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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결혼식


Chapter 5. 결혼식 승리하고 귀환하는 청염 기사단을 맞이하는 영지민들의 행렬이 도로 앞에 늘어섰다. 모두가 나뭇가지와 종이꽃을 뿌리며 환성을 질렀다. “청염의 가호가 있기를!” “라치아 공작 만세!” “불꽃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사단원들은 투구를 벗고, 한껏 멋 부린 머리를 치켜들며 당당히 길 가운데를 걸었다. “꺄악! 여기 봐주세요!” “기사님! 멋쟁이 기사님!” 여자들 역시 소리를 지르며 2층 창문에서 손수건을 흔들었다. 하늘 저택에서 고기와 술이 나와 영지민들에게도 돌려질 예정이어서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해진 몇몇 기사들은 손을 흔들었고, 그러자 다시금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렇게 마을을 통과해서, 하늘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요했다. 그때 로스가 “앗!” 하고 소리치며 양쪽에 높이 솟은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보십시오!” 길 양측 나무들에 녹색 리본들이 묶여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누구를 환영하는 건지는 명백했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그려지고, 말의 속도가 더 빠르게 올라갔다. 하늘 저택에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모두 도열해 서 있었다. 제복을 쫙 빼 입고 열을 맞춰 서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근사했다. 그 사이를 지나 유스타프는 현관에 도착했다. 란이 치맛자락을 붙잡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승전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유스타프가 말에서 내려 란이 웃으며 인사말을 이었다. “청염을 떨치― 꺅?!” 유스타프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란은 소리를 내질렀고, 그는 웃으며 그녀를 꽉 끌어안고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약혼녀님.” 란의 녹색 눈이 동그래졌다가 곧 웃음을 머금었다. “어서 오세요, 약혼자님.” 그러며 란은 그가 내려주기를 기다렸지만, 유스타프는 그녀를 내려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스타프의 양팔이 그녀를 단단히 받치고 있어서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다. “유스.” 란이 낮게 속삭이며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다가 모두 싱글벙글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내일 아침부터 연회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해산.” 유스타프가 짤막하게 덧붙이자 기사단원들은 금방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기사단실로 돌아가 각자 마갑을 벗겨내고 갑옷을 벗고, 손질하고, 씻고 먹고, 푹 잘 것이다. 다들 내일 연회가 어떨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삼삼오오 흩어졌다. 시나는 금방 루미에를 발견했다. 주홍색 머리카락은 멀리 있어도 눈에 확 들어왔다. 그녀는 루미에와 눈이 마주쳤고, 루미에가 희미하게 웃어서 가슴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끼며 그에게로 후다닥 달려갔다. “무사히 돌아왔네.” “무사히 돌아왔지.” 루미에가 가볍게 말해서 시나는 “다행이야.” 하고 작게 말했다. 루미에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겼다. 차가운 건틀릿에 살짝 몸을 움츠리자 루미에가 손을 떼며 말했다.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걱정했어?” “했지.” 루미에의 말에 시나가 활짝 웃었다. 란은 저를 안고 유스타프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약간 반항하며 말했다. “이제 놔줘.” “싫습니다.” “뭐? 왜?” “누님을 만질 기회가 적으니까요.” “유스타프!” 란이 목소리를 높여서야, 그는 그녀를 내려주었다. 란은 제 치마 주름을 탁탁 쳐서 펴며 “정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유스타프가 손을 뻗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속삭였다. “어째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 란의 뺨이 붉어졌다. “이건 키리랑 디모디아가 승전 연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변명처럼 한 말에 유스타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면 결혼해 주신다고 했지요.” “으응?” “하셨지요.” 그가 확인하듯 다시 물어서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 했지. 하지만 일단은 승전 연회가 끝나고 수도에 올라가서 영지전 정리를 한 다음에―” “내일 하죠.” “……네?” 저도 모르게 되물음이 튀어나왔다. 유스타프가 느긋하게 말했다. “에메랄드 홀을 개방해서 연회를 열지요?” “그, 그렇지?” “그렇다면 됐습니다. 결혼식으로 변경하죠.” “말도 안 돼! 결혼 준비를 하지도 않았는……데…….” 점점 란의 말이 느려졌다. ‘잠깐, 이거 좀…….’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봉된 옷. 약혼식 때처럼 시작한 미용 단장.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지.” “뭐가 말입니까?” “나 말고 시녀들은 알고 있었던― 하지만 어떻게? 아아, 그렇군. 녹영이었지, 둘 다.” 자문자답하며 란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떻게 자기도 모르게 유스타프가 지시를 내렸을까, 했는데 디모디아와 키리는 녹영이다. 첫 번째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유스타프와 있었을 테니 유스의 계획을 전달했겠지. “교활해.” 란이 중얼거리자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하루도 더 참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진짜, 정말이지, 유스타프.” 란이 투덜투덜하자 그가 란이 약해지는, 특유의 표정을 하며 물었다. “싫으신가요? 누님?” “이럴 때만 누님이지?” 그의 미소가 달콤해졌다. “열심히 유혹을 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란은 시선을 휙 돌렸다. “……지 않아.” 작게 말하고 란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쓰며 그를 꾹꾹 밀었다. “자, 얼른 올라가서 갑옷도 벗고 쉬시죠. 그리고 어떻게 정리가 잘된 건지 이야기도 해 줘요.” “네, 네.” 유스타프가 웃으며 말하자 란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다. “대답은 한 번만.” “알겠습니다.” 유스타프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아니면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고, 그러면 란이 더 화를 낼 것 같았다. ‘귀여워라.’ 유스타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에게 밀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공작의 방은 매끄럽고 짙은 시럽빛 나무와 새하얀 대리석으로 짜여져 있었다. 가구들은 크고 짙은 색에 심플한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란은 시종을 물리고 직접 유스타프의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그는 좀 당혹해서 말했다. “란, 이런 건 그냥 시종에게, 아니 제가 하죠.” “싫어. 또 다치고서 숨기는 걸지도 모르잖아.” 저번처럼. 내 눈으로 꼭 확인을 해야겠다, 하는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이번에는 진짜로 멀쩡한데요.”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다. 란이 조임쇠 때문에 낑낑거리자, 유스타프는 제 손으로 조임쇠를 풀어주었다. 사실상 란이 손을 대지만, 푸는 건 유스타프가 전부 다 하는 식이었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갑옷들을 하나씩 벗어내고 나자 가벼운 셔츠 차림이 되었다. 