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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화


02. 시간이 흘렀다. 유월은 해수와 함께 홈스쿨링으로 중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그 과정이 결코 수월했던 건 아니었다. 해수는 머리가 좋았고, 모든 진도는 그에게 맞춰졌다. 그래서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유월은 어떻게든 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집안 형편으로는 해수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에 감사해야 했으니까. 덕분에 유월은 높은 성적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변화는 또 있었다. 해수는 이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고, 유월의 도움 없이도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여전히 지팡이가 있어야 했으나 혼자서는 발도 못 떼던 과거를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왼쪽 다리가 불편할 뿐 성장기를 지나오며 해수는 훌쩍 자라났다. 처음 만났을 땐 나름 눈높이가 맞았는데, 지금은 고개를 아주 높이 들어야 겨우 해수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키가 너무 커진 것 아니냐고 툴툴거리면, 해수는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이러려고 커진 것 같다는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그때마다 유월은 가슴께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얼굴로 무감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어느덧 미소를 지을 만큼 다정한 사람으로 자랐다. 그의 변화를 느낄 때마다 벅찬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야야, 저 사람 봐.” 넋을 잃는 사람은 유월뿐만이 아니었다. 열아홉 살을 앞둔 겨울, 해수와 함께 잠시 외출을 나왔을 때였다. 밖에서 해수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와, 미친.” “뭐야, 왜.” “저기 봐.” 그렇게 말한 그들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넓은 창 안쪽으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해수가 보였다. “미쳤……. 야, 나 저렇게 생긴 사람 처음 봐. 번호 딸까?” “근데 너무 어려 보이는데……. 그리고 여자 친구 있을 수도 있잖아.” “여자 친구가 다섯 명이어도 노려질 외모라고 본다, 나는.” “그건 인정.” 어쩌지? 어쩌지? 바쁘게 속삭이던 찰나, 때마침 해수가 밖으로 나왔다. “오래 기다렸어?” 유월을 향해 그가 다정히 웃었다. 그러자 여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그들이 말하던 ‘여자 친구’ 때문이 아님을, 유월은 알았다. 그들의 시선이 해수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 닿아 있었으니까. 그제야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가 대학병원 앞임을 깨달았다. 아……. 작은 탄식이 유월의 귓가에 날카롭게 꽂혔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섞인 음성이었다. 멀리서도 대번에 탄성을 자아낼 만큼 잘난 남자는 한순간에 안쓰러운 존재로 변했다. 혼자 걸을 줄 알아도, 천희영을 답답하게 했던 환상통이 조금은 나아졌어도 여전히 권해수는 망가진 상태였다. 제가 해수의 다리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이렇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유월은 지옥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유월아?” 유월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해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신을 차린 유월이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응. 진료가 빨리 끝났거든.” “그랬구나. 다리는…… 괜찮대?” 유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해수는 진료실에 혼자 들어가길 원했다. 끔찍하고 흉측한 다리를 그녀에게 보여 줄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늘 똑같지.” 해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끔찍해. 흉측하고.” 마치 타인의 것을 말하듯 단조롭고 평이한 어조에, 억지로나마 지었던 미소가 기어코 흐려졌다. 유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죄책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해수가 걷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마음은 그의 성장을 지켜볼수록 죄책감으로 변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해수는 더 아름답게 성장했을 텐데. 내가 없었더라면 아까 그 여자들도 해수를 좋은 눈으로 바라봤을 텐데. 모두의 눈에 빛나 보이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전부 나 때문에……. 해수와 함께 외출할 때마다 죄책감이 더욱 짙어져, 이제 유월은 외출을 꺼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그냥 어디든 괜찮으니까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은 유월이 이제 가자며 해수를 이끌었다. 그러나 선뜻 움직여 주지 않는 그로 인해 다시 몸을 돌려야 했다. “……왜?” “오랜만에 나왔는데, 아깝지 않아?” 해수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병원 근처는 번화가라 사람이 많았다. 해수는 누구보다 이목을 끄는 외모였고, 그렇기에 그를 안쓰러워하는 시선과 탄식이 끊임없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유월이 어물거리며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였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 너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늦게 들어가면 사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야.” “오랜만에 둘이 나온 거잖아.” 그러나 오늘따라 유독 강경했다. “난 더 있고 싶은데.” “…….” “유월이는 나랑 있기 싫어?” 해수가 어리광 부리듯 유월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키가 얼추 맞았을 때부터 행했던 해수의 습관은 훌쩍 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응? 더 놀다 가자아.” 그가 애교부리듯 덧붙였다. 그 얼굴을 보며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결국 유월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해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어디 갈까? 가 보고 싶은 곳 있어?” “……난 아무 데나 상관없어.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유월은 흐리게 웃었다. 절뚝거리며 그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경악과 안타까움 섞인 시선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전부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그날의 사고가 생생히 되살아나 그녀를 덮쳤다. 사람들의 반응을 어릴 때부터 익혔다면 좋았겠지만, 반지하 방에서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느라 급급해서. 그리고 권씨 저택에 와서는 홈스쿨링으로 바깥을 잘 나가지 않은 탓에 유월은 타인을 대하는 게 어색했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긴 해도 사람을 좋아하던 유월은 사고 이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꺼렸다. 반면 입을 닫고 주로 혼자 있던 해수는 사고 이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월은 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해수는 더욱 빛났고 저는 더욱 어두워졌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제가 없으면 통증을 호소하는 해수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해수가 가는 곳 어디든, 자신이 동행해야 했다. “우리 유월이가 어딜 좋아할까…….” 우울한 기색의 유월과 달리 해수는 기분 좋은 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와 달리 유월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밖을 둘러보고 싶단 말과 달리, 해수는 고집스럽게 유월과 관련된 물건들만 둘러보았다. 