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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EP0089-0084화-귀환 (22:24 수정)


뜨겁고 축축하고 부드러웠다. ​ 미끈한 표면이 피부를 따라 느릿하게 미끄러졌고, 몸을 휘감은 촉수들이 꿈틀거릴 때마다 말랑하면서도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다. 살아 있는 근육처럼 수축했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느낌은 낯설고 기묘했다. ​ 엘레노아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촉수 역시 그 움직임을 따라 형태를 바꾸며 더욱 단단히 몸을 감싸왔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엘레노아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볼프람에게 능욕당하면서 시퍼렇게 멍들고 손자국이 울긋불긋하게 나 있던 피부가 말끔히 돌아왔다. 가슴에 보기 흉하게 남아 있던 이빨 자국들도 모두 사라졌다. ​ “게다가….” ​ 그녀는 고개를 돌려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보석 반지를 바라봤다. 자수정이 박혀 있는 반지는 다름 아닌 볼프람의 것이었다. 항상 그의 손에 껴 있던 아티팩트….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잘려나간 손가락과 거기에 걸려 있는 반지뿐이었다. ​ 본체는…. ​ -콰득! 아그작! ​ 무언가 폭발하듯이 밀려들었던 그 순간, 볼프람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촉수 더미 사이로 흘러 들어가 피 한 줌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그 광경은 볼프람에게 능욕 당하고 정신이 피폐해져 현실 도피 중이었던 그녀마저 번뜩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 하지만 마력을 쓸 수 없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조금은 덜 아프게 죽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 ‘난 더럽혀졌어.’ ​ 그것도 철저하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더럽혀졌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하복부가 뜨겁다 못 해 데일 것만 같았다. ​ 창에 꿰뚫리는 것 같은 격통과 함께 몸을 꽉 채우던 볼프람의 자지. 그 자지가 움직일때마다 마치 내장이 딸려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토악질이 나올정도로 힘겹고 고통스러웠지만 점차 온몸을 휘감는 쾌감에 정신이 혼미해져버렸다. ​ 볼프람이 그의 자지를 꽉 물며 달라붙는 질벽을 박살내며 안으로 깊숙히 찌를때마다 전율과 함께 눈앞이 새하야졌다.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카엘을 떠올리며 버텨보려고 했지만 약점인 머리가 잡아당겨지고 온몸을 꿰뚫는 거근과 볼프람의 우왁스러운 손길에 몸과 정신이 제대로 버텨내질 못했다. ​ 게다가…. ​ ‘카엘군은…. 날….’ ​ ……버렸다. 반란의 명목으로 잡혀 있는 인원들을 모두 죽인다고 했을때, 카엘을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내던졌다. 옛 추억이 서린 마을도, 마을 주민들도, 옛 친구들도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은 건 안타까웠지만…, 이곳에 붙잡힌 뒤 그들이 보인 행동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고, 옛 추억마저 오물로 뒤덮인 듯한 기분이 들게 했으니까. ​ 그렇기에 카엘을 위해 온갖 굴욕과 능욕을 견뎌내려던 것이었는데…. 이젠 그가 없다. ​ 나라가 멸망하고 공왕가가 무너지고 상징마저 빼앗긴 채, 남은 거라곤 몸뚱아리와 유산 조금에 불과한 여자애가 발버둥치다가 간신히 만난 보금자리였는데, 이젠 그곳마저 사라졌다. ​ “카엘군….” ​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카엘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가장 행복하던 순간…. 그의 품 안에 안겨 행복한 온기를 느끼던 그 순간을…. ​ 촉수 더미 사이에서 작게 웅크린 엘레노아에게는 그 좁은 공간이 카엘을 잃은 뒤 온전히 남은 세상처럼 느껴졌다. ​ 즈으윽 ​ 행복한 회상에 빠져 있는 엘레노아는 촉수들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엘레노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듯 움직이던 촉수들이 서서히 그녀의 몸을 누르기 시작했다. ​ “……카엘군.” ​ 엘레노아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부디 볼프람처럼 한순간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죽기를 바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신의 추악하고 천박한 모습을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과 여전히 그의 기억 속의 엘레노아는 사랑스럽고 애교 많은 연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 쯔…업 ​ 점액질의 촉수가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 천천히…. ​ 그녀의 몸을 감싸안았다. ​ ‘따뜻해….’ ​ 단순히 몸이 아닌 마음까지 전달되는 온기가 느껴졌다. 세상을 저주하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빼앗긴 여자애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아카데미 시절의 올곧게 정진하던 한 소년의 온기. ​ “카엘…?” ​ 왜 저 촉수에서 카엘군의 온기가 느껴지는 지 설명할 수 없었다. 