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72화
72.
굵은 나뭇가지에 앉은 하임은 나무에 몸을 밀착시킨 채 숨을 죽였다. 손끝에 전해지는 나무의 거친 결이 또렷해질수록, 아래에서 움직이는 존재 역시 선명하게 느껴졌다.
제법 까마득한 높이까지 올라왔음에도 더 높은 나무를 택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왜인지 그녀를 따라오던 발걸음은 나무 바로 아래에 멈춰 있었고, 누군가가 날카롭게 주변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왜 안 가는 거야…….’
귀신 같은 남자의 직감에 하임은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남자는 무언가를 가늠하듯 방향을 살피면서도 섣불리 나아가지 않았다.
슬슬 그의 시선 반경이 위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전혀 다른 방향에서 기척 하나가 끼어들었다.
빠른 속도였다. 대놓고 존재감을 드러내듯 조심성이라곤 없는 기척이었다. 그 탓에 남자도 순식간에 그쪽을 돌아보았고 이내 공기를 가르는 움직임이 짧게 스쳤다. 곧이어 짧고 둔탁한 충돌음이 터졌다.
“……!”
하임은 아래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혁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울프독이 잽싸게 먹잇감에게 덤벼들듯,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혀 파고들었다.
* * *
중성이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총구를 올렸지만, 이미 거리는 붙은 상태였다. 무혁이 그를 공격하는 게 더 빨랐다. 손목을 틀어 궤도를 꺾고, 팔꿈치로 중심을 밀어붙였다.
푸슉―! 탕―!
비틀린 총구에서 탄환이 옆으로 튀었다. 총알이 꽂힌 나무껍질이 터지며 파편이 흩어졌다.
둘의 몸이 그대로 얽혔다. 중성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파고들었다. 몸을 낮춰 무혁의 축을 무너트리고, 빈틈을 찌르듯 어깨를 밀어 넣었다. 서로를 오래 보아 온 만큼 어디를 어떻게 노리면 되는지 잘 아는 움직임이었다.
무혁은 그 흐름을 읽고 그대로 받아쳤다. 밀리는 대신 더 가까이 파고들며 중심을 다시 붙잡았다. 발을 걸어 균형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총을 쥔 손목을 비틀어 떼어 내려 했다. 짧고 거친 숨이 서로의 얼굴에 부딪혔다.
“여기까지 올 줄 알았어.”
중성이 낮게 웃었다.
“고고하신 울프독이 언제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하찮은 개새끼가 다 됐을까.”
“10년간 적한테 목줄 채워진 채 개노릇이나 해 온 너만 할까.”
무혁이 다시 한번 주먹을 꽂았다. 중성은 턱을 내어 주는 대신 팔을 접어 버티며 무혁의 옆구리를 노렸다. 무혁 역시 그대로 몸을 틀어 반대 방향으로 힘을 실었다. 얽힌 팔을 강제로 푼 중성은 거리를 아주 미세하게 벌렸고, 무혁은 그 틈에 발을 걸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둘의 발밑에서 흙이 크게 쓸렸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힘과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힘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불쌍한 새끼. 자존심도 없이 시키는 대로 짖고 꼬리 흔든 결과가 어때.”
“…….”
“네 그 가엾은 복수심은 흐른 세월만큼 보잘것없는 싸구려가 된 지 오래야. 지금도 적한테 빌붙어서 연명이나 하는 꼬라지도 무능하긴 마찬가지이고.”
무혁의 서슬 퍼런 비웃음에 중성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내가 어떻게든 널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거다.”
“죽여 봐, 씹새끼야. 네가 날 몇 번이고 지옥으로 밀어 넣으려 해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그러는 넌 날 죽일 순 있고?”
중성이 미친놈처럼 웃다가 비아냥거렸다.
“너야말로 날 죽이고 싶어도 멋대로 못 죽일 텐데. 생포해 오라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개새끼 신세잖아. 안 그런가?”
“내가 언제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거 봤나?”
