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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화


30화 차분한 분위기의 클래식 음악이 레스토랑을 가득 채웠다. 텅 빈 좌석들 사이로 이상하게 오직 한 테이블만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 그 소리에 백금발의 늙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카리스마 있는 외모를 가진 늙은 남자의 눈빛은 금색이었다. 그것도 테즈만과 똑같은 호박색에 가까운 금색. 그는 유럽을 쥐고 있는 마피아 대부 중 하나이자 명망 높은 파바드 가문의 주인. 미켈레 폰 파바드였다. “앉아라.” 미켈레의 말에 마테오가 조용히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마테오가 앉자마자 미켈레가 손을 들더니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먼발치에서 대기하던 그의 비서인 루카가 다가섰다. 말없이 제 등 뒤에선 루카를 향해 미켈레가 말했다. “테즈만은.” “조금 전에 저택에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미켈레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수프라도 먼저 먹어야겠어. 늙으니 배고픈 걸 못 참겠구만.” 루카가 주방 쪽을 향해 눈짓하자 안에 있던 주방장이 냉큼 수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켈레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두 아들과 밖에서 식사를 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럴 때마다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고는 했다. 주방장이 직접 수프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미켈레 님께서 좋아하시는 트러플과 아스파라거스를 메인으로 만든 수프입니다.” 바짝 긴장한 주방장과는 다르게 미켈레가 앞에 놓인 수프를 향해 느긋하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음, 괜찮군.” 그제야 바짝 긴장했던 주방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루카가 주방장을 향해 주방으로 돌아가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자 주방장이 냉큼 주방으로 발을 움직였다. 30년을 가까이 미켈레를 보좌한 루카는 이제 척하면 척이었다.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루카가 미켈레 등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미켈레가 고개를 들고는 마테오를 향해 턱짓했다. “먹거라.” “네.” 마테오가 숟가락을 들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한들 보스였다. 그렇기에 마테오는 미켈레가 어려웠다. 정작 테즈만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지만. 그렇기에 이런 식사 자리에 지각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마테오가 수프를 한입 떠먹던 찰나였다. “루카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던데 말이지.” 재미난 이야기. 두 가지 뜻이었다. 정말로 재미난 일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재미있어 질만큼 화가 난 것인지. 미켈레의 말이 전자인지 후자인지 마테오가 가늠하던 때였다. 미켈레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난 또 테즈만이 게이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하도 여자를 돌처럼 보기에.”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자니 확실히 후자는 아니었다. “마테오.” “네, 아버지.” “테즈만에게 여자가 생겼다면서?” 마테오도 아는 사실을 미켈레가 모를 리 없었다. 파바드 패밀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숨겨도 미켈레 귀에 다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있는 것 같습니다.” 마테오의 말에 다시금 미켈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야, 다행인데... 그 상대가 말이지.” 조금 전까지 웃음이 가득했던 미켈레의 표정이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동양인 수녀라고 했나?”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미켈레가 동양인 여자라면 질색하는 이유는 테즈만의 생모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 한국 혼혈이었던 그녀는 혼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동양인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외모가 특이해서 미켈레가 끌린 것도 있었지만. 매춘을 하던 그녀가 위험해 처한 것을 구해준 걸로 시작해서 연인이 되었다. 미켈레는 부인이 있었지만 테즈만의 생모에게 흔들렸고 결국 테즈만까지 낳게 되었다. 그런데 테즈만의 생모는 점차 많은 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부인을 죽이고 절 옆에 앉히라는 소리는 물론이고 미켈레가 가져다준 돈을 모두 술과 마약으로 펑펑 써버렸다. 나중에는 정신까지 나가서 걸핏하면 갓난아기였던 테즈만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했다. 참다못한 미켈레의 부인이 카포들을 시켜 그녀를 죽였지만.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고 테즈만의 생모이니 장례도 치르고 무덤도 만들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테즈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악행이 너무나도 강렬했고 소름 끼쳤기에. 