽을 봐 주시겠습니까?”
“부츠……?”
란이 의아해하며 손을 뻗어 부츠 안쪽을 더듬자 뭔가가 느껴졌다.
“아!”
란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그걸 빼냈다. 단검이었다.
“이쪽으로 밀어 주세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 쪽으로 단검을 밀었다. 유스타프는 몇 번 시도한 끝에 간신히 단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란의 목줄과 달리 그의 것은 짚으로 된 줄이었기 때문에 곧 줄이 끊어졌다. 뒤로 당겨져 있던 어깨가 풀리면서 불이 붙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그는 천천히 어깨를 움직여서 풀었다. 통증이 사라지자 그제야 피가 통하며 저릿한 느낌이 들어 유스타프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발목의 밧줄까지 끊고서 단검을 허리춤에 도로 찔러 넣고 유스타프가 다가와 란의 목줄을 살폈다.
쇠줄은 자물쇠로 단단히 기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선창 뚜껑을 살짝 밀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자물쇠로 잠근 후에 무거운 걸 옮겨 둔 듯했다.
“유스타프 혼자서만이라도 탈출해.”
란이 절박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란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단은 도착지까지 가 보죠.”
“뭐? 탈출하는 게 아니라?”
“상대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 상황에서 탈출하려면 위의 선원이 문을 열게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란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유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제 곧 도착한다고 했고, 슬슬 물 냄새도 바뀌었습니다. 금방 만나게 될 겁니다.”
유스타프가 란의 앞에 앉아서 그녀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상처가 하나 발견될 때마다 유스타프의 푸른 눈동자가 점점 더 깊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전문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고?”
“램프를 두고 간 것도 그렇고, 인질을 다루는 방식도 그렇고 말입니다. 저를 때릴 때도 비효율적이더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제 딱지가 앉기 시작한 란의 팔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자신을 살피는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란은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물었다.
“효율적으로 때리는 방식이 있어?”
“있지요.”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고통을 줘서 굴복시키는 방법을 유스타프는 여럿 알고 있었다.
유스타프는 단검으로 란의 페티코트 일부를 잘라서 그녀의 발목에 테이핑하듯이 천을 감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 상처를 살피며 살며시 머리를 더듬을 때 란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아프십니까?”
“아니, 괜찮아.”
“어지럽거나 토할 것 같지는 않으시고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멀쩡해.”
유스타프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배에 달린 마법 세공품도 있지요. 아무리 그래도 마법 세공품은 귀족이 아닌 자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즉, 저 선원들은 미로 공작가 소속일 겁니다. 그쪽에도 더러운 일을 해주는 연줄은 있겠지요.”
중앙 정치와 가까이에 있다면 더더욱.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면 안 돼.”
아직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잠시 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 어머니가 저에게 충고한 말이 있었습니다.”
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죽여 버리라고요.”
란이 크게 움찔했고, 유스타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상대방이 배신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이지요.”
“무서운…… 말이네…….”
란이 간신히 말을 내뱉어서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했습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유스타프가 천천히 란의 뺨을 쓸었다.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사랑은 한없이 모호한 것이지요.”
란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가 말했다.
“사랑을 한 사람에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건 없고.”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가 눈을 찌푸렸다.
“여기도 상처가 있네요.”
“아, 말에서 떨어질 때 다쳤나 봐.”
란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멋쩍게 덧붙였다.
“이제 결혼 다 했네.”
“다 했지요. 저와 할 테니까.”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저는 사랑에 빠지면 뭐 세상에 둘밖에 없고, 그런 묘사들 있잖습니까?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란이 바람 빠지듯 웃었다.
“그렇지.”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의 푸른 눈이 란에게 고정되어서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저조차도 보이지 않더군요.”
란은 숨을 삼켰다.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
“유스…….”
떨리는 숨으로 내뱉은 소리에, 유스타프가 그 숨결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피 맛 나.”
란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혀로 입 안을 훑고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래도…….”
란이 어쩔 줄 모르자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그러니 사랑에 푹 빠진 남자의 무모한 선택을 용서해 주시죠. 게다가 그렇게 무모한 것도 아니었고요.”
“충분히 무모해.”
그녀가 유스타프의 얼굴에 난 상처를 만지며 말했다. 터진 입술로 유스타프는 가볍게 웃었다.
“란을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낫지요.”
유스타프가 배 위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가 슬슬 느려지고 있는 게 이제 정말로 도착한 것 같군요.”
“벌써?”
란이 놀라 묻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춰 준 다음 말했다.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눈을 꼭 감으세요.”
“응.”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밧줄로 대강 손이 묶인 것처럼 하고 앉았다.
란은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유스타프가 함께 있으니까.
쿵.
작은 울림이 배에 전해졌다. 선착장에 배가 닿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명이 우르르 배 위에 올라타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서야 선창 문이 열렸다.
“올라 와.”
유스타프가 줄을 푼 걸 알고 있는 듯이 밖에서 말했다.
“유스…….”
란이 초조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유스타프가 “괜찮아요.” 하고 속삭인 뒤 말했다.
“나가길 원하면 내려오든가?”
그러자 선창으로 기름이 쏟아졌다. 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산 채로 통구이가 되고 싶지는 않겠지?”
유스타프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선창 위로 순순히 올라갔다. 잠시 후 좀 전에 보았던 선원과는 다른 남자가 내려왔다.
그가 먼저 란의 손을 묶은 다음 그녀의 목줄을 기둥에서 떼어내고 잡아당겼다.
란은 왼쪽 발목을 디뎠다가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누르고 절뚝거리며, 그리고 계단에서는 네발로 기다시피 해서 올라갔다.
배 위에 올라가니 햇살이 눈을 찔러 란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있다가 나오니 눈이 아팠다.
“목줄이라니, 딱 개에게 어울리는 장신구네요.”
웃음기 섞인, 승리에 도취된 목소리에 란은 눈을 떴다. 선착장가에 로브를 뒤집어쓴 올리비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올리비아…….”
란이 중얼거리자 그녀의 목줄을 잡고 있던 남자가 힘차게 줄을 잡아당겨 란은 몇 번 컥컥거렸다.
“올리비아 님이라고 불러야지.”
선원의 말에 란은 숨을 몰아쉬고 “올리비아 님.” 하고 말했고 올리비아는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그동안 답답하고 괴로웠던 것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일이 수월하게 풀리니, 신도 그녀를 돕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신들도 그녀의 억울함을 아는 거다.
그래서 본래는 숲 안쪽 오두막에서 기다리기로 했던 것도 참지 못하고 허둥지둥 선착장까지 나온 거였다.
목줄이 걸린 채 비참하게 끌려 나오는 란의 모습이 올리비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는 이어 유스타프를 바라보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유스타프는 포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남자 둘이 그의 옆구리에 창을 들이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라치아 공작님. 본의 아니게 함께 잡게 되어서 영광이군요.”
“본인이 여기까지 나올 줄이야.”
유스타프의 중얼거림에 올리비아가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앉아서 선물을 기다릴 수가 없더군요.”
유스타프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저까지 처리할 생각입니까?”
“설마요.”
올리비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란도 죽일 생각은 없는걸요.”
그건 너무 쉽잖아요?
올리비아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란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올리비아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끔찍한 일을 준비했다.
올리비아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란을 위한 환대는 준비했지만, 공작님을 위한 환대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올리비아가 순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란이 환대받는 걸 같이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요? 꽤 즐거울 거랍니다.”
“어떤 환대인지 궁금한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며 숲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사락사락 나무들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지금 말씀드리는 게 기대감을 높이는 걸까요?”
올리비아가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목줄을 잡은 남자가 란을 잡아끌었고, 유스타프도 옆구리를 창끝으로 밀어서 두 사람을 배에서 내리게 했다.
“안쪽에 남자 여럿이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창녀를 만족시켜 주려고요.”
올리비아의 말에 란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얼굴에 공포가 서리자 올리비아는 기쁨이 솟구치는 걸 느끼며 재빠르게 이어 말했다.
“확실히 임신이 되는 약도 있지요. 그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예쁜 얼굴도 흉터투성이로 끔찍해지겠죠.”
미모를 잃고, 순결을 잃고, 후계자가 아닌 아이를 가지는 것.
여자의 가치는 그 세 가지였기에 올리비아가 생각하기에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다.
란이 저렇게 되면, 유스타프도 란을 버릴 것이다. 가치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날 적대하는 거죠?”
올리비아가 불타오르는 눈으로 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네가 그 이유를 모른다고? 넌 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어, 란 로미아. 감히, 하급 귀족의 딸, 아니 창녀의 딸 따위가―”
지고한 여인인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사교계에서 자신의 이름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는가?
올리비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이 강했고, 무엇보다도 그것에 상처를 준 란을 용서할 수 없었다.
“너만 없었으면, 난 최고였을 거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뭘 어쨌는데?”
“내 남편을 유혹했지.”