란이 그의 몸을 슬슬 더듬었고 유스타프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차라리 제가 옷을 다 벗죠. 그리고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란이 얼굴을 붉혔다. “그건 변태잖아.” “이렇게 더듬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더듬는 건 변태가 아닙니까? 유스타프는 억울함마저 느끼며 항의했고, 란은 손을 뗐다. “정말로 안 다친 거지?” “네, 정말로요.”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덧붙였다. “만지는 건 결혼식 후에 침대에서 많이 해 주십시오.” “유스타프!” 란이 빽 목소리를 높여 유스타프가 웃고 속삭였다. “저는 핥아 드릴 테니까요.” “―!!” 말도 나오지 않아 란이 숨 막힌 소리를 내고 소파에 있는 쿠션을 가지러 달려가자 유스타프는 낮게 웃었다. “아, 진짜!” 란은 가져온 쿠션으로 그를 몇 번 때렸지만, 타격이 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쿠션을 끌어안고 란이 궁시렁거리는 사이에 유스타프는 제 갑옷을 마저 벗었다. 시종에게 가져가라고 한 뒤에 유스타프는 파티션을 치고 그 뒤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란은 소파에 털썩 앉아서, 그의 셔츠가 파티션 위에 걸쳐지는 걸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린드버그 남작은? 미로 공작은? 캐머론 후작은?” “린드버그 남작의 시신은 유가족에게 양도하기로 했습니다. 미로 공작은 시신이 남지 않았고요.” “안 남았어?” “네, 그게-” 유스타프가 설명하자 란이 눈을 크게 떴다. 한마디로 자폭했다는 거 아닌가? “미스릴 갑옷이라 살았지요.” 란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끌어안은 쿠션 위에 턱을 올렸다. 아까 갑옷 앞이 이상하게 울퉁불퉁했던 게 문양이 아니라……. 등에 소름이 돋았다. 침을 삼키고 란이 이어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나. 그럼 남작가는 이제 사라진 거네?” “그렇지요.” “미로 공작가는?” “유서 깊은 공작가를 황제 폐하가 끊기게 두지 않겠지요.” ‘새 미로 공작은 라벨의 입김이 들어간다는 뜻이군.’ 라벨에게도 편할 것이다. 어쨌든 미로 공작가는 중앙 정치의 주축 중 하나고 올리비아 일 때문에 황실과 사이가 껄끄러웠으니까. 이 기회에 깨끗이 정리하겠지. 파티션 위에 이번에는 바지가 걸쳐졌다. 란은 눈이 동그래져서 파티션 너머 그림자를 빤히 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럼 캐머론 후작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쪽까지 끝장낼 필요는 없지요. 포로로 잡혀 있는데, 황제 폐하께서 관대한 중재를 해 주셔서 풀려날 듯싶고요.” “흐음.” “하지만 파산하지 않을까요.” 두 번이나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는 건 아무리 후작가의 재정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터. “그러네. 게다가 거기 영지도 그렇게 좋지 않잖아?” “어쨌든 키릭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고, 키릭스 공작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후작가는 남은 영지를 팔거나, 아니면 지참금이 많은 신부를 얻어야겠지요. ” “나 같은?” 란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파티션 뒤에서 산뜻하게 새 옷을 입은 유스타프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나왔다. “란은 이미 제 것이니까 안 되지요.” 농담인 줄 알면서도 말투는 단호하게 나왔다. 란이 나온 그를 보고 쿠션을 옆에 내려놓은 후에 팔을 벌렸다. “다시 안아 줘.” 갑옷 너머로 말고. 란의 말에 유스타프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란은 그의 뜨거운 체온과 단단한 몸이 자신을 완전히 감싸는 걸 느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 번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란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잠시 후 란이 말했다. “정말이지, 미리 말해 주면 안 돼?” “말하면 놀라지 않을 거 아닙니까? 게다가 란은 규모도 줄이려고 했을 거고요.”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그야―”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자신의 결혼식이었다면 이러게 화려하게 열지 않았을 거다. ‘잠깐, 그럼―’ “시나도 알고 있었어?” “네.” “어쩐지…….” 홀을 꾸미는 것이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더라니. 란이 “이렇게까지 해도 될까?” 하며 갸웃거리는 대목마다 시나는 “모처럼의 승전 연회잖아요!” 하고 밀어붙였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동조하곤 했다. 란이 신음을 내뱉었다. “나만 몰랐구나.” 유스타프가 웃으며 그녀를 꼭 안았다. 계속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키리가 란을 찾으러 왔다. “자, 이제 결혼식까지는 두 분이 보시면 안 됩니다. 란 님의 웨딩드레스도 마저 끝내야 하고요.” 유스타프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란을 놓아주었고, 란은 키리와 돌아가며 말했다. “날 속였겠다?” 그러자 키리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가주님의 명이라…… 저는 힘없는 수하일 뿐이랍니다.” 애처로운 시늉이 우습기도 했지만 키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키리가 방긋 웃었다.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벌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으면서.” 란의 말에 키리는 호호 웃었다. 란에게 알려졌으니 이제 상관없다는 태도로, 시녀들은 웨딩드레스를 가져와서 가봉했다. 웨딩드레스는 흰색이 아니라 짙은 녹색이었다. 뒤에 길게 끌리게 되어 있는 진녹색 드레스에는 금사로 수가 촘촘하게 놓여 있었다. 드레스를 입히고 시녀들은 스스로 감탄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녹색이 진짜 잘 어울려요.” “세상에, 피부가 진짜로 우윳빛이에요. 거기에 눈동자가 더 돋보이고요.” “얼른 녹음의 관까지 쓴 모습을 보고 싶네요.” 란은 당일까지 드레스를 입은 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낯간지러운 탄성에 궁금해졌다. “자, 이제 일찍 주무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셔야 해요.” 카라의 말에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일찍 저녁을 먹고 걸쭉한 음료를 마신 후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갔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음료 덕분인지 란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 결혼식 당일 아침이 되자 란은 긴장 때문에 일찍 일어났다. 잠을 설치지는 않았지만, 아직 동도 트기 전이었다. 란은 침대에서 나와서 침실 베란다 문을 열었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모슬린 커튼이 요정 날개처럼 나부꼈다. 란은 빙벽을 바라보았다. 아직 빙벽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빙벽은 불길했지만, ‘어쩌면 이대로 끝날지도 몰라. 계속 봉인 의식을 했잖아?’ 하는 낙관적인 추측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멀리 동이 트기 시작해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어두웠던 빙벽도 위부터 점점 밝아져왔다. 하늘은 놀라울 정도로 푸른빛, 좋은 날씨였다. “란 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침실로 들어오며 말했던 소다가 ‘어머?’ 하고 눈을 떴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응, 눈이 떠졌어.” “찬바람 맞으시면 안 돼요. 피부 거칠어진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소다가 부랴부랴 란을 안으로 들이고 창문을 꼭 닫았다. ‘겨울도 아닌데.’ 란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순순히 말에 따랐다. 란이 기상했다는 게 알려지자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오며 방의 커튼을 모두 열었다. 