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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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방울 내리던 빗방울은 금세 장대비로 바뀌어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여원이 우왕좌왕하자 신월은 차분하게 가림막 밑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쏴아아―
바닥에 순식간에 물웅덩이가 고여 갔다.
바람이 습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쏟아질 줄은 몰랐다. 강한 빗줄기를 망연하게 쳐다보던 여원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잠깐 여기 계세요. 안에서 우산 사 올게요.”
분명 터미널 안에 늦게까지 하는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우산을 사러 갈 테니 지체하면 못 구할 수도 있었다. 빠르게 판단을 끝낸 여원은 망설임 없이 빗속을 뚫고 터미널 안으로 뛰어갔다.
신월이 여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녀는 어느 때보다 날렵하게 빠져나갔다.
그는 멀어지는 여원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몸도 약하면서 고뿔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슈룹(雨伞)을 구하러 간 모양인데 아무래도 여원은 자신이 도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 모양이었다.
슈룹이 없어도 여원이 부탁만 한다면 비 한 방울 안 맞게 할 수도 있었고 젖은 옷을 말려 줄 수도 있었다. 조금 더 힘을 쓴다면 비를 그치게 할 수도 있었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신월은 고개를 젖혀 비가 쏟아지는 검은 하늘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까 내릴 때부터 느낀 건데 불쾌한 기운이 인월 전역에 퍼져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인간들이 무슨 짓을 벌여 놓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제법 재밌는 형태로 말이다.
그가 가림막 너머로 손바닥을 내밀자 빗물들이 손을 피해 떨어졌다.
발밑 아래로 무언가가 꾸물거리던 때 저 멀리 투명한 우산을 쓴 여원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신월은 손을 거둔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다 팔리고 하나밖에 안 남았더라고요. 이거라도 구해서 다행이에요.”
제법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이 거칠었다. 여원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호기롭게 우산을 높이 들어 올렸다.
“호텔까지 안 머니까 하나로 나눠 써도 괜찮을 거예요. 들어오세요.”
그새 또 머리가 산발이 돼서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꼴이 귀엽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자신도 이미 글러 먹을 대로 글러 먹은 것이다.
신월이 몸을 숙여 우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일반적인 사이즈의 비닐우산이 꽉 찼다. 아니, 사실 부족했다.
신월의 몸을 다 덮기에는 우산은 한없이 작았고 그의 키에 맞추려면 여원은 벌서듯이 팔을 꼿꼿하게 들어 올려야 했다.
보다 못한 신월이 여원에게서 우산을 가로채 들었다.
[이리 주렴.]
“아, 감사해요.”
그렇게 여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는데 사소한 의문이 들었다.
이상하게 몸이 젖지 않았다. 그의 체구를 생각하면 어깨 한쪽은 젖어야 마땅한데.
의아해 위를 올려 보니 우산이 완전히 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화들짝 놀란 여원이 우산을 잡은 신월의 팔을 반대로 꾹 밀었다.
“이렇게 배려해 주실 필요 없어요! 신월 씨 어깨 다 젖잖아요!”
[…….]
여원의 말에 신월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접혔다. 그런 와중에도 기울어진 우산을 똑바로 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전전긍긍하는 여원을 보던 신월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는 내가 도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
“아니요. 알고 있어요…….”
여원은 지금 이 상황에 그 말을 왜 하냐는 물음이 담긴 뉘앙스로 대꾸했다. 그러자 신월의 눈이 더 가늘어지더니 아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왜 도술을 부려 달라고 하지 않지? 이런 은막 따위로 가리는 것보다 훨씬 편할 텐데.]
여원도 멈춰 서서 큰 눈을 깜빡였다. 살짝 당황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도술을 부릴 수 있는 게 부럽다고는 생각해 봤어도 편하다고는 생각 안 해요. 무슨 버튼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도 아니고.”
여원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리고 그거 아무런 대가 없이 사용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럼 쓰지 않는 게 더 좋죠. 고작 비 오는 거에 힘을 쓸 일이 뭐가 있어요? 우산만 사면 되는 건데.”
신월이 대답 없이 여원을 응시했다. 멀뚱히 서 있는 신월의 모습에 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여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껏 만난 인간들은 전부 신월에게 무언가를 바라고는 했다.
작게는 약재를 찾아 달라는 부탁부터 크게는 불로불사의 몸, 혹은 삼라만상을 깨닫게 해 달라거나 인간을 뛰어넘을 지혜를 달라는 부탁까지.
정말 무엇이든지 바랐고 가감 없이 부탁했다.
그리고 그의 도술을 보면 인간 대부분은 그것이 만능인 줄 알고 눈을 뒤집어 까고 덤벼들고는 했다.