해수의 다정한 시선이 계속될수록 유월의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괜찮다는 만류에도 기어코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한 해수는, 드물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집에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외출을 마치고 해수를 방까지 데려다준 뒤였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빌어먹을 자식들. 감히 누구한테……!” 거실 한복판에 선 천희영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거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엔 깨진 유리잔과 물에 젖어 엉망이 된 잡지가 나뒹굴고 있었다. 매달 정기 발간되는 예술 잡지였다. 유월은 몇 달 전, 천희영이 자기 작품을 곁에 둔 채 에디터들과 인터뷰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보기 드물게 인자한 미소를 띤 천희영의 모습도. “누가 누구보고 슬럼프라는 거야!” 그러나 지금 소리를 지르는 천희영의 눈동자엔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천희영은 유명한 조각가이자 화가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어진 슬럼프에서 도통 벗어나질 못했고, 그 히스테리는 고스란히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돌아왔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 유월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술잔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던 천희영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어디 다녀오니?” “……아, 그게.” “아아. 해수.” 유월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살핀 천희영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긴 걔가 아니면 네가 나갈 일이 뭐 있겠어.” “…….” 노골적인 무시에 유월은 잠자코 고개만 숙였다. 지금 천희영의 심기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미선 아줌마! 미선 아줌마, 어디 있어요?” “아, 예. 사모님!” 천희영의 부름에 유월의 어머니가 달려왔다. 청소하고 있었는지 어머니의 앞치마가 물기로 흥건했다. “잔 좀 가져와요. 곁들일 것도 간단히 가져오고. 그리고 이것들 좀 치워! 실수로 밟아서 피라도 나면 책임질 거야?” “예, 금방 치울게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고개 숙이는 어머니에게 제가 하겠다고 말한 유월이 바닥을 정리했다. 천희영을 향한 신랄한 평가가 유리 파편과 함께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이번에도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나. 천재의 몰락. 그리고……. 그 아래 글자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읽던 유월은 어머니가 오는 소리에 일단 잡지를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묵직한 위스키병, 꼭지를 제거한 딸기, 작게 자른 치즈들이 천희영 앞에 놓였다. 주문과 달리 안주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천희영이 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는 동안, 유월과 어머니 그리고 뒤늦게 온 다른 가정부까지 총 세 사람이 한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천희영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녀는 술을 마실 때 제일 고요했으나 그렇기에 더 무서웠다. 이다음 무슨 행동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으니까. 천희영은 넓은 통창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기가 좀 축축하다 싶었는데, 기어이 눈이 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 잘 정돈된 소나무들 위로 눈이 느릿하게 쌓인다. 그를 지켜보던 천희영이 불쑥 내뱉었다. “눈 좋아하니?” “……예?” “겨울 말이야.”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닿아 있어, 유월은 질문의 대상이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난 겨울이 제일 싫어.” 천희영이 서늘히 중얼거렸다. “내 인생을 나락으로 처박은 계절이니까.” 그녀가 다시금 술을 들이켰다. 찰랑거리는 짙은 오렌지색 액체는 채워지기 무섭게 다시 동이 났다. 독한 술이 다 사라져 갈 즈음이었다. 술을 더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천희영의 눈이 돌연 가늘어졌다. 시선 끝엔 유월이 구석으로 밀어 놓은 잡지가 놓여 있었다. 나름 치운다고 치웠는데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큰일이다. 유월이 재빨리 치워 버리려고 했으나, 천희영의 이죽거림이 더 빨랐다. “해수는 참 좋겠어. 하루하루 몰락하는 누구와 달리 좋은 평가만 받으니까.” “…….” 유월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던 해수는 고등학교 과정을 밟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 쪽으로 진학할 거냐고 묻자, 해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취미야. 별로 큰 관심은 없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해수의 그림 실력은 월등했다. 돈 많은 도련님의 취미 생활 정도를 예상하고 왔던 미술 과외 선생이 눈을 빛내며 찬사를 내뱉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찬사는 곧 욕심으로 번졌다. 과외 선생은 해수의 그림을 빼돌려 공모전에 제출했다. 결과는 대상이었다. 적당히 수상 경력을 채울 생각이었던 과외 선생은 예상외의 결과에 덜컥 겁을 먹고 진실을 고백했다. 그 그림은 제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학생의 그림이라고. 그 학생이 권성 그룹의 외동아들, 권해수라는 사실은 순식간에 퍼졌다. 권성 측에선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아 보려고 했으나, 권성 그룹의 외동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권해수의 뛰어난 그림 실력은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원치 않는 관심이었다. 당연히 과외 선생은 그 즉시 해고되었다. “하지만 분명 대상은 아닐 거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가 일부러 그런 건……! 그래, 해수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제발! 해수야. 해수야!” 아이도 웃을 만큼 구차한 변명을 내뱉으며 그는 저택에서 쫓겨났다. 잘 모르는 유월도 그가 앞으로 미술계에선 발도 못 들일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미처 가져가지 못한 물건들을 치우며 유월은 드물게 눈꼬리를 세웠다. “자기 것도 아닌 걸, 뻔뻔하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그런 사람이 선생님이었다니.” “신기하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해수가 문득 중얼거렸다. “뭐가 신기해?” “유월이 네가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처음 들어 봐.” “그건…….” 유월은 말끝을 흐렸다. 그 말대로, 유월은 그 선생을 싫어했다. 저를 향해 미술에 관심 없냐며, 너만 괜찮으면 해수랑 같이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물었을 때만 해도 그저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건을 건네받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손을 만진다거나 수업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해 유월의 옆을 빙빙 맴돌 때부터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급기야 저녁에 별일 없는지, 괜찮으면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고 물으며 제 몸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때 유월은 깨달았다. 선생이 미성년자인 저에게 아주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불편함이 더더욱 커지던 찰나, 이번 일로 더 이상 선생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유월은 제 일을 해수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과외 선생의 일로 제일 충격을 받은 사람은 제가 아니라 해수일 테니까. “이미 남의 그림을 몰래 빼돌린 것부터 잘못이야.” “글쎄. 그런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해수 넌, 가끔 보면 사람을 너무 믿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에 해수는 “그런가?” 