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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첫번째 아내 (4)


햇살이 따뜻했다. 오늘따라, 바람도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었다. 정수정은 흰 셔츠 위에 연한 니트를 걸치고 내 옆을 걷고 있었다. 팔짱 낀 팔이 맞닿을 때마다, 부드러운 살결이 슬쩍슬쩍 내 옆구리를 건드렸다. 그냥… 걷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던 연인처럼. “바람 좋다.” 아무 말도 아닌데, 그녀의 말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누나, 오늘… 진짜 예뻐요.” “나야 원래 예뻤거든?” 사람 많은 집앞 공원인데, 자꾸 그녀만 보였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나는 바닐라 수정이는 초코 그녀가 먼저 핥고, 나한테 내밀었다. “입 벌려.” “누나가 먹여줘요?” “씨발, 먹기싫어?” “이게 바로 입으로 주는 이별의 맛인가.” “닥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콘을 다시 내 입에 밀어넣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초코맛이 씁쓸했다. 벤치에 앉았다. 정수정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런 날씨, 졸라 싫어.” “왜요? 완전 데이트 날씨인데?” “그게 싫어. 뭔가 끝나는 것 같아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진짜 끝날 것 같아서. “내일이면, 너도 바뀌겠지.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또 그 여자랑 섹스하고…” 그 말투엔 질투도, 화도 없었다. 그저… 덤덤한 진실이었다. 나는 그녀 손등을 살짝 감쌌다. “누나.” “…왜.” “사랑해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떨렸다. “미쳤냐.” “응. 진짜로 너한테 미쳤어” 그녀가 몸을 숙였다. 귓가에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아직 한 번 남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밤, 누나 나한테 죽는다.” "씨발, 나, 밤까지 못기다릴것 같아" 정수정이 갑자기 내 팔을 탁 잡아당겼다. “야, 뛰어.” “엥? 왜요?” 그녀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 지금 졸라 급해.” “누나, 어디가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그녀는 손을 꽉 잡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그녀 손에 이끌려 뛰었다. 신발이 벽돌길을 두드리는 소리,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그녀의 등과 흐트러진 머리카락만 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마자, 수정이 나를 벽에 밀쳤다. “누나, 여기 엘레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입술을 덮었다. 강한 키스였다. 혀가 들이닥치고, 침이 섞이고, 손은 이미 내 허리를 휘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 진짜, 못 참겠어.” “누나…” “지금 당장 넣고 싶다고, 좆같이.”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오른손은 지문을 도어락에 가져다 대고, 왼손은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띠리리—”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가 나를 밀어붙였다. 현관에서 벽까지, 몇 걸음 만에 우리는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벗어, 빨리.” 나는 셔츠 단추를 풀기도 전에, 그녀가 브라를 위로 걷어올렸다. 탄력 있는 가슴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보지 안에서 터뜨려. 지금.”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그녀의 가슴에 박았다. 혀끝이 유두를 훑자, 수정은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젖혔다. “씨발… 태유야… 지금, 나 진짜 니 자지 먹고 싶다고.” 나는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내리고, 다리를 바지통에서 꺼내다, 바지 자락에 걸려 넘어졌다. "병신" 수정이는 넘어진 내 위에 올라타서, 팬티를 끌어내렸다. 그녀는 내 허리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넣어. 지금” 침대도 소파도 아니다. 그녀는 거실 바닥에 나를 눕히고 내 자지를 훑었다. “씨발, 이 개같은 자지, 보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 미친 숨소리. 삽입은 단숨에 이루어졌다. 촉촉한 살이 자지를 감싸고, 그녀의 몸이 내게 엉겨 붙었다. 내 자지 위에서 미친듯이 허리를 흔들어댔다. 순식간에, 달아버렸다. “싸버려. 태유야… 내 보지 안에... 나 꼭, 니 옆에 남을꺼야.” 나는 허리를 깊이 찔러 넣었다. 