“무슨―”
“황태후도 네 편으로 만들고―”
그녀가 바싹 다가와 란을 강하게 밀치며 말했다.
“그리고 라치아 공작가까지 삼키려고?”
란이 앗 하며 물에 풍덩 빠졌다.
“란!”
유스타프가 뛰어들려고 하는 걸 남자 여럿이 달려들어 붙잡았다.
손이 묶여 있어 란은 발로 헤엄을 칠 수밖에 없었고, 드레스 차림으로는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란은 물 위로 고개를 내민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콜록거렸다.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가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오지만,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올리비아는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로 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분수에 맞는 환대를 해 주마.”
그리고 올리비아가 유스타프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어떤가요? 지금이라도 제 것이 된다고 해 주세요. 늦지 않았어요.”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제가 라치아 공작 부인이 되면, 라치아는 지금보다 더 번영할 겁니다. 어떤가요? 게다가 제 계획을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제 란은 쓸모가 없잖아요?”
“왜?”
유스타프의 의문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굳는 순간,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숲 안쪽에서 들려왔고 유스타프는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올리비아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그때 화살이 날아와 란의 목줄을 잡은 남자를 맞혔다.
란은 순식간에 물을 빨아들여 무거워진 드레스 때문에 물 아래로 끌려 들어가듯 내려갔다. 숨이 괴로웠지만, 란은 보름달을 떠올렸다.
둥글고 환한 보름달.
그러자 어쩐지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붙잡았고, 수면 위로 전신이 끌어올려졌다.
“켁, 컥, 쿨럭―”
유스타프는 기침하는 그녀를 선착장 위로 끌어올렸다.
“란, 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애달파서 란은 기침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주인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란은 눈을 깜박였다. 루미에의 선명한 주홍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스타프가 이를 빠드득 갈고 말했다.
“늦었어.”
“죄송합니다.”
루미에는 그렇게 말하고 란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넌 전투에서 빠져.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루미에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유스타프는 강 위로 손을 내밀고 말했다.
“세레카.”
수면을 뚫고 빛나는 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오듯이 날아왔다. 나디움으로 만들어진 드워프제 검은, 그 주인의 부름에 착실하게 응했다. 그의 옆에 잽싸게 녹영의 첫 번째가 와서 섰다.
“몇 명이나 있지?”
“스무 명 정도입니다.”
“그래? 깨끗하게 죽이지 마라.”
“존의.”
첫 번째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고 유스타프는 화살에 맞아 쓰러진 채로 바르작거리는, 란의 목줄을 잡았던 남자를 찔렀다.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에도 유스타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버둥거림이 멈출 때쯤이나 되어서 유스타프는 상대의 목을 쳤다.
그의 시선에 올리비아가 들어왔다. 숲 안쪽으로 호위들의 보호를 받으며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유스타프는 히죽 웃었다.
녹영의 두 번째― 키리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사실 잔소리가 하고 싶었다.
‘가주님까지 같이 잡히시면 어떻게 합니까! 라치아의 혼란을 어쩌시려고요?’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내뱉는다면, 그 순간 제 목이 날아갈 거라는 걸 직감했다.
주군은 지금 분명히 자신들에게도 화가 났다. 단지 적이 눈앞에 있으니 분노를 그곳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까지는 적을 죽여도 저렇게 잔혹하게 군 적은 없었다.
키리는 눈을 굴렸다가 말했다.
“란 님을 지키러 가도 되나요?”
유스타프가 돌아보지도 않고 가라고 손짓했고, 키리는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첫 번째, 힘내요.’
그렇게 애도하며 말이다.
키리는 전투에서 벗어나 잽싸게 란과 루미에를 따라잡았다.
그녀는 란의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거, 화내실 만한데.’
“백작님, 괜찮으세요?”
키리의 말에 란은 “키리……?”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암록색의 전투 복장을 한 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낯설기도 하지만 이게 그녀의 본모습이겠지 싶었다.
“유스타프를 도와주러 가야 하지 않아?”
“지금 가주님 앞에 서는 인간은 어리석은 인간일 거예요.”
“하지만 유스타프 다쳤는데…….”
“아가씨보다 맷집이 있으신 분이니 걱정 마세요.”
란은 다시 기침을 했다. 그녀의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와 루미에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한 기분이 되어 말했다.
“내상을 입으셨습니까?”
뚜렷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쉰 목소리가 새어나오듯이 나왔다.
“아냐. 그냥 목이 좀 다쳐서…….”
란의 목소리도 다 쉬어 있었다. 키리가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목줄에 당겨지셔서 그런 걸 거예요.”
란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지친 고개를 루미에의 어깨에 묻었다.
그가 그녀를 좀 더 편하게 추스르며 말했다.
“이제 곧 도착할 겁니다.”
“어디에?”
란의 작은 중얼거림에 키리가 대신 대답했다.
“저희도 배를 타고 왔거든요. 아, 보이네요!”
란은 그 말에 눈동자만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생각보다 큰 배가 서 있었다.
루미에가 배에 올라타자마자 디모디아가 마중을 나왔다.
“세상에, 아가씨!”
디모디아는 어쩔 줄 모르며 키리를 보았고, 키리가 물었다.
“치료사는?”
“안에 있습니다.”
“얼른 모셔.”
상당히 호사스러운 배여서, 작기는 해도 침실과 거실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란이 거실에 앉자마자 디모디아가 루미에를 밖으로 내쫓고 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란이 조금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저, 디아…….”
“어디 안 좋으신가요? 말씀하세요!”
“……생리 현상…….”
란이 붉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디모디아가 “아.” 하고는 재빠르게 란을 화장실로 안내했다.
볼일이 끝나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란은 더더욱 몸이 아파진 것 같았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치료사가 란을 보고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디모디아에게 물었다.
“디아, 보름달은―?”
“네?”
“아니, 보름달까지 얼마나 남았어? 나 시간을 잘 모르겠어.”
디모디아는 란의 머리 상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12일 정도 남았어요.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란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말하면 모두가 말리려고 들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은 반드시 날아올라야 한다.
그 사이 치료사가 란의 상처를 살핀 후에 말했다.
“먼저 씻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거 반가운 말이네.”
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배에서 씻을 수 있나?”
란이 갸웃하자 키리가 “물론이지요.” 하고 란을 부축했다.
치료사가 란의 발목에 부목을 해 주어서 그래도 통증이 좀 덜했다.
디모디아와 키리가 란의 몸을 조심스럽게 씻겨 주었다. 머리카락에 굳은 피를 떼어내고, 더러워진 상처도 씻어냈다.
배에서 씻을 수 있다니,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모디아가 시퍼렇게 멍이 든 란의 목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파티에 같이 갔어야 했어요.”
디모디아가 말했다.
“하지만 시녀를 데려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는걸.”
란이 그런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고, 디모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눈총을 받았어도 같이 가는 거였는데.”
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품을 듬뿍 낸 스펀지로 조심스럽게 란의 몸을 문질렀다.
“팔에는 흉터가 남겠어요…….”
디모디아가 이미 딱지가 앉은 팔의 상처를 살피며 말했고 란이 말했다.
“괜찮아. 살았으니까 됐지.”
키리가 가위를 들고 와서 말했다.
“머리에 상처 난 부분은 짧게 잘라야겠어요. 그래야 꿰맬 수 있거든요.
란은 신음을 흘렸다.
“땜빵이라니…….”
“다른 머리카락이 길어서 안 보일 거예요. 자, 얌전히 계세요.”
키리가 그렇게 말하고 란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내서 상처가 잘 보이게 했다. 한 움큼 잘라진 머리카락을 보자 란은 괜히 우울해졌다.
‘아냐. 어차피 잠시 후면 보름달이 뜨는걸.’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란은 몸을 헹구고 욕조에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치료사가 란의 전신에 연고를 치덕치덕 발랐다.
낙마한 탓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고, 팔의 상처도 꿰맸으며, 다리에도 습포를 붙였다.
목줄을 당긴 탓에 목 주변에도 띠처럼 멍이 생겨서, 치료사는 조심스럽게 목 주변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말했다.
“말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보니까 목 안쪽까지 다치신 것 같던데.”
란은 기침하다가 피 맛이 난 걸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에 조심스럽게 옷을 겹쳐 입자 그제야 안도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곧 루미에가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음식 냄새에 갑작스레 허기가 느껴져서 란은 허겁지겁 뜨거운 빵을 집어 들며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잡힌 지 얼마나 된 거야? 중간에 정신을 잃고 있어서 잘 모르겠어.”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해도, 모두가 알아들었다.
“오늘로 3일째입니다.”
루미에의 설명에 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오래됐어?!”
목소리가 저절로 커져서 작게 기침하니, 루미에가 눈을 찌푸렸다.
“목을 쓰지 마세요.”
하지만 란은 황당해서, 목의 힘을 뺀 채로 작고 빠르게 말했다.
