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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170화


169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강렬한 목소리와 함께 등 뒤로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그와 동시에 부족했던 도력이 단숨에 증폭되기 시작했다. [홍, 홍실?! 여, 여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요?!] [너야말로 미쳤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앙칼진 목소리에 청실이 움찔거리다가 슬금슬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청실이 헛숨을 들이켰다. [홍실……, 웁니까요?] [그래! 한스러워서 운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네가 뭔데 목숨을 걸어! 어? 그냥 항상 하던 것처럼 구석에 짜져 있을 것이지! 내가 왜, 왜 연리화한테 붙었는데! 내가 무슨 마음으로 걔한테 간 건데!]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올라간 눈에 옥구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네가 바보처럼 웃으면서 살기를 바라서……!] 씨근덕거리던 홍실이 결국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꼴이, 꼴이 이게 뭐야아아아……. 흐어엉…….] 귀 한쪽은 없고 꼬리도 이미 반은 악귀들한테 갉아 먹혀 있었다. 이빨과 발톱도 전부 뽑혀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성한 곳을 찾는 게 더 찾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청실의 모습에 홍실은 그간의 설움을 전부 터트렸다. [넌 항상 그 모양이야! 눈치가 없으면 용기라도 없든가! 왜 무모한 건데! 왜 위험한 곳에 나서는 건데! 왜, 왜, 왜!] 화를 내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청실은 알 수 있었다. 예전의 홍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왜, 왜 이렇게 착한 건데에…….] 홍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청실은 옛날부터 그랬다.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뺏겨도 바보처럼 헤헤 웃었고, 굴에서 제일 추운 곳으로 밀려나도 찍소리 못 했고, 설익은 자두 따위를 따려다 다쳐도 아픈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멍청하고 모자란 청실은 기어코 덫에 걸렸을 때도, 무리가 그를 외면할 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도리어 홍실을 위로해 주었다. [좀 덜 착해도 되잖아……. 이런 일에는 좀 내빼도 되잖아…….] 홍실이 몸까지 들썩이며 서럽게 울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청실이 멍청하지 않다는 것쯤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미련할 정도로 착할 뿐이었다. 사냥감을 뺏긴 게 아니라 다친 동료를 위해 내주었던 것이고 제일 추운 곳에서 자는 것도 동료들이 푹 잘 수 있도록 입구 쪽에서 자기를 자원했던 것이며, 설익은 자두는 홍실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었기에 따러 올라갔던 것임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덫에 걸린 것도 다 자신 때문이었다. [흑, 미안, 미안해. 그날 그 길로 가자고 고집부려서 미안해…….] 눈이 많이 오던 그날, 빠르게 산을 넘기 위해 인간들의 길을 가로질러 가자던 홍실의 판단을 청실은 말렸다. 인간들의 길에는 덫이 있으니 가지 말자며 말이다. 하지만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려 덫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홍실은 조금이라도 빨리 다음 굴에 도착하고 싶어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사고는 언제나 안일함에서 기인한다. 눈에 가려 보이지 않던 덫을 결국 홍실이 밟아 버리고 만 것이다. 철컹거리는 소리에 몸이 굳은 홍실과 달리 청실은 재빠르게 몸을 날려 홍실을 밀어 내고 자진하여 덫에 걸렸다. 뾰족한 쇠창살이 청실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광경에 홍실은 넋이 나갔다. 청실은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아무런 책망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와주려는 홍실을 밀어 내며 어서 가라고 독촉하기까지 했다. 우두머리의 실수가 드러나면 동료의 신뢰를 잃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무리에서 쫓겨날 것이다. 청실은 그것까지 우려하여 동료들에게 자신의 실수라고 말하며 홍실의 잘못을 덮어 주기까지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홍실을 물끄러미 보던 청실은 달래듯 눈가를 핥아 주었다. [괜찮습니다요. 결국, 홍실은 끝까지 청실의 곁에 있어 주지 않았습니까요. 홍실은 다정하고 상냥한 청실의 자랑스러운 누이입니다요.] 그는 이빨이 없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헤 벌리고 웃었다. 입가가 붉어지고 온몸에 피가 나도 청실은 웃는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강하고 눈이 부셨기에 홍실은 그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한 청실의 온기가 느껴졌다. [홍실, 이만 나가는 겁니다요. 이곳은 위험합니다요.] [……너 두고는 안 가.] [홍실, 제발……. 청실의 마지막 부탁입니다요…….] 