정수정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흐느꼈다. “헤어지기 싫어…”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안에, 깊이, 더 깊이. 몸이 부딪힐수록 감정이 녹아내렸다. 사랑이 아니라 절박한 본능처럼. “니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안에 모든 걸 터뜨렸다. 그녀가 가늘게 떨렸다. 내 좆 끝에서 쏟아지는 게, 그녀의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숨소리만 남은 거실. 우리는 말없이, 오래도록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 이른 아침이었다. 정수정은 말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서랍 속에 넣어뒀던 작은 트렁크에 짐을 챙겼다. 아무것도 아닌 짐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우리가 함께 보낸 한 달의 무게였다. 우리는 출산관리국 건물 앞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가방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 자동문이 열리는 ‘띠링’ 소리, 그리고— 말없는 걸음소리. 임신검사실은 건물 3층, 302호.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임신에 성공했다면 우린 ‘임신 케어 저택’으로 옮겨 함께 살게 된다. 최첨단 자동 시스템, 감정 관리, 심리치료 서비스까지. 수정이와 나는 한 집에 살 수 있다. 물론, 나에겐 두 번째 아내가 배정된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둘에겐 충분했다. 임신에 실패한다면— 우린 서로에게 점수를 매겨야 한다. 코멘트를 남겨야 한다. 그리고… 각자에게 새로운 배우자가 배정된다. 모든 게 시스템에 의해 정해진다. 302호 앞.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았다. 정수정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고개를 숙인 채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누나.”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떨려요?” “떨리면 뭐 달라져?” “아뇨. 그냥… 저도 그래서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 예전처럼 차갑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눈물도 없었다. “임신, 됐을까?” “됐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투는 무표정했지만, 그 속엔 억지로 버틴 감정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007001272번 진태유님, 013372994번 정수정님. 입장해주세요.” 간호사의 안내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정수정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순간,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말도 없이. 한 마디도 없이.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이, 내가 그녀와 함께 걸어가는 마지막 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계음과 터치스크린 소리, 그리고 무표정한 출산관리국 직원의 얼굴. “지문 확인해주세요. 양 손가락 동시에.” 삑— “진태유님, 정수정님의 임신 결과 확인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조함. 긴장. 그리고, 말로 꺼내지 못하는 두려움. “국가 주관 임신검사 결과… 음성입니다.” 순간, 정수정이 작게 중얼였다. “씨발” 그 한마디. 입술도 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입안에서 조용히 터진 두 글자.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머릿속이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끝날 수 없어. 직원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의 혼인 기간은 금일부로 종료됩니다. 본 시각 이후로 두 분이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법률상 불륜으로 간주됩니다. 전화 통화는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차단되며, 거주지는 각각 새로운 배정지로 이동됩니다.” “…” “각자 새로운 배우자와, 행복한 결혼 생활 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은 축복이 아니라 사형선고였다. 우리 앞에 설문지가 놓였다. 표정 없는 직원은 말없이 손짓했다. 먼저 펜을 든 건 정수정이었다. 단 한 줄, 망설임 없이 써내려갔다. 점수: 10 / 10 코멘트: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다. 나는 그 글자를 똑똑히 봤다. 그리고 내 설문지에 적었다. 점수: 10 / 10 코멘트: 그녀는 미쳐버릴만큼 사랑스럽다. 이 제도는 틀렸다. 