“뭐야, 그럼 나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건가……?”
유스타프가 걱정할 만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나는?”
“시나는 녹색 아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녀 덕분에 찾기가 쉬웠어요.”
“시나 덕분에?”
“주인님 뒤를 쫓아갔더군요. 중간중간 자기 드레스 자락을 잘라 흔적을 남기면서요.”
“진짜? 시나가 쫓아왔었구나…….”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루미에의 추궁에 란은 한숨을 내쉬고 얘기했다.
“황태후마마가 같이 경주를 하자고 하셔서…….”
이야기를 들은 루미에가 눈을 찌푸렸다.
“황태후가 조종당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게 아닐까.”
란은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빵을 입 안에 던져 넣은 후에 몸에서 힘을 빼 소파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하지만 이제 해결되겠지. 더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루미에가 팔걸이에 앉아 그녀의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제 심장을 가만두지 않으시네요, 주인님은.”
란이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싫어졌어?”
루미에는 눈을 찡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당겼다가 놓아주었다.
“이런 걸로 싫어질 거면 예전에 싫어졌지요.”
말하고 루미에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란이 상체를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제 걱정을 하실 때가 아니지요.”
루미에가 걱정 따위는 지워버리는 교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몸이나 회복하세요. 치료사에게 들으니 완전히 나으시려면 한참 걸린다면서요.”
“타박상인데 뭐.”
“머리를 꿰맨 사람은 그런 말을 안 하지요.”
“동감이에요.”
큰소리로 말하며 디모디아가 약을 가지고 들어와 말했다.
“아직은 진통제 때문에 괜찮지만 시간 지나면 꿰맨 곳이 아파올 겁니다. 자, 약을 먹고 가서 푹 주무세요.”
“유스타프는?”
란의 물음에 디모디아가 미소 지었다.
“나중에 오실 거예요.”
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유스가 올리비아를 죽일까?”
디모디아가 멈칫했다가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그럼 용서해 주길 바라세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스타프가 올리비아를 죽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데…….
올리비아가 죽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유스타프가 누군가를 죽이는 게 싫었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소리를 해 봐야 소용없겠지.
저쪽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남은 감각은 이곳에서는 필요 없다.
만약 한국에서 상사가 애인을 괴롭혔다고 남친이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해서 상사를 죽였다면 “도망쳐.” 소리가 저절로 나오겠지만, 이곳에서는 아니다.
죽고 죽이는 게 당연한 세계.
‘하긴, 나도 사형 선고를 내린 적도 있고.’
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먼저 약을 드세요.”
디모디아가 내민 녹색의 지독한 맛이 나는 약을 삼키고, 란은 얼른 물을 마셨다.
디모디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 이제 양치하고 주무세요.”
마치 훈계 받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란은 “네에―” 하고 얌전히 대답한 후에 씻고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리고 진짜로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든다는 게 무슨 말인지 경험했다.
란은 서늘한 기운에 잠에서 깨어났다. 조심조심 제 목의 상처를 만져 보는 손길에 란은 웃으며 눈도 뜨지 않고 팔을 벌렸다.
그러자 침대에 반쯤 눕듯이 그녀를 마주 안으며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시고 팔을 벌리십니까?”
그 말에 란이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눈을 떴다.
“어? 유스였어?”
유스타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란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아, 그럼. 당연히 유스타프지. 어서 와. 다녀왔어?”
“제가 아니면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란이 싱긋 웃었다.
“유스타프 말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의 손가락이 유스타프의 얼굴을 훑다가 그의 미간이 찡그려진 걸 발견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유스, 진짜로 화난 거 아니지?”
“아닙니다. 하지만 상상만 해도 화가 치밉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란의 몸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치료사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좀 괜찮으십니까? 괜히 저 때문에 깬 거 아닌가요?”
“유스타프가 왔는데 깨우지 않았으면 더 화가 났을 거야.”
란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팔을 잡아당겨 팔베개를 하며 말했다.
“유스타프야말로 몸은 어때? 괜찮아?”
“그 정도는 모기에 물린 정도지요.”
“모기가 그러면 난 칼을 들고 모기와 싸워야 할 거야.”
그러며 그의 반대 손과 깍지를 끼다가 란은 흠칫하고 그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청염!!”
“네.”
“어떻게 찾았어? 뭐야? 강바닥 뒤진 거야?”
“청염이 ‘한 번 더 날 버리면 뒤진다?’ 하는 말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진짜?”
“아뇨.”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멍하니 그를 보았고,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유스타프가 웃고 이마에 키스해주며 말했다.
“청염은 어디로 가든 라치아의 가주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방식과 방법은 모르지만요. 제 방 테이블에 올라와 있더군요.”
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면 미리 말해 주면 좋았잖아! 엄청 걱정했어.”
자기 때문에 청염을 잃어버린 가주가 되면 어쩌나, 그래서 규탄받으면 어쩌나.
란이 투덜투덜 제 걱정을 말하자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그럼 란이 절 데리고 도망치면 되지요.”
그 말에 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그러면 같이 도망치면 되지요.”
그녀가 그 쪽으로 돌아누우며 파고들었다. 좀 더 가까이 붙어 있고 싶다. 유스타프는 막 씻고 나왔는지 희미하게 비누 냄새가 났다.
란이 웅얼거리듯 물었다.
“일은? 잘 해결됐어?”
유스타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네.” 하고 작게 대답했다.
“어떻게 됐어?”
유스타프는 말을 망설였다.
그가 했던 잔혹한 행동을 란에게 전부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걸 어떻게 생각할까가 두려웠다. 유스타프는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만 조심스럽게 골라냈다.
“일단 주술사는 살려 뒀습니다.”
“주술사……?”
“네. 황태후마마의 정신을 흐린 것을 인정했습니다.”
“진짜로 그랬구나. 황태후마마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은 금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하다니.”
잠시 유스타프는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요. 반역자이니 관대함을 바랄 수도 없을 겁니다.”
“반역자?”
“네. 제국이 세워지기 전에 왕국이 있었다는 걸 아십니까?”
“아, 알아. 트라반 왕국 말이지? 지금도 그 왕국 후손이라고 말하면서 제국에 대해 독립을 주장하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에도 역시 그랬습니다.”
유스타프는 잠시 그가 악의에 차서 피와 함께 내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제국이 있기 전에는 라치아 역시 왕국의 공작이었다.
‘왕국을 위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배신자인가?’
벌써 300년이나 전 이야기다.
그런 말을 들어도 와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스타프는 300년이나 그런 원한을 생생히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어쩐지 걸리는 소리도 내뱉어서.’
유스타프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네 소중한 것 역시 빼앗아주마.
잡혀서 꼼짝도 하지 못하면서도 주술사는 그런 말을 지껄였다. 물론 패자의 저주야 익히 들어온 바였다. 그런데 뭐랄까.
‘확신이 있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그때 란의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깼다.
“그럼, 올리비아는―?”
란이 조심스럽게 묻자 유스타프는 드물게도 “글쎄요.” 하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란은 놀라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 죽었어?”
“역시 죽이는 게 나았을까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유스타프가 란의 이마에 입 맞춰주고 말했다.
“걱정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겁니다.”
그녀가 란을 위해 준비했던 환대를, 올리비아에게 그대로 베풀어 주었다.
유스타프는 그런 과정을 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죽이지 않았다는 부분만 이야기했다.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하품을 했다. 유스타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주무세요.”
그가 팔베개해 준 팔을 빼기 전에 란이 그의 팔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같이 자면 안 돼?”
보름달이 뜨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너랑 있고 싶은걸.
“……란.”
신음처럼 그가 이름을 내뱉어서 란이 “안 돼―?” 하고 다시 말꼬리를 늘렸다. 유스타프가 거칠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다친 란을, 이런 흔들리는 배 위, 그것도 좁은 침대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요.”
란이 눈을 꿈벅였다.
“난 그냥―”
“잠만 자자는 유혹은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러며 그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데 “유스으―” 하고 란이 우는 소리를 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애원하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거기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유스타프는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도로 자리에 누워서 그녀의 팔베개를 해주며 말했다.
“란이 잠들 때까지만입니다.”
“응.”
헤헤 웃으며 그녀는 그를 꼭 끌어안았고 유스타프는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덩치 큰 인형처럼 끌어안는 상황에서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란이 자신과 함께 자고 싶어 한다는 사실―그의 옆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기쁘기도 했고, 동시에…….
‘결혼을 앞당길 수는 없을까.’
유스타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어차피 잠들지 못할 밤일 터였다.
✥✥✥
배를 타고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 사냥터에서 다시 마차를 달려 녹색 아치에 도착했을 때, 란은 휴식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리 호화스럽다고 해도 여행은 여행, 마차는 마차다.
하지만 눈물을 뿌리며 뛰쳐나오는 시나를 보자 휴식 생각이 날아갔다.
“란 언니!”
