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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다섯번째 아내 (1)


이른 아침, 시아와 나는 트렁크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뒤를 따라오는 아린. “...너 왜 따라와?” “그동안 시아랑 정도 들었고, 오늘 새로 주택 배정될 거잖아요. C등급 주택. 여보 따라가야지, 나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시아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8억 5천만원짜리 괴물카. 우리 셋은 그 차를 타고 출발했다. 창밖엔 아무런 풍경도 없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시아의 손등, 꼼꼼하게 바른 연분홍색 네일뿐이었다. 그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출산관리국. 2층. 205호. 임신검사실. 검사 후, 우리는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시아는 무릎을 모은 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나는 괜히 휴대폰을 꺼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임신 아니라고 하면, 나 창문으로 뛰어 내릴지도 몰라요." "여기 2층이라, 그냥 아프기만 할껄?" "흑..." “007001272번 진태유님, 017065590번 정시아님. 입장해주세요.”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아의 손이 내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하얀 방. 기계음. 무표정한 직원. “양 손 지문 스캔 부탁드립니다.” 삑— “임신 결과 조회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아는 손을 꼭 쥐고 눈을 감고, 떨고 있었다. 심장소리가 귓속에서 요동쳤다. 이 결과가, 우리의 전부였다. “국가 주관 임신검사 결과… 임신 1주차입니다.” 그 순간, 시아의 눈이 커졌다. “정말… 됐어요? 저… 정말이에요?” 그 아이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작게 흐느끼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직원이 말했다. “정시아님은 임산부의 권리로, 태아 생부와의 동거 여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동거하시겠습니까?” 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완전히요!!!" "놀람이, 생겼네?" 아린이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문자가 왔다. ㅡㅡㅡㅡㅡ 인구가족부, 출산관리국입니다. 007001272번, 진태유 님. C등급, 진태유님은 금일부터 새로운 배우자와의 결혼시스템이 시작됩니다. 진태유님은 C레벨로서, C 또는 D레벨 배우자 중에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출산관리국 출산정보시스템에 접속하셔서, 본인 인증 후, 배우자를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일 16시까지 선택하지 않으실 경우,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배정됩니다. 결혼기간은 1개월입니다. ㅡㅡㅡㅡㅡ "와씨, 16시까지 고르래" 내 말에 서아린과 정시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여보, 우리가 고를께요" "뭐??" "우리와도 같이 살 사람이에요. 우리 의견도 반영되어야죠. 그렇지 시아?" "물론이죠"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다. ㅡㅡㅡㅡㅡ 007001272번, 진태유 님. 금일부로 C레벨 주택이 배정되었습니다. 주소는 서울 강남구 선릉로 82길 45, 102동 1405호입니다 C레벨 용 기본생활 패키지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진태유, 서아린, 정시아님의 지문이 도어락에 자동 등록되었습니다. 추가 배우자가 지정되면, 자동으로 지문이 추가 등록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ㅡㅡㅡㅡㅡ "정신없네. 오늘..." "렛츠고!" 아린이 손을 뻗으며 기분좋은 웃음을 웃었다. “와아아아… 이게… 진짜 우리 집이에요?” 