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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화


74 발끝에서부터 끌어 올린 고함에 일순 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 덕분에 매서운 바람도, 땅을 흔들던 진동도 한순간 멈췄다. 여원은 이 기회를 틈타 재빨리 입을 열었으나 좀처럼 큰 소리를 내 본 적 없는 목이 놀랐는지 그대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한번 터진 기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어지는 기침에 여원이 괴로운 듯 상체를 숙이자 신월이 고개를 기울여 손을 뻗어 왔다. 등을 쓸어 줄 심산인 듯싶었다. [숨을……] 탁. 어깨에 닿은 신월의 손을 매섭게 쳐 내자 그의 손이 저항 없이 떨어져 나갔다. 옆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여원의 행동에 놀란 듯 무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여원은 신월을 노려보며 세차게 쏘아붙였다. “콜록, 여기 싸우러 온 거예요?” 기침으로 인해 여원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신월은 여원이 때린 손을 잠시 내려 보더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에서 먼저…….] “저쪽에서 먼저 시비 걸었다는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요.” [애초에…….] “애초에 다른 문제인 거 알아요. 제가 궁금한 건 왜 지금 그걸로 싸우냐 이 말이에요.” 여원이 연이어 말을 자르자 신월이 놀란 듯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러고는 턱을 매만지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놀란 게 아니라 이 상황이 신선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둘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사이인 거 잘 알겠어요. 알겠는데 이 상황에 굳이 그 얘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왜 자꾸 화를 부추겨요?” 성인이 되고 이렇게 큰소리를 내 본 적이 있었나. 지금까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여원은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남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여원조차 이 상황에서는 화를 안 낼 수가 없었다. 대화에 끼어들 수 없으니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 “저희는 그냥 귀성하는 길에 산신님의 영역에 들어온 거였으니 그냥 길 열어 달라, 그럼 나가 보겠다 하면 되는 걸 누굴 죽이느니 마느니, 이쪽 분들 대화는 원래 이렇게 폭력적이에요?” […….] 여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발까지 동동 구르며 말했다. 여원이 이렇게나 화를 낸 적이 있던가? 제 앞에서는 항상 조심하고 눈치만 살피던 여원이었다. 그는 놀라움을 넘어 그녀가 씩씩거리는 이 상황이 재밌기까지 느껴졌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여원이 눈을 부라리며 따지자 그가 나른한 웃음을 터트렸다. [말해도 안 들어줄 것 아니냐.] 그제야 아차 싶은 여원이 조금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말을 자른 건 미안해요.” 방금까지는 새끼 삵처럼 눈을 치켜뜨고 쏘아붙이더니 이번에는 또 순순히 사과를 한다. 뭐, 화낼 거라면 줏대라도 있든가. 그 모습이 여간 우스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아니지. 우스운 게 아니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헷갈렸는데 이건 같잖은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뭉근한 열기가 고이는 느낌에 갈증이 일었다. 여원이 답답함에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자 과육이 으깨지는 듯한 달콤한 향이 사방에 퍼졌다. 그 향은 이성 따위는 가볍게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었기에 신월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형광색 눈동자에 추잡한 욕망이 들끓었다. 저 입술을 집어삼킬까 하는 고민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으나 무호가 보는 앞에서 그러고 싶지 않아 참기로 했다. 체면이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닌 여원의 풀어진 얼굴을 다른 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하찮은 장막을 부순 뒤 여원과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신월은 이 상황을 요긴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그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신월은 짐짓 슬퍼 보이는 낯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억울하구나. 대화를 하기 위해 온 나를 매도한 것은 저것이었는데. 너는 내 말을 자르고 내게만 뭐라 하니.] “…….” 여원의 얼굴이 경직되자 그가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옆에서 무호가 뜻 모를 욕설을 내뱉었으나 신월은 가볍게 무시하고 여원의 뺨을 매만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여원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짐승에게도, 그리고 저 아둔한 산신에게도 전부 몇 차례 경고했지. 그럼에도 선을 넘은 것은 저들이지 않으냐.] 여원이 입술을 삐쭉 내밀고 항변했다. “신월 님도 산신님께 도력이 약하느니 뭐가 무리라느니 하면서 화를 부추겼잖아요.” [부추긴 게 아니라 사실을 알려 주었을 뿐이야.]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걸 면전에다 말하면 당연히 기분 상하죠.” [타인의 얘기에 기분이 상한다면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란다. 약한 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지. 우리에게는 그것이 당연해.] 