빽 소리를 지르고 시나는 란을 확 끌어안았고, 란은 비명을 삼켰다. 시나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물었다.
“다, 다치셨어요? 괜찮으세요?”
“괜찮아.”
란이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 시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유스타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시나를 한 번 보고 란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나는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느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졸졸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시나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했다. 물론 란 자신이 걱정되기도 했겠지만, 란이 없어지면 자신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될까? 공작가에서 쫓겨나는 건가, 하는 걱정도 있었을 게다.
‘어쩌지. 내가 가고 나면.’
시나가 혼자 남게 되면…….
란은 혼란스러워졌다.
유스타프와 시나, 루미에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신은 날아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란이 절뚝절뚝 걷는 걸 보고 시나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고 물었다.
“다리 다치신 거예요?”
“응, 으앗!”
마지막 비명은 보다 못한 유스타프가 그녀를 안아 들었기 때문에 나온 비명이었다. 자동적으로 시나와 란은 손을 놓게 되었다.
“올라가서 이야기하죠.”
그러며 유스타프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고 시나는 약간 풀이 죽어 그 뒤를 따랐다.
루미에가 그런 시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시나가 루미에를 돌아보았다. 루미에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란과 함께 서 있는 시나를 본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시나가 붙잡든 말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란에게 달려갔을 거다.
그리고 그래야 했을 터였다.
적어도 유스타프 혼자 란을 구하러 가게 두지는…….
하지만 두려움과 겁에 찬 시나의 눈동자를 보고 그대로 그녀를 뿌리치고 달려갈 수가 없었다.
“넌 최선을 다했어.”
루미에가 그렇게 말하며 시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래,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면 나는?
“시나?”
계단을 위쪽에서 란이 그녀를 불러 시나는 얼른 후다닥 뛰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 뒤를 루미에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따라 올라갔다.
란은 침대에 누워 습포를 대네, 뜨거운 주머니를 가져오겠네, 어미 새처럼 부산을 떨어대는 카라와 소다에게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똑같은 말을 시나에게도 반복했다.
“정말로 괜찮아. 그리고 고마워. 날 쫓아와 줬다면서?”
“아니에요. 제가 좀 더 강했으면 좋았을걸요.”
시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해서 란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서 란이 웃을지 몰라 시나는 입을 벌렸고, 란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거기서 악당을 다 물리치고 날 구해주려고? 마음은 고맙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아.”
그 말에 시나가 뺨을 부풀렸다.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 그리고 그런 걸 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돌아갈 거잖아?”
란이 부드럽게 말하며 시나의 둥근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 안 되지.”
그 말에 시나가 “언니이―” 하고 다시 란의 이불 위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언니는 왜 그렇게 사람이 좋아요? 네에?”
란은 웃으며 시나의 머리를 문질문질 쓰다듬어 주었다.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은 묘한 향수를 가져다주었다.
‘여기 사람들은 모질도 좀 다르니까.’
유스타프도 검은 머리카락이지만, 시나와는 달랐다. 란은 ‘귀여워라.’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루미에를 보았다.
그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루미에의 표정이 뜻밖에도 어두워서 란은 흠칫했다.
“루미에?”
그녀의 부름에 루미에가 표정을 싹 밝게 바꾸며 대꾸했다.
“네, 주인님.”
란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루미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고민하다가 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캘 필요 없겠지.
‘모든 걸 나에게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나를 토닥였다.
“이제 괜찮으니까. 시나 이야기도 해봐.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리제는― 그러니까 키릭스 후작 부인은? 황태후마마는 어떠시고?”
시나가 후 하고 길게 숨을 뱉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저도 곧바로 언니를 쫓아가서 잘은 모르지만, 황태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언니가 혼자 산책하고 싶다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네. 그래서 제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고, 쫓아갔어요. 그 후에 키릭스 후작 부인께서 저에게 따로 연락을 주셨거든요.”
황태후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잘린이 그녀의 기억에 혼란이 있는 걸 보고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파티는 혼란에 빠졌다.
귀부인들은 “황태후마마, 괜찮으신가요?” 하고 말하며 연신 부채질하고 찬 음료를 날랐다.
황태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파티가 끝나게 되어 미안하지만, 그대들은 더 즐기고 가도록 하시오.”
“아닙니다, 어찌 마마께서 용태가 좋지 않으신데 저희끼리 놀 수 있겠습니까. 같이 돌아가지요.”
우슬라 공작 부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모두가 마차며 말을 불러 가든파티는 그대로 접게 되었다.
엘리제가 “로미아 백작은 어쩌고요?” 하고 물어서야 황태후가 “기사들을 시켜서 찾게 하게.” 하고 말했다.
엘리제가 너무 화가 나서 자기가 직접 말을 타고 가서 찾아보겠다며 말하고 있을 때 유스타프와 루미에가 도착했다.
“그러고서 저와 가주님이 주인님을 찾으러 간 거지요.”
루미에가 마무리를 해서 란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에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뭐가 뭔지 알지도 못했다.
그냥 너무 아파서 깨어나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고 있고, 배? 강? 유스?
그런 혼란스러운 느낌이었을 뿐.
“시나 덕분에 날 찾기 쉬웠다고 들었어. 고마워.”
시나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었으면 루미에도 언니를 구하러 갔을 거고, 그러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루미에가?”
의아한 얼굴로 란이 시나를 보고 루미에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살짝 미소가 흐려졌다가 곧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시나 양을 거기에 두고 갈 수는 없어서요.”
“당연하지.”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에게 혼났을 거야.”
란이 눈을 부릅뜨며 하는 말에 루미에는 힘없이 웃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그의 말에 시나는 젖은 눈으로 다시 웃었다.
“그러네.”
카라가 손뼉을 짝짝 치고 말했다.
“자, 이제 다들 나가 주세요. 아가씨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두 사람은 어어 하고 밀려서 란의 방을 떠났다.
시나가 조심스럽게 루미에에게 물었다.
“괜찮아?”
움찔하고 루미에는 “뭐가?” 하고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의 말에 날이 선 게 느껴져 시나가 눈을 찌푸렸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역시 기분 상했구나.”
“그러니까 뭐가.”
“란 언니가 네가 안 와도 됐다는 식으로 말해서.”
말하는 그녀의 얼굴도 어쩐지 우울해졌다. 루미에는 숨을 삼키고 말했다.
“아니, 그것 때문에 상한 게 아니야.”
말하고 나서 루미에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 그것 때문에 상했을 수도 있겠네.”
“뭐야? 괜찮아?”
시나가 팔짱을 꼈다.
“괜히 걱정했네. 그럼 뭐 때문이야?”
시나의 말에 루미에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뭘?”
“내가 주인님을 놔두고 널 챙겼다는 걸.”
시나는 눈을 크게 떴고, 루미에는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의 주홍색 눈동자에서 시나는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뭔가 말할 듯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시나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루미에를 보았다.
“나 두 번째라도 괜찮아.”
루미에는 누군가가 “나 날개가 달렸어.”라고 말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뭐?”
저도 모르게 되묻는데 시나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난 그래도 괜찮다고.”
그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니, 시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야. 별 뜻 없어. 어-그래서? 언니를 찾은 다음에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시나는 말을 돌렸고, 루미에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힘을 줘 보았다. 꽉 힘을 주면 아직 찌릿한 느낌은 있었지만, 이제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치료사가 란의 상태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좋습니다. 이제 거의 다 나으셨네요.”
그가 진찰판을 이리저리 대보며 그녀의 머리와 팔의 상처도 살폈다.
“잘 아물고 있습니다. 흉터는 남겠지만…….”
“긴 장갑을 유행시켜야겠네.”
란은 가볍게 말했고, 치료사는 몇 가지 주의 점을 더 알려주고서 물러났다.
그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란은 “들어와.” 하고 말했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라벨?!”
라벨은 손에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며 빙긋 웃었다.
란은 제 옷차림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제야 왜 시녀들이 치료사를 만나는데 그렇게 신경을 썼는지 깨달았다.
“아니, 이제 황제 폐하라고 불러드려야겠지요.”
“라벨로 충분한데.”
라벨의 말에 란이 피식 웃었다.
“그런 식의 친밀감이 좋지 않은 소문을 가져오는 걸 저희 둘 다 알지요, 폐하.”
“하긴, 그런가.”
라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꽃다발을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건넨 후에 소파 근처로 다가왔다.
“몸은 어떤가?”
“이제 다 나았어요.”
“그러니까 내 궁으로 오라고 했지.”
짐짓 꾸짖는 듯한 장난기 서린 말에 란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요.”
란이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신다고 미리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몰래 온 거니까.”
“굳이 신하의 집에 살금살금 오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유스타프가 이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유스타프.”
라벨이 불편한 얼굴로 유스타프를 보고 란을 바라본 후에 양손을 들며 말했다.
“난 이미 청혼했다가 차인 몸일세.”