그 후로 미켈레는 동양인 여자만 보면 테즈만의 생모가 생각나서 꺼리기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봐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썩 좋은 기억이 아니니까. 그런데 테즈만이 동양인 여자를 만나다니. 아무리 피는 못 속인다고 하지만 미켈레에게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수녀였다. 신을 섬기며 독신으로 수도하는 여자. “내 아들들이니 범상치 않다는 것은 잘 알지만, 너나 테즈만이나 내 생각 이상이야.” 미켈레가 혀를 내둘렀다. “수녀라니. 그래서 그 수녀님은 정말 테즈만의 저택에 있는 거냐?” 미켈레의 물음에 마테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는 수녀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니 수도원을 나온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나올 수가 있나?” “알아보니 아직 종신 서원을 받기 전, 수녀라고 합니다. 완전한 수녀는 아니니까 절차가 빨랐던 것 같고요.” 미켈레가 스푼을 들어서는 수프를 가득 떴다. “그런데 포기하고 테즈만을 선택했다?” 입 안 가득 수프를 집어넣고는 음미하던 미켈레의 표정이 묘했다.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으냐.” 마테오가 먼저 나섰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질문이었다.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으며 마테오가 입가를 휘었다. “생각보다 더 순진하더군요.” 순진하다 못해서 아무것도 때 묻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더럽혀주고 싶은 가학심이 생길 정도였다. “수녀라서 그런 거겠지. 세상과 단절한 채 수행하는 사람들이니 때가 덜 묻을 수밖에. 테즈만은, 어떤 것 같으냐.” “진심이냐, 아니냐를 물으시는 거라면.” 마테오의 입가가 매끈하게 휘었다. “상당히 진심인 것 같습니다.” 의외라는 듯 놀라는 미켈레가 입을 열려던 찰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식당 안에는 루카와 주방장, 미켈레와 마테오 밖에 없었다. 식당 밖으로는 그들을 엄호하는 수많은 카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느긋하게 걸어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테즈만.” 미켈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마테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죽음의 사신이라도 되는 양 셔츠까지 블랙 셔츠인 테즈만의 얼굴이 무척이나 서늘했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마테오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두 사람이 앉은 식탁 앞에 테즈만이 섰다. “오랜만이네요, 아버지.” 미켈레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의 시선이 마테오에게 향했다. 제 저택을 찾아와서 뒤집어 놓고는 태평하게 식사라니. 어이가 없었다. 테즈만이 조소 띤 얼굴로 마테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 그가 마테오를 형이라고 부를 때의 공통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지 않다는 것. “수프를 좀처럼 못 먹네.” 마테오 앞에 놓인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서는 다시 마테오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좀 먹여줄까.” 그 말을 끝으로 테즈만이 그대로 마테오의 뒤통수를 잡고는 수프 접시에 얼굴을 처박았다. 쾅-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식탁이 진동했다. 놀라서 뛰어온 루카가 식탁 상황을 보며 멈칫했다. 정작 미켈레와 마테오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마테오의 뒤통수를 잡았던 손을 떼며 테즈만이 입을 뗐다. “다시는, 내 것에 손대지 마.” 처음이었다. 테즈만이 마테오에게 이렇게까지나 적의를 보인 적은. “다음에는 수프가 아니라 변기통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이윽고 태연한 표정으로 테즈만이 미켈레를 바라보았다. “오늘 식사 자리는 제가 망쳤으니 다음 식사는 제가 잡겠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좋아할 만한 음식으로 말이죠. 그러니 이만 전 가보겠습니다.”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돌아서는 테즈만을 바라보던 미켈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고개를 든 마테오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냅킨을 집어 들고는 얼굴을 닦아냈다. “수프에 얼굴을 처박히는 건 처음인데.” 오히려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수프를 맛보는 마테오를 보며 미켈레가 말했다. “마테오, 네 말이 정말인 듯하구나. 테즈만이 그 여자에게 진심이라는 것이.” 저렇게까지나 화를 내며 제 것을 지키려고 하는 테즈만을 보자 미켈레는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제 아들을 저렇게 변화시킨 건지. “루카.” 미켈레의 부름에 루카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네, 보스.” “말은 저렇게 해도 저 녀석이 레스토랑을 예약할 리가 없으니 내가 다시 잡아야겠어. 이번에는 아시안 레스토랑으로. 어떤가?” 아시안 음식이라는 소리에 루카는 눈치챘다. 다음 식사 자리는 세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아마도 다음 식사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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