둘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며 바닥을 긁었다. 중성은 넘어지는 순간에도 손을 뻗어 무혁의 목을 노렸다. 찰나였다. 무혁은 그 손을 쳐 내며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고, 다시 발을 디디는 순간 곧장 거리를 벌렸다.
어느새 긁히고 찢긴 피부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낮게 깔린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번져 왔다. 처음엔 바람 소리 같았다가 곧 묵직하게 겹치며 커졌다.
프로펠러.
중성의 시선이 순간 위로 들렸다가, 예기치 않게 무언가를 발견하고 좁아졌다.
* * *
두 남자의 몸이 부딪히고, 밀리고, 다시 파고드는 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무혁은 한 번 붙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밀어 넣으며 상대의 중심을 무너트렸다.
퍽―!
퍼억―!
두 사람의 움직임은 잠시도 끊기지 않았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이어지는 압박 속에서, 누가 먼저 틈을 내주느냐에 따라 끝이 갈릴 상황이었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격투를 따라가려 할수록 하임의 시야가 흔들렸다. 너무 빠르고 거칠어서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그대로 끝날 것만 같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세게 두드렸다.
‘안 돼…….’
입안에서만 맴도는 소리였다. 무혁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마다 숨이 턱 막혔고, 다시 파고드는 움직임이 보일 때면 그제야 숨이 이어졌다. 그 짧은 반복이 계속되자 머릿속이 점점 하얘지며 손끝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어긋나면, 무혁 씨가 잘못될 수도 있어. 마음 같아선 같이 싸워 주고 싶었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적에게 위치를 드러냈다간 무혁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었다.
지이이잉―
좌절하고 있던 찰나 블랙폰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임은 화면에 무혁과 같은 채널 표시가 뜨는 걸 확인하고 통신 버튼을 눌렀다.
-하임 씨, 남성기입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다친 곳 없이 무사하시다면 스피커 쪽 톡톡, 두 번만 두드려 주십시오. 다친 곳 있으시면 세 번 두드리시고요.
톡톡.
몸 군데군데가 쓰라렸지만 응급 상황은 아니었다. 하임이 두 번 두드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다행입니다. 곧 저희 쪽 증원팀이 진입할 건데, 상대측이 본인들 노출 막으려고 전파 교란을 걸어 놓아서 신호만으론 위치와 수가 특정이 잘 안 되고 있어요. 섣불리 진입했다간 바로 교전 붙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를 좀 도와줄 수 있으십니까?
“어, 어떻게요……?”
하임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듯 물었다.
-주변에 추가 기척이 잡히는지 확인 가능하십니까? 방향이랑 대략적인 거리만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면 괜찮습니다.
“…….”
그녀는 재차 물을 필요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주변의 소리를 하나씩 밀어 냈다. 두 남자의 난투극 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까지 하나씩 밀어 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아주 미세한 것들만 골라내듯 집중했다.
‘…….’
있다.
하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디선가 흙을 밟는 감각이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일부러 속도를 죽인 듯 묘하게 눌린 리듬이었다.
“이, 있어요.”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귀를 기울이니 다른 결의 소리도 느껴졌다.
“바다 쪽 방향에서 두 명, 그리고 반대쪽에서 한 명, 왼쪽 대각선 아래에서 또 한 명…… 거리는 대략 백 미터쯤 되는 거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뭔가 둘러싸려고 하는 느낌인데,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어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하늘 위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하임에겐 낯설지 않은 소리였다.
“헬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성기가 대꾸했다.
-우리 쪽 증원팀입니다.
“무혁 씨가…… 무혁 씨가 어떤 남자와 싸우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처럼 어떻게든 숨어 계십시오. 하임 씨는 무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곧 헬기가 빠르게 가까워지며 잔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들릴 법할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자 아래에 있던 남자의 시선이 문득 위로 치켜 들렸다.
“……!”
하임의 심장이 바닥으로 꺼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저를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뒤이어 눈 깜짝할 새 없이 총구가 위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