“저도 폐하께서 제 약혼자에게 손댈 만큼 굶주리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란은 둘 사이에 흐르는 친밀한 분위기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둘이 몰래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하고, 란은 아직 내용을 모르지만 동맹을 맺는다는 이야기도 나왔으니 상당히 만남이 잦았겠지.
“게다가 신하니까 더더욱 몰래몰래 와야지. 라치아 공작가에 왔으니 다음에는 미로와 우슬라 공작가도 차례로 들러야 할걸.”
“총애는 공평하게, 입니까? 애첩도 아니고.”
유스타프가 비웃듯 말했고 라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스워 보이겠지만, 그게 현실이라네. 라치아 공작.”
“적어도 라치아는 그 총애 전쟁에서 빼주시죠.”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란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란이 저도 모르게 라벨을 보았고, 라벨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황제가 아니라 친구로서 온 거니, 신경 쓰지 말게.”
그의 말에 란은 그렇다면, 하고 소파에 도로 앉았고 유스타프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후 란의 발목을 눌러 보았다.
란이 짧게 신음을 흘리자 유스타프가 미간을 좁혔다.
“아직 덜 나은 거 아닙니까?”
“뛸 정도는 아니지만, 걸을 수는 있어. 그렇게 꽉 누르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라벨은 이 모습을 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황제인 자신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 유스타프가 순순히 제 약혼녀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란의 투덜거림에 유스타프가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벨이 란에게 말했다.
“몸이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폐하.”
인사하고 란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일부러 제 문병을 오신 것은 아니지요?”
라벨이 그녀의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
“문병 온 것이 맞는데…….”
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다면 제가 잘못 생각한 거네요. 죄송합니다. 폐하.”
“좋은 소식도 함께 전해 주려고 겸사겸사 온 거야.”
“좋은 소식이요?”
“올리비아가 죽었네.”
란의 얼굴에 작은 충격이 지나가자 라벨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좋은 소식처럼 받아들이지 않는군.”
란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떻게 죽었습니까?”
“자택에서 목을 맸어.”
란은 가볍게 숨을 삼켰다가 내뱉었다.
“그렇군요.”
“꼭 문병 와서 그런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하셔야 합니까?”
유스타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라벨은 약간 충격을 받아 눈을 크게 떴다.
“피비린내라고?”
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정치는 싫으시다더니, 이제 익숙해지셨군요. 폐하.”
라벨은 그 말에 란을 돌아보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보네. 이거 참.”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변하지 않은 점도 있으시다고 생각해요.”
란의 말에 라벨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역시 나에게 오지 그랬나?”
유스타프가 위협하듯이 “폐하.” 하고 말했고, 란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그렇다면 유스타프가 슬퍼할 일도 없었을 텐데.
둥글고 환하고 아름다운 달을 떠올리며 란이 말하자 라벨은 순간 멈칫했고, 유스타프도 그랬다.
“란?”
저도 모르게 라벨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자 란이 아, 하고 씩 웃어 보였다.
“두 번째 정도로는 생각해 드리죠. 폐하.”
라벨이 눈을 꿈벅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에게 “넌 두 번째다.” 하고 말하는 여인은 없을 거다.
라벨이 란에게 말했다.
“문병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아니면 라치아 공작이 나에게 장갑을 던질 것 같아서.”
“설마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대답하고, 라벨이 방을 나가자 란에게 쉬라고 말한 후에 그를 따라 나갔다.
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날 보러 온 게 아니라니까.’
유스타프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겠지.
란은 설렁줄을 당겨서 시녀를 불렀다.
“옷 좀 제대로 입혀 주겠어?”
란의 말에 카라와 디모디아가 마주 보았다가 말했다.
“아직 덜 나으셔서 코르피스를 조이시면 어떨지…….”
“괜찮아. 멍만 심하지 이제 안 아프니까.”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하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란의 말에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오랜만에 그녀에게 제대로 된 드레스 차림을 해주었다.
엉킨 머리카락도 살살 풀어서 촘촘하게 땋았지만, 머리가 당기거나 무거울까 봐 장신구는 달지 않았다.
“유스타프 말이야, 요즘 제대로 자?”
란의 말에 그녀의 귀걸이를 고르던 키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요즘 밤새 일하시는 게 잦으세요. 밤낮으로 뭐가 그리도 바쁘신지.”
“역시.”
란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일을 안 하고 있잖아?”
그녀의 말에 디모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분명히 있지요.”
란이 유스타프의 일에서 상당분을 맡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유스타프는 요즘 란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고, 당연히 그만큼 그의 업무는 가중되었다.
“가주님은 좀 쉬셔야 해요.”
카라도 말을 거들었다.
란이 빙긋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단장을 끝낸 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일단은 치료사를 찾아가겠어.”
란은 치료사에게 들렀다가, 다시 유스타프를 찾아갔다.
막 라벨이 저택을 떠난 참이었다. 유스타프는 란을 돌아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란이 빙긋 웃고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어때?”
“어떤 차림이라도 빛이 나시는군요.”
란은 가볍게 웃고 말했다.
“요즘 무리하고 있다면서?”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유스.”
“네.”
“내 일로 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
그녀의 말은 이중적인 의미였지만, 유스타프는 그게 단지 올리비아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작게 말했다.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모든 사고로부터 날 보호할 수는 없는 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아직 딱지가 남아 있는 유스타프의 눈가를 부드럽게 엄지로 쓸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일찍 자? 몸도 챙겨가면서 해야지.”
유스타프는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
유스타프는 서류를 넘기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란이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유스타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쟁반을 받아 들며 눈을 찌푸렸다.
“밤이 늦었습니다.”
“맞아. 늦었어. 그런데 이 시간까지 유스 혼자 뭐 하는 거야?”
“일이 남아 있어서요.”
“내가 낮에 뭐라고 했지요?”
란의 말에 유스타프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 일만 끝내면 잘 겁니다.”
“가주님.”
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가주님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실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도 맡겨 주십시오.”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당혹한 얼굴로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누님은 아직 아프시잖습니까?”
“아프기 전부터 이미 내, 아니 제 일을 줄이고 계셨잖습니까?”
란이 얼른 책상으로 다가가 유리잔에 찻물을 따랐다.
유리잔에는 이미 얼음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쩍 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아이스티가 만들어졌다.
란이 잔을 유스타프에게 내밀며 물었다.
“저에 대한 신뢰가 없으신 겁니까?”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투에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미아 백작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그러면 어째서입니까?”
란이 제 몫의 아이스티에 시럽을 쏟듯이 붓는 걸 보고 유스타프는 희미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내가 싫으니까.”
“싫다고요?”
“걱정 없이, 일할 필요도 없이. 그냥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어. 란은.”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다가 순간 눈앞이 어질해지는 걸 느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는 손끝으로 잔을 쳐내며 란에게 마시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그녀가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자 순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푹 쓰러지는 그를 란이 화급하게 붙잡았다.
‘무거워!’
그녀는 끄응, 하고 있는 힘껏 유스타프를 들쳐 업었다.
“블레인 경, 들어와 줘요.”
블레인은 방으로 들어왔다가 쓰러진 유스타프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가주님! 무슨, 쓰러지신 겁니까? 당장 치료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치료사는 안 불러도 되고, 일단 유스타프를 침대로 옮겨주겠어요?”
블레인이 그 말에 화급히 란 대신에 유스타프를 부축했다. 란이 말했다.
“내가 약 먹인 거니까, 치료사는 필요 없어요.”
“예……?”
저도 모르게 블레인의 말끝이 떨렸다. 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일단 사람이 잠도 자고 쉬어야지 뭘 하죠. 들어 보니 제가 다친 후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면서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블레인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가주님이 깨어나시면…….”
“나에게 화내겠죠. 하지만 그건 내 일이에요.”
란은 그렇게 말하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단 유스타프가 쉬는 게 가장 중요해요.”
적어도 보름이 오기 전에,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줘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절박함이었다.
란도 자신이 뛰어내리는 게 끔찍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유스타프가 상처받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건 그녀 자신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의무였다.
벗어날 수 없는.
조악한 비유를 하자면, 적게 먹고 운동하면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론 성공하지 못하는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래서 란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버렸다.
‘어차피 그냥 자라고 하면 절대로 안 잘걸.’
“괜찮으니 안으로 옮겨줘요.”
그녀의 말에 블레인은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가 제 주군을 조심스럽게 침실로 데려가는 걸 보고 란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다.’
유스타프가 깨어나면 뭐라고 하려나.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어.
‘이 란 로미아는 호락호락하지 않단 말이지요.’
란은 유스타프의 자리에 털썩 앉아 그가 보던 서류를 넘겨 보았다.
‘어라? 벌써 올해 겨울 예산 집행서 짜고 있는 거야? 으응? 여기 금액이 좀 이상하지 않나?’
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펜을 꺼내 들었다.
침실에 유스타프를 눕히고 나온 블레인은 란이 그의 책상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안 주무십니까?”