많은 인간이 그의 도술을 보고 편리한 것이라고만 정의했다.
이 또한 만능은 아니라고 말해 주어도 잠깐 이해하는 척만 할 뿐, 시간이 지나면 아주 간단한 행위까지 전부 그에게 부탁해 왔다.
그것이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행동인지 알면서도 신월은 차라리 그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재물을 바란다면 금괴를 쥐여 주면 된다. 건강한 몸을 원한다면 약재를 건네주면 된다.
그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은 신월에게는 너무나 간단했고 또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잇속을 드러내는 인간은 다루기 쉬웠으나 반대로 그러지 않는 인간은 대하기 힘들었다.
몇천 년의 세월 동안 만난 인간들 중 그러지 않은 인간은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두 명이 되었다.
멀뚱히 서 있는 신월을 향해 여원이 걱정스레 물었다.
“……제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이것 또한 핏줄의 영향인가. 순간 스쳐 지나가는 문아의 잔상을 애써 지우며 신월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니, 가지.]
여원은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그를 살피다가 앞에 있는 검은색 더미를 보고 흠칫 놀랐다.
제법 크게 놀란 탓에 신월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 쓰레기구나…….”
여원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가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반쯤 그의 품에 기대 있던 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비가 오면 그것들이 조금 더 잘 보이거든요.”
[잡귀를 말하는 게냐. 네게 해를 끼치지는 못할 텐데.]
“그렇죠, 저도 알고는 있는데……,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여원이 힘없이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쓰레기인 것을 확인하고도 본능적으로 더미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비를 싫어하느냐.]
“좋아하지는 않아요. 하늘이 어두컴컴하고 습하기도 하니까.”
여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으나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래도 오늘은 별로 안 보이네요. 더 무서운 게 옆에 있어서 그런가?”
부러 잘하지 않는 농담까지 던지는 것이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발악처럼 보였다.
이전에 한번 밀어 버렸으니 잡귀야 보이지 않겠지만 비를 싫어한다라.
[흐음.]
신월이 뭔가를 고민하는 듯 숨을 길게 내리쉬더니 또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럼 그치게 하면 그만이지.]
그가 멈춰 선 자리에서부터 청록색의 빛들이 그의 주변으로 퍼지더니 한데 모여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하늘로 떠오른 청록색의 빛 주변으로 먹구름이 빨려 들더니 이내 초신성이 폭발하듯 펑 하고 사라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먹구름에 가려진 달과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서 신월이 싱그럽게 웃었다.
달빛 아래에 선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비쳤다.
[또 무엇을 해 줄까?]
자연을 단숨에 뒤바꿔 놓고도 신월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을 선물한 것처럼 태평하기만 했다.
이 강력한 존재 앞에서 여원은 그저 넋을 놓고 있다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요.”
몇 초간 신월을 쳐다보던 여원은 체념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신월이 들고 있던 우산을 뺏은 뒤 탁탁 물기를 털어 냈다. 약간의 신경질이 묻어나는 손짓에 신월이 의아하게 물었다.
[기쁘지 않니?]
그의 물음에 우산 물기를 털어 내던 여원이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봤다.
“기뻐요.”
[전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네, 사실 별로예요.”
냉소적으로 대답하며 우산을 접자 신월이 재차 물어 왔다.
[비가 싫다 하지 않았느냐.]
“싫어요. 하지만 그 전에 신월 님이 괜히 힘을 쓰는 것도 싫다 했죠.”
그새 바뀐 존칭에 신월이 눈썹을 까딱였다. 그러든 말든 여원은 우산을 접으며 투덜거렸다.
“저를 위해서 비를 그치게 해 주신 거 알아요. 하지만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제게 뭘 해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도 그걸 바라지 않고요. 그러니까 고맙다고는 하지 않을 거예요.”
여원이 잠깐 숨을 돌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쳐다봤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신월 님이 무리하는 게 싫어요. 안 그래도 되니까 힘쓰지 마세요.”
거기까지 말을 한 여원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제게 내민 작은 손을 보던 신월은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무리? 무리하지 말라고? 난생처음 듣는 말에 잠시나마 머리가 멍해졌다.
물론 큰 도술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하지만 신월은 힘겨워하는 티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술을 많이 쓰면 잠에 드는 것 때문에 그런 건가? 하지만 여원의 앞에서 잠든 모습을 보인 것은 단 한 번이었다.
인간의 사고는 이따금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신월이 홀린 듯 손을 마주 잡자 여원이 힘 있게 잡아끌었다.
“인간의 모습일 때는 그냥 편하게 있으셔도 된다고요.”
단호한 어투와 달리 걱정이 배어 나왔다.
자신을 이끄는 여원의 자그마한 등을 보던 신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