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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화


8화 고요한 새벽, 모두가 숨죽인 시각. 테즈만이 탄 차는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차창 밖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피곤이 물밀듯 밀려왔다. 오늘따라 유독 바빴다. 음지의 돈들을 양지에 나오게 하려면 그만큼 복잡했다. 중국과 유럽 이곳저곳에 투자해야 했고 적당한 때를 노려 회수해야 했다. 오늘은 그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고. 마지막에는 중국 쪽에 정보를 넘기던 배신자들도 처단했다. 평소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 테즈만이었지만 오늘따라 몸이 늘어졌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뒷좌석 시트에 몸을 기댄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눈만 감고 쉴 요량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의 휴식을 망쳐놓기에 충분했다. 한수아. 멈출 수가 없었다. 의지대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고 있으면 불쑥 떠올랐다. 목이 탔다. 그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 생긴 갈증이었다. 아마도 기어이 그녀를 제 밑에 두고 울리고 달래야 이 갈증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입을 뗐다. “성당으로 가.” 그의 한마디에 운전사는 망설임 없이 핸들을 돌렸다. 뒤따라오던 차들도 덩달아 유턴을 했다. 테즈만이 손목에 찬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짧은 시침이 2시를 가리켰다. “세 시간 정도면 되려나.” 수아가 새벽 5시쯤 성당의 문을 연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세 시간 후에는 그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몸을 잠식했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당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차가 멈추어 섰다.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차창 너머로 보이는 성당으로 향했다. 봄임에도 쌀쌀했던 밤공기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돌길 사이로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 움튼 새싹들이 이제는 비죽비죽 돋아났다. 며칠 내내 잠을 설쳤던 탓에 지난 밤에는 푹 잠든 탓일까. 수아의 낯빛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덩달아 기분까지도. 잠겨있던 성당의 문을 연 수아가 그녀가 기도할 때 항상 앉는 자리로 향했다. 그녀가 아침마다 하는 기도의 내용은 비슷했다. 신께 감사 인사와 아네스 수녀와 보육원 아이들을 잘 보살펴달라는 부탁이 주였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제게 선악과 같은 그를 회개하게 하고 좋은 길로 이끌게 도와달라는 것. 어쩌면 교리에 어긋날 수 있는, 수녀가 될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르는 기도였지만 이렇게나마 해야 했다. 지금 수아가 가진 감정의 동요가 오직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긴 기도가 끝나고 성호경을 그으며 수아가 눈을 떴다. 빈첸시오 신부가 오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했고 그동안 성당을 청소하는 건 그녀의 일과 중 하나였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수아가 청소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려던 때, 닫혀있던 성당의 문이 열렸다. 어스름하게 들어오는 빛을 등진 채 걸어오는 남자. 남자를 보자마자 차분했던 수아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수녀님.” 제자리에 굳어진 채 서 있는 수아를 향해 다가온 그가 그녀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가 걸친 블랙 재킷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엷게 풍겼다. 수아는 단번에 눈치챘다. 그가 지금 무얼 하다 왔는지. 제 앞에 선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던 수아가 천천히 입을 뗐다. “... 혹시 말이에요.” 태연하게 사람의 머리에 십자가를 꽂아 넣을 때부터 느꼈던 감정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 많이 나쁜 일 해요?” 나쁜 일이라니. 순진하고도 귀여운 질문에 테즈만이 픽 실소를 흘렸다. “나쁜 일?” “네.” “수녀님이 생각하는 나쁜 일이 뭘까?” 비스듬히 기울인 채 수아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궁금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나쁜 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러면서도 덜컥 겁도 났다. 아무래도 저 조그만 머리통에 든 나쁜 일이라는 수준이 제가 벌인 일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까 봐. “그러니까... 음, 사람을 때린다거나 싸우는 일 같은...” “비슷하네요.” 고작 때리는 걸로 그칠 리가 없지만. 수아가 멈칫하며 그를 향해 물었다.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수아의 눈빛에 물든 감정은 공포가 아닌 걱정이었다. “오늘도 그런 일을 한 거예요?” 네. 중국에 정보를 넘긴 배신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어 주고 왔어요. 라고 답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테즈만은 참기로 했다. 