또 왜 자신은 볼프람처럼 분쇄되지 않고 여전히 멀쩡한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당장이라도 몸을 터트릴 것처럼 조여들었는데…. ​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따뜻함은 카엘에게서 느껴지는 온기와 똑같았다. ​ 엘레노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촉수의 표면을 만졌다. ​ “정말로 따뜻해….” ​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스며든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가슴 깊숙한 곳까지 번져 나갔다. ​ “…카엘군.” ​ 엘레노아의 입술이 떨렸다. ​ “카엘군!” ​ 그 순간…. ​ 꿈틀! ​ 느릿하게 움직이던 촉수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 쿠드득! ​ “읏…!” ​ 주변의 촉수들이 갑자기 요동쳤다. 엘레노아의 몸이 그 움직임에 휘말려 크게 뒤틀렸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에 숨이 턱 막혔다. ​ ‘착각이었어….’ ​ 그렇게 생각한 순간…. ​ 두근! ​ “……?” ​ 심장이 크게 뛰었다. 동시에 한동안 사라진 마력이 몸 안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 “이게…… 뭐야?” ​ 차원이 달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힘이 몸 안쪽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 혈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 째깍 째깍 ​ 어디선가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 두근! 두근! ​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주변을 가득 채운 촉수들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심장처럼 맥동했다. ​ ‘이해할 순 없지만….’ ​ 가야 한다. 저 맥동이 시작된 곳으로. ​ 엘레노아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가느다란 실처럼 뻗어 나간 갈색 마력이 주변의 촉수들을 부드럽게 감아 묶어두었다. 혹여라도 다치지 않게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꿈틀거리던 촉수들이 하나둘 양옆으로 밀려났다. 그 사이로 좁은 길이 만들어졌다. ​ 두근! 두근! ​ 엘레노아는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가로막는 촉수들을 다시금 마력의 실로 묶어 길을 내며 한참을 나아갔다. ​ 두근! 두근! ​ 앞으로 나아갈수록 맥동이 거세졌다. ​ “카엘군!!” ​ 엘레노아는 다시금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달리기 시작했다. ​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한순간이라도 빨리 카엘군에게 닿기 위해. ​ 우우웅! ​ 그녀의 간절한 염원에 응답하듯 몸에서 흘러나오던 마력의 실들이 갑자기 허공으로 뻗어나갔다. 수백 갈래의 실이 서로 얽히고 꼬이며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그리고 어느 순간, 엘레노아의 두 손 안에 기다란 고삐가 쥐어졌다. ​ “……!” 히이이잉…! ​ 힘찬 말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마력의 실이 갈색 말의 형상을 만들어냈고, 뒤이어 수많은 실이 겹쳐지며 전차를 엮어냈다. 그것은 바닥에서 솟아오르듯 순식간에 엘레노아의 몸을 떠받쳤다. 엘레노아는 놀랄 틈조차 없이 본능적으로 고삐를 움켜쥐었다. ​ “가!” ​ 촤악! ​ 엘레노아가 고삐를 힘껏 휘둘렀다. ​ 히이이잉! ​ 마력으로 만들어진 말들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내달렸다. ​ 콰앙! ​ 전차가 폭발하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촉수로 가득 찬 공간을 가르며 마력의 전차가 거침없이 질주했다. 주변의 촉수들이 길을 막으려 꿈틀거렸지만, 엘레노아의 마력은 그것들을 부드럽게 양옆으로 밀어내며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 두근! 두근! ​ 맥동이 점점 커졌다. ​ “저건….” ​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엘레노아의 눈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그녀는 천천히 고삐를 당겼다. 마력의 말들이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 두근! 두근! ​ 그곳에는 거대한 살덩어리가 있었다. 수많은 촉수가 뿌리처럼 이어진 채, 하나의 거대한 심장처럼 끊임없이 수축하고 팽창하고 있었다. ​ 엘레노아는 말에서 내려 천천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 준 말의 갈기를 한 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고마워.” ​ 우우웅 ​ 말과 전차의 형체가 수많은 마력의 실로 풀어졌다. 그 실들은 그녀의 주위를 한 바퀴 맴돈 뒤 하나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 엘레노아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 두근! 두근! ​ 눈으로만 본다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살덩어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 그곳에서 들려오는 박동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기가…. 