“일만 좀 마무리하고요. 블레인 경은 가서 자요.”
그러며 그녀는 팔락팔락 여러 가지 서류를 동시에 펴 두고 이리저리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란이 가주가 되었던 초기가 생각나서 블레인은 추억에 잠겨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물러났다.
이튿날, 란은 펜으로 사정없이 표시를 한 서류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행정관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았다.
이어 서류에 적힌 글씨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새로운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팔랑팔랑.
란이 서류를 넘기는 속도는 여전히 빨랐고, 블레인은 제 보고서가 뭔가 틀린 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긴장했다.
란이 펜을 들어 찍 하고 줄을 그은 후에 말했다.
“겨울 사냥도 있잖아. 이 예산으로 괜찮은 건가? 신병도 새로 모집해야 하는 건 아니고?”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란은 가볍게 펜 뒤쪽을 깨물었다.
“이대로 드래곤과 싸울 수 있나?”
그녀의 물음에 블레인은 숨을 삼켰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드래곤 한 마리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란이 희미하게 웃고 서류를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알겠네.”
블레인은 재빠르게 서류를 받으며 인사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 그가 나오자 기다리던 다른 행정관들이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란은 서류들을 처리하다가 익숙한 얼굴이 기웃거려 웃으며 손짓했다.
“들어와도 괜찮아. 시나.”
“언니 일하시잖아요?”
“응. 하지만 시나랑 이야기할 짬은 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고, 시나는 어쩐지 부모님의 사무실에 들어온 어린애가 된 기분이 되어 말했다.
“아니에요, 다음에 이야기할게요.”
시나가 그러며 얼른 사라지자 란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고 이어 다른 서류를 열었다.
이틀째 밤이 되어서야, 란은 비틀비틀 침실에서 나오는 유스타프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스타프. 일어났어?”
그녀가 쪼르르 다가가니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푸른색 눈에 불꽃이 튄다.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그의 잇새에서 흘러나왔고, 란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약 그에게 약을 먹인 상대가 란이 아니었다면, 유스타프는 바로 목을 부러트려 버렸을 거다.
혹은 베어 버리거나.
하지만 상대는 란이었고, 그는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그 화를 란에게 퍼부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손을 뻗자 그가 휙 고개를 돌려 피했다.
“못 써!”
란이 단호하게 말하자 유스타프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란이 이어 말했다.
“내 엉덩이를 때리는 건 일단 씻고 나서 하는 게 어떨까?”
유스타프는 “하.” 하고 짧은 웃음인지 뭔지를 흘리고 잡은 손을 놓은 후 말했다.
“엉덩이 딱 붙이고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란은 “얌전히 있을게.” 하고 말했고 유스타프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씻는 걸 확인하고 란은 설렁줄을 당겨 뭔가 가벼운 먹을 것을 준비하게 한 후에 재빨리 시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남색 옷자락과 흰 앞치마를 가볍게 두들겨서 펴고 란은 문을 두들겼다.
“누구야?”
“들어가겠습니다.”
“뭐―”
문이 열리고 란이 당당히 김이 자욱한 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씻는 거 도와드릴까요? 주인님?”
유스타프는 욕조 안으로 몸을 더 밀어 넣으며 “대체―” 하고 뭔가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고 젖은 팔을 내밀었다.
“이리 와.”
란은 그가 정말로 부를 줄 몰라 눈을 크게 떴다가 수건을 든 채로 살며시 그에게 다가가서 욕조 옆에 앉았다. 건식 욕실이라 바닥은 나무였고, 그의 팔에서 떨어진 물에 약간 젖어 있었다.
그가 손으로 살며시 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란이 가르릉 하고 목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내자 유스타프는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전 언제쯤 당신에게 이겨 봅니까?
유스타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란을 보았고 그녀가 물었다.
“고양이 같았어요?”
“같았습니다.”
유스타프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젖은 그의 상체가 움직이는 모습을 란은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유스타프가 푸른색 눈동자를 슥 움직여 란을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침 떨어집니다.”
“아, 안 흘렸어.”
당황하며 란이 말하자 유스타프가 피식 웃고 욕조에 팔을 올린 뒤 턱을 괴었다.
“란.”
“응?”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십시오. 약을 먹여서 강제하는 짓 말입니다.”
“다시는 안 할게요.”
란이 맹세하듯이 한 손을 들며 말했다. 어차피 두 번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을 테고.
그러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 말했다.
“그럼, 누님. 머리 감겨 주세요.”
소년처럼 씩 웃으며 그가 말해서 란은 홀린 기분이 되었다. 잠시 후 란이 눈을 꽉 감고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이, 일단 이걸 먼저 두르고.”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란은 제 손에서 수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유스타프는 다시 욕조에 앉았다.
“이제 됐습니다.”
그의 말에 란은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가 그가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완전히 눈을 떴다.
란이 제 팔을 걷어붙이고 조심스럽게 주전자를 가져왔다.
“자, 머리를 뒤로 젖혀 주세요.”
그녀는 최대한 그의 얼굴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주전자로 그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그 다음 유스타프의 눈에 작은 수건을 덮고 머리에 비누칠을 시작했다. 꾹꾹 두피 마사지를 해주니 유스타프에게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야하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감겨준 후에 꼼꼼하게 주전자로 헹궜다.
생각보다도 품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라서 머리를 다 감기고 나자 란은 힘이 빠졌다.
“이제 끝났습니다. 주인님.”
란이 시녀답게 공손하게 말하자 유스타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욕조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란은 몸이 첨벙 따뜻한 물에 잠기자 당황했지만, 얌전히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놀란 건 유스타프였다. 그가 그녀의 상체를 빼내며 외쳤다.
“반항 정도는 해 주십시오!”
“하지만, 유스타프인걸.”
란이 물을 뚝뚝 흘리며 하는 말에 그는 신음을 내뱉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저라고 해도 반항해 주세요.”
란이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키스했다. 유스타프는 부드럽게 그녀에게 키스를 돌려주었다.
어쩐지 절박한 란의 키스를 달래는 듯한 다정하고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유스…….”
란이 허덕이며 입술을 떼자 유스타프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깊게 숨을 빨아들였다.
“허기가 지네요.”
그의 속삭임에 란이 속삭였다.
“먹을 걸 준비해 뒀답니다.”
“먹어치워도 됩니까?”
그가 그녀의 연약한 살을 빨아들이며 말했고 란은 파르르 숨을 내쉬었다.
“좋으실 만큼 드세요, 주인님.”
유스타프는 불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고 그녀의 목에서 고개를 들었다.
“얼른 결혼하죠.”
“어?”
“이대로는 제가 죽겠습니다.”
그 말에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유스타프가 “농담이 아닌데요.” 하고는 그의 하체를 슬쩍 밀어붙였고 란은 화들짝 놀랐다.
“유스타프!”
“네.”
대답하며 유스타프는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고 란의 뺨이 달아올랐다.
“이, 이, 일단 여기서 나갈래.”
유스타프는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고 란은 젖어서 엉키는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욕조에서 나왔다.
“저는 좀 더 있다가 나갈 테니 편히 옷 갈아입으세요.”
유스타프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란은 젖은 채로 밖으로 나와 젖은 옷을 벗었다.
그때 창문 너머로 부풀어 오르는 달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제 아주 보름에 가까워진 달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란의 녹색 눈을 가득 채웠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알고 있어…….”
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떼었다. 그리고 본래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니, 이미 시종이 트레이에 음식을 싣고 기다리고 있었다.
란은 음식만 남겨두고 나가라고 손짓하고 털썩 소파에 앉았다.
힘없이 앉아 있는데 유스타프가 들어왔다.
“란?”
그가 조심스럽게 란을 불렀다.
“응.”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며 웃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유스타프가 다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괜찮아.”
“그건 대답이 아니지요.”
그의 추궁에 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스.”
“네.”
“내가, 만약에, 내가― 널― 혼자 두게 되면…….”
뒷이야기는 한숨처럼 흔들리며 꺼질 듯 나왔지만, 유스타프는 똑바로 들었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생생하게 빛났다.
“혼자 둔다고요?”
그의 되물음에 란은 벌써 후회하는 마음이 되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먹자. 다 식겠어. 배고프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란을 유스타프가 도로 앉혔다.
“란.”
“나중에.”
란이 가로막듯이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할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하는 말을 들으며 유스타프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는 조용하게 이뤄졌고, 유스타프는 제 책상의 서류를 보고 물었다.
“제가 얼마나 잔 겁니까?”
“이틀.”
“그 사이에 예산 집행서를 다 짜놓으셨네요.”
“응. 열심히 했지.”
유스타프는 확실히 잠을 자고 나니 머릿속이 맑아진 걸 느꼈다.
“란이야말로 자야겠는걸요.”
란은 웃었다. 확실히 졸리기는 졸리다.
“그러게.”
“주무십시오.”