하고 웃었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유월은 한숨을 내쉬며 마저 물건을 치웠다. 그러다 구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이번 공모전의 포스터였다. 예술계는 크고 작은 이해관계에 따라 수상작이 미리 정해지기도 한다. 천희영의 인맥에 따라 수많은 그림이 떨어지고, 또 큰 상을 받기도 했으니까. 이 공모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천희영이 시킨 심부름을 하던 중. 유월은 우연히 공표되기 전의 포스터를 보았다. 이 포스터는 공표되기 전의 포스터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사모님께서 이걸 미술 과외 교사에게 주었을 리도 없을 텐데. 무심코 생각하던 유월은 곧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 따위, 계속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선생은 계속 유월의 곁을 맴돌았다. 해수의 수상이 곧 천희영의 분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천희영의 인터뷰 뒤엔 항상 해수를 향한 관심이 따라붙었다. 제 근황을 묻는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아드님’의 근황으로 이어졌다. 예술가 천희영에서 권해수의 양어머니. 호칭이 변할수록 천희영의 히스테리는 날로 심해졌다. “우리 권씨 집안에 천재라니. 참 부럽지?”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유월은 가만히 침묵했다. 완벽하게 잡지를 치우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물건을 치우기 위해 유월이 몸을 굽히는 동안, 가정부가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살가운 척 말을 붙였다. “심리 치료로 시작한 건데, 도련님께 생각보다 잘 맞나 봐요. 사모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 아니겠어요? 회장님과 이사님께서도 기뻐하시잖아요.” 모든 걸 천희영의 공으로. 권씨 집안 고용인들이라면 눈 감고도 술술 내뱉을 수 있는 처세술이었다. 이를 말하면 천희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노기를 낮추곤 했다. “……그래, 심리 치료였지. 그 빌어먹을 그림도. 이럴 줄 알았으면 다 때려치우는 거였는데.” “…….” “입을 열든 말든, 미친 짓을 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어. 그랬으면 나도…….” 그러나 오늘따라 천희영의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유월이 빠르게 잡지를 치우려고 할 때였다. 잔을 기울이던 천희영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돌연 유월을 쳐다보았다. “너, 대학교 어디 간다고 했지?” “네?” “대학. 갈 거라고 하지 않았니?” 힘줘 말한 천희영이 유월에게 재차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타오를 듯 강렬했다. “어디 간다고 했지?” 유월은 잠시 망설였다. 해수가 갈 대학은 정해져 있었다. 한국대학교.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였다. 유월도 한국대에 지원할 성적은 되었지만, 문제는 학비였다. 한국대는 높은 등록금으로 유명했다. 지금까지는 권씨 집안 덕분에 학비 고민이 없었으나, 그 지원이 대학 때까지 이어지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유월은 같은 대학교에 가자는 해수에게 어색한 웃음만 지어 줄 수밖에 없었다. “사정에 맞춰서 가야죠. 저희 형편상 대학도 감지덕지한걸요.” 유월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께서 그동안 신경 많이 써 주셨잖아요. 대학은 저랑 유월이 힘으로…….” “가요.” “네?” “대학, 가라고.” 눈만 깜빡이는 그녀를 향해 천희영이 말했다. 사나운 눈빛을 지워 낸 천희영이 다정히 웃었다. “그 정도는 지원해 줄 수 있어요. 큰돈도 아니고.” “하지만 사모님…….” “성한대는 어때? 내가 아는 사람이 그쪽 교수거든. 공부하기도 그쪽이 더 편할 것 같은데.” 유월의 어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성한대도 한국대 못지않은 명문대였다. 하지만 권씨 저택과 너무 멀었다. “괜찮습니다, 사모님. 어떻게 그런 신세까지 질 수 있겠어요.” “신세라니. 그런 말은 좀 섭섭하다, 우리 사이에.” “하지만…….” “각자 길 찾아야지.” 고개를 저으려던 유월은 이어진 말에 멈칫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 없잖아. 너나 해수나.” “…….” “아줌마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집을 나갈 준비를 해라. 그 함의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다. 재벌 사회에서 불편한 다리는 더 이상 해수의 단점이 되지 못했다. 그가 원한다면 그를 도와줄 ‘친구’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마지못해 들인 가정부의 딸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해도 해수가 제게 가진 유대감은 과했다. 제가 계속 곁에 있다면 해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매번 신세만 져서 어떡하죠, 사모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사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머니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당장 큰 고민이 해결된 것이 그저 기쁜 듯했다. “너도 어서 인사드려. 얼른.” “……감사합니다.” 유월은 천희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떨어진 시야로 습관처럼 가지런히 모은 자신의 양손이 들어왔다. 병을 치우다 베였는지 어느새 피가 나고 있었다. 유월은 주먹을 쥐어 상처를 가렸다. 새어 나오는 통증은 애써 무시하며. ***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유월은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해수에게는 한국대라고 말했지만, 남몰래 성한대를 준비했다. 준비는 잘되어 가냐 묻는 해수에게 그렇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지만, 어머니 말대로 그들은 권씨 집안의 지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은 성한대의 설명회가 있는 날이었다. 원래는 갈 생각이 없었지만, 혼자서는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했다. 홈스쿨링 선생이 가져다주는 것도 전부 한국대에 관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성한대의 입학 설명회 날이 권성그룹의 창업기념일과 겹쳤다. 보통의 행사라면 유월도 해수와 함께해,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기업의 총수들도 참석하는 자리라 가정부 딸이 동행할 수는 없었다. “가기 싫다.” 준비를 어렴풋이 마쳤을 때, 해수가 말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그는 정돈된 차림새와 달리 다소 불퉁해 보였다. “어제 물어봤을 땐 괜찮다고 했으면서.” “그런 데 가면 머리 아프단 말이야.” 해수가 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기야 사지 멀쩡한 사람들에게서도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눈을 빛내는 사람들이다. 해수는 몇 배는 더 괴로울 터였다. “유월이 네가 못 가는 줄 알았으면 나도 안 갔을 거야.”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니까.” 대꾸를 마친 유월은 몸을 돌려 해수의 짐을 마저 챙겼다. 그러나 머리 한구석에선 입학 설명회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성한대에서 진행되니, 이제 슬슬 출발해야 했다. 더 늦어지면 안 되는데. 시간이, 그러니까……. “유월아.” 그때였다. 등 뒤에서 해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어디 가?” “……어?” 그 말에 유월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유월은 어색하게 몸을 돌려 해수를 돌아보았다. 해수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매단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참으며 유월이 입술을 떼었다. “아니, 어디 안 가.” “…….” “그런데…… 그건 왜?” 유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라도 해수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해수는 얼마간 유월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제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해수가 빙그레 웃었다. “그냥. 오늘 더 예뻐서.” 평소와 똑같은 장난스러운 대답이었다. 긴장으로 꽉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렸다. 해수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목덜미에 잘 정돈된 머리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유월이랑 같이 가고 싶다.” “나 사모님께 혼나기 싫어, 해수야.” “으응……. 