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28화
28.
-그렇죠. 이렇게 깔끔한 수준이라면, 국가 차원에서 손댄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거 같은데요?
역시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던 거군. 무혁의 손가락이 톡톡, 느리게 움직였다. 신상이라도 파악해 두려던 차에 예상보다 더 흥미로운 정보를 얻었다.
이곳이 민통선 구역이었다는 점에서, 하임의 할아버지는 도망자라기보단 봉인된 인물에 가까웠다. 국가 입장에선 자유를 주되 감시하기 가장 좋은 감옥에 넣어 둔 셈이었다.
간첩, 특수전 요원, 정보부 공작원. 혹은 공식 기록에서 지워진 비정규 전력이나 은퇴한 내부 고위 인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무혁의 눈빛이 냉하게 가라앉았다. 하임이 할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는 의심이나 경계가 없었다. 보호받는 사람 특유의 신뢰, 평범하게 가족을 위하는 모습들을 보아 그녀는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형이 갑자기 웬 노인을 조사해 달라고 해서 의아했는데, 확실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네요.
“‘하루타’라는 놈은.”
-아직입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얼마나.”
-모르겠어요. 풀 네임도 한자도 모르니 추릴 수가 없어요. 출입국 기록만 봐도 ‘하루타’가 수백 명이고요. 국적도 확실치 않아서 특정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특정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라…….”
-그렇다고 또 위험하게 들이대지는 마시고요. 우선은 제 선에서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형은 몸 사려요.
성기는 주말부터 읍내 유통업체 납품 직원으로서 이 지역에 드나들 예정이라고 했다. 현장 요원들처럼 몸을 던져 싸우는 재능은 없지만, 대신 사람들 사이에 스며드는 법을 아는 녀석이었다. 뒤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정보를 모으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위장은 성기의 주특기이기도 하기에 무혁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거 보면 군부와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는 게 분명하니까 그쪽으로 파고들어.”
-그럴게요. 웬만하면 당분간은 마을 밖으로 벗어나지 마세요. 일단, NEXA 내부 상황은…….
무혁은 성기가 전하는 말을 잠자코 귀담아들었다. 현재 성기는 무혁 한정으로 연결된 버너폰(Burner phone; 일회성·단기 사용을 전제로 한 연락 수단)을 사용 중이라 추적 위험은 극도로 낮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연락은 최소화하는 편이 나았다.
무혁은 성기와 다음 접선 약속을 잡는 것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때까지 보조 배터리 용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듯했다.
“…….”
그는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섰다. 초겨울의 밤. 울프독이 움직이기에 이보다 나은 시간은 없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끔 계단을 내려간 무혁은 지난밤에 우연히 발견한 지하로 향했다. 마구 뒤엉킨 채로 쌓인 책상과 의자 뒤엔 전에 보지 못했던 철문이 있었다. 별거 없는 지하실일 테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구조를 파악해 두기로 했다.
버려진 철사를 주운 무혁이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경첩은 녹이 슬어 있었고, 손잡이 주변엔 스크래치가 겹겹이 나 있었다.
그는 서두르는 법 없이 뾰족하게 감은 철사를 구멍 안으로 넣었다. 오직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각에만 집중하며 손쉽게 잠금을 풀었다.
끼이익―
그가 막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
어디에선가 짧은 마찰음이 스쳤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이 공간에서는 과분할 정도로 또렷했다.
소리 없이 손잡이를 놓은 무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은 주변의 공기를 베어 낼 것처럼 오싹한 기세를 풍겼다.
그는 아무런 미동 없이 숨을 죽인 채, 소리가 난 방향으로 감각을 열어 두었다. 인간인지 귀신인지 모를, 이질적인 무언가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공기가 갑자기 멎었다. 눅눅하게 깔려 있던 지하의 냄새가 끊기듯 사라지고, 한층 더 스산해진 기류가 무혁을 에워쌌다.
지하실과 1층을 잇는 계단을 천천히 오른 무혁이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기척이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문득 삼동이가 언급한 귀신 이야기가 떠오르자 그가 소리 없는 비소를 흘렸다. 정말 귀신인가.