그의 나지막한 말에 란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아까운걸.”
“앞으로 시간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네.”
란을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아침에?”
“방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응.”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와 란은 복도를 걸었다.
“란.”
“응.”
“이제 보름까지 이틀이네요.”
란의 눈동자가 훅 커졌다. 움찔하는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고 유스타프가 말했다.
“계속 달을 바라보고 계셔서.”
“어, 달, 예쁘지?”
“란이 더 예쁩니다.”
그의 말에 란이 미소 지었다.
“유스타프.”
“네.”
“사랑해.”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허리를 숙여 살며시 입 맞추고 말했다.
“저도 사랑합니다.”
이어 그가 부드럽게 달래듯 눈가와 이마에도 입 맞춰주고 말했다.
“들어가서 이제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남아 있는 것도 없을걸.”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고, 란은 제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긴장이 풀려 란은 침대에 눕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
시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란 언니가 이상해.”
“주인님이?”
루미에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말했다.
“맞아. 생각이 어디로 가 계시는 것 같지.”
그와 그녀는 검술 훈련 중에 잠깐 쉬는 중이었다. 시나가 말했다.
“물론 PTSD가 충분히 올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피티에스디?”
“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던가? 뭔가 큰 충격을 받고 나서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는 그런 거?”
“아.”
루미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뭐 상담사도 없고…….”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으니 멍해지는 것 정도라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여기보다는 차라리 라치아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해.”
도시보다는 산속에 있는 편이 좀 더 마음 편하고 힐링되지 않을까.
시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미에가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보름이네.”
루미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나가 그런 루미에를 바라보다가 툭툭 그의 허벅지를 제 목검으로 찔렀다.
“검 연습, 계속하자.”
루미에가 씩 웃었다.
“얻어맞은 데는 괜찮고?”
“괜찮고말고.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여 줄 줄 알아.”
시나가 자신만만하게 하는 말에 루미에는 “부디 해보시지.” 하고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시나는 자신이 아주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루미에가 란 언니 생각을 하는 게 싫었어.’
그래서 슬쩍 말을 돌렸다.
‘나 정말 최악이다. 두 번째로도 괜찮다고 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나는 제 검에 이마를 부딪쳤다. 루미에의 공격을 막았는데,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검이 밀린 거다.
“시나!”
놀라 루미에가 제 검을 거뒀고, 시나는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걸 느끼며 이마를 더듬었다.
“찢어지지는 않았네.”
루미에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혹이 생기겠는데. 일단 치료사에게 가 보자. 무슨 생각을 하기에 검도 못 받아쳐?”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
“뭐?”
“루미에가 란 언니 생각을 안 했으면 해서.”
빤히 루미에를 보다가 시나는 힘없이 웃었다.
“한심하지. 바보 같아. 사실 나도-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시나는 고개를 숙였다.
“…….”
루미에는 잠시 시나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그의 어투에 짜증이나 화는 없었다. 시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란은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가장 높은 곳.’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맨발이어서 복도를 걷는 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저택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올라갔다.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서자 사방이 뻥 뚫린 탑 꼭대기였다.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서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이 마구 흔들렸다.
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색으로 빛나는 완벽한 동그라미가 높이 떠 있었다. 란은 달을 바라보며 홀린 듯이 탑의 좁은 난간 위로 올라갔다.
망설임 없이, 란은 허공으로 발을 디뎠고 그녀의 몸이 앞으로 떨어지는 찰나, 홱 허리가 붙잡혔다.
놀라 란이 돌아보니 창백한 얼굴의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란.”
유스타프는 말도 나오지 않는 듯 보였다.
“이게 무슨-”
란은 당혹했지만, 그보다 그녀의 의무가 실패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유스―”
란이 몸을 뒤로 빼며 그의 팔을 풀어내려고 하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난간에서 끌어내렸다.
“놔 줘! 싫어!”
버둥거리며 란은 양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버텼지만 유스타프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억지로 란을 난간에서 떼어냈다.
아무리 봐도 란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번쩍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 란은 애처롭게 흐느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빨리―”
목소리만 듣는다면, 유스타프가 반대로 그녀를 떨어지게 밀고 있는 듯한 애원이었다.
란은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머릿속을 윙윙 그 소리만이 가득 메우고 채우고 울렸다. 그녀가 제 허리를 안은 유스타프의 팔을 마구 할퀴었다.
“놔! 이거 놔아―!”
발이 땅에 닿게 내려놓자마자 그녀가 난간으로 달음박질치는 걸 유스타프가 붙잡았다. 양팔을 꽉 붙잡고 유스타프는 그녀를 흔들었다.
“란!”
목소리가 높아지자 란은 화들짝 놀라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흘러내린 눈물로 엉망이었다.
“유스, 유스, 나―”
헐떡이며 란이 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나 가야 하는데, 나 가야 해.”
“어디로요.”
“날아가야 하는데―”
“저만 두고요?”
유스타프의 어조는 질책이 아니었고 부드러웠지만, 란은 채찍에라도 맞은 사람처럼 전신을 움찔 떨었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 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그럼 가지 마세요.”
“하지만, 유스, 하지만―”
란은 혼란에 빠진 녹색 눈을 들어 유스타프를 보았다.
“쉬이― 괜찮습니다. 저와 함께 여기에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유스, 나 무서워. 무서워서―”
참을 수 없는 감각이 그녀를 날카롭게 붙잡았다. 누군가가 그녀의 등 뒤에서 칼끝으로 찌르고 있는 듯한 불안감이었다.
공황 발작이라도 올 것 같은 감각에 란은 흐느꼈다.
유스타프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다른 손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란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몇 번 심호흡한 후에야 란은 내뱉듯 말할 수 있었다.
“나 이상해졌어. 유스타프.”
그녀의 말에 유스타프는 란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인가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주술사의 주술에 걸리신 게 아닐까 합니다.”
란은 제 발가락을 오므렸다. 차가운 돌바닥의 한기보다 지금 뛰지 못한다는 게 더 괴로웠다.
“주술사……?”
“네, 전에 이야기했던, 황태후를 조종했던 주술사 말입니다.”
“그래…….”
란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일단 내려가자.”
그러며 몸을 빼려는 란을 유스타프가 붙잡고 말했다.
“내려가는 길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란의 팔을 붙잡고 좁은 계단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역시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들어서 창문 없는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란에게 더 큰 충격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제 손끝이 란에게 닿아서 다행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멈춰 섰고, 그럴 때마다 유스타프는 상처 입은 새끼 양을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란을 불러서 그녀가 비틀거리며 제 발로 내려오게 만들었다.
유스타프는 가장 가까운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란이 들어가자 그는 안에서 문을 잠갔고, 란이 초조해하며 방 안을 맴도는 동안 재빠르게 창문도 닫았다.
어둠 속에서 따뜻한 오렌지색 램프만이 빛을 발했다.
란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제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논리적으로는 그래, 자신이 뛰어내리려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견딜 수가 없었다.
“란, 란, 날 봐.”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말해서 란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새파란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정확하게 이야기해. 그가 뭐라고 했지?”
란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리자 유스타프가 “날 보고.” 하고 다시 말했다. 란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뜨면 날아올라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유스타프의 푸른색 눈이 더 짙게 가라앉았다. 그가 란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란, 내가 하는 말 다 믿지?”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타프가 착하다, 하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보름달은 없습니다. 달은 없어요.”
란은 눈을 크게 깜박였다.
“달도 달빛도 전부 다 제가 먹어치웠습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란의 입술을 살짝 벌리며 입 맞췄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유도해서 굳어 있던 란도 조금씩조금씩 그의 키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유스타프가 키스를 끝내고 가볍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전부 먹어치웠으니까요.”
어차피 암시란 말놀이다.
스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발휘한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유스타프를 끌어안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에게서는 겨울 냄새가 났다.
라치아의 눈 냄새.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유스.”
“네.”
“미안.”
“아닙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자신을 보게 하고 뺨을 핥아 올렸다.
“유스타프!”
란이 펄쩍 뛰었고, 그는 “짜네요.” 하고 빙긋 웃었다.
란은 떨리는 몸과 불안한 생각이 조금 사그라진 것을 느꼈다. 그녀는 불안감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넣고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마법사나 하레쉬를 불러야지요.”
“그 주술사는―”
“마지막 선택이 되겠죠.”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 잡히는 건 싫어.”
그녀가 중얼거리고는 다시 제 머리카락을 당겨서 유스타프가 그 손을 제지했다. 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이제.”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유스타프는 손을 놓았고 란은 후―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주인님! 어디 계십니까!”
루미에의 필사적인 목소리에 란은 눈을 크게 떴고 유스타프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란을 바라보았다.
“여기 얌전히 계실 수― 아니, 같이 가죠.”
유스타프가 손을 내밀어 란은 순순히 그 손을 잡았다. 잠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유스타프가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고, 그러자 저쪽에서부터 뛰는 소리가 나더니만 루미에가 달려왔다.