마지막이라는 말에 홍실이 턱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두 개의 심장 소리가 서서히 맞물렸다. 도력의 흐름이 겹쳐지자 단숨에 힘이 증폭되어 악귀들이 빛에 밀려 나갔다. [그 인간을 살리고 싶은 거지?] 그 말에 청실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네 도력으로는 무리야. 내가 도력을 보탤 테니 경문을 외워.] [하지만 여기 있다가는 홍실도…….] [네가 그랬잖아.] 점층적으로 커지는 빛의 무리에 홍실의 꼬리 끝이 파스스 흩어져 갔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활짝 웃었다. [이제 떨어지지 말자고.] 그 말에 청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이 달싹거렸으나 홍실이 촉촉한 코끝을 맞대며 느릿하게 문질렀다. [이번에도 함께해 줄게. 너는 내 하나뿐인 오라비고 나는 네 자랑스러운 동생이니까.] 청실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툭 떨어졌다. [우린 둘도 없는 가족이잖아.] [……응.] 보드라운 털의 결이 느껴졌다. 똑같은 온기가 전해져 발끝까지 따뜻함이 퍼졌다. 두 여우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끝까지 함께입니다요.] 더는 고통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해지는 것은 맞닿은 서로의 온기뿐이었다. 이젠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다시 한번 아까와 똑같은 주술이 시작되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빛무리들이 그들의 주위를 둥글게 감쌌다. * 몸이 가벼웠다.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무의 공간에 떠 있는 기분에 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조용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깊은 바닷속에 하염없이 잠겨 가는 느낌을 만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해서 좋았는데. 평온한 휴식을 방해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어서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귓가에 왁!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인가안!] “으앗!” 소스라치게 놀란 여원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제 배 위에 누워 있는 청실과 눈이 마주쳤다. “청실?” [잠꾸러기를 깨우러 왔습니다요!] “뭐?” 너무 놀란 나머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원은 반사적으로 청실을 껴안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얗고 넓은 공간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는 잠들기 전의 일을 빠르게 더듬었다. 몇 초 후, 여원은 사색이 되어 청실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돌아가!” 의식이 끊기기 전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 넣은 것부터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둔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청실은 뾰족한 주둥이를 더 길게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싫습니다요.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신월 님한테 돌아가는 겁니다요. 인간은 거짓말쟁이!] 청실이 흥 하며 고개를 팩 돌렸다. 여원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실 안 죽은 건가? 아냐, 분명히 죽었는데. 그럼 눈앞의 청실은 뭐지? 얘가 왜 여깄지? 여원이 혼란에 잠긴 사이 청실이 폴짝 뛰어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소곳이 앉아 눈을 깜빡거렸다. [인간, 밖에는 신월 님이 있습니다요. 인간이 쓰러지고 신월 님이 엄청 슬퍼했습니다요.] “……나 죽은 게 맞는 거야?” 청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여원은 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이어 물었다. “그럼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인간이 잠꾸러기니까 청실이 데리러 온 겁니다요.] “데리러 왔다니?” [길게 설명하진 못합니다요.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 왜?” 그 순간, 옆에서 여원의 무언가가 옆구리를 가격했다. 욱신거리는 아픔에 옆구리를 부여잡고 아래를 보니 홍실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아 거 쫑알쫑알 말 많네! 가라면 좀 가!] “아윽, 홍, 홍실?” [홍실, 인간은 연약하니 쫌만 살살…….] [연약은 개뿔, 얘 2천 년 산 구미호들을 가지고 논 애야. 어지간한 담력이 없으면 그렇게 못 하지.] 대체 이게 뭔 상황이야? 혼란에 물든 얼굴로 둘을 내려다보던 여원이 제 볼을 꼬집었다. 피부가 늘어나는 감각이 선명했다. 따끔따끔했다. “이게 뭔…….” 홍실이 그런 여원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야, 뻘짓 다했으면 가라. 우리도 갈 거니까.] “아까부터 자꾸 어딜 가라는 거야? 너네는 어딜 간다는 거고!” [어디긴, 밖에서 난리 치고 있는 네 여우한테지.] 그 순간 바닥이 진동했다. 어디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여원이 고개를 젖혔다. 새하얀 천장에서 물줄기가 툭 떨어져 뺨에 닿았다. [봐, 너 찾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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