그건 나도 싫어…….” “잘 다녀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에 해수가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얼마간 멈춰 있는 것을 의아하게 느낀 유월이 시선을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응, 어디 갈 리 없지.” “…….” “정유월이 날 두고 어디 갈 리 없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혼잣말인데도 귓가 가까이 들려서 그런지, 미약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숨을 길게 들이켠 그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럼 나 내려가는 거 도와줘.” “언제는 안 도와준 것처럼 말하네.” “응, 도와주세요.” 금세 애교스러운 말을 내뱉는 것을 보며 유월이 작게 미소 지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유월이 해수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천희영은 미리 차에 탄 듯, 보이지 않았다. 기사의 도움을 받아 차에 탄 해수를 향해 유월이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해수의 미소와 함께 차가 느릿하게 출발했다. 손을 흔들던 유월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빠르게 외출 준비를 했다.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쯤 출발해야 했다. *** 일찍 끝나리라 생각했던 입학 설명회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학회장의 연설 때문이었다. 저택까지 가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곧장 출발해야 했다. 유월이 짐을 챙겨 일어난 순간이었다. “안녕. 너 여기 살아?” 입학 설명회 내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웃던 아이들이 대뜸 유월에게 말을 걸었다. “……나 말하는 거야?” “여기 있는 대부분은 아는데, 넌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미친, 손수연. 하여튼 존나 나대.” “아니, 그렇잖아. 내가 이렇게 생긴 애를 기억 못 할 리가 있냐고. 나 기억력 완전 좋은데.” 장난스러운 면박에 굴하지 않고 대꾸한 아이가 다시 유월에게 물었다. “어디 살아? 학교는 어디 다녀?” 성한대는 사립고등학교의 진학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저희끼리 대충 얼굴을 아는 이유도 그 때문인 듯했다. “아……. 난 학교 따로 안 다녀. 집에서 배우고 있어.” “아, 홈스쿨링? 대박. 나도 그거 하고 싶었는데. 너 공부 잘하나 보다.” 대단하다는 듯 묻는 얼굴에 유월은 가만히 웃어 주었다. 굳이 나서서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것보다는 웃음으로 무마하는 게 편했다. “오늘 끝나고 뭐 해? 너만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놀래?” “아, 미안해.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서.” “그래? 아쉽다. 그러면 번호 알려 줘. 나중에 시간 될 때 연락할게.” 대뜸 핸드폰을 내미는 아이들을 향해 유월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나 핸드폰이 없어.” “핸드폰 없어? 왜? 엄마가 안 사 주셔?” “응. 집이 엄하거든.” 유월은 그럴듯한 핑계를 대었다. 핸드폰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도 없어 굳이 만들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만 있기도 했고. 그러자 누가 공감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뭔지 알아. 우리 집도 그랬어. 우리 엄마도 절대 안 사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갑자기 납치당하거나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냐고 막 그랬거든. 일부러 납치 뉴스도 막 보여 줌.” “미친……. 그래서 갑자기 핸드폰 생겼던 거야?” “어. 알잖아, 우리 엄마 극성인 거.” “와, 진짜 못됐다. 엄마 마음에 대못을 박네.” “아, 그럼 넌 효자 하시든가요.” 누군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못됐다며 아이들이 눈짓을 보냈지만, 그들의 입가에도 하나같이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웃지 못하는 건 유월뿐이었다. 사고나 납치가 그들에겐 핸드폰을 얻는 데 쓰이는 구실밖에 되질 못한다니. 고작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인데도 자신의 존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집에서도 연락 안 되는 건 아니지?” 그때 무리에 섞여 있던 남자아이 하나가 유월에게 말을 걸었다. “뭐냐, 박민재. 은근슬쩍 번호 물어보네?” “아,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왜 선수 쳐!” 유월의 연락처 문제로 아이들은 저들끼리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 정작 유월은 난감한 얼굴로 말끝만 흐렸다. 그녀의 집에는, 정확히 그녀와 엄마가 기거하는 방엔 전화가 없었다. 과거엔 밤마다 울렸던 독촉 전화 때문이었고, 지금은 그들이 버리고 온 아버지 때문이었다. 통화할 일이 있다면 허락을 받고, 권씨 집안의 전화를 빌려야 했다. 만약 제가 권씨 집안 가정부의 딸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웃고 있는 아이들과 달리 유월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졌다. “야, 너무 들이대지 마. 애 무서워하잖아.” 그때였다. 무리에 섞여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던 남자아이가 팔을 뻗어 아이들을 제지했다.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아이였다. “뭔데, 최현성. 번호 따고 싶다고 말한 건 너였잖아.” “민재야. 적당히 치고 빠져야 나처럼 인기 많아지는 거야. 말도 좀 예쁘게 하고. 너같이 가벼운 타입은 여자한테 인기 없다.” “웩, 재수 없어.” 타박하면서도 아이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웃는 최현성의 모습엔 어떤 여유까지 느껴졌다. 그때 최현성이 시선을 내려 유월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유월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서? 집 전화도 알려 주기 어려워?” “아, 어려운 건 아닌데…….” “집이 그렇게 엄해?” 유월이 침묵하자 최현성은 알 만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귀한 집 따님, 좋네.” “…….” “그래도 미리 친해지면 좋을 텐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던 최현성이 “아, 혹시 아싸가 꿈인가?” 하고 덧붙였다.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권씨 저택에 들어가면서, 초등학교 때 알고 지냈던 아이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그 후로, 제 곁에 또래라곤 해수가 유일했다. 하지만 자신이 성한대에 가고 해수가 한국대에 간다면 저는 완전히 혼자가 될 터였다. “뭐, 아싸면 내가 놀아 주면 되고.” 장난스러운 어조에 유월이 고개를 들었다. 최현성이 그럼 문제없지 않냐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계절이 여름이라 그런가, 저 아이가 웃을 때마다 싱그러운 여름 햇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최현성에게 핀잔을 들었던 아이가 느끼하다며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지만, 최현성의 느긋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입시 설명회 다음 주에 또 있어. 그때 다시 보자.” “그래. 다음 주에 보면 되겠다.” 그러자 손수연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리 날짜도 정했으니까, 설명회 끝나고 같이 노는 거다? 무르기 없음.” “손수연, 너 진짜 모르는 애한테 말 작작 걸어……. 착한 애들만 만나서 그렇지, 욕먹기 딱 좋아.” “뭐래, 그게 내 매력인데.” “매력 이 지랄.” 짧은 투덕거림과 함께 아이들이 멀어졌다. 폭풍이 휩쓸고 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때, 가방을 한쪽 어깨에 대충 걸쳐 맨 최현성이 유월을 돌아보았다. “야.” 그 부름과 동시에 무언가가 휙 날아왔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유월이 조심스럽게 손을 펼쳤다. 금빛 포장지에 싸인 작은 초콜릿이었다. “너 먹어.” “이건 왜…….” “긴장 풀 때 단거 먹으면 좋더라고, 난.” 최현성이 씩 웃으며 자신의 가방을 눈짓했다. 스포츠 백. 아마 운동 쪽으로 입시 준비를 하는 듯했다. “오늘처럼 얼어 있지 말고 다음 주에 그거 먹고 와.” “…….” “혹시 알아? 덕분에 잘 놀게 될지.” 간다. 짧은 인사를 남기며 최현성이 무리와 함께 멀어졌다. 유월아, 잘 가! 다음 주에 봐! 