시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입을 틀어막은 채, 거실 벽에 달라붙어 벽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천장이 높고, 바닥은 광이 나는 대리석. 푹신한 소파는 한 눈에도 고급 브랜드였다. “헐… 랑이, 나 지금… 꿈 아니죠?” 시아는 신나게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내게 안겼다. 아린은 벌써 주방으로 향해 있었다. “이야~ 냉장고 열었는데, 죄다 고기랑 즉석식이야” “고기? 한우도 있어요?” 시아가 쪼르르 달려와 냉장고 안을 함께 들여다봤다. “헐, 이거 다 진짜야? …헐, 이건 오마카세 도시락이잖아? 이거 하나에 12만 원짜린데?” “삼계탕도 있어요! 전복… 어머어머.” "D레벨 때는 라면 밖에 없더니" 격세지감이다. 나는 천천히 안쪽 방들을 둘러봤다. “방 두 개. 침실 하나, 멀티룸 하나. 화장실 두 개. 드레스룸도 있고…” 전체 구조가 L자형으로 연결되어 있어, 침실 쪽과 거실 쪽이 은근히 분리되어 있었다. 특히 침실 옆에 붙은 드레스룸은 넓이 자체가 일반 방 하나 크기. “와!” 시아가 드레스룸 안에서 깡총거렸다. “어우, 이 정도로 신기해할 일은 아니잖아?” 아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넌 원래 좋은집에 살았으니까 그렇지.” “에이, 그게 아니라~ 내가 원래 감정표현이 담백한 거죠.” 조용히 대답했지만 아린의 표정에 그림자가 스쳤다. 괜한 얘기로 김도훈 기억을 떠올리게 했나 싶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켰다. 아직 정리할 게 산더미다. 특히—— “이제 문제는… 새 와이프.” 그 말에 두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선택 마감까지 2시간 남았어요. 까딱하면 자동 배정이에요.” 서아린이 머리카락을 넘기며 내 옆에 앉았다. “시아야, 같이 보자.” “네… 랑이의 새 와이프니까… 우리가 고를까요?” 난감하다. 태블릿 화면을 켜고, 인증을 거쳐 출산관리국의 시스템에 접속했다. ‘C 또는 D등급 가임여성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시아가 키보드를 붙잡았다. "자, 나이는?" 시아가 나를 보며 물었다. "글쎄.. 생각 안해봤는데?" "늙은이가 좋지" 아린이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45살 이상으로 검색할까요?" 시아가 신났다. "미쳤냐? 우리 이모 나이야." 출산헌법 3년째. 가족들간의 왕래는 여전했다. 아이들의 육아는 국가가 책임지고 있지만, 부모가 육아시설의 자녀에게 찾아가거나 일정기간 집에서 돌보는 것도 장려되었다. 다만, 결혼식 같은건 사라졌고, 며느리같은 개념은 희미해졌다. "45살이 딱인데... 늙어야, 랑이가 관심을 안가질텐데..." 시아가 뾰루퉁해 했다. "나이, 22살 미만, 서울, C레벨로 검색해" "네" 시아가 엔터키를 눌렀다. "와.. 그래도 너무 많은데요?" 프로필이 주르륵 떴다. 이름, 얼굴 사진, 평점, 전 남편 평가 코멘트 등이 간단히 요약돼 있었다. 아린이 화면을 툭툭 넘기며 말했다. “이건 너무 화장발이고… 이건 좀 세 보이고… 어? 얘는 귀엽네? 얘는 제외.” "부끄럼 캐릭터도 제외해 주세요. 제 장르니까요." 한참을 넘기다 보니, 뭔가 기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타인의 프로필을 보며 ‘아내감’을 고른다는 행위가, 마치 게임 캐릭터 고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거… 진짜 ‘성격’이 드러나는 애는 없어요. 다 그냥 꾸민 표정, 꾸민 말투.” “이분은… 눈이 좀 슬퍼요. 너무 슬퍼 보이는 사람은… 안 됐으면 좋겠어요.” 니들 뭐하냐... 아린이 내 어깨에 턱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여보가 정해야죠. 우리는… 그냥 참견한 거예요.” 나는 화면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한 명. 사진 속 여자는 하늘색 블라우스에 안경.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 숨이 턱 막힐만큼 예쁘다. “어? 이 사람?” 두 여자가 동시에 소리쳤다. "민하진" "민하진 몰라요? 아이돌" "말도 안되. 아이돌이 C레벨이라고?" "히히. 국민변태 아이돌, 민하진" "랑이 진짜 모르나보다" 서아린과 정시아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게 뭐가 웃기냐. "변태?" "얘, 생방송 중에 가방에서 딜도 나왔잖아요. 이상한 기구도..." "엇? 졸라 땡기는데? 나는 무조건 콜" 졸라 이쁜데, 아이돌인데.. 