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49화
49.
“그놈들에겐 그런 비정상적인 것들이 병이 아니고 능력이여. 그러니 탐이 나서 찾으러 온 게지.”
봉주는 총 한 자루를 손질하며 이제껏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I.D.C는 인간을 볼 때 개체로 안 봐. 혈통으로 보지. 실험체가 하나의 사례가 아니라, 이어질 수 있는 계통인지부터 따지는 놈들이라는 거여.”
무혁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아른거리는 양초의 불빛이 주름진 얼굴의 굴곡을 깊게 파고들었다.
“부모에게서 나온 특성이 우연이 아니라면 그다음도 가능하다고 믿는 놈들이여. 한 명을 고쳐 쓰는 것보다 같은 조건을 반복해서 대체품을 만들 수 있으면 훨씬 효율적이니께. 실패해도 남는 거고, 성공하면 그대로 양산이여.”
“…….”
“그래서 놈들은 하임이 엄마를 놓지 않았고, 그다음으로 하임이를 본 거여. 니도 알다시피 하임이가 소리를 듣는 방식이 정상이 아니잖여. 놈들 눈에는 그게 결함이 아니라 방향이 될 것이여. 조금만 손보면 무기가 될 수 있을 테니께.”
봉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
“하루타는 아직 하임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러. 그놈은 하임이를 보고 온 것이 아니라 하임이 엄마의 흔적을 쫓아온 거여.”
“앞으로도 하루타가 하임 씨를 모르게 하면 되겠군요.”
“한 번만 막아선다고 끝날 일이 아니여.”
봉주의 시선이 무혁을 곧게 꿰뚫었다.
“놈들은 쉽게 포기 안 혀. 하임이를 찾으러 온 게 하루타가 처음이 아니란 뜻이여.”
“…….”
“한 번 ‘계통’으로 찍힌 건 끝까지 쫓는 놈들이니 니도 각오부터 단단히 혀.”
“그래서 하루타를 죽이지 않으신 거였군요.”
하루타를 죽이면 또 다른 이가 올 확률이 높기에, 차라리 망가트린 채로 두고 시간을 끌려는 계획이었던 듯싶었다.
“이제 내 기력이 예전만큼 못 하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여. 그래도 내 손녀를 위해서라면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죽기 살기로 이 총을 휘두를 테니께 약골로 보지 말어.”
“저 또한 각오는 이미 끝났습니다.”
무혁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를 식혔다. 감정이 앞서면 판단이 흐려진다는 걸 오래전부터 몸으로 배워 온 터였다. 대신 서늘한 침전물처럼 가라앉은 무언가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천천히 응고되고 있었다.
혈통이니 계통이니 하는 말들은 그의 기준 밖의 논리였지만, 누군가가 그 이유로 하임을 노린다는 사실만으로 분노하기 충분했다.
“I.D.C든 청명국이든 저도 끝까지 상대할 겁니다. 죽다 살아온 놈으로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경험하게 해 줘야겠군요.”
낮고 건조한 음성이 지하실 공기를 갈랐다. 무혁의 시선이 무기들을 스쳐 지나갔다가 봉주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빛에는 흥분도 과시도 없었다. 다만 되돌릴 생각이 없다는 확신만이 분명했다.
봉주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무혁을 보는 눈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그 매서움의 방향이 달라져 있었다.
“니놈이 그랬지. 널 믿을 수 없다면 독고일재의 손자를 믿어 보라고.”
노인의 말끝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 대답을 지금까지 지켜봐 온 셈이었다. 그는 총을 내려놓고 무혁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젠 물러설 자리도 숨길 이유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말이 허튼소리였으면 진작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여.”
봉주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의심과 경계로 살아온 사람 특유의 신중함이 마지막으로 발목을 잡았다가 이내 놓아주는 순간이었다.
“하임이는 니놈 손에 맡기겠다.”
“…….”
“그러니 앞으로도 지킬 수 없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말어.”
봉주는 그리 말하며 돌아섰다. 등을 보이는 건 그가 무혁에게 허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뢰였고, 말하지 않아도 뜻하는 바를 느낀 무혁은 그가 준 총을 갖고 지하실을 나섰다.