마지막 마사지와 몸단장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피부 화장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카라가 소다와의 의논 끝에 란에게 말했다. 란도 거울 안의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카라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피부가 좋아 보이라고 화장을 하는 건데, 이미 너무 좋으시니까요. 여기에 화장하면 그편이 더 어둡고 거칠어 보일 것 같아요. 색조만 올리지요.”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이너도 검은색이 아니라 너무 진해서 검은색으로 보이는 암록색이었다. 그걸로 길게 눈꼬리를 잡아 빼자 그녀의 녹색 눈이 더욱 그윽해 보였다. 붉은빛으로 칠한 입술은 녹색 드레스와 찰떡으로 어울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시녀들은 란의 머리카락을 땋아 올렸다. 란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땋아 올리고,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정교하게 만든 산호 가지 모양 장신구로 마무리를 했다. 너무 화려한 장신구는 달지 않았다. 식의 내용 중 하나가 녹음의 관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서, 시녀들은 자신의 주인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들어온 시나가 란을 보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니, 현세에 여신님이 강림하시다니!” 란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나도 예뻐.” 란의 말에 시나가 “저는 반딧불이지요.” 하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녀 역시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보트넥으로 파인 분홍빛 귀여운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카락은 웨이브를 넣은 후에 틀어 올렸다. 란을 보는 시나의 눈은 동경으로 반짝거리고 뺨은 상기되어 있어서 그녀 역시 사랑스러웠다. “시나도 머리에 장신구를 하는 게 좋겠다. 뭐 괜찮은 게 없을까?” 란의 말에 시나가 펄쩍 뛰면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란은 강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라가 안에서 홍산호 가지로 만든 머리 장식을 가져왔다. 란이 웃으며 제 머리 장식을 돌려 보여주고 말했다. “세트네.” 시나의 눈시울이 글썽해졌다. 그녀가 말했다. “언니, 진짜로 정말로 행복해질 거예요. 지금보다 더더 꼭, 꼭이요.” 시나의 말에 란은 어쩐지 가족에게 말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야…….” 란의 말끝이 떨려오자 소다가 허둥지둥 손수건을 가져오며 말했다. “아래를 보고 가볍게 닦으세요.” 키리 역시 시나에게 말했다. “울면 화장이 다 번질 거예요. 자, 이쪽에 앉으시죠. 장식을 달아 드릴 테니까요.” 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날이니까, 웃어야지.” 시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검은색 머리에 붉은 장식은 매우 잘 어울렸다. 거기다가 시나는 홍산호의 가치를 잘 몰라서 ‘보석도 아니니까 그렇게 비싸지 않겠거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 만약 그 가격을 알았다면 머리를 끄덕이지도 못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란의 머리에 베일을 씌워주는 걸로 결혼식 채비는 끝났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머릿속으로 순서를 생각했다. 홀 앞으로 이동하면, 푸른 불꽃이 담긴 금 접시가 기다리고 있다. 그 접시를 들고, 홀 안으로 들어가서 세 개의 아치를 지나 단상 앞으로 나가면 유스타프가 접시를 받아 들어 불꽃을 단상 앞에 있는 화로에 붓는다. 그리고 불꽃이 타오르면 그걸로 라치아식 결혼의 성립이었다. 그런 뒤에 유스타프가 란에게 녹음의 관을 씌워 줄 테고, 반지도 끼워 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결혼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아치를 돌아서 나오면 끝.’ 복잡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란은 그렇게 순서를 머릿속으로 복기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카라의 말에 란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정복을 입은 블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에스코트를 하러 왔습니다.”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팔에 손을 얹고 란은 베일 때문에 시야가 답답하다고 생각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저택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에메랄드 홀 입구로 가자 입구 양쪽으로 청염 기사단이 쫙 도열해 있었다. 란은 압도되는 듯한 오싹함을 느끼며 그 사이로 지나갔다. 그 앞에 분홍색 옷을 입은 시나가 보여서 다행이었다. 시나는 푸른 불꽃이 담긴 금 그릇을 들고 있었다. 시나가 그걸 건네며 말했다. “언니 축하드려요. 그리고 이거 좀 무거워요.” “고마워.” 란은 그렇게 대답하며 조심스럽게 그릇을 받아 들었다. 푸른 불꽃이 생각보다 커서 좀 놀랐다. 그리고 금 접시도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금이라서 그런 거겠지.’ 접시를 들고 문 앞에 서자 시종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란은 어렴풋한 베일 너머로 홀에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보았다. ‘베일 써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었으면 진짜로 긴장했을 거다. 란은 조심스럽게 홀로 들어갔다. 베일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고, 불꽃도 들고 있었고, 아주 긴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주변을 볼 여유가 없었다. 녹색, 흰색, 은색, 세 개의 아치를 지나 란은 멈춰 섰다. 유스타프가 그녀에게서 그릇을 받아 들고 나서야 란은 안심하며 고개를 들고 그를 볼 수 있었다. ‘헉.’ 란은 작게 숨을 삼켰다. 정복을 입은 유스타프는 베일 너머로 봐도 너무 멋있었다. 란은 자신이 베일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지금 이 얼빠진 표정을 모두에게 보였을 거다. 유스타프가 불꽃을 화로에 붓자, 화로에서 커다란 푸른색 불꽃이 솟구쳤다. 열기는 없었지만, 갑자기 크게 솟구쳐 란은 깜짝 놀랐다. 유스타프가 돌아서서 그녀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고 유스타프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가 베일을 벗겨 불꽃에 던져 버리고 준비된 관을 들어 올렸다. 푸른 불꽃에 녹음의 관에 달린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가 춤추듯 빛났다. 란이 살짝 머리를 기울이자 유스타프가 조심스럽게 란의 머리에 관을 씌웠다. 란이 고개를 들자 유스타프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그러자 하객 사이에서 가볍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란의 뺨이 붉어졌다. 유스타프는 이 식을 빠르게 해치운 다음, 그녀를 안고 바로 침실로 올라가고 싶다고 느꼈다. 그는 란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브릴리언트 컷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졌다. ‘너무 커.’ 란은 이렇게 큰 다이아몬드가? 하며 유스타프를 바라보았고, 반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스치는 걸 보고 그냥 즐겁게 이 선물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자 홀에 모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녹음을 드리우소서!” 란은 가슴속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러고 나자 시종이 양피지와 펜을 가지고 왔다. 결혼 서약서였다. 먼저 유스타프가 서명하고, 그 다음 란이 서명을 끝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일루미니티 백작이 외쳤다. “이로써 라치아와 제국의 법에 의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란이 유스타프를 바라보며 ‘이제 출발해도 되지?’ 