너무나 익숙했다. ​ “카엘군…….” ​ 엘레노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맥동하는 표면에 닿는 순간…. ​ 파앗! ​ “……!” ​ 수많은 장면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아카데미의 복도. 검을 들고 땀을 흘리던 한 소년의 뒷모습과 자신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던 얼굴. 함께 싸웠던 순간들…. 그리고 서로에게 등을 맡겼던 순간들. ​ 행복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고 뒤틀리고 어두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 카엘은 자신의 연인들이 다른 남자들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때론 쾌락을 느끼며 스스로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저주하는 카엘…. ​ “아….” ​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엘레노아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 “아아!” ​ 그리고 보았다. 볼프람의 저택에서 문 밖에 서서 자신이 능욕당하는 걸 바라보는 카엘을. ​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자신이 나약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자책….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끝내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 그 모든 감정이 뒤엉켜 카엘의 마음을 조금씩 짓이겼다. 하지만 엘레노아에게는 그 무엇도 카엘에 대한 감정을 해치지 못했다. ​ “옆에 있었어….” ​ 볼프람은 그가 도망갔다고 했지만 카엘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비록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저 방관에 지나지 않은 결과였다고 해도…. 그녀는 그 사실만으로 희망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 “카엘군!!” ​ 엘레노아는 살덩어리를 껴안고 모든 마력을 뿜어냈다. 그녀의 머리색을 닮은 이 갈색 마력이 카엘에게 닿기를 바라며…. ​ -보완 절차 완료. “……응?” ​ 무언가 속삭인 것 같았는데…, 엘레노아는 방금 전 자신이 들었던 소리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 우르르르! ​ 그때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그녀가 있는 공간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주위를 감싼 촉수들도 녹아내리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 “아…!” ​ 갑작스러운 변화에 엘레노아는 당황한 채 살덩어리를 꼭 껴안고 눈을 감았다. 부디 이것만은 무사하길 원했다. ​ 쿠쿠구구구궁!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 “어…?” ​ 발밑의 감각이 사라졌다.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붕 뜨는 듯한 기묘한 부유감이 밀려왔다. 엘레노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 “아…!” ​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하얀 구름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촉수와 살덩어리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 안에는…. ​ “카엘…?” ​ 거대한 살덩어리 대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카엘이 안겨 있었다. 엘레노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카엘!” ​ 그녀는 반사적으로 카엘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끌어안으며 카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 따뜻했다. 아까 그 살덩어리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온기였다. ​ “카엘! 카엘!!” ​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실감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 “어…라?” ​ 부우웅! ​ 그런데 몸에 느껴지는 감각이 조금 이상했다. 엘레노아는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까마득한 허공 한가운데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잠깐…!” ​ 순식간에 추락 속도가 빨라졌다. 엘레노아는 다급히 한 팔로 카엘을 끌어안은 채 다른 손을 뻗었다. ​ 우우웅! ​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수많은 마력의 실이 허공에서 얽히고 엮이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 빼애액! ​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거대한 마력의 독수리는 두 사람을 다치지 않도록 발톱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날개를 퍼덕였다. ​ 후우웅! ​ 몇 차례 크게 날갯짓한 독수리는 천천히 고도를 낮추더니 지면 가까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발톱을 살며시 풀어, 품고 있던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땅 위에 내려놓곤 다시 마력으로 변해 