손수연이 과장된 손짓으로 팔을 흔들자, 최현성이 수연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의 넓은 등 뒤로 스포츠 백이 미약하게 흔들거렸다. “…….” 유월은 멀어지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아이들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고, 그 나이대 아이들 같은 생기가 있었다. 반면 자신은 어떠한가. 친구는 한 명도 없었고 초등학생들도 가지고 있는 핸드폰마저 없었다. 타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보다 바닥을 보는 게 더 익숙했다. 권씨 집안에 살면서 유월이 제일 먼저 익힌 습관이었다. 만약 나도 친구가 생긴다면 저런 식으로 웃을 수 있을까?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롭게 웃고 떠들고, 내일이 없을 것처럼 놀고……. 가슴이 둥둥 뛰었다. 유월은 초콜릿을 소중히 바라보다가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역시나 거리가 좀 멀었는지, 좀 서둘렀음에도 도로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발걸음을 서둘렀을 테지만, 오늘은 권성의 창업기념일이다. 해수가 도착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외출한 건 크게 티 나지 않으리라. 조심스럽게 저택 문을 열었다. 그녀의 생각을 증명하듯, 거실은 불이 켜져 있을 뿐 조용했다. 사모님이 자리를 비울 테니 자신들도 오랜만의 자유를 누리겠다며 벼르던 아주머니들이 정말 실천에 옮긴 듯했다. 깜빡. 그녀가 중문을 밝힌 주황빛 조명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늦었네.” 들리는 목소리에 유월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월은 뻣뻣하게 굳어 버린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해수는 넓은 소파에 앉아,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툭. 툭. 일정한 소리를 내는 모습이 꼭 장난감을 억지로 빼앗겨 골이 난 아이처럼 불량해 보였다. “어디 안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툭. 툭……. 고장 난 왼쪽 다리 위로 긴 다리를 고고하게 꼰 채 정면만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속 있었나 봐, 오늘?” 해수는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유월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지? 분명 더 늦게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한 시간 전? 두 시간 전? 기약을 알 수 없는 시간을 셈할수록 침묵은 길어졌다. 쿵. 침묵을 끊어 낸 것은 바닥을 내리찍는 해수의 지팡이 소리였다. 가벼운 울림이었으나 명령어라도 입력된 것처럼 그녀의 사고가 다시 움직였다. 유월은 억지로 음성을 짜내어 대답했다. “그냥…… 잠깐 나갔다 왔어.” “어디를?” “그냥 엄마 심부름……. 약속 같은 건 없었어.” “…….” “저, 정말이야.”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볼품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게다가 심부름이라는 말과 달리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고, 웬 가방만 덜렁 메고 있지 않은가. 성한대의 이름이 적힌 가방 속 팸플릿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이 아닌 게 없었다. 눈치채면 어떡하지. 가방이라도 확인한다면……. 유월이 입 안쪽 살을 지그시 씹을 때였다.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 번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적 없었던 해수가 입을 열었다. “멀리 나간 줄 알고 걱정했어.” 예상외로 해수의 반응은 담백했다. 오히려 유월이 당황해 눈을 깜빡일 정도였다. 그런 유월을 향해 해수가 팔을 뻗었다. “나 일으켜 줘, 유월아.” “아, 응. 응.” 유월은 제 짐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재빨리 해수를 부축했다. 방으로 올라가면서 해수를 힐끔거렸지만, 유월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유월은 해수의 절뚝이는 걸음에 맞춰 계단을 올랐다. 사고 이후, 1층으로 방을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해수는 2층을 고집했다. 이동이 힘들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해수가 원하는 것이니, 유월은 제가 더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겉옷 줘.” “응.” “지팡이는 이쪽으로 주고.” “응.” 방으로 들어온 유월이 능숙하게 그의 짐을 정리하면, 해수는 얌전히 그런 유월을 따른다. 너무 어릴 때부터 행해서 고착된 순서였다. “저녁은 먹었어? 약은?” 아직 안 먹었다는 듯 해수가 고개를 저었다. 수술 후로도 해수는 정기적으로 약을 챙겨 먹고 있었다. 정신과 약일 때도 있었고, 단순한 진통제일 때도 있었는데, 어쨌든 약을 챙겨 먹이는 건 전부 유월의 몫이었다. “자. 얼른 먹어.” 물컵을 받아 든 해수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남성적인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약을 먹은 해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유독 쓰고 독한 약이라 먹을 때마다 힘들어하는 그에게 유월은 항상 사탕 같은 달콤한 것을 함께 챙겨 주었다. “사탕 줄게. 잠깐만…….” 유월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제가 늘 채워 놓았던 바구니가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채워 놨던 것 같은데……. “맛없어, 유월아.” 그때 해수가 작게 칭얼거렸다. “아, 미안. 금방 줄게.” 유월의 머릿속에 차선책이 떠올랐다. 오늘 받았던 초콜릿. 유월은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해수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자. 초콜릿이래.” “…….” “아, 포장 까 줄까?” 유월이 능숙하게 포장을 까, 해수에게 내밀었다. 물끄러미 초콜릿을 바라보던 해수가 고개를 젖히곤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흑갈색 초콜릿이 모습을 감췄다. 평소라면 약 먹기 싫다고, 사탕은 다른 게 좋다고 칭얼거렸어야 할 해수가 얌전했다. 많이 피곤했나.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약을 먹는 해수는 어린 시절 이후로 오랜만인지라, 유월은 조금 말랑해진 기분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맛있어?” “아니, 나 이거 싫어해.” “응? 먹어 본 적 있어?” 유월이 손에 구겨 넣은 포장지를 힐끔거리며 되물었다. 처음 보는 건데, 미리 기억해 두고 앞으로 사지 말아야겠다. 그때 해수가 유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응, 그거 진현 호텔 거거든.” 유월의 숨이 멈췄다. “진현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한테만 나눠 준 초콜릿이야.” “…….” “나 그거 싫어해, 유월아.” 유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유월에게 허락된 장소라곤 근처 마트와 생활용품점이 전부였다. 외부 장소는 전부 해수와 동행했다. 그런 그녀가 진현 호텔의 비매품 초콜릿을 가지고 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이걸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면…… 난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해수의 표정이라도 확인하고 싶은데,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장 기사님한테 받았어?” 그때 해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어?” 하고 눈만 깜빡이자, 해수가 이어 말했다. “며칠 전에 어머니께서 진현 쪽에 다녀오신 적이 있거든.” “아…….” “장 기사님도 같이 간 것 같던데…… 그때 받은 거야?” 해수가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투명한 회색 눈을 보자 유월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맞아. 그때 받았어. 사, 사탕은 가끔 입이 베어서 싫다고 했었잖아. 초콜릿은 부드러우니까 괜찮을 것 같았거든.” “그랬구나.” “너 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받은 건데……. 네가, 네가 싫어하는 줄 알았으면 안 받았을 거야. 정말이야.” “앞으로는 받지 마……. 나 그거 싫어.” 해수가 유월의 배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웅얼거렸다. 응. 안 받아. 안 받을게. 절대 안 받을 거야. 유월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리며 해수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다음부터는 사탕 챙겨 놓을게.” “응.”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잔뜩 채워 놓고, 또…….” 