하는 눈짓을 보내자 유스타프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란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숨을 삼켰다. 모두가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함성을 내질렀고, 유스타프는 란을 안은 채로 다시 홀을 가로질러 세 개의 아치를 통과했다. 모두가 박수 치고 휘파람을 불고 꽃잎과 밀알, 금화를 뿌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몇몇 금화가 유스타프 위로 떨어져서, 그는 란에게 맞지 않게 조심했다. “신랑 너무 빨리 간다!” 짓궂게 누군가가 외치자 다들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란은 뺨이 더더욱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유스타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홀을 나와 시종이 홀의 문을 닫자마자, 유스타프는 란을 내려놓으며 키스했다. 란의 머리에 얹은 관이 흘러내려 떨어지는 걸 그가 한 손으로 낚아챘다. 란이 당황해 유스타프의 입술을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립스틱 묻었어.” 유스타프가 손등으로 슥 제 입술을 문지르며 “그런가요?” 하곤 한 번 더 그녀에게 입 맞췄다. “크흠, 크흠.” 카라가 헛기침을 해서야 유스타프는 키스를 멈췄다. 란은 숨을 헐떡였다. “연회 준비를 해야 하니, 두 분 다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카라가 그렇게 말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뵙죠.” 유스타프가 란의 귀에 속삭이고 자리를 떴고, 란은 카라의 뒤를 따라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연회복은 짙은 푸른색 드레스로, 나폴나폴한 재질이 몇 겹이나 겹쳐 있었고 그 모든 치마 아래쪽에 반짝이는 색색의 토파즈를 잔뜩 달아 마치 밤하늘처럼 보였다. 거기에 머리에는 관을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한 다음, 드러난 팔에 진주 단추가 촘촘하게 달린 롱 글로브를 끼웠다. 그리고 에메랄드 홀로 돌아가니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파티장이 되어 있었다. 연회장 가장 상석에는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란은 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스타프를 바라보았다. 옷을 갈아입은 유스타프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멋있었다. “가실까요, 부인.” 유스타프가 정중하게 말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란과 유스타프가 홀에 들어서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둘을 주목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사람들은 허리를 깊게 숙이며 좌우로 물러섰다. 란과 유스타프가 자리에 앉았지만 잠깐이었다. 유스타프의 인사말이 있고 사람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나자, 유스타프가 란에게 춤을 청했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플로어로 들어가자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했고, 란은 이제는 꽤 익숙하게 더블릿을 추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숨을 내쉴 만큼 완벽한 한 쌍이었다. “춤추시겠습니까?” 루미에가 손을 내밀어 시나는 웃으며 얼른 그 손을 맞잡았다. 둘이 플로어에 합류하며 다른 사람들도 플로어로 끼어들어, 곧 플로어는 춤추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제야 좀 긴장이 풀려 란이 말했다. “벌써 지쳤어.” “안 됩니다.” 유스타프가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전 오늘 밤 란을 순순히 재워 줄 생각이 없거든요.” 란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유스타프!’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을 삼키고 그를 짐짓 노려보듯 하며 말했다. “정말, 정말로,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네, 부인.” 유스타프가 달콤하게, 노래하듯 그녀를 그렇게 불러서 란은 어쩐지 간질거렸다. 부인. 내가 라치아 공작 부인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 란이 중얼거린 말에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정말?” “네. 그러니 확인해 보고 싶어집니다.” 의미심장하게 말해와 란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적당히 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가세요.” 란이 입을 비죽였다. “유스타프 좋으라고?” 유스타프가 그 말에 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절 한 번 살려 주시죠, 부인.” 란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그녀의 귀 끝이 붉어진 게 보여서 유스타프는 그녀의 귓바퀴에 키스해 주고 싶고, 핥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첫 춤을 끝내고 플로어에서 나오자 몰려든 사람들이 차례로 축하인사를 건넸다. 둘은 그걸 받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란은 같이 춤을 추자는 사람들 손에 이끌려, 콰트로움을 추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한창 연회의 중반쯤 되었을 때, 키리가 다가와서 정중하게 말했다. “잠시 옷매무새를 고치려 가실 시간입니다.” “아, 응.” 란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홀을 빠져나왔다. 란이 휴 하고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힘들다.” 키리가 빙긋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 “마님, 저는 지금 가주님의 부탁으로 마님을 데리고 나온 거예요.” 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리가 부드럽게 이었다. “정말로 옷매무새를 고치고 돌아가셔도 되고, 아니면 침실로 안내를 해 드려도 되고요.” 란이 뺨을 사과처럼 물들였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면 유스타프가 울겠지.” 키리가 키득키득 웃고 말했다. “갑자기 제 아내가 아프다며 번쩍 들고 사라지실지도 모르지요.” 그 말에 란은 “현실성 있어.” 하고 중얼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새침하게 말했다. “침실로 갈래.” “네.” 키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그녀를 공작 부인의 침실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이미 카라와 소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란의 머리를 풀어주고, 목욕을 도와주고서 옷을 입혀 주었다. “그럼.” 시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란은 어색함을 느꼈다. 그녀는 긴장을 삼키며 공작 부인의 방을 살폈다. 그러다가 세공이 다른 문을 발견했다. 크기도 다른 문에 비하자면 작았다. 손잡이는 은으로 만들어진 듯했고, 에메랄드 장식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쪽에 잠글 수 있는 잠금쇠가 상당히 크게 달려 있었는데, 역시 은으로 된 빗장이었다. ‘이건가…….’ 란은 빗장을 풀고, 손잡이를 열었다. 그러자 역시나 부부 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부부 침실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늑하게 꾸며진 공간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방의 커튼은 지금 전부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아이보릿빛 커튼에는 화려한 수가 놓여 있었다. 란은 그 침대 끝에 앉았다. ‘푹신하다.’ 뭘로 만든 걸까. 역시 거위 털이겠지? 그런 뻘한 생각을 하며 란은 슬리퍼를 까닥거렸다. 이곳의 침대는 대부분 높은 편이었는데, 부부 침대는 더 높아서 앉으니 발끝이 바닥에 살짝 닿을락 말락 했다. ‘떨어지면 아프겠다. 