변태? 살인범이라도 난 무조건 콜이다. "진짜요?" "응. 콜" 내가 태블릿을 빼앗았다. [해당 인물은 C등급 여성 민하진입니다. 선택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예’를 눌렀다. [진태유님의 배우자로, 민하진 님이 배정되었습니다. 즐거운 결혼생활 되시기 바랍니다] "어?? 진짜 골랐어요?" 서아린이 내 손을 치며 말했다. "응. 왜?" "걔, 마약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뭐라고?" "엄청 떠들썩 했는데, 몰라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도, 점수랑 코멘트는 보고 골라야죠." "아... 그러네.. 이제 보면 되지 뭐." 민하진의 세부 정보를 터치했다. 민하진 20세 직업: 걸그룹 ‘핑크플레임’ 리더 상대남편들의 평가점수 6.8/10 임신 성공 여부 : 없음 현재 등급 : C 아이돌 점수가 이거라고? 평가 코멘트 "변태 저질, 예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님.” 어? 코멘트가 딱 하나네? 혹시 내가 두번째 남편? ㅡㅡㅡㅡㅡ “근데 진짜… 너무 예쁘지 않았어요? 아까 사진 봤을 때, 살짝 놀랐어요. 진짜 사람이 저런 얼굴을…” “아니, 그건 성형이지.” 아린이 단호하게 잘랐다. “딱 봐도 코는 라인 잡은 거고, 입은 필러 느낌이었어. 눈은 앞트임+뒤트임. 게다가… 턱이 너무 매끈해. 저건 무조건 턱 보톡스야.” “헉… 진짜요?” “난 알지. 나 연예인 친구도 있었고, 옛날에 뷰티 학원도 잠깐 다녔거든.”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살짝 시무룩해졌다. “…근데 성형이어도… 너무 완성형이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그래서 더 열받는 거야.” 아린은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진짜 이쁘고, 몸매도 좋고, 아이돌 출신인데, 그 점수? 6.8점? 그건 성격이 진짜 구린 거 아니면 섹스하다 갑자기 똥싼거야.”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그런 사람일까…?” “몰라. 근데 우리 집에 들어온다잖아. 우리 셋이 사는 이 공간에. 우리랑 같이 밥 먹고, 씻고, 잠자고, 심지어——” “섹스도?” 시아가 작게 속삭였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더 짜증나지. 여보가 그 년 보고 꼴리면 어떡해. 아님, 걔가 또 갑자기 막 유혹하면? 아이돌이면 노하우 있을 거 아냐?” “으으… 그건 싫다…” 시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그런데… 혹시 진짜 약한거 아니겠죠?…” “말하는 건, 딱 약먹은거 같긴 해.” 아린은 창밖을 힐끔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걔 오기 전에 화장해야겠어. 괜히 걔 앞에서 초라해지기 싫어.” 삐리릭 —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풀렸다. 왔다. 나의 다섯번째 아내. 그녀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긴 흑갈색 생머리가 어깨를 쓸며 떨어졌고, 왼쪽 관자놀이 위에 꽂힌 큼직한 노란 별 머리핀이 기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옷차림은 정돈되어 있었다. 하늘색 셔츠는 목 끝 단추까지 채워져 있었고, 짙은 회색 테니스 스커트는 주름 하나 없이 각이 잡혀 있었다. 무릎 위로 드러난 다리는 햇빛에 한 번도 닿지 않은 듯 창백했고, 발에는 굽 없는 검정 플랫슈즈. 전반적으로 학교 교복을 닮은 느낌이었다. 화장은 세심하게 얹혀 있었다. 눈두덩에는 연한 핑크 섀도우, 속눈썹은 길게 올렸고, 입술은 틴트를 얹은 듯한 매트한 코랄색. 피부는 유리처럼 매끈했지만, 표정의 리듬은 없었다. 웃고 있지 않은데 웃는 것처럼 보였고, 화난 것도 아닌데 따지는 듯한 인상이 겹쳐졌다. 귀 양쪽에는 똑같은 은색 별 귀걸이,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고개만 살짝 돌렸다. 말도 인사도 없이, 마치 방 분위기를 가늠하듯이. 몇 초간의 침묵. 예쁘긴 했다. 그런데… 마치 만든 사람은 있는데, 꺼내 쓰는 법은 모르는 얼굴. 현관 앞에 나온 아린과 시아를 번갈아 보더니 살짝 웃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야. 내가 세 번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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