*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나뭇결이 고운 판재 사이로 매립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고, 그 불빛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순간 꿈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임은 한동안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귀를 스치는 소음이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인식됐다.
바람도, 마루의 삐걱거림도, 멀리서 울리는 개 짖는 소리도 없이 공간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아기자기한 풍경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들이, 침대 위에는 색이 과하지 않은 쿠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TV에서나 보던 예쁘고 모던한 벽지에도 시선이 갔다. 그녀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장식처럼 보이는 벽면은 단단한 방음 패널이었고, 문틈 하나까지도 소리를 흘리지 않게 설계된 터였다.
“어?”
손등에 연결된 수액 줄을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컵을 내려놓는 소리마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절제된 움직임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깼어요?”
모습을 드러낸 무혁이 반기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임은 그를 보는 순간 다시 한번 현실감이 흐릿해졌다. 늘 삼동이에게 빌려 입은 옷차림은 벗어 던지고 단정한 맨투맨 니트에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불필요한 장식 하나 없는 깔끔한 옷차림인데도 이상하게 눈을 떼기 어려웠다. 몸에 맞게 떨어지는 선과 여유 있는 태도가 겹치며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두통에 말을 잇지 못한 하임이 이마를 짚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을 겁니다. 무리하지 말아요.”
“……네? 저는 약 같은 거 먹은 적 없는데.”
기억을 더듬던 하임은 잠들기 전에 무혁과 나눈 행위가 고스란히 떠오르자 뒤늦게 얼어붙었다. 그의 것이 제 안을 왔다 갔다하고 연달아 오르가슴을 느꼈던 기억까지.
무혁이 뺨에 홍조가 피어오른 그녀를 더듬듯 훑어보며 덤덤히 말했다.
“이곳으로 데려오기 전에 수면제를 투여했습니다. 안전한 약품이고 몸에 무리가 갈 정도의 양도 아니었으니 걱정할 거 없어요.”
“수면제요? 왜요?”
“왜긴.”
그가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는 하임의 볼을 가볍게 쓸었다.
“오는 길이 하도 시끄러워서 깰까 봐 그랬지.”
“…….”
“이제 하임 씨는 나와 당분간 여기서 지낼 겁니다.”
하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고급스럽게 정돈된 공간의 분위기가 저와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 분명 여담 마을에 있었는데, 잠든 사이에 다른 세계로 옮겨진 기분이었다.
무혁은 낯설어하는 그녀에게 핫초코가 담긴 머그잔을 건넸다.
“마셔요. 컨디션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천천히 구경시켜 줄 테니까.”
“……정말 제가 여기서 지낸다고요?”
하임은 뜨듯한 잔을 받아 쥔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할아버지는요?”
“영감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나중에 모시고 올 계획입니다.”
“할아버지는 안 오셨다고요? 혼자는 힘드실 텐데…….”
“내 동료들이 잘 케어해 드릴 거야.”
“…….”
잔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 설명되지 않은 상황, 그리고 지나치게 침착한 남자. 마음의 준비를 할 틈 없이 맞닥트리게 된 상황이 다소 혼란스러웠다.
“왜. 내가 못 미더워?”
하임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신기하게도 진중한 무혁의 눈빛을 마주하자 따듯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가슴께까지 번졌다.
그가 안전을 위해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으리란 걸 모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선데도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감이 올라오는 듯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망설임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적응할 겁니다. 뭐든 불편한 게 있으면 고쳐 줄 테니 숨기지 말고 말하고.”
하임의 목뒤를 지그시 당긴 그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격하고 거칠었던 지난밤과 달리, 사뭇 감미로운 스킨십에 그녀의 속눈썹이 자르르 떨렸다.
“여긴 바깥 소음이 전부 걸러지게끔 설계해 놨어요. 밤에 놀라서 깰 일도 귀 아플 일도 없을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하임은 그제야 이 공간이 왜 이리 고요한지 이해했다. 나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구나.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무혁 씨한테 제 청각 상태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