엘레노아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탈력감이 느껴졌다. ​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막대한 마력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저 방금 전 넘쳐흘렀던 힘이 과거의 수준으로 사그라든 것에 불과했다. ​ “괜찮아.” ​ 물론 강대한 힘을 다시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건 크게 중요치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품 안에 있었다. ​ “카엘….” ​ 엘레노아는 품 안의 카엘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카엘이 있고, 그 곁에 자신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 “Sskhar! Vrakhtâl! Kheresh!” ​ 그때 칼을 찌르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쿵! 쿵! ​ 동시에 지면을 울리는 진동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엘레노아는 다급히 마력으로 발판을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 “……리자드맨?!” ​ 저 멀리서부터 리자드맨의 군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들 앞에 있는 자신들이 무사할 것 같진 않았다. ​ “이, 일단…. 도망을…!” “Zarkhâ! Zarkhâ! Kresh-nar!” ​ 그때, 반대편에서도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정반대쪽에서도 리자드맨 군대가 이곳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사방이 그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엘레노아는 잠시 기절한 카엘을 바라보았다. ​ “……내가, 내가 지켜야 해. 이렇게 빨리 아쉬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 그녀는 사라졌던 강대한 힘을 아쉬워하며 마력을 방출했다. 다수와의 전투는 그녀의 특기였으니 카엘이 깨어날 때까지만 버틴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 “후우…. 할 수 있어! 엘레노아!” ​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며 리자드맨들을 향해 마력을 쏘아 보내려는 순간…. ​ 콰카카카가각! ​ 지면을 휩쓰는 거대한 얼음 폭풍이 리자드맨 군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 “아…?” ​ 엘레노아는 그 익숙한 힘에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지평선 부근에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금발이 보였다. 새하얀 백마를 탄 채, 가문의 가보인 대검 실버 팽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루크레치아. ​ 이윽고 ​ 루크레치아가 실버 팽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힘껏 내리긋자, 거대한 인마의 물결이 지평선 너머에서 쏟아졌다. ​ ​ ​ ​ ​ * * * ​ ​ ​ ​ ​ 콰가가각! ​ 저 멀리 얼음 기둥들이 솟아나며 리자드맨들을 뭉개버리는 장관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사람 모두 감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 “젠장젠장젠장젠장젠장젠장!!” ​ 루멘시아는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 “왜왜왜왜왜왜왜!! 왜 에이든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던 주제에…!” “…….” ​ 세레나는 혼잣말을 하는 루멘시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 “실패했어.” “젠장젠장!!” ​ 그들이 원했던 결과는 모두 뒤틀렸다. 옛 신들 중에서도 특히 강한 힘을 지녔고, 소유자의 정신을 뒤틀어 빠르게 부활할 수 있는 심연의 사도를 이용해 준비한 안배가 모두 무너져 버렸다. ​ 사흘 밤낮 동안 아름다운 마을이었던 엘렌브룩을 말 그대로 지도 위에서 지워 버릴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위용을 자랑했던 살덩어리들은 단 한 줌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 자연스레 이 세상을 구원할 이세계 용사의 소환 의식도 진행되지 않았다. ​ “이만 가볼게.” “세레나!” “이 결과로는 지금 너를 신뢰하기 힘들어. 네가 겪은 일은 내가 겪은 게 아니니까.” “네 머릿속에 보여줬잖아!” ​ 세레나는 뇌를 헤집어 놓던 기억들을 잠시 떠올렸다가 구석에 다시 처박았다. 그 역겨운 기억들 속에서 유일하게 봐줄 만한 건 지금의 공허한 눈빛과 달리 반짝이게 빛나는 자신의 눈빛뿐이었다. ​ “다시 믿을 만한 준비가 되면 그때 찾아와.” “세레나!” “그럼 이만.” ​ 세레나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에서 루멘시아의 고함과 마력이 느껴졌지만, 세레나는 이미 그곳에서 한참 멀어진 뒤였다. ​ “으으으….” ​ 세레나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로엔덤 가문에서 마굿간지기라고 불리던 남자가 그녀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 한편 세레나가 사라진 곳에 홀로 남은 루멘시아는 쓰러져 있던 카엘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이내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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