아니지, 카펫이 워낙 두꺼워서 괜찮을지도.’ 란은 어깨를 움츠렸다. 제 옷차림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때 딸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란의 어깨가 크게 흠칫했다.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입구에 유스타프가 서 있었다. 란이 진녹색 로브를 입고 있는 것처럼, 그 역시 암록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빨리 왔네?” 저도 모르게 말하자 유스타프가 살짝 웃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 “연회는?”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느라 저희가 없어진 걸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말하면서도 유스타프는 입구 쪽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스.” “네.” “이쪽으로 와.” 란이 작게 말하자 그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어두운 램프 불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유스타프가 조용히 침대로 다가왔다. 란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 침대 너무 높은 것 같지 않아?” “다리를 자르라고 하죠.” “어, 아니, 그건 아니고.” 란이 당황해 말하는데 유스타프가 가볍게 웃고 그녀의 허리를 당겨 키스했다. ‘아.’ 지금까지의 키스도 충분히 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 완전히 다르다. 집요하고 질척거리고― 키스에 밀려 란은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가 그녀의 머리와 허리를 붙잡고 있어서 그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의 입맞춤이 이제 입술에서 목으로, 어깨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손이 로브 안으로 들어오자 란의 몸이 크게 뛰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자 유스타프는 순순히 밀려주었다. “유스.” “네.” 란은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헐떡거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내가 유스타프 로브 먼저 벗겨도 돼?” 유스타프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제 로브 끈에 올렸다. 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 끈을 잡아당겼다. 란이 살짝 로브를 잡아당기자 암록색 실크 로브가 부드럽게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려 떨어졌다. 안은 두 사람 다 알몸이었기 때문에 란은 그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스타프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고 물었다. “만족하셨습니까?” “어― 그 이상?” 그녀의 말에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벗겨도 됩니까?” 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유스타프는 그녀의 끈을 당겨 로브를 벗겨냈다. 그의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란의 뺨이 붉어졌다. 그가 란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 “란은 항상 제 상상을 뛰어넘지요.” 그러며 그는 찬양하는 말을 쏟아냈고 란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기쁨도 느꼈다. 유스타프가 란을 가볍게 안아 들어 침대 가운데로 데리고 갔다.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제가 항상 하고 싶었던 걸 전부 다 해도 됩니까?” “하고 싶었던 게 뭔데?” 란의 물음에 그가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란은 웃으며 “유스타프!” 하고 외쳤고, 그의 말이 계속 이어지자 이번에는 “유스타프!” 하고 비난하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유스타프가 그녀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싫다고 하지 않으시면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유스, 읏―”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에게 애무를 퍼붓기 시작하자 란이 흐느끼며 말했다. “하, 하지만 언제 다―” 그 많은 걸 언제 다 하려고? 그녀의 물음을 충분히 알아들은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신혼은 깁니다.” ‘언제까지 침실에서 안 나가려고?!’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크게 떴지만, 유스타프가 입술을 겹치자 그 생각은 스르륵 녹아버렸다.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지고 살며시 문대어졌다가 각도를 살짝 바꾸어 다시 겹쳐진다. 그러며 그의 손이 가볍게 그녀의 어깨와 목, 귀를 어루만졌다. ‘흐아, 이거 뭐야-’ 지금까지도 유스타프와 키스는 해왔는데 지금 것은 완전히 달랐다. 머릿속이 흐늘흐늘해지고 허리가 찌릿해져 오는 키스였다. 저절로 몸에 힘이 빠졌다. 손가락이 귓바퀴를 가볍게 쓸자 란은 숨을 헉 삼켰고 그 사이 벌어진 입술로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흣-”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혀가 아주 부드럽게 엉켰다가 살며시 그녀의 혀를 문질렀다. 란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민감해져오는 가운데 그가 가볍게 혀를 빨아들이자 란은 저도 모르게 그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맞춰주었다. 키스가 끝나는 게 아쉬워서 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키스라면 하루 종일 하고 싶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목덜미에서 쇄골로 내려갔다. 도드라진 쇄골을 핥아 올리자 란은 저절로 몸이 비틀어졌다.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손이 그녀의 몸을 쓸어내렸다. 어깨에서 팔로, 팔에서 옆구리로 살며시 복부를 누르며 쓸어내려온다. 옅게 땀이 배기 시작하는 피부를 어루만지며 유스타프가 속삭였다. “너무 예뻐요.” 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역시 어두운 게 좋을 것 같아.” “싫습니다.” 유스타프가 단호하게 말해서 란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하지만 부끄러운걸.” “그렇지만 보이지 않으면, 란이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죠. 기분 좋게 해주고 싶어요, 누님.” 몸을 바싹 기울여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피부가 부드럽고 말랑해요. 어떻게 이렇게 기분 좋게 매끄러울까요?” 그의 손가락이 아래에서 다시 위로 쭉 올라와 명치부근에 머물렀다가 가슴 아래쪽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가슴을 살며시 쥐자 란은 숨을 삼켰다. “긴장하지 마세요.” 속삭이고 유스타프가 입술을 겹쳐왔다. 아까보다 좀 더 강한 입맞춤이었다. 그러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유두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윽.”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입 안으로도 이렇게까지 질척한데, 거기에 유두까지 어루만지니 눈앞이 반짝였다. 유스타프는 그의 손 아래에서 심지가 서서 단단해진 유두를 입 안에 물었다. “아!” 가벼운 교성이 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유스타프는 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혀로 단단해진 돌기를 굴리다가 강하게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반대쪽 유두도 똑같이 해주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흐, 응-” 란은 혀도 성감대가 될 수 있는 걸 처음 알았다. 그의 손가락과 제 혀가 엉켜서 저릿했다. 란은 그가 해준 것처럼 그의 손가락을 빨아들이며 혀로 핥아 올렸다. 