제출과 동시에, 디지털 스크린이 켜졌다. [정수정 – 금번 배우자 평가 점수: 10 / 10] [평균 점수 상승 → 현재 평균: 5.1 / 10] [등급 조정: D → C등급] [다음 배우자 매칭 중…] [진태유 – 임신 실패] [등급: D등급 유지] [다음 배우자 매칭 중…] 정수정이 잠깐 내 쪽을 봤다. 그 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말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그 검은 눈동자 속에 조용히 스며 있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 허락되지 않았다. 정수정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트렁크를 끌며, 등을 보인 채 걸어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정아, 기다려... 알았지?" 정수정은 그 말에,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왼손이 눈가를 훔치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멀어지는 하얀 니트. 정수정이라는 이름의 계절. 그녀는 내가 가장 사랑한 여자였고, 지금은 국가가 이별을 선언한 전 아내였다. ㅡㅡㅡㅡㅡ 고깃집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머리 위 환풍기가 미친 듯 돌아가는데도, 삼겹살 냄새가 끈적하게 옷에 들러붙었다. “야, 먹어. 먹고 쳐 울어라.” 정한석. 고등학교 동창이자, 지금은 C등급 남성. 나는 마주 앉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주잔을 들었다. “오늘, 임신 확정났거든.” 한석이 씩 웃으며 말한다. “이제부터는 진짜다. 나 아내 보러 가야 돼. 빨리 마셔라.” 잔이 부딪혔다. 소주가 목구멍으로 쓸려 내려가는데, 그보다 더 쓰라린 건 그가 당연하게 말하는 그 단어였다. 아내. “아, 진짜. 임신한 아내도 고맙고. C등급 되니까 일이 존나 줄어. 국가포인트도 두 배. 게다가 이제—” 그는 잔을 내려놓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아내를 고를 수 있어.” 나는 고기를 굽고 있었다. 기름이 튀었다. “C등급은 차원이 달라. 사진 목록 볼 때부터 급이 달라. 훨씬 예뻐. 진짜, 이번엔 골라서 제대로 산다.” 그는 들뜬 표정으로 고기를 집어 상추에 싸기 시작했다. “야, 너 소은이 소식 들었냐?” “…소은이?” “걔 이쁜 애 있잖아. 너도 알잖아, 중학교 때부터 네 뒤 졸졸 따라다니던 그년.” 한석이 콧웃음을 쉬었다. “F등급 나왔대. 관계흥분케어사 됐더라.” “…” “야 씨발, 그년이 내 케어사로 배정되면 좋겠다. 그 얼굴로 옆에서 자지 만지고, 자극 유도하고, 미쳤지 않냐?” 조용히 소주잔이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그를 봤다. “개새끼…” 한석은 움찔하더니 웃었다. “뭐, 현실이 그렇다는 거지. 사랑? 감정? 다 사치야.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사는 거지.” “야, 너도 이제 새 아내 배정됐잖아. 어때? 어떤 스타일이야? 괜찮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맥주를 들이켰다. “왜? 별로야?” “…확인 안 했어.” “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 말에 한석이 웃음을 멈췄다. 잠깐 조용해진 자리. 그는 소주잔을 들고, 내 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야. 사랑은 사치다. 몰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지독하게 틀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정수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눈빛, 거칠고 예민한 말투, 그리고 마지막 밤,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였던 말. ‘나, 니 옆에 있고 싶어.’ 고기 냄새가 역하게 느껴졌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정한석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야, 나 간다. 새 배정주택 가야하거든. 아내가 둘이니 집도 커졌어. 근데 새아내 씨발, 진짜 존예야. 너도 확인해봐. 어차피 바뀐 건 바뀐 거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뒷모습이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 연기만 남았다. 이 시스템은, 정확하고 무자비하게 모든 감정을 갈아버린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문자가 와 있었다 인구가족부, 출산관리국입니다. 007001272번, 진태유 님. 진태유님의 두번째 배우자가 배정되었습니다. 진태유 님은 D등급이며, 자동으로 시스템에 의해 배정됩니다. 결혼 배정은 오늘부터이며, 결혼 기간은 1개월입니다. 대상자는 32세 여성 D등급 이주영님입니다. 임신과 출산 기록은 없습니다. 결혼배정자의 간략정보는 출산정보시스템에서 본인 인증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접속해서 추가 정보를 보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게 누가 됐든, 그 이름은 ‘정수정’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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