겨우 풀어놓은 경계의 벽이 다시 견고해지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대답 없는 그를 응시하던 수아가 다시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다쳤나요?” “날 걱정하는 거야?”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은 신께서….” “우리 수녀님은.” 천천히 손을 뻗은 그의 손이 수아의 볼로 향했다. 멈칫하는 그녀의 볼을 천천히 감싸 쥔 커다란 손에서 작열감이 느껴졌다. “참 친절하기도 해라.” “하…. 테즈만.” 가냘프게 숨을 내뱉는 수아의 볼을 그의 손이 천천히 쓸어내렸다. “방금까지 기도했어요?” “... 네. 그러니까 그만···.” 그가 수아의 볼에서 손을 떼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이 작은 손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위해 기도해준다면 엄청 흥분될 거 같은데.” 그가 입술을 내려, 수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잠깐….” 손등 위에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수아가 잡힌 손을 빼려던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느릿하게 시선을 올린 그가 수아를 마주 본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날 구원해줘, 수녀님.” 위험했다. 매일 그만 시험에 들라고 기도했건만 그의 유혹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수아가 입을 뗐다. “구원은... 신께서...” “내 구원은 당신인데.” 겨우 내뱉은 거부의 말도 단숨에 삼켜졌다. 어쩔 줄 모르는 수아를 응시하는 테즈만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혼란스러움과 동요. 그가 원하는 결말이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을 선택하기를. 잡고 있던 수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따스했던 온기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이 당황스러운 건지 수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오늘은 이만 가죠. 내 기도는 충분한 것 같아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멀어지는 테즈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아의 눈동자가 혼탁했다. 뱀처럼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서는 마음과 머리를 헤집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결국 남은 것은 어지러운 마음뿐이었다. 언젠가 아네스 수녀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누구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고 봉사해야 한다고. 구원은 저라던 테즈만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아네스 수녀의 말처럼 그를 구원하기 위해 손을 내민다면, 결말은 뻔했다. 잡아먹히고 말리라. 이미 선을 넘을 대로 넘어서는, 고해성사로도 부족한 제 죄를 여기서 더 늘릴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수아의 선택은 하나였다. 잠시나마 마음을 비울 때까지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 기도하듯 두 손이 저절로 모였다. 하지만 그녀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곱게 포개진 손등 위로 시선이 멈춰 있었다. 정확하게는 테즈만이 입술을 내려찍은 곳으로. 수아가 멍하게 손등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성당 문이 열리며 빈첸시오 신부가 등장했다. “수-아. 오늘도 일찍 나왔네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다가오는 빈첸시오 신부를 보자 수아는 테즈만이 입을 맞춘 손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아, 빈첸시오 신부님. 좋은 아침입니다.” “마침 수-아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이요?” “저희 성당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주시겠다는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기부금이요?” 워낙 작은 성당이기에 다른 성당들과 달리 궁핍했다. 수아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낡은 성당 의자를 두고 보지 못해 자발적으로 니스칠했을 정도였다. 성수대 십자가는 빈첸시오 신부의 마지막 남은 지참금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성당 기부금은 메마른 땅에 빗방울이 쏟아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네. 성당과 저희가 묵고 있는 수도원을 수리하게끔 도와주신다고 하더군요.” “정말요? 드디어 저희 낡은 의자를 바꿀 수 있겠어요.” 수아가 활짝 웃자 빈첸시오 신부도 덩달아 웃어 보였다. “수-아가 우리 성당에 오고 난 뒤로 좋은 일들이 많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인사를 하고는 성당 밖으로 나가려던 수아의 발길이 빈첸시오 신부의 말에 멈췄다. “참, 그분이 수-아 이야기를 하더군요.” “네?” “기부금을 내주시겠다는 분 말입니다. 우연히 성당을 오게 되었는데 수-아가 친절하게 성당을 안내해줬다고 말입니다.” 성당을 안내해줬다고? 수아가 기억을 더듬었다. 성당에 온 뒤로 누군가를 안내한 적은 손에 꼽았다. 워낙 작은 성당에다가 관광지도 아니었기에 동네 사람들만 이용하는 성당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생각에 잠긴 수아를 향해 빈첸시오 신부가 말을 이었다. “아, 그분 성함은 테즈만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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