그럴 때마다 호응하듯이 유스타프가 그녀의 유두를 강하게 빨았다. 질척한 소리가 침실 안을 채웠다. 뜨거운 란의 입에서 젖은 손가락을 꺼내고 가볍게 입술에 입 맞춰 준 후에 그는 무릎으로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으-” “이미 흠뻑 젖었네요. 여기가요.”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그녀의 음부를 갈랐다. 찌걱 하는 소리가 나서 란은 제 얼굴을 돌렸다. “보지마…….” “놀리는 게 아닌데요. 젖어서, 반짝거리고 예뻐요. 벌써 충혈되어서.” 엄지가 살며시 클리토리스를 누르자 란의 허리가 움찔 떨렸다. 유스타프는 꿀이 잔뜩 묻은 엄지로 음핵을 돌리며 손가락을 살며시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얕게 들어온 손가락으로 살살 벽을 비비며 음핵을 주무르자 란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손으로 유스타프가 얼굴을 돌린 그녀의 턱을 잡아 바로 보게 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정욕에 가득 차 있는 걸 보자 란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조르지 마십시오.” 그가 속삭여 란이 “안 졸랐어.” 하고 허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유스타프의 손가락이 저항감 없이 좀 더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 “이렇게나 조르고 있는데요?” 제 손가락을 조이며 보챈다는 말에 란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안으며 속삭였다. “키스해줘.” 유스타프는 순순히 그녀의 입 안으로 제 혀를 밀어넣었다. 란은 그가 제 혀를 빨아들이면서 손가락을 더 안으로 밀어넣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지만 유스타프가 막고 있어서 다리를 닫을 수 없었다. 혀를 빨리며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고 유두가 비틀려서 란은 흐느꼈지만 그의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전까지는 다채로운 색으로 반짝이던 것이 단숨에 새하얗게 변하며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다리가 쭉 펴졌다. “-!!” 그녀의 반응에 유스타프는 강하게 그곳을 문질렀다. 란은 버둥거리며 허리를 빼려고 했지만 뺄 수 없었다. 그녀는 절정에 올라 유스타프를 끌어안았다. 폭발했던 감각에 한참을 떨고 있었지만, 몸은 아직도 둥실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솟아오른 클리토리스를 유스타프가 엄지와 검지로 둥글리자 란은 다시 흐느꼈다. “아, 으, 유스, 으앙-” 제 입에서 제 소리 같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쾌락의 빗장이 열려서 온 몸의 감각이 뭘 하든 그녀를 쾌감으로 몰고 갔다. “흐윽, 아앗-아-” 입맞춤은 다시 가슴으로 내려왔다. 부풀어 오른 유륜을 빨아들이다가 딱딱한 유두를 혀로 굴리고 혀끝으로 둥근 유방의 윤곽을 따라 내려와서 그녀의 배꼽 주변에서 한 바퀴 돌고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아 살짝 위로 올렸다. “잠깐, 유스?!” 설마? 하며 란이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혀가 먼저 음핵에 닿았다. “힉!”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가 란은 간신히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손가락과 혀는 완전히 달랐다. 이미 절정에 한 번 달했던 음핵을 입술로 지분거리다가 혀로 눌렀다가 빨아올리는 순간 란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앗, 으흑, 아, 아아아-!” 교성과 함께 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벅지 안쪽이 멋대로 경련하며 유스타프 오른 어깨에 올려진 다리가 움찔거렸다. 이미 흐늘해진 안쪽에 유스타프의 손가락이 들어와 이리저리 휘젓다가 빠져나갔다. 스윽 하고 그의 손가락이 나가는 순간 란은 아쉬움을 느꼈다. 안쪽에 들어와 줬으면 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어깨를 핥고 목덜미를 핥았다. 귓바퀴를 가볍게 물었다가 놓고 그가 속삭였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다리를 벌려주세요.” 이미 다리는 충분히 벌리고 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서 란은 허락의 의미로 발끝을 밀어 좀 더 다리를 벌리며 그를 꽉 안았다. 이미 아랫배에 달라붙을 듯 발기한 그의 성기에서는 쿠퍼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붙잡고 그의 성기가 천천히 밀고 들어왔다. 이미 애무로 눅진해진 그녀의 안은 그의 침입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이, 이제 다 들어왔나?’ 뱃속이 꽉 들어차서 란이 헐떡이며 허리를 비틀자 유스타프가 신음을 내뱉고는 허리를 밀어붙였다. 단숨에 그의 것이 안쪽까지 밀고 들어와 란은 헉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경직시켰다. 순간 안이 꽉 조여 유스타프는 이를 악 물었다. “란, 쉬이-괜찮아요.” 그가 그녀를 달래며 그녀의 눈꺼풀에, 뺨에, 광대 위에, 입술에 연신 입 맞췄다. 란은 그에게 입 맞췄다. 그가 해준 대로 그의 혀를 살며시 빨자 그녀의 손 아래 있는 그의 등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유스도 기분 좋구나.’ 란은 사탕을 핥듯이 그의 혀를 문지르며 빨아들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문질러지며 키스하자 그의 허리가 꾹 하고 그녀를 더 눌렀다. ‘커졌어.’ 그녀의 안에서 그의 것이 더더욱 부피를 부풀렸다. 란은 숨을 짧게 허덕이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이제 그가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익숙해졌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움직여줬으면 했다. 안쪽에 간질거리는 부분을……. 그러자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유스타프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란은 길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움직였다. 이쪽으로, 좀 더 안으로 와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건 잠깐이었다. 유스타프가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고 얕게 쳐올리기 시작하자 란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앗, 앗, 잠깐, 유스, 아, 으읏!!”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가 쿡쿡 찌를 때마다 멋대로 몸이 튀었다. 머릿속에서 누가 전기 충격을 주고 있는 것처럼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가를 반복했다. 얼핏 시야로 유스타프가 웃는 게 들어온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앗, 아아앗, 아응, 하으-!!” 교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란은 허리를 띄웠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느라 손톱을 세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유스타프의 손가락이 둘 사이로 들어와 그녀의 도톰한 음핵을 강하게 문질렀다. “힉-!” 그 다음은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벌리며 란은 경련했다. 안쪽이 수축하며 꽉 조여 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혀를 빨아올리며 유스타프는 달라붙는 안쪽에서 더더욱 속도를 올려왔다. 눈물이 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절정이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가 다시 그녀를 공중으로 내던졌다. 유스타프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안에 자신을 꽉 묻었다. 축 늘어진 란의 안에서 그가 빠져나오자 애액과 정액이 함께 흘러나왔다. 유스타프가 그것을 도로 밀어넣듯이 손가락을 그녀의 안으로 넣었다. “오물오물하고 있네요. 맛있나 봐요.” 유스타프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란은 들리지 않았다. 