단 한 번도 약자인 적이 없었기에 나올 수 있는 오만하고도 서늘한 어투였다. 여원도 알고 있었다. 신월의 가치관은 인간과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굳이 따지자면 그의 가치관은 짐승의 약육강식과 닮아 있었다. 그렇기에 여원은 더더욱 걱정이 들었다. “저는 당연하지 않아요. 말했잖아요, 저는 신월 님이 누굴 다치게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안다.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부탁인지. 알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안에 있는 생명의 가치는 너무나 가벼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제게 보여 주는 다정함과 배려를 보면 그 부탁이 무리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지 않고는 널 지킬 수가 없는데.] 들릴 듯 말 듯 한 중얼거림에 여원의 가슴에 돌이 쿵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가 힘을 쓸 때는 전부 자신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심각하게 굳은 여원의 표정을 내려 본 신월이 고요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리하자꾸나. 내가 힘을 쓰는 것이 싫다면 네가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로. 그럼 나도 굳이 힘을 쓸 일이 없으니.] “곁에요?” [그래, 평생 내 곁에서 날 감시하면 되겠구나.] 유달리 강조된 평생이라는 글자에 여원이 잠시 멈칫거렸다. 여원은 사색에 잠긴 얼굴로 고민했다. 지금도 딱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고 약속한 것도 있으니 아마 죽을 때까지 여원은 신월의 곁에 있을 것이다. 죽을 때 이름을 불러 주겠다고 했으니 평생이라는 단어를 써도 무방하겠지. 고심 끝에 여원이 입술을 뗐다. “제가 곁에 있을 때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어요?” [그리하지.] 신월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여원 또한 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가 되었다. 말이 딴 데로 새어 나간 느낌이 없잖아 있었기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사과하고 돌아가요.” 여원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한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도달한 것 같았다. [사과?] 그가 생소한 단어라는 듯 되묻자 여원이 표정을 확 구겼다. “……우리 지금까지 무슨 대화를 한 거죠?” [무호는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내게 감사해야지. 거기에 네 덕분에 산신의 체면도 지킬 수 있었으니 고개를 조아려도 모자라겠구나.] 여원이 입을 뻐끔거렸다. 보는 눈만 없었어도 그녀는 지금 당장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리를 내질렀을 것이다. 어쩜 이렇게, 오만하고 뻔뻔한 생물이 있을 수 있을까. 여원은 잠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결국 정제되지 못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연세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이렇게 자존심 부리는 거 보기 흉해요.” [연세.] 신월이 일순 멍한 표정을 지으며 되뇌니 옆에서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하!] 옆을 보자 무호가 허리를 접고 끅끅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아, 미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오래 살기는 했나 봐. 살다 보니 그 대단하신 신월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다 보네.] 그는 어찌나 즐거운지 숨까지 헐떡이며 박장대소를 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신님도 잘한 거 없어요.” [뭐?] 무호가 웃음을 멈추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야, 나는 피해자야. 너희는 허락도 없이 내 영역에 쳐들어온 불청객들이고!] “일부러 들어온 게 아니었어요, 귀성하는 길에 우연히 길이 겹쳤을 뿐이에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까 뭐, 아 실수였군요, 이것 참 유감입니다. 하고 선물이라도 쥐여서 보내 주리?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해도 모자랄 판에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걸 그냥 넘겨?] 무호와의 대화는 신월과는 다른 의미로 또 피곤했다. 신월이 대화하기 버거운 느낌이라면 무호는 마치 치기 어린 남자아이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것보다도 신월의 기분이 시시각각 가라앉는 게 선명하게 느껴져 어서 빨리 대화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알아요, 저였어도 그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쁠 거예요.” [그래! 그걸 어떻게 참아!] 무호가 보란 듯 턱을 치켜들며 신월을 쳐다봤다. 봤냐? 저 인간은 내 편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에 신월의 표정이 싸늘히 식어 가던 찰나, 여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상처를 함부로 들쑤시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당했던 무호의 얼굴이 일순 어색하게 굳었다. [아, 그건.] “무슨 이유든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은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닌 마치 저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대꾸할 말이 수백 가지는 있는데 어째서인지 처량하게 느껴지는 여원의 얼굴에 목구멍이 조여들어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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