사람이라면 남길 법한 사소한 흔적들이 모조리 빠져 있었다. 체중이 실리지 않는 듯한 발걸음, 저보다 더 오래 어둠에 적응한 듯한 기묘한 움직임.
귀신이라 부르기엔 너무 계산적이고, 인간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정제된 기척이었다. 낯설면서도 동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나를 죽이고자 한 새끼가 기어이 저를 찾아낸 것인가.
“…….”
허리 뒤를 더듬던 무혁이 칼 손잡이를 쥐었다. 칼날이 뽑히는 소리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히 움직였다.
왼쪽 대각선 뒤로 다가오는 그것과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15미터, 10미터, 5미터, 3미터. 그리고.
휙―
상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순간 무혁이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시작부터 끝을 보겠다는 판단이었다.
무혁의 몸이 낮게 튀어 오르며 칼날이 반원을 그렸다. 목덜미와 쇄골 사이의 급소를 노리는 몸놀림이 재빨랐다. 그러나.
딱―
금속이 아닌, 단단한 무언가가 칼의 궤적을 비틀어 막아 냈다. 가벼운 충격이 손목을 타고 올라오자 무혁이 실소를 흘렸다. 날 막았다?
이내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상대의 반격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나무 막대기가 휘둘러졌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쉽게 당할 리 없는 무혁이 반사적으로 손목을 틀어 칼등으로 받아 냈다.
탁―
충돌음이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밀리지 않은 무혁은 곧바로 발을 내디디며 안으로 파고들었고, 상대는 한 박자 늦게 물러섰다.
휘익― 탁― 탁― 휙―
짧고 거친 공방이 몇 차례 더 오간 뒤에야 두 형체가 동시에 멈췄다.
“…….”
“…….”
칼끝과 막대기 끝이 서로를 겨눈 채, 여차하면 적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을 듯한 거리.
무혁은 그제야 상대의 형체를 완전히 포착했다. 약간 굽은 듯하지만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 불필요한 힘이 빠진 어깨. 체중은 뒤꿈치가 아니라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게 발바닥 중앙에 실려 있었다.
주름진 손등엔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막대를 쥔 손목은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상대의 관절을 끊어 놓을 수 있는 궤적 위에 놓여 있었다. 노쇠했을지언정 녹슬지 않은 기세와 감정이 철저히 제거된 눈빛.
무혁의 입매가 차갑게 뒤틀렸다. 묻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 손을 뒷짐 진 채, 고작 한 손으로 저를 막아 낸 노인이라면 누굴지 뻔했다.
“임봉주 영감님.”
“…….”
“마침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뵙는군요.”
노인은 경계도 놀람도 분노도 없이 오직 무혁의 얼굴을 뇌리에 새겨 박듯 응시했다. 늙었다는 사실 따윈 약점이 되지 않을 듯한, 충분히 치명적인 노익장이었다.
무혁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눈앞의 노인에겐 그 어떠한 연기도 통하지 않으리란 걸 예감했다. 이미 저를 파악한 것 같은 시선에 묘한 흥미가 피어올랐다.
“아픈 사람치고는 상당히 건장해 보이십니다. 듣던 것과 다르게.”
“…….”
“속일 사람이 없어서 본인 손녀를 속이시나.”
비딱한 태도에도 봉주의 낯빛은 무덤덤했다. 그저 무혁을 빤히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무언의 결론을 내리는 듯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인 건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나서였다.
“니놈이었구먼.”
“…….”
“우리 순진한 강아지 꼬셔서 날 팥 똥 싸게 만든 새끼가 니놈이었어.”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에 무혁의 눈썹이 사납게 추켜 올라갔다. 노친네가 치매에 걸리기라도 했나.
나무 막대기로 무혁을 겨냥하고 있던 봉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무혁은 경계를 놓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노인의 몸이 이완하고 나서야 뒤이어 손을 물렸다.
“니놈은 정체가 뭐여.”
“…….”
“뭔 개수작으로 우리 하임이한테 접근한 건지 불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뒤지고 싶지 않으면.”
“말은 바로 하시죠. 제가 아니라 임하임 씨가 먼저 저한테 접근한 겁니다.”
피식, 웃은 무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영감님이야말로 정체가 궁금하군요. 무슨 이유로 과거는 싹 다 지우고 이 마을에 숨어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