풀어진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스타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잘 맞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부부 사이면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진다고 하니까요. 더 좋아질 겁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움찔거리는 란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앞으로 계속 란을 더 알려주세요.” ✥✥✥ 유스타프는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았다가 란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란은 정신없이 쿨쿨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꼬았다. 침실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게 커튼을 쳐 놓았기 때문에 낮밤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한번 커튼을 열었더니 란이 “낮인데…….” 하고 부끄럽다며 이불 속으로 들어간 후로는 커튼을 절대 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식사는 시간에 맞춰 딱딱 들어와서 유스타프는 얼마나 지난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스타프는 그녀의 옆구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가 쿡 하고 그녀의 말랑한 뺨을 찔러 보았다. 그래도 란은 꿈쩍도 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희미한 빛 속에 드러난 란의 둥근 어깨에도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유스타프는 그 흔적 위에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점점 입맞춤이 아래로 내려가서 이불을 끌어내리고 등의 오목한 곳마다 키스를 하는데 “으응―” 소리를 내며 란이 귀찮다는 듯 그를 밀어냈다. 유스타프는 얌전히 키스를 멈추고 다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준 후에 가볍게 토닥거렸다. ‘큰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유스타프의 품에서 눈을 뜨는 것도 익숙하다. 그녀는 제 허리에 두른 팔을 느끼며 하품을 하고 몸을 돌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응…….” 멍한 목소리로 란이 대답했다. 유스타프가 물 컵을 건네어 란은 반쯤 몸을 일으키고 물을 마시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씻을래.” 그녀가 칭얼거리듯 말하자 유스타프가 “준비하게 하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당기고 로브를 걸쳤다. 란은 그의 넓은 등과 역삼각형으로 줄어드는 허리, 딱 올라붙은 엉덩이가 로브 속으로 가려지는 걸 빤히 바라보았다. 힐끗 뒤를 돌아본 유스타프와 눈이 마주치자 란이 제 이불 속으로 얼굴을 반쯤 숨기며 말했다. “왜, 뭐?” “아무것도,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유스타프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돌려주며 문밖에 선 시종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란이 웅얼거렸다. “이제 내 거잖아. 내 거 내가 보겠다는데…….” 그 말에 유스타프가 기쁜 듯이 미소 지으며 “그렇지요, 란의 것이지요.” 하고 대답하고 침대로 돌아와 물었다. “배고프지는 않으십니까?” 란은 고개를 저었다. 허기가 지지는 않았다. 단지 그냥 씻고 싶을 뿐이었다. “목 아파…… 피곤해…… 대체 오늘이 며칠 째야?” “아직 일주일은 안 되었답니다.” ‘채울 작정인가…….’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빤히 유스타프를 보았고, 그는 신음을 흘린 후에 말했다. “여자에게 빠지는 남자 이야기는 전부 한심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지금 그러고 있네요.” 란이 눈을 샐쭉하게 떴다. “뭐야? 그거 지금 내 탓 하는 거야?” “제가 한심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이 피식 웃고 말했다. “그건 일단 라치아 영지를 말아먹고 나서 이야기해보자.” “그건 그렇군요.”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숙여 란의 입술에 입맞춤하며 말했다. “그럼 말을 바꾸죠.” “바꿔?” “제가 란에게 정신없이 푹 빠졌습니다. 라치아를 말아먹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유스타프!” 란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유스타프가 그녀의 목에, 어깨에 키스하며 이어 말했다. “이대로 계속 침실에 있고 싶어집니다. 란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요.” 란이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그 꼴은 내가 못 보지. 내가 라치아를 일으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럼 라치아가 망할 일은 없겠군요.” 유스타프가 빙긋 웃었다. ✥✥✥ ‘역시 사람은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해.’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테라스의 햇살을 즐겼다. 그녀는 제 눈앞에서 차를 마시는 유스타프를 노려보듯 하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햇빛을 받으면서 살아야 해.” “그래서 지금 받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계속 받으시겠지요.” “정말?” 유스타프의 푸른 눈이 의아하다는 듯이 크게 떠졌다. “당연하죠.” “난 유스타프가 나 침실에서 안 꺼내 주는 줄…….” “침실에도 햇빛은 들지 않습니까.” “유스타프.” “농담입니다.” 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키리에게 호신술을 배운다며 키운 체력을 침실에서 써먹게 될 줄은 누가 알았는가. 유스타프가 잠시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만 좋았습니까?” 란은 그 말에 뚫어져라 유스타프를 보다가 체온이 확 올라가는 걸 느끼며 말했다. “안 좋았으면 이미 첫날밤 유스타프를 걷어찼을 거야.” 좋았냐니.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너무 좋아서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유스타프의 푸른색 눈동자가 정염으로 가득 차서 흐릿해지고, 쾌락으로 일그러진 단정한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다. 종종 그가 장난스럽고 달콤하게 “누님.” 하고 속삭이면 어쩐지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뱃속이 짜르르하고……. 정말로 체력만 된다면 한 달 내내― ‘안 돼.’ 정신 차리자. 일단 몸이 견디지를 못한다. 지금도 옷 아래 알몸을 란은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밤마다 유스타프가 물고 빠는 통에 유두며 성기가 모두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서 목욕 시중도 받을 수 없었다. 코르피스로 조이는 스타일이니 망정이지 스치는 옷감이었다면 눈물이 났을 터였다. 란은 그렇게 생각하며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이러다 진짜 라치아를 말아먹을지도 모른다. “이제 수도로 올라가야 하지 않아? 결혼식 때문에 영지전 보고가 너무 늦어졌어.” “그렇습니다.”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올라가면, 다시 하늘 저택으로 돌아오기가 빠듯하겠는걸?” 유스타프는 ‘아’ 하고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재빠르게 대답했다. “겨울은 녹색 아치에서 보내시죠.” “정말?” 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될까?” 작년과 재작년 겨울, 서류에 시달렸던 걸 생각하며 란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신년회는 어떻게 하고?”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눈을 깜박였다. 당혹해서 란이 물었다. “그럼 녹색 아치에는 나만 남는 거야?” 