유월은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해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유월은 거칠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초콜릿 껍질을 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 2차 입학 설명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유월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1차 때 해수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보이지 않는 눈이 저를 감시하고, 무언가가 양심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기분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가야지.” 그러자 어머니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걸레를 그대로 바닥에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유월은 몸을 움츠렸다. “1차로도 설명은 충분했어요. 게다가 해수한테도 성한대 간다는 말을 아직 못 해서…….” “사모님께서 계시잖아.” 어머니가 유월의 말을 잘랐다. “사모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거야. 뭘 걱정해.” “하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엄마는 걱정돼.” 어머니가 유월의 손을 붙잡았다. “친구도 없이, 이 저택에서 계속 해수 옆을 지켰잖아.” “…….” “사고는…… 그래, 책임은 분명히 있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어머니가 간절한 눈으로 유월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유월이가 다른 친구들도 만나고, 활발하게 웃고 뛰놀고 그랬으면 좋겠어. 이렇게 다른 사람의 수발을 드는 게 아니라.” “…….” “엄마가 못 이룬 꿈, 대학 가서 멋있게 졸업하는 거. 그래서 보란 듯이 잘 사는 거. 우리 유월이가 대신 이뤄 줬으면 해.” “…….” “엄마가 유월이 엄마로서 많은 거 바라는 거 아니잖아. 그렇지?” 그녀가 대답을 재촉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유월의 떨리는 시야에 한쪽에 널브러진 어머니의 가방이 들어왔다. 저 두툼한 흰 봉투는 과연 어디서 왔을까. 저 안엔 돈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도 함께 담겨 있다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을까. “갈 거지? 입학 설명회.” “……네.” 그러나 유월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끝낸 유월은 해수의 방으로 올라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도 해수는 집안일로 외출해야 했다. “네, 잘 부탁드려요. 혹시라도 험한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군가와 통화 중인 해수가 보였다. 유월을 보자 그가 전화를 끊으며 빙긋 웃었다. 유월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나 좀 이따 들어올까?” “아니, 다 끝났어. 괜찮아.” 그의 승낙에 유월은 해수에게 다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평소처럼 이런저런 말을 해 줘야 하는데, 괜히 속이 쿡쿡 찔려 와서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평소 같으면 가기 싫다며 어리광 부렸을 해수도 오늘따라 잠잠했다. 유월은 해수를 부축해 계단을 내려왔다. 하품을 쩍 하고 있던 김 기사가 재빨리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몸을 싣기 전, 해수가 유월을 돌아보았다. “유월아.” “응?” “오늘 어디 안 가지?” 툭. 해수의 지팡이가 가볍게 땅을 두드렸다. 유월은 덜컹한 마음을 추스르며 웃었다. “응. 어디 안 가지.” “…….”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뻣뻣한 입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제 거짓말을 한눈에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래. 알았어.” 그러나 해수는 빙그레 웃었다. 유월이 제일 좋아하는 다정한 미소로. 해수가 차에 몸을 실었다. 한 걸음 물러나 손을 흔들어 주려는데, 창문이 내려갔다. “유월아. 나 금방 집에 올 거야.” “……어?” “그냥, 그렇다고.” 열린 차창 사이로 마주한 유월에게 의미 모를 말을 남긴 해수가 옅게 웃었다. 그 말과 함께 차가 느릿하게 출발했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유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급하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 조금 늦게 출발해서 그런지 설명회의 좌석은 가득 차 있었다. 일단 빈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는데,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야, 손수연. 내가 일찍 나오라고 했지? 니 때문에 지각할 뻔했잖아.” “미안하다고 한 삼천 번 말한 것 같은데?” “넌 오천 번은 말해야 돼.” “아, 그럼 일행을 두고 오냐고. 이제 막 미국에서 왔다는데 당연히 모시고……. 어? 유월아!” 수연이 유월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월이 어색하게 웃으며 따라 손을 흔들려고 한 순간이었다. 유월의 얼굴이 굳었다. 수연의 옆에 선 누군가 때문이었다. 윤선아. 유월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월만 그녀를 알아본 것은 아닌 듯했다. “쟤야? 네가 말했던 애가?” “왜? 선아 너도 알아? 미국 가기 전에 본 적 있나?” 그 물음에 윤선아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본 적 있지.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때마침 타이밍 좋게 입학처 담당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월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앞으로 돌려 버렸다. 여러 말이 들렸지만, 쿵쿵 뛰는 심장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에 맞춰 유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가는 도둑처럼 인파들 사이로 유월이 몸을 숨길 때였다. “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유월의 발목을 붙들었다. “오랜만이다?” “…….” “가정부 딸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신세 많이 폈네?” 윤선아가 유월을 위아래로 훑으며 내뱉었다. 가정부 딸이라는 말에 지나가던 아이들도 유월을 힐끔거렸다. “가정부 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손수연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어쩔래? 네 입으로 직접 말할래?” “…….” “하긴 말 못 하겠지. 자기 입으로 어떻게 말하겠어, 쪽팔리게.” 윤선아가 유월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내가 말한 적 있지? 웬 미친년한테 잘못 걸려서 트라우마 생긴 적 있다고. 내가 그거 때문에 미국 갔잖아.” “그 미친년이 유월이었어? 잠깐, 그럼 그…… 권성 그룹 아들 다리병신 만든 것도 쟤야?” “대박. 그럼 윤선아 너 가정부 딸한테 한 방 먹은 거냐? 근데 미친년이 아니라 미친놈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를 가운데에 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유월은 목덜미를 붙들린 초식 동물처럼 그대로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얘가 왜 대답이 없어? 야, 귀먹었냐?” 유월이 창백하게 굳어만 있자 윤선아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유월은 치는 대로 밀려났다. 저항할 힘도 없었거니와 손이 덜덜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덩달아 미쳤나 보네. 하긴 그런 애 옆에서 정상인이 버틸 리 없지.” “…….” “뭔가 이상하긴 했어. 우리 오빠는 아직도 네 이야기를 하더라고? 너 진짜 무슨 짓 한 거 아냐? 미친놈한테 한 수 배우기라도 했어? 그래?” 윤선아의 계속되는 빈정거림에도 반박할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한 친구가 주변의 시선을 인식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선아를 말렸다. “야, 선아야. 이제 가자.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그래. 너 때문에 학폭 걸려서 나 대학 못 가면 책임질 거야?” “그럼 넌 먼저 가든가. 난 어차피 국제학교라서 학폭 안 걸려.” “와, 씹소름. 자기 혼자 빠져나가는 거 봐.” 낄낄거리면서도 그 아이는 흥미롭다는 듯 자리를 지켰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유월에게 꽂히는 시선들이 늘어난다. 어떻게든 모습을 감추기 위해 몸을 움츠려도, 그 시선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태성이는 조심해야지. 