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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5화


5. “어, 어디 가셨지?” 초소에 되돌아온 하임은 숨을 채 고르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주변을 살폈다. 달음질하느라 가빠진 숨이 목구멍에서 거칠게 꿀렁였지만, 눈앞의 광경이 그 숨을 단숨에 멎게 했다. 좀 전까지 남자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가진 소쿠리와 더럽혀진 귀마개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을 빠르게 굴리던 하임은 산개하듯 흩뿌려진 핏자국을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난투가 일어났음을 알리는 여러 흔적들이 서로를 고발하듯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그새 뒤쫓아 온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듯싶었다. ‘이럴 수가…….’ 도망쳤을까? 아니면 잡혀갔을까? 그 성치 않은 몸으론 몇 발짝 걷기도 힘드실 텐데. 최악의 상상에 붙들린 하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갑자기 허공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냄새도 퀴퀴한 먼지 냄새도 훨씬 더 선득하게 느껴졌다. “하임아, 누구 찾아?” 어리둥절한 낯으로 뒤따라 들어온 삼동이가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피다.” 삼동이는 잠시 굳었다가 이내 하임을 등 뒤에 세운 채 유심히 흔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내버려두고 바깥으로 뛰쳐나간 하임은 가만히 멈춰 선 채로 두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찜찜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 보고자 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모든 소리를 덮어 버리는 듯했지만 하임은 익숙한 방식으로 자신의 귀를 열었다. 바늘 끝으로 세공하듯, 단 하나의 감각에만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먼 곳에서 떨어지는 이슬의 미세한 파동, 능선을 휘도는 바람의 낮은 울림, 낙엽 사이를 헤집는 작은 벌레의 사각임. 그녀는 일상적인 소리들을 하나하나 옆으로 밀어 두듯 배제했다. 익숙한 것, 살아 있지 않은 것, 자연의 연속음을 모두 걷어 내고 제가 찾는 소리만을 좇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 발 아래 땅에서 아주 미미하게 떨리는 듯한 음이 걸렸다. 처음엔 바람이 흙층을 스치는 소리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이내 자연이 만들 수 없는 떨림의 결이라는 걸 알아챘다. 고통을 삼키느라 갈라지는 숨 하나가 땅속의 얇은 틈을 통해 번지는 느낌이랄까. 하임은 설마 하는 심경으로 더 깊이 집중했다. 그러다 마침내 또렷하게 번지는 인간의 목소리를 들었다. “……큭, 하―” “……!” 진득하게 끊어지는 작은 신음은 분명 땅속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흙 아래 어딘가 짓눌린 숨이 벙벙하게 퍼지고 있었고, 머지않아 꺼질 것처럼 미약했다. 하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몇 걸음 걷다가 천천히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헤진 낙엽을 살살 헤쳐 보니 다른 곳과 달리 땅이 무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는 조심스레 귀를 가까이 대 보았다. “……발, 이딴…… 뒤질 줄…….” “헉……!” 아까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기겁하며 움찔, 튀어 오른 하임이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기다. ‘이 아래에…… 그분이 있어.’ 당장 남자가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는 겨우 정신을 붙든 채 다급히 삼동이를 불렀다. * * * 하임은 호신용이랍시고 삼동이네서 삽과 쇠갈퀴를 챙겨 온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시간을 더 허비했다면 남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여, 여기 당장 파 봐야 할 거 같아.” “왜?” 삼동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임이 무언가에 홀린 듯 땅을 파기 시작하자 그녀를 따라 삽을 고쳐 쥐었다. 부지런히 흙을 파내자 웬 커다란 방수포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단단히 묶여 있었고, 표면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임은 떨리는 손으로 천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곧 꺼져 버릴 듯한 숨소리를 감지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사, 살아 있어……!” 묶인 끈을 풀고 버클에 손을 가져가는데 삼동이가 제지했다. “하임이 위험해. 삼동이가 할 거야.” 철컥― 곧 버클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가방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흙먼지에 얼룩진 얼굴이 피 칠갑을 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다.” 삼동이가 이제야 눈치챈 듯 중얼거렸다. 남자의 행색을 보고 군인이라는 걸 유추했는지, 갑자기 삽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총 쏘는 시늉을 했다. “특수 요원. 투두다다다다다―” “…….” “아님 북한 간첩?” “뭐……?” 땅속에서 발견된 남자 때문에 충격이 가시지 않은 하임이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앞날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삼동이 말대로 군인인 척하는 간첩인가 싶은 의심이 잠깐 들었으나, 제게 위험을 경고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던 모습은 분명 선인(善人)의 면모였다. “그건 아, 아닐 거야.” “다시 묻을까.” “…….” “군인이 알면 안 돼. 우리 혼나.” 금지 구역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하임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괜한 의심을 살 테고 벌금까지 물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게 놔둘 순 없잖아.” 의식을 잃은 남자를 살피던 삼동이는 이내 그가 목에 걸고 있던 도그 태그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보통 군번줄과 달리 이름이나 부대명은 없고 암호 같은 이상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근데 RH랑 혈액형은 그렇다 치고, NX는 뭐지……?” 하임은 태그를 손바닥에 얹은 채 글자를 유심히 읽었다. “RESTRICTED…….” 제한, 비공개. 비밀. 그렇다면.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남자에게로 되돌아왔다. 혈색을 잃은 입술은 새파랬고,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삼동아, 이 사람 정말 특수 요원 같은 건가 봐…….” 삼동이도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 중에 제일 센 군인. TV에서 봤어.” “……삼동아, 우리 이 사람 살려 주자.” “그래.” “일단 마을까지 옮겨야 할 거 같아. 업을 수 있겠어?” 괴력의 소유자인 삼동이는 곧 거뜬하게 남자를 등에 업었다. 그를 거들던 중, 하임은 그만 동상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실신 상태였던 남자가 어느새 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슨하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몽롱한 듯 총기를 잃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동공이 뚜렷하게 시선을 맞추며 저를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 오묘한 강렬함에 하임은 마치 블랙홀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저를 휩쓸고 간 기분이었다. 그 순간은 지워지지 않을 장면처럼 그녀의 안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하임아?” 삼동이의 부름에 흠칫한 하임이 뭐라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남자에게로 다시 시선을 되돌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눈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조금 전의 눈 맞춤이 마치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왜 그래.” “아, 아니야.” 헛것을 털어 내듯 고개를 작게 흔든 하임은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남자를 업은 삼동이의 등 한쪽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얼른 옮겨야 해……!” 그렇게 산을 뛰어 내려온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을 피해 폐분교에 남자를 옮겨 놓았다. 마찬가지로 마을 끝자락 산등성이 앞에 자리한 폐분교는 인적이 거의 없어 남자를 숨겨 놓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게다가 삼동이가 자주 폐분교 운동장에서 쑥, 냉이 따위를 캐거나 녹슨 철봉에 매달리곤 했기에, 누군가가 삼동이를 목격한다고 해도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그저 뒷문 옆 창문을 통해 드나든다는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되었다. 그렇게 남자를 데려온 이후, 하임은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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