유스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같이 남으면 좋겠지만, 겨울에 영지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겨울 사냥이나 봉인 의식도 그렇고―” 란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내가 녹색 아치에 남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겨울은 어차피 사교 시즌도 아닌데? 결국 이유를 찾지 못해서 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스, 다른 계획이라도 있어?” “네?” 유스타프 역시 의아해져서 되물었고 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나 혼자 녹색 아치에 남으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그러고 보니 전에 라벨과 뭔가 한다고 했잖아. 그거의 연장이야? 볼모 같은 건가?” “아닙니다.” 유스타프가 눈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라벨과 했던 이야기를 부인에게도 해야겠군요.” 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싱긋 웃었다. “라치아 공국으로 독립할 예정입니다.” 란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공국으로?” “네.” “왜?” “그게 더 이익이니까요.” “제국이 놔줄까?” “그러니 라벨과 협상하고 있는 거지요.” “아니, 공국이라니…… 그럼 유스타프가 공왕이 되는 거야?” “누님은 공비가 되시는 거고요.” 너무 어마어마한 일이라서 란은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찻잔을 내려놓고 설탕을 퐁당퐁당퐁당퐁당 넣었다. 유스타프는 저건 그냥 설탕차가 아닌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란이 그걸 한 번에 비워 버리고 말했다. “세상에.” 유스타프가 갸웃하고 물었다. “싫으십니까?” “아니, 싫다기보다는…… 귀찮은 일이 늘어나지 않을까?” “그야 그렇겠지만, 이익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누님이 하고 계시는 삼자무역을 직접 공국에서 관리할 수 있지요. 더해서 드워프와 엘프와도 국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력석을 판매하는 데 있어서도 새로운 판로가 열리겠지요.” 란의 머릿속에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허, 그러네? 쩔어. 확실히 제국에 소속되어 있는 공작가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 기사단의 운용도 그렇고, 사병 규모에도 더는 한계가 없다. “라치아 공국.” 란은 작게 말하고 유스타프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름 멋있는 것 같아.” 유스타프는 란이 계획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다. 혹시라도 제국을 떠나는 걸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유스타프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드물게 그가 말을 망설여서 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후처로 제국의 공주를 들이기로 하기라도 했어?” “란!” 기겁하며 유스타프가 외쳤고, 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럴 법하잖아?” “아닙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저희, 분명히 방금 전까지 침대에서 몸을 섞고 있지 않았습니까?” “유스! 쉬― 쉬―”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란이 손을 저었다. 다행스럽게도 공작 부부만 남기고 시종들은 물러난 후였지만, 그래도 저런 말을 큰 소리로 떠드는 건 민망하다. 란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혹시나 하고 해 본 이야기야.” “그럼 저도 혹시나 하고 이야기해 볼까요. 만약 제가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하셨습니까?” “엄청 화냈겠지.” “그리고요?” “지옥에서 돌아온 란 로미아 드 라치아를…….” 중얼거리다가 란은 가볍게 웃었다. “미안. 내가 실언했어.” 그녀가 고개를 숙여 유스타프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런 말은 농담으로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면 무슨 이유인데?” 유스타프는 이제 어떤 이유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 “녹색 아치에서 겨울을 보내지 못하게 될 겁니다.” 말하고 나자 란이 미간을 찌푸리는 게 보여서 그는 움찔했다. 유스타프가 말을 이었다. “물론 최대한 불편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무도회도, 모임도 란이 원하는 만큼 가져도 됩니다. 추위는 있겠지만, 마법 물품도 열심히 개발할 거고-” 빠르게 늘어놓는 건 변명이었다. 그래도 란은 말이 없어서 유스타프는 드물게도 안절부절못한 기분을 느꼈다. 란은 라치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하신다면 크게 온실을 짓죠. 그러면 따뜻할 겁니다.” 란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말 그대로―” “아니, 그게 아니라. 마치, 꼭, 내가. 겨울을 녹색 아치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이번에는 유스타프가 당혹했다. 그가 멈칫거리다가 물었다.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라치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요. 추위는 지긋지긋하다고도 하셨고요.” 몇 번이나. 유스타프의 말에 란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가 똑바로 유스타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스타프 라반 드 라치아. 내 공작, 내 가주, 내 남편.” 노래하듯 그녀가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네가 짊어지고 있는 것. 그 모든 걸 사랑해. 당연히 라치아도 좋아해. 싫어하지 않아. 겨울이 긴 것도 좋아. 날 녹색 아치에 혼자 두지 말아줘.” 란이 빙긋 웃으며 “응?” 하고 되묻듯 덧붙였고 유스타프는 잠시 말없이 란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째서 란은 제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걸까요? 달콤한 말에 푹 빠지는 건―”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뒷말을 유스타프는 삼켰고 란은 웃었다. “그건 내가 유스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럼 저도 란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습니다.” “음―” 란은 갸웃하다가 말했다. “없는데.” “란.” “정말로.” 란이 웃었다. 유스타프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제가 좀 더 열심히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지요.” 그러며 그가 란의 빈 잔을 채워 주고 설탕을 넣어주었다. 문득 란이 물었다. “그런데 그러면 녹색 아치도 두고 가야 하는 건가?” “네.” “그건― 아깝군.” 에메랄드로 된 아치를 생각하며 란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제국 황제가 라치아 공작에게 내린 상징물이니 그걸 가져가는 것도 우습기는 하다. “새로 하나 만들까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란이 손사래를 쳤다. 유스타프라면 진짜로 하나 만들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뭐, 생각해 보면 공짜로 얻은 거니까 두고 가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공국이 되면 행정 구역도 새로 개편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란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일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돈도요.” “열심히 벌어야겠네.” “벌어야지요.”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동시에 가볍게 웃었다. 유스타프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란.” “응?” “어차피 신혼이니 올라가는 건 딱 일주일만 더 미룰까요?” “왜?” 란이 눈을 깜박거려 유스타프가 미소 지었다. “데이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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