얘네 엄마가 어떻게든 대학 보내려고 운동시킨 건데.” 그때 하얀색 운동화가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유월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최태성이었다. 친구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이죽거렸다. “야, 조심해! 너도 다리병신 되면 대학은 그냥 날아가. 선아 도움도 무용지물 되는 거임.” “뭐야, 최태성. 너 얘한테 관심 있어?” “있겠지. 최태성이 제일 먼저 쟤 번호 물어봤잖아.” 그 말에 유월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내 최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씨발, 뭔 소리야.” 최태성이 헛웃음을 흘리며 유월을 향한 시선을 의식적으로 거뒀다. 다분히 혐오 섞인 말을 내뱉으며. “야, 인간적으로 내가 가정부 딸한테 왜 관심을 줘? 너 돌았냐? 그랬다간 나 우리 엄마 아빠한테 맞아 죽어. 알지? 우리 아빠 취미가 골프인 거.” “그럼 번호를 물어봤다는 건 뭔 소린데? 솔직히 말해. 너, 나 없는 동안 또 이상한 짓 했지?” “무슨 소리야. 잊었어, 선아야? 나 너밖에 없는 거.” 최태성이 빙글빙글 웃으며 윤선아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윤선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내심 그의 말이 싫지 않은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며 부러 샐쭉한 얼굴이었다. “이제 가자. 이러다 어른들 오면 괜히 큰일 나.” 손수연이 아이들을 정리했다. 이만 가자는 최태성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윤선아가 몸을 돌렸다. 유월 따윈 더 이상 신경 쓸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그들 무리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목소리들이 커졌다. 권성 그룹 외아들 사고 원인이 쟤였어? 하긴 내가 권성이어도 막았겠다. 가정부 딸 때문에 내 아들 다리가 병신 된 사실이 알려지면 쪽팔리잖아. 키득거리는 소리와 혀를 차는 소리가 유월의 주위를 가득 에워싼다. 내가……. 내가 왜 여기 있지? 난 분명 사모님의 제안을 듣고 대학교에 진학하려던 것뿐인데, 내가 왜 여기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앞에서 저를 둘러싼 사람들이 점점 뿌옇게 흐려진다. 입 밖으로 나가는 숨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유월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진다. 쿵. 쿵. 쿵. 가쁜 호흡과 혼란한 정신 사이로 거센 심장 소리가 파고들었다. 개중 선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유월을 향해 괜찮냐고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천천히, 흐릿한 시야가 점차 명료해진다. 수많은 다리가 보인다. 쿵. 그녀를 스쳐 가기도 하고, 멈춰서 훑어보는 다리들. 쿵. 그리고 해수와 달리 두 발로 멀쩡하게 서 있는 자신의 다리 또한……. 쿵. 쿵. 쿵. 정신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짧아지더니 지팡이가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로 변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소리로 변했다. 무언가를 끄는 소리. 아니, 아니다. 이 소리는……. 절뚝. 절뚝. 절뚝. 절뚝. “……!” 유월은 흠칫 몸을 떨며 물러났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유월의 어깨를 잡았던 누군가가 머쓱하면서도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아, 미안. 나는 그냥 걱정되어서. 걔네 갔으니까 너도 그만 가 봐. 애들 더 쳐다보겠다.” “……흐, 흐으.” “근데 너……. 괜찮아?” “난, 나는…….” 유월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아함과 호기심 섞인 시선이 유월에게 쏟아진다. 쟤 왜 저래? 몰라. 멘탈 나간 것 같은데? 수군거리는 와중에도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리는 이어진다. 절뚝. 쿵. 절뚝. 쿵. “아, 아아…….”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유월은 그대로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택시를 잡아 그대로 저택으로 향했다. 잘 다녀왔냐는 아주머니들의 물음에 답할 틈도 없이 어두운 방에 틀어박혔다. 헉.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귀를 틀어막아도 절뚝이는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빛이 깜빡인다. 헤드라이트. 펑펑 내리는 눈과 튕겨 나가는 몸.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 피투성이가 한데 얽혀, 그녀를 덮친다. 몇 번이고 계속.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끼이익. 작은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빛이 어두운 방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저벅. 저벅. 어둠 속으로 매끄럽게 걸어 들어온 발걸음이 유월의 앞에 멈췄다. 쿵. 까만 지팡이 끝이 조용히 바닥을 두드렸고 유월은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흐릿한 시야는 대상을 잘 잡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아…….” 유월이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그 소리가 저를 떠나지 않았는지. 자신이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해수를 감히 그 꼴로 만들어 놓고, 뻔뻔스럽게도 행복해지려고 한 죄. 감히 평범함을 바랐던 죄. 자신의 죄악을 외면하려 들었던 것에 대한 징벌. “해, 해수야.” 유월이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내가, 내가 미안해.” “…….” “나, 거짓말했어. 그래서 벌 받나 봐. 내가, 그래선 안 됐는데. 널 두고 가서는 안 됐는데, 너한테 거짓말해서…… 그래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해수를 두고 간 날이 그를 망가뜨린 그날인지, 아니면 오늘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든 건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그녀가 연신 잘못을 말하는 와중에도 해수는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유월은 매달리듯 그의 옷자락만 계속 잡아당겼다. “뭘.” 흐느끼는 어깨 위로 단조로운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뭘 잘못했는데, 네가.” “내, 내가…….” 멍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잘못. 내 잘못은……. 유월이 가만히 입술만 달싹이자, 해수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을 떼어 내기라도 하듯이. 유월이 경기라도 일으키듯 해수의 옷을 붙잡았다.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다, 다른 대학교에 가려고 했어.” “…….” “사, 사모님께서 보내 준다고 하셨어. 이, 일차만 가려고 했는데 친구들도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 “사모님께서 보내 준다고 하셨고. 그리고.” “…….” “내가 알아차리기 전까지 숨기고 있다가, 냉정히 버리려고?” 이어진 말에 유월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니야. 그건 아니었어. 그건…….” “아아. 유월이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했구나.” 유월의 말을 잘라 낸 그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싸늘한 어조에 눈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럼 말하지 그랬어. 놔줄 수 있었는데.”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구질구질하게, 다리병신한테 붙잡혀 있었다. 그치.” “아니야……! 아니야……!” 세차게 고개를 저은 유월이 재차 해수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연신 사과를 하며 해수를 올려다봐도, 빛을 등지고 선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해수마저 저를 그들과 같은 표정으로 바라본다면……. 끔찍한 상상에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미안해, 해수야.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나, 나 좀 살려 줘, 제발…….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쯤, 해수가 한쪽 무릎을 느릿하게 굽혔다. “쉬이…….” 그가 엉망이 된 유월의 머리칼을 정리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진정해야지. 이러다 탈진하면 어쩌려고.” “흑, 흐윽, 해수야…….” “숨 쉬어, 유월아. 천천히.” 허겁지겁 해수를 끌어안은 유월은 명령을 이행하는 것처럼 그의 말에 맞춰 숨을 정돈했다. 