란을 보고 그는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루미에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했다.
“밀회를 하신다면 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주인님. 침실이 텅 비어 있어서 놀랐다고요.”
그의 웃음에 란은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루미에에게도 말해야 해.”
루미에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루미에의 소동과 유스타프의 휘파람에 잠이 깬 시종들이 램프를 들고 “무슨 일입니까?” 하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무리 중에는 시나도 섞여 있었다.
유스타프가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 “끝났으니 돌아가.” 하고 말했고, 모두가 한밤중에 일어났으니 불만을 표할 만한데도 순순히 물러났다.
가주에 대한 믿음과 그의 통솔력을 보여 주는 점이었다.
남은 것은 루미에와 시나 둘뿐이었다. 시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언니가 없어져서 정원을 찾았어요. 그런데 위쪽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아, 유스타프와 다투는 소리를 들었구나.’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방 안으로 들어와 란 대신 이야기를 한 것은 유스타프였다. 란은 소파에 앉아서 내내 유스타프에게 기대어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루미에는 눈을 크게 떴고, 시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그냥 뛰어내리면 되지 않아요?”
“뭐?”
루미에가 고개를 휙 돌렸고 유스타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란이 시나를 보자 시나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마법 같은 걸로 몸을 진짜 날아오르게 하면 되지 않아요? 아니면 밑에서 받아준다든가. 게다가 어, 그냥 그…… 음음달에 날아올라라, 라는 거였으니까 계속 그렇게 하라는 반복 명령어도 아니잖아요.”
시나의 말에 란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당연히 반복 명령어일 리가 없다. 그건 한 번 하면 끝나는 일이니까.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시나가 민망해져서 변명하듯 말했다.
“물론 저는 잘 모르는 일이니까…….”
“해 볼 가치는 있지.”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키릭스 후작에게 말해서 마법사를 빌려 달라고 하죠. 비행 마법 정도는 쓸 겁니다.”
마법사가 없는 고위 귀족은 라치아 공작가 정도니까, 키릭스 후작가에도 마법사는 있을 거다.
유스타프가 자리를 뜨자 그 자리를 잽싸게 시나가 차지했다. 루미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물러났다.
시나가 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언니 괜찮으세요?”
“응.”
란은 한숨 쉬듯이 말했다. 사실은 괜찮은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나의 아이디어는 좋은데. 해볼 만한 것 같아. 고마워.”
“아니에요.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요.”
시나가 고개를 저었다.
루미에와 그녀, 두 사람 다 란이 이상하게 보름을 확인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시나의 방은 란의 방 바로 옆이었고, 한 번도 쓴 적은 없지만 통하는 문도 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나가 그 문을 써 본 참이었다.
“그리고 란 언니가 없어서…… 놀라서 루미에를 깨우러 갔어요.”
란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 그렇게 이상했어?”
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거의 괜찮아 보이셨는데, 이상하게 보르, 아니, 그 둥근 거 이야기할 때만 그렇더라고요.”
아까부터 혹시라도 ‘보름달’이라는 단어가 트리거가 될까 봐 은근슬쩍 말을 바꾸는 시나였다.
란은 ‘그랬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덕분에 유스타프가 자신을 뛰어내리지 못하게 붙잡았으니…….
“잘된 거야.”
란은 소리를 내서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생각이 파고들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어 란이 생각을 돌리려 재빠르게 시나에게 말했다.
“왜 내 시녀들은 깨우지 않고? 루미에를 바로 깨우러 가다니―”
싱글싱글 웃으며 란이 말하자 시나는 당황해서 멀리 문가에 있는 루미에를 한 번 보았다가 란을 보고 변명했다.
“그게, 언니 시녀들은 아직 좀 어색해서…… 그리고 몰래 방에 들어갔다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루미에는 믿을 만하니까…….”
“뭐라고 하는 거 아닌데? 잘했어.”
란이 시나의 손을 토닥이자 시나는 안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어 그녀가 말했다.
“일단 언니는 제대로 옷을 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마법사를 만나려면요. 시녀분을 부를게요.”
시나의 말에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시나는 힘차게 설렁줄을 당겼다. 항상 당기는 거지만 당길 때마다 신기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들어온 시종에게 명령해서 옷을 가져오게 하고, 지금껏 깨어 있었던 것처럼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는 디모디아와 키리가 들어와서 란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그러는 사이, 키릭스 후작가에서 마법사가 도착했다.
마법사는 얼떨떨한 얼굴이었고, 탑에서 뛰어내리는 란에게 비행 마법을 걸라는 말에는 더더욱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안 되나?”
“아뇨, 됩니다.”
유스타프의 물음에 마법사는 고개를 저으며 잽싸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부탁하지.”
마법사는 공손하게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어쨌든 라치아 공작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없었다.
게다가 귀족들의 변덕스러움은 익히 소문으로 들어왔기도 하고 말이다. 이 새벽에 무슨 비행 마법인가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이 끝나면 돌아가 잘 수 있겠지.
마법사와 란, 유스타프는 좁은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마법사를 먼저 올라가게 하고, 탑에서 나가기 전에 유스타프가 란에게 키스하고 말했다.
“달빛은 전부 돌려드립니다.”
란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눈을 찌푸린 뒤 다시 미소 지었다.
이제 마음 편하게 뛸 수 있다.
그 사실이 즐거웠다.
란이 탑 위로 올라가자 마법사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법을 걸겠습니다.”
마법사는 지팡이를 흔들고 작게 주문을 외웠고, 란은 반짝이는 마법진이 그녀의 발밑에 그려지는 걸 보았다. 마법사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제 뛰셔도 됩니다.”
“응.”
란은 웃으며 너무나도 가뿐하게 난간 위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고, 유스타프는 알면서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탑 아래서 지켜보던 시나와 루미에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래로 떨어지던 란의 몸은 다시 둥실 떠올랐고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밀색 머리카락이 환한 달빛에 금실처럼 빛나서 흩날리고, 그녀의 녹색 눈을 둘러싼 속눈썹도 금테처럼 반짝였다.
아찔함을 느끼며 유스타프는 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작은 불안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란이 자신의 삶에 온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사라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자신에게서 그녀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가볍게 허공에서 춤추듯 빙글 도는 란의 모습을 보면서도 불안해졌다.
정말로 그녀가 날아갈 것 같아서.
“봐봐, 유스. 정말로 날고 있어.”
천진난만한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가볍게 빙글 도는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네요.”
유스타프가 난간가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란은 순순히 그의 손을 잡았다.
란의 몸이 둥실, 가볍게 끌려와서 반짝이는 구두가 탁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난간에 닿았다.
하지만 무게가 전부 실리지 않아서 아직도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며 머리카락은 가볍게 떠 있는 채였다.
“어떠십니까?”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녹색 눈을 가볍게 굴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속삭임이 사라졌어.”
그 말에 유스타프가 그녀를 휙 당겨서 꽉 끌어안았다. 발이 둥둥 뜬 채로 그에게 안겨서 란은 그를 꼭 마주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
유스타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깊은 안도가 그의 마음속 안쪽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란이 마법사에게 빙긋 웃었다.
“이제 마법을 풀어 주셔도 돼요.”
멍하니 란을 보다가 마법사는 허겁지겁 지팡이를 다시 휘둘렀고, 유스타프는 이제 란의 무게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란.”
그가 다시 이름을 부르며 란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날아가지 마.”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를 꼭 마주 안았다.
“응.”
작게 대답하고 란이 제 팔을 뒤로 돌려 유스타프의 팔을 부드럽게 쓸고 말했다.
“상처, 연고 발라야겠다.”
아까 그녀가 할퀴었던 상처들이었다. 유스타프가 말했다.
“이런 건 핥으면 낫습니다.”
“나에게 핥아 달라고 하면 싫다고 할 거야.”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웃음을 터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꽉 묻었다.
“크흠, 크흠.”
참다못한 마법사가 몇 번 헛기침하고 나서야, 유스타프는 란을 놓아주었다. 그런데도 그가 불안해하는 게 보여, 란은 보란 듯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탑에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시나와 루미에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언니, 어때요? 괜찮아요?”
“응, 이제 괜찮아.”
란이 웃으며 말하자 시나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에요.”
“고마워, 시나. 덕분이야.”
“아니에요.”
시나는 펄쩍 뛰었고, 란이 “오늘은 그만 가서 자. 내일 이야기하자.” 하고 말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니도 쉬세요.”
“루미에가 바래다 줘.”
란의 말에 루미에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와 시나가 함께 자리를 뜨자 란이 유스타프에게 말했다.
“오늘은, 같이 밤샐까?”
유스타프가 란을 바라보자 그녀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각자 가서 자기에는 불안할 것 같아서…….”
“물론입니다.”
유스타프는 란의 손등에 입 맞추고 미소 지었다.
“같이 게임이라도 할까요?”
“응.”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