그래도 쉽게 진정하지 못하자, 그녀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기도 하고 얼굴과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기도 했다. 섹슈얼한 의도 없이, 같은 짐승끼리 온기를 나누며 서로를 달래는 것처럼. “응, 착하네. 잘했어, 유월아.” 크게 들썩이던 가슴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자, 해수가 칭찬하듯 그녀를 토닥였다. “이럴까 봐 일부러 꽁꽁 숨겨 준 건데, 왜 그랬어.” 목덜미에 이마를 댄 그가 속상하다는 듯 작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너 험한 말 들을까 봐 그런 거잖아. 그래, 안 그래.” “맞아. 내 생각해서 그런 건데, 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전부 내 잘못이야…….” 유월이 히끅거리며 대답하자 가벼운 웃음이 목덜미로 번졌다. 맥박이 뛰는 곳에 천천히 입술을 누른 해수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이제 어디 안 갈 거지?”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속에 자신이 담겼다. “평생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약속해.” 짙은 소유욕으로 점철된 질문에 유월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의도로, 어떤 말을 하든지 상관없었다. “어디 안 가. 절대. 절대 안 갈게. 네 옆에 있을게…….”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정유월은 권해수를 떠날 수 없다. 명료하면서도 처참한 각인이었다. “하하.” 느닷없이 해수가 웃음을 흘렸다. 귀여운 소동물의 애교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여전히 울보네, 우리 유월이.” 눈물을 닦아 준 그가 예쁘게 미소 지었다. 선물처럼 다가왔던 어린 시절의 그 미소였다. 커지는 죄책감을 참기 힘들었던 유월이 매달리듯 그에게 안겼다. 이렇게 있으면 모든 죄악이 사라지리라 믿는 것처럼. 악몽에 시달리는 듯한 힘겨운 신음 소리에 누군가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인기척도 못 듣고 제 품에 안겨 있는 유월을 흘깃한 해수가 방문 쪽을 향해 말없이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조용히 문이 닫히며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줄어들었다. 방 안이 어둠 속에 완전히 갇히기 직전, 해수는 웃었다. *** 힘겹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다. 입시 설명회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유월은 아예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성한대가 아닌 다른 대학을 진학해도 소문은 퍼지기 마련이었다.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리는 말소리 끝엔 항상 해수의 이름이 거론될 터였다. 유월이 제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수는 함께 한국대를 가자고 제안했다. 입시 설명회를 듣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극소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유월은 망설였으나, 결심은 빨랐다. 해수 옆에 있어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래서…… 성한대는 못 갈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러렴.” “……네?” “네 마음대로 하라고.” “…….” “한국대에 가든, 성한대에 가든, 네 마음대로 해.” 화를 낼까 우려하며 유월이 쭈뼛쭈뼛 천희영에게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는데도 천희영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천희영이 재기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기존 작품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작품 활동에 도전한 천희영은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완벽히 되찾았다. 몰락과 슬럼프 일색이었던 수식어들은 다시 극찬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더 이상 해수를 향한 저주를 퍼붓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음울한 얼굴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천희영이 재기에 성공한 것은 정확히 해수가 미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했을 즈음이었다. “미대로 가도 괜찮겠어?” 유월은 조심스럽게 해수에게 물었다. 만약 천희영의 슬럼프가 다시 시작된다면, 같은 분야를 선택한 해수에게 분노를 퍼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난 네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그랬지. 그랬는데…… 이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감으로?” “그냥 감으로.” 유월의 말을 따라 하며 해수가 가만히 웃었다. “난 이런 쪽으로 꽤 직감이 좋거든.” 해수가 책에 실린 천희영의 그림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림이라 생각하면서도 유월은 더 묻지 않았다. 그게 해수의 뜻이라면 그녀는 무조건 따를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지원할 과였다. 그녀는 미술에 특출난 재능이 없었고, 의지도 딱히 없었다. “해수 너랑 같은 과는 못 갈 것 같은데…….” “미대 가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유월은 초조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과가 문제가 아니었다. 입학 설명회 이후, 유월은 해수와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가 멀어질 때마다 절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기에. 그 소리는 악몽으로, 때로는 환청으로 나타나 유월을 괴롭혔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차에 치였고, 피투성이가 되어 시체처럼 고요한 해수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다. 절뚝이는 소리와 사이렌 소리 사이에 갇힐 때도 있었다. 오늘같이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서늘한 날엔 더더욱. 그때마다 유월은 병적으로 해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환상통이 다시 도진 것은 아닌지, 그 후엔 심장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마다 해수는 가만히 제 몸을 내어 주었다. 유월의 강박적인 확인이 기껍다는 듯이. “괜찮아, 유월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해수가 자꾸만 창밖을 힐끔거리는 유월의 시선을 제게로 가져와 고정시켰다. “어차피 매일매일 나 만나러 올 거잖아.” “아…….” “왜. 아니야?” “나는 그러고 싶지만…….”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내가 미대가 아니면 좀 어려울 것 같아서……. 타 과 학생이 전공 강의실에 막 들어가는 것도 좀…… 힘들지 않을까?” 그녀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짧게 되물었다. “그래서.” “…….” “안 올 거야?” 입매를 조금 굳힌 것뿐인데 부드러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하게 변했다. 유월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갈게. 갈 거야. 그냥 걱정됐던 것뿐이야.” “…….” “저, 정말이야…….” “그래. 그럼 됐어.” 이리 와.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 해수가 미소를 띠며 팔을 벌리자, 유월이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안겼다. 쿵. 쿵. 안정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자 비로소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다, 그렇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해수가 기분 좋다는 듯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유월은 “응.” 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엔 기어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해수가 곁에 있으니까. 그해 유월은 해수가 추천한 과에 원서를 썼다. 예술 대학과 가까운 건물을 쓰고, 여학생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과였다. 그리고 해수와 함께 당당히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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